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위로하길 바라는 거야?”등받이에 착 달라붙은 차설아는 순수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도 사실 자신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이치대로라면 성도윤의 이런 모습을 봤으니, 드디어 보복받았다고 기뻐해야 마땅하다.하지만, 그의 슬픈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불편해졌다.“누군가를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과 새로운 사람이라고 했어. 시간은 있고, 새로운 사람이라면...”성도윤은 짙은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치켜들며 나지막이 말했다.“모두 당신을 보고 청하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하던데. 차라리 몇 분 동안 청하 대역이 되어 나에게 위로의 키스를 하는 건 어때?”말을 마친 남자는 눈을 감았다. 조각한 듯 완벽한 이목구비에 얇은 입술이 천천히 차설아에게 다가왔다.어떤 여자도 이런 잘생긴 얼굴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한때 차설아도, 이 얼굴에 빠지고 말았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어리석지 않다. 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나보고 대역을 하라고?’“꿈 깨!’차설아는 힘을 모아 남자를 밀어버릴 준비를 했다.갑자기 차설아는 조용한 차 안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움직이지 마!”성도윤은 눈을 떴다. 깊은 눈동자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거절해?”“장난 그만해!”“당신 차 이상하단 말이야!”성도윤은 급히 경계하더니, 이내 숙연한 모습으로 돌아갔다.“이상한 소리 못 들었어? 뚜뚜뚜...”성도윤은 차갑게 눈살을 찌푸리고 숨을 죽이고는 소리에 집중했다.역시 “뚜뚜뚜”소리가 운전석 바닥에서 흘러나왔다.차설아는 침을 삼키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내 추측이 맞는다면 당신 차에 타이밍 폭탄이 설치되었어!”“뭐라고?”성도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보아하니 더 이상 앉아 있기 어려운 모양이다.성도윤이 일어서서 살펴보려는데 차설아가 급히 그를 눌렀다.“죽고 싶어? 움직이지 말라니까!”늘 모든 것을 통제하는 데 익숙했던 성도윤은 처음으로 여린 여자에게 장악당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이상함을 눈치챘다.“왜 그래?”“아니야, 그냥 오래 엎드려 있어서 발에 쥐가 났어.”차설아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다시 조수석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 절대 성도윤이 임신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집으로 돌아온 차설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파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배경수에게 전화했다.“빨리 우리 집에 와. 나 병원에 좀 데리고 가!”배경수는 20억 원 호가의 슈퍼카를 몰고 가장 빠른 속도로 차설아를 인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일련의 검사를 마친 후, 차설아는 병상에 누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계속 바삐 돌아치던 배경수는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고, 잘생긴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예를 들어, 차설아가 왜 산부인과에 와서 진료받으려 하는지.검사 결과가 나오자, 배경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네? 임신 6주라고요?”의사는 안경을 밀며 차설아와 배경수에게 말했다.“임신 초기에는 태아가 아주 약하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부모가 태아를 잘 보호해 주셔야 해요.”“검사 결과를 보면 유산 조짐이 보이지만 큰 문제는 없어요. 며칠 누워서 휴식을 취하면서 산소를 좀 마시면 나을 듯합니다.”아이가 무사하다는 말을 들은 차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 감사합니다.”간호사는 차설아에게 산소 호흡기를 달고 몇 마디 당부하고는 밖으로 나갔다.병실에는 차설아와 배경수 두 사람만 남았다.배경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황급히 물었다.“보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며칠 안 본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어? 애 아빠는 누구야?”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누구겠어?”배경수는 바로 알아차리고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빌어먹을. 성도윤, 이 망할 인간. 어떻게 보스를 임신시키고 또 내연녀를 데리고 와서 이혼을 강요해? 사람을 괴롭혀도 정도껏 해야지!”“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거야? 내가 당장 가서 따질 거야!”배경수가 노기등등하여 성도윤을 찾아가
