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청연은 미친 듯이 몸으로 문을 박고 있었고, 문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방문이 좀 느슨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래서 낙청연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최후의 일격인 양 힘껏 문을 박았다.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의 뒤에 그림자가 나타났고 뒤이어 발 하나가 나타나 문을 걷어찼다.힘이 얼마나 센 건지 문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그리고 때마침 문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낙청연은 문과 함께 날아갔고 그에 깜짝 놀란 부진환이 그녀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낙청연의 무게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뒹굴게 됐고 그렇게 두 사람은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부진환이 쓰러지면서 그의 입술이 낙청연의 콧대에 닿았다.“왕야!”낙청연은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고 부진환도 무안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몸을 눕혀 바닥에 누웠다.“넌 진짜 일을 귀찮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그 정도 실력으로 사람을 잡을 생각을 하다니. 괜히 상대를 놀라게 만들기나 하고. 설마 고의는 아니겠지?”부진환이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그에게는 산명 대사를 잡을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그는 낙청연이 섣불리 그자의 신분을 까발려서는 안 됐다고 생각했다.낙청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어찌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변하실 수 있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사를 같이했었는데 이제 괜찮아졌으니 옛일을 들추어내려 하는 것입니까?”당시 산명 대사는 이미 이상함을 눈치챘었고 만약 제때 손을 쓰지 않으면 도망쳐서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그러면 아주 중요한 단서가 끊기게 된다.게다가 낙청연 본인이 무공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산명 대사 역시 무공을 할 줄 몰랐고 부진환의 실력이라면 쉽게 그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그런데 두 사람 모두 생각지도 못한 통나무에 당한 것이다.부진환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그 사람은 누구더냐? 태부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냐?”낙청연은 무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낙태부께서 받으신 초상화들은 전
“낙청연! 당장 내려오거라!”낙청연이 입을 열려는데 차가우면서도 다소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청연, 형님…”멍한 얼굴로 고개를 든 낙청연은 부운주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걸 보았다.두 사람의 자세를 본 부운주는 무안한 듯 고개를 돌렸고 부진환은 목소리의 주인이 부운주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욱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얼른 내려오라니까!”낙청연은 아픈 몸을 지탱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고 부진환 또한 즉시 일어났다.부운주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걱정스레 물었다.“형님, 청연, 괜찮습니까?”부진환은 미간을 구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다.”그는 고개를 들어 부운주를 쳐다보며 물었다.“네가 여긴 웬일이냐?”“저는 산명 대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다는 소리를 듣고 왔는데 어찌…”부운주는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들의 뒤에서 타고 있는 집을 보며 말했다.“안타깝게도 이미 떠났구나.”부진환은 냉담한 어조로 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풀썩 주저앉았다.“형님!”부운주는 깜짝 놀라 창백한 얼굴로 새된 소리를 냈다.낙청연은 재빨리 부진환을 부축해 그를 바닥에 앉힌 다음 그의 맥을 짚고 목덜미 부근의 상처를 살펴봤다.상처는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오황자, 절 도와주시겠습니까?”낙청연은 부진환의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부운주는 원래 부진환을 업으려 했지만 부진환을 자신의 쪽으로 당기는 순간 무게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연신 기침했다.“제가 하겠습니다.”부진환을 건네받은 낙청연은 그의 두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친 채로 힘겹게 부진환을 끌어당기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부운주는 여러 차례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아 옆에서 부축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낙청연의 힘에 부친 모습을 보던 부운주는 문득 사색에 잠기면서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평소 형님과 자주 싸우셨는데 위험한 순간이 닥치니 목숨을 걸고 형님을 구하시는군요. 형님에 대한 그 정을 형
