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개최되는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가 글로리 호텔에서 열렸다.언론사들은 카메라 장비들을 메고 날이 밝기도 전에 호텔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그들이 이토록 열정적인 이유는 두 명의 거물 때문이었다.한 명은 이혼 파문에 휩싸인 해안 8대 가문인 성가의 미래 후계자이자, 성대 그룹의 대표 성도윤.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전자 칩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선임 연구개발자이자, KCL그룹의 최대주주인 Y씨.Y씨는 신분이 베일에 싸여 있고, 종래로 공식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데다 성도윤과 특별하게 얽혀있어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성도윤과 특별한 인연이라면, KCL 그룹에서 개발한 칩은 성대 그룹에게만 공급해 왔다. 이로하여 성대 그룹은 오늘날 하이테크 시장에서 75%를 차지하는 선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더욱 특별한 것은 성도윤이 호텔에서 자주 한 남자와 만나는데, 이 남자가 Y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전시장은 아주 넓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Forbes유명 인사에서 활약하는 슈퍼 엘리트이다.지역마다 부동한 회사들이 참가하여 자신의 가장 선진적이고 인기 있는 하이테크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차설아는 천신 그룹을 대표해 회의에 참가했다. 이런 신생 기업은 연구개발팀도 없어 유명 브랜드가 모인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에서 존재감이 떨어졌다. 부스도 작고 외진 곳에 위치하여 업계 종사자들의 따돌림과 차별을 받았다.하지만 차설아는 개의치 않았다. 이번 회의에 참가한 주된 목적은 최신 산업 정보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녔다.제일 큰 전시장은 당연히 성대 그룹과 KCL 그룹이었다. 호텔의 황금 자리에 한 층씩 자리잡고 있었다.이 두 회사의 전시장 앞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지 못하여 혼잡하기 짝이 없었다.차설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KCL 그룹의 전시장에 비집고 들어갔다.늘씬한 웨이트리스는 현대적이고 기술적인 느낌의 의상을 입고 최신 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여러분 안녕하세요, 보고 계
“혈기 왕성한 두 남자가 호텔에서 같은 룸에 들어가 아직까지 안 나왔는데 대체 뭘 하고 있겠어요?”사람들은 여기까지 말하고 또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성도윤과 Y에 관한 ‘스캔들’은, 애초에 업계 관계자가 악의적으로 조롱하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또 일련의 우연의 일치와 함께 사실인 양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그리고, 성 대표가 이혼한 것도 다른 여자와 바람피운 게 아니래. 그 내연녀도 사실은 둘이 작정하고 내세운 눈속임일 뿐이래.”“에이, 말도 안 돼요!”여기까지 들은 차설아는 세계관이 무너질 정도였다.하지만 성도윤과의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말이 되는 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성도윤은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여자와의 스캔들이 없고, 늘 엄숙하다.하지만, 진짜 성적 취향이 독특하다면 그녀와 함께한 그날 밤은 또 무엇일까?차설아는 머리가 혼란스러워 말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네이버 창을 열었다.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 검색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차설아는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다 실수로 한 남자의 발을 밟았고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죄송합니다.”차설아는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주우려 했지만, 임신 때문에 허리를 굽히는 것이 불편했다.이때, 그녀에게 발이 밟힌 남자가 매너 있게 허리를 굽혀 대신 주웠다.“여기 휴대폰이요.”남자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고, 휴대전화를 차설아에게 돌려주었다.돌려주는 과정에 남자는 차설아가 검색한 내용을 힐긋 보더니, 가늘고 긴 눈동자에는 흥미가 차올랐다.“감사합니다!”차설아는 어색하게 휴대전화를 받았다. 아주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답이다!남자와 차설아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둘 다 멍해졌다.“당신!”“너!”두 사람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지훈아, 너일 줄은 몰랐어. 아이돌 하는 애가 왜 여기 있어?”차설아는 남자를 쳐다보면서 반달 웃음을 지어 보이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절 기억하고 있
차설아는 멍한 얼굴로 신이 난 지훈을 바라보았다.‘내 남편의 간통에 네가 왜 더 흥분하고 있어?’하지만 차설아는 곧 납득했다.“연예계 사람들, 특히 아이돌들은 역시 사상이 개방적이야!”“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간통남을 잡으려는 이유가 성도윤의 마음을 잡아 스폰을 받기 위해 서지? 맞지?”차설아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서 진지하게 분석했다.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에 코난이 빙의해서, 지훈이의 속셈을 빤히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콜록!”지훈의 조각 같은 잘생긴 얼굴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질식사할 뻔했다.그는 차설아의 추리가 놀라웠고, 차가운 듯 차갑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추리력이 좀 이상한 쪽으로 빠지네요?”“그래?”