며칠 휴식을 취한 차설아는 몸이 회복되었다.차설아는 일찍이 프린트해둔 법률 사무소 양도서를 가지고 성대 그룹으로 가서 성도윤의 사인을 받으려 했다.오늘 성대 그룹의 분위기는 아주 엄숙했다. 건물 외곽에 경계선이 쳐져 있었는데, 중요한 인물이 외빈을 데리고 시찰하러 왔다고 해서 많은 언론이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차설아는 경계선 밖에 막혀, 시찰이 끝나야 빌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멀리서 검은 양복 차림의 성도윤이 보였다. 늘씬한 몸매의 그는 빌딩의 가장 중심에 서서 우아하고 여유롭게 몇몇 시찰 원과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분위기, 타고난 고귀한 기질은 언제나 의기양양하고 매혹적이었다.이때 구경꾼들 사이에서 갑자기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나 들어갈 거야! 당장 비켜. 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아?”남자는 경계선을 뚫고 성도윤을 찾으러 가겠다고 떠들고 있었다.허광희!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허광희는 여전히 무례하게 성도윤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조카사위, 조카사위, 날 좀 보게나. 난 설아의 외삼촌이야. 내가 도저히 힘들어서 자네를 찾아왔네. 나 좀 살려주게나!”이 소리는 이내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의 시선을 끌었고, 잇달아 카메라들이 허광희를 비추기 시작했다.‘창피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냉담한 얼굴로 걸어가서 말했다.“뭔 낯짝으로 여기서 소란을 피워요!”“설아, 너도 있었구나. 너무 다행이야. 네 남편보고 좀 오라고 해. 재산 분할에 관해 상의해야지.”“난 네 친정 식구야. 네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어?”허광희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작정인지 염치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그는 오늘 성대 그룹에 중요한 행사가 있다는 것을 노리고, 언론의 힘으로 성도윤을 압박하여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차설아는 너무 창피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무엇보다, 이 일로 성도윤을 화나게 한다면 지분 양도건도 물 건너 갈지 모른다.“
성도윤의 막강한 카리스마에 허광희는 다소 기가 눌렸다.하지만 많은 카메라가 그들을 보고 있으니, 허광희는 다시 자신감을 찾았다.“조카사위,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허광희는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말했다.“내 조카는 자네 집에 시집을 가서 줄곧 본분을 다했어. 그런데 지금 이혼하겠다고 하고, 고작 법률 사무소 하나만 챙겨주면 설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이 큰 그룹에서 고작 법률 사무소 하나만 내어주다니!”이 말이 나오자 모두 떠들썩했고 기자들은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내 조카는 낯가죽도 얇고 겁이 많아서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룻밤을 사정했어...”“다른 말은 필요 없고, 우리한테 100억을 주면 깨끗하게 물러나지.”허광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입 다물어!”차설아는 이를 갈며 말했다.차설아가 한강에 뛰어들어 죽어도 누명을 씻을 수 없게 되었다. 차설아는 진심으로 이 무뢰한 인간을 손으로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차설아는 조심스럽게 성도윤을 바라보았다. 그가 화낼 줄 알았는데... 남자는 오히려 차분했다. 여전히 차갑고 거리감 느껴지는 모습이었다.큰 키의 성도윤은 하늘의 신처럼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며 몸을 약간 돌려 말했다.“무열아, 재무실로 데리고 가.”그리고 긴 다리로 곧장 자리를 떠났다.‘이게... 끝이라고?’허광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100억을 이렇게 쉽게 얻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일이 어렵게 풀릴까 봐 허광희는 작은 칼까지 준비해서 목숨으로 협박할 생각이었다.‘조카사위가 이렇게 시원시원할 줄 알았다면 더 달라고 할걸!’성도윤은 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설아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안 따라와?”차설아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성도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다시 시찰단으로 돌아와 그녀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차설아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단정하고 참한 성도윤의 아내로 돌아갔다. 그런 차설아의 모습에 시찰단은 몇 번이고 칭찬을 아끼지
