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바람, 네가 왜 여기에 있어?”두 사람은 지난번 만남을 끝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이 상황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바람은 여느 때처럼 편한 옷차림을 하고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환한 미소로 차설아와 인사를 나누었다.“스파크, 오랜만이야!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널 지켜보고 있었어.”바람의 말에 차설아는 소름이 돋았고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야, 넌 나이도 가득 먹고도 애처럼 굴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날 짝사랑하는 스토커인 줄 알겠어.”그러자 차성철이 차설아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설아야, 이분에게 예의를 갖춰. 선우 시원 씨는 우리 그룹에 힘을 실어준 중요한 합작 상대야. 그리고 선우 가문은 방대한 세력을 갖추고 있기에 유일하게 성씨 가문과 대적할 수 있는 가문이라고! 성씨 가문을 짓밟으려면 선우 가문의 도움을 받아야 하거든.”차성철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번에 시원 씨 덕분에 이 구역을 주민 구역으로 남겨둘 수 있었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은 진작에 오수처리 공장이 되었을 거야. 이것만으로도 시원 씨한테 백번 고맙다고 인사해야 해.”차설아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오빠는 아직도 순진하다니까! 이 구역이 오수처리 공장으로 된 건 저놈이 한 짓이라서 그 결정을 철회하기만 하면 되는데 뭘 또 우리가 신세 진 것처럼 구는지 모르겠어.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차설아는 바람이 어떤 가문의 사람이든 관심 없었다. 애초에 바람은 글로벌 해커 리그에서 연속 4년 동안 차설아한테 졌기에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성철 형, 사실 저랑 스파크는 꽤 가까운 사이었어요.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주는 동료일 뿐만 아니라 저랑 결혼할 뻔한 약혼녀였다니까요? 선우 가문에서는 제가 스파크랑 결혼해서 가문을 빛내주길 바랄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오빠, 선우 가문 호락호락하지 않아. 바람은 완전 여우라서 선우 가문과 합작하면 본전도 못 찾고 내팽개쳐진다니까?”“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차성철은 선우 시원의 눈치를 살피면서 진심으로 말했다.“설아야, 네가 모르나 본데 이번 합작 건에서 선우 가문이 80퍼센트를 투자했지만 고작 20퍼센트 이윤만 가진다고 했어. 나머지 80퍼센트 이윤은 다 우리가 가지는 거라고! 선우 가문처럼 열정적이고 관대한 가문한테 내팽개쳐지면 뭐 어때. 선우 가문에서 투자금을 선뜻 내줬는데 뭐가 문제야?”“그게...”차설아는 기가 죽었고 말문이 막혀서 바람한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넌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바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하지, 너랑 결혼하기 위해서 선우 가문이 고군분투하고 있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차성철과 성대 그룹의 합작을 추진하려 할 때마다 더 큰 시련이 가로 막아서 번번이 실패했고 이번에는 가문의 재산을 바치겠다는 선우 가문이 나타나서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합작은 수포로 돌아갔다.차설아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그래, 우리 가문과 선우 가문의 합작도 괜찮은 제안이긴 해. 하지만 오빠는 성도윤과의 원한을 풀고 화해했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아, 합작하지 않더라도 서로 피를 볼 정도로 싸우지 마.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의 유언이니까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절대로 서로 적이 될 수 없어!”차성철도 완강하게 대처했다.“만약 엄마 아빠가 성도윤이 나한테 한 짓을 알게 되면 그 유언은 없던 거로 하자고 하실걸? 우리 할아버지는 대장군이신데 어떻게 자손이 남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두고만 보겠어. 내 얼굴 반쪽을 망가뜨린 건 차씨 가문의 체면을 구긴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러고도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것 같아?”이때 곁에 있던 바람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말했다.“형의 말씀에 동의해요. 차씨 가문과 선우 가문은 모두 군인 출
“방금 한 말 진심이야?”차설아는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차성철이 이렇게 쉽게 인연을 끊자고 말할 줄 몰랐다. 고작 복수 때문에 버림받은 차설아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차성철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것들을 생각하면 화나기보다 속상한 마음이 컸다.“오빠가 복수에 눈이 멀어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아. 이 말은 못 들은 거로 할 테니까 우리 며칠 동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두 가문을 위한 최고의 대안이 나올 거야.”차설아는 말을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스파크...”바람은 차설아의 씁쓸한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인상을 찌푸렸고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쫓아갔다. 차설아는 별장 앞마당의 커다란 아카시아나무에 달린 그네를 타고 있었다.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갔고 아카시아 꽃잎이 하나둘 떨어져 차설아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조금 전 입가에 맴돌던 말은 그대로 삼켜버렸다.차설아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넝쿨 의자에 앉아 바둑을 두었고 엄마는 장미꽃과 작약을 꺾어 도자기 꽃병에 예쁘게 꽂았다. 가족의 일원인 강아지 귀염둥이는 엄마 곁에서 맴돌았고 집안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차설아는 그네의 줄에 기대 눈시울을 붉혔고 울먹이면서 말했다.“엄마, 아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는지도 몰라. 난 그저 모두가 만족할 만한 대안을 찾아서 화해하고 싶었는데 오빠의 입장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 사람 편만 든 것...”“그래, 넌 그 사람 편만 들더라!”갑자기 바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설아의 뒤에서 한참을 지켜보던 바람은 차설아를 혼자 내버려두려고 했지만 혼잣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차설아가 계속 자책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차설아의 미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라도 기분이 나아지고 외로움이 줄어든다면 그걸로 만족했다.“스토커 바람, 왜 내 말을 엿듣는 거야?”
