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휴식을 취한 차설아는 몸이 회복되었다.차설아는 일찍이 프린트해둔 법률 사무소 양도서를 가지고 성대 그룹으로 가서 성도윤의 사인을 받으려 했다.오늘 성대 그룹의 분위기는 아주 엄숙했다. 건물 외곽에 경계선이 쳐져 있었는데, 중요한 인물이 외빈을 데리고 시찰하러 왔다고 해서 많은 언론이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차설아는 경계선 밖에 막혀, 시찰이 끝나야 빌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멀리서 검은 양복 차림의 성도윤이 보였다. 늘씬한 몸매의 그는 빌딩의 가장 중심에 서서 우아하고 여유롭게 몇몇 시찰 원과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분위기, 타고난 고귀한 기질은 언제나 의기양양하고 매혹적이었다.이때 구경꾼들 사이에서 갑자기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나 들어갈 거야! 당장 비켜. 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아?”남자는 경계선을 뚫고 성도윤을 찾으러 가겠다고 떠들고 있었다.허광희!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허광희는 여전히 무례하게 성도윤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조카사위, 조카사위, 날 좀 보게나. 난 설아의 외삼촌이야. 내가 도저히 힘들어서 자네를 찾아왔네. 나 좀 살려주게나!”이 소리는 이내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의 시선을 끌었고, 잇달아 카메라들이 허광희를 비추기 시작했다.‘창피해!’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냉담한 얼굴로 걸어가서 말했다.“뭔 낯짝으로 여기서 소란을 피워요!”“설아, 너도 있었구나. 너무 다행이야. 네 남편보고 좀 오라고 해. 재산 분할에 관해 상의해야지.”“난 네 친정 식구야. 네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어?”허광희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작정인지 염치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그는 오늘 성대 그룹에 중요한 행사가 있다는 것을 노리고, 언론의 힘으로 성도윤을 압박하여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차설아는 너무 창피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무엇보다, 이 일로 성도윤을 화나게 한다면 지분 양도건도 물 건너 갈지 모른다.“
성도윤의 막강한 카리스마에 허광희는 다소 기가 눌렸다.하지만 많은 카메라가 그들을 보고 있으니, 허광희는 다시 자신감을 찾았다.“조카사위,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허광희는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말했다.“내 조카는 자네 집에 시집을 가서 줄곧 본분을 다했어. 그런데 지금 이혼하겠다고 하고, 고작 법률 사무소 하나만 챙겨주면 설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이 큰 그룹에서 고작 법률 사무소 하나만 내어주다니!”이 말이 나오자 모두 떠들썩했고 기자들은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내 조카는 낯가죽도 얇고 겁이 많아서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룻밤을 사정했어...”“다른 말은 필요 없고, 우리한테 100억을 주면 깨끗하게 물러나지.”허광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입 다물어!”차설아는 이를 갈며 말했다.차설아가 한강에 뛰어들어 죽어도 누명을 씻을 수 없게 되었다. 차설아는 진심으로 이 무뢰한 인간을 손으로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차설아는 조심스럽게 성도윤을 바라보았다. 그가 화낼 줄 알았는데... 남자는 오히려 차분했다. 여전히 차갑고 거리감 느껴지는 모습이었다.큰 키의 성도윤은 하늘의 신처럼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며 몸을 약간 돌려 말했다.“무열아, 재무실로 데리고 가.”그리고 긴 다리로 곧장 자리를 떠났다.‘이게... 끝이라고?’허광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100억을 이렇게 쉽게 얻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일이 어렵게 풀릴까 봐 허광희는 작은 칼까지 준비해서 목숨으로 협박할 생각이었다.‘조카사위가 이렇게 시원시원할 줄 알았다면 더 달라고 할걸!’성도윤은 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설아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안 따라와?”차설아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성도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다시 시찰단으로 돌아와 그녀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차설아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단정하고 참한 성도윤의 아내로 돌아갔다. 그런 차설아의 모습에 시찰단은 몇 번이고 칭찬을 아끼지
