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표정이 굳어졌다.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결혼한 지 4년이 되었지만, 같은 테이블에 앉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함께 식사를 했어도 설아의 입맛 취향이 어떤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난 그런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성도윤은 차가운 눈으로 오만하게 말했다.“부질없는 일이요?”배경수의 눈에는 시종일관 유지하던 나른함이 감출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그렇죠. 도윤 씨와 같은 냉혈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니, 어떻게 다른 사람을 신경 쓰겠어요?”배경수는 성도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날카롭게 말했다. 성도윤이라는 무정한 얼음산을 산산조각 낼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설아 누나의 노력이 안타깝네요. 누나는 도윤 씨의 입맛 취향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매운 건 싫어하고, 담백한 걸 즐기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스테이크 미디엄 웰던이라, 도윤 씨를 위해 스테이크 굽는 법만 100가지 넘어 배웠어요. 그 노력이 정말 가엽네요!”배경수의 불평에 성도윤의 냉엄한 얼굴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기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성도윤은 무의식적으로 한자리 건너에 앉은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눈빛으로 배경수의 말이 진짜인지 묻고 있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굳건히 앞을 응시하고, 곱고 하얀 얼굴은 차가운 듯 차갑지 않은 듯했다.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경수의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도윤 씨의 냉혹함에 비하면 전 확실히 인정이 많은 편이죠.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신경 쓰고 있는 분들이니 모두의 입맛 취향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했던 노력이 안타깝지는 않아요. 앞으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그만이죠.”차설아의 말에 성도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성주혁은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설아야, 네가 맘고생 한 걸 알아. 윤이와 재결합하라고 부추기지 않으마. 앞으로 경수와 잘 지내거라. 믿을 만한 사람이니 널
매년 개최되는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가 글로리 호텔에서 열렸다.언론사들은 카메라 장비들을 메고 날이 밝기도 전에 호텔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그들이 이토록 열정적인 이유는 두 명의 거물 때문이었다.한 명은 이혼 파문에 휩싸인 해안 8대 가문인 성가의 미래 후계자이자, 성대 그룹의 대표 성도윤.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전자 칩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선임 연구개발자이자, KCL그룹의 최대주주인 Y씨.Y씨는 신분이 베일에 싸여 있고, 종래로 공식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데다 성도윤과 특별하게 얽혀있어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성도윤과 특별한 인연이라면, KCL 그룹에서 개발한 칩은 성대 그룹에게만 공급해 왔다. 이로하여 성대 그룹은 오늘날 하이테크 시장에서 75%를 차지하는 선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더욱 특별한 것은 성도윤이 호텔에서 자주 한 남자와 만나는데, 이 남자가 Y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전시장은 아주 넓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Forbes유명 인사에서 활약하는 슈퍼 엘리트이다.지역마다 부동한 회사들이 참가하여 자신의 가장 선진적이고 인기 있는 하이테크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차설아는 천신 그룹을 대표해 회의에 참가했다. 이런 신생 기업은 연구개발팀도 없어 유명 브랜드가 모인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에서 존재감이 떨어졌다. 부스도 작고 외진 곳에 위치하여 업계 종사자들의 따돌림과 차별을 받았다.하지만 차설아는 개의치 않았다. 이번 회의에 참가한 주된 목적은 최신 산업 정보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녔다.제일 큰 전시장은 당연히 성대 그룹과 KCL 그룹이었다. 호텔의 황금 자리에 한 층씩 자리잡고 있었다.이 두 회사의 전시장 앞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지 못하여 혼잡하기 짝이 없었다.차설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KCL 그룹의 전시장에 비집고 들어갔다.늘씬한 웨이트리스는 현대적이고 기술적인 느낌의 의상을 입고 최신 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여러분 안녕하세요, 보고 계
