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게 성도윤의 일행들을 만나 쇼핑에 흥미를 잃은 차설아는 배경윤과 쇼핑몰에서 나와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다음날, 차설아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그녀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올리고, 꽃집에 가서 흰색 데이지 한 다발을 산 뒤, 차를 몰고 묘지로 향했다.3월 3일.차설아 부모님의 기일이다.부모님이 투신해 돌아가신 지 4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한 번도 제사를 지낸 적이 없었다.남들은 모두 차설아가 성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조상도 모른 체 하는 냉혈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직 차설아만이 집안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다.차설아는 그들이 용감하지 못한 것에 화가 났고, 너무 나약한 것에 화가 났고, 또 어리석은 방식으로 떠나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둔 것에 화가 났다.그리고 그녀가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도 감히 이 사실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이 용기는 뱃속의 두 아이가 그녀에게 준 것이다.이번 제사를 지낸 후, 그녀는 해안 시를 떠날지도 모른다.다음에 또 언제 돌아올지 그녀 자신도 모른다...그러나 묘지 앞에 이르자 차설아는 멍해졌다.합장된 묘비 앞에는 꽃다발이 늘어서 있었다.꽃은 싱싱하고 정교해서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4년 전 그녀의 집이 변을 당한 이후로 친척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일부러 차가를 멀리하고 있어 올 사람이 없었다.그렇다면 이 꽃은 누가 보낸 것일까?이런 의문을 품고 차설아는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때 꽃다발 옆에 있는 호박 펜던트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차설아는 조심스럽게 주웠다.이 펜던트는 매우 정교하고 안에 특수한 문자가 조각되어 있었다.차설아는 왠지 눈에 익은 것 같았지만, 누가 착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차설아는 펜던트를 호주머니에 넣고, 기회가 되면 원주인에게 돌려주려 했다.묘지를 떠날 때, 차설아는 한 남
묘지를 떠난 차설아는 집으로 돌아갔다.차설아가 집에 막 도착했을 때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받아보니 뜻밖에도 임채원이었다.임채원은 이왕의 오만함과 안하무인의 태도를 버리고 아주 상냥한 말투였다.“설아 씨, 내가 요즘 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설아 씨 물건이 아직 있더라고. 미안하지만 오늘 시간 되면 가지러 올래?” ‘임채원이 언제 이렇게 친절했지?’차설아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또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누가 알겠는가?하지만 차설아는 물러서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좋아, 오늘 갈게.”저번에 급하게 나오느라 확실히 중요한 물건들을 챙기지 못했었다.임채원이 전화를 하지 않았어도 시간을 내서 별장으로 가려고 했었다.저녁 8시쯤 차설아는 택시를 타고 성가 별장으로 향했다.성가 별장의 도우미는 원래 여주인이 돌아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권세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차설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별장 문으로 들어갔다.차설아가 4년 동안 머물렀던 이곳, 그녀가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아쉽게도... 사람이 변했다.차설아는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슬퍼졌다.‘흥, 4년의 청춘을 이런 귀신 같은 곳에서 낭비했다니, 정말 재수 없군!’호화로운 별장 홀은 유난히 떠들썩했다.새 주인 임채원뿐만 아니라 소이서, 그리고 소이서의 남자친구 육장훈도 있었다.차설아가 들어오자, 임채원는 여주인의 모습으로 반갑게 맞이했다.“설아 씨 왔어? 마침 설아 씨 얘기하고 있었어.”차설아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내 물건은?”차설아는 자기의 물건을 챙기러 온 것이다. 물건만 가지고 바로 떠나면 되지 여기서 그녀의 가식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없다.“물건은 설아 씨 원래 방에 있어. 내가 도우미들한테 언제든지 가져갈 수 있게 챙겨놓으라고 했어.”“고마워.”차설아는 회전계단으로 향했다.임채원은 차설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밥 먹고 갈래?”“밥을 먹어?”차설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임채원을
