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울부짖었다.“그러니까 내가 만약 오빠 편이라면 오빠가 사람을 죽인다 해도 말리지 말고 옆에서 칼이나 건네라는 말이야?”“당연한 거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꽉 잡고는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우리는 친남매고 너한테 나랑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어떻게 보면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야. 우린 영광을 함께 누리고 굴욕도 같이 감당해야 해. 내가 한 모든 일이 차씨 가문을 일으켜 세워서 세상을 떠난 우리 부모님을 위해 복수하려고 그러는 건데, 이것마저 하지 말라는 거야?”“가문을 위해서,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서 그러는 거 이해해.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우리가 만약 이루려는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면 천하의 나쁜 놈들과 다를 게 뭐야? 그렇게 해서 가문이 부유해지고 복수한다 해도 하늘에서 보고 있는 부모님이 좋아할 것 같아?”“그럼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차성철은 주먹을 쥔 채 베란다 난간을 내리쳤다.“내가 예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 적당히 했다면 진작에 죽어서 널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남들보다 독하고 잔인하니까 그 마굴에서 도망쳐 나온 거고 오늘의 성심 전당포가 세워진 거야.”“그래, 오빠 말대로 살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안정된 삶을 살면서도 더 많은 것이 욕심나서 비열한 짓을 저질렀잖아. 지아 언니는 오빠를 도와준 천사 같은 사람인데, 도대체 왜 지아 언니한테 은혜를 원수로 갚았어? 오빠가 정말 맞다고 생각해?”“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차성철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성도윤이 너한테 그렇게 말했지? 넌 말로는 내 편이라면서 내가 하는 말을 의심하고 성도윤이 한 말만 믿잖아. 이런 내 기분을 네가 알아?”“도윤 씨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지아 언니 가족을 죽이고 지아 언니한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고 낙태 수술까지 받게 했잖아.”차설아는 남매 간의 우애도 중요했지만 송지아의 참혹한 과거가 자꾸 눈에
차성철은 그동안 그리움과 증오로 가득 찬 삶을 보내오며 고통스러워했다.“만약 지아 언니가 살아있다면... 오빠는 어떻게 할 건데?”차설아는 침을 꿀꺽 삼켰고 차성철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차성철은 먼 곳을 내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차설아와 눈을 마주치고는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지아가 살아있다는 거지?”“아, 아니! 내 말은 만약 지아 언니가 살아있다면 오빠가 어쩔 건지 궁금해서 그래.”“모르겠어.”차성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씁쓸하게 웃었다.“어차피 날 용서해 주지도 않을 텐데, 차라리...”“차라리 뭐?”차설아가 계속해서 묻자 차성철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진짜 살아있는지부터 확인해야 알 것 같아.”“언니는...”차설아는 차성철한테 송지아가 살아있다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성도윤의 말이 떠올라서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차설아를 지그시 쳐다보던 차성철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지아가 살아있구나, 내 말이 맞지? 하지만 너한테 있어서 나는 악마니까 지아를 해칠까 봐 두려워서 알려주지 않는 거고...”“정말 해치려고 그래?”“당장은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어.”차성철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 악마보다 더 나쁜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친동생한테 거짓말하기 싫었다. 그래서 섣불리 약속하지 않은 것이다.“그럼 어떻게 해야 성도윤과의 싸움을 끝내고 평화롭게 지낼 건데?”차설아는 차성철과 성도윤이 피를 보는 싸움을 그만두고 원한을 풀어서 합작의 길로 나아가길 바랐다. 두 그룹 모두 성장할 수 있는 길이지만 성도윤이 먼저 손을 내민다고 해도 고집이 센 차성철이 합작 제안에 응할 가능성이 작았다.“그놈과 합작할 수는 있어. 그놈이 주는 이익이 현재 나의 합작 상대보다 더 높으면 말이야.”차성철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자본가는 이익만 두둑이 챙길 수 있다면 원한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도윤의 처사 방식이었고 차성철도 똑같은 제안을 했다.“오빠의 합작 상대보다 높아야 한다고? 그게 누구고
