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수한 옷차림에 마스크를 쓴 채 사무실 테이블 위에 있는 화초의 나뭇잎을 하나하나 정성껏 닦고 있었다.남자는 차설아의 목소리를 듣고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당신이 우리 법률사무소에 새로 오게 된 사장이에요? 그 성도윤한테 버림받았다던 불쌍한 여자?”차설아는 난처해하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부분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마스크를 벗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40대 남성이었고 자료에서 봤던 오경철의 모습과 똑같았다.배경수가 보낸 자료에 따르면 성운 법률사무소는 세 명의 동업자로 이뤄졌고 여자 한 명에 남자 두 명, 오경철은 그중 한 명이었다.그는 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연륜 있어 보이는 모습은 다가가기 쉬울 것처럼 보였지만 겉모습과 달리 쉽게 마음을 터놓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서로 만난 적도 없고 이런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절 알아보신 거죠?”“아주 간단해요.”차설아는 솔직하게 말했다.“사장으로서 직원들 사전 조사하는 건 필수 아닌가요? 오 변호사님은 식물 가꾸는 걸 좋아하죠. 정말로 청소부였으면 잎사귀 하나하나 닦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을 거예요.”“재밌네요.”오경철은 흥미롭다는 듯 차설아를 보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전 조사를 해보셨다면 우리가 쉬운 상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시겠네요? 똑똑한 사람이라면 알아서 포기해요.”“공교롭게도 전 도전적인 일을 좋아해요.”차설아의 목소리에서는 열정이 느꼈고 반짝 빛나는 두 눈은 마치 포기를 모르는 한 마리의 치타처럼 굳세고 강인했다.차무진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그런 유전자를 몸에 지닌 채 어떻게 쉽게 물러설 수 있겠는가!“성도윤이 3년 동안 해내지 못한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전 3년이 아니라 3일이면 됩니다!”“젊은 사람이 용기가 대단하네요. 정신적으로나마 응원할게요.”오경철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인수한 법률사무소는
삼 일 뒤.해안시에서 유명한 ‘별밤’ 클럽은 격조 있는 우아한 분위기에 상하 2층으로 나뉘어 있다.사도현과 강진우는 탁 트인 시야에 프라이버시까지 보장할 수 있는 2층 VIP석에 앉아있었다.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성도윤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도윤 형 왜 아직도 안 와? 골드 3인방 4년 만의 모임인데 설마 이렇게 바람맞는 건가?”사도현은 술잔을 들고 초조해하며 클럽 입구를 살폈다.“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만나기로 한 건데, 오늘 못 만나면 정말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골드 3인방 중 맏형인 강진우는 줄곧 온화함을 유지하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침착해. 도윤이 성격 너도 잘 알잖아. 기분이 수시로 변하는 녀석인데 우리가 바람맞는 것도 이상한 것 없잖아?”그러나 오직 성도윤만이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었기에 사도현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안 되겠어, 바로 전화해 볼 거야!”그는 핸드폰을 꺼내 성도윤의 번호를 눌렀다.그 시각 한창 일하느라 바쁜 성도윤은 싸늘한 말투로 기다리지 말라고 전했다.‘정말 안 올 생각이야?’그는 일 중독자인 성도윤을 불러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던 순간 클럽으로 들어오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저마다 화려한 모습이었다.그중 하얀 원피스에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이 가장 돋보였는데 바로 차설아였다!그녀는 웃음꽃을 활짝 피운 채 함께 온 비슷한 또래의 남자한테 귓속말하고 있었고 둘은 한없이 친근해 보였다.그는 성도윤이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형, 무조건 와! 차설아 지금 웃으면서 다른 남자랑 껴안고 있어.”핸드폰 너머로 정적이 흘렀고 곧이어 노트북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별밤 클럽? 지금 바로 갈게.”강진우도 차설아를 발견하고선 부드럽고 점잖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도윤이 와이프 저번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네, 참 재밌는 여자야.”그 시각 차설아는 성우 일행과 함께 1층의 테이블에 앉았다.불과 사흘 전만 해도 눈
