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성도윤은 평생을 걸더라도 3개월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당시 형과 함께 뉴욕 거리를 걸으며 성씨 집안의 미래 발전 방향에 대해 논의하던 중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하면서 그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형이 대신하여 온몸으로 막아줬었다.형은 숨을 거두기 전 정말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는데 임채원이라고 했다.게다가 그녀는 아이를 가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채원이랑 결혼해서 나 대신 보살펴 줘. 그리고 채원과 아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줘.”그는 피범벅이 된 손으로 자신을 꽉 붙잡고 애원하던 형의 간절한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성도윤은 자기 앞을 가로막은 형을 밀어내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나랑 아이를 위해 아버님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설아 씨한테도 상처를 줬잖아. 솔직히 말하면 진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데... 됐어! 나 혼자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어. 비록 아이까지 딸린 미혼모라서 생활이 어려울 테지만, 도현 오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난 참을 수 있어.”임채원은 계속해서 훌쩍거렸다.그녀는 자신의 필살기에도 성도윤이 끄떡없을 거로 믿지 않았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임채원과 슬며시 거리를 두었다.“아빠는 속사정까지 모르니까 너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그래.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차설아는...”성도윤은 멈칫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애초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어. 심지어 4년 동안 관계를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너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혼했을 거야.”“그럼 설아 씨는? 아마 널 많이 사랑하고 있을 거야. 너처럼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임채원의 목소리는 애교가 넘쳤고, 성도윤을 바라보는 눈빛에 미련이 가득했다.그녀는 진정한 어장관리녀로서 사실은 재미로 성도현처럼 고분고분한 남자한테 대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너무 고지식하고 아부만 떨어서 정이 안 갔다.하지만 성도윤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드디어 깨달았다.따
차설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간호사가 건넨 검사 결과를 본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차설아 씨, 혈액 검사 결과 HCG 수치와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높은 편이라 임신한 지 한 달 정도 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뭐라고요? 임신한 지 한 달 됐다고요?”“네, 축하드립니다. 이제 엄마가 되셨네요.”간호사가 떠난 후에도 차설아는 여전히 넋을 잃고 있었다.막장도 이런 막장이 어디 있냐는 말이다.그딴 짓거리를 딱 한 번 저질렀을 뿐인데 바로 당첨되다니? 그녀의 생식 기능이 뛰어난 건가, 아니면 그놈의 유전자가 너무 강한 탓인가? 대체 하느님은 왜 그녀에게 이런 시련을 준단 말이지?물론 성도윤의 아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한 달 전 그날 밤, 성도현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 집안 분위기는 유난히 가라앉았다.차설아는 그동안 늘 안하무인에 고고하던 성도윤이 모든 벽을 허물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며 술을 연신 들이켜는 모습을 처음 봤다.결국 함께 슬퍼해 주다가 같이 울면서 술까지 마셔줬다.그러다 술에 취해 잠자리도 들게 되었는데...결혼 4년 만에 그날은 부부로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눈 밤이었다.차설아는 그날 밤 이후로 성도윤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친해지기는커녕 이대로 끝날 줄이야!게다가 깔끔하게 끝내면 그만일 텐데, 뜬금없이 아이까지 생겨 그녀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역시 남자는 동정하는 게 아니라더니, 이렇게 재수 없을 줄이야.”차설아는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과연 성도윤에게 임신 소식을 알려줘야 할까? 어쨌거나 아이의 아버지로서 살릴지 말지 두 사람이 함께 결정해야 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설아 씨, 이런 우연이 있나? 병원에는 무슨 일이야?”이때, 뒤에서 임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가 돌아서는 순간 허리를 짚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임채원이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임채원의 옆에는 곧 전남편이 될 성도윤이 서 있었다.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