차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바람, 네가 왜 여기에 있어?”두 사람은 지난번 만남을 끝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이 상황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바람은 여느 때처럼 편한 옷차림을 하고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환한 미소로 차설아와 인사를 나누었다.“스파크, 오랜만이야!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널 지켜보고 있었어.”바람의 말에 차설아는 소름이 돋았고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야, 넌 나이도 가득 먹고도 애처럼 굴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날 짝사랑하는 스토커인 줄 알겠어.”그러자 차성철이 차설아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설아야, 이분에게 예의를 갖춰. 선우 시원 씨는 우리 그룹에 힘을 실어준 중요한 합작 상대야. 그리고 선우 가문은 방대한 세력을 갖추고 있기에 유일하게 성씨 가문과 대적할 수 있는 가문이라고! 성씨 가문을 짓밟으려면 선우 가문의 도움을 받아야 하거든.”차성철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번에 시원 씨 덕분에 이 구역을 주민 구역으로 남겨둘 수 있었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은 진작에 오수처리 공장이 되었을 거야. 이것만으로도 시원 씨한테 백번 고맙다고 인사해야 해.”차설아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오빠는 아직도 순진하다니까! 이 구역이 오수처리 공장으로 된 건 저놈이 한 짓이라서 그 결정을 철회하기만 하면 되는데 뭘 또 우리가 신세 진 것처럼 구는지 모르겠어.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차설아는 바람이 어떤 가문의 사람이든 관심 없었다. 애초에 바람은 글로벌 해커 리그에서 연속 4년 동안 차설아한테 졌기에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성철 형, 사실 저랑 스파크는 꽤 가까운 사이었어요.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주는 동료일 뿐만 아니라 저랑 결혼할 뻔한 약혼녀였다니까요? 선우 가문에서는 제가 스파크랑 결혼해서 가문을 빛내주길 바랄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오빠, 선우 가문 호락호락하지 않아. 바람은 완전 여우라서 선우 가문과 합작하면 본전도 못 찾고 내팽개쳐진다니까?”“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차성철은 선우 시원의 눈치를 살피면서 진심으로 말했다.“설아야, 네가 모르나 본데 이번 합작 건에서 선우 가문이 80퍼센트를 투자했지만 고작 20퍼센트 이윤만 가진다고 했어. 나머지 80퍼센트 이윤은 다 우리가 가지는 거라고! 선우 가문처럼 열정적이고 관대한 가문한테 내팽개쳐지면 뭐 어때. 선우 가문에서 투자금을 선뜻 내줬는데 뭐가 문제야?”“그게...”차설아는 기가 죽었고 말문이 막혀서 바람한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넌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바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하지, 너랑 결혼하기 위해서 선우 가문이 고군분투하고 있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차성철과 성대 그룹의 합작을 추진하려 할 때마다 더 큰 시련이 가로 막아서 번번이 실패했고 이번에는 가문의 재산을 바치겠다는 선우 가문이 나타나서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합작은 수포로 돌아갔다.차설아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그래, 우리 가문과 선우 가문의 합작도 괜찮은 제안이긴 해. 하지만 오빠는 성도윤과의 원한을 풀고 화해했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아, 합작하지 않더라도 서로 피를 볼 정도로 싸우지 마.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의 유언이니까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절대로 서로 적이 될 수 없어!”차성철도 완강하게 대처했다.“만약 엄마 아빠가 성도윤이 나한테 한 짓을 알게 되면 그 유언은 없던 거로 하자고 하실걸? 우리 할아버지는 대장군이신데 어떻게 자손이 남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두고만 보겠어. 내 얼굴 반쪽을 망가뜨린 건 차씨 가문의 체면을 구긴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러고도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것 같아?”이때 곁에 있던 바람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말했다.“형의 말씀에 동의해요. 차씨 가문과 선우 가문은 모두 군인 출