차설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아이돌들의 성적 취향은 모르는 일이다.팀 내에서 멤버와 사귀고, 팀 밖에서 스폰서와 스캔들이 나는 건 흔한 경우였다. 지훈은 인기 남자 그룹의 멤버로서 이런 속셈이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지훈아, 잘 생각해. 성도윤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을 스폰서로 선택한다면 언젠가 화가 나서 죽을지도 몰라. 그냥 나랑 게임이나 해. 혹시 알아? 내가 기분이 좋으면 저예산 영화에 투자해서 너를 톱스타 반열에 올릴지?”차설아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럴 계획이 있었다.지금은 두 아이의 싱글맘이니, 당연히 돈이 되는 일은 무조건 해야 했다.연예계만큼 돈을 빨리 버는 업계도 흔치 않다.“이건... 생각해 볼게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 밑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하하, 참 재미있는 여자야.’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보물을 왜 성도윤은 마다했을까?엘리베이터는 곧 글로리 호텔의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성도윤의 룸은 찾기 쉬웠다. 이 층 전체가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이기 때문이다.“지훈아, 넌 망을 봐줘. 누가 오면 기침을 심하게 해, 알겠지?”말을 마친 차설아는 도둑처럼 수상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큰 걸음으로 룸
“뭐지?”차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뒤에 있던 지훈이 덤덤하게 말했다.“밖에서 수상하게 훔쳐보느니 차라리 안에서 확실히 보고 도망치는 게 낫죠.”“너!”차설아는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그녀는 지훈이 왜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룸 넘버를 알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빨리 일어나 빠져나가고 싶었다.성도윤과 그의 신비스러운 남자친구가 그녀를 보게 된다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다행히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은 아주 커서, 차설아가 룸 안에 들어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차설아가 일어나 나가려는데 욕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설마 남자친구랑 같이 샤워하고 있는 거야?’낯 뜨거운 장면을 생각한 차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두피가 저렸다.아무리 그래도 성도윤은 4년이나 깊이 사랑한 남자인데, 사실 그는 남자를 좋아한다?차설아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강렬한 호기심에 차설아는 배짱을 부리며 소리가 났던 욕실 문 앞에 다가가 유리문에 귀를 갖다 댔다.방금 지훈에게 한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확실히 남다른 청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줄줄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도 성도윤의 횡포하고 거만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또 장난치는 거야? 1년 동안 대체 어디 숨어 있었어? 당장 들어와!”뭐라고?이 말을 들은 차설아는 눈살을 찌푸렸고 멍해졌다.머릿속으로 까칠스러운 성도윤이 남자에게 구애를 하고, 남자를 욕실 구석으로 몰아가는 장면을 상상했다.듣다 보니 소리는 사라졌고, 차갑던 유리문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이상하다!도둑이 제 발 저린 차설아는 고개를 들어 보니 성도윤의 매서운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대로 얼어버렸다.“안녕... 이런 우연이. 당신도 여기 있었네?”차설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당장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성도윤은 높은 곳에서 제왕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뿜으며 물었다.막 목욕을 마친 성도윤의 머리는 단정한 모습은 없고 축축하게 흐트러
욕실에는 안개가 자욱한 열기가 피어올라 분위기가 극에 달했다.성도윤의 커다란 몸집은 마치 큰 산처럼 차설아의 위에 덮였다. 큰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매끄러운 욕실 벽에 밀어붙이고 차갑게 말했다.차설아는 원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는데 욕실의 열기가 더해지면서 온몸이 더워 나서 호흡조차 가빠졌다.차설아는 애써 빠져나오려고 식식거리며 말했다.“성도윤, 이거 놔. 게이 주제 나한테 뭐 하는 짓이야?”“게이?”성도윤은 차갑게 눈살을 찌푸리고, 잘생긴 얼굴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자신이 왜 게이의 특징을 풍기고 있는 건지 의혹스러웠다.“그럼 아니야?”차설아는 가십의 혼이 활활 타올라 계속 캐물었다.“네 남자친구는 KCL 그룹의 수석 연구원 Y잖아. 사귄 지 얼마나 됐어? 임채원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했던 거야?”속사포 같은 질문에 성도윤은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그의 꼿꼿한 몸은 더욱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여자의 귀에 대고 말했다.“너도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난...”성도윤이 가까워질 때마다 차설아는 주위의 공기가 희박해졌고,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더 미치겠는 건 지금 남자의 몸에는 흰 목욕 타월만 두르고 있었다. 그의 몸의 3분의 2를 차설아는 훤히 볼 수 있었다. 차설아는 함부로 눈을 흘겨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다른 곳만 응시했다. 매 순간순간이 쥐가 날 것 같았다.“당신이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나랑 상관없어. 일단 옷부터 입을래? 언제까지 발가벗고 있을 건데?”차설아는 마치 좌초한 물고기처럼 어쩔 수 없어 하며 말했다.“그러니까, 너도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지, 여자를 좋아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거지? 맞지?”“당연하지, 난...”차설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성도윤의 얇고 차가운 입술이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남자의 키스는 그녀의 대답을 유도했다. 차설아는 이 방면에서 완전 초짜라 바로 항복하고 빠져들고 말았다.“이래도 모르겠어?”성도윤은 아쉽
