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대체 뭔 말이야? 똑바로 말해!”양보아가 매서운 표정으로 외쳤다.하인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차근차근 보고했다.“어젯밤에 우리보다 더 고급진 유니폼을 입은 낯선 하인이 소영금을 전담했다면서 저한테 길을 안내하라고 했어요. 반성실까지 데려다주고 전 돌아왔어요... 오늘 가보니 그 낯선 하인과 소영금이 모두 사라졌어요. 그 신입이 놓아준 게 틀림없어요!”“간도 크구나!”선우도환은 가문의 권위가 도발 당한 것 같아 화가 잔뜩 차올랐다.“대체 누가 감히 우리 집안에 몰래 들어와 겁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른단 말이야! 우리 집안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구나!”“당장 조사해! 발견 즉시 손발을 잘라버려! 우리 집안을 도발한 최후를 똑똑히 보여줘야지!”선우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늘 가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에게 말했다.“왜 아직도 멍하니 있어! 당장 가서 조사해! 감히 우리 가문에 대적한 자를 반드시 잡아 온다!”차설아는 머리를 파묻고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행여나 하인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마음을 졸였다.훈련된 병사들이 장갑차를 몰고 출동하자, 차설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뭐야, 이 사람들 진심이야? 진짜 일을 크게 만든다고?’‘만약 내가 사람을 풀어준 것이 밝혀지면, 내 손발은 아작나겠어!’선우 가문은 예로부터 이렇게 극단적인 스타일이라, 차설아가 놀란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선우 가문은 강압, 집권, 고문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S시에서 권위를 공고히 하는데 습관 되었다.“일단 식사부터 하세요. 우리 설아 괜히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양보아는 선우 부자를 향해 눈짓을 하며 말했다.그들은 젓가락을 들고 아침 먹을 준비를 했다. 다만, 먹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군가를 우렁차게 불러야 했다.차설아는 이런 상황이 몹시 불편하여 속으로 중얼거렸다.‘바람이 일찍 집에서 도망쳐 해커가 된 건 이유가 있었어. 집안 분위기가 이렇게 억압적이니, 나였어도 가출을 했을 거야!’차설아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그들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용
“뭐? 무슨 헛소리야?”양보아는 선우시원을 쏘아보았다.가문을 배신하는 일을 저지르면, 선우도환은 육친을 막론하고 엄벌에 처하는 사람이었다. 이건 자기 목숨을 내놓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선우시원은 느릿느릿 말했다.“헛소리 아니에요. 진짜 제가 풀어줬어요. 그렇게 복잡한 비밀번호는 저희 집안 사람만 알고 있어요. 설아처럼 단순한 애가 어떻게 그 복잡한 비밀번호를 풀고 사람을 놓아줬겠어요?”여기까지 말한 선우시원은 차설아를 바라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하하!”차설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어색하게 웃었다.선우시원의 도움이 눈물 나게 고맙지만, 비꼬는 듯한 그의 모습은 정말 주먹을 불렀다.선우시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성도윤의 손에서 마누라까지 빼앗았는데, 굳이 어머니까지 가둬 놓을 필요 있어요?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성가의 실력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요. 저희한테 군대가 있다는 이유로 너무 설치면 안 돼요. 성가에 돈이 차고 넘치는데, 진짜 화나면 외국에서 결사대를 고용해 우리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고요. 어느 정도 선은 지켜야 앞으로 얼굴 보며 살죠.”“맞아요! 맞는 말이에요!”차설아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지금 이 순간, 선우시원은 그녀의 대변인이 되었다.독선적인 오만함에 빠져있는 선우 가문 전체에서, 늘 밖에서 빈둥거리는 선우시원만 이성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선우도환은 눈살을 찌푸리고 위엄 있는 눈빛으로 선우시원을 노려보았다.“성가가 그렇게 대단해? 그럼 우리 선우 가문이 성가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냐?”“선우 가문과 성가는 진작에 일전을 벌였어야 했어. 지금까지 조용했던 건, 설아가 성가의 사람이라 괜히 설아에게 불똥이 튈까 봐 참았던 거야. 지금은 설아가 이미 성가와 인연을 끊었으니, 난 이제 더 이상 돌볼 것도 없이 전투를 시작할 거다!”선우도환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두피가 저렸다.역시, 선우도환은 전쟁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맞아, 세 분은 리더의 이념이 달라 뼈아픈
