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정말 사람 괴롭힐 줄 아네. 나한테 잡히면 죽었어!’카지노는 워낙 컸기에 매개 구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하지만 한 구역은 유독 인기가 많았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흥분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성도윤은 바로 그쪽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원형 테이블 위에는 묘령의 여인이 밧줄로 묶여 있었다.그녀는 비칠 듯 말 듯 한 흰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깃털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움츠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성도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앞으로 돌진하려고 했다.깃털 가면에 가려진 그녀의 이목구비는 차설아와 똑같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똑같이 오뚝한 콧날과 앙증맞은 입술, 그리고 그녀의 턱선, 쇄골까지, 모두 차설아 그대로였다.다만 그녀는 어떤 우람한 몸집의 흑인에게 잡히고 있었다.“이 여자는 흔히 볼 수 없는 천하절색 미인이죠. 베팅에 성공해서 혼자 쓰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하든 절대 밑진 장사는 아닐 겁니다. 또 베팅하실 분 있나요?”흑인이 소리를 지르며 말하고는 또 여인을 호되게 잡아당겼다.그 힘에 여인은 몸을 비틀거렸고 가엾은 목소리를 내었다.그 소리는 곧바로 남자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들의 투지를 불태웠다.그들은 하나둘씩 돈을 쏟아부어 베팅했다.성도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모든 동작을 멈췄다.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저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졌다.이때, 이미 사람들의 중심에 섰던 사도현이 입을 열었다.“셋까지 셀 테니까 당장 그 사람 내놔.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흑인은 매일같이 사도현처럼 소란을 피우는 사람을 만났었기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고는 웃으며 말했다.“이봐요, 무릇 남자라면 다 미인을 좋아합니다. 미인을 얻으려면 베팅하셔야지요. 승리하면 데려가시고, 패배하면
“조심해!”성도윤이 인파의 가장자리에서 높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이곳은 결국 다른 사람의 영역이었고, 사도현은 워낙 눈에 띄게 행동했으니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공범까지 있어?”흑인이 성도윤을 발견하고는 다른 쪽에 있는 경호원을 보며 말했다.“저 사람도 잡아! 가차 없이 쏴버려!”“누가 감히 총을 쏘는지 내가 한 번 보겠어!”원래 비교적 잠잠했던 사도현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먼저 품에 안긴 차설아를 조심히 내려놓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흑인을 보며 말했다.“나한테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는데 우리 도윤 형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죽으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없지!”흑인은 사도현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봤어도 이렇게 날뛰는 사람은 처음인데 말이다.총까지 보였는데도 잘못을 빌기는커녕 오히려 도발을 해?사도현은 두말없이 또 흑인의 배를 발로 걷어차고는 목소리를 높였다.“당장 무릎 꿇고 도윤 형한테 사과해!”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무릎이야 꿇을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그는 원래 이 모든 걸 구경하고만 있었을 뿐이다.하지만 사도현의 말에 그는 순식간에 이 일에 연루되었다.‘총알 맞지 않고 안전하게 이곳을 떠나는 건 어려워 보이는데? 사도현이 아주 나를 제대로 끌어내렸구나.’경호원들은 총알을 장전하고 당장이라도 총을 쏘려고 했었다.하지만 그들은 성도윤과 사도현의 강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꼼짝하지 못했고, 총을 쏘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저 두 사람은 보내줘. 그리고 여기 책임자를 불러와. 이 일은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까.”성도윤이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바닥에 쓰러진 흑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사도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도윤 형, 먼저 설아 쨩이랑 가. 이런 분야는 내가 더 잘 아니까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사 가문은 해안의 90%에 가까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대부분 그레이존을 걸쳤고, 그는 어려서