부운주는 그 말이 농담이란 걸 알아챘지만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그러면 다시 그자를 찾을 방법을 알아봐야겠군요. 예전에 알아봤을 때는 수도 밖에도 저택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가 불에 탔으니 어쩌면 거기에 갔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그곳에 다시 한번 가봐야겠네요.”부운주는 좋은 마음으로 얘기했고 낙청연은 순간 눈을 반짝였다. 수도 밖에 또 저택이 있다니? 그렇다면 그곳으로 도망간 걸지도 몰랐다.“수도 밖 어느 곳입니까? 주소를 주세요. 당장 그를 찾아가 봐야겠습니다.”최대한 일찍 찾아내면 그자를 잡을 수 있을지 몰랐고, 어쩌면 태부 할아버지를 해치려는 흑막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부운주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정확히 어딘지는 기억나지 않네요. 외진 곳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택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네, 고맙습니다.”“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왕부로 돌아온 뒤 소식을 접한 소유는 급히 부진환을 업어 처소로 모셨다.낙청연이 그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먼저 문턱을 넘으면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왕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찌 이렇게 다치신 겁니까…”바로 그때, 고 신의가 허겁지겁 달려와 낙월영을 끌어냈고 부진환을 치료하기 시작했다.낙청연이 그런 그를 일깨웠다.“왕야의 상처는 머리 뒤쪽에 있습니다.”고 신의는 낙청연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소유는 그곳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낙월영은 옆에서 울고 있었으며 고 신의는 부진환을 위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낙청연은 몸을 돌려 자리를 뜨고 남각으로 향했다.부운주는 방 안에서 종이를 찾아냈는데 그 위에는 산명 대사의 수도 내와 수도 밖의 주소가 적혀있었다.부운주는 오래전부터 그를 찾아갈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았다.주소를 건네받은 뒤 낙청연은 곧장 저택을 나섰다.이번에는 반드시 그자를 잡을 생각이었다.방 안에서 고 신의는 재빨리 부진환을 위해 상처를 싸맸다. 그러나 낙월영이 계
낙청연은 저택을 나선 뒤 마차를 한 대 불러 부운주가 준 주소를 따라 수도 밖으로 향했다.낙청연은 길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를 벗어난 뒤 한참을 헤매서야 겨우 그곳을 찾아냈다.산명 대사가 있는 곳은 아주 외진 곳이라 마차가 들어갈 수 없었기에 낙청연은 하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서 그곳으로 향했다.수풀을 지나자 죽림 안에 숨겨진 작은 집이 보였다. 그곳은 조용하고 고즈넉했으며 정원에서는 장작을 패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곳에 산명 대사가 있는 듯했다.낙청연은 기쁜 마음에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산명 대사가 입막음 때문에 제거당하지 않았으면. 그가 아직 살아있으면 했다.하지만 그녀는 부진환이 그곳까지 따라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부진환은 그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삐걱—낙청연은 정원 문을 열었다.정원 안에서 장작을 패고 불을 피워 약을 달이려던 산명 대사는 고개를 들어 낙청연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여기는 어떻게 아셨습니까?”낙청연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더니 곧바로 문을 걸어 잠그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미간 사이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군요. 당신 또한 관상을 볼 줄 아니 액운이 코앞에 닥쳤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얘기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습니다.”낙청연은 자신이 지금 무공을 쓸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산명 대사는 그 말에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당신…”어떻게 안 것일까? 그녀도 관상을 볼 줄 아는 것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낙청연이 정말 자신처럼 점을 칠 수 있는 것일까?그는 깜짝 놀라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돌연 냉소를 흘렸다.“낙씨 가문의 큰아씨, 공을 가로채려 하면 안 되지요. 저와 함께 주인님을 위해서 일하면서 저에게 누가 시킨 일인지 묻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주인님 앞에서 공을 세우려는 걸로도 모자라 저를 이리 팔아치워 섭정왕의 앞에
