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아 아가씨, 혹시 설아 아가씨예요?”음산하고 쉰 목소리는, 설레는 말투로 차설아를 향해 끊임없이 다가갔다.차설아는 제대로 놀라, 두 손을 흔들며 크게 소리쳤다.“경고하는데 나한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내 팔자가 얼마나 단단한 줄 알아! 나한테 함부로 한다면 도사를 찾아가서 너를 거두어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 거야!”“무서워하지 마세요, 아가씨, 저예요. 늘 제 옆에 붙어 계셨잖아요. 민이 이모예요.”뼈만 앙상한 ‘여자 귀신’은 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목을 잡아 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검고 긴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넘겨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였다.“민이... 이모?”차설아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여자 귀신’의 얼굴을 보고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차설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이모, 어떻게, 어떻게 지금까지...”민이 이모는 차설아 집의 집사이자, 어릴 때부터 차설아를 키운 유모였다.어떻게 보면 차설아의 엄마보다 더 친한 관계였다.차씨 가문이 파산한 후, 부모님은 투신하여 자살했고, 수많은 빚쟁이가 집에 찾아왔다. 민이 이모는 끝까지 집을 지키려다가, 한 패거리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난장소에 던져졌다.물론 이런 소식은 차설아가 성가에 시집와서 들은 것이다.그녀가 차가로 돌아갔을 때,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차설아는 난장소에 달려가 사흘 밤낮을 뒤졌지만, 이모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차설아는 돌아가서 몸살이 났다. 거의 보름 동안 흐리멍덩해서 잠만 잤고, 입에서 온갖 귀신에 홀린 듯한 말을 했다.그때부터 소영금은 차설아를 불길한 사람이라며, 주위 사람에게 불운을 가져오는 재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차설아는 언젠가 민이 이모의 복수를 하리라 다짐했다.최근에 마침 민이 이모를 때려죽인 몇몇 사람을 찾아내 손을 쓸 생각이었다.설마 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진심을 느끼고 신통력을 발휘한 것일까?“아가씨, 겁먹지 마세요. 전 귀신이 아니에요. 보세요. 체온이 있잖아요.”민이 이모는 차설
“그때, 선생님과 사모님이 떠나시고, 어르신도 떠나시고, 아가씨도 성가로 시집을 가니 집안이 텅텅 비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별장에 눈독을 들였죠. 물건을 옮겨가는 사람, 부수는 사람, 특히 어떤 사람들은 바닥의 타일까지 뜯어서 가져갈 기세였죠.”“전 목숨을 걸고 아가씨를 대신해 이 집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러다 맞기도 하고, 보복을 당하기도 하면서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어요. 마지막에 온 몇 명의 독한 사람들은 아예 숨이 넘어갈 정도로 때리고, 내가 정신을 잃으니 난장소에 끌고 가 묻어버렸죠.”이 말을 들은 차설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이모, 너무 고생하셨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모를 다치게 한 자들을 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아가씨, 화내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다시 아가씨를 보게 된 것만으로 충분해요.”모녀만큼 깊은 정을 나눈 두 사람은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지난 4년 동안의 서러움을 모두 쏟아냈다.“그런데 어떻게 탈출했어요?”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며 궁금해서 물었다.“운이 좋았어요. 어느 착한 분이 절 시체로 가득 쌓인 진흙 구덩이에서 꺼내주었고, 그 덕에 목숨을 부지했어요.”민이 이모는 과거를 회상하며, 공허한 두 눈에는 깊은 두려움과 고마움이 가득했다.“절 구해준 그 분은 신분이 범상치 않았어요. 어떤 큰 인물의 부탁을 받았다고 했고, 저보고 해안을 떠나라고 했어요.”“신비로운 큰 인물이요?”차설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누가 이렇게 선심을 베풀었는지 짐작하려했다.그 당시 차씨 가문은 완전히 나락했고, 전 세계인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누가 그때 선뜻 도움을 줄 수 있을까?“저도 잘 모르겠어요. 생명의 은인에게 꼭 보답하고 싶은데 말이에요.”“혹시 도윤 도련님이 아닐까요? 그때 차씨 가문을 나서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건 성가네 뿐이었어요. 그리고 아가씨가 그 집안에 시집을 갔고, 저는 아가씨의 유모이고, 그러니 아가씨를 위해 절 구한 게 아닐까요?”“불가능해요!”차설
민이 이모는 말을 마치고, 서둘러 지하실에서 4년 동안 간직해 온 유서가 담긴 낡은 상자를 가져왔다.“아가씨, 이 유서는 사모님께서 임종 직전 저에게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약 아가씨의 결혼생활이 행복하다면 절대 이걸 보여서는 안 되고, 이혼하면 이 유서를 전하라고 하셨어요.”민이 이모는 정중하게 봉투에 담긴 유서를 차설아에게 건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사모님이 투신하기 전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사모님의 유일한 걱정은 차설아였다. 차설아가 성도윤과 결혼해서 행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하지만 이 결혼이 4년 만에 깨질 줄은 누가 알았을까?차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봉투를 바라보니 ‘설아 아가에게’라고 적혀 있었다.그 누구도 모사할 수 없는 어머니의 글씨였다.눈물이 핑 돌며 시야가 흐려졌다.4년 전, 부모님이 투신했을 때 차설아는 실험실에 웅크리고 앉아 다양한 행성에서 전자파의 작동 속도를 연구하고 있었다.과학 천재로서 그녀는 데이터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한 달 이상 실험실 문을 나서지 않았으며 외부와 연락하지 않았다.