성도윤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성우가 술을 따르고 있지?’삼 년 전, 성대 그룹이 성운 법률사무소를 인수했을 때 성우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그러나 업무 능력이 뛰어났던 성우는 성대 그룹의 모든 법무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했고 그의 실력을 생각하며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관건적인 순간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기에 돈을 벌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근 몇 년 동안 사무소에 일절 손대지 않았다.배려해 준 걸 감사하게 생각해도 모자랄 상황에 되려 연마다 손해를 보고 있었다.그는 700여 억을 포기하고 손해만 보고 있는 법률사무소를 택한 차설아의 선택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또한 차설아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절대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직접 모든걸 겪어본 후에 재산 재분할 요청할 거라고 확신했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불과 3일밖에 안 지났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차설아와 변호사들은 성도윤이 온 걸 알아채지 못했고, 성도윤도 인사를 건네지 않은 채 곧장 2층 VIP석으로 올라갔다.사도현은 참고 있던 불만을 내뱉았다.“형, 드디어 왔네. 차설아 얘기에 그 바쁜 사람이 바로 달려온 것 좀 봐. 역시 친구보다는 애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네!”“걔랑은 상관없어.”성도윤은 싸늘하게 답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은 곳은 마침 차설아의 맞은편이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자리에 앉은 그는 뚫어져라 차설아만 바라봤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하얀 원피스에 레드립, 청순함과 섹시함이 모두 공존한 차설아는 너무 매혹적이었다!‘설마 미모로 저 사람들을 설득한 건가?’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술을 마셨고 마음속에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형, 내 말 듣고 있어?”사도현은 손을 흔들며 성도윤을 불렀고 투덜거림은 멈출 줄 몰랐다.“그만 좀 봐.
아래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남다른 분위기를 뽐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차설아와 변호사들은 외부와 단절된 듯 즐겁게 술 마시며 놀고 있었고, 그렇게 두 도련님은 찬밥신세가 되었다!어딜 가나 환영만 받던 사도현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홀대에 기분이 상했고 옆에 있는 성도윤을 대신하여 분풀이하듯 거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술 게임 하는데 뭘 이렇게까지 흥분해, 유치하지도 않나?”사람들은 그제야 그들을 발견했고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서로 눈이 마주친 성도윤과 차설아는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봤고 아무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불꽃이 튀고 있다는 걸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옛사장과 현 사장 사이에서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난감한 상황에 놓였고 행여나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나같이 침묵을 유지했다.결국 차설아가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같이 놀래?”“이런 유치한 게임을 누가 좋아한다고...”“그래.”사도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도윤은 이미 자리에 앉았다.어쩔 수 없는 상황에 사도현도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고 옆자리에는 그의 ‘유일한 구원자’ 성우가 있었다.그간 줄곧 미지근한 태도로 성도윤을 대해온 성우는 오늘 기분도 좋고,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저희랑 놀아주신다니 다 같이 간단하게 진실게임 해요. 일단 각자 번호 하나씩 뽑아요. 주사위 굴려서 나온 사람이 아무나 한 명 골라 질문하고 만약 상대방이 답을 못하면 벌칙 받는 거 어때요?”“이럴 줄 알았어, 엄청 유치하네!”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싶은 사도현이었지만, 우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도윤의 모습을 보고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우물쭈물하지 말고 얼른 시작해!’시종일관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며 일 중독인 성도윤이 한가하게 어린애들이랑 이런 유치한 게임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설마 진짜 차설아한테 넘어간 건가?’갑자기 끼어든 두 사람에 분위기는 어색해졌고 게임이
성도윤과 사도현 두 도련님에게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성우는 방금 전 번호표를 나눌 때 일부러 6번을 사도현에게 건네줬다.8대 가문의 도련님들이 서로 30초 동안 키스를 나눈다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짜릿해졌고 정말로 한다면 아마 전설로 남을 것이다.“6번 누구예요, 얼른 일어나세요!”성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들을 보며 물었고 화가 난 사도현은 성우를 가리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너 이 자식 무슨 속셈이야? 감히 우리 형을 갖고 놀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성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무덤덤했다. 변호사 생활하면서 그간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고 사도현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도 성우 앞에서는 꼼짝 못 하며 그를 공손히 대했다.