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수는 차설아가 우울해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말했다.“조급해하지 말고 우선 얌전히 누워 보스 몸부터 챙겨. 내가 바로 의사한테 가서 구체적인 상황을 물어볼게. 그 자식 명줄이 길어서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그렇긴 하지. 명줄 하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물에 뛰어들어도, 불에 뛰어들어도 죽지 않는 사람인데 넘어졌다고 뭔 큰일이 있겠어?”차설아는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배경수를 재촉했다.“여기 있지 말고 얼른 의사한테 가서 물어봐. 네가 안 가면 내가 간다?”“움직이지 마! 지금 갈게!”배경수가 일어나 떠나려다가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가 가져온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내가 올 때까지 저거 다 먹어. 자기 몸은 챙겨야지. 만약 보스가 굶어 죽으면 두 아이는 어떡해...”배경수가 떠난 후에도 차설아는 여전히 속이 타들어 갔고, 도저히 입맛이 없었다.만약 성도윤이 죽거나 한쪽 다리를 잃는다면, 여생을 얼마나 무거운 자책 속에서 살아갈지 그녀는 상상할 수 없었다.곧, 배경수가 병실로 돌아왔고, 잘생긴 얼굴은 어두웠다.“어때? 의사가 뭐래?”차설아가 다급하게 물었다.만약 지금 병상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는 진작에 뛰어갔을 것이다.배경수는 대답 대신 한 입도 먹지 않은 죽을 보며 나무랐다.“내가 먼저 뭐 좀 먹으라고 했잖아. 오랫동안 굶고 또 큰 수술까지 했는데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어? 정말 죽고 싶어?”“경수야, 화내지 마. 나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나 좀 이해해줘. 이렇게 큰일이 터졌잖아. 성도윤의 생사도 알 수 없고, 한쪽 다리를 잃을 수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밥이 넘어가겠어?”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목이 메었다.“빨리 말해줘. 의사가 최종 방안이 뭐라고 했어?”배경수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방금 전문가가 달려와서 다리를 절단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니 보수적인 치료 방안을 선택하고, 수술한 후 재활치료 잘 받으면 된대.”“진짜?”차설아는 반신반의했다.방금까지 상태가 심각해서 생
사실 성도윤의 상황은 그가 말한 것보다 더 심각했다. 다리의 괴사 조직이 너무 많아서 절단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위험했다.“다 먹었어. 배부르다!”차설아는 배를 움켜쥐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배경수에게 물었다.“나 이 깁스 언제 풀 수 있는지, 언제 퇴원하는지 물어봤어?”“그건 보스 회복 속도에 달렸지. 빠르면 두 주일, 늦으면 수개월 걸려.”“그럼 몸조리를 잘해야겠네. 완쾌하고 퇴원하는 날에 정식으로 그 사람한테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배경수는 순간 당황하여 황급히 말했다.“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그 자식, 전에 보스한테 한 짓이 있지, 이걸로 죄를 갚는다고 생각해!”만약 진짜 성도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차설아는 견디지 못할 테니, 차라리 성도윤의 소식을 모르고 있는 것이 좋았다.“너 이 녀석, 속이 왜 그렇게 좁아? 다시 옛정이라도 되살아날까 봐 두려워?”차설아는 배경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착한 동생아, 누나가 장담하는데, 세상 남자가 다 죽어도 나랑 그 사람은 절대 불가능해. 그런 걱정은 마음속 깊이 넣어둬!”차설아는 말하면서 배경수의 잘생긴 뺨을 쿡쿡 찔렀다.“이것 봐. 젖살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난 거야? 귀여워 죽겠네!”“알았어!”배경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아마 해안 전체에서 차설아만이 소문난 ‘해안의 악동’인 배경수를 어린애로 여길 것이다.배경수는 성도윤의 명줄이 길어, 이번 고비만 넘기만을 바랐다.배경수는 차설아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또 성도윤이 있는 수술실로 달려가 상황을 살폈다.비록 성도윤은 그의 라이벌이고, 전에 차설아에게 잘해주지 않아 조금도 맘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차설아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이고, 두 아이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배경수는 그가 일찍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비록 배경수는 차설아를 뼛속까지 사랑하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지만, 만약 언젠가 두 사람이 정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절대 불가능해!”