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해! 시끄러워죽겠네!”차설아는 비틀거리며 이미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자신의 전화가 계속 울리자 귀찮았던 차설아는 아예 손을 흔들어 멀리 던져버렸다.“휴, 설아 씨. 휴대폰을 던져버리면 어떡해요...”연지는 한 손으로 비틀거리는 차설아를 부축하고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주웠다.전화를 건 사람은 끈질기게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연지는 어쩔 수 없이 차설아를 대신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시죠?”“차설아가 아닌데?”“네, 저는 이 전화 주인 친구예요. 설아 씨는 지금 취해서 전화를 받기 어려워요.”“취했다고요?”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극도로 차가워졌다.“지금 어디죠?”“영흥 부둣가 **술집이요. 근데 누구...”“잘 보고 있어요. 바로 갈게요.”남자는 연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력한 명령을 내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이런...”연지는 온몸이 나른한 차설아를 붙잡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먼저 자리를 떠나야 할지 아니면 계속 기다려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하지만 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닌 것 같아 떠나고 싶어도 감히 떠날 수 없었다.“설아 씨, 정신 차려봐요. 이 번호... 아는 번호예요? 조금 이따가 여기로 온대요.”연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차설아의 의견을 물었다.“이 번호는...”차설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그 숫자들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모르는 번호예요. 분명 나쁜 사람이니 못 오게 해요!”“나쁜 사람이라고요? 그럼 오기 전에 우리 빨리 나가요.”연지는 바짝 긴장하더니 차설아를 부축해서 술집 밖으로 나가려 했다.만취한 채 걸어오던 한 건장한 남자가 예쁘게 생긴 차설아의 모습을 보더니 이내 흥미가 생겨 말했다.“이쁜이,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나도 취했고, 너도 취했네? 나 백호는 너처럼 예쁜 애는 처음 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랑 한잔 더 하러 갈래?”건장한 남자는 차설아를 향해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봐요, 자중하
술집 사장은 나서서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내기판을 벌렸다.“자자자, 우리 내기할까요? 다들 누가 이길 것 같나요?”“백호가 이길 것 같아요!”“나도 백호에 한 표!”“이 미녀가 꽤 싸움을 하는 것 같으니 난 미녀에 한 표!”모두 차설아와 백호를 빙 둘러 에워쌌다. 마치 지하 복싱 경기를 보듯 하나같이 혈안이 되어있었다.연지는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이 큰 남자 몇 명이 진짜 손을 쓴다면 차설아는 위험할 것이다!그녀는 애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비천하게 백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오라버니, 우리 그냥 장난친 건데 왜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일단 진정하시고 내 말 좀 들어봐요...”“나랑 이 친구는 평소 밖에서 잘 놀지 않는 순진한 사람들이에요. 오라버니들은 입맛에 맞는 여자들을 골라 놀아야 더 재밌죠. 이렇게 큰 소동을 피우면 괜히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어요?”백호는 그녀가 용서를 빌자 더욱 신이 나서 손가락으로 두꺼운 입술을 만지더니 연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네 친구가 순진하다는 건 믿겠지만, 네가 순진하다는 말은 못 믿겠는데?”“몸매를 보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손을 탔을지 뻔한데,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연지는 얼굴이 붉어졌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그녀는 확실히 술집 아가씨로 일한 적이 있지만, 영리하므로 단순히 술 접대만 했을 뿐 다른 부끄러운 일은 한 적이 없었다.이런 원칙적인 그녀 때문에 술집 사장의 사업에 영향을 주었고, 사장은 그녀를 통제하기 위해 금지 물품을 먹이고, 그녀가 중독되게 만들었다.그녀가 가장 절망하고 견딜 수 없던 순간에 성심 전당포의 사람이 그녀를 구해주었고, 미스터 Q가 그녀에게 새 생명을 선사했다.하지만 그 ‘흑’역사 때문에 그녀는 늘 초라해졌고, 다른 사람이 조금만 언급해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말이 없는 걸 보니 내 말이 맞나보네...”백호는 더욱 느끼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좋아, 내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해. 어차피
