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를 떠난 차설아는 집으로 돌아갔다.차설아가 집에 막 도착했을 때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받아보니 뜻밖에도 임채원이었다.임채원은 이왕의 오만함과 안하무인의 태도를 버리고 아주 상냥한 말투였다.“설아 씨, 내가 요즘 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설아 씨 물건이 아직 있더라고. 미안하지만 오늘 시간 되면 가지러 올래?” ‘임채원이 언제 이렇게 친절했지?’차설아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또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누가 알겠는가?하지만 차설아는 물러서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좋아, 오늘 갈게.”저번에 급하게 나오느라 확실히 중요한 물건들을 챙기지 못했었다.임채원이 전화를 하지 않았어도 시간을 내서 별장으로 가려고 했었다.저녁 8시쯤 차설아는 택시를 타고 성가 별장으로 향했다.성가 별장의 도우미는 원래 여주인이 돌아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권세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차설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별장 문으로 들어갔다.차설아가 4년 동안 머물렀던 이곳, 그녀가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아쉽게도... 사람이 변했다.차설아는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슬퍼졌다.‘흥, 4년의 청춘을 이런 귀신 같은 곳에서 낭비했다니, 정말 재수 없군!’호화로운 별장 홀은 유난히 떠들썩했다.새 주인 임채원뿐만 아니라 소이서, 그리고 소이서의 남자친구 육장훈도 있었다.차설아가 들어오자, 임채원는 여주인의 모습으로 반갑게 맞이했다.“설아 씨 왔어? 마침 설아 씨 얘기하고 있었어.”차설아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내 물건은?”차설아는 자기의 물건을 챙기러 온 것이다. 물건만 가지고 바로 떠나면 되지 여기서 그녀의 가식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없다.“물건은 설아 씨 원래 방에 있어. 내가 도우미들한테 언제든지 가져갈 수 있게 챙겨놓으라고 했어.”“고마워.”차설아는 회전계단으로 향했다.임채원은 차설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밥 먹고 갈래?”“밥을 먹어?”차설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임채원을
임채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아직은 법적 아내인데 그건 좀 심하지 않을까?”소이서는 임채원의 팔짱을 끼고 대신해서 불평했다.“언니, 왜 그렇게 착해빠졌어요? 저번 자선행사에서 저년이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데요? 좀 혼내줘야 하지 않겠어요?”“방금 간지러워 미치겠어하는 모습 못 봤어요? 제가 선뜻 남자친구까지 빌려줬는데, 오히려 나중에 저한테 감사해야죠!”“어쨌든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책임져요.”“이서야, 나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마워.”임채원은 겉으로는 감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소이서를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비웃었다. ‘총받이로 쓰이는 주제에 목숨까지 바치다니!’얼마 후 성도윤이 별장에 도착했다. 큰 덩치에서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어디 있어?”성도윤은 넓은 별장 홀을 차갑게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임채원은 나서서 난처한 척하며 우물쭈물 말했다. “도윤 씨, 설아 씨는 위층에 있어. 장훈 씨랑 같이...”소이서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오빠의 그 현모양처 마누라가 나랑 채원 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내 남자친구를 꼬셔 침대에 올라갔어요!”소이서는 말을 마치고 재빨리 성도윤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성도윤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들이 차설아의 옛 침실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야릇한 소리가 들려왔다.임채원은 능청스럽게 문을 열려 했지만 안에서 잠겨 있었다.“도윤 씨, 안에서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아...”성도윤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되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쾅”하는 소리와 함께 성도윤은 발로 문을 걷어 찼다.하지만 안의 장면을 본 그들은 멍해졌다.침실 안에서는 눈빛이 흐트러진 채 바닥에 엎드려 곰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육장훈의 동작이 매우 용속했다.“이쁜이, 이쁜이...”한편 차설아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촬영을 하
