나는 신지태 곁의 여자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는 옷차림과 화장을 보면 신지태의 정식 여자 친구라기보다는 스쳐 가는 사람임이 분명했다.신지태가 떠난 후, 다시 내 아이스크림 그릇을 보니 이미 진정우가 다 먹어 치운 상태였다.“다른 거 더 먹으러 갑시다.”진정우는 전혀 사양할 줄 몰랐다.나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좋아요.”진정우는 나를 이끌고 국수를 파는 가게로 갔고 두 그릇을 시켰다. 이번엔 내 것을 빼앗지 않았다. 이건 따뜻한 음식이니까.알고 보니 진정우가 정말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먹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이 먹을까 봐 신경 쓴 것이었다.이 사람, 약간 얄미운 구석은 있지만 나름 진심으로 챙겨주고 있는 건 분명했다.국수를 다 먹고 나서 우리는 계속 거리를 걸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파는 가게도 있었고 화분을 파는 가게도 있다. 그러다 내가 작은 화분 두 개를 사서 진정우에게 주었다.“방이 너무 삭막하니까 꽃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조금은 따뜻한 느낌이 들게.”“내가 있는 걸로 부족한가 봐요?”그가 웃으며 말했다. 충분하기는 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그럼 향기나 풍기게 놔두세요.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잖아요.”내가 웃으며 말하자 진정우도 따라 웃었다.그의 웃음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말하지 마세요.”진정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용히 꽃을 들고 나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밤 12시가 될 때까지 거리를 누볐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진정우가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할 텐데 걱정이 되어 말했다.“우리 이제 돌아가요.”“아직 더 보고 싶은 거 없어요?”그가 물었다.“아니요, 슬슬 피곤하네요.”나는 일부러 하품하며 말했다.그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주변의 다양한 먹거리와 작은 소품들에 시선을 빼앗겨 그의 표정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다 예쁜 생화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하나를 집어 머리에 얹었다
문 앞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표정을 한 사람은 강유형이었다.우리가 헤어진 후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서로의 피를 거꾸로 쏟게 하는 장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지금 진정우와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고, 그 곁에는 조나연이 서 있었다.조나연과 관계를 정리했다면서 이렇게 떡하니 같이 있다니... 남자의 말은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시선을 거두고 강유형을 보지 않기로 했다. 괜히 신경 쓰면 속만 상할 테니까.진정우도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 손을 잡으며 핸드폰을 빼앗지 않고 다정하게 말했다.“예쁠 때 찍어주세요.”그의 말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생각이 들게 했고 마치 오래된 연인 같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그러자 강유형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윤지원,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그는 재수 없고 무례하게 말을 건넸다. 조나연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나를 끌어내려는 그의 태도는 조나연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지금 바빠.”정말 바빴다. 지금은 진정우 곁을 지키며 그의 주사를 챙겨줘야 하니까.그런데 강유형은 내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보다 더 빨리 진정우가 그의 손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부딪치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둘은 아무 말 없이 기싸움을 벌였지만, 이렇게 계속 가면 결국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진정우는 지금 링거를 맞는 중이라 무리하게 싸우다가는 링거를 다시 맞아야 할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나는 이 상황을 말리지 않으면 더욱 악화될 것 같아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조나연을 쏘아보며 말했다.“저 사람 좀 데리고 가줄래요?”조나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는지 움찔했다. 그러고는 강유형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유형 씨, 나 좀 아파. 우리 빨리 가서 주사 맞자.”조나연도 링거를 맞으러 온 건가? 임산부가 약을 맞는 일은 흔치 않은데, 혹시 태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조나연과 간호사의 대화가 끝나고서야 오늘 그녀가 놀이공원에서 넘어져서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는데 이게 누구 탓이겠나?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조나연이 링거를 맞기 위해 강유형과 함께 내 앞에 앉았다. 오늘 밤 뭔가 일을 벌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앉아서 한동안 말이 없었고 나와 진정우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 듯 행동했다.하지만 강유형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겨우 몇 분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 그가 입을 열었다.“오늘 저 사람을 집에 데려간 이유가 뭐야?”사실 그가 이 질문을 꺼내기 전부터 오늘 일로 그가 미쳐 날뛸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내 새로운 시작을 알리려는 거야.”강유형이 비웃으며 진정우를 바라보았다.“이 사람하고?”“그래, 이 사람이랑.”나는 진정우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강유형이 헛웃음을 지었다.