가족들은 줄곧 그녀의 연구를 지지해 왔으며, 실험을 할 때 방해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마침내 실험에 성공하여 이 기쁨을 부모님에게 나누려고 했을 때, 들려온 건 집안의 파산과 부모님의 비보였다.그때, 차설아는 가문의 사람이 미웠다. 자신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 부모님이 더욱 미웠다.그녀는 복수를 원했고,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하더니, 성도윤과 결혼시켰다.4년 동안, 그녀는 말없이 갑자기 떠나 버린 부모님 때문에 고통에 빠졌다. 심지어 일부러 그들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가문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엄마 아빠는 말없이 절 떠난 게 아니었네요. 내가 너무 어리석고, 고집스러워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차설아는 울면서 봉투를 뜯었다.유서는 몇십 자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자 한 자 차설
민이 이모의 추측에 차설아는 생각에 잠겼다.차설아는 눈썹을 가늘게 찡그리고, 부모님이 남긴 유서를 되새기며 입을 열지 않았다.민이 이모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바로 자기 뺨을 때리며 말했다.“늙은이 입방정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성씨 가문이 어떻게 차씨 가문을 해칠 수 있겠어요? 만약 사실이라면 선생님과 사모님도 아가씨를 그 집으로 시집보내진 않았을 거예요.”“그렇긴 하지만, 이혼하면 이 유서를 주라고 하셨고, 저한테 성씨 집안 사람들을 탓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셨어요. 분명 그 집안과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거예요.”차설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미 사건의 대략적인 맥락을 분석했다.“성씨 가문이 우리 집안을 해친 게 아니더라도, 뭔가를 알고 있는 건 틀림없어요. 게다가 우리 집안을 해친 가문은 세력이 아주 클 거예요. 그러니 다들 나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으면서 성씨 가문에 시집을 보냈죠.”차씨 가문은 결코 겁쟁이가 아니다.부모님을 자살하게 하고, 할아버지가 임종 전에 손녀를 맡길 정도라면 분명 차씨 가문보다 세력이 크고, 성가와 필적하는 가문일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차설아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해안 전체에서 성가와 필적하는 가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가씨,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복수하실 생각이에요?”“당연하죠!”차설아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고, 눈 밑에 살기가 어렸다.“우리 부모님을 죽게 한 사람들, 절대 가만두지 않아요!”성도윤의 아내로 살 때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세상의 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복수를 잊은 채 폐인으로 살아왔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도윤과 이혼을 했고, 성가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절대 차씨 가문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고, 부모님의 원한도 꼭 갚아야 한다.이제부터 그녀는 모든 정력을 복수에 쏟아부을 예정이다.이튿날, 차설아는 듣기 좋은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잘 잤어? 아가들.”차설아는 몸을 편안
차설아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달려갔다.이모가 파놓은 깊은 구덩이 안에 청록색의 옥패가 보였다.차설아는 서둘러 옥패를 주워 위의 흙을 깨끗이 닦고 자세히 살폈다.옥패는 불순물 한 점 없이 순수한 색상으로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윤택하고 약간 차가웠다. 위에는 정교하고 기발한 도안이 새겨져 있어 보기에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민이 이모는 옥패를 쳐다보며 이해가 되지 않아 말했다.“이상하네요, 우리집 마당에 언제 이렇게 귀한 옥패가 묻혔을까요? 전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나요?”“혹시 가문이 파산당하고, 누군가 몰래 들어와 묻은 건 아닐까요?”차설아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옥패의 도안에 시선이 쏠렸다.이 도안을 왠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그건 불가능해요.”민이 이모는 곰곰이 회억했다.“가문이 파산당하고 나서 전 한 발자국도 이 집을 떠난 적이 없어요.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틈을 타서 누군가 집에 들어와 이 물건을 정원에 묻었다면 제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고요.”“그리고, 누가 이런 귀한 옥패를 남의 집 정원에 묻을까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이 아주머니는 꼼꼼한 분이셨다. 만약 누군가 정원의 흙을 건드렸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그러니 이 옥패는 오래전 정원에 묻혔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이모, 이 옥패의 도안을 전 어디서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나요. 이모는 본 적이 없나요?”“봐봐요.”민이 이모는 자세히 보기 위해 돋보기 안경을 썼다.한참 동안 자세히 본 후, 민이 이모는 갑자기 생각난 듯했다.“아, 본적이 있어요. 아가씨가 태어났을 때, 아가씨를 감싼 포대기 안에 수놓은 것이 바로 이 도안이었어요. 보아하니 봉황과 피안화의 결합이네요.”“그러고보니 저도 생각이 나는 것 같아요.”차설아는 기억력이 뛰어나서 한 번 본 것을 절대 까먹지 않는다.엄마 유품을 챙길 때 그 포대기를 본 적이 있었다. 부모님의 다른 유품과 함께 상