바람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건들건들 차설아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어머, 사모님도 계셨네? 마침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는데 주인공이 빠지면 섭섭하죠.”차설아는 당연히 바람의 말의 다른 뜻을 이해했다.전에 바람과 협력하지 않으면 차설아가 스파크라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었다. 이제 보니 겁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성도윤이 법률 사무소 주식 양도서에 서명하는 것을 기다려야 하므로 그녀가 스파크라는 정체는 절대 지금 드러나서는 안 된다.“바람 씨, 오랫동안 존경해 왔어요. 제가 먼저 따로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결과는 이미 정해졌지만, 차설아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발악해 보기로 했다.바람이 자비를 베풀 수도 있지 않은가?“당연하죠.”바람의 좁고 긴 눈망울은 목적을 달성한 듯한 교활함을 드러내며 웃었다.“사모님께서 특별히 요청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두 사람은 동시에 그들 사이에 있는 성도윤을 바라보았다.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이었다.성도윤의 원래 냉철한 얼굴은 더욱 차가워졌다.“5분 드리죠.”성도윤은 거만한 태도로 바람에게 말한 후, 곧장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모습은 마치 빙산처럼 느껴졌고, 지나가는 곳마다 한기가 서렸다.성도윤이 떠나자 차설아는 바람을 데리고 외진 곳에 끌고 갔다. 긴 손가락으로 바람의 목덜미를 잡으며 살벌하게 벽에 눌렀다. “경고하는데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내 신분을 폭로한다면 당장 네 목을 부러뜨릴 테니까!”바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오히려 흥분한 모습이었다.“의외네? 거장 스파크는 코드만 잘 치는 게 아니라 주먹도 일품이야. 역시 보물이었어. 당신과 더 협력하고 싶은데 어쩌지?”“닥쳐!”차설아는 행여나 다른 사람이 듣거나 보게 될까 봐 즉시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더 바짝 붙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촐싹대던 바람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얌전하게 침을 꿀꺽 삼켰다.
차설아는 심호흡하고 성도윤의 사무실로 들어갔다.훤칠한 키, 넓은 어깨에 긴 다리까지 더해지니 창가 옆에 서 있는 그의 다부진 몸매가 유난히 더 시선을 사로잡았다.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주변공기마저 싸늘하게 만들었고, 보아하니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차설아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주식 양도서를 꺼내더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도윤 씨, 시간 있을 때 여기에 사인 좀 해줘. 일찌감치 재산 분배를 완벽하게 해놔야 며칠 뒤에 깔끔하게 이혼 증명서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아.”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몸을 돌렸고, 따스한 햇볕에 비친 그의 얼굴은 부드럽고 매혹적이었다. “이혼 증명서로 뭘 하려고 이렇게 재촉하는 거야? 설명해야지?”“설명?”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설명할 것도 없어. 첫째, 허광희가 당신한테 100억 요구한 건 그 사람 생각이고 믿든 말든 나랑은 아무런 상관없어. 둘째, 성대 그룹의 고객 시스템은 처음부터 허점이 많았고 공격받는 건 시간문제였어. 난 그저 당신들을 위해 미리 지뢰를 제거한 거고, 복수하고 싶으면 그냥 해. 셋째, 이혼 합의서에 법률사무소는 내 명의로 되어있어. 당신이 사인을 안 한다고 해도 법원에서 강제 집행할 거야.”성도윤은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한참이 지나서야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소리야?”“내가 충분히 설명했잖아, 우물쭈물하지 말고 얼른 사인해!”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아주는 성도윤이었기에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걸 예상하였다.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방금 코드 쓰던 남자가 네가 자기 전 여자친구라고 하더라. 나랑 이혼하는 것도 다시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줘.”“뭐라고? 전 여자친구?”그의 말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한참 동안 하고 있던데, 고작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했다고?”“안 그러면?”“아니,
“뭘?”차설아는 마치 질식 전 산소를 되찾은 물고기처럼 두 눈이 반짝 빛나더니 생각에 잠겼다.“주식 양도서에 사인해달라며. 시간 지나면 안 할 거야!”도도한 태도의 성도윤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설마 동의한 거야?!’차설아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재빨리 양도서와 사인펜을 공손하게 남자에게 건넸다.“여기!”행여나 자기 행동이나 표정이 그의 눈에 거슬려 갑자기 변심하지 않을까 긴장한 채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성도윤은 싸늘한 표정으로 서류에 깔끔하게 사인을 한 뒤 아무 감정 없이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충고하는데 이혼 협의서에 적힌 내용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뒤에서 이상한 일 꾸미지 말고.”차갑고 잔인한 그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고 차설아는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허광희의 헛소리를 잊고 흔쾌히 양도서에 사인을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차설아를 믿지 않았다...