말을 마친 성도윤은 또 키스하려 했다.지금 성도윤의 눈에 차설아는 도살을 기다리는 어린 양에 불과했다. 그것도 직접 자기 몸을 바치러 온 셈이다.만약 지금 ‘잘 교육’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수고’가 헛될 뿐만 아니라, 성도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확실시된다.“난 이미 너랑 선을 긋기로 결심했어, 날 계속 건드리는 건 너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네 뜻대로 해주지. 난 인정 없는 전 남편이 되기 싫거든.”“오해야.”차설아는 바다를 떠나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지고 온몸이 뜨거워졌다.차설아도 자신의 행동이 오해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걸 인지했다. 호랑이의 굴에 직접 들어왔으니 성도윤이 오해를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난 그냥 호기심에, 그 유명한 Y씨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어. 절대 너한테 딴마음을 품은 적은 없어.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으면 이혼했겠어? 안 그래?”차설아는 두 손으로 남자의 넓은 어깨를 밀어냈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발악하는 토끼처럼 힘없이 해명했다.성도윤의 뜨거운 눈망울이 순식간에 식어버리더니 말했다.“그래서, 지금은 알겠어?”“알았어!”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저하게 알아버렸다는 표정이었다.공기 중에 떠돌던 애매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는 차갑게 여자를 한참이나 주시하더니 쌀쌀맞게 말했다.“이제 꺼져!”이대로 그녀를 놓아준 셈인가?차설아는 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서 나온 차설아는 지훈의 모습을 찾아다녔다. 대체 어떻게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지, 왜 자신을 방금 불구덩이에 밀었는지, 제대로 따져 물어야 했다.하지만,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주변을 다 살폈지만, 지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아주 신비로운 자식이었다.차설아는 방금 자신이 만난 지훈은 자신의 환각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인기 남자 아이돌이 이런 엘리트들이 모인 회의에 나타나는 것이 너무 어울
천신 그룹은 막 성장하기 시작한 스타트업 기업이었기에 아직 많은 직원을 뽑지 못했다.전시 회장을 책임지는 두 여자 애는 인턴이었기에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어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죄송합니다, 선생님. 설아 대표님은 바쁘시니 무슨 일이 있으면 저희와 얘기해 주세요.”“그러지!”건장한 남자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해마다 열리는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에 참석하려는 회사들은 어느 정도 조건에 부합해야 하거든. 당신들 회사는 설립된 지 1년도 되지 않았고, 독자적인 개발 제품도 없으니 이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없어. 3분 안에 당장 이 회의장에서 나가. 아니면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당신들을 모두 진압할 거야!”“하지만... 저희는 이미 대회의 초대장을 받았어요. 그럼 주최 측에서 우리의 참가를 허락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아요? 지금 저희를 내쫓아내려고 하시는 건 주최 측에서 실수를 했다는 말씀인가요?”인턴의 반박에 건장한 남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패널을 발로 툭 차고는 버럭 화를 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윗선에서 당신들을 회의에 참가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잔말 말고 당장 나가!”“계속 안 나가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건장한 남자가 말을 끝내고는 무전기로 경비원들을 불렀다. 그리고 천신 그룹이 속해있는 전시 구역을 가리키며 명령했다.“다 부셔놔! 저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부셔!”주위에는 다른 기업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박수를 치고 있었다.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린 대형 기업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신 그룹 같은 작은 회사가 글로벌 회의에 참석했으니 회의 클래스만 떨구기에 당연히 그들이 방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누가 감히 우리 구역을 부수려고 해요?”차설아가 천천히 사람들 속에서 걸어나오면서 크진 않지만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두 인턴은 서둘러 차설아의 뒤에 숨었다.그들은 천신 그룹에 입사한지 보름도 되지 않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은 차설아가 끝장날 줄 알았지만 사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그 건장한 남자였다.“아, 팔이 부러졌어, 팔이 부러졌다고!”남자는 극심한 고통에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차설아를 보며 협박했다.“X발년, 난 줄곧 글로벌 하이 테크 회의의 경비원을 해왔어.