바람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건들건들 차설아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어머, 사모님도 계셨네? 마침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는데 주인공이 빠지면 섭섭하죠.”차설아는 당연히 바람의 말의 다른 뜻을 이해했다.전에 바람과 협력하지 않으면 차설아가 스파크라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었다. 이제 보니 겁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성도윤이 법률 사무소 주식 양도서에 서명하는 것을 기다려야 하므로 그녀가 스파크라는 정체는 절대 지금 드러나서는 안 된다.“바람 씨, 오랫동안 존경해 왔어요. 제가 먼저 따로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결과는 이미 정해졌지만, 차설아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발악해 보기로 했다.바람이 자비를 베풀 수도 있지 않은가?“당연하죠.”바람의 좁고 긴 눈망울은 목적을 달성한 듯한 교활함을 드러내며 웃었다.“사모님께서 특별히 요청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두 사람은 동시에 그들 사이에 있는 성도윤을 바라보았다.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이었다.성도윤의 원래 냉철한 얼굴은 더욱 차가워졌다.“5분 드리죠.”성도윤은 거만한 태도로 바람에게 말한 후, 곧장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모습은 마치 빙산처럼 느껴졌고, 지나가는 곳마다 한기가 서렸다.성도윤이 떠나자 차설아는 바람을 데리고 외진 곳에 끌고 갔다. 긴 손가락으로 바람의 목덜미를 잡으며 살벌하게 벽에 눌렀다. “경고하는데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내 신분을 폭로한다면 당장 네 목을 부러뜨릴 테니까!”바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오히려 흥분한 모습이었다.“의외네? 거장 스파크는 코드만 잘 치는 게 아니라 주먹도 일품이야. 역시 보물이었어. 당신과 더 협력하고 싶은데 어쩌지?”“닥쳐!”차설아는 행여나 다른 사람이 듣거나 보게 될까 봐 즉시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더 바짝 붙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촐싹대던 바람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얌전하게 침을 꿀꺽 삼켰다.
차설아는 심호흡하고 성도윤의 사무실로 들어갔다.훤칠한 키, 넓은 어깨에 긴 다리까지 더해지니 창가 옆에 서 있는 그의 다부진 몸매가 유난히 더 시선을 사로잡았다.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주변공기마저 싸늘하게 만들었고, 보아하니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차설아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주식 양도서를 꺼내더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도윤 씨, 시간 있을 때 여기에 사인 좀 해줘. 일찌감치 재산 분배를 완벽하게 해놔야 며칠 뒤에 깔끔하게 이혼 증명서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아.”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몸을 돌렸고, 따스한 햇볕에 비친 그의 얼굴은 부드럽고 매혹적이었다. “이혼 증명서로 뭘 하려고 이렇게 재촉하는 거야? 설명해야지?”“설명?”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설명할 것도 없어. 첫째, 허광희가 당신한테 100억 요구한 건 그 사람 생각이고 믿든 말든 나랑은 아무런 상관없어. 둘째, 성대 그룹의 고객 시스템은 처음부터 허점이 많았고 공격받는 건 시간문제였어. 난 그저 당신들을 위해 미리 지뢰를 제거한 거고, 복수하고 싶으면 그냥 해. 셋째, 이혼 합의서에 법률사무소는 내 명의로 되어있어. 당신이 사인을 안 한다고 해도 법원에서 강제 집행할 거야.”성도윤은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한참이 지나서야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소리야?”“내가 충분히 설명했잖아, 우물쭈물하지 말고 얼른 사인해!”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아주는 성도윤이었기에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걸 예상하였다.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방금 코드 쓰던 남자가 네가 자기 전 여자친구라고 하더라. 나랑 이혼하는 것도 다시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줘.”“뭐라고? 전 여자친구?”그의 말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한참 동안 하고 있던데, 고작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했다고?”“안 그러면?”“아니,