“혈기 왕성한 두 남자가 호텔에서 같은 룸에 들어가 아직까지 안 나왔는데 대체 뭘 하고 있겠어요?”사람들은 여기까지 말하고 또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성도윤과 Y에 관한 ‘스캔들’은, 애초에 업계 관계자가 악의적으로 조롱하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또 일련의 우연의 일치와 함께 사실인 양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그리고, 성 대표가 이혼한 것도 다른 여자와 바람피운 게 아니래. 그 내연녀도 사실은 둘이 작정하고 내세운 눈속임일 뿐이래.”“에이, 말도 안 돼요!”여기까지 들은 차설아는 세계관이 무너질 정도였다.하지만 성도윤과의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말이 되는 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성도윤은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여자와의 스캔들이 없고, 늘 엄숙하다.하지만, 진짜 성적 취향이 독특하다면 그녀와 함께한 그날 밤은 또 무엇일까?차설아는 머리가 혼란스러워 말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네이버 창을 열었다.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 검색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차설아는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다 실수로 한 남자의 발을 밟았고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죄송합니다.”차설아는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주우려 했지만, 임신 때문에 허리를 굽히는 것이 불편했다.이때, 그녀에게 발이 밟힌 남자가 매너 있게 허리를 굽혀 대신 주웠다.“여기 휴대폰이요.”남자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고, 휴대전화를 차설아에게 돌려주었다.돌려주는 과정에 남자는 차설아가 검색한 내용을 힐긋 보더니, 가늘고 긴 눈동자에는 흥미가 차올랐다.“감사합니다!”차설아는 어색하게 휴대전화를 받았다. 아주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답이다!남자와 차설아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둘 다 멍해졌다.“당신!”“너!”두 사람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지훈아, 너일 줄은 몰랐어. 아이돌 하는 애가 왜 여기 있어?”차설아는 남자를 쳐다보면서 반달 웃음을 지어 보이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절 기억하고 있
차설아는 멍한 얼굴로 신이 난 지훈을 바라보았다.‘내 남편의 간통에 네가 왜 더 흥분하고 있어?’하지만 차설아는 곧 납득했다.“연예계 사람들, 특히 아이돌들은 역시 사상이 개방적이야!”“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간통남을 잡으려는 이유가 성도윤의 마음을 잡아 스폰을 받기 위해 서지? 맞지?”차설아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서 진지하게 분석했다.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에 코난이 빙의해서, 지훈이의 속셈을 빤히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콜록!”지훈의 조각 같은 잘생긴 얼굴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질식사할 뻔했다.그는 차설아의 추리가 놀라웠고, 차가운 듯 차갑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추리력이 좀 이상한 쪽으로 빠지네요?”“그래?”차설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아이돌들의 성적 취향은 모르는 일이다.팀 내에서 멤버와 사귀고, 팀 밖에서 스폰서와 스캔들이 나는 건 흔한 경우였다. 지훈은 인기 남자 그룹의 멤버로서 이런 속셈이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지훈아, 잘 생각해. 성도윤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을 스폰서로 선택한다면 언젠가 화가 나서 죽을지도 몰라. 그냥 나랑 게임이나 해. 혹시 알아? 내가 기분이 좋으면 저예산 영화에 투자해서 너를 톱스타 반열에 올릴지?”차설아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럴 계획이 있었다.지금은 두 아이의 싱글맘이니, 당연히 돈이 되는 일은 무조건 해야 했다.연예계만큼 돈을 빨리 버는 업계도 흔치 않다.“이건... 생각해 볼게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 밑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하하, 참 재미있는 여자야.’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보물을 왜 성도윤은 마다했을까?엘리베이터는 곧 글로리 호텔의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성도윤의 룸은 찾기 쉬웠다. 이 층 전체가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이기 때문이다.“지훈아, 넌 망을 봐줘. 누가 오면 기침을 심하게 해, 알겠지?”말을 마친 차설아는 도둑처럼 수상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큰 걸음으로 룸