“네, 알겠습니다!”블랙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흑인은 놀란 마음에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았다.그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사도 도련님,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그들에게 있어서 사씨 가문은 워낙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이렇게 비굴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아무도 쉽게 손댈 수 없는 그레이 존에서 그들은 법을 안중에 두지 않았지만 사씨 가문 만큼은 뼛속까지 두려워했다. 사씨 가문을 건드린다면 이 바닥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사도현은 여기로 오기 전에 블랙에 소식을 전하라고 부하들을 분부했다. 그래서 그는 아까 아무 걱정도 없이 날뛸 수 있었던 것이었다.“카지노 안의 냄새가 너무 코를 찌르네. 1분도 더 못 있겠어!”사도현이 코를 막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어쩔 수 없어요, 도련님. 카지노는 이렇게 해야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가 좀 혼란스럽기는 해도 원하는 물건이라면 모두 얻을 수 있는 곳이에요.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다면 이곳에서 따내 가면 되거든요.”블랙은 지하 카지노의 보스가 아닌, 기껏해야 책임자였다.최근 몇 년 동안 그는 보스의 지시로 이곳을 잘 운영해 왔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사도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렇지,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곳이지. 감히 우리 도윤 형 와이프를 두고 도박을 해? 정말 대단해!”블랙이 그 말을 듣더니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도윤 형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성대 그룹의 성...”“그렇다!”“네? 세상에, 세상에!”블랙은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성씨 가문은 해안 8대 가문 중 서열 1위, 지위는 심지어 사씨 가문보다 더 위였다. 하지만 그들은 성도윤의 아내를 두고 도박판을 벌였으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마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블랙은 또 바닥에 쓰러진 흑인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너 죽을래? 성대 그룹 대표님의 아내분에게도 손을 대? 정말 죽으려고 작정한 모양이구나. 내가
성도윤은 덤덤하게 말하고는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고 돌아섰다.“휴, 형, 그냥 가는 거야?”사도현은 쿨하게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장난이 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해서 소리쳤다.“방금 농담이었어. 왜 그래? 내가 구했지만, 설아는 여전히 형 거야. 나 선은 지킨다고!”“선을 지키든 말든, 상관없어.”성도윤은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OK 손짓을 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사도현은 성도윤을 미처 말리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서 있었다.‘자기 마누라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만큼 통이 큰 사람이었나?’사도현은 아직도 온몸이 묶여 있는 차설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선물상자 같아 괜히 쑥스러웠다.“그게, 형수, 무서워하지 마. 도윤이 형이 질투가 났는지 먼저 가버렸어. 지금부터는 내가 보살펴줄게.”사도현이 처음으로 차설아를 ‘형수’라고 불렀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한없이 깨끗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사도현이 차설아에게 공손할수록 오히려 그녀에게 딴마음을 품은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어쩔 수 없었다. 지금 차설아는 흰 레이스 치마를 입고 있었고, 그 모습이 너무 매혹적이었다.“윽윽윽!”차설아는 입이 테이프로 막혀 말을 잇지 못하고 고양이처럼 연약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많이 놀란 모습이었다.“기다려, 일단 밧줄부터 풀어줄게.”사도현은 말을 마치고 차설아의 몸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느라 바빴다.이 굵은 밧줄은 차설아의 몸에 여러 바퀴 휘감겨져 있어 시간이 꽤 걸렸다.두 사람의 몸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붙게 되었다.여자의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은 라일락꽃의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사도현의 잘생긴 뺨을 스쳤고, 이는 사도현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잠깐만, 곧... 다 풀었어.”사도현은 심호흡을 하며 간지러운 마음을 달랬다.‘휴, 정말 미치겠네. 내가 가장 하찮게 생각했던 차설아에게 이런 매력이 있다니. 귀엽고 섹시한 매력을 누가 당해내겠어?”드
