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일 뒤.해안시에서 유명한 ‘별밤’ 클럽은 격조 있는 우아한 분위기에 상하 2층으로 나뉘어 있다.사도현과 강진우는 탁 트인 시야에 프라이버시까지 보장할 수 있는 2층 VIP석에 앉아있었다.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성도윤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도윤 형 왜 아직도 안 와? 골드 3인방 4년 만의 모임인데 설마 이렇게 바람맞는 건가?”사도현은 술잔을 들고 초조해하며 클럽 입구를 살폈다.“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만나기로 한 건데, 오늘 못 만나면 정말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골드 3인방 중 맏형인 강진우는 줄곧 온화함을 유지하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침착해. 도윤이 성격 너도 잘 알잖아. 기분이 수시로 변하는 녀석인데 우리가 바람맞는 것도 이상한 것 없잖아?”그러나 오직 성도윤만이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었기에 사도현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안 되겠어, 바로 전화해 볼 거야!”그는 핸드폰을 꺼내 성도윤의 번호를 눌렀다.그 시각 한창 일하느라 바쁜 성도윤은 싸늘한 말투로 기다리지 말라고 전했다.‘정말 안 올 생각이야?’그는 일 중독자인 성도윤을 불러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던 순간 클럽으로 들어오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저마다 화려한 모습이었다.그중 하얀 원피스에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이 가장 돋보였는데 바로 차설아였다!그녀는 웃음꽃을 활짝 피운 채 함께 온 비슷한 또래의 남자한테 귓속말하고 있었고 둘은 한없이 친근해 보였다.그는 성도윤이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형, 무조건 와! 차설아 지금 웃으면서 다른 남자랑 껴안고 있어.”핸드폰 너머로 정적이 흘렀고 곧이어 노트북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별밤 클럽? 지금 바로 갈게.”강진우도 차설아를 발견하고선 부드럽고 점잖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도윤이 와이프 저번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네, 참 재밌는 여자야.”그 시각 차설아는 성우 일행과 함께 1층의 테이블에 앉았다.불과 사흘 전만 해도 눈
성도윤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성우가 술을 따르고 있지?’삼 년 전, 성대 그룹이 성운 법률사무소를 인수했을 때 성우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그러나 업무 능력이 뛰어났던 성우는 성대 그룹의 모든 법무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했고 그의 실력을 생각하며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관건적인 순간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기에 돈을 벌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근 몇 년 동안 사무소에 일절 손대지 않았다.배려해 준 걸 감사하게 생각해도 모자랄 상황에 되려 연마다 손해를 보고 있었다.그는 700여 억을 포기하고 손해만 보고 있는 법률사무소를 택한 차설아의 선택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또한 차설아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절대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직접 모든걸 겪어본 후에 재산 재분할 요청할 거라고 확신했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불과 3일밖에 안 지났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차설아와 변호사들은 성도윤이 온 걸 알아채지 못했고, 성도윤도 인사를 건네지 않은 채 곧장 2층 VIP석으로 올라갔다.사도현은 참고 있던 불만을 내뱉았다.“형, 드디어 왔네. 차설아 얘기에 그 바쁜 사람이 바로 달려온 것 좀 봐. 역시 친구보다는 애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네!”“걔랑은 상관없어.”성도윤은 싸늘하게 답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은 곳은 마침 차설아의 맞은편이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자리에 앉은 그는 뚫어져라 차설아만 바라봤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하얀 원피스에 레드립, 청순함과 섹시함이 모두 공존한 차설아는 너무 매혹적이었다!‘설마 미모로 저 사람들을 설득한 건가?’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술을 마셨고 마음속에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형, 내 말 듣고 있어?”사도현은 손을 흔들며 성도윤을 불렀고 투덜거림은 멈출 줄 몰랐다.“그만 좀 봐.