성도윤은 여전히 키가 크고 꼿꼿하며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마치 차설아를 보지 못한 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차설아는 턱을 치켜들고 무시하려 했다.하지만 술에 취해 남자들과 KTV에서 울부짖고, 가지 말라고 자신을 붙들고 억지를 부리던 모습이 떠올라 ‘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성도윤은 멈칫하더니 빙산처럼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물었다.“왜 웃어?”차설아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차갑게 말했다.“그냥 기분이 좋아서.”성도윤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흥, 너한테 뭔 기분 좋은 일이 있다고. 생각보다 긍정적이네.”“이혼했잖아. 불구덩이에서 드디어 탈출을 했으니 기분이 좋지!”차설아는 희고 예쁜 얼굴을 들고 활기찬 얼굴로 말했다.“누구처럼 밤늦게 술 마시고 통곡하고, 또 남자들을 불러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거나, 또 뻔뻔스럽게 전 부인에게 매달리지 않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그 비굴한 모습을 다 봤어. 부끄럽지 않아?”성도윤의 차갑고 도도하던 모습은 무너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반박할 길이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빌어먹을, 술에 취한 동영상이 성도윤 인생의 오점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차설아 앞에서 얼마나 차갑고 도도하게 굴든 간에, 전보다 위협감이 떨어질 건 사실이다.성도윤은 이미 거금을 들여 그 창피한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완전히 내렸고, 기회를 틈타 이슈몰이하던 플랫폼도 여러 개 차단했다.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셈이다. 어쨌든 네티즌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지금 전 세계 사람들이 성도윤이 무릎을 꿇고 차설아에게 매달리는 동영상을 보았으니, 제대로 망신을 당했다.차설아는 웃음을 참고 계속 남자를 놀렸다.“날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네, 성도윤 씨? 왜 진작에 말을 안 했어?”“역시 나 차설아는 매력이 있다니까. 까다로운 성 대표님이 이성을 잃고 내 앞에서 통곡하고 말이야...”차설아는 자존심을 버리며 이 남자만 4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드디어 역할이 바뀌었으니
성도윤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내딛고 창문 앞으로 가서, 창밖의 푸르고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넋을 잃었다.이런 뷰는 이 아파트에서 꼭대기 층에 사는 성도윤과 차설아의 집에서만 볼 수 있었다.이런 우연의 일치는 마치 두 사람을 암암리에 엮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그들은 얼마나 많은 밤을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지냈을까. 서로의 고민을 전혀 알지 못한 채...“왜 이사 가는 거야?”한참 뒤 성도윤은 몸을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포대기를 찾느라 거실 서랍을 열어보던 차설아는 성도윤의 갑작스런 물음에 어리둥절했다.“이사 가고 싶어서.”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한마디 덧붙였다.“성 대표님이 날 싫어하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말이야. 맞은 편에 살고 있으니 오다가다 마주치면서 성 대표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떡해.”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똑똑한 척하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몰라!”“그래, 성 대표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임채원이랑 성가 저택에서 알콩달콩할 시간도 모자란데 언제 여기에 오겠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햇빛 속에 서 있는 차갑던 성도윤의 얼굴에는 갑자기 흥미로움이 번졌다. 그는 차설아를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질투하는 거야?”차설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즉각 부인했다.“김칫국 마시지 마!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질투해?”“질투하는 거 맞네.”성도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확신에 차서 말했다.그를 좋아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 쯤은 당연히 느낄 수 있었다.갑자기 성도윤은 그 영상이 폭로된 후, 마침내 자존감을 회복한 느낌이 들었다.영상에서는 성도윤이 차설아에게 끈질기게 매달렸어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설아가 자기에게 마음이 남아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햇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성도윤은 빛을 받으며 마치 아이돌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차설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뭐 하는 거야?”남자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자 차설아는 무의식적으로 방어 자세를