하지만 이제는 아무 상관 없기에 차설아도 뭔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이혼하게 된 마당에 어떤 이미지로 남을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역시도 깔끔하게 이혼하려고 흔쾌히 서류에 사인한 게 틀림없다.“협조해 줘서 고마워. 별다른 일 없다면 아마 증명서 받는 날에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겠네. 이제 앞으로 각자 제 갈 길 가자고.”말을 마친 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고 쿨하게 자리를 떴다.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하루라도 빨리 그한테서 벗어나고 싶다는 차설아의 다짐이 눈에 보였다.그는 700여 억을 포기하고 기어코 법률사무소를 원하는 차설아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성운 법률사무소에는 하나같이 다 쓸모없고 괴팍한 인간들뿐인데 정말 잘 버틸 수 있을까?’...다음날, 차설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세련된 오피스룩에 플랫 구두를 신고 씩씩하게 법률사무소로 향했다.이 법률사무소는 성대 그룹 소속이었지만 사실상
그는 수수한 옷차림에 마스크를 쓴 채 사무실 테이블 위에 있는 화초의 나뭇잎을 하나하나 정성껏 닦고 있었다.남자는 차설아의 목소리를 듣고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당신이 우리 법률사무소에 새로 오게 된 사장이에요? 그 성도윤한테 버림받았다던 불쌍한 여자?”차설아는 난처해하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부분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마스크를 벗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40대 남성이었고 자료에서 봤던 오경철의 모습과 똑같았다.배경수가 보낸 자료에 따르면 성운 법률사무소는 세 명의 동업자로 이뤄졌고 여자 한 명에 남자 두 명, 오경철은 그중 한 명이었다.그는 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연륜 있어 보이는 모습은 다가가기 쉬울 것처럼 보였지만 겉모습과 달리 쉽게 마음을 터놓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서로 만난 적도 없고 이런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절 알아보신 거죠?”“아주 간단해요.”차설아는 솔직하게 말했다.“사장으로서 직원들 사전 조사하는 건 필수 아닌가요? 오 변호사님은 식물 가꾸는 걸 좋아하죠. 정말로 청소부였으면 잎사귀 하나하나 닦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을 거예요.”“재밌네요.”오경철은 흥미롭다는 듯 차설아를 보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전 조사를 해보셨다면 우리가 쉬운 상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시겠네요? 똑똑한 사람이라면 알아서 포기해요.”“공교롭게도 전 도전적인 일을 좋아해요.”차설아의 목소리에서는 열정이 느꼈고 반짝 빛나는 두 눈은 마치 포기를 모르는 한 마리의 치타처럼 굳세고 강인했다.차무진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그런 유전자를 몸에 지닌 채 어떻게 쉽게 물러설 수 있겠는가!“성도윤이 3년 동안 해내지 못한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전 3년이 아니라 3일이면 됩니다!”“젊은 사람이 용기가 대단하네요. 정신적으로나마 응원할게요.”오경철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인수한 법률사무소는
“읍!”배경윤은 갑자기 돌진한 사도현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집어삼킬 것처럼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편집 없이 실시간으로 방송되었기에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아냈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본 네티즌은 앞다투어 댓글을 달았고 시청률은 기록을 경신했다.[아니, 내가 이런 장면을 봐도 되는 거야? 드라마보다 더 로맨틱하잖아!][키스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줄 알았더니 정말 입을 맞추었어. 유명한 그룹의 대표와 사랑에 빠지는 대본을 나도 받아보고 싶네.][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그 여배우를 더 이상 밀어주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었어. 벌써 새로운 여자랑 놀아나고 있었던 거지!][그럼 배경윤이 첩이네. 첩 주제에 연애 프로그램에 왜 출연하는 거야? 이런 사람을 섭외한 제작진도 이상해.][지금 몇 세기인데 첩을 논해? 고귀한 사도현이 그 여우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다가 지쳤을 뿐이야.][네가 뭔데 우리 윤설을 여우라고 해? 윤설이 사도현한테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네티즌은 의견이 분분했고 댓글이 삽시에 몇천 개씩 달렸다.사도현과 배경윤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경윤을 첩이라고 부르면서 모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윤설의 극성팬들이 윤설을 옹호했다.