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한테 굽실거릴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감히 나를 건드려? 너랑 네 보잘것없는 회사가 이 바닥에서 사라지게 해주지.”차설아는 전혀 두려울 것 없는 표정으로 남자의 어깨를 꽉 밟고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셋까지 센다, 당장 나랑 우리 회사 직원들한테 사과해, 아니면 다른 한쪽 손도 부술 거야.”남자는 계속 씩씩거렸지만 차설아가 힘을 조금 더 주자 그는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아 서둘러 꼬리를 내렸다.“알겠어요, 죄송합니다. 아깐 경우가 없어서 제가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이만 용서해 주세요!”점점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 여자 누구야?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감히 오영철도 건드리고. 이 사람 성도윤 쪽 사람이잖아. 정말 이 바닥에 더는 남아있지 않을 생각인가 봐.”“올해 하이 테크 협회에서 신임 회장을 뽑는다고 하더라고. 그 신임 회장이 이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투자를 했대. 성도윤과도 막역한 사이인 것 같더라고. 이 일이 커지게 되면 아마 이 회사는 바로 망하게 되겠지?”두 인턴은 사람들의 말을 듣자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조심스럽게 차설아에게 말했다.“대표님, 이 사람이 성 대표님 쪽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저희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분 아닐까요? 아니면... 아니면 우리가 사과하고 한 번 봐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우리 천신 그룹은 망하면 안 되잖아요.”해안시에서 성도윤은 절대적인 권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법을 어기는 것보다 성도윤에게 밉보이는 걸 더 꺼려 했다.만약 오영철이 정말 성도윤 쪽 사람이라면 아마 천신 그룹은 오래가지
배경윤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사도현과 진찬영 사이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도대체 왜 온 세상이 이 문제로 싸우고 있는 거야?’그때 마침 택시가 도착했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재빨리 차에 올랐다.운전사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백미러로 계속해서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말을 걸었다.“>에 나온 배경윤 씨 맞죠? 그 프로그램 진짜 재밌게 봤는데... 갑자기 폐지돼서 아쉬웠어요. 해외 촬영 가셨다가 뱀에게 물렸다면서요? 이제 다 회복하신 거예요?”그 말에 배경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당장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세상에... 연애 프로그램이 이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이 얘기뿐이야. 이거 트루먼 쇼 아니지?’“저는 도현 씨가 제일 좋았어요. 볼 때마다 빵 터지는 장면이 있었거든요!”“근데 배경윤 씨는 도대체 누구를 더 좋아해요? 최종 선택에 누굴 골랐어요? 저는 사도현 씨랑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던데...”운전사는 신나게 떠들며 >의 각종 명장면을 줄줄 읊어댔다.배경윤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 못 했다고 하는 게 맞나?’그녀는 그저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배경윤은 차설아의 집에 도착했다....한편, 지금 그 넓은 저택에는 차설아와 현이만 남아 있었다.원이와 달이는 학교로 갔고 김정민은 장을 보러 나간 데다가 성도윤은 아침 일찍 출근했기 때문이었다.현이는 차설아의 커피에 무언가를 넣은 후, 그녀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설아 씨, 커피 드세요.”“고마워요.”차설아는 음악을 튼 채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그녀는 하루하루가 편안했지만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자꾸 졸음이 쏟아지고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왜 이렇게 잠이 오지?”커피를 마시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경윤이?”배경윤에게서 나
일주일 잘 회복한 배경윤은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절친인 차설아였다. 하지만 아직 목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말을 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계속 차설아와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았다.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아무리 문자를 보내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퇴원하자마자 배경윤은 먼저 차설아네 집으로 가보려 했다.진찬영이 그녀와 같이 갔고 예상대로 사도현도 나타났다.그는 자연스럽게 배경윤의 여행 가방을 받아서 들며 남자 친구처럼 굴었다.“가자. 나도 마침 사랑스러운 여왕님 찾으러 가려고 했거든. 같이 가면 딱 좋겠네?”[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나한테서 떨어지라고 말이야. 너 같은 거 보고 싶지 않거든.]배경윤은 일부러 그를 멀리하며 휴대폰에 타자를 했다. 그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사도현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보고 싶지 않으면 눈 감으면 되잖아.”사도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진찬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찬영 씨는 안 가도 되지 않나요? 저희 친구들이랑 친한 것도 아니고... 괜히 따라가서 분위기 갈지 말지는 그냥 빠지세요.”“제가 가는지 마는지는 경윤 씨가 정할 문제 아닌가요? 사도현 씨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찬영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두 사람이 또다시 싸우기 시작하자 배경윤은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둘 다 오지 말라고 입력한 후, 가방을 끌고 병원을 빠져나갔다.사실 배경윤의 목적은 차설아와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두 사람이 따라붙으면 또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싸울 게 뻔했기에 그 민망한 꼴을 그녀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렇게 혼자 길을 나선 배경윤은 도로 옆에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병원 근처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다.“배경윤 씨... 맞죠?”갑자기 뒤에서 낯선 목소리