아래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남다른 분위기를 뽐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차설아와 변호사들은 외부와 단절된 듯 즐겁게 술 마시며 놀고 있었고, 그렇게 두 도련님은 찬밥신세가 되었다!어딜 가나 환영만 받던 사도현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홀대에 기분이 상했고 옆에 있는 성도윤을 대신하여 분풀이하듯 거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술 게임 하는데 뭘 이렇게까지 흥분해, 유치하지도 않나?”사람들은 그제야 그들을 발견했고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서로 눈이 마주친 성도윤과 차설아는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봤고 아무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불꽃이 튀고 있다는 걸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옛사장과 현 사장 사이에서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난감한 상황에 놓였고 행여나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나같이 침묵을 유지했다.결국 차설아가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같이 놀래?”“이런 유치한 게임을 누가 좋아한다고...”“그래.”사도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도윤은 이미 자리에 앉았다.어쩔 수 없는 상황에 사도현도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고 옆자리에는 그의 ‘유일한 구원자’ 성우가 있었다.그간 줄곧 미지근한 태도로 성도윤을 대해온 성우는 오늘 기분도 좋고,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저희랑 놀아주신다니 다 같이 간단하게 진실게임 해요. 일단 각자 번호 하나씩 뽑아요. 주사위 굴려서 나온 사람이 아무나 한 명 골라 질문하고 만약 상대방이 답을 못하면 벌칙 받는 거 어때요?”“이럴 줄 알았어, 엄청 유치하네!”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싶은 사도현이었지만, 우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도윤의 모습을 보고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우물쭈물하지 말고 얼른 시작해!’시종일관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며 일 중독인 성도윤이 한가하게 어린애들이랑 이런 유치한 게임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설마 진짜 차설아한테 넘어간 건가?’갑자기 끼어든 두 사람에 분위기는 어색해졌고 게임이
성도윤과 사도현 두 도련님에게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성우는 방금 전 번호표를 나눌 때 일부러 6번을 사도현에게 건네줬다.8대 가문의 도련님들이 서로 30초 동안 키스를 나눈다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짜릿해졌고 정말로 한다면 아마 전설로 남을 것이다.“6번 누구예요, 얼른 일어나세요!”성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들을 보며 물었고 화가 난 사도현은 성우를 가리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너 이 자식 무슨 속셈이야? 감히 우리 형을 갖고 놀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성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무덤덤했다. 변호사 생활하면서 그간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고 사도현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도 성우 앞에서는 꼼짝 못 하며 그를 공손히 대했다.“벌칙을 쿨하게 받으세요. 대표님과 도련님이 저희랑 함께 게임을 하겠다고 한 이상 적어도 기본적인 룰은 지켜야죠.”말을 마친 성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스톱워치를 켰다.“두 분 얼른 하세요. 별거 없어요. 미남 두 명이 키스하는 장면은 아름답게 느껴질 거예요.”사람들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사도현은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왜 다들 날 봐, 나 6번 아니야.”그는 고개를 돌려 성도윤을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형, 그냥 한번 걸어봐. 여자애들이 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키스 30초 한다고 손해 볼 건 없잖아. 정말 운 안 좋게 남자가 걸린다면 내가 이 테이블 뒤집어엎을게.”“6번이 아니라고요?”성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 몇 번이세요?”“나 9번이야.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던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번호표를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쳤다. 정말 9번이었다!성우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9번을 6번으로 착각한 것 같다.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말을 바꾸기도 애매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사람들을 부추겼다.“도대체 6번 누구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상대가 누가 됐든 성도윤이 키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너무 흥미로운 일이었다.“나 아니
몹시 난처해하는 차설아의 모습에 성우는 재빨리 말을 덧붙여 그녀를 도와줬다.“솔직히 저도 이 벌칙은 지루한 것 같네요. 대표님 같은 분한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제가 경솔했어요. 벌칙은 제가 포기할게요.”그의 이중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잡아먹을 기세로 밀어붙일 땐 언제고 새 사장을 위해 편드는 모습이 너무 눈에 훤히 보였다.성도윤은 줄곧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고 어두컴컴한 조명에 비친 그의 싸늘한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봤다.“사람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돌릴 수 있다니, 당신의 매력을 내가 과소평가했네.”“...”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던 차설아는 그저 반듯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왜 갑자기 또 발끈하는 거야? 벌칙 안 받게 했으면 고마워해야지. 표정은 또 왜 저래?’게임은 계속 진행됐고 주사위를 돌리자, 사도현이 나왔다.“하하하!”복수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박장대소했고 골탕 먹이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그는 유부녀와 친하게 지내는 성우가 눈에 거슬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성도윤에게 망신 준 차설아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정말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키스를 지루하다고 느낄 수가 있겠는가?순간 그녀가 성도윤에게 어떤 마음인지 궁금했던 그는 차설아를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남편 사랑해? 첫날밤도 남편이랑 보낸 거야?”난감한 질문이긴 했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성도윤은 착잡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며 오매불망 그녀의 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거절할게요.”사람들의 얼굴에는 실망이 가득 찼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에 부부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고작 게임 하나에 서로 똑같이 행동하는 걸 보니 부부가 맞는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는 침묵이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사도현은 성도윤을 힐끗 쳐다보고선 가치 없는 사람에게 감정 낭비하고 있는 그가 안
