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과 글씨 연습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글을 쓸 일이 없었다. 나이가 들었다지만 여전히 아이 같아서 쉴 수 있을 때는 늘 게으름을 피우곤 했다.“괜찮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써 봐. 잘 쓰든 못 쓰든 상관없어.” 삼촌이 나를 격려하며 붓을 내밀었다.더는 거절할 수 없어 붓을 받았지만 그 순간 붓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먹을 묻혀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삼촌의 기대가 담긴 눈빛 때문일 것이다. 삼촌은 내가 예전처럼 글을 쓰고 마음에 여전히 강유형만 두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여전히 내가 ‘가족’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손이 살짝 떨리면서도 힘겹게 붓을 내려 글씨를 썼지만 글자는 삐뚤고 힘도 고르지 못했다. 삼촌이 내게 글을 쓰게 한 건, 글씨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닐까.“한 번뿐인 인생...” 삼촌은 내가 쓴 글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삼촌이 글씨로 내게 무언가를 전해 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을 담아 답을 쓴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원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삼촌은 항상 네 편이야.”삼촌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악수 대신 가볍게 삼촌을 안았다.“삼촌, 감사해요.”삼촌은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미안하다. 네가 힘들었을 텐데... 삼촌이 아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야.”조금 전 아줌마의 잔소리에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삼촌이, 나에게는 이렇게 사과를 해주니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삼촌은 내가 울 것 같다는 걸 느꼈는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유형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나도 알아. 이미 경고를 해 두었으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또다시 그런 짓을 하면 쫓아낼 각오도 돼 있어.”사실 나는 오늘 이 일을 삼촌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말하기도 전에 삼촌이 다 알고 있었다. 20년 동안 함께 지내며 우리는 진짜 가족처럼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삼촌,
삼촌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그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삼촌...”그러자 삼촌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지원아,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거야?”진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삼촌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그냥 궁금해서요.”삼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그의 무거운 표정에 나까지 긴장되었다.“지원아, 네 부모님의 사고는 그저 안타까운 사고였어. 내가 현장에 직접 갔었고 당시 경찰 보고서와 부검 결과도 다 확인했어.” 삼촌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삼촌이 나를 사고 현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삼촌이 나를 보호하려고 현장에 데려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제일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지원아, 만약 네가 의문이 있거나 믿지 못하겠다면, 그 당시의 기록을 직접 열람해 봐도 좋아.” 삼촌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조금 전까지 밝았던 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삼촌과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친형제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내가 부모님의 사고를 언급한 것이, 그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 듯 보였다.나는 삼촌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삼촌, 아니에요. 전 믿어요.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예요.”삼촌은 내 말을 듣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원아, 먼저 내려가 있어라. 난 잠깐 혼자 더 있을게.”함께 내려가기로 했던 삼촌이 갑자기 말을 바꾸자, 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삼촌...”“괜찮아, 어서 내려가.” 삼촌은 손짓하며 나를 보내려 했다.나는 서재를 나왔지만, 바로 아래층으로 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삼촌의 반응이 예상 밖이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혹시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의 진심 어
“알겠어요.” 나는 아줌마를 보며 인사했다.“아줌마, 저희 이만 가볼게요.”아줌마는 내 얼굴빛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듯, 잠시 위층을 바라봤다. 아마 삼촌과 나눈 대화가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굳이 붙잡지 않고 “조심해서 가” 하고 배웅해 주었다.나는 진정우와 함께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려고 하자 진정우가 내 손을 붙잡았다.“왜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 부모님 얘기가 나왔거든요.” 나는 숨기지 않고 답했다.“혹시 사고 얘기 물어보신 거예요?” 그는 바로 눈치챘다.“네, 사실은... 정우 씨 영향도 좀 받았죠. 정우 씨의 이야기를 듣고 제 가족사도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나는 약간 자조적으로 웃었다.“그럼 결과는요?” 그가 다시 물었다.삼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조용히 답했다.“단순한 사고였대요.”차가 삼촌 집을 벗어나자 나는 말을 덧붙였다.“현장 보고서와 부검 결과도 있고요.”진정우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앉아 있었고 어느덧 도심의 화려한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사람이 붐비는 거리라 교통이 막혀 차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신호등에 걸린 사이, 나는 침묵을 깨며 물었다.“오늘 저녁 드셨어요?”“아니요, 아직이요.” 진정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오늘 고생 많았으니까 저녁은 제가 살게요.”“좋죠.” 그는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나는 주차할 곳을 찾아 차를 세운 후, 차에서 내려 붐비는 길거리 음식 노점을 둘러봤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오늘 여기 있는 거 전부 마음껏 드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내 몸을 툭 치고 지나갔다.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 나는 본능적으로 진정우의 옷깃을 잡아 그의 쪽으로 넘어갔다.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진정우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장면은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연출이었고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코끝이 맞닿고 조금만 움
