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 야비한 자식!”차설아는 바람이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고, 빙빙 돌려 말하기 귀찮았다.“말해봐.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들어줄 테니까.”“나랑 결혼해줘!”바람은 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꿈 깨!”차설아는 생각지도 않고 단번에 거절했다.바람이 이렇게 뻔뻔한 요구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녀가 거절한 것도 당연히 처음이 아니다.여러 번 경험하고 나니, 차설아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없었고, 그저 바람이 매를 번다고 생각했다.“거절할 줄 알았어.”바람은 가슴을 움켜쥐더니 상처 입은 척했다.여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차갑게 말했다.“계속 이렇게 미친 짓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대체 원하는 게 뭐야. 핵심을 말하라고!”“그래, 알겠어. 무서워죽겠네. 마귀할멈...”바람은 순간 웃음기를 거두더니 모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천신 그룹의 지분 20%를 원해.”“뭐? 20%?”차설아는 화가 나서 목이 쉴 정도였다. 아름다운 얼굴은 이내 잔뜩 일그러졌다.“20% 지분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해?”“나를 제외하고 최대 주주가 되는 거야.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차라리 뺏어가지 그래?”“일단 흥분하지 마. 얼굴 삐뚤어진 것 봐. 술부터 마시고 화 좀 풀어.”바람은 침착하게 와인잔을 들고 차설아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고는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공짜로 달라는 거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돈이 넘쳐흐르잖아? 그런데 천신 그룹은 마침 자금이 부족하고...”“너만 원한다면 시가의 다섯 배로 20% 지분을 인수할 생각이야. 너 절대 손해 보게 만들지 않아.”그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표정이 좀 누그러졌다.“아, 공짜로 달라는 거 아니었어? 그럼 진작 말하지. 난 그 땅값으로 지분을 달라고 하는 줄 알았지.”“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여?”“응!”차설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적어도 선우 가문은 지금까지 원하는 것을 강압적으로 빼앗
바람의 예쁜 눈은 어두워지더니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다시 거들먹거리며 비꼬듯 말했다.“뭐가 두려운 거야? 고기를 입가에 갖다 줘도 못 먹어? 안심하고 그냥 먹어. 오늘 다 못 먹으면 내일 먹고, 내일 다 못 먹으면 모레 먹으면 되지. 언젠가 소화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굶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그 말은 듣기 좀 거북하네. 천신 그룹은 잘 나가고 있는데 누가 굶는대?”“배가 고픈지 아닌지는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파트너 배경수가 구멍을 메우기 위해 하마터면 배씨 가문까지 날릴 뻔했잖아. 지금의 천신 그룹은 낡은 차량처럼 동력도 부족하고 용병도 없으니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없...”“모두 일시적인 거야! 네가... 네가 뭘 알아?”차설아는 바람을 나무랐지만 사실이었다.천신 그룹의 재무 상황은 확실히 어려웠다. 비록 전도가 유망하지만, 그의 말대로 낡은 차로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문제였다.“차설아, 나 똑똑히 봐...”바람은 모처럼 진지한 얼굴로 여자를 보며 약속했다.“세상 사람 다 못 믿어도, 난 믿어. 난 우리 할아버지 명령으로 차씨 가문의 재기를 돕고 있는 거야.”“할아버지의 뜻이라고?”차설아는 좀 뜻밖이었다.“아니면 누구 뜻이겠어?”바람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너도 알다시피 난 사업할 재목이 아니야. 어두운 방에서 코드 짜는 거나 좋아하지. 만약 할아버지께서 차씨 가문과 네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도와서 난관을 극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난 절대 이쪽에 발도 안 들였어. 이 시간에 프로그램이나 연구하고 있겠지.”“얼마나 많은 사람이 차씨 저택 부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줄 알아? 할아버지께서 그 땅은 차씨 가문에게 의미가 남다르니 반드시 따내서 너 대신 잘 지켜주라고 하셨어. 우리 가문이 나서지 않았다면 조인성이 퍽이나 양보했겠다.”“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을 지켜주셨구나!”놀랍고 또 감동한 차설아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4년 전에 내가 어르신을 속여
