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성도윤은 또 키스하려 했다.지금 성도윤의 눈에 차설아는 도살을 기다리는 어린 양에 불과했다. 그것도 직접 자기 몸을 바치러 온 셈이다.만약 지금 ‘잘 교육’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수고’가 헛될 뿐만 아니라, 성도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확실시된다.“난 이미 너랑 선을 긋기로 결심했어, 날 계속 건드리는 건 너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네 뜻대로 해주지. 난 인정 없는 전 남편이 되기 싫거든.”“오해야.”차설아는 바다를 떠나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지고 온몸이 뜨거워졌다.차설아도 자신의 행동이 오해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걸 인지했다. 호랑이의 굴에 직접 들어왔으니 성도윤이 오해를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난 그냥 호기심에, 그 유명한 Y씨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어. 절대 너한테 딴마음을 품은 적은 없어.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으면 이혼했겠어? 안 그래?”차설아는 두 손으로 남자의 넓은 어깨를 밀어냈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발악하는 토끼처럼 힘없이 해명했다.성도윤의 뜨거운 눈망울이 순식간에 식어버리더니 말했다.“그래서, 지금은 알겠어?”“알았어!”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저하게 알아버렸다는 표정이었다.공기 중에 떠돌던 애매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는 차갑게 여자를 한참이나 주시하더니 쌀쌀맞게 말했다.“이제 꺼져!”이대로 그녀를 놓아준 셈인가?차설아는 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서 나온 차설아는 지훈의 모습을 찾아다녔다. 대체 어떻게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지, 왜 자신을 방금 불구덩이에 밀었는지, 제대로 따져 물어야 했다.하지만,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주변을 다 살폈지만, 지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아주 신비로운 자식이었다.차설아는 방금 자신이 만난 지훈은 자신의 환각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인기 남자 아이돌이 이런 엘리트들이 모인 회의에 나타나는 것이 너무 어울
천신 그룹은 막 성장하기 시작한 스타트업 기업이었기에 아직 많은 직원을 뽑지 못했다.전시 회장을 책임지는 두 여자 애는 인턴이었기에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어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죄송합니다, 선생님. 설아 대표님은 바쁘시니 무슨 일이 있으면 저희와 얘기해 주세요.”“그러지!”건장한 남자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해마다 열리는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에 참석하려는 회사들은 어느 정도 조건에 부합해야 하거든. 당신들 회사는 설립된 지 1년도 되지 않았고, 독자적인 개발 제품도 없으니 이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없어. 3분 안에 당장 이 회의장에서 나가. 아니면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당신들을 모두 진압할 거야!”“하지만... 저희는 이미 대회의 초대장을 받았어요. 그럼 주최 측에서 우리의 참가를 허락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아요? 지금 저희를 내쫓아내려고 하시는 건 주최 측에서 실수를 했다는 말씀인가요?”인턴의 반박에 건장한 남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패널을 발로 툭 차고는 버럭 화를 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윗선에서 당신들을 회의에 참가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잔말 말고 당장 나가!”“계속 안 나가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건장한 남자가 말을 끝내고는 무전기로 경비원들을 불렀다. 그리고 천신 그룹이 속해있는 전시 구역을 가리키며 명령했다.“다 부셔놔! 저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부셔!”주위에는 다른 기업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박수를 치고 있었다.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린 대형 기업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신 그룹 같은 작은 회사가 글로벌 회의에 참석했으니 회의 클래스만 떨구기에 당연히 그들이 방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누가 감히 우리 구역을 부수려고 해요?”차설아가 천천히 사람들 속에서 걸어나오면서 크진 않지만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두 인턴은 서둘러 차설아의 뒤에 숨었다.그들은 천신 그룹에 입사한지 보름도 되지 않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은 차설아가 끝장날 줄 알았지만 사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그 건장한 남자였다.“아, 팔이 부러졌어, 팔이 부러졌다고!”남자는 극심한 고통에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차설아를 보며 협박했다.“X발년, 난 줄곧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의 경비원을 해왔어.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한테 굽실거릴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감히 나를 건드려? 너랑 네 보잘것없는 회사가 이 바닥에서 사라지게 해주지.”차설아는 전혀 두려울 것 없는 표정으로 남자의 어깨를 꽉 밟고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셋까지 센다, 당장 나랑 우리 회사 직원들한테 사과해, 아니면 다른 한쪽 손도 부술 거야.”남자는 계속 씩씩거렸지만 차설아가 힘을 조금 더 주자 그는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아 서둘러 꼬리를 내렸다.“알겠어요, 죄송합니다. 아깐 경우가 없어서 제가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이만 용서해 주세요!”점점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 여자 누구야?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감히 오영철도 건드리고. 이 사람 성도윤 쪽 사람이잖아. 정말 이 바닥에 더는 남아있지 않을 생각인가 봐.”“올해 하이 테크 협회에서 신임 회장을 뽑는다고 하더라고. 그 신임 회장이 이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투자를 했대. 성도윤과도 막역한 사이인 것 같더라고. 이 일이 커지게 되면 아마 이 회사는 바로 망하게 되겠지?”두 인턴은 사람들의 말을 듣자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조심스럽게 차설아에게 말했다.“대표님, 이 사람이 성 대표님 쪽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저희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분 아닐까요? 아니면... 아니면 우리가 사과하고 한 번 봐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우리 천신 그룹은 망하면 안 되잖아요.”해안시에서 성도윤은 절대적인 권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법을 어기는 것보다 성도윤에게 밉보이는 걸 더 꺼려 했다.만약 오영철이 정말 성도윤 쪽 사람이라면 아마 천신 그룹은 오래가지