“벌칙을 쿨하게 받으세요. 대표님과 도련님이 저희랑 함께 게임을 하겠다고 한 이상 적어도 기본적인 룰은 지켜야죠.”말을 마친 성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스톱워치를 켰다.“두 분 얼른 하세요. 별거 없어요. 미남 두 명이 키스하는 장면은 아름답게 느껴질 거예요.”사람들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사도현은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왜 다들 날 봐, 나 6번 아니야.”그는 고개를 돌려 성도윤을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형, 그냥 한번 걸어봐. 여자애들이 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키스 30초 한다고 손해 볼 건 없잖아. 정말 운 안 좋게 남자가 걸린다면 내가 이 테이블 뒤집어엎을게.”“6번이 아니라고요?”성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 몇 번이세요?”“나 9번이야.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던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번호표를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쳤다. 정말 9번이었다!성우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9번을 6번으로 착각한 것 같다.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말을 바꾸기도 애매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사람들을 부추겼다.“도대체 6번 누구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상대가 누가 됐든 성도윤이 키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너무 흥미로운 일이었다.“나 아니
몹시 난처해하는 차설아의 모습에 성우는 재빨리 말을 덧붙여 그녀를 도와줬다.“솔직히 저도 이 벌칙은 지루한 것 같네요. 대표님 같은 분한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제가 경솔했어요. 벌칙은 제가 포기할게요.”그의 이중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잡아먹을 기세로 밀어붙일 땐 언제고 새 사장을 위해 편드는 모습이 너무 눈에 훤히 보였다.성도윤은 줄곧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고 어두컴컴한 조명에 비친 그의 싸늘한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봤다.“사람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돌릴 수 있다니, 당신의 매력을 내가 과소평가했네.”“...”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던 차설아는 그저 반듯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왜 갑자기 또 발끈하는 거야? 벌칙 안 받게 했으면 고마워해야지. 표정은 또 왜 저래?’게임은 계속 진행됐고 주사위를 돌리자, 사도현이 나왔다.“하하하!”복수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박장대소했고 골탕 먹이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그는 유부녀와 친하게 지내는 성우가 눈에 거슬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성도윤에게 망신 준 차설아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정말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키스를 지루하다고 느낄 수가 있겠는가?순간 그녀가 성도윤에게 어떤 마음인지 궁금했던 그는 차설아를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남편 사랑해? 첫날밤도 남편이랑 보낸 거야?”난감한 질문이긴 했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성도윤은 착잡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며 오매불망 그녀의 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거절할게요.”사람들의 얼굴에는 실망이 가득 찼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에 부부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고작 게임 하나에 서로 똑같이 행동하는 걸 보니 부부가 맞는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는 침묵이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사도현은 성도윤을 힐끗 쳐다보고선 가치 없는 사람에게 감정 낭비하고 있는 그가 안
클럽에서 나온 차설아는 일행한테 인사를 건넨 뒤 혼자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스치니 정신도 덩달아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날씬한 몸매에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었고 예쁘장한 얼굴에서는 슬픔이 느껴져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많은 남자들이 차를 세워 경적을 울리거나 휘파람을 불며 수작을 부렸고 험악한 눈빛으로 쏘아보자 전부 놀란 채 도망쳤다.그러던 중 또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마음 준비를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안에는 성도윤이었다.험악하던 눈빛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고 마치 모르는 사람인 듯 차가웠다.“같이 갈래?”