“방금 한 말 진심이야?”차설아는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차성철이 이렇게 쉽게 인연을 끊자고 말할 줄 몰랐다. 고작 복수 때문에 버림받은 차설아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차성철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것들을 생각하면 화나기보다 속상한 마음이 컸다.“오빠가 복수에 눈이 멀어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아. 이 말은 못 들은 거로 할 테니까 우리 며칠 동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두 가문을 위한 최고의 대안이 나올 거야.”차설아는 말을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스파크...”바람은 차설아의 씁쓸한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인상을 찌푸렸고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쫓아갔다. 차설아는 별장 앞마당의 커다란 아카시아나무에 달린 그네를 타고 있었다.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갔고 아카시아 꽃잎이 하나둘 떨어져 차설아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조금 전 입가에 맴돌던 말은 그대로 삼켜버렸다.차설아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넝쿨 의자에 앉아 바둑을 두었고 엄마는 장미꽃과 작약을 꺾어 도자기 꽃병에 예쁘게 꽂았다. 가족의 일원인 강아지 귀염둥이는 엄마 곁에서 맴돌았고 집안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차설아는 그네의 줄에 기대 눈시울을 붉혔고 울먹이면서 말했다.“엄마, 아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는지도 몰라. 난 그저 모두가 만족할 만한 대안을 찾아서 화해하고 싶었는데 오빠의 입장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 사람 편만 든 것...”“그래, 넌 그 사람 편만 들더라!”갑자기 바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설아의 뒤에서 한참을 지켜보던 바람은 차설아를 혼자 내버려두려고 했지만 혼잣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차설아가 계속 자책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차설아의 미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라도 기분이 나아지고 외로움이 줄어든다면 그걸로 만족했다.“스토커 바람, 왜 내 말을 엿듣는 거야?”
두 사람은 원수처럼 서로를 흉보았고 얼마 후 차설아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바람, 사실 네가 가만히 있을 때는 봐줄 만해.”차설아는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바람을 쳐다보면서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마워.”바람도 차설아의 말을 따라 했다.“넌 말을 예쁘게 할 때가 제일 예뻐.”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예전처럼 환하게 웃었다.“바람, 넌 내가 정말 그 사람 편을 든다고 생각해?”차설아는 경계심을 거두었고 제3자 바람의 입장에서 분석해 주길 바랐다.“솔직하게 말해도 돼?”바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괜찮으니까 솔직하게 알려줘. 내 눈치 볼 필요 없어.”“나는 네가 성철 형보다 성도윤의 편을 든다고 생각해.”바람은 갑자기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투덜거렸다.“흥, 네 전남편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를 더 끔찍이 아끼더라고.”“아, 아니거든! 난 오빠가 복수의 틀에 갇혀서 고통스러워하니까 그러는 거야. 그리고 성씨 가문도 우리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길 텐데 자꾸 건드리고 싸우려고 하니까 되레 당하는 거지.”“넌 성철 형이 되어보지 않았고 형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면서 왜 네 마음대로 화해하라고 강요하는 거야?”바람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진지하게 말했다.“만약 내가 열심히 해온 사업이 망하고 얼굴까지 괴물처럼 변했으면 절대 화해 안 해. 우리 선우 가문은 복수에 진심이거든. 그래서 쿨하게 웃으면서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대대로 친하게 지냈어. 난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가 두 가문이 싸우지 않기를 바란다고 생각해.”“그건 핑계일 뿐이야.”바람이 정곡을 찔렀다.“만약 성씨 가문과 차씨 가문 사이가 대대로 좋았다면 차씨 가문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성씨 가문에서 왜 가만히 있었겠어! 차씨 가문이 몰락 직전까지 가자 성씨 가문이 곧바로 해안시 8대 가문 중 하나로 떠올랐잖아. 난 아무리 봐도 두 가문 사이가 좋은 줄 모르겠어.”“그때는