“넌 거짓말을 할 때마다 귀가 빨개지는 버릇이 있잖아. 그걸 고치고 나서 거짓말을 해.”그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손이 귀 쪽으로 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지금 흔들리면 진정우와 함께하는 이 연극이 모두 무너질 테니까.나와 강유형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깃든 짜증스러운 미소는 마치 '네 거짓말 따위 믿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때 진정우가 한마디 툭 던졌다.“지원 씨는 화가 나도 귀가 빨개져요.”강유형이 진정우를 째려보았지만 진정우의 말 덕분에 나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사실 나는 화가 날 때도 귀가 붉어지는 편이다. 진정우가 그걸 어떻게 알아챘는지 궁금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나는 강유형을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 널 보니까 또 귀가 빨개지네.”강유형은 다시 화기 치밀어 올랐지만 말을 꺼내진 않고 비웃음을 지었다.“네가 내 여자인 걸 잊지 마. 그냥 나를 화나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그의 말이 참 뻔뻔하다고 느껴졌다. 그의 ‘내 여자’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조나연의 신경을
진정우의 몸이 잠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먼저 그를 키스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았다. 나는 그의 입술에서 살짝 떨어지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주사 잘 맞은 보상이에요.”그 말을 하니 문득 강유형이 아팠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주사를 몹시 무서워해서, 아파도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으려 했다. 주사를 맞는 건 거의 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주사를 맞으러 갈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겁을 내며 거의 울먹이기까지 했다.그때마다 나는 아이를 달래듯 그를 다독였고 심지어 그가 주사를 맞는 동안 그의 눈을 가려 주기도 했다. 그가 아픔을 견디라고 내 팔을 물게 했던 적도 있었다. 강유형이 주사를 맞을 때마다 마치 커다란 임무를 완수한 듯 안도감을 느끼곤 했고 주사를 다 맞고 나면 그는 보상으로 나에게 춤을 추라든가, 노래를 부르라든가, 무언가를 사 달라며 요구하곤 했다. 마치 개구쟁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그에 비해 진정우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주사를 맞았고 오히려 내가 지루하지 않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이나 보내라며 나를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비교가 되니, 강유형은 나를 여자 친구라기보다는 개인 비서로 여겼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는 내 말을 듣고 허리를 감싼 손에 더 힘을 주며,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그럼 앞으로는 자주 아파야겠네요.”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바로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게 아니라...”그때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하니까 이제 속이 편해? 이제 우린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그는 화가 난 듯 보였지만, 목소리만은 차분하게 되물었다.“못 볼 걸로 할게. 우리 다시 시작하자.”이게 얼마나 뻔뻔한 말인지. 나는 그에게 쏘아붙였다.“정말 어이없네!”그리고 미련 없이 병원을 나섰다. 진정우의 손은 여전히 내 허리를 단단
“어?”나는 잠시 멍해졌다. 다른 남자와 키스할 일은 거의 없었다. 강유형을 좋아했을 때도 내가 먼저 입맞춤을 시도한 건, 그가 아프거나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얼굴이나 손등에 살짝 닿았던 게 전부였다.입술을 맞댄 건 거의 없었고 강유형도 나를 키스할 때는 가볍게 얼굴이나 이마에 하는 게 전부였다.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지원아, 우리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너한텐 쉽게 입 맞추기가 어려워.”결국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말했듯, 남녀 간의 진짜 키스는 서로에게 끌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라고 했다. 충동을 참는 건, 결국 사랑이 아니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전 ‘만약에’라는 접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진정우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목울대를 잠깐 삼키는 듯했다. 그 눈빛은 단단하고 집요했다.“하지만 너무 궁금해서요.”그의 강렬한 눈빛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돌려보려 했다.“왜요? 혹시 여자한테 키스 당한 게 처음인가요?”“네.”그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몇 초 후, 나는 마치 나쁜 여자처럼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내가 보상해 줄까요?”“어떻게 보상할 건데요?”그의 대답에 순간 내가 주도권을 뺏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가 원하는 보상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결단을 내렸다. 그가 더 오해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정우 씨, 우리 그저 연기하는 거였잖아요. 스킨십도 다 설정된 거였고요. 만약 이게 마음에 걸린다면 다른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겠네요.”“그럼 매일 다른 남자를 남자 친구로 바꿀 거예요?”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고 날카로웠다.나는 무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웃었다.“저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정우 씨가 버티지 못하면 어쩔 수 없잖아요.”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우 씨가 너무 순진한 거 알아요.