차설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부자연스러운 손길로 배를 가리며 애써 덤덤한 척 말했다.“나도 임신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자연히 배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이혼해서 너무 신이 났나 봐. 맨날 맛있는 거 먹었더니 살이 찐 거더라고.”“그래도 그런 말 해줘서 고마워, 내가 다이어트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줬네. 경수가 워낙 젊어서 활력도 넘치고, 내가 몸매를 잘 가꾸지 않으면 걔가 다른 여자한테 마음을 뺏길지 누가 알아?”성도윤의 얼굴빛은 한껏 어두워졌다.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차설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그래? 그럼 행운을 빌게.”남자가 코웃음을 치고는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차설아는 그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으면서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아봤다.‘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반응 보니까 엄청 화난 것 같은데? 그런데 화가 났다고 해도 왜 때문이지? 경수가 싫어서 그러나? 어휴, 나도 모르겠어!’차설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역시 남자 마음은 알 수가 없다니까!’그녀는 생각을 거두고 집 안에서 포대기를 샅샅이 뒤져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봐도 포대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그렇다면 단 한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바로 그녀가 포대기를 성씨 가문 본가에 두고 온 것이다.지난번에 임채원이 갑자기 들이닥친 바람에 차설아는 너무 급하게 떠났다. 그래서 주로 옷을 담는 상자 하나를 두고 왔었다. 포대기는 분명 그 상자 안에 있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성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지금 마침 한낮이라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임채원은 유럽의 귀부인처럼 파라솔 밑에 있는 의자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하인들에게 말했다.“다들 밥 안 먹었어요? 당장 움직이란 말이에요. 차설아가 이 화원에 심은 모든 화초와 나무를 모조리 뽑아버려요!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를 심어놓으란 말이에요. 열두
성도윤은 묵묵히 참다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경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랑 차설아의 관계는 너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지금 행복해. 네가 보기 불편하면 그냥 나가면 되잖아.”“...”배경윤이 성도윤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붙잡히자 이번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려 했다.성도윤은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지만 배경윤의 저돌적인 공격에 살짝 밀리는 기분이 들어 결국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바로 그 순간, 사도현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성도윤과 배경윤도 순간 굳어버렸다.“오해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성도윤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배경윤을 놓아주었고 배경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도윤의 발을 힘껏 밟았다.“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성도윤은 발끝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차설아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차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는데 그녀의 절친인 배경윤까지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슬쩍 사도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너, 보험 많이 들어둬.”“무슨 뜻이야?”사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뜻이긴? 저 호랑이 같은 여자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성도윤이 배경윤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투덜댔다.그러자 사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우리 경윤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애가 아니야. 분명 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겠지.”그는 중요한 순간에 배경윤 편을 들기로 했다.사실 예전에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마다 배경윤과 말다툼이 잦았다.배경윤은 성도윤을 두고 철저히 쓰레기라고 욕했고 사도현은 차설아가 너무 까다롭다고 반박하며 두 사람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곤 했다.하지만 이
“그만 좀 해요, 너무 닭살 돋아요.”차설아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랑 고백을 들으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쑥스럽기보다 오히려 닭살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엔 성도윤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전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입만 열면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성도윤이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뒤 말했다.“물 받아놨어. 들어가서 몸 좀 풀고 와.”“좋긴 한데... 좀 나가주겠어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안 되지. 당신이 미끄러지거나 수건이 필요하거나 옷을 입어야 할 때 누가 도와줘?”“괜찮아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도윤 씨가 여기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어요.”