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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늘씬한 몸매를 가진 성도윤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뿜어냈고, 마치 이 막장 싸움과 무관한 사람 같았다.

그는 살짝 튀어나온 임채원의 배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채원은 임신한 지 3개월이 되었죠. 아이는 우리 성씨 집안의 혈육인지라 떳떳한 신분이 필요해요. 전 이미 차설아와 이혼을 신청했고, 혼인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나면 채원이랑 결혼할 겁니다.”

그의 말에 소영금과 임채원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성명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 불효자 녀석을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었다.

“이 자식아, 진심이야? 밖에서 얻은 여자는 갖고 놀면 그만이지, 지금 내연녀를 집에 들이려고 와이프까지 내팽개칠 정도로 어리석은 거야? 정신 나갔어? 설아 할아버지께서 알게 된다면 저승에서 쫓아올지도 몰라. 왕년에 얼마나 용맹한 장군이었는지 알기나 해? 수십만 명의 대군을 이끄는 모습은 정말 위풍당당했는데, 설아 할아버지가 널 해코지하는 게 두렵지도 않냐?”

“말도 마세요.”

소영금은 팔짱을 끼고 잔뜩 경멸하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그렇게 대단하다는 사람이 결국에는 한순간에 몰락했잖아요. 그동안 우리가 차씨 집안 하나뿐인 손녀딸을 거둬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대가 끊겼을 거예요. 당시 차씨 집안과 원수를 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잊었어요? 그런 압박까지 무릅쓰고 차설아와 결혼하면서 본의 아니게 적을 만들게 되었는데, 아무리 은혜를 갚는다고 해도 할 만큼 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그때 노인네가 직접 둘이 결혼 생활을 4년 동안만 이어가면 된다고 정했잖아요. 4년이 지나도 여전히 정이 없으면 좋게 헤어지는 거라고 했는데, 딱히 우리 도윤의 잘못도 아니잖아요?”

당장이라도 말다툼을 벌일 것 같은 부모님을 보자, 성도윤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두 분이 싸우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싸우세요.”

“됐다, 됐어!”

성명원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탄식했다.

“넌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워낙 유별나고 제멋대로였으니 한 번 마음 먹은 이상 네 형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았잖아. 도현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널 설득이라도 했을 텐데.”

순간 분위기가 무거워지더니 다들 슬픔에 잠겼다.

3개월 전 성도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성씨 집안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가뜩이나 차갑고 거만하던 성도윤은 마음의 문까지 닫고 매사에 시니컬한 태도로 일관했다.

“정녕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만, 딱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아니면 널 집에서 쫓아낼 테니까.”

“뭔데요?”

성도윤은 무심한 눈빛으로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준수한 외모와 달리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은 당최 무슨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네 할아버지한테는 꼭 비밀로 해줘. 최근에 심장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곧 심장이식 수술을 받으실 텐데 괜히 자극해봤자 좋은 점이 없어. 네 할아버지가 설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거의 친손녀 대하듯이 예뻐하는데, 고작 내연녀와 결혼하기 위해 설아와 이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화딱지가 날지도 몰라.”

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성명원 부부는 그제야 별장을 떠났다.

집을 나서기 전에 소영금은 임채원의 손을 잡고 태교를 잘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는데, 누가 봐도 이미 그녀를 예비 며느리로 삼은 모습이었다.

차설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성명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임채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임채원은 밤새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어쨌거나 성명원과 소영금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보다 성도윤의 마음이 더욱 중요했다.

왜냐하면 성씨 집안 심지어 해안시를 통틀어 가장 발언권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성도윤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도윤은 2층 창가에 서서 정원을 가득 메운 해바라기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별장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니라서 정원에 벌써 이렇게 많은 해바라기꽃이 피었는지 전혀 몰랐는데 장관이 따로 없었다.

해바라기꽃이라...

차설아가 좋아하는 꽃이 해바라기라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갖은 역경에도 오로지 햇빛만 보고 자라나는 꽃.

그래서 차설아는 지금 역경을 벗어나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의 아내로 산다는 자체가 역경이라는 건가?

“도윤아.”

임채원은 성도윤에게 다가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미안해, 나랑 아이가 너한테 짐만 되었네. 아니면... 그냥 지울까?”

성도윤이 뒤돌아섰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동자 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는 울컥하는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우리 형의 마지막 소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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