차설아는 몸부림치며 그를 밀어냈다.“성도윤, 당신 미쳤어!”‘왜 다른 사람의 고상한 흥취를 방해하는 거야?’“어린이는 보면 안 돼!”성도윤은 아직 순수한 차설아가 나쁜 것을 배울까 봐 걱정하는 아버지처럼 보였다. 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나도 알 만큼 알 거든?”“그래? 그럼 말해봐. 어느 만큼 아는데?”성도윤의 차가운 얼굴에는 이미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의 노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약간재밌다는 표정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차설아는 그날 밤 성도윤과의 야릇한 모습이 금세 머리에 떠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볼이 붉어졌다.이 수줍은 반응은 성도윤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차설아가 임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남자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곧이어 임채원도 난처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서둘러 발뺌했다.“설아 씨 괜찮아? 나도 장훈이가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어. 둘이 안에 꽤 오래 갇혀 있었는데, 설마 설아 씨한테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지?”이건 분명 차설아를 궁지에 모는 질문이다. 두 청춘남녀가 한 방에 있었고, 게다가 남자가 저 상태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믿기 어려울 것이다.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만약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면 넌 실망하겠지?”“방금 나한테 준 술잔에 뭔가를 듬뿍 넣었잖아.”차설아의 말에 임채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설아 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그저 사과의 뜻으로 진심으로 술 한잔을 권하고 싶었을 뿐이야.”“일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는 나도 몰라. 술은 이서가 가져왔어. 안에 뭐가 있는지는 이서한테 물어봐봐.”“확실해? 우리 미련한 아가씨 머리에서 나올법한 수법이 아닌데?”‘배은망덕한 년! 몇 마디 말로 깨끗이 선을 그었어!’차설아는 소이서를 조금 동정했다.“설아 씨, 나 싫어하는 거 알아. 다 내 잘못이야. 이 아이를 임신해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게 아니었어. 당장 짐을 싸서 나갈게...”
방문을 연 성도윤은 약의 발작으로 소이서의 위에서 불결한 일을 하려는 육장훈을 보았다.“오빠, 빨리 나 좀 살려줘!”소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비명을 지르며 성도윤에게 도움을 청했다.비록 육장훈은 소이서의 남자친구이고, 이미 관계를 맺은 사이지만 이런 상황은 그녀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무 창피했다.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넘어 테이블 위에 있는 차설아의 물건을 가져갔다.“자업자득이야!”성도윤은 말을 남기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소이서는 너무 곱게 자라 안하무인이 되었으니 이제 혼이 날 때도 되었다.계단을 내려와 문 앞에 서 있는 차설아를 보고 성도윤은 차갑게 눈살을 찌푸렸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그러니까 네가 아직 이 별장의 주인이야.”“고맙지만 사양할게.”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에 든 물건을 건네받고 작별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나갔다.이미 밤이 깊어졌다.차설아는 별장 밖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도시와 너무 멀리 떨어진 탓에 오려는 기사가 없었다.잠시 후, 성도윤은 자신의 은색 부가티 베이런을 몰고 그녀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잘생긴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타!”초대가 아닌 명령이었다.차설아는 고민하다가 거절하지 않았다. 조수석 문을 열고 바로 차에 올라탔다.하지만 좌석에 있는 물건을 보고 차설아는 조금 놀랐다.“이건... 어디서 났어?”차에는 묘지에서 주웠던 호박 펜던트와 똑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차설아는 속으로 무언가를 예상했다.‘설마 이 자식이 오늘 우리 부모님 묘지에 갔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나?’“이 펜던트는...”“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성도윤은 쌀쌀맞게 말하더니 차가운 얼굴로 펜던트를 빼앗아 갔다.“쳇, 쪼잔하기는!”차설아는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우연이겠지. 내가 괜한 생각을 했어.’‘이 자식은 나한테 관심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 기일을 기억하고 있겠어? 굳이 꽃까지 들고 가서 제사를 지낼 리가 없잖아?’‘날 싫어하는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성도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놀았던 동생 사도현이었다.그는 성도윤의 옆에 서 있는 차설아를 보더니 더욱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대박, 다들 빨리 와서 봐. 도윤 형이 그 얌전하고 참한 마누라까지 데리고 왔어. 이건 분명 세계 10대 불가사의야. 우리 오늘 완전 운이 좋은데?”