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는 처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차설아가 성도윤을 잘 ‘교육’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따가 너무 폭력적인 장면이라 어린 애들이 보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니, 원이는 그제야 달이를 끌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방을 나섰다.아이들이 떠난 후, 두 사람은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성도윤은 차갑게 명령했다.“당장 이거 안 풀어?”“싫어!”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단번에 거절했다.“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이따가 날 죽이겠다고 하는데, 그런 당신을 풀어주면 난 바보 아니야?”“...”성도윤은 말문이 막혔다.“당신 여장한 모습 꽤 예쁘네? 진짜 여자라고 해도 믿겠어. 혹시 진짜 여자가 될 의향이 있다면 태국 가서 수술받아 봐!”“부드러운 피부, 좁은 허리, 긴 다리까지, 얼마나 매력적이야. 내가 남자라도 마음을 빼앗기겠어.”차설아는 변태처럼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그의 허리를 툭툭 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촉감도 탁월해!”참다못한 성도윤은 온 힘을 다해 밧줄을 벗어던졌고, 벼락같은 기세로 차설아를 와락 끌어당겼다.“멋대로 만지니까 좋아?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 알지?”“어떻게...”차설아는 그가 밧줄에서 벗어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고 보니, 이미 남자의 손아귀에 들어가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당신 촉감도 나쁘지 않네!”성도윤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여자의 모습을 본떠서 마음대로 더듬었다.“나쁜 놈. 성도윤 이 변태. 이거 놔!”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이미 목까지 빨개졌다.원래 성도윤의 몸에 민감한 차설아는, 그가 만지기까지 하니... 견디기 어려웠다.‘안돼, 안돼, 차설아 진정해야 해. 정신 차려! 이러다 이 녀석한테 무슨 놀림을 당하려고!’“말해, 두 아이 어떻게 된 거야?”성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정곡을 찔린 차설아는 곧바로 준비태세에 돌입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뭐가?”“몰래 아이를 낳으려고 4년 동안 사라진 거야? 그것도 나 성도윤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차설아는 아예 큰소리쳤다.“친자 검사하면 뭐? 당신 아이라고 하면 뭐 어쩔 건데? 두 아이에게 다른 맘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난 목숨 걸고 싸울 거야!”“드디어 인정하는 거야?”성도윤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음산한 눈동자로 냉담하게 말했다.“제멋대로군. 감히 나 성도윤의 아이를 훔쳤으니 당연히 목숨 걸고 싸워야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당신 목숨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두 아이가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자기 엄마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더군...”남자의 표정을 본 차설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전쟁은 이미 선포되었고, 이미 4년 전에 매설된 지뢰가 폭발 직전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절대 두렵지 않았다!“성도윤,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 원하는 게 뭐야?”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쯧쯧!”성도윤은 손을 내저으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난 사실 내 아이라는 걸 몰랐어. 당신이랑 부부의 일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아이가 생겼으니, 내가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살았나 싶어.”“성도윤, 어디서 시치미를 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인정할 용기는 없는 거야?”차설아는 마음속으로 4년 동안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당신 형 장례식 날 밤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어?”“형 장례식 날 밤?”성도윤의 표정이 사그라들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회상했다.어렴풋이 그날 밤에 차설아와 많은 술을 마시고, 후에 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다시 일어났을 때, 옷차림도 단정했고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설마, 그날 밤 당신이랑...”“내가 왜 당신을 그토록 미워하고, 평생 용서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차갑게 웃었다.“나는 그때 당신과 하룻밤을 보내고, 드디어 우리가 진정한 부부로 되는 줄 알았어. 당신이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날 사