바람은 두 눈을 감은 채 차설아와 입을 맞추려 했고 차설아는 처음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시도해 보기로 했다.인체가 한차례의 세포 신진대사를 완성하기까지 7년이 걸린다고 한다. 7년이 지난 뒤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차설아는 10여 년 동안 성도윤을 사랑했지만 감정에 변화가 생겨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매일 늙어가는 육체보다도 더 빨리 식어버리는 건 인간의 감정이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가볍게 부딪혔고 더 깊은 스킨십을 하려던 찰나,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 안돼!”차설아는 꿈에서 깨어난 듯 바람을 밀어냈고 손으로 머리를 내리치면서 후회했다.“내가 미쳤지, 정말 미쳤어!”바람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설아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뭐가 걱정되어서 그러는데?”“이런 걸 바란 게 아니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남녀가 사랑해서 함께 하는 거지, 서로 조건이 비슷하거나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아무 남자랑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두 사람한테 모두 불공평한 일이야.”“내가 아무 남자야?”“사랑하지 않으면 상대가 누구든 아무 남자인 거지. 우리는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나열해 보면서 행복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우리 사이에 사랑 같은 건 없잖아. 함께하려면 꼭 필요한 사랑이 빠진다면 기초가 흔들리는 건물처럼 얼마 못 가서 무너질 거야.”차설아는 솔직한 생각을 바람한테 알려주었다. 바람은 차설아와 결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고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바람이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는 맛있는 음식 중에서 배변물을 찾아 먹는다고 하는데, 어쩌면 차설아가 애타게 찾는 그것이 바로 성도윤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냄새나는 것을 멀리하라고 경고하지만 차설아는 성도윤이 아니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차설아의 말을 들은 바람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너의 억측에 불과해. 넌 나랑 시작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사랑
선우 가문에서는 보물로 인한 차씨 가문의 손해를 메꿔주었고 6조를 선물로 전달했다. 거금을 받은 차성철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바람과 함께 다니면서 여러 협력 건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차성철은 바람에게 깍듯이 대했지만 차설아와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매는 예전처럼 대화하지도 않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지냈다. 두 사람은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식사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만 열면 비난하는 말뿐이어서 바람과 배경윤은 그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오빠, 좁쌀은 적게 먹어, 그러다가 속 좁은 인간이 되면 어떡해?”차설아는 차성철 앞에 놓인 죽 그릇을 다른 쪽에 가져다 놓았고 누가 들어도 차성철이 속 좁다는 뜻이었다. 차성철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더니 차설아한테 콩나물 볶음을 집어주면서 차갑게 웃었다.“설아야,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먹어야지. 아니면 돼지 취급당할 수도 있어.”“고마워, 오빠. 닭발 무침도 먹어봐, 닭발이 오빠 대신 돈을 세어줄 수도 있잖아.”“그래, 이 물고기 눈을 먹으면 남자 보는 눈이 높아진대.”저녁 식사 내내 남매는 서로에게 반찬을 집어주면서 비꼬았고 그 사이에서 한숨만 내쉬던 바람과 배경윤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다시 밥을 먹었다.“나 먼저 일어날게.”차설아는 차성한의 말에 기가 차서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은 뒤 자리를 떠났다. 차설아는 차성철과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어젯밤에 차성철이 먼저 인연을 끊자는 말에 화가 단단히 났던 것이다.“저도 다 먹었어요. 설아야, 같이 가!”배경윤은 재빨리 차설아를 뒤따라갔다. 차설아는 걷다가 부둣가 앞에서 멈춰 섰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배를 쳐다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설아야, 성철 오빠랑 무슨 일 있었어? 두 사람 요즘 따라 분위기 이상하단 말이야. 서로 비난하려고 안달 난 사람 같아.”뒤따라온 배경윤이 차설아 곁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매가 싸우는 일은 흔하지만 서로를 사랑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