배경윤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급히 휴대폰을 꺼내 몇 글자를 입력했다.[제가 듣기로는 다들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때,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던데...혹시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기억이 안 나서 그래요.]“정말 알고 싶어요?”진찬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배경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걸요? 알고 나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반응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날의 모습을 영상으로 몰래 기록해 뒀었다.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 왔었다. 배경윤처럼 순수하게 사랑스러운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그날 귀여운 그녀의 모습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해도 진찬영은 영원히 기록해두고 싶었다.[빨리 말해줘요! 저도 알고 싶어요!]배경윤은 계속해서 그에게 졸랐다.사실 그녀도 인터넷에서 비슷한 영상을 본 적이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의식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황당한 행동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또 다른 숨겨진 성격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요. 그럼 직접 봐요.”진찬영은 휴대폰을 꺼내 그날 촬영해 둔 영상을 보여주었다.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영상 속 장면을 보는 순간, 그녀는 숨이 턱 막혀 기절할 뻔했다.그 영상 내용은 이러했다.전신마취에서 깨어나 수술대에서 밀려 나올 때, 사도현과 진찬영이 양쪽에서 배경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배경윤이 갑자기 사도현의 손을 덥석 잡더니 울다가 또 웃으며 그의 목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도현에게 입을 맞추더니 또 한바탕 대성통곡을 했다. 마지막에는 사도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뭔가를 찾는 듯했다.[저 도대체 뭘 찾고 있었던 거래요?]배경윤은 당황한 나머지 급히 영상을 꺼버리고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감싸 쥔 채 진찬영에게 물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마취에서 막
사도현의 말에 병실 안이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사실 요즘 늘 이런 분위기가 반복되고 있었다.진찬영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사도현이 뭐라 비꼬는 것의 반복이었다배경윤은 마치 인형처럼 두 남자 사이에서 양쪽으로 잡아당겨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피곤했다.신중히 고민한 끝에 그녀는 결국 화가 치밀어 올라서 핸드폰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두 사람 다 내일부터 오지 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배경윤은 이렇게 적어서 각각 사도현과 진찬영, 두 사람에게 각각 보여주었다.그러자 진찬영이 바로 사과했다.“미안해요, 경윤 씨. 제 잘못이에요. 제가 강요하지 말아야 했어요.”그는 깨끗하고 맑은 얼굴에 마치 대학교 남학생 같은 순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든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사도현 같은 사람에게 놓고 말해서 진찬영처럼 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고 진찬영을 노려보며 이를 갈며 말했다.“여우 같은 놈.”하지만 진찬영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눈을 살짝 내리깔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도현 씨, 미안해요. 사실 저도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경윤 씨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나 봐요. 소유욕 때문에 말이 거칠어졌어요. 제가 떠날게요. 경윤 씨만 행복할 수 있다면 저는 상관없어요.”“진찬영 씨,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제가 못 알아볼 줄 아세요?”사도현이 버럭 소리쳤지만 진찬영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경윤 씨, 전 경윤 씨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에요. 만약 제 존재가 부담스럽다면 더 이상 여기 있지 않을게요. 잘 지내요.”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배경윤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배경윤은 핸드폰을 들어 차분한 표