클럽에서 나온 차설아는 일행한테 인사를 건넨 뒤 혼자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스치니 정신도 덩달아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날씬한 몸매에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었고 예쁘장한 얼굴에서는 슬픔이 느껴져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많은 남자들이 차를 세워 경적을 울리거나 휘파람을 불며 수작을 부렸고 험악한 눈빛으로 쏘아보자 전부 놀란 채 도망쳤다.그러던 중 또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마음 준비를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안에는 성도윤이었다.험악하던 눈빛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고 마치 모르는 사람인 듯 차가웠다.“같이 갈래?”성도윤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같은 길 아니야!”차설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바로 앞인데 같은 길이 아니라고?’불편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을 성도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어떻게 팬 픽션의 원작자가 될 수 있었을까?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지금 연기를 하는 게 분명했다!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그는 클럽에서 망신당한 일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차설아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핸들을 돌려 고개를 내밀며 다시 한번 얘기했다.“얼른 타, 가면서 법률사무소에 관해서 얘기해줄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야.”“필요 없어.”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며 턱을 높이 들더니 싸늘하고 도도하게 답했다.“적어도 너보다는 잘할 거야.”성도윤의 눈빛은 싸늘하게 변했다.“성우만 해결하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성우가 아니라고!”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이현을 가리키는 것임을 단번에 알아챘다.능력이 뛰어나고 강한 여장부 스타일인 그녀야말로 성운 법률사무소의 진정한 핵심 인물이었다.만약 이현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법률사무소는 가지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골칫덩이로 남게 된다!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은색 스포츠카에는 배경수가 있었고 그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았다. 행여나 차설아가 다치지는 않을까, 뱃속의 두 아이가 놀라지는 않을까 주의를 기울였다.“설아, 넌 정말 말썽꾸러기야. 임신한 채로 술 마시러 나오다니, 시대를 앞서나간 태교 방법인데?”“난 술 안 마셨어.”조수석에 앉은 차설아는 머리를 짚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걱정거리가 많은 모습이었다.털털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배경수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번에 차설아가 성도윤과의 일로 골치 아파하는 걸 알아챘고 떠보듯 물었다.“설아, 아직 완전히 이혼한 건 아니니까 선택은 그 쪽한테 맡기고 임신했다는 사실을 얘기해 보는 건 어때? 내가 관찰했는데 그 사람 너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어. 적어도... 소유욕은 있어.”그렇지 않으면 배경수 차에 올라타는 걸 보고 표정이 굳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남자의 입장으로 볼 때 여자에 대한 소유욕이 남아있는 한 그들 관계는 끝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더군다나 설아가 목숨 걸고 그 사람을 구했으니 널 선택하겠지.”“그만해!”차설아는 그의 말을 자르고선 싸늘하게 노려봤다.“내가 왜 그 사람한테 선택받아야 하는데? 나한테 좋은 게 뭐가 있어? 천대받는 며느리 생활? 아니면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거? 미치지 않고서야 그걸 어떻게 버텨!”소유욕은 사랑이 아니다. 임채원을 대하는 성도윤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맞는 말이야!”정신 차린 차설아의 모습에 배경수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4년 동안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가 정신 차린 모습을 보니 너무 기쁘네! 그래도 아이한테는 아빠가 필요하니까 내가 계속 연기할게.”배경수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애틋함을 보이는 그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차설아는 그를 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맞고 싶어?”순간 움찔한 배경수는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얌전해졌다.“알겠어, 삼촌이야, 삼촌. 이제 됐지?”배
다음 날.차설아는 베이지 캐주얼 점프슈트 차림에 깔끔한 포니테일을 묶은 채로 클라우드 리조트로 향했다. 청순한 차림 덕분에 그녀는 마치 방금 학교를 졸업한 여대생 같았다.클라우드 리조트는 해안시에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숲에 위치한 리조트이다.울창한 나무와 산뜻한 공기는 물론이고, 천연 온천, 골프장에 천연 낚시터 등 시설이 갖춰져 있어 많은 부자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휴가를 즐기곤 했다.길이 좀 막혔기 때문에 차설아가 클라우드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에는 마침 10시 1분이었다. 1분 지각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직 한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시끌벅적한 채 클라우드 리조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중간에 둘러싸인 사람은 바로 차설아와 만나기로 약속한 남우 그룹 사장인 남해진이었다.남우 그룹은 실력이 탄탄하고 든든한 뒷배가 있는 해안시 탑급 투자 회사였다. 성대 그룹의 오래된 사업 파트너이기도 하다.이번 성대 그룹에서 일어난 클라이언트 데이터 누설 이슈는 남우 그룹에게도 막심한 손해를 안겨줬다.그래서 남우 그룹은 성대 그룹과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사업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차설아는 빠르게 걸어가더니 한 무리 우람한 남자들의 앞을 가로지르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예의를 갖춰 말했다.“남해진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차설아라고 합니다. 말씀으로만 듣던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시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그녀는 여리여리하고 순해 보였지만 의외로 기가 센 여자였다. 카리스마 있는 말투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를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남해진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남우 그룹이 성대 그룹과 계약을 해지한 이후로 그는 포식자들이 탐내는 먹이로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설아처럼 그와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찾아왔기에 그는 차설아가 안중에도 없었다.“차설아 씨, 나 당신을 알아요. 나락으로 떨어진 차씨 집안 출신에, 지금 성씨 집안의 당정한 며느리로서 살고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