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씨 집안의 딸이 약혼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곽 회장은 요즘 매일 축하를 받고 있었다. 수양딸이 반지훈의 처남과 약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딸도 약혼했으니 말이다.강성연은 김아린과 함께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이 소식이 떠올라 말을 꺼냈다."의정 씨 약혼했다면서?"김아린이 강성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몰랐어?"강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혼 소식이라면 진작에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곽씨 집안에서 숨기고 있는 탓에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강성연은 곽의정과 우연히 마주쳤던 그날을 떠올리며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은 금세 현실이 되었다.식사를 끝내고 레스토랑에서 나오자 서도준과 곽의정이 복도에 나타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앞뒤로 걷고 있었다.뒤에 있던 곽의정은 머리를 숙이고 걷다 갑자기 멈춰 선 서도준의 등에 부딪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들었고 강성연과 김아린이 눈에 들어왔다.김아린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서도준을 바라봤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간에 바다 하나를 가로 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 있거나 슬퍼서가 아닌 단지 아쉬움에 울컥해서 말이다.서도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부러 피해 다니던 사람을 다시 만나니 마음속에서는 거센 파도가 치는 것만 같았다. 곽의정도 그의 감정변화를 알아챘다."의정 씨, 어떻게 여기서 다 보네요."강성연은 또 서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도준 씨도 오랜만이에요."서도준은 약간 창백한 안색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네, 오랜만이에요."서도준의 시선이 김아린에게 닿자, 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지라, 김아린은 몰래 강성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강성연이 눈치껏 말했다."저희는 식사가 끝나서 이만 가볼게요."곽의정이 머리를 끄덕였다.김아린은 머리도 들지 않고 서도준을 스쳐 지나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강성연은 김아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언제 개입했어요?"곽의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호기심과 개입은 다르다고요."서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의정은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래서 개의치 않는 듯 수프 몇 술 떠먹고는 말했다."제가 다른 사람한테 얘기할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요.""이해해 줘서 고마워요.""저는 밥 먹고 회사로 돌아갈 거예요. 약혼식은 도준 씨한테 부탁할게요.""제가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요즘 보는 눈이 많은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서도준의 덤덤한 말투에 곽의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도준은 곽의정을 직접 베이 테크놀로지로 데려다줬다. 이 장면을 본 회사 직원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회사 앞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는데 혹시 약혼 상대는 아니냐고 말이다.직원의 부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보고 곽의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맞아요. 저한테 엄청 잘해줘요."서도준은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신분을 밝히기 약간 어려운 것 빼고는 완벽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감정을 제외한 객관적인 평가라고 곽의정은 속으로 생각했다.일주일 후, 곽씨 집안의 약혼식은 국제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약혼식에 참석한 사람은 전부 사업적으로 연결된 사람이었다.강현은 곽 회장의 예비 사위로 당연히 약혼식에 참석했다. 강성연과 반지훈도 물론 함께 참석했다, 강성연이 있는 곳에 반지훈이 없을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예비 사위 덕분에 반지훈과 아는 사이가 된 곽 회장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반지훈은 술잔을 흔들며 무심한 표정으로 인파 속에 서 있었다. 사실 그는 약혼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강성연을 혼자 보내기 싫었고, 또 서도준도 만나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강성연, 이율, 강현은 함께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곽의정의 약혼에 이율은 기쁘기는커녕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강성연이 의아한 표
하얀색은 검은색과 달리 어울리기 아주 어려웠다. 이는 훌륭한 몸매뿐만 아니라 남다른 아우라도 필요로 했다. 서도준의 피부색은 하얀 정장 덕분에 한층 더 밝아졌다. 특유의 차분한 아우라는 옅은 색 계열의 정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직원이 먼저 곽의정을 발견하고, 서도준도 이어서 머리를 돌렸다. 그는 곽의정을 향해 걸어갔고 직원들은 눈치껏 빠져줬다. 조용한 복도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서도준과 마주 선 곽의정은 긴장감 때문인지 약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약혼식이 곧 시작한다면서요?"서도준은 곽의정의 드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드레스 잘 어울리네요."곽의정은 잠깐 머리를 들어 서도준과 눈을 마주치다가 금방 다시 피했다."고마워요. 도준 씨도 정장 잘 어울려요.""이만 들어갈까요?"곽의정이 머리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떼려고 하자 서도준이 팔을 내밀었다. 그녀는 약간 멈칫하다가 완전히 경직된 채로 팔짱을 꼈다.서도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의정 씨도 긴장할 때가 있네요.""제가 긴장 안 하는 사람으로 보였어요?""네."곽의정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도준 씨는 긴장 안 돼요?""저는 괜찮은 것 같아요."곽의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도준은 이런 일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두 사람은 함께 약혼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잠깐의 감탄사와 함께 사람들은 저마다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예비 사위 두 명 다 외모가 훤칠했으니 부러워할 만도 하다.두 사람은 곽 회장에게로 걸어갔고, 그는 열정적으로 서도준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서도준은 자연스러운 미소로 곽 회장의 지인과 인사를 나눴다.반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저 녀석이 서도준이야?"강성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천광 씨 문자를 아직도 신경 쓰고 있어요?""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여?""네,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여요."반지훈은 입을 다물었다.이때 서도준이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서도준은 술잔을 들더니 미소