"저예요."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순간적으로 계단 난간을 꽉 잡고 멈춰 섰다.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누그러졌다.잠시 후, 뒤돌아 올라가자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진정우가 보였다.얼마 전 어색하게 헤어졌던 순간이 떠올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깜짝 놀란 건 사실이라 일부러 짜증 난 척하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는 거 몰라요?”“네.”그는 늘 그렇듯 짧게 대답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어찌나 무심하게 느껴지는지 뭔가 더 말하려던 순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다음번엔 안 그럴게요.”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는데 열쇠가 자물쇠에 닿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도 진지했다.“오늘 밤은 제가 오해했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응?내가 멍하니 돌아보자 그는 이미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나를 잠시 바라보며 말했다.“잘 자요.”입술이 떨렸지만 그의 문이 닫히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앞으로... 라는 게 무슨 뜻이지?”사실 그가 말하는 뜻은 알고 있었다. 가짜 연인 관계를 끝내기 싫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이 관계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상처를 더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진정우는 여자 친구조차 사귀어본 적 없는 사람인데 나 때문에 억지로 연애를 흉내 내면서 소중한 첫 경험들까지 다 내주고 있었다.이젠 너무한 것 같아서 스스로가 미워졌다.자책하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고 그날 밤 죄책감에 뒤척이며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꿈속에서도 진정우가 나를 따라다니며 "왜 키스했어요? 그건 내 첫 키스였는데."라고 묻는 장면이 반복됐다.결국 새벽 4시 반쯤에 눈을 떴다.이 시간쯤이면 진정우는 벌써 운동을 나갔을 것이다. 이 틈을 타서 서둘러 씻고 준비한 후,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서둘러 집을 나섰다.아침 해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거리를 달리며 문득 내가 왜 이토록 피해 다니고 있는지 스스로가 한심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업무에 빨리 익숙해지고 싶어서요.”“그래도 너무 일찍 나오신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추가 수당 안 주는 거 아시죠?” 허진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제가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그래서 윤 부장님이 이 자리까지 오신 거겠죠. 모두가 부장님처럼 열심히 하면 우리 회사도 금방 대박 나겠어요.” 허진호의 지나친 칭찬에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그는 항상 이렇게 말에 진심과 농담을 섞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나는 이런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농담이 아니라, 회사 발전이 한 사람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어요. 윤 부장님의 노력은 저도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도 말씀드렸어요. 부장님이 너무 무리하셔서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면 회사로서는 큰 손실이라고요. 앞으로는 좀 더 건강에 신경 쓰라고 하셨어요.”허진호는 아예 내가 일찍 출근할 핑계마저 막아버렸다. 그래도 뭐, 오히려 잘 됐다. 이제 더는 진정우를 피해 다닐 필요도 없으니까.진정우는 요 며칠 아침 식사를 문 앞에 두지 않았다. 내 뜻을 알았는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듣기로는 오늘 고객이 오신다면서요? 게다가 꽤 큰 계약이라던데?” 허진호가 화제를 돌렸다.“네, 10시에 오기로 했어요.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제 준비하러 가봐야 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좋아요. 윤 부장님, 오늘도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허진호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응원했다.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준비한 자료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9시 50분쯤 미리 회의실에 들어가 준비 상태를 확인했다.오늘 만날 분은 정말 중요한 고객이었다. 이 계약을 성사할 수만 있다면 며칠 전 강유형이 빼앗아 간 고객으로 생긴 손해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과를 몇 단계 더 끌어올릴 기회였다.10시 정각, 고객이 도착했다.그런데 그가 회의실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회사 사장은 마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신비한 인물 같았다.강유형은 내게 쏟아붓던 분노를 허진호에게 돌리며 소리쳤다.“안 한다고? 네가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지 알고는 하는 소리야? 내가 누군지 알아?”지금 강유형은 무례하고 돈만 많은 졸부같았다.허진호는 물컵을 들고 무표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사장님께서 당신이 누군지 알아서 이 거래를 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그는 짧은 말로도 강유형을 제대로 자극했다.강유형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 사장 누구야? 해동에서 발붙이고 살기 싫단 거야?”“네, 사장님께서 말씀하시길 해동에서 장사를 안 해도 되니까 당신과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허진호의 말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강유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좋아, 두고 보자고. 네 사장한테도 전해.”“알겠습니다. 사장님께서도 강 대표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언제든 환영한다고요.”허진호의 말이 강유형을 완전히 자극했다.그러자 강유형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나는 그가 허진호에게 주먹이라도 날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하지만 강유형은 이를 꽉 물고 몇 초간 허진호를 노려보다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네가 이렇게 버티면 결국 다른 사람들만 피해를 보는 거 알지? 오늘 나와 함께 가면 좋게 끝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회사가 네 고집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될 거야.”강유형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소용없자 협박하기 시작했다. 비록 나는 그의 집에서 자란 사람이긴 해도, 우리 부모님이 물려주신 고집은 쉽게 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쉽게 겁을 먹었다면,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만약 네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 사이의 마지막 정까지 스스로 짓밟는 거야.”“네가 날 버린 마당에 무슨 정 타령이야?”그는 화가 나서 욕설을 내뱉었다.더 이상 그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회사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길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강 대표님, 이제 그만 가세요.”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
교통사고는 정말 내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악몽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이 절망감은 얼마나 깊은지...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순간에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어쩌면 더 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끝에 돌아가셨으니까.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정우는 그런 나를 잡아주려고 애썼다.“지원아, 괜찮아. 곧 사람들이 너희를 구하러 갈 거야. 나도 금방 갈게.”그는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진정시키려 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아파...”강유형의 힘없는 신음이 내 옆에서 들려왔다.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못했다.“지원아, 왜 대답 안 해? 괜찮아?”진정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괜찮아...”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차에서 불이 나거나 휘발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 봐.”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차 앞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차가 또다시 흔들리더니 곧이어 세상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으악!”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했지만 다시 차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다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지원아! 지원아!”멀리서 진정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고 내 핸드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까 차가 뒤집힐 때 핸드폰은 어디론가 던져졌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진정우! 차가 또 뒤집혔어!”“진정우, 제발 사람들 빨리 보내줘. 제발!”커가는 공포감에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나는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을 볼 용기가 없었다. 만약 불이 나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