성도윤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같은 길 아니야!”차설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바로 앞인데 같은 길이 아니라고?’불편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을 성도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어떻게 팬 픽션의 원작자가 될 수 있었을까?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지금 연기를 하는 게 분명했다!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그는 클럽에서 망신당한 일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차설아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핸들을 돌려 고개를 내밀며 다시 한번 얘기했다.“얼른 타, 가면서 법률사무소에 관해서 얘기해줄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야.”“필요 없어.”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며 턱을 높이 들더니 싸늘하고 도도하게 답했다.“적어도 너보다는 잘할 거야.”성도윤의 눈빛은 싸늘하게 변했다.“성우만 해결하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성우가 아니라고!”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이현을 가리키는 것임을 단번에 알아챘다.능력이 뛰어나고 강한 여장부 스타일인 그녀야말로 성운 법률사무소의 진정한 핵심 인물이었다.만약 이현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법률사무소는 가지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골칫덩이로 남게 된다!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은색 스포츠카에는 배경수가 있었고 그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았다. 행여나 차설아가 다치지는 않을까, 뱃속의 두 아이가 놀라지는 않을까 주의를 기울였다.“설아, 넌 정말 말썽꾸러기야. 임신한 채로 술 마시러 나오다니, 시대를 앞서나간 태교 방법인데?”“난 술 안 마셨어.”조수석에 앉은 차설아는 머리를 짚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걱정거리가 많은 모습이었다.털털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배경수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번에 차설아가 성도윤과의 일로 골치 아파하는 걸 알아챘고 떠보듯 물었다.“설아, 아직 완전히 이혼한 건 아니니까 선택은 그 쪽한테 맡기고 임신했다는 사실을 얘기해 보는 건 어때? 내가 관찰했는데 그 사람 너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어. 적어도... 소유욕은 있어.”그렇지 않으면 배경수 차에 올라타는 걸 보고 표정이 굳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남자의 입장으로 볼 때 여자에 대한 소유욕이 남아있는 한 그들 관계는 끝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더군다나 설아가 목숨 걸고 그 사람을 구했으니 널 선택하겠지.”“그만해!”차설아는 그의 말을 자르고선 싸늘하게 노려봤다.“내가 왜 그 사람한테 선택받아야 하는데? 나한테 좋은 게 뭐가 있어? 천대받는 며느리 생활? 아니면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거? 미치지 않고서야 그걸 어떻게 버텨!”소유욕은 사랑이 아니다. 임채원을 대하는 성도윤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맞는 말이야!”정신 차린 차설아의 모습에 배경수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4년 동안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가 정신 차린 모습을 보니 너무 기쁘네! 그래도 아이한테는 아빠가 필요하니까 내가 계속 연기할게.”배경수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애틋함을 보이는 그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차설아는 그를 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맞고 싶어?”순간 움찔한 배경수는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얌전해졌다.“알겠어, 삼촌이야, 삼촌. 이제 됐지?”배
“웃기지 마!”배경윤은 사도현을 밀어내고는 목청을 높였다.“너는 어쩌면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거야? 내가 선택한 바다 별장에 너 같은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어. 미안하지만 나가줄래? 앞으로 내 집에 들어오지 말아줘.”배경윤은 사도현이 어떤 남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쳐 돌아서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 수위 높은 행각을 벌이려고 든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지금으로서 제일 좋은 방법은 사도현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현의 음험한 계획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조각 같은 사도현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경윤아, 지금 네가 한 말 후회하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나한테 울면서 빌어도 소용없어.”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게스트들이 일부러 두 사람을 놀려댔다.