차설아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모두 어리둥절했다.특히 선우시원은 차설아의 이런 태도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진짜 두 집안이 싸우기를 원한다고?”선우시원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흥미로운 말투로 물었다.“당연하지!”차설아는 계속 감정이 격해서 말했다.“할아버지는 언젠가 내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직접 군대를 이끌기를 원하셨어. 만약 선우 가문과 성가가 일전을 치르게 된다면, 상업적으로나 무력적으로나, 내가 선두에서 이끌었으면 좋겠어!”“좋아! 아주 당차구나!”선우도환은 만족스럽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다.“역시 차무진의 손녀야, 여장군이 따로 없네. 못난 내 손자보다 훨씬 훌륭해!”“그러게요. 시원아, 너도 설아한테서 좀 배워.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떻게 설아를 지키겠어. 잘못하면 설아가 널 보호하는 게 아닌지 몰라.”양보아는 선우시원을 흘겨보며 하찮은 표정이 역력했다.선우시원은 차설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대체 무슨 꿍꿍이야? 겁도 없이 함부로 나대는 거야? 난 그저 할아버지와 농담을 한 것뿐인데 왜 네가 부채질을 해? 진짜 두 집안이 싸우기를 바라는 거야?”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평화주의인 척 연기하지 마. 애초에 날 끌어들여 성가에 대적하려던 건 너였어. 내 해커의 신분을 성도윤에게 폭로하겠다고 협박까지 했었잖아. 지금 와서 휴전을 선포하는 거야?”“그건 성도윤에 대한 너의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려던 거였지. 성도윤에게 그렇게 애틋하던 사람이 지금은 전쟁을 하겠다는 건, 딱 봐도 이상하잖아!”여기까지 말한 선우시원은 더욱 다정하게 차설아의 어깨를 감싸고 이마를 여자의 뺨에 대고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랑 아버지 앞에서 괜히 잔꾀를 부려서 두 집안이 휴전하거나, 화해하게 만들려고 하지 마. 그러다 들통나면 나도 너를 구해줄 수 없어!”“하하하!”차설아는 별말 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우시원과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선우도환은 희색이 만개하여 선우준
선우도환은 흥분에 차서 황급히 말했다.“맞아, 결의 대회를 전신 앞에서 하면 되겠네!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헬기를 준비해서 떠나자꾸나!”“좋아요, 지금 당장 출발해요!”차설아는 팔을 흔들며 말했다.그리고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선우도환은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매우 충동적이고 열정적이고 심지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다. 전신에게 인사하러 당장 가자고 해도 움직이니 말이다.‘다행이야. 성도윤이 이 집안 사람들과 마주치는 건 막을 수 있겠어! 그때 가서 아무 핑계나 찾아서 두 집안싸움을 멈추면 그만이야!’차설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자신이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는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바로 이때, 집사가 와서 보고했다.“큰일 났어요, 어르신. 밖에... 밖에 엄청난 분께서 뵙자고 하시네요.”선우도환은 차갑게 말했다.“대체 얼마나 큰 인물이기에 유난을 떨어?”“그분은...”집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을 곧게 펴고 잘생긴 얼굴의 성도윤이 경비원들의 제지를 무시하고 쳐들어왔다.그는 검은 양복 차림에, 터프한 발걸음, 완벽하고 냉혹한 이목구비, 마치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차갑고 매서운 모습이었다.그는 총도 없고, 아무런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총을 메고 있는 경비원들은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눌려 벌벌 떨었고,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젠장,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순간이동이라도 한 거 아니야?”차설아는 성도윤을 보고 놀라서 표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해안과 S시는 차로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리는데, 성도윤이 지금 왔다는 건, 오로지 한가지 가능성뿐이었다. 그는 원래 S시에 있었을 것이다!어쨌든, 차설아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그녀는 정말 남자를 붙잡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성도윤, 당신 진짜 바보야? 여기가 지옥문인 걸 알면서도 쳐들어와? 누가 소 여사 아들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아주 똑같네!’차설아는 힘에 부쳤다. 겨우 소영금을 보냈는데, 지금은 성도윤이 왔다.‘보아