이 인간벽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연지가 줄곧 손에 쥐고 있던 전화가 공교롭게도 울리기 시작했다.“혹시... 성도윤 씨? 방금 설아 씨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사람이 바로 당신인가요?”연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눈앞의 커다란 남자를 보고, 또 쉴새 없이 울리는 전화를 보며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떠보듯 물었다.성도윤은 검은 롱코트를 입고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어두운 밤의 왕처럼 존귀하고 우아하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랑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연지를 힐끗 보더니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그쪽이 차설아 친구?”“음, 그런 셈이죠!”연지는 차설아가 쓰레기 전남편을 뼛속까지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상대로라면 성도윤을 꺼려야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한데다 남자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서둘러 말했다.“마침 잘 왔어요. 얼른 설아 씨 좀 구해주세요. 지금 변태 패거리들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어요!”“패거리에게 괴롭힘 당해요?”“네, 바로 저기서요. 들어보세요... 소리가 얼마나 처참해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가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어요!”연지는 겹겹이 둘러싸인 사람들을 가리키며 초조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그녀는 변태들을 상대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원망했다. 차설아가 그들에게 얼마나 괴롭힘을 당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성도윤이 술집 안을 바라보니 확실히 시끌벅적했다. 사람들 속에서 이따금 흥분된 갈채 소리와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그의 입가에는 흥미로운 미소가 번지더니 긴 팔로 아무 의자나 꺼내 유유히 앉았다. 심지어 바텐더에게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한 잔을 주문했다.“성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죠? 설아 씨가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있는데 칵테일이 목에 넘어가요? 당장 구해주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난다고요!”연지는 다급하게 재촉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알아서 해결할 거예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연지는 성도
자세히 보니, 이 ‘거물’은 다름 아닌 방금까지 날뛰던 백호였다.“아악, 아이고!”원래 뚱뚱한데, 지금은 얻어맞기까지 해서 코가 시퍼렇게 멍들고 얼굴은 퉁퉁 부어 계속 울부짖고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연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반면 성도윤은 예상이라도 한 듯 유유히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역시 차설아야!”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사람이 날아와 백호의 몸 위에 포개졌다.바로 백호가 말하던 ‘다섯째’라는 사람이었다.곧이어 또 다른 사람이 날아왔다...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땅바닥에 겹겹이 쌓여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미녀가 이겼어, 미녀가 이겼어! 나 오늘 큰돈 벌었다!”사람들 속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그들은 대세를 거슬러 차설아가 이긴다고 배팅한 사람으로, 모두 합치면 10명도 안 되었다.“돈 벌었으면 나한테도 좀 나눠주지? 난 공짜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아!”차설아는 비틀거리며 한 남자를 붙잡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더니 혀를 꼬부렸다.모두 귀신이라도 본 듯 차설아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저절로 한쪽으로 도망갔다.“설아 씨, 괜찮아요?”연지가 얼른 달려가 비틀거리는 여자를 부축했다.그녀는 차설아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죠?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당연하죠, 나 차설아는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요. 게다가 오늘 술을 마셨으니 공격력이 더 치솟아 싸우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어요. 오늘 이 변태들이 운이 없었던 거죠!”차설아는 연지에게 기대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그녀는 사실 싸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무력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말로 떠드는 것을 귀찮아했다.하지만 싸움은 제창 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의 엄마로서, 또 한 여자로서 사용해야 할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늘 자제하고 있었다.차설아는 최근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 마침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왔으니 완벽하게 분풀이를 한 셈이다!“설아 씨가 싸움을 이렇게 잘하는 줄 전