손잡기, 포옹, 키스는 항목별로 따로 비용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소개팅남과 했던 약속이었다.지금 진정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아마 그날 밤 그가 소개팅남을 때려눕힌 후 뒷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내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정말 이 남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그는 나와 실제로 키스하지는 않고 대신 내 손을 잡아끌며 인파를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북적이는 도심에서 함께 뛰는 것은 내게도 처음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 둘이 왜 뛰는지 의아해했지만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붐비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양옆으로 비켜섰고 우리는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달렸다. 진정우가 내 손을 잡고 가끔 나를 돌아보는 모습이 정말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불어왔다. 그렇게 나를 이끌고 달리는 진정우를 바라보자 문득 그와 함께 어디론가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한참을 뛰다 보니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진정우는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멈춰 섰다.나는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고 진정우 역시 숨이 거칠었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진정우와 함께 이 순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설렘을 주었다.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숨이 점차 가라앉자, 나는 그가 아직도 내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걸 알아챘다. 그의 목젖이 한번 꿀꺽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공기가 묘하게 달아올랐고 나는 심장이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목이 바싹 말라오는 긴장감 속에 겨우 말을 꺼냈다.“저기... 왜 저를 잡고 뛰어왔어요?”“안 뛰면... 사람들 앞에서 키스해야 했을 텐데요.”진정우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손을 힘껏 빼내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발을 살짝
“자.” 진정우가 자신이 들고 있던 탕후루를 내 입 가까이 들이밀었다.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탕후루를 더 가까이 내밀었다. 마치 내가 한 입 먹지 않으면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할 수 없이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느껴졌고 확실히 오리지널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솔직히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먹고 있던 과일 탕후루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맛은 아니었다.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맛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정말 맛있네요.”그러자 진정우가 내가 들고 있는 탕후루를 가리키며 말했다.“지원 씨 것도 궁금한데요.”나는 반사적으로 내 탕후루를 뒤로 숨기며 마치 소중한 걸 빼앗길까 봐 조심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그러자 진정우가 웃으며 말했다.“한 입만 먹어볼 건데 뭘 그렇게까지... 그럼 너무 소심해 보이잖아요.”그 말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한 입 정도 줄 수 있지 않은가 싶어서 탕후루를 다시 꺼냈다. 내가 선택한 탕후루는 작은 과일들이 다섯 알씩 담긴 것이었고 각기 다른 맛이 있었다.“자, 여기서 하나 고르세요.”하지만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보지도 않고 내가 먹고 있던 탕후루를 가리켰다.“저는 이걸로 할게요.”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건 내가 이미 한 입 먹은 거였다.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진정우는 고개를 내밀어 내가 들고 있는 탕후루에서 작은 감 하나를 베어 물었다. 그가 먹고 나서 탕후루를 보니 남은 과일은 딱 한 알뿐이었다. 어쩐지 먹기도 뭐하고 안 먹기도 뭐한 기분이었다.그때 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남은 마지막 한 알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설탕 코팅이 된 청포도라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버리기 아까워 마지막 청포도를 입에 넣고 재빨리 씹으려는 찰나, 고개를 들어 보니 진정우가 돌아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는 갑
나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다.진정우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고르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나는 일부러 물었다.“여자들이 이런 걸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진정우가 진지하게 말하자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정우 씨, 여자들에 대해 꽤 잘 아시네요. 정말 연애 경험 없으신 거 맞아요?”“네, 없어요.” 진정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여동생이 있어서 여자들에 대해 기본적인 건 조금 알죠.” 그의 말에 나는 숟가락을 잠시 멈췄다.여동생이 있다고?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그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친여동생이에요. 부모님이 같은.”나는 시선을 피하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한 번도 얘기하신 적 없잖아요.”“얘기할 기회가 없었거든요.”진정우도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고 그가 다시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니 이걸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역시 강유형도 이런 종류의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때도 “이런 건 몸에 해로울 뿐”이라며 불평했었다.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며 기분이 살짝 상했다.“억지로 드시지 마세요. 다른 거 시켜드릴게요.”“아니에요, 괜찮아요. 좀 차가운 것뿐이라서요.”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차가운 거 드시면 속이 불편하실 텐데요.”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작은 반항의 의미로 침묵을 지켰다. 진정우도 내 마음을 알아챈 듯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그때 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지원아?”고개를 돌리니 신지태가 예쁘게 화장한 여자와 함께 나를 보고 있었다.“지태 오빠, 여기서 보네.” “혼자 아이스크림 먹고 있었구나.” 신지태는 아직 진정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그 순간 진정우의 숟가락이 내 그릇에 들어왔다. 그는 내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
