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사우는 집집마다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서 처음엔 조나연도 삼촌에게 드릴 선물을 사러 온 건가 싶었다. 며칠 전, 강유형이 조나연과 회사에서 손을 끊고 더는 얽히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던 걸 생각하니 그가 삼촌의 생일에 그녀를 데리고 가려 한다는 건 뜻밖이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조나연은 사장님이 가져온 문구 세트를 꼼꼼하게 살피며 꽤 아는 척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고 나 역시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아서 못 본 척 돌아서서 내 선물을 고르기로 했다.“사장님, 정말 이게 제일 좋은 거 맞죠? 아주 중요한 분께 드리는 거라서 실망시키지 말아주세요.” 조나연이 사장님에게 물었다.“나연 씨가 말씀하시는 ‘제일 좋은’ 것에는 기준이 없죠. 최고가 있다면 그보다 나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약속하건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고 주시는 분의 품격을 살릴 겁니다.” 사장님은 장사를 잘 아시는 분이었다.“그렇군요. 그래도 그날 제가 주는 게 제일 좋아 보였으면 해요.” 조나연의 말에서 그가 선물할 사람을 꽤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해동에서 이 문방사우라면 저희 가게를 능가할 곳이 없습니다. 나연 씨께서 고르신 이 세트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선물을 받는 분이 나연 씨의 정성을 느끼실 겁니다.” 사장님이 말하며 웃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사실 이 선물은 제 미래의 시아버지께 드리는 거거든요.”그 말을 듣고 나는 움찔했다. 그녀가 강유형과 진지하게 교제하는 건가? 그렇다면 왜 강유형은 아직도 내가 다니는 회사를 압박하는 걸까? 참으로 이기적이다 싶었다.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선물을 고르려 했지만, 진열된 물건들은 눈에 차지 않았다. 조금 실망하고 있던 찰나, 진열장 아래 구석에 놓인 문구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사장님, 이거 좀 보여주세요.”“고르신 거 마음대로 꺼내 보세요.” 사장님은 나를 편하게 대했다.궁금해서 서둘러 진열장을 열고 문구 세트를
계산을 마치고 있을 때, 진정우에게서 전화가 왔다.“방금 바빠서 이제야 메시지를 봤어요.”진정우가 먼저 사과했다.“괜찮아요.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진정우가 “몇 시쯤?” 하고 묻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여섯 시에 가면 저녁 식사 시간이어서 삼촌과 아줌마가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할 게 뻔했다. 나는 괜찮지만 진정우는 좀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일곱 시 반이요.”이때쯤이면 식사를 마쳤을 시간이었다.“좋아요. 제가 일곱 시에 데리러 갈게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저를 어떻게 데리러 오실 건데요? 자전거라도 타고?”그냥 재미로 한 말이었는데 진정우가 아무 대답이 없자 내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나는 서둘러 해명했다.“제가 데리러 갈게요. 미리 집으로 돌아갈 테니 그때 같이 가면 될 것 같네요. 혹시 선물 준비해야 할 것도 있나요?”“아니요, 제가 준비했어요.”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보니, 조나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조나연은 나를 볼 때마다 어딘가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와 할 말이 없어서 물건을 챙겨 나왔다.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남성복 매장으로 향했다. 오늘 진정우와 함께 가야 하니 평소 입던 옷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에게 옷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연기를 해주기로 한 만큼 옷 한 벌쯤은 맞춰주는 게 예의였다.저녁 여섯 시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진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소희의 전화를 받았다.“언니,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같이 얘기 좀 하고 싶어요.”마침 오늘은 시간이 없었다.“무슨 일이에요? 전화로 말해도 돼요. 오늘은 삼촌 댁에 가야 하거든요.”나는 솔직히 말했다.“그렇구나, 아쉽네요.”이소희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나는 탁자 위에 놓인 사과를 베어 물며 말했다.“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안 먹어요. 