“나중에 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 그런데 막장인 건, 임채원도 임신했다네? 당신은 아이의 출생을 기대하며 임채원을 극진히 보살피면서, 나에겐 얼마나 차가웠는지 알아? 나는 그때 당신이 너무 미웠어!”“아이를 지우고 싶었지만, 의사 선생님이 이란성 쌍둥이라고 하셨어. 임신할 확률도 낮고, 버젓이 살아 있는 두 생명을 난 도저히 지울 수 없었어!”차설아가 눈을 감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줄곧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회억할 용기가 없었다. 마치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조심하지 않아 건드리게 되면 송곳니가 되어 마음을 쿡쿡 찔렀다.다시는 엉망진창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도윤과 끝까지 싸울 것이다!“그래서 몰래 아이를 낳은 거야? 애들이 이렇게 컸는데도 나한테 한 번도 알려줄 생각은 안 했어?”성도윤 역시 빨개진 눈가로 차설아를 향해 물었다.아이의 아버지로서,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4년을 놓친 성도윤의 손실은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까?“하하, 당신에게 알려줘?”차설아는 차갑게 웃었다.“임채원이랑 그렇게 깨가 쏟아지는데 갑자기 두 아이가 튀어나오면, 과연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받아들인다고 해도, 아이 친엄마인 나를 내쫓고 임채원을 새엄마로 삼았겠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내가 왜 해?”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그렇게 처리하고도 남을 인간이라 생각했다.당시는 그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설아는 요 몇 년 계속 힘을 키운 것이다.오늘날, 그를 백 프로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그와 싸울 용기는 생겼다!“바보?”성도윤은 그녀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 어깨를 움켜쥐더니 깊은 눈으로 여자를 주시했다.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맞아, 당신은 바보야. 아주 잘난 체하는 미련한 여자지.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는 바보!”남자는 점점 감정이 격해졌고, 그의 표정에는 미움인지 원망
침묵이 흘렀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공기 중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러니까... 임채원이 임신한 아이가, 당신 핏줄이 아니라는 거야? 두 사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야?”차설아는 너무 놀라 한참이나 목이 메더니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성도윤이 왜 하필 임채원처럼 가식적인 여자를 철석같이 좋아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차설아는 아주 많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이건 전혀 예상 밖이었다!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음산했다. 그는 이 상황이 어이없고 또 허탈했다.“내가 임채원 같은 여자를 좋아할 취향으로 보여?”“당신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차설아는 두 팔을 껴안고 비꼬았다.“남자들은 툭 건드리면 바로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하고 예쁜 여자를 제일 좋아하지 않아? 중국 소설 중의 임대옥과 같은 캐릭터 말이야. 애교 한 방이면 바로 무너지잖아?”“임대옥을 모욕하지 마.”성도윤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임대옥은 적어도 주견이 있고 재능도 있는 캐릭터야. 임대옥으로 표현하는 건 좀 과분하지 않아?”남자의 반박에 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희열을 느꼈고, 심지어 웃음까지 났다.그녀는 애써 웃음을 꾹 참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켁, 그럼 임채원은 누구를 닮았는데?”“연약하긴 한데 머릿속에 꿍꿍이가 너무 많아.”차설아의 얼굴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갑자기 슬프고 어이없어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당신도 임채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는 거야?”“자신만의 고충이 있는 사람이야. 형이 그러는데, 어릴 때 불행한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했어.”성도윤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형 때문에 그는 항상 임채원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욕심이 많긴 하지만, 그녀가 성장한 환경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살려고 하는 것, 더 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까.임채원이 겉으로는 연약한 척하며 뒤에서 온갖 수단을 부리는 것도, 그저 잘 살기 위함이었다.성도윤은 형과 임채원을 잘 돌보겠다고
성도윤이 임채원을 무조건적으로 감싸는 바람에, 차설아는 혼자 아이를 낳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다른 정상 가정의 아이들처럼 부성애를 누릴 수 없었다.“채원이 건드리지 마!”성도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이미 충분히 벌 받았으니까, 그만해도 돼.”“당신이 충분하다면 충분한 거야? 그럼 내가 받은 상처는? 아이들이 입은 상처는? 왜 내 앞에만 오면 사람이 관대해지는 건데?”차설아는 결코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그녀를 괴롭히면 반드시 두 배로 갚아주어야 했다.만약 그때 아이를 임신해 서둘러 해을 떠나 해바라기 섬으로 가지 않았다면, 차설아는 절대 임채원을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내가 최대한 당신과 아이들에게 보상할게.”성도윤은 단호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당신과 내가 다시 시작한다면, 분명 좋은 미래가 열릴 거야.”“누가 당신이랑 미래를 함께하고 싶대? 우리 사이에 미래 따위는 없어!”차설아는 또 한 번 성도윤을 거절했다.꽃병에 한 번 금이 가면 이미 결과는 정해진 것으로, 아무리 노력해서 보완한다고 해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차설아는 자신을 설득할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 싫어하는 남자와 연기를 하며,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차가운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그녀는 그저 평범한 생활을 원했다. 서로 돕고 보살피며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생활. 마치... 미스터 Q 같은 사람과 말이다!“진짜 그렇게 생각해?”성도윤의 얼굴에는 쉽게 보아낼 수 없는 상처가 비치더니, 눈동자가 점점 차가워지고 위태로워지며, 최후 통보를 내렸다.“그렇다면, 두 가지 선택지를 주지...”“첫째, 나랑 결혼해서 네 식구가 잘 살아보는 거야.”“둘째, 두 아이는 내가 키워. 당신은 아이들 인생에서 사라지는 거.”차설아는 그의 말이 허세가 들어간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차갑게 웃더니 말했다.