“유명한 회사 대표가 경윤 씨만 바라보고 직진하는데 왜 자꾸 내빼는 거예요? 솔직히 마음 있잖아요.”“프로그램의 이름을 >이 아니라 >이라고 바꾸는 게 낫겠어요.”“사도현 씨, 경윤 씨가 지내는 별장에 들어오세요. 어차피 곧 가족이 될 사람들인데 초가집에 살든, 별장에 살든 상관없잖아요.”배경윤은 미간을 매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여러분,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하세요. 사도현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예요. 요트에서 저를 제압하고 그런 짓을 했으니 여성 참가자를 쉽게 보고 함부로 대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저랑 같은 편에 서서 사도현과 맞서 싸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그런 사람이라서 더 무섭다는 말이에요.”소수민은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사도현을 힐끔 쳐다보았다.“저는 차라리 사도현 님처럼 완벽한 남자가 다가와 주길 바랐어요. 그런데 이미 마음은 정해진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죠. 유빈 씨, 이나 씨. 제 말이 맞죠?”장유빈과 양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사도현 씨처럼 멋진 남자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으세요.”명문대 학생 장유빈은 사도현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갑기
소수민이 숙소를 선착순으로 정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올림픽 금메달 선수 하늘과 더 얘기하지 않고 재빨리 달려갔을 것이다.“장 감독님이라면 그럴 줄 알았거든요. 장 감독님이 촬영한 예능을 보면서 어떤 스타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혹시나 해서 먼저 뛰었더니 진짜 선착순이더라고요.”“아까 경윤 씨가 사도현 씨랑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알아요? 게다가 바다가 보이는 별장까지 선택했으니 정말 모든 걸 다 가졌네요.”소수민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수민 씨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저랑 사도현을 보고 있었나요?”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배경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실시간 방송이라 진작에 소문이 났는걸요. 두 사람이 키스하는 장면을 네티즌이 편집해서 올린 모양인데 그게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어요.”“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어! 망신당했으니 어쩌면 좋아.”배경윤은 바다를 쳐다보면서 소리를 질렀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영상이 퍼졌다는 건, 진찬영도 그 영상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사도현,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나랑 찬영 오빠를 갈라놓으려는 수작이잖아.’배경윤은 저 멀리서 진찬영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찬영의 두 눈은 오로지 배경윤을 향해 있었다.“찬, 찬영 오빠...”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모습은 바람이 난 아내가 남편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경윤 씨는 운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전에 나한테 얘기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별장이네요. 바다를 마주 보고 있고 날씨가 따뜻하잖아요.”진찬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네. 정말 좋아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찬영 오빠는 어디에서 지내요?”“아주 운 좋게도 경윤 씨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경윤 씨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식사해요. 이래 보여도 요리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저야 너
배경윤은 제일 빨리 달려갔고 여섯 채의 별장 중에서 가장 근사한 별장을 선택했다.반대로 사도현은 느긋하게 걸어서 마지막으로 남은 별장을 선택했다. 별장이라 하기에는 한없이 누추한 초가집이었고 지붕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낸단 말이에요? 다른 집으로 안내해 주세요.”사도현은 재벌가 도련님으로서 어릴 적부터 큰집에서 자랐다. 그런데 갑자기 초가집에서 지내라니 기가 찼다.“사도현 씨, 정말 죄송하지만 이곳의 규칙을 준수해야 해요. 숙소는 선착순으로 결정되지만 합산 점수가 가장 높은 참가자에게는 숙소를 바꿀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요. 며칠 동안 힘내서 점수를 얻으세요.”사회자 최빈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도현은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지만 연애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면 규칙을 잘 준수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시청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숙소를 바꿀 수 있다고요?”