배경수는 너무 놀라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곧이어 간호사가 수술대를 밀고 수술실에서 나왔고, 커다란 남성의 몸이 흰 천으로 덮인 채 누워 있었다.“가족분 와서 보시겠어요?”의사는 얼굴이 창백한 배경수에게 말했다.“보지 않으시면 곧바로 영안실로 보내겠어요. 빠른 시일 내로 장례를 치르세요.”“저는...”배경수는 침을 삼키고, 일어서서 한번 보려고 했지만,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안 보겠습니다.”그는 손을 내저으며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였다.간호사는 수술대를 밀고 그의 앞을 지나 영안실로 향했다.성도윤이 죽었다!성도윤이 죽었다!성도윤이 죽었다!이 소식은 마치 저주처럼 배경수의 머릿속에서 반복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그 대단하고 잘난 인간이 이렇게 갔다고? 앙숙인 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보스는 어떻게 받아들이겠어...’배경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안돼, 절대 보스가 이 일을 알게 해서는 안돼. 몸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 절대 모르게 해야 해!”다음날.배경수는 정성껏 만든 아침 식사를 들고 제일 먼저 차설아의 병실에 도착했다.“왔어?”차설아는 진작에 깨어나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다.“어때? 아직도 아파?”배경수는 작은 상판을 올려놓고, 각양각색의 아침 식사를 하나씩 꺼내며 정성스레 물었다.“전혀 안 아파. 간호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진작 내려가 걸었을 거야!”차설아는 씩씩하게 말했다.그녀는 작은 탁자 위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침 식사를 보며 침을 삼켰다.차설아는 아침 식사를 하며 성도윤의 안부를 물었다.“그 사람은 수술 끝났어? 방금 간호사한테 물었는데 안 알려주더라고.”“그 자식은...”배경수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진작 괜찮아졌지. 전문가가 직접 나서서 수술했잖아. 누가 감히 부잣집 도련님의 몸을 함부로 대하겠어!”“맞는 말이네. 그럼 나도 안심
하지만 직원이 말했다.“죄송하지만, 성도윤 씨 시체는 이미 인계되었습니다.”“네? 인계되었다고요?”배경수는 신경이 곤두서서 물었다.“누가요?”“고인의 가족분께서 어제저녁에 옮기셨어요.”‘그렇다면, 성가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건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배경수는 생각에 잠겼다.그는 휴대폰을 들고 주식 시장, 언론, 심지어 성대 그룹까지 최신 정보를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혹시, 죽은 사람이 성도윤이 아니란 말인가?’“확인할 것이 있는데요, 그 시신이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가 맞나요?”배경수는 직원에게 물었다.“아마 맞을 거예요. 시신을 받으러 온 분이 아버지셨어요.”직원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럼 더 이상한데요?”배경수는 의심을 가득 품고 차설아의 병실로 돌아갔다.공교롭게도 배경윤은 남자친구 강우혁을 데리고 차설아를 보러 왔다.“언니,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잖아. 하룻밤 사이에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대체 누가 그랬어? 내가 당장 가서 복수할 거야!”배경윤은 차설아을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히며 분을 토했다.“내가 길에 잘못 들어서서 넘어진 거야.”차설아는 몸을 움직이며 자신만만해서 말했다.“걱정 마. 이 정도 상처는 열흘이나 보름 정도면 충분해!”강우혁이 말을 보탰다.“저희 집은 의사 가문이라, 아버지께서 정형외과 의사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 설아 씨가 필요하면 제가 소개해드리죠.”배경윤이 급히 말했다.“뭘 묻고 그래? 당장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지! 반드시 최고의 의사가 언니를 치료해줘야 내가 마음이 놓인단 말이야.”강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당장 전화할게.”차설아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형외과 의사라는 말을 듣고 냉큼 말했다.“그럼 우혁 씨한테 부탁 좀 할게요. 저는 필요하지 않지만 성도윤이 필요할 것 같아요.”“성도윤? 그 인간이랑 뭔 상관인데?”배경윤은 성도윤의 이름을 듣고 급히 물었다.“설마, 두 사람 같이 있다가 사고 난 거야?”“그 인간 나 구하려다가 심하게 다