병실 밖에서 우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사도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러곤 갓 사 온 레드벨벳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사과 같은 거 먹어서 뭐 해? 차갑기만 하고 이가 시려서 고생한다고... 케이크 사 왔으니까 이거 먹어. 이거 사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더니 작고 정교한 케이크를 배경윤에게 건넸다.배경윤은 평소 사도현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이 레드벨벳 케이크만큼은 예전부터 너무나도 먹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로 받아 들었다.이 케이크 가게의 사장은 굉장히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하루에 딱 세 개만 만들었고 돈이 많다고 해서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 사장이 진심이 느껴지는 손님에게만 케이크를 파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배경윤도 몇 번이나 줄을 서서 사장에게 간절히 부탁했지만 끝내 사지 못했었다.그런 케이크를 사도현이 어떻게든 구해 왔으니 사느라 엄청 고생했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그런데 바로 그때, 진찬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배경윤에게 손을 내밀었다.“사과에는 비타민이 풍부하지만 케이크에는 당분이 너무 많아요. 지금은 회복하는 중이라서 단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돼요.”“경윤 씨, 자제해야죠? 빨리 회복해야 일찍 퇴원하고 목도 나을 수 있잖아요.”배경윤은 케이크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갑자기 먹기가 두려워졌던 것이다.“그깟 조각 케이크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그래요. 의사도 안 된다고 안 했잖아요. 게다가 케이크가 주는 행복은 그쪽이 하는 아재 개그보다 훨씬 크다고요.”사도현 역시 싸늘하게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만약 정말 경윤 씨를 위한다면 건강부터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은 행복보다 회복이 더 중요해요.”진찬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끝까지 반대할 작정이었다.“경윤이 인생이니까 제가 책임져요. 우리는 연인 사이예요. 앞으로도 결혼할 사이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쪽이 참
한편, 뱀에게 물린 배경윤은 일시적인 쇼크 상태에 빠졌다가 구조된 뒤로 줄곧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다.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프로그램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사도현, 진찬영 사이에서 벌어진 삼각관계로 인해 그녀를 둘러싼 논란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네티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머지는 중립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또 사도현을 좋아하는 사람, 진찬영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배경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그들 사이의 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결국 이 세 사람은 인기가 많아져서 배경윤 같은 일반인조차 연예인처럼 주목받게 되었다.배경윤은 목숨을 건졌지만 부작용으로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병원에 있는 동안, 사도현과 진찬영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돌봤다. 그 덕분에 병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격한 신경전이 벌어지게 되었다.그날도 사도현은 회사 일을 마치자마자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진찬영이 더 먼저 도착해 있었다.늘 조용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과일을 깎으면서도 배경윤을 웃겨주려고 그녀에게 장난을 쳤다. 그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배경윤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경윤 씨, 사과 먹으면 하나 더 들려줄게요.”진찬영은 깎은 사과를 한입 크기로 잘라서 그녀에게 건넸고 배경윤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활발하고 털털한 성격을 가졌기에 평소와 달리 아무 말 없이 웃는 모습은 뜻밖의 차분함과 부드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저 예전에 도사를 만난 적 있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매주 일요일 밤 12시 이후가 귀신들한테 제일 위험한 시간이라고 말이에요. 왜 그런지 알아요?”진찬영은 일부러 신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배경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핸드폰으로 타자를 했다.[왜요? 왜요? 빨리 말해봐요!]그녀는 평소 점을 치는 거나 미신 같은 걸 꽤 좋아했다. 그래
하지만 차설아는 현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오후가 되자 김정민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이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그녀는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서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했어?”검은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눈빛은 싸늘했다.“말씀하신 대로 다 했어요. 제발 엄마를 놓아주세요.”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계속해. 열흘 뒤에야 풀어줄 거야.”여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현이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헛짓거리할 생각은 마. 날 속이거나, 하루라도 늦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네 엄마는 죽는 거야. 