차설아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더니 흐리멍덩한 정신이 점차 맑아지는 듯했지만, 결국 알코올의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여전히 흐리멍덩했다.그녀는 비틀거리며 손을 내밀어 성도윤의 코를 가리키고는 고개를 돌려 연지를 보며 말했다.“연지 씨, 여기 봐요. 이 사람이 바로... 성도윤이에요. 나의 그 쓰레기 전남편.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번지르르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좋은 인간이 아니에요. 진작 발로 차서 하늘 끝까지 보내버리고 싶었어요!”차설아는 중얼중얼 말하더니 진짜 성도윤을 발로 차려고 했다.“참, 설아 씨. 조심해요.”연지는 급히 손을 뻗었지만 제대로 잡지 못했고, 중심이 흔들린 차설아는 성도윤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왜? 술을 핑계로 내 품에 안기고 싶었던 거야?”성도윤의 긴 팔은 차설아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았고, 그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웃는 듯 마는 듯 조롱했다.“천만에!”원래 술에 취해 뺨이 붉게 물들었던 차설아는 지금 왠지 모르게 얼굴이 더 뜨거워졌고 미꾸라지처럼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너 같은 파렴치한 쓰레기는 피부만 스쳐도 구역질이 나. 그런데 내가 왜 네 품에 안겨! 이거 놔!”“이렇게 취했는데도 여전히 고집불통이네. 힘들지도 않아? 차설아.”“취하기는! 나 멀쩡해! 난 고집만 센 아니라, 주먹이 더 세거든.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보여줄까?”말을 마친 그녀는 성도윤을 향해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방금 백호의 무리는 그저 허술한 멍텅구리들이었다. 보기에는 단단해 보이나 실제로는 물러터졌었다. 차설아는 기껏해야 근골만 움직였을 뿐 온몸의 힘을 쓸 기회도 없었다. 성도윤이 인간 샌드백이 되기를 자초하니 그녀는 당연히 마다하지 않았다.다만, 성도윤이 몰래 무술 고수에게 과외라도 했는지, 그녀의 공격을 몇 번이나 교묘하게 피했고 오히려 그들의 자세는 더욱 애매해졌다.급기야 남자는 아예 그녀를 가로 안은 채 술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취했으면 좀 작작 해. 집까지 바래다
연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맞는 말이네. 방금 설아 씨가 이미 성도윤이랑 혼인신고를 마쳤다고 했어. 비록 성도윤이 일방적으로 음모를 꾸며서 한 혼인신고지만 법률적으로 두 사람은 확실히 부부가 맞아. 나 같은 외부인이 간섭할 처지가 아니지!’“이제 데려가도 되죠?”“네!”연지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성도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겉으로는 차갑고 도도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하하, 합법적인 게 이래서 좋다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안고 한정판 롤스로이스 앞까지 도착했고, 비서 진무열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대표님, 사모님 괜찮으세요?”진무열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이곳은 해안 전체에서 가장 어둡고 위험한 지역이기 때문에 차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미리 백여 명을 동원하여 총알을 장전하고, 성도윤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괜찮아, 그냥 취해서 건장한 남자 몇 명을 때려눕히고 술집을 부숴버릴 뻔했을 뿐이야.”성도윤은 진지하게 말하고는 곤히 잠든 여자를 뒷좌석에 편안하게 앉혔다.“풉!”진무열은 늘 엄숙한 사람이었지만,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역시 사모님은 여전하시네요. 늘 실망하게 하지 않으세요.”“잔말 말고 큰집으로 가.”성도윤은 차갑게 그를 흘겨보더니 낮은 소리로 재촉했다.“넵!”진무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전석으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영흥 부둣가의 지형은 울퉁불퉁하고 복잡했다. 아무리 몇십억짜리 차라고 해도 약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원래 매우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지만, 차가 갑자기 돌멩이를 찧으면서 그녀의 머리도 관성으로 인해 차 문에 부딪혔다. 아팠던 그녀는 잠에서 벌떡 깨어났고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아파!”그녀는 눈썹을 찡그리고는 불쌍한 얼굴로 말했다.“미안!”성도윤은 자책하는 표정으로 긴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가 부딪힌 곳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 안 아파. 문지르면 안 아플 거야.”“음, 진
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그 말은, 당신 마음속에 그 사람이 성도윤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거야?”남자의 눈빛은 차가웠고, 거의 이를 악물고 분개한 듯 따져 물었다.“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한 거 아니야?”차설아는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성도윤의 뺨을 한 대 때리더니 또 고양이처럼 그를 더 꽉 껴안았다.“미스터 Q, 내 마음속에는 당신이 가장 중요해. 그러니까 당신이랑 결혼했지. 성도윤은 4년 전에 이미 마음에서 깨끗이 비워냈어...”“그 자식은 아마 당신이 인품도 좋고, 얼굴도 잘생긴 걸 질투해서 당신 얼굴을 망가뜨렸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언젠가 꼭 당신을 도와 복수할 거야!”“그래?”성도윤은 코웃음을 쳤다.“어떻게 복수할 생각인데?”“그거야 간단하지. 그 자식이 당신 얼굴을 망가뜨렸으니, 나도 그 자식 얼굴을 망가뜨려야지...”차설아는 술 트림을 하고, 손을 크게 흔들어 껄껄 웃었다.“그 자식 얼굴에 ‘나는 추남’이라고 글자를 크게 새겨야지. 하하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풉!”