곽의정은 반지훈과 서도준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느샌가 뒤에서 다가온 이율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언니.""왜?"곽의정은 몸을 돌리며 물었다.이율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귀가에 대고 몇 마디 했다. 곽의정은 술잔을 내려놓고 이율과 함께 약혼식장 밖으로 나갔다.강성연은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베란다로 나온 곽의정은 비교적 큰 화분 뒤에 자리를 잡았다."너 설마 아직도 나를 말릴 생각이야?""약혼은 성급하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진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곽의정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후회를 하더라도 내 일이야."이율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알아요. 제가 언니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자격 없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곽의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니, 혹시라도... 서도준 씨한테 감정이 생기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감정이 생긴다고?'이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도 처음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늘 서도준 씨를 직접 보니까 딱 언니 이상형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히 약간 걱정돼요."곽의정은 어른스럽고 차분한 남자를 좋아했는데 서도준이 딱 그런 부류에 속했다. 그래서 이율은 곽의정이 조만간 꼭 마음이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곽의정은 정색하며 말했다."너 지금 내가 가벼운 사람이라고 돌려서 까는 거니? 맞아, 서도준 씨는 내 이상형이야. 그래도 지금이 감정을 운운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거든."곽의정은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다. 솔직히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몇 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연기는 연기일 뿐, 가짜에 마음이 흔들려 귀찮은 일을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서도준은 그녀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이율은 심호흡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더 할 말 없겠네요."이율은 두말없이 베란
서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곽의정도 아차 싶었다. 서로의 일을 상관하지 않기로 했는데 너무 많은 것을 물은 것 같았다.“미안해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전 그냥 만약 서도준 씨가 후회한다면 일단 약혼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약혼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을 취할 수 있을 테니까요.”그녀는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먼저 약혼 의사를 꺼냈다고 해도 그녀와 그의 약혼은 단지 서로의 이익만을 위해서 결정된 것이었다. 절대 각자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그 사이에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될 일은 더더욱 없어야 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어쩐지 망설여졌다.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형식적인 결혼이 겁나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형식뿐인 결혼이니 각자의 삶을 살면 되었다. 그래도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혼하면 그만이다. 번거로운 일도 아니었고 그녀로서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일이었다.하지만 이율의 충고를 들은 후 어쩐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결혼을 하고 나서 정말로 서도준한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사실 서도준은 어떤 방면으로 보아도 뛰어난 남자였다. 신사적인데다 매너도 있었고 남자다움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겁이 났다. 형식뿐인 결혼 생활에 만에 하나 불필요한 감정이 생기지는 않을지. 그렇게 되면 정말로 큰일이었다.뒤에 앉은 남자는 몇 분간 침묵하고 있었다.“의정 씨는 왜 계속 저한테 후회하지 않냐고 묻죠?”순간 말문이 막힌 그녀가 차 속도를 줄였다.“제가 뭘 또 계속 물었어요.”그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혹시 의정 씨야말로 다른 걱정 거리가 있는 거 아니에요?”곽의정은 입술만 살짝 깨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서도준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깊게 생각하실 필요 전혀 없어요.”20분 후, 차가 북로 남원 22호에 도착했다. 그녀는 천천히 차를 주차한 후 고개를 돌렸다.“집에 다 왔어요.”뒷좌석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곽의정이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