성도윤은 사람들을 향해 느릿느릿하지만 확고하게 말했다.“당연히 이혼절차죠.”말을 마친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다가가 긴 팔을 뻗어 자연스럽게 여자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자기야, 왜 이렇게 속을 썩여.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남자랑 도망간 거야? 이러면 곤란하지.”“자... 기?”차설아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 보며 두피가 저렸다.‘이 녀석... 이 정도로 연기 할 필요는 없잖아!’차설아는 어젯밤의 악몽이 생각났다. 기름, 호랑이 의자...성도윤에 의해 뜯어먹히고 있었다...선우 가문의 사람들은 이미 화가 잔뜩 차올랐지만, 성도윤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선우도환은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총을 꺼내 식탁에 놓으며 매서운 눈으로 말했다.“보아하니, 성가에 꽤 쓸만한 놈이 있네. 감히 홀몸으로 우리 집에 와서 사람을 빼앗아 가다니. 듣자 하니 성가에 후손이 너 하나뿐이라고 하던데, 만약 그 유일한 후손이 우리 집에서 죽는다면 성주혁 그 노인네가 얼마나 화가 날까?”성도윤은 그 단총을 흘깃 쳐다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차설아를 더 꽉 끌어안았다.“어르신, 빼앗는다는 건, 보통 자기 물건이 아닌 것에 사용하죠. 저랑 설아는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부부이고, 어엿한 저의 아내이니 원래 제 것이죠. 그러니 빼앗는다는 표현보다는... 데려간다는 표현이 더 알맞겠네요.”“네 놈이 감히!”선우도환은 번개 같은 속도로 총을 집어 들어 성도윤의 머리에 대고 사납게 말했다.“어떤 표현이 더 알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 집에서 사람을 데려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니까!”“네 할아버지가 말해줬나? 난 절대 총알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백발백중이지.”차설아는 양팔을 벌리고 성도윤의 앞을 가로막고 큰 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진정하세요. 권세를 믿고 약자를 괴롭히라고 제 할아버지가 이 총을 드린 것이 아니에요.”그녀의 말에 모두들 숨을 들이쉬었다.양보아는 끊임없이 차설아에게 눈
선우도환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일의 맥락을 파악한 그는 연로하지만, 늑대처럼 매서운 차가운 눈으로 차설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시원이를 이용했고, 모든 것이 연기였고, 우리 집안을 속였다, 이 말이야?”차설아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겸연쩍게 말했다.“모두 죄송해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그만... 그만하라고!”선우시원은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차설아를 걱정하면서도 화가 났다.“차설아, 진짜 바보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건 너무 어리석었다.선우시원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을 가장 싫어했고,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눈앞의 차설아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차설아, 너 이제 끝장이야!’“그래, 좋아!”선우도환은 화가 나서 표정을 일그러졌고, 총구를 차설아에게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얼마나 너를 맘에 들어 했는데. 너는 차 장군님의 손녀이니 온 힘을 다해 키우려 했어, 하지만 날 너무 실망하게 하는군...”“선우 가문의 규칙 제1조: 우리 가문을 속인 자는 죽어 마땅하다!”선우도환이 당장 총을 쏠 위기일발의 순간, 선우시원이 차설아의 앞을 가로막고 건들건들 말했다.“할아버지 말씀대로 우리 가문의 규칙인데, 외부인이랑 뭔 상관이 있죠? 만약 오늘 누군가에게 총을 꼭 쏘아야 한다면, 저한테 쏘는 게 맞죠!”“내가 못 쏠 것 같아?”“당연히 쏘시겠죠. 가문 전체가 멸망해도 눈도 깜박이지 않는 대단한 분이시잖아요!”양보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이 자식, 당장 입 닥쳐! 일을 더 크게 만들 생각이야?”선우준수도 총을 쏠까 봐 무서워 용기를 내어 말했다.“아버지, 진정하세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 말을 함부로 해요. 어른인 저희가 잘 가르쳐야죠. 개과천선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어요?”이 말은 줄곧 독단적이고 고집불통인 선우도환의 마음을 움