“당연하지!”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배경수와 마찬가지로, 배경윤도 차설아를 백 프로 신뢰했다.“그럼 언니만 믿을게.”배경윤은 떠나기 전, 차설아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또 강우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당부했다.“우리 언니한테 잘 보여. 언니가 허락하지 않으면 난 결혼 못 한다고.”“걱정하지 마. 설아 씨는 분명 나의 진심을 알아주실 거야.”강우혁은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맞죠, 설아 씨?”“아마도요?”차설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배경수와 배경윤이 병실을 떠나고, 차설아는 입꼬리를 내리더니 차갑게 말했다.“문 좀 닫아주세요.”강우혁은 차설아의 요구대로 문을 닫고 차설아 앞에 다가가 점잖은 얼굴에는 시종 온화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저에 대해 뒷조사를 한 모양인데, 제 과거를 아셨나 봐요?”차설아는 조금 의외였다.“생각보다 똑똑하네요.”“과찬이세요. 경윤이가 늘 저한테 설아 씨는 정과 의리를 중히 여기고 신중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친한 동생이 오래 만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니, 절 조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죠.”“좋네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사리에도 밝네요. 확실히 흠잡을 데가 없어요.”차설아는 강우혁의 태도가 이렇게 겸손할 줄 몰랐다. 자신에 대해 뒷조사를 한 걸 알면서도 전혀 화내지 않고 사리에 밝은 말만 골라 하니, 차설아는 조금 부끄러웠다.“그럼 솔직하게 말해요. 경윤이에게 접근한 목적이 뭐죠?”차설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강우혁은 덤덤하게 웃었다.“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저는 윤이를 사랑해요. 굳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윤이와 부부가 되어 평생 함께 사는 것?”“헛소리!”차설아는 하찮은 듯 말했다.“그런 말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경윤이나 믿지, 난 절대 못 속여요. 당신이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요? 똑똑한 분이, 그 여자가 우리에게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요?”“지금 채원이를 말하는
하지만 차설아는 여전히 마음이 찝찝했다.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정말 떳떳하다면 시간 내서 당신과 임채원이 사랑했던 사이라는 걸 경윤이한테 솔직하게 말해요. 경윤이가 받아들인다면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차설아가 강우혁을 향해 말했다.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건 바로 자기 때문에 배경윤에게까지 누를 끼치는 것이었다.임채원이 어떤 여자인지는 차설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든 임채원과 관계된다면 반드시 재수가 없게 된다.“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설아 씨가 그 말을 안 했어도 저는 경윤이에게 잘 얘기할 거예요.”강우혁이 꽤 진정성 있는 얼굴로 말했다.“좋아요,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는데 혹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제가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거예요.”차설아는 강우혁의 허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에 그에게 다시 한번 경고했다.강우혁이 병실을 떠난 후, 밖에서 기다리던 배경윤이 바로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어때? 언니에게 인정받았어?”“아마도? 80%는?”강우혁이 솔직하게 말했다.“그래도 괜찮네, 계속 화이팅해!”배경윤이 웃으며 말했다.그녀는 누구보다 차설아를 잘 알고 있었다. 강우혁이 차설아로부터 80%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이미 그녀의 기대 이상이었다.강우혁은 배경윤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물었다.“경윤아, 만약 언젠간 나랑 설아 씨 사이에서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누굴 선택할 거야?”“당연한 걸 왜 물어?”배경윤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당연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설아 언니를 선택하지. 설아 언니랑 맞서 싸우는 일이 없는 게 좋을 거야, 난 무조건 설아 언니 편이니까.”배경윤의 말은 농담이 아닌 진심 같았다.차설아는 항상 배경윤을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 여자라고 놀리곤 했지만 배경윤은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생각했다. 남자와 차설아 중에서 고르라면 그녀는 무조건 차설아를 고를 것이다.남자는 배신하고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차설아는