차설아는 계약서를 들고 고민에 빠져 집으로 돌아왔다.여느 때와는 달리 진작 마중 나왔어야 할 두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쥐죽은 듯 조용했다.“얘들아, 어디 갔어? 달아, 원아, 엄마 돌아왔어. 대체 어디 간 거야? 엄마 안 보고 싶어?”그녀는 들어오면서 불을 켰지만, 거실은 텅 비었고 아무도 없었다.이상하게 생각한 차설아는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두 녀석은 갑자기 그들의 방에서 뛰쳐나오더니 쌍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껴안았다.“엄마, 돌아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제가 어깨랑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원이와 달이는 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듯, 차설아를 아름답다고 칭찬하더니 또 마사지를 해주느라 바빴다.차설아는 눈을 감고 즐기며 말했다.“음, 아주 시원해. 너희들 덕분에 하루 피로가 다 가시는 것 같아.”그녀가 말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가려고 하자, 두 아이는 계속 엄마의 허벅지를 껴안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 같았다.“엄마, 시원하면 제가 더 주물러 드릴게요!”“엄마, 배고프지 않아요? 제가 디저트 갖다 드릴게요!”“엄마, 소파에서 TV 좀 보면서 쉬세요!”똑똑한 차설아는 금세 이상함을 눈치챘다.“너희 둘, 나쁜 일이라도 꾸민 거야? 그래서 엄마가 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거지?”차설아는 정색하고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그게...”거짓말을 못 하는 달이는, 예쁜 눈으로 계속 그녀의 뒤쪽 침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분명 찔리는 것이 있었고, 당장이라도 실토할 기세였다.하지만 원이는 시종일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랑 달이가 얼마나 착한데 나쁜 일을 꾸미겠어요?”“착하다고? 난 전혀 모르겠는데?”차설아는 지금, 이 두 녀석이 분명 무슨 일을 꾸몄고, 스케일이 꽤 크다는 것을 백 프로 확신할 수 있었다.이전의 경험으로 볼 때, 두 아이의 능력으로 하늘을 뒤집었다고 해도 차설아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그래요. 엄마는 속일 수 없겠어요...”원이는 손을 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엄마
침대 위에는 하이힐을 신고, 가발을 쓰고, 비키니를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남자가 묶여 누워있었다.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남자는 다름 아닌 성대 그룹의 대표 성도윤이라는 것이다!“맙소사,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거 환각인가?”차설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인 장면이라 놀라 자빠질 뻔했다.“엄마, 맘에 들어요?”원이는 약 5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성과를 자랑했다.“저랑 달이가 밤새 분장을 한 결과물이에요. 여자를 괴롭히는 나쁜 놈이니까, 여자로 변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줘야죠!”“인터넷에서 분만 체험기도 주문했어요. 이따가 애를 낳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느끼게 해줄 거예요...”“엄마를 그렇게 고생시켰으니, 나쁜 놈도 쓴맛을 봐야죠!”차설아는 빠르게 뛰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너희들... 진짜!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그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겨왔던 두 아이는 이렇게 노출되었다.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끈한 방식으로 신고식을 치렀다.성도윤의 성격으로, 어떻게 이런 수모와 농락을 견딜 수 있을까?남자가 끝까지 추궁하려 든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차설아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런데 왜 누워서 안 움직이는 거야? 잠들었어? 아니면...”차설아가 다가가 성도윤을 밀었지만, 그는 죽은 돼지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저희가 수면제를 먹였더니 곤히 자고 있어요!”원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케이크에 넣은 수면제는 치명적이지 않지만 한동안 잠을 잘 수 있게 해준다.“뭐라고?”차설아는 하마터면 화나 죽을 뻔했다.“차진원, 너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감히 약을 타? 너 이러다가 살인 방화까지 저지르는 거 아니야?”“안 되겠다. 너 오늘 제대로 혼나야겠어. 아니면 나중에 경찰과 사회가 널 교육할 거야!”화가 치밀어오른 차설아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자를 들고 원이를 처벌하려 했다.“손 내밀어!”차설아는 높은 소리로 명령했다.“싫어요!”