사도현은 침을 꿀꺽 삼켰고, 여자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저는 저를 카지노에 팔았어요. 카지노는 저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죠. 어떤 남자의 손에 들어가도 죽기보다 못한 인생이니 살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절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을 제게 보내셨네요...”여자는 감정이 격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사도현에게 다가갔다.“잠깐! 다가오지 마요!”건장한 체구의 사도현은 마치 맹수라도 본 듯 연신 뒷걸음질 치며 여자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그녀의 가녀린 몸은 멈칫하더니, 상처를 받은 눈빛으로 말했다.“제가 당신에게 빌붙을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아니요! 아니요!”사도현은 손을 내저었다. “그 뜻이 아니라, 제 말은, 당신은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잖아요. 자기 인생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 되죠!”“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지만 저는 이미 카지노와 신체 매매 계약을 했고, 만약 당신이 저를 원하지 않으시면, 전 분명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요. 더 이상 상품처럼 카지노 테이블에 묶여 징그러운 남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싫어요.”“신체 매매 계약이 있다고요?”사도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옆에 있는 블랙을 바라봤다.블랙은 겁에 질려 당장이라도 도망갈 기세였고, 즉시 갈치를 재촉하여 신체 매매 계약을 내놓았다.“여기.... 여기 있습니다. 카지노에서는 이 여자를 2억에 샀습니다. 이제 도련님의 것입니다.”갈치는 전전긍긍하여 가방에서 여자의 서명과 손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꺼냈다.사도현은 위에 적힌 이름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윤설?”그리고 눈을 반짝이더니 문득 깨달았다.“생각났어. 그날 술집에서 도윤이 형이랑 춤을 추던 여자지? 어쩐지 눈에 익더라고!”“맞아요, 드디어 제가 생각나셨군요. 전에 술집에서 뵙고 당신한테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윤설은 물결처럼 부드러운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그날 밤, 그녀는 성도윤에게 설렜을 뿐만 아니라, 사도현에게도 끌렸었다.늘 사도현처럼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스타일을 좋아했었
“아, 누가 쓰러졌어요!”사람들 속에서 황급한 고함소리가 들렸다.사도현은 이미 차에 탄 상태였고, 자신과 무관한 여자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생각이 불순한 남자들도 있는 것이니, 사도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다 비켜!”사도현은 빽빽이 들어찬 인파를 헤치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구경꾼들은 딱 봐도 부잣집 도련님인 사도현의 모습을 보고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하지만, 사도현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의식을 잃은 윤설을 독점하려는 건방진 인간도 있었다.“그 손 놔!”사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윤설의 몸에 손대고 있는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남자에게 명령했다.“네가 뭔데 참견이야? 이 여자는 내가 먼저 발견했어! 빼앗아 갈 생각하지 마!”칼자국 남자는 윤설의 팔을 잡아당기며 당당하게 그녀를 업고 떠나려 했다.구경꾼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만류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이건 확실히 이 지역의 ‘특색’으로, 흔히들 ‘시체 줍기’라고 한다.이곳에서 거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모든 여자들은, 술에 취했든, 배가 고파서 기절했든, 아니면 아파서 쓰러졌든, 모두 생수처럼 공공자원으로 여겨져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라는 규칙이 있었다.윤설 같은 절세미인은 보기 드문 보물이라, 그녀를 주운 사람은 당연히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그 여자 놓으라고!”사도현은 큰 체구로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가운 기운이 극도에 달해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물론, 칼자국 남자도 현지에서 꽤 유명했다. 일반인들은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니, 당연히 사도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야?”“이 여자는 내 사람이야!”사도현은 또박또박 말한 후, 찢은 계약서를 꺼내 냉소를 지었다.“방금 블랙한테서 받아온 신체 매매 계약서야. 굳이 이 여자를 데려가겠다면 네가 블랙을 찾아가든가!”“블랙... 형님?”칼자국 남자는 갑자기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당황한