차설아는 아직 성도윤과 그렇게까지 오픈된 관계는 아니었다.게다가 자신만 벗고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알겠어. 그럼 욕조까지만 데려 줄게. 다 끝나면 전화해.”성도윤이 한발 물러나며 휴대폰을 욕조 옆 선반에 올려놨다.“여기 핸드폰 놔뒀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야.”“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요!”차설아가 손을 휘저으며 성도윤을 재촉했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차설아는 그가 정말 나갔다고 확신하고서야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원래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얬다. 실루엣만 봐도 누구든 넋을 놓을 정도였다.그런데, 옷을 벗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씨, 변태예요?!”“들켰네.”성도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차설아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불만 지르고... 알겠어, 나 간다.”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더 있다가는 차설아가 진짜로 그를 때려눕힐지도 몰랐다.성도윤은 자
“와, 대박! 이런 주제에 감히 남자를 뺏으려고 했다고?”그 여자들은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와 배경윤을 마구 찍어댔다.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으...”배경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차설아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그 여자들과 맞서야 해서 허둥지둥했다.“꺼져!”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도윤이 험상꿎은 얼굴로 난동을 부리던 여자 하나를 단숨에 잡아채 거침없이 밀쳐버렸다. “설아야!”그는 온몸에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서 있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저 없이 배경윤을 밀어내고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았다.“도윤 씨?”차설아가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가 순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가까이 오지 마요. 나 더러워요.”“상관없어.”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두 손을 꼭 쥐고는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그 모습을 본 여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퍼졌고 각종 편집과 조롱으로 도배되었다.온라인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세상에 공평한 법은 있구나. 이게 바로 업보지!][아무리 그래도 팬들이 너무 폭력적이야.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리고 바로 이 영상을 통해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한편, 성진의 차 안.성진은 무료한 듯 핸드폰을 스크롤내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최근 권력 싸움에서 그는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선글라스를 낀 채,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서 있는 차설아.그 순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설아의 눈이...”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그가 가지고 있는 이 눈은 바로 차설아가 준 것이었다.여러 감
“당연히 다르지!”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도윤 씨 한 사람만 좋아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선우시원이든, 성진 씨든, 내 선택은 항상 도윤 씨였어. 하지만 넌 다르잖아... 네 마음은 진찬영 씨한테도 가고 도현 씨한테도 끌리고 있잖아. 솔직히 말하면, 너 둘 다 갖고 싶어 하는 거 맞지?”[너 진짜 무섭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집어내냐!]배경윤은 차설아의 날카로운 분석을 듣고 반박도 못 하고 민망하게 웃었다.사실 그녀도 자신이 왜 이렇게 고민하는지 몰랐고 이제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욕심이 많았던 거였다.“그러니까, 이제 솔직해지자. 굳이 도망갈 필요 없어. 양쪽 다 품으면 되잖아? 왼쪽엔 한 명, 오른쪽엔 한 명. 얼마나 좋아? 만약 내가 두 사람을 좋아할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후궁 3천은 거느렸을걸?”차설아가 반은 농담, 반은 진심으로 말했다.[야, 진짜 맞는 말이네! 네 말 듣고 나니까 머리가 확 맑아졌어!]배경윤은 갑자기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신나게 글을 써 내려갔다.[가만 생각해 보니까, 역사적으로 연애에서 이득 본 건 전부 남자들이었어. 우리는 애 낳아야지, 생리해야지, 시댁 챙겨야지, 애 키워야지, 일도 해야지, 불륜까지 걱정해야지... 정작 이득은 다 남자들이 보고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남편을 두 명쯤 두는 것도 합리적인 거 아니야?]“그치? 나는 진찬영 씨랑 도현 씨 둘 다 괜찮다고 보는데? 한 명은 집에서 살림하고 나 챙겨주고 한 명은 데이트하고... 완벽한 조합 아니야?”[하하하, 그러네, 그러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배경윤은 벌써 왼쪽엔 진찬영을, 오른쪽엔 사도현을 끼고 달콤한 나날을 보내는 상상을 하며 싱글벙글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너 아까 네가 오직 성도윤 한 사람만 좋아했다고 했잖아. 설마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거야?]“어... 그러니까..