임채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아직은 법적 아내인데 그건 좀 심하지 않을까?”소이서는 임채원의 팔짱을 끼고 대신해서 불평했다.“언니, 왜 그렇게 착해빠졌어요? 저번 자선행사에서 저년이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데요? 좀 혼내줘야 하지 않겠어요?”“방금 간지러워 미치겠어하는 모습 못 봤어요? 제가 선뜻 남자친구까지 빌려줬는데, 오히려 나중에 저한테 감사해야죠!”“어쨌든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책임져요.”“이서야, 나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마워.”임채원은 겉으로는 감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소이서를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비웃었다. ‘총받이로 쓰이는 주제에 목숨까지 바치다니!’얼마 후 성도윤이 별장에 도착했다. 큰 덩치에서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어디 있어?”성도윤은 넓은 별장 홀을 차갑게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임채원은 나서서 난처한 척하며 우물쭈물 말했다. “도윤 씨, 설아 씨는 위층에 있어. 장훈 씨랑 같이...”소이서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오빠의 그 현모양처 마누라가 나랑 채원 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내 남자친구를 꼬셔 침대에 올라갔어요!”소이서는 말을 마치고 재빨리 성도윤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성도윤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들이 차설아의 옛 침실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야릇한 소리가 들려왔다.임채원은 능청스럽게 문을 열려 했지만 안에서 잠겨 있었다.“도윤 씨, 안에서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아...”성도윤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되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쾅”하는 소리와 함께 성도윤은 발로 문을 걷어 찼다.하지만 안의 장면을 본 그들은 멍해졌다.침실 안에서는 눈빛이 흐트러진 채 바닥에 엎드려 곰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육장훈의 동작이 매우 용속했다.“이쁜이, 이쁜이...”한편 차설아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촬영을 하
차설아는 몸부림치며 그를 밀어냈다.“성도윤, 당신 미쳤어!”‘왜 다른 사람의 고상한 흥취를 방해하는 거야?’“어린이는 보면 안 돼!”성도윤은 아직 순수한 차설아가 나쁜 것을 배울까 봐 걱정하는 아버지처럼 보였다. 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나도 알 만큼 알 거든?”“그래? 그럼 말해봐. 어느 만큼 아는데?”성도윤의 차가운 얼굴에는 이미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의 노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약간재밌다는 표정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차설아는 그날 밤 성도윤과의 야릇한 모습이 금세 머리에 떠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볼이 붉어졌다.이 수줍은 반응은 성도윤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차설아가 임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남자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곧이어 임채원도 난처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서둘러 발뺌했다.“설아 씨 괜찮아? 나도 장훈이가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어. 둘이 안에 꽤 오래 갇혀 있었는데, 설마 설아 씨한테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지?”이건 분명 차설아를 궁지에 모는 질문이다. 두 청춘남녀가 한 방에 있었고, 게다가 남자가 저 상태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믿기 어려울 것이다.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만약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면 넌 실망하겠지?”“방금 나한테 준 술잔에 뭔가를 듬뿍 넣었잖아.”차설아의 말에 임채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설아 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그저 사과의 뜻으로 진심으로 술 한잔을 권하고 싶었을 뿐이야.”“일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는 나도 몰라. 술은 이서가 가져왔어. 안에 뭐가 있는지는 이서한테 물어봐봐.”“확실해? 우리 미련한 아가씨 머리에서 나올법한 수법이 아닌데?”‘배은망덕한 년! 몇 마디 말로 깨끗이 선을 그었어!’차설아는 소이서를 조금 동정했다.“설아 씨, 나 싫어하는 거 알아. 다 내 잘못이야. 이 아이를 임신해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게 아니었어. 당장 짐을 싸서 나갈게...”