“두세 시간 뒤에요.”진찬영이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모든 독소를 제거하려면 세 시간 후에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물을 마시면 안 돼요.”“아직 시간이 많네요...”배경윤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제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설아에게 안부를 전해야 하거든요.”사도현이 배경윤을 다시 침대에 눕히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너나 잘 챙겨. 설아를 챙기는 사람은 많고도 많아.”“누군데? 설마 너의 그 쓰레기 같은 친구 성도윤은 아니지?”배경윤이 무례하게 반박했다.“난 그 자식이 방해할까 봐 걱정돼서 설아랑 계속 연락하려고 하는 거야.”사도현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도윤이 형이 대체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그래?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그 두 사람은 딱봐도 재능과 미모를 갖춘 천생연분인데, 그냥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잖아. 우리 도윤이 형을 바람둥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지?”“그 사람이 바람둥이 아니면 누가 바람둥이인데!”배경윤은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사도현과 따지려고 했다.“혼인 중에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고, 겨우 설아 마음을 되돌리더니 또 다른 재벌 딸과 약혼하고. 이게 바람둥이가 아니면 뭔데?”“설아도 너의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잖아. 요즘에는 선우 가문 도련님과도 뜨겁게 보내더니. 그리고 도윤이 형은 왜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실명하고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 설아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거야?”“그건 그냥 사고일 뿐인데 설아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원망할 거면 하느님을 원망해. 누가 그런 악행을 많이 저지르라고 했어. 하느님도 노해서 가만두지 않은 거지.”“배경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한테 막말은 해도 도윤이 형한테는 그러면 안 되지.”“내가 뭘 어쨌다고? 너도 방금 우리 설아한테 뭐라고 했잖아!”두 사람은 마치 싸움닭처럼 감정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이것은 두 사람이 계속 다투게 되는 주제라
진찬영은 사도현이 지금까지 만난 가장 자아도취적이고 오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경윤 씨한테 물어봤어요? 당신과 저 사이에 도대체 누가 외부인인지.”사도현은 말을 끝내자마자 진찬영의 품에서 배경윤을 뺏어오려고 했다.이때 이미 힘이 풀린 배경윤이 입술이 약간 창백해져서 말했다.“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계속 싸웠다간 제가 죽을지도 몰라요. 빨리... 저 좀 병원에 데려다줘요!”배경윤은 눈앞이 어두워지면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근처 병원의 환자 침대에 누워있었다.병상 앞에는 사도현과 진찬영이 앉아있었고, 분위기는 쓰러지기 전과 같았다.하지만 다행히도, 아직은 죽은 목숨이 아니었다.“경윤아, 깼어? 목말라? 물 따라줄까?”배경윤이 눈을 뜨자, 진찬영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이틀 동안 혼수상태였는데, 목마르냐고 묻는 시간에 이미 다 마셨겠어요.”사도현이 이 말을 할 때, 진찬영은 이미 따뜻한 물을 배경윤한테 건넸다.배경윤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오른손에 아무런 감각도 없어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내... 내 손...”그녀는 침을 삼키면서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손을 절단해야 하는 건가? 이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걸까?’“걱정 안 해도 돼요. 괜찮아요. 독이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마비된 느낌이 들 거예요.”진찬영은 부드럽게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아... 깜짝 놀랐잖아요.”배경윤은 절단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도현은 배경윤에게 직접 물을 먹여주면서 대뜸 말했다.“24시간 이내에 독을 깨끗이 배출하지 못하면 신경이 마비되어 절단해야 할수도 있어.”“푸!”배경윤은 물을 다 마시기도 전에 뿜어내고 말았다.“뭐라고?”긴장한 채로 사도현을 쳐다보던 배경윤은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만약 손을 정말 절단해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아직도 이해 못 했어? 독이 말끔히 없어지기 전까진