불과 20분도 채 안 돼서 배경윤은 성도윤은 물론 그의 주변 사람까지 깡그리 욕해버렸다.차설아는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고 이런 분위기에서 성도윤과 다시 화해했다는 사실을 밝힐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됐고, 너 얘기나 해 봐. 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은 잘 끝났어? 최종 선택은 누구야?”“이 타이밍에 왜 하필 이걸 묻냐, 이 친구야!”배경윤은 코를 킁킁대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또 귤을 집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나 몇 회 봤는데 사도현 씨도 그렇고 진찬영 씨도 그렇고, 둘 다 너한테 진심이더라. 지금 많이 고민되겠어, 맞지?”차설아도 친구의 선택이 궁금했다.“하... 너까지 이 얘기를 꺼내다니, 나 진짜 이 주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퇴원 후 팬들을 만나고 오빠를 만나고 그리고 차설아를 만나기까지, 늘 똑같은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그래, 사도현과 진찬영, 둘 다 진심이었어. 그런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더 좋아하는 걸까?’“설아야, 너라면... 내가 누구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말을 가장 신뢰했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너만 말해 봐. 네가 고르라고 하면 난 그냥 그 사람 선택할게.”“장난치지 마. 이런 중요한 인생 결정을 남한테 맡기면 안 돼. 네가 직접 결정해야지.”“내가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잖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찬영 씨가 더 맞는 것 같아. 여러 면에서 봤을 때 우리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거든. 그런데...”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찬영 씨가 나한테 마취 깨고 난 뒤의 영상을 보여줬거든. 그걸 보고서야 알았어. 내 무의식은 사도현한테 더 끌리고 있더라. 거의 그를 한입에 집어삼킬 기세였어. 이유 없이 스킨십하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나 진짜 미쳤나 봐.”“음, 알겠다. 그러니까 네가 진찬영 씨를 좋아하는 감정은 ‘영혼의 동반자’
두 사람은 점점 지루해졌다.[우리 근처 공원 가볼까? 여기 많이 변했더라. 원래 화학 공장을 지으려던 곳인데 결국 보존돼서 주민 지역으로 바뀌었대. 습지 공원도 새로 조성돼서 꽤 예쁘더라고...]배경윤은 문장을 입력하다 문득 차설아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문장을 고쳐 적었다.[우리 근처 습지 공원 가볼래? 공기가 정말 좋더라.]“좋아!”차설아는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녀도 사실 집에만 계속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가 데리고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참이었다.배경윤은 차설아의 손을 잡고 함께 근처 습지 공원으로 향했다.공원 안에는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었고 호숫가엔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차설아와 배경윤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그곳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호수 중앙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신선한 공기와 은은한 물풀 향기가 물씬 느껴졌고 햇살이 호수 위로 내려앉아 반짝이며 일렁였다.[괜찮으면 눈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배경윤은 귤을 까면서도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타자한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 차설아에게 물었다.“빚을 갚았어.”차설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빚이길래 네 눈까지 내줘야 했어?]“마음의 빚.”[마음의 빚이라니, 누구한테?]배경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무슨 빚을 졌다고 그래? 항상 손해 보는 쪽은 너였잖아.]“성진 씨...”차설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예전에,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자신의 눈을 도윤 씨에게 줬어.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었는데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어. 그의 인생을 망쳐버린 게 결국 나였으니까. 이 은혜를 갚지 않으면 평생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어.”[뭐라고? 네 말은, 네 눈을 성진한테 줬다는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귤을 손에 꽉 쥐었다. 그
배경윤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사도현과 진찬영 사이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도대체 왜 온 세상이 이 문제로 싸우고 있는 거야?’그때 마침 택시가 도착했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재빨리 차에 올랐다.운전사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백미러로 계속해서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말을 걸었다.“>에 나온 배경윤 씨 맞죠? 그 프로그램 진짜 재밌게 봤는데... 갑자기 폐지돼서 아쉬웠어요. 해외 촬영 가셨다가 뱀에게 물렸다면서요? 이제 다 회복하신 거예요?”그 말에 배경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당장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세상에... 연애 프로그램이 이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이 얘기뿐이야. 이거 트루먼 쇼 아니지?’“저는 도현 씨가 제일 좋았어요. 볼 때마다 빵 터지는 장면이 있었거든요!”“근데 배경윤 씨는 도대체 누구를 더 좋아해요? 최종 선택에 누굴 골랐어요? 저는 사도현 씨랑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던데...”운전사는 신나게 떠들며 >의 각종 명장면을 줄줄 읊어댔다.