하지만 대부분 시청자는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장면에 감탄하면서 댓글을 달았다.사도현과 배경윤의 촬영을 맡은 일부 제작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라마 같은 장면을 계속 촬영해야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하지 못해서 장윤태한테 도움을 청했다.“두 사람을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둬. 예능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생각해.”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장윤태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배경윤과 진찬영을 이어주려고 했지만 갑자기 돌진한 사도현 때문에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수줍고 천천히 다가가는 진찬영과 달리, 사도현은 직진하는 남자였다.방송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아무리 잘 짜인 대
“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배경윤은 자신이 사도현과 같은 붉은 공을 뽑았을 때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이지 그 순간 죽고 싶었다.그를 멀리 피해 도망가려 하면 할수록 운명은 계속 그녀와 그를 엮고 있었다.만약 사도현이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거라면 그녀는 거부할 기회가 있었다.하지만 이건 랜덤이었고 그녀가 지금 거부를 한다면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너무도 짜증이 났다.“어쩔 수가 없네요. 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가 없죠!”사도현이 웃음을 참으며 자신이 들고 있는 공으로 배경윤이 들고 있는 공을 툭 쳤다.“만나서 반가워요. 파트너.”그러자 배경윤이 말했다.“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배가 바다 중간까지 갔을 때 제가 실수로 그쪽으로 바닷속에 차버릴 수 있으니까요.”“괜찮아요. 바다에 떨어져도 전 경윤 씨를 쫓아갈 거니까요. 그거 모르죠? 전 예전에 수영 대회에서 우승한 적 있거든요.”사도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배경윤이 아무리 정색하면서 말해도 그는 오히려 더 뻔뻔하게 말했다.그가 살아온 세상엔 약육강식만 존재했다. 그의 인생엔 ‘실패'라는 두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고 한번 꽂힌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체면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옆에 있던 진찬영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가시 돋친 말을 했다.“아무리 하늘의 뜻이라고 해도 성격이 맞지 않으면 안 맞는 거죠. 어차피 배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니까 이런 하늘의 뜻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예요.”말을 마친 후 이내 배경윤을 보며 말했다.“조금만 참아요. 제가 먼저 가서 경윤 씨 기다리고 있을게요.”“네, 찬영 오빠. 제가 비록 다른 사람이랑 같은 배에 타게 되었지만, 마음만은 오빠한테 있다는 거 아시죠? 저 꼭 기다려줘야 해요!!”배경윤은 눈물 닦는 시늉을 하며 손수건을 흔들었다. 누가 보면 해적에게 인질로 붙잡힌 사람인 줄 알 것이다.“걱정하지 마요. 꼭 기다리고 있을게요. 섬이
최빈은 웃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다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그냥 말 그대로 배를 타는 것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이따가 섬에 도착할 때 저희가 여러분께 제비뽑기를 진행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네 개의 팀으로 나뉘게 되겠죠... 같은 색의 공을 뽑는 사람이 같은 배에 타는 겁니다. 말 같은 색 공을 뽑은 두 사람이 한배에 탄다는 의미죠.”최빈의 설명을 들은 그들은 오랫동안 침묵했다.한참 후 하늘이 먼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이런 게임은 너무 식상하네요. 억지로 커플로 엮어주는 거랑 뭐가 다른가요. 만약 남자 둘이거나 여자 둘이 같은 색 공을 뽑은 거라면, 남남 커플 또는 두 여자로 커플로 밀어줄 건가요?”최빈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말이 안 되는 건 아니죠. 저희 프로그램 제목도 ‘사랑스러운 선택'이잖아요.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커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긴 하지만 지금 시대에 동성이 찐 사랑일 때가 많잖아요. 만약 저희 프로그램에서 정말로 동성 커플이 탄생한다면 그럼 시청률은 분명 대박 날 겁니다.”“쯧쯧쯧,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그래도 전 기대가 되네요...”배경윤은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이미 흥미가 생겨버린 그녀는 다소 장난스럽게 말했다.“자극적인 걸 원한다면 제가 자극이 뭔지 보여드릴게요.”“그래요, 맞아요. 저희가 두려워할 건 없죠. 저 소수민은 남자든 여자든 전부 환영해요. 그래도 경윤 씨처럼 귀엽고 예쁜 사람이 저랑 같은 배에 탔으면 좋겠네요!”소수민은 극강의 E였다. 처음부터 배경윤과 친해지려고 했고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정말로 ‘어울리는' 것 같았다.“귀엽다고요?”사도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귀엽다는 것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안 귀여운가요? 전 우리 경윤 씨가 아주 귀엽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얼굴부터 귀엽잖아요. 볼살도 통통하고 피부도 아기들처럼 보드랍잖아요