“X발년, 아직도 그 주둥이를 놀리고 있네. 우리 대표님한테 눈도장 찍히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거야!”오영철은 부러진 손 때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차설아에게 곧 닥칠 시련을 생각하더니 이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아부하는 얼굴로 옆에 선 훤칠한 성도윤을 보며 말했다.“대표님, 이년이 키도 작고 여리여리한 것 같아 보여도 예사롭지 않은 솜씨를 가지고 있어요. 이참에 아예 저년의 팔이랑 다리를 모두 부러뜨릴까요? 나중에 또 무슨 사고를 일으킬지 어떻게 알아요.”“팔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성도윤은 씩 입꼬리를 올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좋은 생각이네.”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등골이 오싹했다.‘성도윤이 설마 그렇게까지 독하게 하겠어? 사랑의 감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부부의 연을 맺었던 사람한테 정말 그렇게까지 한다고?’오영철은 성도윤의 허락을 받고는 바로 기세등등하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경비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뭐들 하고 있어, 대표님 말씀 못 들었어? 얼른 저년의 팔다리를 부러뜨리라니까. 팔다리 없이 앞으로 어떻게 건방을 떨지 한 번 지켜보겠어!”경비원들이 움직이려고 하자 성도윤은 긴 다리를 뻗어 오영철의 가슴팍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그렇게 오영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성도윤은 멀리 밀려난 오영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경비원들을 향해 말했다.“저놈의 팔다리를 부셔버려.”그 말을 들은 오영철은 겁에 질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대표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뭐 잘못했나요?”오영철뿐만 아니라 차설아를 포함한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이 자식...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오영철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성도윤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싹싹 빌었다.“대표님, 제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나요? 저는 대표님이 분부하신 대로 한 것밖에 없습니다. 제가 죽게 되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죠.”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차설아는 잠깐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당연히 당신 돈을 빼가려고 하지!”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던 성도윤은 어이가 없는 듯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그는 차설아가 그의 물음에 얼버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원하던 대답을 얻지 못한 셈이었다.“내가 말했었지, 돈이 필요하면 직접 나한테 말해도 된다고.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은 부부였잖아. 돈으로는 절대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어. 돈을 얻으려고 괜히 헛수고하지 않아도 돼.”“직접 당신한테 말해도 된다고?”차설아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을 이어갔다.“그럼 성씨 가문의 재산 절반을 원한다고 하면 그래도 줄 생각인가 봐?”그 말을 들은 성도윤의 얼굴색은 한껏 어두워졌다.“장난은 하지 말고.”“그럼 그렇지, 전 남편이 의리 있으면 얼마나 의리 있겠어? 정말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이렇게 짠돌이가 되는데. 이것도 아까워, 저것도 아까워...”남자의 얼굴은 어두울 대로 어두워졌지만 차설아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성도윤을 화나게 하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나 차설아를 몰라도 너무 모르네. 내가 얼마나 탐욕이 많은 여자라고. 겨우 5, 600억은 전혀 내 성에 차지 않아!”그녀는 곧 아이 둘을 홀로 키워야 하는 싱글 맘으로 된다. 그러니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성도윤이 있는 대로 차설아는 돈을 모조리 가져오고 싶었다. 그래야 아이들이 크면 엄마를 따른 걸 후회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성도윤은 욕심도 없고 돈을 밝히지 않던 착한 전처에게 이런 탐욕스러운 면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녀의 ‘탐욕’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직접 돈을 달라고 했을 텐데 차설아는 자기 노력으로 성도윤의 자원을 뺏으려고 했으니 다른 한편으로는 그 노력에 박수를 쳐줄 만도 하다고 생각되었다.“정말 순진하네. 법률사무소를 가져가고, 또 남우 그룹과 계약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아?”성도윤은 깊은 눈망울로 그
차설아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자 성도윤도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회의장에 돌아간 그는 이번 회의의 메인 자리에 앉았고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성도윤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무표정으로 그의 뒤에 서 있던 비서 진무열에게 말했다.“서중훈한테 전해, 곧 열릴 글로벌 하이 테크 포럼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천신 그룹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으라고.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천신 그룹과 협력하는 순간 그들과의 비즈니스는 모두 끊으라고 해.”1년에 한 번 열리는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는 수많은 간판 기업들이 전시하고 홍보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하이 테크 포럼이었다.