고집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하던 방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깨... 깨났어?”차설아는 침을 꿀꺽 삼켰고, 자는 허공에 든 채로 감히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네, 깬 것 같아요. 눈을 엄청나게 크게 뜨고 있어요.”달이는 성도윤의 옆에 엎드려 유심히 관찰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하하하하...”차설아는 할 수 없이 돌아섰고, 성도윤과 시선이 마주치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물었다.“깼어? 느낌이... 어때?”성도윤은 짙은 화장에 여자 옷을 입고 요염한 모습이었지만, 눈매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강하고 무서웠다.그는 얇은 입술을 움직이더니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어때 보여?”“그게...”차설아는 마른기침을 하고 전전긍긍해서 말했다.“내 생각에 당신 속으로는 엄청 후련할 것 같아. 당신 성적 취향이 정상이 아니고, 남자친구도 여러 명 있다는 소문이 있잖아? 그래서 속으로는 진작 여자로 되는 모습을 상상한 거 아니야? 진한 화장을 하고, 탱크톱을 입고, 스타킹을 신고, 그리고 하이힐까지...”“차설아!”성도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만약 이 두 녀석이 그에게 물리적 침해를 입혔다면, 차설아의 말은 치명타로 성도윤을 바로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는 정도였다.“기다려. 나 절대 당신 용서 안 해!”성도윤은 성난 맹수처럼 당장이라도 차설아에게 달려들 기세였다.하지만, 손발이 모두 침대 프레임에 묶여 대자로 뻗은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차설아는 원래 무서웠지만, 궁지에 몰린 짐승 같은 성도윤의 억울한 모습에 여장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당... 당신, 너무 안 됐잖아. 성인 남성이 두 아이에게 붙잡혀 이 꼴이 됐으니. 웃겨 죽겠네!”“닥쳐. 웃지 마!”성도윤은 더욱 화가 치밀었고, 벗어나려고 더 세게 몸부림쳤다.열정적인 레드립을 하고 스타킹을 신은 긴 다리로 이리저리 뒤척이는 성도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차설아는 더욱
원이는 처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차설아가 성도윤을 잘 ‘교육’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따가 너무 폭력적인 장면이라 어린 애들이 보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니, 원이는 그제야 달이를 끌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방을 나섰다.아이들이 떠난 후, 두 사람은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성도윤은 차갑게 명령했다.“당장 이거 안 풀어?”“싫어!”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단번에 거절했다.“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이따가 날 죽이겠다고 하는데, 그런 당신을 풀어주면 난 바보 아니야?”“...”성도윤은 말문이 막혔다.“당신 여장한 모습 꽤 예쁘네? 진짜 여자라고 해도 믿겠어. 혹시 진짜 여자가 될 의향이 있다면 태국 가서 수술받아 봐!”“부드러운 피부, 좁은 허리, 긴 다리까지, 얼마나 매력적이야. 내가 남자라도 마음을 빼앗기겠어.”차설아는 변태처럼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그의 허리를 툭툭 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촉감도 탁월해!”참다못한 성도윤은 온 힘을 다해 밧줄을 벗어던졌고, 벼락같은 기세로 차설아를 와락 끌어당겼다.“멋대로 만지니까 좋아?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 알지?”“어떻게...”차설아는 그가 밧줄에서 벗어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고 보니, 이미 남자의 손아귀에 들어가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당신 촉감도 나쁘지 않네!”성도윤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여자의 모습을 본떠서 마음대로 더듬었다.“나쁜 놈. 성도윤 이 변태. 이거 놔!”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이미 목까지 빨개졌다.원래 성도윤의 몸에 민감한 차설아는, 그가 만지기까지 하니... 견디기 어려웠다.‘안돼, 안돼, 차설아 진정해야 해. 정신 차려! 이러다 이 녀석한테 무슨 놀림을 당하려고!’“말해, 두 아이 어떻게 된 거야?”성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정곡을 찔린 차설아는 곧바로 준비태세에 돌입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뭐가?”“몰래 아이를 낳으려고 4년 동안 사라진 거야? 그것도 나 성도윤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차설아는 아예 큰소리쳤다.“친자 검사하면 뭐? 당신 아이라고 하면 뭐 어쩔 건데? 두 아이에게 다른 맘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난 목숨 걸고 싸울 거야!”