성도윤은 부정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았다.그는 이 일을 떠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불리했으니까.“만약 정말로 수술할 거면 그럼... 집도의를 잘 알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누군가 무슨 수를 썼을 수도 있으니까.”차설아는 원이가 들은 소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랐으니 이렇게라도 주의하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뭐라도 알고 있는 거야?”“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당신도 저처럼 원수 집안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주의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원수 집안이 많다고?”성도윤은 미간을 구기며 따져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아니요. 전 아주 안전해요. 그 사람들이 저한테 무슨 짓을 하기엔 실력이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죠.”차설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여하간에 그녀는 세계 살수 랭킹 1위에 등극한 사람이었으니까.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을 대는 건 정말이지 멍청한 짓이었다.아무리 그녀가 지금 병원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자신이 가득하군. 그래도 조심해.”성도윤은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당신도요. 조심해요.”차설아도 당부했다.이 대화는 두 사람에게 다른 형식의 고백과 다름이 없었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성도윤이 나간 뒤 창밖은 어느새 어둠으로 가득했다.졸음이 쏟아졌던 차설아는 아무 생각도 없이 누워 잠을 잤다.오늘 밤의 병실은 이상하게도 향기로웠다.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의식도 흐릿했다.어두운 곳에서 지켜보던 누군가는 차설아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싸늘하게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데려가!”...사흘 후. 연애 프로그램 ‘사랑스러운 선택'이 촬영을 들어가게 되는 날이 되었다.촬영 장소는 해안시에서 몇십 km 떨어진 작은 섬에서 진행하게 되었다.이번 게스트에
선우시원은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며 조심하라고 했다.최근 선우 가문과 차씨 가문이 협력 관계를 달성했던지라 꽤나 많은 세력들이 뒤에서 몰래 그들을 공격하려는 게 보였다.경제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투자자가 갑자기 투자를 철회한다거나 제조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상회에서 찾아와 온갖 트집을 잡았다. 또 가끔 개인적인 이유로 찾아와 피해를 주곤 했다.선우시원이든 차설아든 그동안 많은 알지 못하는 세력에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이틀 전에도 차성철는 자신의 차 아래서 폭탄 유도 장치를 발견했고 시동을 걸 때 누군가 브레이크에 손을 댔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차성철은 행여나 차설아가 걱정하게 될까 봐 이 사실을 숨겼다.하지만 선우시원은 차설아가 이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난 이 갑작스러운 추락 사고가 누군가 뒤에서 계획한 일이라고 생각해. 분명 우연이 아닐 거야!”선우시원은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알아. 그래서 조심하려고.”차설아는 선우시원의 입에서 들은 소식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나랑 오빠가 고작 며칠 안일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고 누군가 벌써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네.”“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미리 퇴원하는 건 어때? 병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틈새로 숨어 손을 쓰기 쉬울 거야. 집이라면 여기보단 안전할 것 같은데.”선우시원이 차설아에게 제안했다.며칠 전 차성철도 그녀에게 예정보다 앞당겨 퇴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었다. 여러 방면을 고려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기에 퇴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퇴원하는 것이 그녀의 안전에도 좋을 것 같았다.“일단 생각은 해볼게!”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녀의 허리는 꽤나 회복되었다. 