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의문이 스쳤다. 막 말을 꺼내려는 찰나, 허진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크음! 윤 팀장, 왜 문틈에서 엿듣고 있었어요? 깜짝 놀랐네.”허진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엿들은 게 아니라 마침 찾아뵈려던 참이었어요.”“하하!”허진호는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그가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주자 나는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입사한 지 며칠 지났지만 그의 사무실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인상은 어딘가 자유롭고 독특했다. 허진호는 회사의 부대표였지만 대표가 회사 업무에 관여하지 않으니 사실상 최고 결정권자나 다름없었다. 보통 대표의 사무실이라면 차분하고 세련된 분위기여야 할 텐데 그의 사무실은 좀 달랐다.소파는 다채로운 색상이었고 디자인도 반달 모양의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방 안 곳곳에는 알록달록한 생화가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귀여운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여성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그가 부대표라는 걸 몰랐다면 사무실을 잘못 찾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어때요, 마음에 들어요?”허진호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물었다.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였다. 사무실치고는 너무 가벼운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곳의 주인은 그였으니 그가 좋아하면 그만이었다.“대표님 사무실 스타일이 참 독특하시네요.”나는 약간의 아부를 섞어 말했다.허진호는 웃으며 나를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나는 딱딱한 분위기는 싫더라고요. 형도 늘 그런 얘길 해요. 아, 그 형이 바로 대표예요. 방금 그와 통화 중이었는데, 지원 씨가 문 앞에 불쑥 나타나서 놀랐잖아요.”나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생각이 많았다. 그가 대표를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둘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듯했다. 어쩐지 모든 걸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이유가 있겠지.“다음엔 조심할게요.”나는 겸손하게 말했다.“괜
“아니에요, 아니에요. 대표님은 모두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사랑받기를 원하죠.”회사를 떠날 때도 허진호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왠지 그 대표님이 어떤 생김새일지 궁금해졌다.그런데 이상한 건 회사 자료에 대표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혹시 숨겨야 할 뭔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마치 재벌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극도로 신비주의를 유지해서 사진도 안 찍고 이름도 숨기는 타입일까?문방사우를 파는 명품 가게인 ‘영보각’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온통 대표님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차에서 내리기 전, 나는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바쁜가 싶어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산책할래요? 시간 괜찮으면 알려줘요.”전화를 받지 않는 걸 보면 메시지도 곧바로 확인하지 않겠지 싶어, 메시지를 보낸 뒤 차에서 내려 영보각 안으로 들어갔다.“윤 팀장님, 오셨군요!”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이곳의 단골로, 매년 여기서 비싼 가격에 특별한 문구 세트를 주문하곤 했다.삼촌은 서예와 그림을 좋아해서 매년 이 문구를 많이 사용하셨으니, 이번에도 그분께 드리기에 딱 맞는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사장님, 올해도 좋은 신상품이 나왔나요?”나는 평소처럼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물건을 둘러보았다.“네, 여기 진열된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드실 테니까요. 좋은 건 이쪽에 따로 있습니다.”그는 나를 한쪽 진열대로 안내했다.나는 가게를 한 바퀴 돌아보고 사장님이 말한 진열대 앞에 섰다. 그리고 한눈에 한 세트를 보고 마음이 끌렸다. 짙은 초록빛이 도는 고급스러운 문구 세트였다.“이거 좀 보여주세요.”“물론이죠.” 사장님은 세트를 조심스럽게 꺼내며 말했다.“이건 올해 신제품이라 이제 막 입고된 겁니다.”어떻게 보면 내 안목을 칭찬해 주는 듯했다.나는 그 문구 세트를 꼼꼼히 살폈다. 재질이나 공예가 모두 뛰어
문방사우는 집집마다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서 처음엔 조나연도 삼촌에게 드릴 선물을 사러 온 건가 싶었다. 며칠 전, 강유형이 조나연과 회사에서 손을 끊고 더는 얽히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던 걸 생각하니 그가 삼촌의 생일에 그녀를 데리고 가려 한다는 건 뜻밖이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조나연은 사장님이 가져온 문구 세트를 꼼꼼하게 살피며 꽤 아는 척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고 나 역시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아서 못 본 척 돌아서서 내 선물을 고르기로 했다.“사장님, 정말 이게 제일 좋은 거 맞죠? 아주 중요한 분께 드리는 거라서 실망시키지 말아주세요.” 조나연이 사장님에게 물었다.“나연 씨가 말씀하시는 ‘제일 좋은’ 것에는 기준이 없죠. 최고가 있다면 그보다 나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약속하건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고 주시는 분의 품격을 살릴 겁니다.” 사장님은 장사를 잘 아시는 분이었다.“그렇군요. 그래도 그날 제가 주는 게 제일 좋아 보였으면 해요.” 조나연의 말에서 그가 선물할 사람을 꽤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해동에서 이 문방사우라면 저희 가게를 능가할 곳이 없습니다. 나연 씨께서 고르신 이 세트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선물을 받는 분이 나연 씨의 정성을 느끼실 겁니다.” 사장님이 말하며 웃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사실 이 선물은 제 미래의 시아버지께 드리는 거거든요.”그 말을 듣고 나는 움찔했다. 그녀가 강유형과 진지하게 교제하는 건가? 그렇다면 왜 강유형은 아직도 내가 다니는 회사를 압박하는 걸까? 참으로 이기적이다 싶었다.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선물을 고르려 했지만, 진열된 물건들은 눈에 차지 않았다. 조금 실망하고 있던 찰나, 진열장 아래 구석에 놓인 문구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사장님, 이거 좀 보여주세요.”“고르신 거 마음대로 꺼내 보세요.” 사장님은 나를 편하게 대했다.궁금해서 서둘러 진열장을 열고 문구 세트를