각국의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업계 다음 해의 발전 방향을 상의하곤 했는데 마치 유엔에서 중요한 문제를 두고 회의하는 것 같은 맥락이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대표로서 하이 테크 분야의 75%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었기에 절대적인 리더라고도 할 수 있었다.“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진무열은 마른침을 삼키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소문에 의하면 올해의 하이 테크 협회 회장이신 서중훈 씨는 연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회사를 아웃시킨다고 할 권리도 없을 듯합니다.”서중훈은 최근 몇 년간 계속 하이 테크 협회 회장직을 맡아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분야에 뛰어들려고 했고, 그럼 하이 테크 협회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또 하이 테크 협회 회장은 협회의 공식 대변인이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꽤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협회 회장의 말 한마디로 한 회사의 앞날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오랫동안 하이 테크 협회의 회장직은 성도윤이 키워낸 인재인 서중훈이 맡고 있었다. 덕분에 성대 그룹도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올해는 하이 테크 협회 회장이 교체되는 시점이었지만 큰 이변이 있지 않은 한 서중훈은 회장직을 연임할 것이다.진무열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연임하지 않을 것이라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연단 아래에서 큰 박수 소리가 울렸다.업계의 거물들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입구를 보고 있었다. 하이 테크 협회의 신임 회장이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또 신임 회장은 앞으로 4년 동안 하이 테크 분야의 방향을 정할 것이기 때문이다.스포트라이트 아래 검은 정장 슈트를 입고 머리를 높게 묶은 세련된 여자가 걸어 나왔다.맨 처음으로 소리를 지른 사람은 진무열이었다. 그는 눈을 비비더니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젠장,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왜 사모님이 나오셨지?”성도윤은 미간을 구기면서 차가운 얼굴로 세련된 모습의 차설아를 지켜봤다. 당연히 그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안녕하세요, 저는 하이 테크 협회의 새로운 회장직을 맡은 차설아라고 합니다.”차설아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턱을 높이 치켜든 채 연단에 올랐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그녀는 줄곧 캐주얼하거나 우아한 차림이었지만 오늘의 오피스룩에 은테 안경까지 더하니 그 누구보다도 세련되고 카리스마 있어 보였다.몸에 딱 붙는 스커트 아래에 옅은 색의 스타킹은 그녀의 긴 다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덕분에 그녀의 세련된 모습에는 섹시함까지 더해졌다. 이를 본 남자들은 차설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차설아의 외모는 완벽했지만 하이 테크 포럼에 참석하는 사람은 모두 이 분야에서의 거물들이었다. 협회 회장직을 여자에게 맡기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깐의 감탄 뒤에 곧바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졌다.“이분 성 대표님 아내분이 아니신가? 혹시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잘못 들어온 거 아니야?”“하이 테크 협회가 언제부터 일을 이렇게 못했어? 개나 소나 다 회장을 할 수 있고 말이야. 장난해?”봇물 같은 비난에 사회자는 머쓱한 얼굴을 보였다.“여러분,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차설아 씨는 협회 회장으로 당선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요구대로 제출했고, 또 충분히 회장직을 맡을 자격이 됩니다. 학업 스펙도 훌륭하고 발표한 논문은 국내외 유명
하이 테크 포럼이 끝난 후.차설아의 등장은 하이 테크 분야에 일파만파를 일으켰다.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 얘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그녀는 순식간에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관례에 따르면 하이 테크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을 맺게 되면 업계의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곤 했다.성도윤은 업계 최강자로, 차설아는 협회 회장으로 당연히 초대를 받게 되었다.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같은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분명 한때 가장 가까웠던 부부 사이였는데 두 사람은 말을 하기는커녕 서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엄밀히 말하자면 차설아가 성도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었다.반대로 성도윤은 차설아가 신경 쓰였는지 계속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차설아가 술잔을 들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여유롭게 업계 거물들과 얘기를 나눴다.여유로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비즈니즈계를 오랫동안 겪어온 ‘알파 우먼’ 같았다. 성씨 가문 사모님이었을 때의 수줍음과 소심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성도윤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아무도 그의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누군가 그에게 술을 권하러 오면 그의 싸늘한 얼굴에 겁을 먹어 뒤로 물러서고는 멀리서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현장은 극과 극인 상황으로 엇갈려졌다.차설아가 있는 쪽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사람도 북적북적 많았는데, 성도윤이 있는 쪽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은 채 무거운 분위기를 이어가며 조용했다.진무열은 성도윤의 뒤에 서 있었다. 그도 성도윤과 마찬가지로 차설아만 빤히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이런 대단한 재주도 있으셨네요. 공부만 잘했나 싶었는데 말씀도 엄청 잘하시네요. 왜 예전에는 몰랐을까요?”성도윤은 입술을 씰룩거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색은 한껏 더 어두워졌다.진무열은 눈치 없이 계속 물었다.“전에 대표님은 신임 회장에게 천신 그룹을 아웃시키는 일을 맡기려고 하셨잖아요.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