다만 미련이 남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해이해졌다고 생각했다.“내일. 내일 내가 퇴원할게.”차설아는 짙은 한숨을 내쉬고 결정을 내렸다.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뭐? 커다란 지갑?”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들어오세요. 지갑 아저씨.”원이는 등 뒤에 있던 선우시원을 향해 손을 까딱거리더니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엄마, 전 이미 시원 아저씨랑 상의했어요. 아저씨는 앞으로 헛소리만 하지 않고 엄마한테 돈을 주겠대요. 몇천억씩 말이에요. 엄마는 그냥 원하는 만큼 말씀하시면 돼요. 앞으로 힘들게 일하지 않으셔도 돼요.”“뭐?”차설아는 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이가 한 말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선우시원이 차설아의 곁으로 다가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원이 말이 맞아. 그동안 난 너한테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그러니 나한테 기회를 줘. 내가 진심을 보여줄 기회. 이따가 계좌 알려주면 돈 보내줄게. 어차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돈 말고 없는 것 같으니까.”차설아의 안색이 굳어지고 손을 들어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두 사람 장난 그만해.”“장난 아니야. 난 정말로 당신한테 돈을 주고 싶어서 그래.”선우시원은 지금 이 순간 몸을 해부해서라도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 자리에서 당장 그녀의 계좌로 입금해주고 싶었다.차설아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어린아이가 한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지 마. 게다가 난 돈 필요하다고 한 적 없다고. 설령 정말로 필요하다고 해도 네 돈을 거저 받을 생각은 없어.”“내가 주겠다고. 너한테 돈을 주는 거로 난 기쁨을 느끼거든. 거저 받으라는 거 아니야. 난 너한테 기쁨을 돈으로 주고 사는 거라고. 거저 주는 거 아니야.”선우시원은 완벽한 논리로 차설아가 할 말을 잃게 했다.그녀는 다소 어이없기도 했다.“정말 미치겠네. 시원아,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지? 안 그러면 왜 갑자기 돈을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겠어?”선우시원이 말을 하기도 전에 다급해진 원이가 선우시원의 편을 들어주었다.“엄마, 시원 아저씨의 머리는 정상이에요. 머리가 비정상인 건 나쁜 아빠라고요. 저랑 달이 잊은 것도 모자라 엄마까지 잊었잖
원이는 곧 자신의 함정에 걸려들 것 같은 선우시원의 모습에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해주지 않았다.“우리 엄마를 그렇게 사랑한다면서요. 그럼 우리 엄마에 대해서도 잘 알 텐데 한번 맞춰보시는 건 어때요?”“맞춰보라고?”선우시원은 턱을 매만졌다. 그는 아주 협조적으로 골똘히 생각했다.“네 엄마가 지금 제일 부족한 건 분명 나처럼 훌륭한 남자의 진심일 거야. 다행히 지금 내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네 엄마가 느끼는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겠군.”“우엑!”원이는 그의 느끼함에 결국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하는 모습을 보이며 반박했다.“아저씨가 이렇게 느끼한 사람일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네요. 어쩐지 우리 엄마가 아저씨를 왜 안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 말만 진심이라고 하지 이건 그냥 헛소리하는 거잖아요. 행동으로 보여줘야 진심을 느낄 수 있는 거죠.”“하하, 어린 녀석이 헛소리라는 단어도 알아?”“당연하죠. 헛소리는 실속이 없는 말이잖아요. 설마 그것도 모르는 거예요?”원이가 정곡을 찔렀다.“아저씨, 그래서 진심을 보여줄 건가요, 안 보여줄 건가요?”“하하하, 됐어. 그만 말을 빙빙 돌리고 얼른 말해.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야?”선우시원은 원이의 말과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나이도 한참 어린 녀석이 그를 쥐락펴락하면서 또 말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음... 우리 엄마에게 부족한 건 사랑이 아니에요. 돈이죠.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잖아요. 아저씨네 집에 돈이 많잖아요. 그걸 우리 엄마한테 조금 나눠주시면 안 돼요? 2000억은 좀 적은 것 같고, 2조는 좀 많은 것 같네요.”원이는 더는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했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커서 분명 사업 잘하는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다만 원이의 생각은 간단했다.차설아에게 아주 많은 돈이 생긴다면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과 달이의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 더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다.“너, 여기서 나