성도윤의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큰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초대받았으니 당연히 와야지.”자초지종을 잘 모르는 차설아는 얌전하고 참한 시늉을 하며 남자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어쨌든 1분에 2억 원이라는 돈을 받기로 했으니 ‘도구인’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야 했다.룸안의 인테리어는 고급스럽기 그지없었다.넓고, 럭셔리하고, 화려한데 불빛은 또 희미해서 누가 보면 황궁에 온 줄 알 것이다.소파에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모두 신분이 비범한 명문가 자식들이었다. 그중 가장 비범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 사람은 바로 중앙에 앉아 있는 남녀 한 쌍이었다.잘생긴 남자는 오똑한 콧날에 볼테 안경을 쓰고 있어 점잖아 보였지만, 좁고 깊은 두 눈동자에는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는 여유가 흘러넘쳤다.이런 여유는 분명 강력한 집안 배경에서 온 것이다.그가 착용하고 있는 은색 손목시계만 해도, 롤렉스의 한정판으로 전 세계적으로 하나만 있어 가치가 100억이 넘는다!그의 옆에 앉아 친밀한 행동을 하는 여자도 압도적이었다. 완벽한 이목구비는 아름다움을 넘어 기품과 지성이 넘쳤다. 이건 보통 명문가의 아가씨가 풍길 수 없는 분위기이다.어쨌든, 둘이 같이 앉아 있었고,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두 사람 모두 성도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윤아, 너...”여자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정이 흐르는 그녀의 큰 두 눈은 할 말이 많은 모습이었다.이에 비해 남자는 침착했고 온화하게 말했다.“드디어 화가 풀린 거야? 그래서 온 거야?”성도윤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두
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얌전하고 순진해 보이는 차설아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이렇게 완벽한 내 남편을, 대체 어느 눈이 먼 여자가 차버렸죠?”여기까지 말한 차설아는 성도윤의 팔을 다정하게 껴안으며 사랑꾼의 면모를 드러냈다.물론, 그녀의 연기에 불과했다.하지만 궁금증이 동한 차설아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역시 소파에 있는 그 분위기 있는 여자가 켕기는 듯 고개를 숙였다.강진우의 표정도 조금 어색해졌다.사도현은 소파에 있는 그 여자를 아주 의식하는 듯, 곧 차설아에게 화를 냈다.“그게 누구든 당신이랑 뭔 상관이야? 어쨌든 도윤이 형 첫사랑은 모든 면에서 당신보다 백배는 완벽해!”“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당신이랑 우리 도윤이 형은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이야. 모든 게 어울리지 않는데 염치없이 우리 형이랑 결혼해서 이 사달을 내?”강진우의 부드러운 눈빛이 약간 차갑게 변했다. 가볍지만 매우 압박감 있는 말투로 말했다.“현아, 그만해!”사도현은 유치한 아이처럼 계속 말을 이어갔다.“내 말이 틀렸어? 이 여자가 어떻게 감히 청하 누나랑 비교가 돼?”청하 누나?차설아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파에 있는 분위기 미녀가 아마 ‘청하 누나’일 것으로 추측했다.“현아, 장난 그만해. 우리 새 친구 놀라겠다.”허청하는 드디어 고개를 들더니, 성도윤과 차설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온화하게 웃었다.“윤아, 오랜만이야.”“응, 오랜만이야.”“윤아, 아직도 나랑 진우 오빠한테 화가 났어?”허청하는 눈썹을 찡그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다 나 때문이야. 그때는 철이 없어서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너희 두 사람 사이에서 허둥댔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게 했어. 그런데 오늘 네가 와줘서 너무 기뻐.”“지나간 일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 없어.”여자의 흥분한 태도와 달리 성도윤은 미적지근한 태도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이런 서먹한 느낌은 마치 두 사람
“흥, 알면 아주 깜짝 놀랄걸?”사도현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우리 청하 누나는 모범생이야. 페테르부르크 대학 알지? 청하 누나는 국보급 대학의 인기 인물이야. 그 대학에서 가장 좋은 학과인 천체물리학과를 전공했고 졸업할 때 발표한 학술 논문으로 ‘성화요원’ 대회에서 일등상을 수상했어!”“와 진짜 모범생이다. 청하 언니 대단해요!”모두 허청하를 숭배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그들이 이토록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자제들 사이에서 이공계의 모범생은 유일무이한 보물처럼 아주 희소했다.허청하는 담담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별것 아니야. 운 좋게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별것 아니기는! 엄청 대단한 거지!”사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넌 천체물리학이 뭔지는 알아?”“집에 틀어박혀서 남편 없이는 못 사는 가정주부는 아마 들어 본 적도 없을 거야!”차설아는 가볍게 웃더니 컵 속의 오렌지 주스를 흔들며 사도현의 수모를 무시했다.