언니, 요즘 진짜 화가 나요. 원래는 말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도대체 누구 아이인지 본인이 제일 잘 알겠죠. 정말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든가요.”이소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가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시간은 없어요. 그 시간에 차라리 정우 씨에게 신경을 더 쓰겠어요.”이소희가 진정우를 언급하자 그가 아직 오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보며 돌려 물었다.“지금 저랑 얘기하는 거 퇴근하고 하는 거예요? 아니면 또 핑계 대고 화장실에 가서 전화하는 거예요?”“언니,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정우 씨, 요즘 완전 인간미 넘쳐요. 오늘도 평소보다 더 일찍 퇴근하셨다니까요.”“그래요? 퇴근한 지 얼마나 됐는데요?”“한 30분? 저 지금 벌써 집 소파에 누워 있어요.”이소희의 말을 듣고 진정우가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었다.“요즘 이렇게 일찍 퇴근하고 밤에도 야근 안 하면 공사를 제때 끝낼 수 있어요?”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이소희가 뭔가를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정우 씨가 괜찮다고 하셨어요.”“정말 괜찮아 보이세요? 괜히 믿었다가 시간 못 맞추면 소희 씨만 손해잖아요. 보너스 깎이면 어쩌려고요.”이소희가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괜찮을 거예요. 이제 D구역까지 작업이 진행됐고 요즘 진짜 순조롭게 가고 있어요. 문제도 거의 없고 출근해서 일만 하면 되니까요.”이소희는 말을 끝내며 혀를 찼다.“언니, 신기한 게요. 언니가 여기 있을 때는 매일같이 문제가 생겨서 정우 씨 방을 들락거렸는데 언니 나가고 나서는 그런 일도 없어졌어요. 덕분에 정우 씨 방에 갈 일도 줄어들어서 아쉽네요. 차라리 문제라도 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럼 가서... 호호호...”이소희가 또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걸 눈치채고 나는 바로 말을 잘랐다.“아마 제가 진정우 씨랑 사주가 안 맞아서 그랬을 거예요. 같이 일할 때마다 이상하게 문제가 생기더니 제가 떠나고 나니까 다 잘 풀리네
나는 진정우의 목욕 후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허리에만 수건을 두른 채로 상체도, 하체도 드러나고 겨우 가운데만 가린 모습이었다. 진정우 역시 나처럼 놀란 듯했는데 내가 갑자기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의 살짝 붉어진 구릿빛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잠시 동안 우리 둘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그러다 진정우가 먼저 반응하며 침실로 들어갔고 그제야 나도 겨우 몸이 움직였다. 나는 긴장해서 두어 번 침을 삼켰다.그때야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우가 들어간 침실 문을 바라보며, 아마 옷을 갈아입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그를 위해 산 옷이 떠올라 말했다.“정우 씨, 잠깐만 옷 입지 말고 기다려요.”말을 내뱉고 돌아서는데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당황했다. 옷 입지 말고 기다려 달라니...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그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기에 얼른 방으로 가서 옷을 챙긴 뒤 다시 진정우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실 문 앞에 도착해 두 번 노크했다.“제가 산 옷이에요. 문 앞에 둘 테니 이걸 입는 게 나을 거예요.”굳이 방금 말을 해명하지 않았다. 그러면 더 민망해질 테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으려 했는데 침실 문이 휙 열리며 이미 옷을 갖춰 입은 진정우가 나타났다.흰 셔츠에 검정 슬랙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두 개의 단추가 풀려 있어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격식 있는 느낌을 풍겼다.이렇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평소 그의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이런 옷이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나는 조금 더 캐주얼한 옷을 사준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의 진정우는 그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마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 된 듯했다.