“뭐지?”차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뒤에 있던 지훈이 덤덤하게 말했다.“밖에서 수상하게 훔쳐보느니 차라리 안에서 확실히 보고 도망치는 게 낫죠.”“너!”차설아는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그녀는 지훈이 왜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룸 넘버를 알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빨리 일어나 빠져나가고 싶었다.성도윤과 그의 신비스러운 남자친구가 그녀를 보게 된다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다행히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은 아주 커서, 차설아가 룸 안에 들어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차설아가 일어나 나가려는데 욕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설마 남자친구랑 같이 샤워하고 있는 거야?’낯 뜨거운 장면을 생각한 차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두피가 저렸다.아무리 그래도 성도윤은 4년이나 깊이 사랑한 남자인데, 사실 그는 남자를 좋아한다?차설아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강렬한 호기심에 차설아는 배짱을 부리며 소리가 났던 욕실 문 앞에 다가가 유리문에 귀를 갖다 댔다.방금 지훈에게 한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확실히 남다른 청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줄줄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도 성도윤의 횡포하고 거만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또 장난치는 거야? 1년 동안 대체 어디 숨어 있었어? 당장 들어와!”뭐라고?이 말을 들은 차설아는 눈살을 찌푸렸고 멍해졌다.머릿속으로 까칠스러운 성도윤이 남자에게 구애를 하고, 남자를 욕실 구석으로 몰아가는 장면을 상상했다.듣다 보니 소리는 사라졌고, 차갑던 유리문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이상하다!도둑이 제 발 저린 차설아는 고개를 들어 보니 성도윤의 매서운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대로 얼어버렸다.“안녕... 이런 우연이. 당신도 여기 있었네?”차설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당장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성도윤은 높은 곳에서 제왕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뿜으며 물었다.막 목욕을 마친 성도윤의 머리는 단정한 모습은 없고 축축하게 흐트러
욕실에는 안개가 자욱한 열기가 피어올라 분위기가 극에 달했다.성도윤의 커다란 몸집은 마치 큰 산처럼 차설아의 위에 덮였다. 큰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매끄러운 욕실 벽에 밀어붙이고 차갑게 말했다.차설아는 원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는데 욕실의 열기가 더해지면서 온몸이 더워 나서 호흡조차 가빠졌다.차설아는 애써 빠져나오려고 식식거리며 말했다.“성도윤, 이거 놔. 게이 주제 나한테 뭐 하는 짓이야?”“게이?”성도윤은 차갑게 눈살을 찌푸리고, 잘생긴 얼굴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자신이 왜 게이의 특징을 풍기고 있는 건지 의혹스러웠다.“그럼 아니야?”차설아는 가십의 혼이 활활 타올라 계속 캐물었다.“네 남자친구는 KCL 그룹의 수석 연구원 Y잖아. 사귄 지 얼마나 됐어? 임채원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했던 거야?”속사포 같은 질문에 성도윤은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그의 꼿꼿한 몸은 더욱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여자의 귀에 대고 말했다.“너도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난...”성도윤이 가까워질 때마다 차설아는 주위의 공기가 희박해졌고,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더 미치겠는 건 지금 남자의 몸에는 흰 목욕 타월만 두르고 있었다. 그의 몸의 3분의 2를 차설아는 훤히 볼 수 있었다. 차설아는 함부로 눈을 흘겨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다른 곳만 응시했다. 매 순간순간이 쥐가 날 것 같았다.“당신이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나랑 상관없어. 일단 옷부터 입을래? 언제까지 발가벗고 있을 건데?”차설아는 마치 좌초한 물고기처럼 어쩔 수 없어 하며 말했다.“그러니까, 너도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지, 여자를 좋아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거지? 맞지?”“당연하지, 난...”차설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성도윤의 얇고 차가운 입술이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남자의 키스는 그녀의 대답을 유도했다. 차설아는 이 방면에서 완전 초짜라 바로 항복하고 빠져들고 말았다.“이래도 모르겠어?”성도윤은 아쉽