차설아는 허청하를 보며 물었다.“청하 언니의 그 논문이 설마 ‘천궁에 앉은 왕: 태양 복사층과 대류층의 관계에 관하여’인가요?”허청하의 눈에는 웃음이 사라지더니 약간 놀란 표정으로 차설아를 보았다.“맞아요. 혹시 설아 씨도 천체물리학을 공부했나요?”“하하하. 그럴 리가!”사도현은 하찮은 듯 말했다.“가정주부가 음식 레시피를 본다면 모를까. 그런 고급 학술 논문을 어떻게 알아보겠어?”이때, 계속 침묵을 지키던 성도윤이 담담하게 말했다.“당연히 알아보지.”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성도윤은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왜냐하면, 설아가 그 대회 익명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으니까.”“뭐?”모두 화들짝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허청하는 더욱 불가사의한 표정이었다.“설아 씨가 혹시 대회에서 가장 신비로운 심사위원 MISSC인가요?”“다 지나간 일이에요. 별것 아니에요.”차
“그게 뭐 어려운 건가요?”차설아는 사도현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휴대전화를 꺼냈다.어쩌면 차설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 허청하와 겨루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어쨌든 허청하는 성도윤의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니, 차설아도 대체 왜 그녀를 잊을 수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다.“휴대전화에 히어로즈 정상 게임 깔려있어?”여기까지 말한 사도현은 더욱 숭배하는 시선으로 허청하를 보며 말했다.“우리 청하 누나는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게임도 잘해. 히어로즈 정상은 전 세계를 휩쓴 모바일 게임이잖아. 누나는 아시아 지역의 서열 3위야!”차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대단해요?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요?”“게임도 할 줄 알아?”사도현은 좀 의아했다.보아하니, 사도현이 생각했던 만큼 차설아는 얌전하기만 한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래도 그냥 초보겠지. 어떻게 모든 면에서 뛰어난 청하 누나를 이기겠어?’방금 자존심이 구겨진 허청하는 이 기회를 틈타서 자신감을 만회하려 서둘러 말했다.“시합은 됐고, 그냥 재밌게 놀면서 다들 같이 구경하자고.”두 사람은 게임 인터페이스에서 대결을 선택하고, 게임은 시작되었다. 화면은 동시에 대형 액정 디스플레이에 투사되었다.이번 시합은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모두 흥미가 높지 않았다. 다들 차설아가 얼마나 빨리 죽을지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세 경기가 지나가고, 뜻밖에도 차설아는 기적적으로 통과하여 허청하와 비슷한 점수가 되었다.경기는 갈수록 치열해지고, 차설아는 프로급 선수에 맞먹는 경기 실력을 보여주었다.허청하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긴 손가락으로 액정을 누르기에 바빴다.마지막 매치 포인트였다. 허청하가 더 이상 득점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망신당할 것이다!“스핀!”“포초!”“조심, 크리스탈이 공격당하고 있어!”마치 세계적인 e스포츠 리그를 보는 것처럼 모두 숨을 죽였다.마지막 일격으로 차설아는 100
원이는 곧 자신의 함정에 걸려들 것 같은 선우시원의 모습에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해주지 않았다.“우리 엄마를 그렇게 사랑한다면서요. 그럼 우리 엄마에 대해서도 잘 알 텐데 한번 맞춰보시는 건 어때요?”“맞춰보라고?”선우시원은 턱을 매만졌다. 그는 아주 협조적으로 골똘히 생각했다.“네 엄마가 지금 제일 부족한 건 분명 나처럼 훌륭한 남자의 진심일 거야. 다행히 지금 내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네 엄마가 느끼는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겠군.”“우엑!”원이는 그의 느끼함에 결국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하는 모습을 보이며 반박했다.“아저씨가 이렇게 느끼한 사람일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네요. 어쩐지 우리 엄마가 아저씨를 왜 안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 말만 진심이라고 하지 이건 그냥 헛소리하는 거잖아요. 행동으로 보여줘야 진심을 느낄 수 있는 거죠.”“하하, 어린 녀석이 헛소리라는 단어도 알아?”“당연하죠. 헛소리는 실속이 없는 말이잖아요. 설마 그것도 모르는 거예요?”원이가 정곡을 찔렀다.“아저씨, 그래서 진심을 보여줄 건가요, 안 보여줄 건가요?”“하하하, 됐어. 그만 말을 빙빙 돌리고 얼른 말해.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야?”선우시원은 원이의 말과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나이도 한참 어린 녀석이 그를 쥐락펴락하면서 또 말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음... 우리 엄마에게 부족한 건 사랑이 아니에요. 돈이죠.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잖아요. 아저씨네 집에 돈이 많잖아요. 그걸 우리 엄마한테 조금 나눠주시면 안 돼요? 2000억은 좀 적은 것 같고, 2조는 좀 많은 것 같네요.”원이는 더는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했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커서 분명 사업 잘하는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다만 원이의 생각은 간단했다.차설아에게 아주 많은 돈이 생긴다면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과 달이의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 더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다.“너, 여기서 나