“혹시라도 급하면 찾으러 올 줄 알고 일부러 문을 열어뒀어요.”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그래서 수건 하나만 두르고 나온 것도 일부러예요?”진정우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아니에요, 핸드폰 소리가 들려서 받으려고 나왔을 뿐이에요. 이렇게 타이밍이 맞을 줄은 몰랐죠.”그래, 참 묘하게 맞아떨어진 타이밍이었다. 그래도 그의 몸이 훌륭하니 눈이 즐거웠달까.삼촌 집으로 가는 길에 진정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긴장한 건가 싶어 내가 말을 걸었다.“가서 그냥 인사만 잘하면 돼요. 나머지 질문은 제가 다 답할게요.”진정우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강유형이 만약 뭐 불편한 말을 하거나 일부러 괴롭히려 하면 너무 예의 차리지 마세요.”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는 말을 맞춰둬야 할 것 같아요. 청평에서 처음 만났고 당신이 저한테 관심 있어서 청평까지 찾아왔다고 하면 될 것 같아요.”그 얘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이때 진정우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실수 없을 겁니다.”“네?” 나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잠시 후에야 그의 말을 깨달았다.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우리 둘은 그저 침묵 속에 있었다.하지만 그 침묵이 묘하게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고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운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거의 들이받을 뻔했다.그 순간, 진정우가 재빨리 핸들을 잡아 45도 각도로 방향을 틀어주면서 겨우 추돌을 피할 수 있었다.차가 멈춘 후에도 나는 아직 정신이 없었다. 그의 빠른 반응이 너무 놀라워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운전할 때는 좀 더 집중하세요. 사고는 그렇다 쳐도 다치면 어떡하려고요?” 진정우가 한마디 했다. 앞차가 출발하자 차를 바르게 돌려놓고 핸들을 나에게 넘겼다.운전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나는 그의 앞에서 초보처럼 느껴졌다.한참 후에야 진정이
나는 아무 말 없이 멍하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정우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울 텐데 괜히 잘못된 반응을 보여 그를 더 슬프게 할까 봐 말을 삼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부모님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의 사고는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사고 이후 모든 일은 강두식 삼촌이 처리해 주셨다. 아마 삼촌만이 진실을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조금 후에 그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진정우도 내가 말이 없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삼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굴 인식으로 문이 열렸다. 마당에 있던 장 집사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아가씨, 오셨네요! 곧바로 어르신과 사모님께 알려 드릴게요.”“괜찮아요. 제가 직접 들어갈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장 집사는 차에서 내린 진정우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의 정체가 궁금한 듯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제 남자 친구, 진정우예요.”장 집사는 단순한 집사가 아니라, 삼촌 댁에서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보냈고 김희연 아줌마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니 장 집사 앞이라고 해도 연기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진정우는 장 집사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장 집사님.”“아이고...” 장 집사는 그를 바라보며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나와 강유형의 혼약이 정해진 사이로 보이는 상황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장 집사가 이런 반응이라면, 조금 후 삼촌과 아줌마는 더 큰 충격을 받겠지.나는 진정우와 팔짱을 낀 채 장 집사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아직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을 꾸짖는 중이었다.“회장이라는 사람이 회사에서 몇천 명씩 다스리면서도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말을 듣게 하지 못하잖아!”삼촌은 대답 없이 스마트폰이나 잡지를 보고 계신 것 같았다.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걸까?“강두식! 또 못 들은 척하는
하지만 아줌마는 믿지 않는다는 듯, 다시 삼촌을 한 대 때리며 말했다."지원이를 핑계로 나를 달래려 하지 마. 안 속아."“아줌마!” 내가 부르자 아줌마가 몸을 살짝 떨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마자 눈에 기쁨이 번졌지만 곧 삼촌과 다정한 모습을 내가 목격했음을 깨달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아줌마는 삼촌의 손을 재빨리 떨쳐내며 내게 다가왔다.“지원아, 왔구나! 밥은 먹었어? 내가 장 집사한테 준비하라고 할까?”“이미 먹었어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먹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진정우가 식사를 했는지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넌 왜 집에 와서 먹지 않고 나가서 먹어?” 아줌마는 나에게만 투덜대면서도 진정우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것이었다. 진정우에게 말 걸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줌마는 이렇게 자신의 방식으로 진정우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상류층 가문의 사모님답게, 약간의 침묵 후에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지원이 친구인가 보네?”나는 슬쩍 진정우의 팔을 쥐었다. 그도 상황을 파악한 듯 정중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원의 친구라면 외부인은 아니네. 어서 들어와.”삼촌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준비해 온 선물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삼촌, 미리 생신 축하드려요.”“역시 우리 지원이! 늘 이렇게 마음 써주니 고맙구나.” 삼촌은 기쁜 얼굴로 선물을 받으며 진정우를 바라봤다.“안녕하세요, 삼촌.” 진정우도 인사를 건넸다.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권하자 아줌마는 장 집사에게 차와 과일을 준비하라고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와 진정우를 한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선물만 주고 그날에 안 오면 곤란해. 네 삼촌과 난 그런 거 허락 못 해.”아줌마는 내 의도를 꿰뚫어 본 듯, 단호하게 내 계획을 차단했다. 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그날 정우 씨와 함께 올 거예요.”그러자 아줌마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더니, 이내 억