낙청연은 날 선 눈빛으로 산명 대사를 쳐다보며 그의 멱살을 잡았다.“보았습니까? 당신 배후의 사람이 절 모함하라고 시켰어도 당신을 살려주지는 않을 것입니다.”감히 자신을 해치려 하다니? 그렇다면 배후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으스러진 검은 벌레를 본 산명 대사는 심장이 철렁했지만 결연한 기색을 드러내며 대꾸했다.“당신에게 잡혔다고 한들 제 처지가 나아질 가능성이 있겠습니까?”말을 마친 그는 입 안에 넣어뒀던 독을 먹고 죽으려고 했고, 그 순간 낙청연은 서늘하게 눈빛을 빛냈다. 그가 독을 마시고 자결하려는 것을 눈치챈 낙청연은 그를 세게 때렸고 그로 인해 산명 대사는 얼굴이 삐뚤어지고 치아가 두 개 빠졌으며 독약도 빠져나왔다.부진환은 그 장면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리도 민첩하게 반응하다니, 평범한 대갓집 규슈 같지 않았디.대체 모함을 당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이 기회를 빌려 자신의 믿음을 사려는 건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낙청연은 노끈으로 산명 대사를 묶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죽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얌전히 협력할 생각이 없는 걸 보니 고생을 좀 해봐야겠군요.”그녀는 산명 대사를 밀면서 밖으로 나갔고 부진환의 앞에 선 채로 그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이 사람은 제가 잡았으니 제가 심문할 겁니다. 왕야께서는 간섭하지 마시지요!”부진환을 보자 또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그를 구한 게 후회됐다.눈앞의 남자는 그녀를 끝도 없이 의심하는데, 자신은 왜 그를 구한 것일까?“그리고 이 일이 끝나고 제 결백이 증명되면 수세를 써주세요.”낙청연의 결연하면서도 냉담한 말이 부진환의 마음속에 강렬히 내리꽂혔다.부진환은 놀랍기도 하고 또 우습기도 했다.애당초 낙월영을 대신해 죽기 살기로 섭정왕부로 시집온 것은 낙청연이었고 그에게 약을 써서 아이부터 가지려고 한 것도 낙청연이었다.그런데 지금 와서 수세를 써달라고 하는 것도 그녀였다.설마 이것도 밀고 당기려는 수작인 건가 싶었다.부진환이
낙청연은 미간이 떨렸다.그녀는 산명 대사를 집어 들어 그를 바닥으로 엎어뜨렸고, 예리한 화살은 마차의 차 벽을 뚫었다.부진환은 심장이 조여오면서 긴장됐고 급히 차 문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그의 시선은 먼저 낙청연에게로 향했고 낙청연이 고개를 드는 순간 그는 산명 대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그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더니 채찍을 휘두르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잘 앉아있거라!”채찍이 말의 엉덩이를 때리는 순간, 말은 우는 소리를 내면서 다리를 움직여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그 순간, 낙청연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거의 날아오르다시피 했고 산명 대사 역시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마차 안에서 이리저리 굴렀다.쉬쉬쉭—날카로운 화살들이 그들이 앉은 마차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낙청연은 자세를 바로 하려고 애를 쓰는 동시에 산명 대사를 붙잡고 이리저리 피했다.만약 산명 대사가 죽는다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가 더 어려웠다.“세상에, 어지러워 죽겠네. 그냥 날 죽여!”산명 대사는 덜컹거리는 걸 참지 못했고 당장이라도 토할 듯한 얼굴이었다.“그렇게 쉽게 죽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지요!”낙청연은 그를 바닥에 쓰러뜨리더니 자신의 체중을 이용해 그를 위에서 아래로 눌렀고 그 바람에 산명 대사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마차는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화살은 점점 더 많아졌고, 마차에는 수없이 많은 구멍이 생겨 그곳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차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그 점을 부진환에게 알리려 발을 걷는 순간, 낙청연은 놀랍게도 부진환이 수도로 향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그는 점점 더 외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왕야, 어디로 가시려는 것입니까?”낙청연이 다급히 물었다.앞에 뜸직하게 앉아있던 부진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온몸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고 있었는데 낙청연은 이상하게 그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그런데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낙청연은 곧바로 그 생각을 버렸다.