성도윤의 진지한 눈빛과 단호한 표정을 본 차설아는 손에 검사 결과를 꼭 쥔 채 속으로 몇 번이고 망설였다.옆에 있던 임채원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더니 자기 검사 결과를 꺼내 차설아에게 다가갔다.“설아 씨, 우리 아가 좀 봐봐. 벌써 3개월이야. 방금 입체 초음파 검사를 받았거든? 벌써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대, 사진 볼래? 어때? 귀엽지? 오늘 모처럼 설아 씨를 만났는데, 배 속의 아이를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해야겠어. 설아 씨가 넓은 마음으로 허락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이한테 온전한 가정은 사치였을 테니까. 게다가 도윤처럼 완벽한 아빠도 없었을 거야.”이건 누가 봐도 자랑이었다.차설아는 임채원이 건넨 입체 초음파 사진을 흘끗 내려다보았다.아니나 다를까 팔다리와 이목구비가 또렷한 다 자란 아기 사진이었다.반면, 그녀의 아이는 엄밀히 따지면 아직 생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배아에 불과했다.이러한 격차는 그녀에게 무언의 조롱거리로 다가왔다.마치 그녀와 아이가 성도윤에게 얼마나 불필요한 존재인지 조롱하는 것처럼 말이다.말없이 꾹 참고 있는 차설아가 만만하게 느껴진 임채원이 계속해서 비꼬았다.“설아 씨는 우리 아기한테 은인과 다름없잖아. 참,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설아 씨가 우리 아기의 이름을 대신 지어주는 거야. 그렇다면 아기도 감사한 마음을 안고 평생 고마워할 테니까.”차설아는 처음으로 임채원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장난하나?자기 남편과 바람 핀 것도 모자라 그녀한테 아이의 이름마저 지어달라니? 지금 너 죽고 나 죽자는 건가? 그녀의 아픈 곳에 비수를 꽂는 상황이 따로 없었다.차설아는 피식 웃으며 마치 임채원이 하찮은 듯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진심으로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당연하지, 설아 씨만 원한다면.”임채원은 최대한 겸손하게 말했다. 물론 본심은 성도윤 앞에서 차설아를 망신 주는 것이다.왜냐하면 차설아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로 예상했기 때문이다.아무리 마음이 넓고 인내심이 강하더라
성도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동안 아무런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처럼 따분한 줄만 알았던 여자에게 이토록 날카롭고 톡 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왜 인제야 깨달았지? 마치 발톱을 바짝 세운 새끼 고양이가 긁어대는 것처럼 사람을 미치게 했다.대체 어딜 봐서 보호가 필요한 모양새인가!이를 본 임채원은 곧바로 다시 아양을 떨며 성도윤의 팔을 잡아당겼다.“도윤아, 설아 씨 탓하지 마. 따지고 보면 나랑 아기 잘못이지, 뭐. 설아 씨가 널 그렇게 사랑하는데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려고 강제로 이혼당했으니, 나랑 아기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냥 화풀이하도록...”“아니.”차설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굳이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있나?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들의 행복 따위를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개념도 없는 쓰레기를 버렸다가 마침 그쪽이 재활용했을 뿐이야. 그래서 아이 이름이 성재기라고 하는 게 찰떡이라고 했잖아.”곧이어 그녀는 성도윤을 바라보며 웃는 둥 마는 둥 했다.“개념이 없는 사람은 보통 운이 좋지 않기 마련이라던데, 성도윤 씨... 최근에 재수 털리는 일이 생길 거로 감히 예상해 볼게.”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드리웠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어릴 때부터 엄마가 재수 없는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라고 가르쳐줬거든. 아니면 같이 불행해질 수 있다고. 둘이 끼리끼리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오래오래 함께하길 바랄게. 축하해, 안녕!”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었다.죽고 싶어 환장했나?해안시에서 ‘성도윤’이라는 세 글자는 절대적인 권위를 의미하기에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따라서 성도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차설아는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어차피 화풀이는 다 했으니 기분은 후련했다. 물론 한 쌍의 불륜 남녀가 화를 내든 말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차설아가 떠난 후 임채원은 성도윤을 몰래 살폈다.그의 성격대로라면 대놓고 모욕당했으니 절대로 가만있지