앞에서 운전하고 있던 진무열은 계속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복수 계획을 듣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말했다.“하하, 대표님. 저 못 들었어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닥치고 운전해.”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성도윤의 말투는 싸늘했다. 품에 안긴 여자가 술에 취해 비몽사몽 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여자에게 폭력을 가했을 것이다.진무열은 백미러를 통해 차설아를 향한 성도윤의 눈빛을 살폈다. 그야말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제야 대표님 마음속에 누가 가장 중요한지 아신 거예요?”“난 늘 내 마음을 알고 있었어. 다만 전에는 다른 것들을 신경 쓰느라 정말 나에게 중요한 걸 포기했었지. 지금은 하느님이 기회를 다시 한번 주셨으니,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여기까지 말하고 차설아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남은 생의 행복을 움켜쥔 듯
“죄송해요, 대표님. 제가 주제넘었어요. 저는 그저 대표님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쨌든 사모님은 모르고...”“이미 알고 있어. 그러니 나 믿어줄 거야.”성도윤은 당연히 지금 상황에서 임채원이 죽었다고 해도 언급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형이 가장 사랑한 여자이기 때문에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사모님 이미 진실을 아셨어요?”진무열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표정은 더욱 의혹스러웠다.“그럼 당시 대표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사모님이 지금 대표님을 이렇게까지 배척하는 거예요? 설마... 진짜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닐까요?”“아마도!”성도윤의 덤덤한 표정에 진무열은 더욱 당혹스러웠다.“이상하네요, 대표님 성격에 사모님이 다른 남자를 사랑한 걸 아셨다면 진작 뚜껑이 열리셨을 텐데 왜 이렇게 담담한 거죠? 그렇게 속이 넓은 분 아니시잖아요!”자존심이 강한 남자일수록 소유욕이 강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일편단심이기를 바란다.보통 남자도 자기 여자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평생 유아독존으로 살아오던 성도윤이 이렇게 마음이 넓다니! 너무 비정상이었다.“이 여자가 누구를 사랑하든, 마음이 움직인 남자는 결국 나 성도윤 한 명이니, 쓸데없는 질투는 하지 않아도 돼.”성도윤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그의 말에 진무열은 머리가 빙빙 돌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저 아이큐 테스트해요? 쓸데없는 질투는 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이 얘기는 그만하지.”진무열이 계속 꼬치꼬치 캐묻자 성도윤은 화제를 중단했다.워낙 감정표현에 서툰 성도윤은 차설아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당연히 드러낼 리 없었다.하지만 진무열 이 녀석이 눈치 없이 계속 캐물으니 그는 짜증이 났다.“네, 그럼 다시 임채원 씨 얘기로 돌아가죠.”진무열은 사실대로 보고했다.“사실, 임채원 씨가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한이 없다는 말까지 하는 차설아에 측은지심이 생겨난 박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차설아 씨 말고는 도련님이랑 맞는 눈이 없어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부담 갖지 마요. 이건 내가 진이한테 빚진 거니까 내가 갚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럼 내일 오전 두 분 만나게 해드릴게요.”그 말에 박서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고 그날 밤을 차설아는 뜬 눈으로 새우게 되었다.하지만 잠을 설친 건 성도윤도 마찬가지였다.차설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사도현의 말에 자신도 연락을 해봤지만 차설아는 줄곧 묵묵부답이었다.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올린 새 스토리를 확인하게 되었다.[내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너뿐이야.]해바라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을 저런 문구와 함께 올렸는데 꽃을 사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의 꽃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진심이 가득한 그 스토리를 본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나 싶었다.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 저런 자신을 올리는 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는 순간 오만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고 싶어 처음으로 그녀의 스토리에 댓글을 달았다.“너 지금 어디야?”하지만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이미 끝난 사이이니 연락을 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성도윤은 새벽 두 시에 비서에게 연락했다.“진무열, 차설아 현재 위치 알아보고 나한테 보내.”보스의 전화에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흐리멍텅했던 진무열은 눈을 비비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보스, 저는 비서지 해커가 아닙니다.