방문을 연 성도윤은 약의 발작으로 소이서의 위에서 불결한 일을 하려는 육장훈을 보았다.“오빠, 빨리 나 좀 살려줘!”소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비명을 지르며 성도윤에게 도움을 청했다.비록 육장훈은 소이서의 남자친구이고, 이미 관계를 맺은 사이지만 이런 상황은 그녀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무 창피했다.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넘어 테이블 위에 있는 차설아의 물건을 가져갔다.“자업자득이야!”성도윤은 말을 남기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소이서는 너무 곱게 자라 안하무인이 되었으니 이제 혼이 날 때도 되었다.계단을 내려와 문 앞에 서 있는 차설아를 보고 성도윤은 차갑게 눈살을 찌푸렸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그러니까 네가 아직 이 별장의 주인이야.”“고맙지만 사양할게.”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에 든 물건을 건네받고 작별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나갔다.이미 밤이 깊어졌다.차설아는 별장 밖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도시와 너무 멀리 떨어진 탓에 오려는 기사가 없었다.잠시 후, 성도윤은 자신의 은색 부가티 베이런을 몰고 그녀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잘생긴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타!”초대가 아닌 명령이었다.차설아는 고민하다가 거절하지 않았다. 조수석 문을 열고 바로 차에 올라탔다.하지만 좌석에 있는 물건을 보고 차설아는 조금 놀랐다.“이건... 어디서 났어?”차에는 묘지에서 주웠던 호박 펜던트와 똑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차설아는 속으로 무언가를 예상했다.‘설마 이 자식이 오늘 우리 부모님 묘지에 갔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나?’“이 펜던트는...”“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성도윤은 쌀쌀맞게 말하더니 차가운 얼굴로 펜던트를 빼앗아 갔다.“쳇, 쪼잔하기는!”차설아는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우연이겠지. 내가 괜한 생각을 했어.’‘이 자식은 나한테 관심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 기일을 기억하고 있겠어? 굳이 꽃까지 들고 가서 제사를 지낼 리가 없잖아?’‘날 싫어하는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성도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놀았던 동생 사도현이었다.그는 성도윤의 옆에 서 있는 차설아를 보더니 더욱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대박, 다들 빨리 와서 봐. 도윤 형이 그 얌전하고 참한 마누라까지 데리고 왔어. 이건 분명 세계 10대 불가사의야. 우리 오늘 완전 운이 좋은데?”성도윤의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큰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초대받았으니 당연히 와야지.”자초지종을 잘 모르는 차설아는 얌전하고 참한 시늉을 하며 남자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어쨌든 1분에 2억 원이라는 돈을 받기로 했으니 ‘도구인’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야 했다.룸안의 인테리어는 고급스럽기 그지없었다.넓고, 럭셔리하고, 화려한데 불빛은 또 희미해서 누가 보면 황궁에 온 줄 알 것이다.소파에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모두 신분이 비범한 명문가 자식들이었다. 그중 가장 비범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 사람은 바로 중앙에 앉아 있는 남녀 한 쌍이었다.잘생긴 남자는 오똑한 콧날에 볼테 안경을 쓰고 있어 점잖아 보였지만, 좁고 깊은 두 눈동자에는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는 여유가 흘러넘쳤다.이런 여유는 분명 강력한 집안 배경에서 온 것이다.그가 착용하고 있는 은색 손목시계만 해도, 롤렉스의 한정판으로 전 세계적으로 하나만 있어 가치가 100억이 넘는다!그의 옆에 앉아 친밀한 행동을 하는 여자도 압도적이었다. 완벽한 이목구비는 아름다움을 넘어 기품과 지성이 넘쳤다. 이건 보통 명문가의 아가씨가 풍길 수 없는 분위기이다.어쨌든, 둘이 같이 앉아 있었고,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두 사람 모두 성도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윤아, 너...”여자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정이 흐르는 그녀의 큰 두 눈은 할 말이 많은 모습이었다.이에 비해 남자는 침착했고 온화하게 말했다.“드디어 화가 풀린 거야? 그래서 온 거야?”성도윤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두