차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목이 성도윤에 의해 꽉 잡혔다.“설아는 선택할 필요 없어요. 반드시 저와 함께 가야 해요.”성도윤은 말을 마치고 바로 차설아를 잡고 홱 돌아섰다.“감히 어딜가!”선우도환은 단단히 화가 났고, 인내심도 없어져 총을 성도윤의 머리에 겨누었다.“성도윤, 설아까지 죽게 만들 셈이구나!”동시에 주위의 경비원들도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선우도환의 명령만 떨어지면, 두 사람은 틀림없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을 것이다.차설아는 당황하여, 성도윤의 손을 뿌리치려고 노력했다.“성도윤, 이거 놔! 그만 고집부려! 급박한 상황에서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지. 당신은 죽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라고!”성도윤은 차갑게 말했다.“나 성도윤은 아직 여자에게 보호받을 만큼 못나지 않았어.”차설아는 할 말을 잃었다.‘젠장, 고집도 세지. 내가 당신을 한두 번 구했어? 이럴 때 무슨 영웅 놀이야?’성도윤은 고개를 돌려 날카롭고 냉담한 눈빛으로 선우도환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르신, 총을 쏘셔도 되지만, 그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어르신의 선우 군대는 즉시 잿더미가 될 거예요.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선우도환은 미간을 구겼다.“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패배를 모르고 있는 나의 선우 군대에게 네 놈 위협이 통할 것 같으냐?”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제 할아버지는 언젠가 어르신이 미쳐 날뛰는 날을 미리 대비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모든 선우 군대의 훈련장소에 대량의 전자폭탄을 묻었죠. 버튼만 누르면 수만 개의 에너지가 섬 하나는 거뜬히 폭발 시킬 수 있는 파급력을 갖고 있어요. 못 믿으시겠다면, 한번 시범해 보셔도 돼요.”“뭐라고?”선우도환은 물론 선우 가문 사람들의 안색이 돌변했다.선우 군대는 모두 16개로, 세계 각지에 분포되어 엄격한 훈련을 받고 있다. 훈련의 장소는 모두 극비리에 엄선한 곳인데, 성가가 어떻게 알았고, 또 정확하게 전자폭탄을 설치할 수 있을까?그동안 선우 가문이 큰소리를 칠
차설아는 대충 얼버무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참, 당신 어머니는 어젯밤에 내가 풀어줬어. 지금 안전할 테니 전화해서 확인해봐.”“확인할 필요 없어.”우뚝 솟은 몸매의 성도윤은 선우 가문에서의 무뚝뚝함은 사라지고 여유로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그는 빳빳한 수트를 아무렇게나 벗어 의자에 휙 던지니, 고급스러우면서도 몸에 달라붙는 흰색 셔츠만 남겼다. 완벽한 근육이 셔츠를 통해 은은하게 비쳤다.차설아는 힐끗 쳐다보고는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곧이어 남자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시계를 천천히 벗어 탁자에 놓고,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니는 어젯밤에 이미 해안에 도착하셨어. 아마 지금쯤 친구들이랑 커피를 마시고 있겠지.”“어젯밤에 도착했다고?”차설아는 말이 안 되지만, 또 아예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그럼 당신은 왜 아침부터 선우 가문에 쳐들어왔어?”성도윤은 고개를 들더니 차설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날카롭고 깊은 눈으로 씩 웃었다.“왜일까?”“그건...”차설아는 입술을 깨물고 왠지 긴장되었다.성도윤의 눈빛은 화염처럼 너무 뜨거웠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 마치 그녀를 태울 것 같았다.차설아는 머리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당신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분명한 건, 난 이미 당신 집안 사람들에게 할 만큼 했어...”“날 이렇게 멋대로 데려오면 어떡해. 내 입장에 대해 생각은 해봤어? 아마 난 선우 가문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거야. 당신 참 고맙네!”선우 가문의 기괴한 가풍은 공포에 떨 정도로 삼엄하지만, 선우 가문의 모든 사람, 선우도환부터 선우시원까지 모두 차설아에게 잘해주었고, 차설아를 공주처럼 모실 것 같았다.그런데 지금 성도윤과 함께 그 집을 나왔으니, 선우 가문 사람들은 분명 매우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당신이 와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나랑 선우 가문은 관계가 이렇게까지 틀어지지 않았을 거야. 당신이 날 함정에 빠뜨렸다고!”“그래?”성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