두 사람은 원수처럼 서로를 흉보았고 얼마 후 차설아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바람, 사실 네가 가만히 있을 때는 봐줄 만해.”차설아는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바람을 쳐다보면서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마워.”바람도 차설아의 말을 따라 했다.“넌 말을 예쁘게 할 때가 제일 예뻐.”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예전처럼 환하게 웃었다.“바람, 넌 내가 정말 그 사람 편을 든다고 생각해?”차설아는 경계심을 거두었고 제3자 바람의 입장에서 분석해 주길 바랐다.“솔직하게 말해도 돼?”바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괜찮으니까 솔직하게 알려줘. 내 눈치 볼 필요 없어.”“나는 네가 성철 형보다 성도윤의 편을 든다고 생각해.”바람은 갑자기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투덜거렸다.“흥, 네 전남편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를 더 끔찍이 아끼더라고.”“아, 아니거든! 난 오빠가 복수의 틀에 갇혀서 고통스러워하니까 그러는 거야. 그리고 성씨 가문도 우리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길 텐데 자꾸 건드리고 싸우려고 하니까 되레 당하는 거지.”“넌 성철 형이 되어보지 않았고 형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면서 왜 네 마음대로 화해하라고 강요하는 거야?”바람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진지하게 말했다.“만약 내가 열심히 해온 사업이 망하고 얼굴까지 괴물처럼 변했으면 절대 화해 안 해. 우리 선우 가문은 복수에 진심이거든. 그래서 쿨하게 웃으면서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대대로 친하게 지냈어. 난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가 두 가문이 싸우지 않기를 바란다고 생각해.”“그건 핑계일 뿐이야.”바람이 정곡을 찔렀다.“만약 성씨 가문과 차씨 가문 사이가 대대로 좋았다면 차씨 가문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성씨 가문에서 왜 가만히 있었겠어! 차씨 가문이 몰락 직전까지 가자 성씨 가문이 곧바로 해안시 8대 가문 중 하나로 떠올랐잖아. 난 아무리 봐도 두 가문 사이가 좋은 줄 모르겠어.”“그때는
바람은 두 눈을 감은 채 차설아와 입을 맞추려 했고 차설아는 처음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시도해 보기로 했다.인체가 한차례의 세포 신진대사를 완성하기까지 7년이 걸린다고 한다. 7년이 지난 뒤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차설아는 10여 년 동안 성도윤을 사랑했지만 감정에 변화가 생겨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매일 늙어가는 육체보다도 더 빨리 식어버리는 건 인간의 감정이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가볍게 부딪혔고 더 깊은 스킨십을 하려던 찰나,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 안돼!”차설아는 꿈에서 깨어난 듯 바람을 밀어냈고 손으로 머리를 내리치면서 후회했다.“내가 미쳤지, 정말 미쳤어!”바람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설아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뭐가 걱정되어서 그러는데?”“이런 걸 바란 게 아니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남녀가 사랑해서 함께 하는 거지, 서로 조건이 비슷하거나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아무 남자랑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두 사람한테 모두 불공평한 일이야.”“내가 아무 남자야?”“사랑하지 않으면 상대가 누구든 아무 남자인 거지. 우리는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나열해 보면서 행복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우리 사이에 사랑 같은 건 없잖아. 함께하려면 꼭 필요한 사랑이 빠진다면 기초가 흔들리는 건물처럼 얼마 못 가서 무너질 거야.”차설아는 솔직한 생각을 바람한테 알려주었다. 바람은 차설아와 결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고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차설아는 바람이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는 맛있는 음식 중에서 배변물을 찾아 먹는다고 하는데, 어쩌면 차설아가 애타게 찾는 그것이 바로 성도윤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냄새나는 것을 멀리하라고 경고하지만 차설아는 성도윤이 아니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차설아의 말을 들은 바람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너의 억측에 불과해. 넌 나랑 시작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사랑