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얌전하고 순진해 보이는 차설아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이렇게 완벽한 내 남편을, 대체 어느 눈이 먼 여자가 차버렸죠?”여기까지 말한 차설아는 성도윤의 팔을 다정하게 껴안으며 사랑꾼의 면모를 드러냈다.물론, 그녀의 연기에 불과했다.하지만 궁금증이 동한 차설아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역시 소파에 있는 그 분위기 있는 여자가 켕기는 듯 고개를 숙였다.강진우의 표정도 조금 어색해졌다.사도현은 소파에 있는 그 여자를 아주 의식하는 듯, 곧 차설아에게 화를 냈다.“그게 누구든 당신이랑 뭔 상관이야? 어쨌든 도윤이 형 첫사랑은 모든 면에서 당신보다 백배는 완벽해!”“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당신이랑 우리 도윤이 형은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이야. 모든 게 어울리지 않는데 염치없이 우리 형이랑 결혼해서 이 사달을 내?”강진우의 부드러운 눈빛이 약간 차갑게 변했다. 가볍지만 매우 압박감 있는 말투로 말했다.“현아, 그만해!”사도현은 유치한 아이처럼 계속 말을 이어갔다.“내 말이 틀렸어? 이 여자가 어떻게 감히 청하 누나랑 비교가 돼?”청하 누나?차설아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파에 있는 분위기 미녀가 아마 ‘청하 누나’일 것으로 추측했다.“현아, 장난 그만해. 우리 새 친구 놀라겠다.”허청하는 드디어 고개를 들더니, 성도윤과 차설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온화하게 웃었다.“윤아, 오랜만이야.”“응, 오랜만이야.”“윤아, 아직도 나랑 진우 오빠한테 화가 났어?”허청하는 눈썹을 찡그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다 나 때문이야. 그때는 철이 없어서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너희 두 사람 사이에서 허둥댔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게 했어. 그런데 오늘 네가 와줘서 너무 기뻐.”“지나간 일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 없어.”여자의 흥분한 태도와 달리 성도윤은 미적지근한 태도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이런 서먹한 느낌은 마치 두 사람
“흥, 알면 아주 깜짝 놀랄걸?”사도현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우리 청하 누나는 모범생이야. 페테르부르크 대학 알지? 청하 누나는 국보급 대학의 인기 인물이야. 그 대학에서 가장 좋은 학과인 천체물리학과를 전공했고 졸업할 때 발표한 학술 논문으로 ‘성화요원’ 대회에서 일등상을 수상했어!”“와 진짜 모범생이다. 청하 언니 대단해요!”모두 허청하를 숭배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그들이 이토록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자제들 사이에서 이공계의 모범생은 유일무이한 보물처럼 아주 희소했다.허청하는 담담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별것 아니야. 운 좋게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별것 아니기는! 엄청 대단한 거지!”사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넌 천체물리학이 뭔지는 알아?”“집에 틀어박혀서 남편 없이는 못 사는 가정주부는 아마 들어 본 적도 없을 거야!”차설아는 가볍게 웃더니 컵 속의 오렌지 주스를 흔들며 사도현의 수모를 무시했다.차설아는 허청하를 보며 물었다.“청하 언니의 그 논문이 설마 ‘천궁에 앉은 왕: 태양 복사층과 대류층의 관계에 관하여’인가요?”허청하의 눈에는 웃음이 사라지더니 약간 놀란 표정으로 차설아를 보았다.“맞아요. 혹시 설아 씨도 천체물리학을 공부했나요?”“하하하. 그럴 리가!”사도현은 하찮은 듯 말했다.“가정주부가 음식 레시피를 본다면 모를까. 그런 고급 학술 논문을 어떻게 알아보겠어?”이때, 계속 침묵을 지키던 성도윤이 담담하게 말했다.“당연히 알아보지.”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성도윤은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왜냐하면, 설아가 그 대회 익명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으니까.”“뭐?”모두 화들짝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허청하는 더욱 불가사의한 표정이었다.“설아 씨가 혹시 대회에서 가장 신비로운 심사위원 MISSC인가요?”“다 지나간 일이에요. 별것 아니에요.”차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