계산을 마치고 있을 때, 진정우에게서 전화가 왔다.“방금 바빠서 이제야 메시지를 봤어요.”진정우가 먼저 사과했다.“괜찮아요.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진정우가 “몇 시쯤?” 하고 묻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여섯 시에 가면 저녁 식사 시간이어서 삼촌과 아줌마가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할 게 뻔했다. 나는 괜찮지만 진정우는 좀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일곱 시 반이요.”이때쯤이면 식사를 마쳤을 시간이었다.“좋아요. 제가 일곱 시에 데리러 갈게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저를 어떻게 데리러 오실 건데요? 자전거라도 타고?”그냥 재미로 한 말이었는데 진정우가 아무 대답이 없자 내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나는 서둘러 해명했다.“제가 데리러 갈게요. 미리 집으로 돌아갈 테니 그때 같이 가면 될 것 같네요. 혹시 선물 준비해야 할 것도 있나요?”“아니요, 제가 준비했어요.”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보니, 조나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조나연은 나를 볼 때마다 어딘가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와 할 말이 없어서 물건을 챙겨 나왔다.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남성복 매장으로 향했다. 오늘 진정우와 함께 가야 하니 평소 입던 옷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에게 옷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연기를 해주기로 한 만큼 옷 한 벌쯤은 맞춰주는 게 예의였다.저녁 여섯 시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진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소희의 전화를 받았다.“언니,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같이 얘기 좀 하고 싶어요.”마침 오늘은 시간이 없었다.“무슨 일이에요? 전화로 말해도 돼요. 오늘은 삼촌 댁에 가야 하거든요.”나는 솔직히 말했다.“그렇구나, 아쉽네요.”이소희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나는 탁자 위에 놓인 사과를 베어 물며 말했다.“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안 먹어요. 언니, 요즘 진짜 화가 나요. 원래는 말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도대체 누구 아이인지 본인이 제일 잘 알겠죠. 정말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든가요.”이소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가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시간은 없어요. 그 시간에 차라리 정우 씨에게 신경을 더 쓰겠어요.”이소희가 진정우를 언급하자 그가 아직 오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보며 돌려 물었다.“지금 저랑 얘기하는 거 퇴근하고 하는 거예요? 아니면 또 핑계 대고 화장실에 가서 전화하는 거예요?”“언니,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정우 씨, 요즘 완전 인간미 넘쳐요. 오늘도 평소보다 더 일찍 퇴근하셨다니까요.”“그래요? 퇴근한 지 얼마나 됐는데요?”“한 30분? 저 지금 벌써 집 소파에 누워 있어요.”이소희의 말을 듣고 진정우가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었다.“요즘 이렇게 일찍 퇴근하고 밤에도 야근 안 하면 공사를 제때 끝낼 수 있어요?”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이소희가 뭔가를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정우 씨가 괜찮다고 하셨어요.”“정말 괜찮아 보이세요? 괜히 믿었다가 시간 못 맞추면 소희 씨만 손해잖아요. 보너스 깎이면 어쩌려고요.”이소희가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괜찮을 거예요. 이제 D구역까지 작업이 진행됐고 요즘 진짜 순조롭게 가고 있어요. 문제도 거의 없고 출근해서 일만 하면 되니까요.”이소희는 말을 끝내며 혀를 찼다.“언니, 신기한 게요. 언니가 여기 있을 때는 매일같이 문제가 생겨서 정우 씨 방을 들락거렸는데 언니 나가고 나서는 그런 일도 없어졌어요. 덕분에 정우 씨 방에 갈 일도 줄어들어서 아쉽네요. 차라리 문제라도 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럼 가서... 호호호...”이소희가 또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걸 눈치채고 나는 바로 말을 잘랐다.“아마 제가 진정우 씨랑 사주가 안 맞아서 그랬을 거예요. 같이 일할 때마다 이상하게 문제가 생기더니 제가 떠나고 나니까 다 잘 풀리네
나는 진정우의 목욕 후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허리에만 수건을 두른 채로 상체도, 하체도 드러나고 겨우 가운데만 가린 모습이었다. 진정우 역시 나처럼 놀란 듯했는데 내가 갑자기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의 살짝 붉어진 구릿빛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잠시 동안 우리 둘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그러다 진정우가 먼저 반응하며 침실로 들어갔고 그제야 나도 겨우 몸이 움직였다. 나는 긴장해서 두어 번 침을 삼켰다.그때야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우가 들어간 침실 문을 바라보며, 아마 옷을 갈아입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그를 위해 산 옷이 떠올라 말했다.“정우 씨, 잠깐만 옷 입지 말고 기다려요.”말을 내뱉고 돌아서는데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당황했다. 옷 입지 말고 기다려 달라니...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그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기에 얼른 방으로 가서 옷을 챙긴 뒤 다시 진정우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실 문 앞에 도착해 두 번 노크했다.“제가 산 옷이에요. 문 앞에 둘 테니 이걸 입는 게 나을 거예요.”굳이 방금 말을 해명하지 않았다. 그러면 더 민망해질 테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으려 했는데 침실 문이 휙 열리며 이미 옷을 갖춰 입은 진정우가 나타났다.흰 셔츠에 검정 슬랙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두 개의 단추가 풀려 있어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격식 있는 느낌을 풍겼다.이렇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평소 그의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이런 옷이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나는 조금 더 캐주얼한 옷을 사준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의 진정우는 그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마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 된 듯했다.