말을 마친 성도윤은 또 키스하려 했다.지금 성도윤의 눈에 차설아는 도살을 기다리는 어린 양에 불과했다. 그것도 직접 자기 몸을 바치러 온 셈이다.만약 지금 ‘잘 교육’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수고’가 헛될 뿐만 아니라, 성도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확실시된다.“난 이미 너랑 선을 긋기로 결심했어, 날 계속 건드리는 건 너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네 뜻대로 해주지. 난 인정 없는 전 남편이 되기 싫거든.”“오해야.”차설아는 바다를 떠나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지고 온몸이 뜨거워졌다.차설아도 자신의 행동이 오해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걸 인지했다. 호랑이의 굴에 직접 들어왔으니 성도윤이 오해를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난 그냥 호기심에, 그 유명한 Y씨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어. 절대 너한테 딴마음을 품은 적은 없어.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으면 이혼했겠어? 안 그래?”차설아는 두 손으로 남자의 넓은 어깨를 밀어냈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발악하는 토끼처럼 힘없이 해명했다.성도윤의 뜨거운 눈망울이 순식간에 식어버리더니 말했다.“그래서, 지금은 알겠어?”“알았어!”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저하게 알아버렸다는 표정이었다.공기 중에 떠돌던 애매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는 차갑게 여자를 한참이나 주시하더니 쌀쌀맞게 말했다.“이제 꺼져!”이대로 그녀를 놓아준 셈인가?차설아는 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서 나온 차설아는 지훈의 모습을 찾아다녔다. 대체 어떻게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지, 왜 자신을 방금 불구덩이에 밀었는지, 제대로 따져 물어야 했다.하지만,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주변을 다 살폈지만, 지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아주 신비로운 자식이었다.차설아는 방금 자신이 만난 지훈은 자신의 환각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인기 남자 아이돌이 이런 엘리트들이 모인 회의에 나타나는 것이 너무 어울
천신 그룹은 막 성장하기 시작한 스타트업 기업이었기에 아직 많은 직원을 뽑지 못했다.전시 회장을 책임지는 두 여자 애는 인턴이었기에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어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죄송합니다, 선생님. 설아 대표님은 바쁘시니 무슨 일이 있으면 저희와 얘기해 주세요.”“그러지!”건장한 남자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해마다 열리는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에 참석하려는 회사들은 어느 정도 조건에 부합해야 하거든. 당신들 회사는 설립된 지 1년도 되지 않았고, 독자적인 개발 제품도 없으니 이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없어. 3분 안에 당장 이 회의장에서 나가. 아니면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당신들을 모두 진압할 거야!”“하지만... 저희는 이미 대회의 초대장을 받았어요. 그럼 주최 측에서 우리의 참가를 허락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아요? 지금 저희를 내쫓아내려고 하시는 건 주최 측에서 실수를 했다는 말씀인가요?”인턴의 반박에 건장한 남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패널을 발로 툭 차고는 버럭 화를 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윗선에서 당신들을 회의에 참가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잔말 말고 당장 나가!”“계속 안 나가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건장한 남자가 말을 끝내고는 무전기로 경비원들을 불렀다. 그리고 천신 그룹이 속해있는 전시 구역을 가리키며 명령했다.“다 부셔놔! 저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부셔!”주위에는 다른 기업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박수를 치고 있었다.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린 대형 기업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신 그룹 같은 작은 회사가 글로벌 회의에 참석했으니 회의 클래스만 떨구기에 당연히 그들이 방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누가 감히 우리 구역을 부수려고 해요?”차설아가 천천히 사람들 속에서 걸어나오면서 크진 않지만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두 인턴은 서둘러 차설아의 뒤에 숨었다.그들은 천신 그룹에 입사한지 보름도 되지 않았지만 이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