나는 신지태 곁의 여자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는 옷차림과 화장을 보면 신지태의 정식 여자 친구라기보다는 스쳐 가는 사람임이 분명했다.신지태가 떠난 후, 다시 내 아이스크림 그릇을 보니 이미 진정우가 다 먹어 치운 상태였다.“다른 거 더 먹으러 갑시다.”진정우는 전혀 사양할 줄 몰랐다.나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좋아요.”진정우는 나를 이끌고 국수를 파는 가게로 갔고 두 그릇을 시켰다. 이번엔 내 것을 빼앗지 않았다. 이건 따뜻한 음식이니까.알고 보니 진정우가 정말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먹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이 먹을까 봐 신경 쓴 것이었다.이 사람, 약간 얄미운 구석은 있지만 나름 진심으로 챙겨주고 있는 건 분명했다.국수를 다 먹고 나서 우리는 계속 거리를 걸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파는 가게도 있었고 화분을 파는 가게도 있다. 그러다 내가 작은 화분 두 개를 사서 진정우에게 주었다.“방이 너무 삭막하니까 꽃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조금은 따뜻한 느낌이 들게.”“내가 있는 걸로 부족한가 봐요?”그가 웃으며 말했다. 충분하기는 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그럼 향기나 풍기게 놔두세요.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잖아요.”내가 웃으며 말하자 진정우도 따라 웃었다.그의 웃음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말하지 마세요.”진정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용히 꽃을 들고 나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밤 12시가 될 때까지 거리를 누볐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진정우가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할 텐데 걱정이 되어 말했다.“우리 이제 돌아가요.”“아직 더 보고 싶은 거 없어요?”그가 물었다.“아니요, 슬슬 피곤하네요.”나는 일부러 하품하며 말했다.그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주변의 다양한 먹거리와 작은 소품들에 시선을 빼앗겨 그의 표정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다 예쁜 생화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하나를 집어 머리에 얹었다
문 앞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표정을 한 사람은 강유형이었다.우리가 헤어진 후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서로의 피를 거꾸로 쏟게 하는 장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지금 진정우와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고, 그 곁에는 조나연이 서 있었다.조나연과 관계를 정리했다면서 이렇게 떡하니 같이 있다니... 남자의 말은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시선을 거두고 강유형을 보지 않기로 했다. 괜히 신경 쓰면 속만 상할 테니까.진정우도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 손을 잡으며 핸드폰을 빼앗지 않고 다정하게 말했다.“예쁠 때 찍어주세요.”그의 말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생각이 들게 했고 마치 오래된 연인 같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그러자 강유형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윤지원,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그는 재수 없고 무례하게 말을 건넸다. 조나연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나를 끌어내려는 그의 태도는 조나연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지금 바빠.”정말 바빴다. 지금은 진정우 곁을 지키며 그의 주사를 챙겨줘야 하니까.그런데 강유형은 내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보다 더 빨리 진정우가 그의 손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부딪치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둘은 아무 말 없이 기싸움을 벌였지만, 이렇게 계속 가면 결국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진정우는 지금 링거를 맞는 중이라 무리하게 싸우다가는 링거를 다시 맞아야 할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나는 이 상황을 말리지 않으면 더욱 악화될 것 같아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조나연을 쏘아보며 말했다.“저 사람 좀 데리고 가줄래요?”조나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는지 움찔했다. 그러고는 강유형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유형 씨, 나 좀 아파. 우리 빨리 가서 주사 맞자.”조나연도 링거를 맞으러 온 건가? 임산부가 약을 맞는 일은 흔치 않은데, 혹시 태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
교통사고는 정말 내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악몽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이 절망감은 얼마나 깊은지...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순간에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어쩌면 더 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한 상처를 입은 끝에 돌아가셨으니까.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정우는 그런 나를 잡아주려고 애썼다.“지원아, 괜찮아. 곧 사람들이 너희를 구하러 갈 거야. 나도 금방 갈게.”그는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진정시키려 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아파...”강유형의 힘없는 신음이 내 옆에서 들려왔다.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못했다.“지원아, 왜 대답 안 해? 괜찮아?”진정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괜찮아...”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차에서 불이 나거나 휘발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 봐.”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차 앞쪽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차가 또다시 흔들리더니 곧이어 세상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으악!”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했지만 다시 차가 뒤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다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탈진한 상태였다.“지원아! 지원아!”멀리서 진정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고 내 핸드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까 차가 뒤집힐 때 핸드폰은 어디론가 던져졌고 나는 간절히 외쳤다.“진정우! 차가 또 뒤집혔어!”“진정우, 제발 사람들 빨리 보내줘. 제발!”커가는 공포감에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나는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을 볼 용기가 없었다. 만약 불이 나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