“혹시라도 급하면 찾으러 올 줄 알고 일부러 문을 열어뒀어요.”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그래서 수건 하나만 두르고 나온 것도 일부러예요?”진정우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아니에요, 핸드폰 소리가 들려서 받으려고 나왔을 뿐이에요. 이렇게 타이밍이 맞을 줄은 몰랐죠.”그래, 참 묘하게 맞아떨어진 타이밍이었다. 그래도 그의 몸이 훌륭하니 눈이 즐거웠달까.삼촌 집으로 가는 길에 진정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긴장한 건가 싶어 내가 말을 걸었다.“가서 그냥 인사만 잘하면 돼요. 나머지 질문은 제가 다 답할게요.”진정우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강유형이 만약 뭐 불편한 말을 하거나 일부러 괴롭히려 하면 너무 예의 차리지 마세요.”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는 말을 맞춰둬야 할 것 같아요. 청평에서 처음 만났고 당신이 저한테 관심 있어서 청평까지 찾아왔다고 하면 될 것 같아요.”그 얘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이때 진정우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실수 없을 겁니다.”“네?” 나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잠시 후에야 그의 말을 깨달았다.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우리 둘은 그저 침묵 속에 있었다.하지만 그 침묵이 묘하게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고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운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거의 들이받을 뻔했다.그 순간, 진정우가 재빨리 핸들을 잡아 45도 각도로 방향을 틀어주면서 겨우 추돌을 피할 수 있었다.차가 멈춘 후에도 나는 아직 정신이 없었다. 그의 빠른 반응이 너무 놀라워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운전할 때는 좀 더 집중하세요. 사고는 그렇다 쳐도 다치면 어떡하려고요?” 진정우가 한마디 했다. 앞차가 출발하자 차를 바르게 돌려놓고 핸들을 나에게 넘겼다.운전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나는 그의 앞에서 초보처럼 느껴졌다.한참 후에야 진정이
나는 아무 말 없이 멍하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정우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울 텐데 괜히 잘못된 반응을 보여 그를 더 슬프게 할까 봐 말을 삼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부모님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의 사고는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사고 이후 모든 일은 강두식 삼촌이 처리해 주셨다. 아마 삼촌만이 진실을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조금 후에 그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진정우도 내가 말이 없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삼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굴 인식으로 문이 열렸다. 마당에 있던 장 집사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아가씨, 오셨네요! 곧바로 어르신과 사모님께 알려 드릴게요.”“괜찮아요. 제가 직접 들어갈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장 집사는 차에서 내린 진정우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의 정체가 궁금한 듯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제 남자 친구, 진정우예요.”장 집사는 단순한 집사가 아니라, 삼촌 댁에서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보냈고 김희연 아줌마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니 장 집사 앞이라고 해도 연기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진정우는 장 집사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장 집사님.”“아이고...” 장 집사는 그를 바라보며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나와 강유형의 혼약이 정해진 사이로 보이는 상황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장 집사가 이런 반응이라면, 조금 후 삼촌과 아줌마는 더 큰 충격을 받겠지.나는 진정우와 팔짱을 낀 채 장 집사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아직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을 꾸짖는 중이었다.“회장이라는 사람이 회사에서 몇천 명씩 다스리면서도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말을 듣게 하지 못하잖아!”삼촌은 대답 없이 스마트폰이나 잡지를 보고 계신 것 같았다.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걸까?“강두식! 또 못 들은 척하는