진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의 손이 내 손을 더 단단히 감싸 쥐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마치 내 심장의 멎는 것 같았다. 설렘의 극치가 있으면 바로 이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저는 지원이에게 제 모든 걸 줄 겁니다. 제 생명처럼 사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지킬 거예요.” 진정우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다.'바다처럼 깊은 사랑'이란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걸까? 연기임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정우가 진심을 담아 고백하고 있는 것 같았다.정말 대단한 남자다. 연기라는 핑계로 내 마음을 흔들다니.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맞잡으려다가, 왠지 그가 얄미워져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평소 고지식한 그가 이런 행동을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손에 얼굴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굴었다.‘진짜 뻔뻔하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지만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긴 했다.진정우는 내 손을 살짝 놓고 삼촌과 아줌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삼촌께서 아줌마를 평생 사랑하시듯 저도 평생 지원이를 사랑할 겁니다.”앞부분은 내게 하는 고백이었다면, 뒷부분은 아줌마를 겨냥한 반격이었다.아줌마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진정우의 말을 듣고 더는 뭐라 말할 수 없었던 듯했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삼촌이 입을 열었다.“정우 씨는 아줌마와 얘기 좀 나누고 너는 나랑 서재에 잠깐 가자.”삼촌은 진정우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삼촌이 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그를 따라갔다.서재에 들어가자 삼촌은 내가 가져온 선물 상자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사 온 새 먹과 붓으로 나랑 같이 글을 써 보자.”오랜만에 삼촌과 함께 글을 쓰게 된 거였다. 적어도 3년은 된 일이다. 그때 아줌마는 아들이 크면 엄마와 서먹해지고 딸이 크면 아빠와 서먹해진다고 했다. 게다가
“콜록!”전화기 너머에서 배성재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내 갑작스러운 애교 섞인 목소리가 꽤 당황스러웠나 보다.그는 곧바로 물었다.“무슨 부탁이죠?”나는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드래곤킹에는 남자 모델뿐만 아니라 여자 모델도 있죠? 혹시 그쪽이랑 친하세요?”이제 내가 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 확신한 이상, 굳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도 없었다.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그동안 그렇게 떠보고 시험해 보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결국 미트볼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갑자기 왜 그런 걸 묻죠?”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조심스럽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팔짱을 끼고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톤으로 말했다.“저도 한 번 여자 모델이 되어 보고 싶어서요.”“뭐라고요?”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높아졌다.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했다.“드래곤킹에서 여자 모델로 일해 보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성재 씨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그건 안 됩니다.”이번엔 단칼에 잘라 말했다. 거절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왜요? 제가 못생겨서? 아니면 몸매가 별로라서?”“그런 문제가 아닙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곧이어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그곳은 당신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좋아, 바로 이 반응. 이제야 진짜 진정우다운 모습이 나오는군.’“왜요? 성재 씨도 거기서 일하셨잖아요?”내가 일부러 짓궂게 되묻자, 그는 순간 말을 잃었다.그리고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낮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그곳에 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어요.”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그래, 바로 이거야. 이 반응이야.’분명 그는 자신이 진정우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통제하려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럼 내 방법대로 알아서 갈게요.”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가 날 불러 세웠다.“잠깐. 진짜 이유