“내가 배신했다고?”성도윤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마침 다시 따져 물으려던 참이었다.“원아!”이때 선우시원이 다가오며 원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가요!”원이는 선우시원을 보자마자 바로 웃음꽃을 피우며 달려갔다. 성도윤은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엄마가 말했었잖아. 나쁜 사람이랑 말도 섞지 말고 멀리 도망치라고.”선우시원은 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도발하듯 성도윤을 보았다.그는 차설아에게 전해 들었었다. 성도윤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두 아이의 기억도 있다고. 그래서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차설아는 전에 그에게 부탁했었다. 원이와 달이의 아빠인 척해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부자처럼 보이게 행동했다.성도윤은 역시나 오해하고 있었고 눈빛이 점차 차가워졌다.“차설아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도 멀리 도망쳤을 거예요. 꼬마보다 오히려 제가 더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요.”말을 마친 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정원을 떠났다.원래 그도 이렇게 딱딱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원이가 차설아와 선우시원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면서 이상하게도 짜증이 치밀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그런 성도윤의 뒷모습을 보던 원이는 고개를 저었다.“역시 엄마가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건 옳은 선택이었네요. 분노조절장애가 있을 뿐 아니라 머리까지 다쳤잖아요. 너무 멍청해요. 절대 우리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거예요.”“풉, 푸하하!”선우시원은 인생 절반쯤 살아본 어른처럼 말하는 원이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원아, 넌 그런 말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니? 넌 웬만한 여자들보다 남자 고르는 안목이 좋은... 아니지, 네 엄마보다 남자 보는 눈이 좋네.”“당연하죠!”원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제 마음에 든 남자는 경수 아빠 한 명뿐이에요. 아저씨도 흠... 조금 부족하네요.”“뭐?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선우시원은 자신도 원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원이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이 아닌 속으로 ‘나쁜 아빠'라고 욕하고 있던 성도윤이었다.‘음, 지금 보니까 전처럼 나빠... 보이는 건 아닌 것 같기도?'“왜 대답이 없어?”성도윤은 원이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그리고 제 딴에는 예민한 통찰력으로 분석하며 말했다.“아, 알겠다. 말을 못 하는구나?”원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무시해버렸다.‘보아하니 이 아빠는 머리가 확실히 이상한 것 같네. 수술이 필요한 상태야. 누가 봐도 난 지금 다섯 살 어린이인데 어떻게 말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거지?!'“말을 못 하는 거면 더 혼자 돌아다녀서는 안 되지. 부모님이 걱정하시잖아...”성도윤은 원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조금 강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거기 위험하니까 이리와.”원이는 성도윤을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땅에 떨어진 꽃을 주웠다.“아휴, 불쌍하네. 말을 할 줄 못할 뿐 아니라 자폐증 증상까지 있나 보네... 안타깝네. 귀엽게 생겼는데.”성도윤은 긴 한숨을 내쉬며 동정 어린 시선으로 원이를 보았다.그는 평소에 찬 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으나 가끔 마음 약해질 때도 있었다. 특히 어린 아이나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을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다가가게 되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성도윤은 갑자기 자신의 신세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차설아는 이미 자식이 둘이나 있었는데 곧 서른을 바라보는 자신에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혹시 내가 무서운 거니?”성도윤은 원래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 정원에 남아 있는 것이 걱정되어 인내심 있게 계속 원이와 소통을 시도했다.“아저씨랑 같이 가자. 아저씨가 네 부모님 찾아줄게.”원이는 바닥에 떨어진 꽃을 한 송이씩 주운 후 다시 하나의 꽃다발로 묶었다. 아이의 이마엔 어느새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힘들었는지 호흡도 조금 거칠어졌다.성도윤이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는 모습에 원이는 조금 전보다 누그러진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정말로 기억을 잃으신