사도현은 턱을 매만지더니 씩 웃으면서 물었다.“어떻게 하면 점수를 얻을 수 있어요?”“밭일을 하거나 가축에게 먹이를 주면 돼요. 바닥에 널린 소똥과 개똥을 치워도 되고요. 아무튼 이곳은 할 일이 아주 많으니 일을 찾아서 하면 점수를 드려요.”그러자 사도현의 표정이 삽시에 굳었다.“연애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을 부려 먹는 프로그램 아니에요? 자꾸 힘든 일만 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아요.”최빈은 어색하게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시다시피 장윤태 감독님이 >을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사랑을 찾으러 온 이곳에서 직접 일하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호감을 느끼는 상대의 마음을 얻으라는 취지라고 했어요.“하! 소똥이나 주우면서 매력을 발산하라는 말이네요? 궂은일만 하는데 어떻게 로맨틱한 분위기가 이루어지겠어요. 감독님도 참 대단해요.”사도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그러고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합산 점수가 제일 높으면 된다는 뜻이죠? 내가 이런 승부욕은 또 있거든요. 다른 남성 참가자한테 뒤처지지 않을 거예요.”사도현은 소
윤설은 화면 속의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배경윤, 네까짓 게 뭔데 내 남자를 차지해! 죽기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해줄 테니 딱 기다려. 연예계라는 곳은 너처럼 멍청한 년이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게.”윤설은 심호흡하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는 인터넷 마케팅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 회사는 수백 개의 계정으로 한 사건의 여론을 조작하는 것에 능했다.“윤설 씨, 오랜만이에요. 고귀하신 분이 어쩐 일로 연락했어요?”“장 사장님, 그동안 너무 받기만 해서 선물이라도 드리려고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예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요즘 장사도 잘되지 않아서 골치 아팠거든요. 한번 들어나 볼까요?”“배경윤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죠? 이 여자가 망신당하게 해주면 돼요.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챙겨드릴 테니 확실하게 해주세요.”“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건 우리 회사가 이 바닥에서 제일 잘해요.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게요.”윤설을 전화를 끊고는 피식 웃었다. 한편, 요트에서 사도현이 돌진한 뒤로 배경윤은 꼼짝하지 못했다.“사도현, 너는 내가 본 남자 중에 제일 뻔뻔한 남자야. 너처럼 뻔뻔하면 못 하는 일이 없겠어.”조각상 같은 사도현의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사도현은 개의치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배경윤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뻔뻔스러운 척했을 뿐이야. 너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여기 왔으니 뭐라도 해야지. 나는 직진할 줄밖에 몰라.”사도현은 평온하게 말했다.“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나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서 왜 계속 확신을 주지 않았어? 너는 진심을 표현할 줄 모르는 멍청이야.”배경윤은 사도현과 사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사도현의 여자가 되려고 애썼지만 고통만 받았기에 다시는 자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너한테 상처 준 걸 많이 후회했어. 너를 잃고 나서 내가 잘못했다는
“읍!”배경윤은 갑자기 돌진한 사도현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집어삼킬 것처럼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편집 없이 실시간으로 방송되었기에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아냈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본 네티즌은 앞다투어 댓글을 달았고 시청률은 기록을 경신했다.[아니, 내가 이런 장면을 봐도 되는 거야? 드라마보다 더 로맨틱하잖아!][키스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줄 알았더니 정말 입을 맞추었어. 유명한 그룹의 대표와 사랑에 빠지는 대본을 나도 받아보고 싶네.][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그 여배우를 더 이상 밀어주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었어. 벌써 새로운 여자랑 놀아나고 있었던 거지!][그럼 배경윤이 첩이네. 첩 주제에 연애 프로그램에 왜 출연하는 거야? 이런 사람을 섭외한 제작진도 이상해.][지금 몇 세기인데 첩을 논해? 고귀한 사도현이 그 여우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다가 지쳤을 뿐이야.][네가 뭔데 우리 윤설을 여우라고 해? 윤설이 사도현한테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네티즌은 의견이 분분했고 댓글이 삽시에 몇천 개씩 달렸다.사도현과 배경윤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경윤을 첩이라고 부르면서 모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윤설의 극성팬들이 윤설을 옹호했다.