성대 그룹.우뚝 솟은 건물 내부에 감도는 저기압 때문에 사람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꼬박 이틀이 지났는데, 어떻게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단서를 못 찾는단 말입니까? IT팀 직원들은 밥만 축내는 사람이에요?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고작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됩니까? 고객 정보가 지금도 외부로 유출되고 있는데, 얼른 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으면 성대 그룹은 해안시의 웃음거리가 될지도 몰라요. 그때가 되면 다들 가차 없이 잘릴 줄 알아요!”진무열의 호통에 하늘 높이 뻗은 건물이 흔들릴 지경이었다.그는 성도윤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 비서로서 회사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했다.이틀 전 성대 그룹 업무 시스템이 알 수 없는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공격을 받은 이후로 그는 100명에 가까운 IT팀 직원들과 여태껏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실장님, 말은 바른대로 하자면 저희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넘사벽이라서 그래요. 범인의 IP 주소가 랜덤으로 계속 바뀌는데 세계 각국이라서 당최 추적할 방법이 없습니다.”IT팀 팀장 강민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해서 총대를 메고 말했다.“실장님도 아시다시피 성대 그룹 IT팀은 해안시 IT업계 거물이 전부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저희마저 속수무책이면 해결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이때, 구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검은 테 안경을 쓴 청년을 발견했다.“무슨 방법인지 얼른 얘기하지 않고 뭐 해요?”진무열이 조급한 듯 얼른 말을 보탰다.청년은 검은 테 안경을 고쳐 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해결 방법인즉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예요. 3일만 더 기다리면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제거될 테니까요.”“그게 무슨 소리죠?”진무열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IT팀 별종들을 혼내려고 소매를 걷어붙였다.“계속해요.”회의실 상석에서 성도윤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는 기
“에취!”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포장마차에서 차설아는 연달아 재채기하더니 귀까지 후끈거릴 지경이었다.“뭐지? 감기가 다 나았을 텐데 왜 자꾸 재채기해?”차설아는 코를 훌쩍이며 감기약을 더 먹어야 하나 고민했다.“누군가 언니 얘기만 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배경윤은 차설아 앞에 ‘해안신문’을 내려놓으며 싱글벙글 말했다.“언니 지금 큰일 났어. 곧 전 남편이 될 분이 2천억을 내걸고 언니를 공개수배한대.”배경수의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으로서 배경윤도 차설아와 생사를 같이 한 사이였다.다만 차설아에게 간이고 쓸개고 빼줄 듯한 배경수와 달리 그녀는 차설아의 가장 친한 친구에 가까웠다. 둘은 모이기만 한다면 티격태격하는데 그것조차 즐거웠다.차설아는 신문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피식 비웃었다.“지금처럼 허세 부릴 시간이 있으면 얼른 버그를 수정할 방법이나 찾지. 벌써 몇 년째인데 성대 그룹 내부 시스템이 이렇게 물러터져서 쓰겠어? 공격 한 번에 바로 다운되다니, 전혀 도전할 맛이 안 나잖아.”“간지 작렬이네.”배경윤은 저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언니라서 이런 얘기할 자격이 있겠지? 해킹계의 신, 그 유명한 ‘스파크’가 바로 언니이잖아. 성도윤 그 만년설 같은 자식이 얼굴만 반반한 했지 머리에 똥만 찼나 봐. 언니처럼 숨겨진 보물을 내팽개치고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켜? 정말 최악이야! 그동안 언니가 암암리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도 모르고, 성대 그룹의 허술한 시스템을 공격하려는 해커를 몰래 방어해 준 언니가 없었더라면 벌써 몇 번이나 다운되고 말았을 텐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이번에 쌤통이야.”배경윤은 성도윤과 차설아 커플의 덕후로서 둘이 결혼하고 사랑이 싹트면서 날이 갈수록 사이가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결국 사랑이 싹트기도 전에 갑자기 튀어나온 내연녀와 아이 때문에 바로 탈덕했다.젠장!차설아보다 화가 더 난 듯한 그녀는 지금 당장 성대 그룹에 쳐들어가 쓰레기 같은 놈을 패고