“아니거든요!”원이는 성도윤의 심기를 제대로 긁으려고 비수를 꽂았다.“우리 엄마는 아저씨를 너무 싫어해서 상대하기도 귀찮아해요. 아저씨가 나쁜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우리가 조금만 조사하니 바로 나오던데요?”차설아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성도윤이 원이에 대한 인상이 너무 나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원아, 이렇게 버릇없이 굴면 안 돼.”‘그래도 네 아버지잖아!’라는 뜻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엄마, 제가 언제 버릇없이 굴었어요? 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이 나쁜 놈이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어요? 이 사람만 아니었다면 엄마도 그렇게 고생할 필요 없잖아요!”“나쁜 짓을 했으면, 모두에게 미움받는 결과를 감수해야죠. 제가 이 나쁜 놈을 싫어하는 건 도리에 전혀 어긋나지 않아요.”“미스터 Q 좀 봐요, 얼마나 좋아요. 엄마에게도, 저희에게도 잘해주고, 매일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어야 우리 사랑과 예의를 받을 자격이 있죠.”원이의 논리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했다.차설아가 이마를 짚고는, 제발 성도윤이 자애로움을 베풀어, 아이에게 화내지 않기를 빌었다.성도윤의 차가운 눈동자는 원이를 한참이나 지그시 바라보더니,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아주 훌륭해. 내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역시 내 유전자는 대단하다니까.”차설아와 원이는 어리둥절했다.성도윤은 손을 내밀어 원이의 뽀송뽀송한 머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나랑 성씨 가문으로 가서, 내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나의 뒤를 잇는 차세대 왕이 되지 않을래?”원이는 오만불손한 태도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가 그쪽이랑 성씨 가문으로 가요? 누가 그쪽 교육을 받으며 차세대 왕이 되고 싶대요? 차세대 나쁜 놈만 아니어도 다행이지!”“열혈 애니메이션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아저씨 중2병 걸린 거 가족분들은 아세요?”성도윤의 손은 허공에 뻣뻣하게 얼었고, 얼굴도 굳어지더니 한참 후에야 애써 말했다.“역시 훌륭해. 나에 버금가는 독설 능
토끼도 급하면 사람을 문다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상대는 사람을 잡아먹고 뼈도 뱉지 않는 슈퍼 맹수이니, 차설아는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했다.원이와 달이도 성도윤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감지하고, 재빨리 그의 옷과 바지를 꺼내 성도윤의 손에 쥐여주었다.“이번에는 이쯤에서 봐줄게요. 다음번에 또 우리 손에 잡히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줄 알아요.”원이는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너희들도 기억해. 다음번에는 진짜 아빠가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줄게!”성도윤도 카리스마 넘치게 독설을 내뱉고는, 하이힐을 신은 채로 옷을 안고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푸하하하!”차설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작게 웃던 데로부터 시작해 큰소리로 웃었다.그녀의 방자한 웃음소리는 건물 전체를 꿰뚫을 기세였다.지난 몇 년 동안, 그녀가 본 성도윤은 늘 고상하고 빈틈없이 우아한 모습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낭패한 꼴을 보았으니, 일종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었다.역시, 성도윤을 다스릴 수 있는 건 리틀 성도윤뿐이었다. “너희들, 엄마가 이번에는 이대로 넘어가지만, 절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돼. 저 안에 있는 놈이 미치면 악마보다 더 무서워. 그러다 진짜 화나기라도 하면 너희 둘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해. 알겠어?”차설아는 실컷 웃은 후, 심각한 표정으로 원이와 달이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교육했다.그러자 달이가 말했다.“하지만 엄마, 나쁜 아빠 성격 꽤 좋아 보이는데요? 저희가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화내지 않잖아요? 마치... 우리가 해준 스타일링을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혹시 속으로 좋아하는 건 아닐까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노파심에 말했다.“아니, 쉽게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맹수라서 그래. 화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화가 치밀어 올라 어떻게 복수할지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며 안돼.”달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반짝였다.“그렇다면, 우리 차라리 전략을
“엄마는 늘 우리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잖아요. 만약 나쁜 아빠가 이미 잘못을 뉘우쳤다면, 우리는 왜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주지 않는 거죠?”“우리가 잘해주면, 아빠도 우리에게 잘해 줄 거예요. 우리가 괴롭히면, 똑같이 우리를 괴롭히겠죠. 그럼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또 한 명 늘어나도록, 아빠에게 잘해주면 안 돼요?”달이는 논리정연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어릴 때부터 달이는 원이의 1호 팬이었고,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다.그래서 차설아는, 만약 언젠가 원이가 사람을 죽였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칼을 건넨 사람은 분명 달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하지만, 지금 이 두 녀석은 성도윤 때문에 아주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음, 그게. 너희 둘...”차설아는 옆에서 듣다가, 두 녀석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런 장면은 처음이었느니 말이다.“달아, 네 생각은 문제가 있어.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이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나쁜 놈에게 마음이 약해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아니야, 만약 누구든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왜 선생님이 있고 왜 경찰이 있는 건데?”원이도 처음으로 달이가 이렇게 고집부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차설아를 전쟁터로 끌어들였다.“엄마가 좀 말해봐요. 저랑 달이, 누구 말이 맞아요? 아니면... 우리는 그 나쁜 아빠를 용서해야 하나요?”“글쎄...”차설아는 턱을 쥐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두 아이에게 상처도 주지 않으면서 갈등도 풀 수 있을까?“엄마는 말이야. 우리가 강해져야 하는 것도 맞고, 관대해야 하는 것도 틀리지 않은 것 같아. 그 정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아주 나쁜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면 안 되고, 착한 사람에게는 기회를 줘야겠지? 그래서...”“그러니까, 나쁜 아빠의 행동에 달렸다는 거죠?”원이는 단번에 차설아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그는 마치 애늙은이처럼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말도 일리가 있어요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