강우혁의 표정은 조금 복잡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물었다.“두 아이를 어떻게 할 건지 내가 알아도 돼?”“그렇게 많은 걸 물어서 뭐 하게?”임채원은 갑자기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네가 잘 알잖아. 나 사랑한다며, 나를 위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며, 지금이 바로 나한테 잘 보일 기회야. 절대 이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돼. 일이 잘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다 줄게!”“나...”강우혁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알겠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치 않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너를 저버린다 해도 나는 너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거야.”임채원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여왕처럼 도도하게 말했다.“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나 임채원은 말만 잘하고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자를 제일 싫어해. 너 그 씨발년 친구랑 그래도 오랫동안 사귀었잖아. 그 씨발년에게 아이 둘 있다는 것 외에 또 뭐 알아낸 것 없어?”“아직은 없어. 배경윤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야. 차설아를 100% 믿는데 간이라도 꺼내 줄 것 같았어. 너무 자주 차설아에 관해 물어보면 나 의심할 거야.”“흥, 여자들 사이에 100% 믿는 관계가 어디 있어. 남자 때문에 감정 틀어진 경우가 수두룩한데. 만약 자기가 가장 믿는 친구가 자기 남자친구에게 꼬리 쳤단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 것 같은데?”임채원이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그게 무슨 말이야?”“무슨 말인지는 네가 잘 알잖아!”임채원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원한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씨발년, 안 나타나면 몰라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내가 복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아무튼...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꾸물거리다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이미 도윤이랑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것 같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4년 동안 그녀는 하루 같이 정신 나간 척을 했다. 손목도 1
“오 아주머니, 올해 정원에 핀 백합꽃 말이에요, 엄청 많고 크게 피지 않았어요?”소영금은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집사 오 아주머니에게 물었다.“네?”사실 백합은 해마다 크고 화사하게 피었기에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소영금의 흥을 깨우지 않기 위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래요, 정말 많이, 그리고 크게 피었네요. 작년과 똑같이요!”소영금은 오 아주머니를 힐끔 보더니 마치 승부욕이 오른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어디가 똑같아요? 분명 올해 더 잘 피었구먼. 백합꽃이 잘 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네? 무슨 뜻이에요?”“백년가약을 의미하죠. 올해 백합꽃이 특별히 잘 피었으니 분명 하느님의 뜻일 거예요. 우리 아들이랑 며늘아기는 곧 다시 화목하게 지낼 것이고 백년가약을 맺겠죠!”소영금이 말하고는 활짝 웃는 얼굴로 백합 한 송이를 따서 손에 들고 다시 보았다.마치 활짝 피어난 백합꽃에서 성도윤과 차설아의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듯이 말이다.“백합꽃이 그런 꽃말도 있었어요?”어안이 벙벙한 오 아주머니는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소영금이 해석한 백합의 꽃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나 소영금이 있다면 있는 거지. 내가 말한 대로 가장 예쁘게 핀 백합 몇 송이를 따서 한 다발로 묶어줘요. 쓸데가 있어서 그래요.”소영금이 눈썹을 들썩이며 오 아주머니에게 분부했다.“알겠어요!”오 아주머니는 가위를 꺼내 소영금의 요구대로 백합꽃을 일일이 잘라 꽃바구니에 담았다.그녀는 꽃을 자르면서도 조심스럽게 소영금에게 물었다.“사모님, 이번에 차설아 씨가 돌아왔는데 어째 사모님께서 도련님보다 더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정말 차설아 씨가 임채원 씨에게 한 일들은 용서하신 거예요?”소영금의 귀까지 걸린 미소는 조금 옅어졌다. 소영금이 덤덤하게 말했다.“왜 갑자기 과거의 기분 나쁜 일을 꺼낸 거예요? 정말 흥이 깨지네.”“사모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차설아 씨에 대한 사모님의 태도가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