내 아버지를 언급하자 강진혁은 순간 굳어졌다.표정이 단단하게 굳은 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연한 반응이었다.내 부모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비극이었으니까.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배성재가 만든 완자를 바라보았다.나는 차분한 척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제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그 맛은 다시 없을 거야.”하지만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었고 나는 이미 확신했다.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그런데도 그가 계속 자신을 배성재라고 주장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괜히 흔들리지 말고 그의 계획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었다.강진혁은 한숨을 내쉬듯 낮게 말했다.“지원아, 네 부모님 일은 정말 미안해.”하지만 그 말은 더럽게도 위선적으로 들렸다.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애써 눌러가며 나는 덤덤하게 받아쳤다.“그 일은 오빠랑 상관없잖아요.”강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넌 참 착한 애야.”‘착해? 아니, 바보였겠지.’한때는 용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내가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단 1%도 없다는 걸 말이다.나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조용히 단호박 수프를 떠먹었다.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솔직히 말해 배성재의 요리 실력은 꽤 수준급이었다.심지어 예전 진정우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그동안 숨어서 요리 연습이라도 했나? 나중에 진짜 정체를 밝히면 꼭 물어봐야겠네.’“이거 맛있네요. 잘 만들었어요.”내가 무심하게 던진 칭찬에 강진혁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저녁 약속 있어?”그는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없어요. 그냥 한 말이에요.”나는 무심히 단호박 수프를 한 모금 마셨고 그 순간 강진혁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그럼 오늘 저녁에는 나랑 같
배성재는 정말 겁도 없었다.강진혁이 나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도전장을 내밀다니...나는 그의 이런 태도가 예상 밖이었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건 이소희였다.그녀가 정말 드래곤킹에 있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나는 고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요.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요.”배성재는 별다른 아쉬운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섰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들을 마주쳤는지 다시 한 번 진 팀장님이라 불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던 강진혁이 문득 내게 물었다.“저 사람... 진정우랑 정말 많이 닮지 않았어?”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만약 이 자리에서 안 닮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답했다.“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시험해 봐야죠.”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항상 나한테 맛있는 걸 챙겨줬어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성재 씨의 요리를 경험해 보려고요.”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강진혁에게 보내는 신호였다.내가 배성재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신호였다.나는 아직 강진혁이 배성재를 위험 요소로 인식하지 않길 바랐다.적어도 지금은 배성재가 그의 타겟이 되어서는 안 된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결과는 나왔어?”우리는 이미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열었다.그 안에는 예상했던 두 가지 요리 외에도 만두와 호박죽까지 곁들여져 있었다.솔직히 말해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길 정도였다.강진혁도 한마디 덧붙였다.“보아하니 요리 실력이 제법인데. 드래곤킹에서 남자 모델로 있기엔 아까운 재능이네. 그냥 식당을 차리는 게 낫겠어.”나는 의미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았을 뿐이에요.”나는 강진혁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그런 태도조차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관심과 걱정이라기보다 그저 나를 붙잡기 위한 수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사랑이 식으면 그의 모든 행동이 불편하게만 보인다더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그래도 물이라도 좀 마셔.”강진혁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권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그렇게 화장실을 나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그리고 곧, 회사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어? 진 팀장님!”“오랜만이에요! 드디어 복귀하신 거예요?”“우린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여러 직원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반가워하는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 배성재라는 것이었다.배성재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게 조용히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그 순간, 내 옆에 있던 강진혁의 기운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그가 진정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계속 착각하도록 놔두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괜한 오해가 쌓이면 나중에 정리하기가 더 골치 아파진다.배성재는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내게 건넸다.“점심 가져왔어요.”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사실 나는 아침도 못 먹고 나와서 속이 비어 있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책임감이 꽤 강하네요?”