“드디어 인정하는 거야?”성도윤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음산한 눈동자로 냉담하게 말했다.“제멋대로군. 감히 나 성도윤의 아이를 훔쳤으니 당연히 목숨 걸고 싸워야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당신 목숨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두 아이가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자기 엄마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더군...”남자의 표정을 본 차설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전쟁은 이미 선포되었고, 이미 4년 전에 매설된 지뢰가 폭발 직전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절대 두렵지 않았다!“성도윤,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 원하는 게 뭐야?”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쯧쯧!”성도윤은 손을 내저으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난 사실 내 아이라는 걸 몰랐어. 당신이랑 부부의 일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아이가 생겼으니, 내가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살았나 싶어.”“성도윤, 어디서 시치미를 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인정할 용기는 없는 거야?”차설아는 마음속으로 4년 동안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당신 형 장례식 날 밤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어?”“형 장례식 날 밤?”성도윤의 표정이 사그라들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회상했다.어렴풋이 그날 밤에 차설아와 많은 술을 마시고, 후에 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다시 일어났을 때, 옷차림도 단정했고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설마, 그날 밤 당신이랑...”“내가 왜 당신을 그토록 미워하고, 평생 용서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차갑게 웃었다.“나는 그때 당신과 하룻밤을 보내고, 드디어 우리가 진정한 부부로 되는 줄 알았어. 당신이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날 사
“나중에 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 그런데 막장인 건, 임채원도 임신했다네? 당신은 아이의 출생을 기대하며 임채원을 극진히 보살피면서, 나에겐 얼마나 차가웠는지 알아? 나는 그때 당신이 너무 미웠어!”“아이를 지우고 싶었지만, 의사 선생님이 이란성 쌍둥이라고 하셨어. 임신할 확률도 낮고, 버젓이 살아 있는 두 생명을 난 도저히 지울 수 없었어!”차설아가 눈을 감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줄곧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회억할 용기가 없었다. 마치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조심하지 않아 건드리게 되면 송곳니가 되어 마음을 쿡쿡 찔렀다.다시는 엉망진창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도윤과 끝까지 싸울 것이다!“그래서 몰래 아이를 낳은 거야? 애들이 이렇게 컸는데도 나한테 한 번도 알려줄 생각은 안 했어?”성도윤 역시 빨개진 눈가로 차설아를 향해 물었다.아이의 아버지로서,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4년을 놓친 성도윤의 손실은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까?“하하, 당신에게 알려줘?”차설아는 차갑게 웃었다.“임채원이랑 그렇게 깨가 쏟아지는데 갑자기 두 아이가 튀어나오면, 과연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받아들인다고 해도, 아이 친엄마인 나를 내쫓고 임채원을 새엄마로 삼았겠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내가 왜 해?”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그렇게 처리하고도 남을 인간이라 생각했다.당시는 그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설아는 요 몇 년 계속 힘을 키운 것이다.오늘날, 그를 백 프로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그와 싸울 용기는 생겼다!“바보?”성도윤은 그녀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 어깨를 움켜쥐더니 깊은 눈으로 여자를 주시했다.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맞아, 당신은 바보야. 아주 잘난 체하는 미련한 여자지.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는 바보!”남자는 점점 감정이 격해졌고, 그의 표정에는 미움인지 원망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