원이는 매번 차설아를 보러 올 때 항상 이 커다란 정원을 지나치게 된다.아이는 커다란 정원에 핀 예쁜 꽃들을 보며 전부터 생각했었다. 하나를 꺾어 차설아에게 선물하리라고.차설아가 예쁜 꽃이나 풍경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원이는 매번 예쁜 것을 볼 때마다 차설아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니던가.꽃을 받은 차설아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정원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었고 종류도 다양했다.커다란 장미는 붉게 피어있었고 진한 향기를 내는 커다란 작약꽃도 있어 보기만 해도 아름다움에 넋 놓게 되었다.원이는 여러 품종의 꽃을 하나씩 꺾어 예쁜 꽃다발을 만들었다. 종류가 다양했던지라 아이가 만든 꽃다발은 알록달록했고 전부 차설아에게 줄 것이었다.아직 작았던 아이는 정원에 핀 꽃들에 몸이 쏙 가려지게 되었고 멀리서 보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꽃다발을 만들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다가온 사람이 싸우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여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고 누군가 통화하며 싸우는 것 같았다.“난 몰라요. 어쨌든 이 수술 절대 못 하게 막아야 해요.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으니까 어떻게든 박성훈이 병원으로 오는 걸 막아요!”“사람 하나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비행기 사고나 교통사고로 위장하면 되잖아요!”“그 사람이 바다낚시를 좋아한다면서요. 그럼 바다에 빠지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어쨌든 자꾸 쓸데없는 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말아요. 난 과정 따윈 필요 없고 결과만 바라는 거니까.”우연히 듣고 있던 원이는 꽃다발 만들던 작은 손이 멈추었다.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했기 때문이다.꼭 뭔가 나쁜 짓을 꾸미는 것 같았다.정원에 와서 통화를 한 사람은 서은아였다. 그녀는 정원에 있는 원이를 발견하지 못한 채 계속 전화기 너머의 상대와 말다툼을 벌였다.“성도윤이 지금 병원에 누워 있어요. 그런 사람이 이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어요... 어쨌든 성도
간호사는 차설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없었어요.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착각이었으면 좋겠네요.”그날 저녁, 민이 이모가 원이와 달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몸은 좀 괜찮아요?”원이는 마음이 아주 따듯한 남자아이였다.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차설아의 손을 잡더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귀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응, 엄마 많이 괜찮아졌어. 며칠만 더 있으면 엄마는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차설아도 원이의 볼을 만졌다.보드랍고 통통한 아이의 볼살을 만지니 아프던 것도 전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약보다 더 효과가 강력했다.달이는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분홍색 멜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차설아에게 토마토를 건넸다.“엄마, 이건 달이가 어린이집에서 심은 토마토에요. 하나만 익어서 엄마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이거 먹고 얼른 나아야 해요.”“하나만 익었는데 엄마 주려고 가져온 거야? 우리 달이는 안 먹었어?”차설아는 달이가 들고 있는 토마토를 보았다. 달이는 토마토를 세상에서 아주 귀한 물건이라도 된 것처럼 들고 있었다. 너무도 행복했다.“달이는 안 먹어도 돼요. 맛있는 건 엄마한테 드릴 거예요. 이 토마토는 달이가 매일 물도 주고 쑥쑥 자라는 거 지켜본 거예요. 마법 토마토니까 분명 엄마를 지켜줄 수 있을 거예요!”달이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달이가 이 토마토를 얼마나 정성을 들여 키웠는지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 아이는 분명 이 토마토에 마법처럼 신기한 힘이 깃들어 어떤 병이던 다 낫게 해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차설아는 당연히 그런 아이의 마음을 짓밟을 생각이 없었기에 토마토를 받아들고 입안에 쏙 넣었다.“음, 이 토마토 아주 달구나. 엄마가 먹어본 토마토 중에 세상에서 제일 달아. 게다가 먹고 나니까 몸도 가뿐해지고 아픈 곳이 없는 것 같네... 세상에, 설마 우리 달리 마법사였어? 그래서 마법 토마토를 심을 수