“뭘?”차설아는 마치 질식 전 산소를 되찾은 물고기처럼 두 눈이 반짝 빛나더니 생각에 잠겼다.“주식 양도서에 사인해달라며. 시간 지나면 안 할 거야!”도도한 태도의 성도윤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설마 동의한 거야?!’차설아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재빨리 양도서와 사인펜을 공손하게 남자에게 건넸다.“여기!”행여나 자기 행동이나 표정이 그의 눈에 거슬려 갑자기 변심하지 않을까 긴장한 채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성도윤은 싸늘한 표정으로 서류에 깔끔하게 사인을 한 뒤 아무 감정 없이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충고하는데 이혼 협의서에 적힌 내용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뒤에서 이상한 일 꾸미지 말고.”차갑고 잔인한 그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고 차설아는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허광희의 헛소리를 잊고 흔쾌히 양도서에 사인을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차설아를 믿지 않았다...하지만 이제는 아무 상관 없기에 차설아도 뭔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이혼하게 된 마당에 어떤 이미지로 남을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역시도 깔끔하게 이혼하려고 흔쾌히 서류에 사인한 게 틀림없다.“협조해 줘서 고마워. 별다른 일 없다면 아마 증명서 받는 날에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겠네. 이제 앞으로 각자 제 갈 길 가자고.”말을 마친 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고 쿨하게 자리를 떴다.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하루라도 빨리 그한테서 벗어나고 싶다는 차설아의 다짐이 눈에 보였다.그는 700여 억을 포기하고 기어코 법률사무소를 원하는 차설아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성운 법률사무소에는 하나같이 다 쓸모없고 괴팍한 인간들뿐인데 정말 잘 버틸 수 있을까?’...다음날, 차설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세련된 오피스룩에 플랫 구두를 신고 씩씩하게 법률사무소로 향했다.이 법률사무소는 성대 그룹 소속이었지만 사실상
그는 수수한 옷차림에 마스크를 쓴 채 사무실 테이블 위에 있는 화초의 나뭇잎을 하나하나 정성껏 닦고 있었다.남자는 차설아의 목소리를 듣고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당신이 우리 법률사무소에 새로 오게 된 사장이에요? 그 성도윤한테 버림받았다던 불쌍한 여자?”차설아는 난처해하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부분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마스크를 벗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40대 남성이었고 자료에서 봤던 오경철의 모습과 똑같았다.배경수가 보낸 자료에 따르면 성운 법률사무소는 세 명의 동업자로 이뤄졌고 여자 한 명에 남자 두 명, 오경철은 그중 한 명이었다.그는 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연륜 있어 보이는 모습은 다가가기 쉬울 것처럼 보였지만 겉모습과 달리 쉽게 마음을 터놓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서로 만난 적도 없고 이런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절 알아보신 거죠?”“아주 간단해요.”차설아는 솔직하게 말했다.“사장으로서 직원들 사전 조사하는 건 필수 아닌가요? 오 변호사님은 식물 가꾸는 걸 좋아하죠. 정말로 청소부였으면 잎사귀 하나하나 닦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을 거예요.”“재밌네요.”오경철은 흥미롭다는 듯 차설아를 보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전 조사를 해보셨다면 우리가 쉬운 상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시겠네요? 똑똑한 사람이라면 알아서 포기해요.”“공교롭게도 전 도전적인 일을 좋아해요.”차설아의 목소리에서는 열정이 느꼈고 반짝 빛나는 두 눈은 마치 포기를 모르는 한 마리의 치타처럼 굳세고 강인했다.차무진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그런 유전자를 몸에 지닌 채 어떻게 쉽게 물러설 수 있겠는가!“성도윤이 3년 동안 해내지 못한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전 3년이 아니라 3일이면 됩니다!”“젊은 사람이 용기가 대단하네요. 정신적으로나마 응원할게요.”오경철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인수한 법률사무소는