알아?”“네, 알겠어요.”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살짝 떨었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제야 그 여자는 현이를 놓아주고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그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뭔데?”“그냥 궁금해서요. 설아 씨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설아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시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현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녀는 이 여자에게 조종당해 차설아를 해치는 일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그녀는 언젠가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러자 그 모자를 쓴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착하다고?”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자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뱀과도 같았다.“차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자가 누굴 해쳤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그럴
“현이 씨?”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현이 뿐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현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차설아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현이 씨 아니죠?”“설아 씨, 저 맞아요.”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차고 상냥한 말투와 달랐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설아 씨,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옷장 맨 왼쪽에 있는 니트 한 벌이면 돼요.”차설아가 또렷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가 그녀가 원하는 옷을 꺼냈다. 니트를 받아 든 차설아는 능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립심이 강했기에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오히려 현이 입장에서는 여느 고용인들보다 차설아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차설아를 좋아했다.하지만...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현이는 평소처럼 우유 한 잔에 통밀 토스트, 그리고 과일 몇 조각을 준비했다.차설아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토스트를 씹으며 현이에게 말했다.“혹시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아, 아니에요.”현이는 입술을 꼭 깨물며 망설였다.“그냥... 가족끼리 또 싸웠을 뿐이에요. 사실 맨날 싸워서 이제 익숙하지만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뭘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요? 앞을 못 보고 나서 지금까지 현이 씨가 절 도와주고 있잖아요. 오히려 제가 현이 씨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차
성도윤은 남자로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로 하여금 닭살 돋는 말을 하게 만들었고 눈물도 흘리게 했다.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알면 됐어요. 제가 얼마나 좋은 아내인데요! 그러니까 평생 저만 사랑해 주세요.”차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도윤의 목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술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완전히 긴장을 풀어 주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줬으니 말이다.사실 차설아는 오래전부터 성도윤과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한꺼번에 채울 생각이었다.“너, 너... 취한 거 아냐?”성도윤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차설아를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 그녀가 이러는 건 꿈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으니 말이다.그는 어찌할 바 몰랐다. 괜히 진하게 키스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취했든 안 취했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그냥 키스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녀는 두 손으로 성도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술을 포갰다. 차설아가 워낙 격렬하게 덤벼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갈까?”성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살짝 쉬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은데요?”그녀는 장난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위층으로 가면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게 아닐 텐데 괜찮아요?”“상관없어. 오늘 밤, 난 주인님의 말씀만 잘 따를 테니까.”그렇게 말한 성도윤은 차설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고 단숨에 침실까지 도착했다.아이들이 캠프를 떠난 타이밍이 이렇게 절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시간을 두 사람은 너무 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