야맹주를 확인한 배경윤은 신속히 잠수했다.“천천히 가!”사도현은 그녀가 걱정되어 조심하라고 말했다.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운 산호바다였지만 단면이 너무 높아 일부 산호는 쉽게 만졌다가 위험할 정도로 날카로웠다.하지만 이때, 동심의 세계로 들어간 배경윤은 마치 큰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하면서 야맹주 위에 덮여 있던 산호초를 맨손으로 제거했다.그녀는 차설아가 평안 무사할수 있도록 이 야맹주를 선물하고 싶었다.“아!”배경윤이 야맹주에 손을 대려는 순간, 갑자기 산호초 틈새에서 은색 원형 물체가 튀어나와 그녀의 손등을 덥석 물었다.“바다뱀이야!”바다뱀이 배경윤을 물고 옆을 쓱 스쳐 자나가자 머릿속이 하얘진 사도현은 급히 잠수하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봐봐...야맹주!”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배경윤은 그저 벌레에게 물렸다고 생각하면서 순진하게 사도현에게 야맹주를 자랑했다.“입 다물어!”사도현은 눈앞의 이 덜렁거리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너무 화가 나고 안타까웠다. 그녀는 과연 이런 바다뱀이 독성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진찬영은 그렇게 많은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긴 팔로 배경윤의 허리를 감싸고, 긴 다리를 쭉 뻗어 빠르게 수면으로 올라갔다.진찬영과 하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례로 수면으로 떠올라 잠수 마스크를 벗었다.“여기 도와주세요! 보트를 준비해 주세요. 병원으로 가야겠어요!”사도현의 잘생긴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고, 잠긴 목소리로 육지에 있는 안전요원에게 외쳤다.“무슨 일이에요?”진찬영이 신속히 배경윤 곁으로 다가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벌레에게 물렸을 뿐이에요...”배경윤은 뱀에게 물린 손등을 들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보였고, 오히려 사도현이 너무 예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일반적으로 뱀에게 물리면 독이 체내에 바로 퍼지지 않아 아직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그녀는 다시 야맹주를 들어 올리며,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다들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진찬영은 이런 중요한 기회를 사도현을 놓칠 수가 없었다.“저는 저의 파트너로 하늘 씨를 선택하고 싶어요.”진찬영이 사도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안전요원에게 이렇게 말하자 사도현과 배경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이 자식 뭐하는 거야. 포기라도 하는 거야?”사도현은 믿기지 않는지 진찬영을 째려보면서 말했다.“어떻게 하늘 씨를 선택할 수 있어요? 어쩌다 정면으로 승부를 겨룰 기회가 생겼는데 왜 포기하는 거예요?”진찬영이 사도현을 냉랭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지금은 잠깐 경윤 씨를 도현 씨한테 맡길게요. 꼭 잘 지켜주셔야 해요.”사도현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잠수복을 입고 하늘과 함께 바다로 뛰어드는 진찬영을 쳐다보았다.“왜 저래?”제대로 한판 붙어볼 줄 알았는데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자기뿐이라 갑자기 김이 새는 느낌에 불쾌하기만 했다.“갑시다. 파트너님.”사도현은 더는 생각하기도 싫어 멍한 표정의 배경윤한테 터벅터벅 걸어갔다.“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랑 짝이 된 거야.”배경윤은 싫증난 표정을 하고있었다.진찬영과 손잡고 바다 경치를 즐길 줄 알았는데 말이다.그런데 아무리 봐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도현한테 자기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아까 등산할 때까지만 해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이 타이밍에 진찬영이 뒤로 물러설 줄 몰랐다.“난 다이빙 챔피언까지 땄던 사람이야. 기다려 봐. 오늘 야맹주를 꼭 찾아줄게.”사도현의 오늘 주요 목적은 야맹주를 찾는 것이었다.비록 전설일 뿐이었지만 만약 정말 찾아서 배경윤한테 준다면 이보다 더 의미 있고 로맨틱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사람들은 하나둘씩 바다에 뛰어들었다.하트섬은 물고기 떼, 가지각색의 산호초가 훤히 보일 정도로 수질이 좋았다. 더 깊이 내려가면 잭피시가 보이기도 했다.배경윤은 산소 호흡기를 꽉 깨물고 천천히 밑으로 향했다.파트너인 사도현은 그녀에게 무슨 사고라도 일어날까 봐 옆에 꼭 붙어있었다.진찬영은 몇 미터 밖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중이염을