그러면서 슬쩍 강진혁을 향해 돌아보며 덧붙였다.“오빠, 성재 씨 요리 실력 한 번도 안 맛봤죠? 진 팀장님보다는 아주 약간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꽤 괜찮아요.”내 말이 끝나기가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강진혁은 집요하게 내 반응을 살폈다.나는 짧게 웃으며 허진호에게 집중하듯 말했다.“전 허 대표님이 빨리 회복해서 출근하셨으면 좋겠어요. 출근 도장 찍는 모습 못 보니 너무 심심하네요.”그렇게 나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전화를 끊었다.강진혁은 이미 내 자리까지 들어와 있었고 가져온 꽃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오랜만에 그렇게 밝게 웃는 거 본 것 같은데.” 나는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냈다.“허 대표님이 여자 친구한테 얼굴 할퀴었다고 투덜대는데 그게 너무 웃겨서요.”강진혁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혹시 유흥업소 간 거 때문에 그런 거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강진혁이 허진호를 봤고 허진호가 본 사람이 정말 이소희라면 강진혁도 그녀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리고 이소희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이 바로 강진혁이었다는 내 의심이 맞다면...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역시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네요. 그런 곳은 꼭 가봐야 속이 시원해요?”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난 일 때문에 갔어.”“허 팀장님도 똑같이 말하던데요. 근데 여자 친구가 안 믿고 난리를 쳤대요.”나는 꽃을 들어 올려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으며 시선을 피했다.향은 좋았지만 지금 내 기분과는 정반대였다.그러다 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어제 드래곤킹에서 좀 난처한 일 겪었다며?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싸늘해졌다.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묻는 걸까?그가 배후에 숨어져 있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면 정말 그의 걱정 어린 태도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주범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가 연기를 한다면 나도 맞춰줘야 했다.아직은 그를 자극할 때가 아니니까.그래서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직접 해결했어요. 굳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나는
나는 준비실에서 차를 따르다가 무심코 동료들에게 물었다.“허 대표님은 오늘 안 나오셨나요?”내 말에 몇몇이 입을 꾹 다물고 킥킥거리며 웃었다.나는 그 반응이 이상해서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뭐예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그러자 한 명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얼굴이 엉망이 됐다네요!”“아무래도 여자 친구한테 할퀸 모양이에요.”“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허 대표님 여자 친구가 그렇게 사나운 줄은...”“근데 솔직히 허 대표님이 유흥업소라도 갔다면 나 같아도 가만 안 뒀을걸요.”순식간에 사무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고 다들 각자 한마디씩 보태며 떠들어댔다.그제야 나는 허진호가 오늘 회사에 안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얼굴이 엉망이 돼서 창피해서 못 나온 거겠지.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때리는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은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솔직히 나는 그냥 궁금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허진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지원 씨,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다 헛소문입니다. 그런 일 없었어요.”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고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되물었다.“네? 무슨 일인데요? 제가 뭘 들었다는 거죠?”허진호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회사 갔다면서요? 아무도 얘기 안 해줬어요?”나는 일부러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아침부터 바빠서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그제야 허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아, 됐습니다.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그리고 내가 들은 내용은 사무실 사람들이 떠들던 소문과 거의 똑같았다.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제가 지금 제일 후회하는 건 도대체 왜 여자한테 빠졌냐는 겁니다.”나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의 한탄이 어이없기도 했고 뭔가 귀엽기도 했다.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남자를 좋아해 보시려고요?”그러자 허진호도 장단을
나는 놀란 채로 그를 바라봤다.“강유형, 너...”그는 천천히 입가를 닦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나는 순간 따라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끝내 발을 떼지 않았다.그냥... 이대로 두는 게 맞을 것 같았다.그래야 그도 이제 완전히 포기할 테니까.“저를 원망하진 않겠죠?”강유형이 떠난 후 뒤에서 배성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배성재는 문가에 서 있었고 그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강유형이 토한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얼룩져 있었다.“저 사람이 계속 지원 씨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었어요.”나는 짧게 대꾸하며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옷 갈아입고 이제 가세요.”배성재는 말없이 옷을 받았다.그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손에 작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그 안에는 그가 입었던 더러워진 옷이 담겨 있었다.