“맞아. 곧 서른이라니. 나랑 설아는 영원한 낭랑 18세라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소녀야. 이제 알겠어?”배경윤도 전투태세를 보였다. 차설아와 함께 나이 공격하는 차성철을 공격할 생각이었다.차성철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바로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그래, 그래. 내가 잘 못 했네. 너희들은 아직도 어린 소녀였지. 그래, 영원히 낭랑 18세야. 적어도 내 눈엔 너희 둘은 18세... 아니지, 18세도 생각해보니 너무 많네. 세 살이랑 다섯 살이 어울리네.”배경윤은 눈을 깜빡이며 헤실 웃었다.“누가 세 살이고, 누가 다섯 살인데?”차설아와 차성철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차성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걸 물어봐야 아나? 뻔히 보이잖아.”“하, 말하고 나니 나도 좀 걱정되네. 촬영하면서 누가 널 괴롭히면 어떡해?”“날 괴롭힌다고?”배경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내가 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지.”“그럼 됐어. 어쨌든 내가 전에 가르쳐준 호신술 잊지 않았지? 틈만 나면 연습해둬. 적어도 네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차설아는 그럼에도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모습은 꼭 아이를 학교에 처음 혼자 보내고 불안해하는 엄마의 모습 같았다.“걱정하지 마. 난 그냥 촬영하러 가는 것뿐이야.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닌데 괜찮을 거야.”배경윤과 차설아는 대화를 조금 더 나누었다. 결국 배경윤은 아쉬움이 가득 남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병실에 남은 건 차설아와 차성철이었다.차성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말했다.“동생아,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오늘 이렇게 온 건 나도 너한테 작별인사하려고 온 거야.”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오빠는 어디 가는데?”“지난번에 말했다시피 장재혁이 행방불명된 상태라서 내가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거든.”차성철은 계속 장재혁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었다. 비록 장재혁이 이미 바다에 던져졌을 확률이 높았지만 죽었다고 해도 그는 시체
사도현의 갑작스러운 출연으로 배경윤은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출연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진찬영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도망치고 싶어요? 원한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그러고는 싶은데 여기서 제가 도망치면 감독님이 절 가만두지 않으실 것 같네요. 게다가...”배경윤은 소녀처럼 수줍어하면서 말을 이었다.“전 찬영 오빠랑 같이 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그럼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출연자들이 많았고 식탁에 젓가락 한 쌍 더 올려놓는 것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하하하, 찬영 오빠가 이렇게 쿨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고 즐거운 분위기가 옆에 있던 출연자에게도 전해졌다.사도현은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당연히 두 사람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심드렁했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있었고 조금 어두운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큼큼, 두 사람. 벌써 서로 귓속말하는 사이가 된 거예요?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남은 건 촬영하면서 하는 건 어때요. 일단 계약서에 사인부터 하자고요.”장윤태는 이미 진찬영과 배경윤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부터 촬영하면서 두 사람을 엮어줄 생각이었다.그러나 그가 엮어주기도 전에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다정했기에 장윤태는 너무도 기뻤다. 다만 아쉽게도... 갑자기 나타난 사도현 때문에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배경윤과 진찬영은 출연 동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촬영은 사흘 뒤부터 시작한다고 했다.촬영장으로 떠나기 전 배경윤은 차설아와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설아, 나 아마도 한동안은 너랑 만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그동안 꼭 밥 잘 챙겨 먹고 나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그녀는 차설아의 손을 꼭 잡았다.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고 여전히 손을 놓기 아쉬