“뭐? 뭘 들었는데?”“저는 도현 씨의 사람이라고. 이건 저를 받아드렸다는 뜻이죠, 맞죠?”“오해하지 마. 방금 돌발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고마워요!”윤설은 웃으면서도 눈시울을 붉히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이 말을 들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요. 저승길에서 외로운 혼령이 아닐 거예요.”“그게 무슨 말이야? 죽다니?”사도현은 윤설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임종 전의 유언을 남기는 것 같았다.“제가 작은 부탁을 해도 될까요?”윤설은 사도현의 팔을 붙잡고 불쌍하게 말했다.사도현은 여자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말해봐.”“제가 죽으면 유골을 작은 상자에 담아 이장의 오래된 우물에 묻어주세요. 장례식도 필요 없고, 그저 기일에 아무나 보내서 제사를 지내면 돼요.”여기까지 말한 윤설은 이미 호흡이 약해졌다.사도현은 생각할수록 이상해서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대체 뭔 일이야?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아니에요. 그저… 콜록!”윤설은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의식을 잃었다.사도현은 당황하여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차에 태우고 계속 말했다.“조금만 버텨, 당장 병원으로 데려다줄 테니, 조금만!”차는 사람들이 붐비는 길을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어쩌면 이 순간부터 두 사람의 운명은 함께 묶였는지도 모른다.그 늙은 어르신의 말씀대로 윤설은 사도현의 운명이자 재난일 지도 모른다.성도윤은 성가 저택으로 돌아왔고, 이미 늦은 밤이었다.여전히 차설아에 대한 소식을 얻지 못했다.‘이 여자 진짜 지구에서 사라진 거 아니야?’강진우는 위로하며 말했다.“도윤아, 조급해하지 마. 이미 사람들을 더 보내서 전국에서 찾고 있어… 다른 나라의 정보 부서와도 연락해서 설아 씨 행적을 찾고 있으니까, 곧 소식이 있을 거야.”성도윤은 의욕을 잃고 덤덤히 말했다.“찾지 마. 그냥 내버려 둬!”“도윤아, 그게 무슨 말이야? 포기하겠다는 소리야?”“우리 사이는 이미 너무 많이 멀어졌어. 찾더라도 서로 상처만 줄 거
성도윤은 이 지도의 지형구조와 선로의 방향이 성가의 북성 노군산에 있는 선조의 무덤 입구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성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대대로 장군 대신으로 세력이 뛰어났다. 가문은 북성 일대에서 활동했고, 조상들도 북성에서 가장 풍수가 좋고 외부인의 접근이 가장 어려운 노군산에 묻혔다.증조할아버지 때 온 가족은 해안 시로 와 지금의 성과를 이룩했다.몇 년 동안 성가는 주요 제삿날을 제외하고는 북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이상하네. 성씨 가문의 지형도가 왜 차설아의 포대기에 있지?”‘혹시 두 가문 사이에 어떤 인연이라도 있었나? 할아버지한테 기회를 봐서 여쭤야겠어.’성도윤은 조심스럽게 이불과 비단을 작은 상자에 넣었다.그는 갑자기 또 무슨 생각이 나서 차설아의 노트를 꺼내 사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사도현은 응급실 문밖의 벤치에 앉아 윤설을 기다리고 있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아마 미쳤다고 생각되었다.종래로 남 일에 나서지 않고 독선적으로 행동하던 자신이 열정적으로 나서서 밥도 못 먹은 채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있으니 말이다!“형,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사도현은 성도윤의 전화를 받았지만, 주의력은 여전히 끊임없이 반짝이는 응급실의 빨간 불에 있었다.빨간 불이 멈추면 응급처치가 끝났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사도현은 윤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녀에 대한 강한 끌림으로 인해, 그녀가 이렇게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내가 전에 차에서 너한테 노트를 보여줬잖아. 나 도와주겠다고 했던 말 기억나?”전화기 너머에서 성도윤이 느릿느릿 물었다.“콜록, 기억 안 난다고 해도 돼?”성도윤의 말투를 들은 사도현은 분명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이건 성도윤이 함정을 파놓고 사도현에게 ‘네가 약속했으니, 뛰어들어!’라고 말하는 격이었다.“긴장할 필요 없어. 돈을 버는 일이니까, 너한테 손해 가지 않아.”“고마워, 형. 하지만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이렇게 좋은 일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