하지만 대부분 시청자는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장면에 감탄하면서 댓글을 달았다.사도현과 배경윤의 촬영을 맡은 일부 제작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라마 같은 장면을 계속 촬영해야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하지 못해서 장윤태한테 도움을 청했다.“두 사람을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둬. 예능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생각해.”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장윤태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배경윤과 진찬영을 이어주려고 했지만 갑자기 돌진한 사도현 때문에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수줍고 천천히 다가가는 진찬영과 달리, 사도현은 직진하는 남자였다.방송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아무리 잘 짜인 대
“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배경윤은 자신이 사도현과 같은 붉은 공을 뽑았을 때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이지 그 순간 죽고 싶었다.그를 멀리 피해 도망가려 하면 할수록 운명은 계속 그녀와 그를 엮고 있었다.만약 사도현이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거라면 그녀는 거부할 기회가 있었다.하지만 이건 랜덤이었고 그녀가 지금 거부를 한다면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너무도 짜증이 났다.“어쩔 수가 없네요. 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가 없죠!”사도현이 웃음을 참으며 자신이 들고 있는 공으로 배경윤이 들고 있는 공을 툭 쳤다.“만나서 반가워요. 파트너.”그러자 배경윤이 말했다.“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배가 바다 중간까지 갔을 때 제가 실수로 그쪽으로 바닷속에 차버릴 수 있으니까요.”“괜찮아요. 바다에 떨어져도 전 경윤 씨를 쫓아갈 거니까요. 그거 모르죠? 전 예전에 수영 대회에서 우승한 적 있거든요.”사도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배경윤이 아무리 정색하면서 말해도 그는 오히려 더 뻔뻔하게 말했다.그가 살아온 세상엔 약육강식만 존재했다. 그의 인생엔 ‘실패'라는 두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고 한번 꽂힌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체면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옆에 있던 진찬영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가시 돋친 말을 했다.“아무리 하늘의 뜻이라고 해도 성격이 맞지 않으면 안 맞는 거죠. 어차피 배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니까 이런 하늘의 뜻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예요.”말을 마친 후 이내 배경윤을 보며 말했다.“조금만 참아요. 제가 먼저 가서 경윤 씨 기다리고 있을게요.”“네, 찬영 오빠. 제가 비록 다른 사람이랑 같은 배에 타게 되었지만, 마음만은 오빠한테 있다는 거 아시죠? 저 꼭 기다려줘야 해요!!”배경윤은 눈물 닦는 시늉을 하며 손수건을 흔들었다. 누가 보면 해적에게 인질로 붙잡힌 사람인 줄 알 것이다.“걱정하지 마요. 꼭 기다리고 있을게요. 섬이
최빈은 웃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다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그냥 말 그대로 배를 타는 것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이따가 섬에 도착할 때 저희가 여러분께 제비뽑기를 진행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네 개의 팀으로 나뉘게 되겠죠... 같은 색의 공을 뽑는 사람이 같은 배에 타는 겁니다. 말 같은 색 공을 뽑은 두 사람이 한배에 탄다는 의미죠.”최빈의 설명을 들은 그들은 오랫동안 침묵했다.한참 후 하늘이 먼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이런 게임은 너무 식상하네요. 억지로 커플로 엮어주는 거랑 뭐가 다른가요. 만약 남자 둘이거나 여자 둘이 같은 색 공을 뽑은 거라면, 남남 커플 또는 두 여자로 커플로 밀어줄 건가요?”최빈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말이 안 되는 건 아니죠. 저희 프로그램 제목도 ‘사랑스러운 선택'이잖아요.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커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긴 하지만 지금 시대에 동성이 찐 사랑일 때가 많잖아요. 만약 저희 프로그램에서 정말로 동성 커플이 탄생한다면 그럼 시청률은 분명 대박 날 겁니다.”“쯧쯧쯧,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그래도 전 기대가 되네요...”배경윤은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이미 흥미가 생겨버린 그녀는 다소 장난스럽게 말했다.“자극적인 걸 원한다면 제가 자극이 뭔지 보여드릴게요.”“그래요, 맞아요. 저희가 두려워할 건 없죠. 저 소수민은 남자든 여자든 전부 환영해요. 그래도 경윤 씨처럼 귀엽고 예쁜 사람이 저랑 같은 배에 탔으면 좋겠네요!”소수민은 극강의 E였다. 처음부터 배경윤과 친해지려고 했고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정말로 ‘어울리는' 것 같았다.“귀엽다고요?”사도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귀엽다는 것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안 귀여운가요? 전 우리 경윤 씨가 아주 귀엽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얼굴부터 귀엽잖아요. 볼살도 통통하고 피부도 아기들처럼 보드랍잖아요