이들은 어제저녁 약속한 대로 섬 근처에 있는 청정지역에서 스토클링하기로 했다.이때 감독 최빈이 말했다.“이 섬은 모양이 하트로 되어있어 하트섬이라고 불리는데 물이 맑아 산호초와 열대 물고기를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다들 오늘 운이 좋으면 하트섬 특유의 야맹주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밤이면 빛이 나는 그런 야맹주요.”“정말 야맹주가 있는 거예요?”배경윤이 이번 스노클링이 점점 더 기대되었다.사실 그녀는 일찍 하트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섬 중앙에는 고가의 진주가 들어있는 천연 조개가 많다고 했다. 최빈이 언급한 야맹주는 그저 전설일 뿐이었다.전설 속에서는 야맹주를 찾은 사람이 평생 행복할 거라고 했다.신난 배경윤은 야맹주를 찾아서 차설아한테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호객행위인지 몰랐다.“당연히 있죠. 수년 전에 섬에서 살던 분들이 발견했대요. 찾을 확률은 낮지만, 없는건 아니에요.”최빈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그럼 뭘 기다려요. 저희 얼른 가요...”조급해 난 배경윤이 이때 대담하게 제의했다.“저희 스노클링하지 말고 아예 다이빙하는 거 어때요? 6미터 가까이 되는 그런 다이빙을 하면 야맹주를 찾을 수 있는 확율이 더욱 높지 않을까요?”“좋아요.”사도현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스노클링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다이빙해야 얻고 싶은 걸 얻을 수 있죠.”“저도 좋아요. 저는 폐활량이 좋아서 물속에서 산소통이 없어도 몇 분씩이나 있을 수 있다고요.”하늘도 찬성의 의미도 손을 들었다.올림픽 금메달 수영선수로서 물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다.오직 진찬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찬영 씨는 스노클링하실 거예요? 아니면 다이빙하실 거예요?”최빈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진찬영에게 물었다.“저는 경윤 씨랑 같은 걸 할게요.”진찬영의 표정이 안 좋았던 것은 전에 중이염 수술을 받은 적 있어 수압을 견디지 못해 너무 깊게는 내려가지 못했다. 5미터
배경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거렸다.“급할 필요 없어요. 아직 시간은 많아요. 어제저녁 하늘 씨를 선택한 것은 저랑 사도현 씨의 모순을 와해시키려고 그랬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오늘 저녁은 경윤 씨 마음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진찬영은 배경윤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계속 지금처럼 애매모호하지 말았으면 했다.이런 명분 없는 사이가 싫기도 했고, 사도현의 맹렬한 공격하에 배경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그래서 하루빨리 결정짓고 싶었다.“알았어요.”배경윤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저녁은 제 마음에 따라 더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오늘 아침 진찬영과 함께 잠깐 아침햇살을 만끽하면서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한 생활이 아니라 평온한 생활을 기대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함께 하산할 때, 사도현도 마침 기상했다.사도현은 지금까지 스코어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경윤과 방을 바꾸기로 하고 짐을 배경윤의 바다뷰 별장으로 옮기기로 했다.복식 별장에는 방이 네 개나 있었고,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배경윤이 상냥하게 대해준다면 기꺼이 방을 하나 내어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 모습만 상상해도 기분이 좋았다.입이 귀에 걸려있을 때, 배경윤과 진찬영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웃으면서 걸어오는 것이다.“어디 갔었어요?”사도현의 안색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어딜 갔든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냉랭하게 말했다.“그러다 저를 놓칠 수도 있어요. 지금 경윤 씨한테 방을 하나 내어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죠...”사도현이 턱을 만지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할수 있는 가장 진지한 말이었다.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유치하긴.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서 지내든 상관없어요. 도현 씨한테는 천장에 별이 가득 붙어있는 저 방이 어울릴 것 같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