서도준은 마치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본 것처럼 뒷말을 이었다.“제 전화번호 뒷자리에요.”“……”그녀는 순간 머쓱해졌다.곽의정이 과장되게 웃으며 그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이런 것까지 굳이 해명할 필요 없어요.”그가 짧게 답했다.“해명한 적 없어요.”그는 단순히 그녀에게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아무런 뜻도 담겨있지 않았다.그가 길쭉한 팔을 뻗어 스위치를 켰다. 순간 집안이 환해졌다. 저택 내부는 상당히 단출했다. 엄청 화려하고 호화로울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깨트렸다.간단하고 깨끗한, 마치 텅 비어있는 듯한 집이었다.그녀가 그를 안방까지 부축했다. 안방은 거실보다 더욱 휑해 보였다. 커다란 침대와 옷장 그리고 책장이 전부였다. 그 외의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녀가 방안을 둘러보았다.“이건 너무 단출한 거 아니에요?”궁상스러운 건 아닌데 지나치게 단출했다. 휑해 보이는 공간은 집이라기 보다 그저 비나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처로 보였다.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혼자 사니까 물건이 많이 필요 없어서요.”그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자주 오지도 않고요.”그는 집에 자주 오는 편이 아니었다. 멀기도 했고 일을 나갈 때도 불편했다.곽의정은 알겠다는 듯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럼 안전하게 집에 도착했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그녀가 막 돌아섰을 때 등 뒤의 남자가 담담하게 물었다.“안 자고 가요?”곽의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아무리 약혼한 사이라고 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서도준이 이마를 문지르며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그녀가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닌데.”“그런데 뭘 겁내고 그래요.”“……”서도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설명했다.“여기 의정 씨 집이랑 꽤 멀어요. 밤이라 의정 씨 혼자 운전하고 가는 것도 위험하고요. 일단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내가 바래다 줄게요.”그의 말
일을 마친 그녀가 살금살금 안방으로 돌아갔다.서도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가 자신의 몸 위에 놓인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는 자신의 주량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군대에 있을 때 매번 위험한 잠입 임무를 했었기에 잠이 매우 얕았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잠에서 깼었다.그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녀가 뭘 하려고 저러는지 지켜보려고 했는데 이런 뜻밖의 행동을 할 줄이야.다음날, 곽의정은 아침 8시 정각에 눈을 떴다. 세수를 하고 거실로 나와보니 소파에는 이불과 베개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깼어요?”서도준이 주방에서 아침밥을 들고나왔다.잠깐 머뭇거리던 그녀가 식탁으로 걸어갔다. 간단하게 차려진 아침은 보기에도 그럴듯해 보였는데 냄새도 끝내주었다.“서도준 씨 솜씨 좋은데요?”서도준이 의자를 빼냈다.“혼자 산 시간이 길어서 이런 건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어요.”그녀가 자리에 앉았다.“술은 깼어요?”“숙취는 없는 편이라서요.”서도준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태연하게 계란 하나를 깠다.“의정 씨는 어젯밤 잘 잤어요?”“그럭저럭요.”곽의정이 고개를 숙이고 그릇에 담긴 수프를 맛보았다.서도준이 절반 넘어 깐 계란을 그녀 앞에 놓인 그릇에 놓아주었다.“맛은 어때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정말 맛있었다.그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어젯밤 의정 씨가 특별히 저를 위해 이불과 베개를 가져다준 것에 대한 보답이에요.”곽의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서둘러 해명했다.“전 그냥 당신 침대를 차지한 게 미안하기도 해서.”그녀는 다른 뜻이 없었다. 그저 술 취한 남자를 소파에서 자게 한 게 양심에 걸렸을 뿐이었다.“의정 씨는 참 착하네요.”“뭘 칭찬까지.”곽의정이 젓가락을 깨물었다. 자신이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칭찬이라니.서도준은 그저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그가
당황한 그녀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그냥 습관이에요.”그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남아있었다.“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습관 되어야 할 텐데요.”곽의정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알았어요. 천천히 익숙해 질게요.”그녀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그는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 천천히 창문을 올렸다. 그때 그의 아버지 서현식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서 씨 저택.거실로 들어선 서도준은 서현식이 소파에 앉아 시가를 태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곁에는 고용인이 그에게 차를 따라주고 있었다.서현식이 그에게 자리에 앉으라며 손짓한 후 담뱃재를 털어내며 말했다.“도준아, 네가 결혼하기 전에 너한테 큰 선물 하나 줄까 하는데.”서도준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와 곽의정의 약혼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아는 건 아니었다. 그건 그와 곽 회장 사이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서현식은 모르는 일이었다.그가 미소 지었다.“기대되네요. 아버지께서 저한테 무슨 큰 선물을 하시려는지.”서현식이 시가를 재떨이에 걸쳐놓고 찻잔을 들었다.“화성 쪽 주식 말이다. 네가 가질래?”서도준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저한테 주식을 주다뇨. 그래도 되나요?”“안 될게 어디 있겠어.”서현식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네 형인 서강우가 계승할 수 없으면, 나한텐 또 다른 아들인 네가 있잖니. 예전에는 내가 너를 많이 신경 쓰지 못했어. 이제 네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아버지로서 너한테 지금껏 못해준 거에 대한 보상을 해줄까 해.”서도준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최대한 고분고분하게 말했다.“저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니 영광이에요.”서현식은 서도준이 아무 야심도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생아는 지금껏 고된 생활만 해왔기에 자그마한 사탕만 쥐여줘도 감사해하며 보답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도준아, 난 너를 믿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란다.”“절대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