배경윤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 못 했다고 하는 게 맞나?’그녀는 그저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배경윤은 차설아의 집에 도착했다....한편, 지금 그 넓은 저택에는 차설아와 현이만 남아 있었다.원이와 달이는 학교로 갔고 김정민은 장을 보러 나간 데다가 성도윤은 아침 일찍 출근했기 때문이었다.현이는 차설아의 커피에 무언가를 넣은 후, 그녀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설아 씨, 커피 드세요.”“고마워요.”차설아는 음악을 튼 채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그녀는 하루하루가 편안했지만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자꾸 졸음이 쏟아지고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왜 이렇게 잠이 오지?”커피를 마시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경윤이?”배경윤에게서 나
일주일 잘 회복한 배경윤은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절친인 차설아였다. 하지만 아직 목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말을 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계속 차설아와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았다.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아무리 문자를 보내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퇴원하자마자 배경윤은 먼저 차설아네 집으로 가보려 했다.진찬영이 그녀와 같이 갔고 예상대로 사도현도 나타났다.그는 자연스럽게 배경윤의 여행 가방을 받아서 들며 남자 친구처럼 굴었다.“가자. 나도 마침 사랑스러운 여왕님 찾으러 가려고 했거든. 같이 가면 딱 좋겠네?”[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나한테서 떨어지라고 말이야. 너 같은 거 보고 싶지 않거든.]배경윤은 일부러 그를 멀리하며 휴대폰에 타자를 했다. 그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사도현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보고 싶지 않으면 눈 감으면 되잖아.”사도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진찬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찬영 씨는 안 가도 되지 않나요? 저희 친구들이랑 친한 것도 아니고... 괜히 따라가서 분위기 갈지 말지는 그냥 빠지세요.”“제가 가는지 마는지는 경윤 씨가 정할 문제 아닌가요? 사도현 씨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찬영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두 사람이 또다시 싸우기 시작하자 배경윤은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둘 다 오지 말라고 입력한 후, 가방을 끌고 병원을 빠져나갔다.사실 배경윤의 목적은 차설아와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두 사람이 따라붙으면 또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싸울 게 뻔했기에 그 민망한 꼴을 그녀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렇게 혼자 길을 나선 배경윤은 도로 옆에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병원 근처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다.“배경윤 씨... 맞죠?”갑자기 뒤에서 낯선 목소리
배경윤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급히 휴대폰을 꺼내 몇 글자를 입력했다.[제가 듣기로는 다들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때,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던데...혹시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기억이 안 나서 그래요.]“정말 알고 싶어요?”진찬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배경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걸요? 알고 나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반응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날의 모습을 영상으로 몰래 기록해 뒀었다.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 왔었다. 배경윤처럼 순수하게 사랑스러운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그날 귀여운 그녀의 모습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해도 진찬영은 영원히 기록해두고 싶었다.[빨리 말해줘요! 저도 알고 싶어요!]배경윤은 계속해서 그에게 졸랐다.사실 그녀도 인터넷에서 비슷한 영상을 본 적이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의식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황당한 행동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또 다른 숨겨진 성격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요. 그럼 직접 봐요.”진찬영은 휴대폰을 꺼내 그날 촬영해 둔 영상을 보여주었다.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영상 속 장면을 보는 순간, 그녀는 숨이 턱 막혀 기절할 뻔했다.그 영상 내용은 이러했다.전신마취에서 깨어나 수술대에서 밀려 나올 때, 사도현과 진찬영이 양쪽에서 배경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배경윤이 갑자기 사도현의 손을 덥석 잡더니 울다가 또 웃으며 그의 목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도현에게 입을 맞추더니 또 한바탕 대성통곡을 했다. 마지막에는 사도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뭔가를 찾는 듯했다.[저 도대체 뭘 찾고 있었던 거래요?]배경윤은 당황한 나머지 급히 영상을 꺼버리고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감싸 쥔 채 진찬영에게 물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마취에서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