“하하하, 역시 금메달리스트 승부욕 답네요! 아주 직설적이었어요!”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장윤태는 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사도현처럼 신과 같은 존재가 그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재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와 라이벌로 겨우 쳐줄 수 있는 사람은 톱배우 진창영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정말이지 그냥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다.게다가 사도현이 출연한다면 많은 재밌는 일화도 쉽게 공개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건 사도현의 동의를 받아야 방영할 수 있는 것이다... 촬영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자칫하면 네티즌들의 악플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자본에 굴한 거냐고 하면서 말이다.‘하... 벌써 머리가 아프네.'사도현은 웃는 둥 마는 둥 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경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럼 저도 먼저 설레는 상대를 찜해도 되는 거죠?”“와, 세상에! 그럼 사도현 님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하신 거예요? 우와, 정말 너무 기대돼요!”소수민은 눈치 있게 분위기를 아주 잘 띄우고 있었다.현재 인기가 많은 배우로서 그녀의 상황 대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자신이 그 유명한 사도현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바로 파악하고 사도현 친구가 되어보기로 루트를 바꾸었다.“전 확신이 없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에요. 확신이 있기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정한 거고 어떻게든 그 사람을 제 여자친구로 만들고 말 거예요.”사도현은 이 말을 하면서도 오로지 배경윤만 빤히 보고 있었다.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바보들이 아니었다. 사도현이 말한 그 사람이 배경윤이라는 것을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하하, 사도현 씨 안목이 아주 좋으시네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여성 출연자 중 사도현 씨랑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은 배경윤 씨죠. 두 사람 집안도 해안시에서 8대 가문에 손꼽히는 가문이잖아요. 나이도 비슷하니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기도 하겠죠.
장윤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긴장한 듯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감독님, 무슨 일이에요?”배경윤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어내고 궁금한 얼굴로 장윤태를 보았다.“우리 프로그램에 변동이 생길 것 같네요. 원래 계획은 남자 세 명 여자 네 명으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합류하게 된 출연자가 있어서 남자 넷, 여자 넷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장윤태는 주먹을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어머,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모두가 짝이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소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쪽수도 맞아서 누구 한 명 외로워지는 사람은 없잖아요.”다른 출연자들도 맞장구를 쳤다.“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조금 특별한 분이라서요.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을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장윤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대체 누가 투입되기에 촬영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하늘이 다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꽤나 돼요. 대통령이든 세계에 손꼽을만한 재벌이든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눠봤죠. 그런데 긴급 투입되는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말해 보세요.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장윤태를 보고 있던 배경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그들의 촬영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건... 제가 말하기 어렵네요. 곧 도착한다고 하니 다들 알게 될 거예요.”장윤태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듯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자자, 도착하셨다고 하니 다들 기쁘게 환영해주자고요!”별빛 엔터의 홍보팀 팀장이 흥분하며 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