성도윤은 부정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았다.그는 이 일을 떠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불리했으니까.“만약 정말로 수술할 거면 그럼... 집도의를 잘 알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누군가 무슨 수를 썼을 수도 있으니까.”차설아는 원이가 들은 소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랐으니 이렇게라도 주의하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뭐라도 알고 있는 거야?”“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당신도 저처럼 원수 집안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주의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원수 집안이 많다고?”성도윤은 미간을 구기며 따져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아니요. 전 아주 안전해요. 그 사람들이 저한테 무슨 짓을 하기엔 실력이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죠.”차설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여하간에 그녀는 세계 살수 랭킹 1위에 등극한 사람이었으니까.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을 대는 건 정말이지 멍청한 짓이었다.아무리 그녀가 지금 병원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자신이 가득하군. 그래도 조심해.”성도윤은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당신도요. 조심해요.”차설아도 당부했다.이 대화는 두 사람에게 다른 형식의 고백과 다름이 없었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성도윤이 나간 뒤 창밖은 어느새 어둠으로 가득했다.졸음이 쏟아졌던 차설아는 아무 생각도 없이 누워 잠을 잤다.오늘 밤의 병실은 이상하게도 향기로웠다.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의식도 흐릿했다.어두운 곳에서 지켜보던 누군가는 차설아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싸늘하게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데려가!”...사흘 후. 연애 프로그램 ‘사랑스러운 선택'이 촬영을 들어가게 되는 날이 되었다.촬영 장소는 해안시에서 몇십 km 떨어진 작은 섬에서 진행하게 되었다.이번 게스트에
선우시원은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며 조심하라고 했다.최근 선우 가문과 차씨 가문이 협력 관계를 달성했던지라 꽤나 많은 세력들이 뒤에서 몰래 그들을 공격하려는 게 보였다.경제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투자자가 갑자기 투자를 철회한다거나 제조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상회에서 찾아와 온갖 트집을 잡았다. 또 가끔 개인적인 이유로 찾아와 피해를 주곤 했다.선우시원이든 차설아든 그동안 많은 알지 못하는 세력에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이틀 전에도 차성철는 자신의 차 아래서 폭탄 유도 장치를 발견했고 시동을 걸 때 누군가 브레이크에 손을 댔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차성철은 행여나 차설아가 걱정하게 될까 봐 이 사실을 숨겼다.하지만 선우시원은 차설아가 이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난 이 갑작스러운 추락 사고가 누군가 뒤에서 계획한 일이라고 생각해. 분명 우연이 아닐 거야!”선우시원은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알아. 그래서 조심하려고.”차설아는 선우시원의 입에서 들은 소식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나랑 오빠가 고작 며칠 안일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고 누군가 벌써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네.”“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미리 퇴원하는 건 어때? 병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틈새로 숨어 손을 쓰기 쉬울 거야. 집이라면 여기보단 안전할 것 같은데.”선우시원이 차설아에게 제안했다.며칠 전 차성철도 그녀에게 예정보다 앞당겨 퇴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었다. 여러 방면을 고려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기에 퇴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퇴원하는 것이 그녀의 안전에도 좋을 것 같았다.“일단 생각은 해볼게!”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녀의 허리는 꽤나 회복되었다. 다만 미련이 남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해이해졌다고 생각했다.“내일. 내일 내가 퇴원할게.”차설아는 짙은 한숨을 내쉬고 결정을 내렸다.세상엔 존재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