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위치를 어떻게 알아냅니까?”“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아침 날 밝기 전까지 무조건 알아내.”말을 마친 성도윤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잠에 들었지만 새벽에 임무를 전달받은 진무열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래요. 그러면 이따 올릴 거니까 일단 로그인해 주세요.”’박서영이 핸드폰을 건네면서 차설아더러 자기 SNS 계정에 로그인하라고 했다.핸드폰을 받아쥔 차설아는 매우 협조적으로 SNS 계정에 로그인했다.구조를 요청할 기회는 많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박서영도 차설아가 진심으로 속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차 믿게 되었고, 다소 놀라면서 말했다.“생각보다 자기 눈을 내놓을 만큼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군요. 그래서 저희 도련님이 당신을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거군요.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저에게 주는 칭찬이에요?”차설아가 박서영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남에게 빚지는 것을 싫어할 뿐이에요.”“저희 도련님께서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도련님이 계속 바보 같이 지내는 것을 두고볼수 없어요. 박서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고통은 결국 도련님만 겪는 거잖아요? 이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는 도련님께서 좀 더 냉정해져서 설아 씨를 곁에 뒀으면 좋겠어요.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연애의 신 같은 건 도련님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박서영은 어릴 적부터 성진 부모의 교육을 받아 성진 한 사람만을 위해 헌신하며, 성진을 위해 무조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성진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중에서 배회하는 사람이었다.이런 사람은 완전히 흑화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착한 모습을 보이면 끝없는 심연에 빠질 뿐이다.이번에는 박서영이 한눈파는 사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박서영은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때 냉혹하고 교활하며 결단력 있는 성진이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다.차설아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박서영에게 물었다.“그동안 성진은 어떻게 지냈나요?”“시각장애인이 뭘 어떻게 지냈겠어요.”박서영은 고개를 저으며
박서영은 그녀를 믿지 못하겠는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말 기꺼이 두 눈을 내놓을 생각이 있으신가요?”그녀는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분명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제가 성진한테 빚진 걸 갚는 거예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어요.”차설아가 말했다.“저를 못 믿겠다면 제가 무사하다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 없어요. 다만 그때 가서 일이 커지면 알아서 처리하세요.”거짓말할 마음도 없는 차설아는 진심으로 이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항상 성진의 헌신 덕분에 남의 인생을 도둑질한 것처럼 느꼈고, 가끔 즐거울 때도 불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다.이 기간에 성진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이 남자가 어떤 어둠 속에 처해있을지, 어떤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원수의 손에 잡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마치 비수처럼 심장에 꽂혀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차설아는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빚을 한 번에 갚고 싶어 했고, 그렇게 되면 그나마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럼 어떤 방법으로 무사하다고 전할 건데요?”박서영은 차설아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여전히 경계하는 어조로 물었다.“SNS에 올리면 되죠.”차설아가 웃으면서 말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위험에 처했을 때 SNS를 올릴 마음이 있겠어요? 제가 SNS를 올려버리면 적어도 제가 안전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SNS만 올리게요?”박서영은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SNS면 충분해요.”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차성철도, 배경윤도, 선우 시원도 각자 바빴기 때문에 그녀를 신경쓸 새도 없었다.이럴 때 SNS를 올리면 최소한 무사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좋아요. SNS 올리는 것만은 허락해 줄게요.”박서영이 여러 번 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