이쑤시개를 입에 문 이상준은 빠릿빠릿해 보이는 네다섯 명의 부하를 이끌고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차설아를 향해 다가갔다.“그때 네 부모님이 나한테 돈을 빌린 건 둘째치고, 불법 거래로 날 경찰서에 신고한 탓에 애먼 벌금만 몇십억 냈잖아. 게다가 2주 동안이나 구금당했거든? 나중에 풀려나서 복수하려고 찾아갔더니 그제야 두 겁쟁이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사실을 알게 되었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그런데 오늘 마침 이 세상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유일한 핏줄을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자, 얘기해 봐. 잔뜩 화가 난 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절을 몇 번 할 거야?”배경윤이 벌떡 일어나더니 잔뜩 열받아서 이상준을 향해 외쳤다.“절보다 제사상은 어때? 말만 하면 지금 당장 차려줄 테니까.”이상준은 기가 막힌 듯 배경윤을 손가락질하며 호통쳤다.“어디서 굴러온 계집애냐? 이건 나랑 차설아의 사적인 원한이니까 불똥 튀기 싫으면 꺼져.”“너나 꺼져!”배경윤은 차설아와 이상준 사이를 가로막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나도 경고하는데 괜히 설아 언니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꺼지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해도 늦을 테니까.”그녀의 말에 이상준과 똘마니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이내 하나같이 배를 끌어안고 폭소를 터뜨렸다.“하하하, 내가 후회한다고? 어이, 혹시 아직도 모르는 거야? 이 재수 없는 며느리는 이미 성씨 집안에서 쫓겨났다고, 뒤를 봐주는 성씨 집안이 사라진 이상 개뿔도 아니거든? 저 여자를 어떻게 대하든 내 마음이야.”그동안 이상준은 차설아에게 복수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만, 해안시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인 성도윤과 결혼하는 바람에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며칠 전, 차설아가 성도윤에게 차이고 내연녀까지 찾아와서 성도윤의 와이프 자리를 넘본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된 순간 드디어 복수할 타이밍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하하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기 마련이지. 배상할 겸 돈이 있으면 당장
다만 이 소리를 낸 사람은 차설아가 아니라 이상준이었다.“뭐... 뭐야?”이상준의 수하에 있는 똘마니 몇 명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고작 5분 만에 차설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작은 숲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고 머리끝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해결됐어?”배경윤이 물었다.“응. 오래간만에 손 좀 쓰려니 예전 같지 않네, 시간이 꽤 걸렸지?”“언니, 겸손한 소리 좀 하지 마. 2초 정도 더 걸렸지만 파워는 전보다 10배나 강해졌어. 녀석들이 마치 곧 죽을 돼지들처럼 소리 지르던데, 아직 살아 있는 거지?”“숨은 붙어 있을 거야.”차설아는 말을 마치고 서늘한 눈빛으로 죽상이 된 건달들을 쳐다보았다.“너희 보스에게 장례를 치러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빨리 병원으로 데리고 가.”이상준을 따르던 똘마니들은 비록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들 보스의 처참한 울음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챈 듯싶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길로 도망쳤다.배경윤은 이 상황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당시 그녀가 오빠와 납치되었을 때, 납치범들이 곧 미쳐 날뛰려고 하던 찰나의 순간에 차설아가 나서서 혼자 열댓 명의 납치범을 물리치고 그들을 구출해냈다.그때 그들은 차설아의 놀라운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고 또한 그녀가 단정하고 순한 모습 뒤에 숨긴 이토록 신비로운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당초 그들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고 말문이 막혔었지만 그런 차설아와 지내는 것도 서서히 습관 되어갔다. 지금은 그저 일상이 되어버렸다.농담이 아니라, 그들의 보스는 차 장군님의 친 외손녀인데, 이 정도 실력은 충분히 타고났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성씨 집안 그 누구도 차설아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이 정도면 전부 눈뜬 장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설아 언니, 방금까지 언니가 이혼하고 나서 괴롭힘을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어. 언니가 이렇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