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렸다.“이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나도 그래.” 그러자 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그런데 차에 앉아 그의 SNS를 보니 조금 전에 본 노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서.]한눈에 보면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확 와닿았다. [이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진정우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형, 이번에 결혼식 하려고 돌아온 거야?”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진정우의 친구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아니. 이번은 아니야.” 진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다음에 한다는 뜻인가?“형수님 미인이시네.” 그 남자가 나를 몇 번이나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그럼.”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형수님 나는 도성운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고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알아요. 알아요.” 도성운은 두어 번 반복하며 말했다. “소영이가 매일 말하더라고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알죠. 형수님 이름이 윤지원이란걸.”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좀 떨쳐내고 있었는데 도성운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아마 자기 소개할 일 없겠네요.”“그러묭. 이렇게 예쁜 분이 오면 다들 한 번에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그런데 진정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보니까, 네가 먼저 분위기 잡은 것 같네.”도성운은 진정우를 많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고 싶
그가 진지하게 내게 농담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그래서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안 믿으면 한번 해봐?”진정우의 뜨거운 시선에 내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나는 그를 한 번 꼬집으며, 일부러 화난 척했다.“너 계속 듣고 싶어? 안 듣고 싶으면 말 안 할 거야.”“듣을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강진혁이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진정우에게 전했다.그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 듯 물었다.“너 걱정되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회사가 걱정이야.”내가 그렇게 바로잡자, 진정우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아, 너는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고 느끼는 거지?”진정우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너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닐 거야. 혹시 강진혁이 돌아오는 것도 이미 다 계산된 일일 수도 있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럴 수도 있어?”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을 진정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강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늘 나와 강유형을 위해 양보하며,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강진혁은 4년 전에 회사를 떠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한다면 굳이 4년 전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진정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지원아, 사실 너는 남자들에 대해 잘 몰라.”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그럼 남자의 입장에서 말해봐.”“강진혁이 너 좋아하지?”진정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나도 이제야 알았어. 예전엔 몰랐고 이번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거야.”나는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강유형이랑 비슷한 시기에 좋아했을 거고 그 감정은 강유형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어.”진정우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걸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누구나 속고 사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민감하게 물었다.“혹시, 앞으로 나를 속이려고 하거나 이미 나한테 뭔가 숨긴 거 있어?”진정우는 잠시 침묵했다.“...아니.”그 두 마디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내 입장을 밝혔다.“너무 싫어.”그러자 그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알겠어.”만약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때 공항 대기실에 비행기 탑승 안내가 나왔고 해외행 비행기였다.나는 본능적으로 강유형을 떠올렸다. 그가 짐을 끌고 보안 검색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해외에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사업 얘기라도 하러? 아니면... “우리 이제 보안 검색대 쪽으로 가자.” 진정우가 내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어!” 나는 대답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유형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진정우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우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불안하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가자.”우리는 보안검색을 무사히 통과하고 비행기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 내 휴대폰에 한 통의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강유형이었다.[안전 비행.]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그가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그때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보내곤 했다.어느 날, 강유형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런 말 너무 촌스럽잖아. 다음엔 다른 말로 보내봐. 새로 배운 거 있으면 알려줘.”그 이후로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안전 비행.]그 문구는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린다.다시 볼 수 있을지라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은 내 마음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