그는 그대로 나가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더니 현관 앞 바닥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마침내 문이 닫히고 그가 떠났고 나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았다.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결국 지쳐서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고 나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그런데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강유형이 내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그 붉은 피가 마치 내 가슴 한복판에 떨어지는 듯한 느낌.그 꿈에 시달리며 나는 밤새 뒤척였다.그리고 다음 날 내가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향했다.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그리고 옷 위에 묻어 있는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나는 조용히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하나하나 천천히 핏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마치 그것이 내 삶에서 강유형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용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들었어. 어제 우리 쪽에서 사고 났다며?”내가 찾기도 전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강유형, 네가 어떻게 내가 사고 난 걸 알았지?”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기둥에 기대섰다.“당연히 알지. 왜냐하면...”그는 말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내가 사람을 붙여서 널 지켜주게 했거든.”지켜준다고? 이건 지켜주는 게 아니라 감시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의 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는 이유 모를 불쾌감이 몰려왔다.그래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네가 붙인 사람이 그렇게 실력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는 어디 있었던 거야?”“그 부분은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놈은 잘랐어.”강유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는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덧붙였다.“그리고 지금 누가 널 해치려 했는지 조사 중이야.”“잘됐네.”나는 짧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그럼 네가 그걸 알아내면 나한테도 알려줘.”강유형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피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더군다나 지금 내 집 안에는 또 다른 손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강유형, 늦었어. 인제 그만 돌아가.”나는 단호하게 말했으나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집에 가고 싶지 않아.”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네가 떠난 이후로... 난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 싫어졌어.”그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은 가슴 한구석을 묘하게 찌르는 기분이었다.“네가 있을 때는 몰랐어. 네가 없는 집이 이렇게 공허한 곳일 줄은... 집에 들어가면 온통 적막하고 부모님도 서로 말이 없고 예전처럼 따뜻한 느낌이 하나도 안 남았어.”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렇게 만든 게 누구 때문인데?“사실, 예전엔 이런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어.”그는 허탈하게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뜨거워졌다.조금 전까지 내가 그를 떠보려 했는데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그는 겉으로 보기엔 진지하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은근슬쩍 던지는 말은 전혀 초보자가 아니었다.이 남자, 예상보다 훨씬 노련한데?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하지 마세요.”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TV가 켜진 거실로 향했다.그는 여유롭게 식탁을 정리한 뒤 내가 뿜어낸 죽이 튄 옷을 간단히 닦고 설거지를 시작했다.그러고 부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내 쪽으로 걸어왔다.“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무심하게 손짓했다.“맘대로 쓰세요.”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샤워도 좀 해야겠네요.”나는 즉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마치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내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보았다.아직도 죽이 튀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그제야 나는 생각을 바꿨다.‘아... 샤우할만 하네.’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갈아입을 옷 있나요?”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순간적으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덧붙인 말이 내 결정을 흔들어 놓았다.“헌 옷이라도 괜찮아요.”그는 진정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내 집에 남자의 옷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진정우의 것일 테니까.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이건 완벽한 연기였다.그러니까 내가 괜한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다.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억지로 무덤덤한 척 대답했다.“찾아볼게요.”나는 옷장을 열어 진정우의 옷을 손에 들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졌다.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