낙청연의 말에 산명 대사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덜덜 떨었다. 아파서인지 아니면 낙청연의 말에 겁을 먹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어찌 됐든 그는 결국 몸을 바르르 떨면서 입을 열었다.“얘기할게요. 얘기하겠습니다. 그러니까…”낙청연은 동공이 떨렸고 긴장한 얼굴로 그의 얘기를 들으려 했다.그런데 산명 대사가 말을 하려는 순간 날카로운 화살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날아와 낙청연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위험을 느낀 낙청연이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화살이 또 하나 날아와서 마차 위를 뚫고 안으로 들어왔고 산명 대사의 어깨 뒤쪽에 박혔다.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산명 대사의 상처를 확인한 낙청연은 그곳이 급소가 아니란 걸 알았고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순간 적막이 감돌면서 공기 중에 살기가 느껴졌다.밖에는 3, 40명 정도 되는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그들을 뒤쫓고 있었는데 저마다 손에 각양각색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마차 밖에서는 부진환이 가볍게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소리와 그의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모습을 나타냈군.”미간을 좁힌 채로 차 문을 연 낙청연은 사면팔방으로 그들을 둘러싼 검은 옷의 자객들을 보았다.부진환은 여유로운 듯 보였으나 그 모습은 위협적이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와 마차 밑을 번갈아 보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낙청연은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더러 마차 밑으로 숨으라는 의미였다.바로 다음 순간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낙청연은 불길한 기분에 곧바로 외쳤다.“조심하세요!”그러나 부진환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그는 자객들에게 포위당했으면서도 몸을 날리며 우아하면서도 살기등등하게 적을 무찌르고 있었다. 매 순간이 아찔했지만 그는 여유롭게 그들을 처리했고 낙청연은 마음을 졸이며 그 모습을 보았다.그러나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그녀는 부진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부진환은 그녀의 상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낙청연은 잽싸게 차 뒷문을 열었고
여기저기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쌓아진 시체가 작은 산을 이루고 있어 마차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낙청연은 힘겹게 시체들을 하나하나 치운 뒤 자신의 거대한 몸을 그곳에서 빼냈다. 그리고 그녀는 곧 부진환의 날렵하면서도 대범한 몸짓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장검을 휘두르며 단숨에 검은 옷을 입은 자객의 목을 벴다.마지막 남은 자객이 죽었다.그는 피로 얼룩진 장검을 바닥에 던지고는 빈손으로 걸어왔다.그 순간 햇빛이 그의 앞을 내리쬐고 있어 마치 그가 빛을 향해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끝없는 어둠과 살육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마치 지옥에서 온 수라처럼 도처에 깔린 시체와 피를 밟으며 그녀의 목숨을 거두려고 오는 것 같았다.낙청연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살육의 기운이 너무도 강했다.짧은 순간이었지만 낙청연은 그의 여생에서 한없이 무거운 어둠과 살육을 보았다.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사람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분명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등 뒤에 있는 농후한 어둠을 가릴 수가 없었다.부진환은 마치 살육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그와 가까워질수록 그의 등 뒤에 있는 검은 그림자도 점점 더 커졌고, 눈을 부릅뜨고 보니 그 어둠 속에는 용의 그림자도 있는 듯했다. 낙청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설마 살육 때문에 용의 기운을 얻은 것인가?찰나의 순간 그녀는 부진환의 운명을 내다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는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도 많았으니 말이다.낙청연은 속으로 매우 놀랐다. 부진환은 자신이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번에 결백을 증명하면 수세를 받고 바로 그를 떠날 생각이었다.자신이 직접 낙청연의 어머니를 조사하고 낙월영의 손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빼앗아야 했다.낙청연은 천궐국의 흙탕물에서 함께 뒹굴 생각은 없었다.“그자는?”부진환의 냉랭한 목소리에 낙청연은 정신을 차리며 대꾸했다.“화살을 맞았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