삼 일 뒤.해안시에서 유명한 ‘별밤’ 클럽은 격조 있는 우아한 분위기에 상하 2층으로 나뉘어 있다.사도현과 강진우는 탁 트인 시야에 프라이버시까지 보장할 수 있는 2층 VIP석에 앉아있었다.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성도윤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도윤 형 왜 아직도 안 와? 골드 3인방 4년 만의 모임인데 설마 이렇게 바람맞는 건가?”사도현은 술잔을 들고 초조해하며 클럽 입구를 살폈다.“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만나기로 한 건데, 오늘 못 만나면 정말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골드 3인방 중 맏형인 강진우는 줄곧 온화함을 유지하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침착해. 도윤이 성격 너도 잘 알잖아. 기분이 수시로 변하는 녀석인데 우리가 바람맞는 것도 이상한 것 없잖아?”그러나 오직 성도윤만이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었기에 사도현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안 되겠어, 바로 전화해 볼 거야!”그는 핸드폰을 꺼내 성도윤의 번호를 눌렀다.그 시각 한창 일하느라 바쁜 성도윤은 싸늘한 말투로 기다리지 말라고 전했다.‘정말 안 올 생각이야?’그는 일 중독자인 성도윤을 불러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던 순간 클럽으로 들어오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저마다 화려한 모습이었다.그중 하얀 원피스에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이 가장 돋보였는데 바로 차설아였다!그녀는 웃음꽃을 활짝 피운 채 함께 온 비슷한 또래의 남자한테 귓속말하고 있었고 둘은 한없이 친근해 보였다.그는 성도윤이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형, 무조건 와! 차설아 지금 웃으면서 다른 남자랑 껴안고 있어.”핸드폰 너머로 정적이 흘렀고 곧이어 노트북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별밤 클럽? 지금 바로 갈게.”강진우도 차설아를 발견하고선 부드럽고 점잖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도윤이 와이프 저번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네, 참 재밌는 여자야.”그 시각 차설아는 성우 일행과 함께 1층의 테이블에 앉았다.불과 사흘 전만 해도 눈
성도윤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성우가 술을 따르고 있지?’삼 년 전, 성대 그룹이 성운 법률사무소를 인수했을 때 성우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그러나 업무 능력이 뛰어났던 성우는 성대 그룹의 모든 법무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했고 그의 실력을 생각하며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관건적인 순간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기에 돈을 벌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근 몇 년 동안 사무소에 일절 손대지 않았다.배려해 준 걸 감사하게 생각해도 모자랄 상황에 되려 연마다 손해를 보고 있었다.그는 700여 억을 포기하고 손해만 보고 있는 법률사무소를 택한 차설아의 선택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또한 차설아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절대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직접 모든걸 겪어본 후에 재산 재분할 요청할 거라고 확신했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불과 3일밖에 안 지났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차설아와 변호사들은 성도윤이 온 걸 알아채지 못했고, 성도윤도 인사를 건네지 않은 채 곧장 2층 VIP석으로 올라갔다.사도현은 참고 있던 불만을 내뱉았다.“형, 드디어 왔네. 차설아 얘기에 그 바쁜 사람이 바로 달려온 것 좀 봐. 역시 친구보다는 애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네!”“걔랑은 상관없어.”성도윤은 싸늘하게 답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은 곳은 마침 차설아의 맞은편이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자리에 앉은 그는 뚫어져라 차설아만 바라봤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하얀 원피스에 레드립, 청순함과 섹시함이 모두 공존한 차설아는 너무 매혹적이었다!‘설마 미모로 저 사람들을 설득한 건가?’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술을 마셨고 마음속에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형, 내 말 듣고 있어?”사도현은 손을 흔들며 성도윤을 불렀고 투덜거림은 멈출 줄 몰랐다.“그만 좀 봐.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