“내가 배신했다고?”성도윤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마침 다시 따져 물으려던 참이었다.“원아!”이때 선우시원이 다가오며 원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가요!”원이는 선우시원을 보자마자 바로 웃음꽃을 피우며 달려갔다. 성도윤은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엄마가 말했었잖아. 나쁜 사람이랑 말도 섞지 말고 멀리 도망치라고.”선우시원은 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도발하듯 성도윤을 보았다.그는 차설아에게 전해 들었었다. 성도윤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두 아이의 기억도 있다고. 그래서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차설아는 전에 그에게 부탁했었다. 원이와 달이의 아빠인 척해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부자처럼 보이게 행동했다.성도윤은 역시나 오해하고 있었고 눈빛이 점차 차가워졌다.“차설아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도 멀리 도망쳤을 거예요. 꼬마보다 오히려 제가 더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요.”말을 마친 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정원을 떠났다.원래 그도 이렇게 딱딱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원이가 차설아와 선우시원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면서 이상하게도 짜증이 치밀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그런 성도윤의 뒷모습을 보던 원이는 고개를 저었다.“역시 엄마가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건 옳은 선택이었네요. 분노조절장애가 있을 뿐 아니라 머리까지 다쳤잖아요. 너무 멍청해요. 절대 우리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거예요.”“풉, 푸하하!”선우시원은 인생 절반쯤 살아본 어른처럼 말하는 원이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원아, 넌 그런 말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니? 넌 웬만한 여자들보다 남자 고르는 안목이 좋은... 아니지, 네 엄마보다 남자 보는 눈이 좋네.”“당연하죠!”원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제 마음에 든 남자는 경수 아빠 한 명뿐이에요. 아저씨도 흠... 조금 부족하네요.”“뭐?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선우시원은 자신도 원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원이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이 아닌 속으로 ‘나쁜 아빠'라고 욕하고 있던 성도윤이었다.‘음, 지금 보니까 전처럼 나빠... 보이는 건 아닌 것 같기도?'“왜 대답이 없어?”성도윤은 원이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그리고 제 딴에는 예민한 통찰력으로 분석하며 말했다.“아, 알겠다. 말을 못 하는구나?”원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무시해버렸다.‘보아하니 이 아빠는 머리가 확실히 이상한 것 같네. 수술이 필요한 상태야. 누가 봐도 난 지금 다섯 살 어린이인데 어떻게 말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거지?!'“말을 못 하는 거면 더 혼자 돌아다녀서는 안 되지. 부모님이 걱정하시잖아...”성도윤은 원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조금 강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거기 위험하니까 이리와.”원이는 성도윤을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땅에 떨어진 꽃을 주웠다.“아휴, 불쌍하네. 말을 할 줄 못할 뿐 아니라 자폐증 증상까지 있나 보네... 안타깝네. 귀엽게 생겼는데.”성도윤은 긴 한숨을 내쉬며 동정 어린 시선으로 원이를 보았다.그는 평소에 찬 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으나 가끔 마음 약해질 때도 있었다. 특히 어린 아이나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을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다가가게 되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성도윤은 갑자기 자신의 신세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차설아는 이미 자식이 둘이나 있었는데 곧 서른을 바라보는 자신에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혹시 내가 무서운 거니?”성도윤은 원래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 정원에 남아 있는 것이 걱정되어 인내심 있게 계속 원이와 소통을 시도했다.“아저씨랑 같이 가자. 아저씨가 네 부모님 찾아줄게.”원이는 바닥에 떨어진 꽃을 한 송이씩 주운 후 다시 하나의 꽃다발로 묶었다. 아이의 이마엔 어느새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힘들었는지 호흡도 조금 거칠어졌다.성도윤이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는 모습에 원이는 조금 전보다 누그러진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정말로 기억을 잃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