선우 가문에서는 보물로 인한 차씨 가문의 손해를 메꿔주었고 6조를 선물로 전달했다. 거금을 받은 차성철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바람과 함께 다니면서 여러 협력 건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차성철은 바람에게 깍듯이 대했지만 차설아와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매는 예전처럼 대화하지도 않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지냈다. 두 사람은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식사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만 열면 비난하는 말뿐이어서 바람과 배경윤은 그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오빠, 좁쌀은 적게 먹어, 그러다가 속 좁은 인간이 되면 어떡해?”차설아는 차성철 앞에 놓인 죽 그릇을 다른 쪽에 가져다 놓았고 누가 들어도 차성철이 속 좁다는 뜻이었다. 차성철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더니 차설아한테 콩나물 볶음을 집어주면서 차갑게 웃었다.“설아야,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먹어야지. 아니면 돼지 취급당할 수도 있어.”“고마워, 오빠. 닭발 무침도 먹어봐, 닭발이 오빠 대신 돈을 세어줄 수도 있잖아.”“그래, 이 물고기 눈을 먹으면 남자 보는 눈이 높아진대.”저녁 식사 내내 남매는 서로에게 반찬을 집어주면서 비꼬았고 그 사이에서 한숨만 내쉬던 바람과 배경윤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다시 밥을 먹었다.“나 먼저 일어날게.”차설아는 차성한의 말에 기가 차서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은 뒤 자리를 떠났다. 차설아는 차성철과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어젯밤에 차성철이 먼저 인연을 끊자는 말에 화가 단단히 났던 것이다.“저도 다 먹었어요. 설아야, 같이 가!”배경윤은 재빨리 차설아를 뒤따라갔다. 차설아는 걷다가 부둣가 앞에서 멈춰 섰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배를 쳐다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설아야, 성철 오빠랑 무슨 일 있었어? 두 사람 요즘 따라 분위기 이상하단 말이야. 서로 비난하려고 안달 난 사람 같아.”뒤따라온 배경윤이 차설아 곁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매가 싸우는 일은 흔하지만 서로를 사랑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
“말해봐.”차설아는 차성철한테 화가 잔뜩 났지만 도와줄 방법이 있다는 말에 두 눈이 반짝였고 진지하게 말했다.“성철 오빠가 말하는 원한은 성씨 가문과 차씨 가문 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 것 같아. 난 오히려 가면 아래 숨겨진 반쪽 얼굴 때문에 그렇다고 봐. 오빠의 잘생긴 얼굴이 하루아침에 칼에 베여서 흉터가 남았잖아. 오빠는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하니까 거울을 볼 때마다 원한이 깊어지는 거야.”배경윤도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고 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런 것 같기도 해.”“약도 증상에 맞게 처방하는 것처럼 오빠 마음의 응어리를 파악해서 방법을 생각하는 거야. 오빠의 얼굴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원한이 풀릴 수 있어.”“그건 그렇지만 상처가 깊은 만큼 흉터가 짙어서 쉽게 회복할 수 있을까?”“일반 성형외과에서는 못하겠지만 연예인 전문 성형외과에서는 할 수 있을 거야. 마법이라도 쓰는지 어두운 피부를 뽀얀 피부로 바꿔주고 일반인도 김태희처럼 만들어 주잖아. 그런데 회복 수술이라고 못 하겠어?”배경윤은 여러 연예인한테 푹 빠지면서 연예인이 데뷔하기 전과 후의 차이가 엄청 크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성형외과 원장님한테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나도 성형수술이 많이 발전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난 성형외과 의사 중에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괜히 수술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을까 봐 걱정돼.”차설아는 차성철을 위해 일반 성형외과의 회복 수술을 권유하고 싶었지만 차성철은 완강하게 거부했고 이름난 성형외과에서 하려면 예약이 가득 차서 5년 기다려야 했다.“우리 둘은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 업계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차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배경윤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윈스 엔터테인먼트 본부로 향했다. 본부 건물을 등지고 선 배경윤이 팔짱을 낀 채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야, 잘 다녀와. 난
몇 년 동안 버텼지만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설의 상업 가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사회에서는 사도현한테 밉보일 위험도 감수하고 의견을 모았고 윤설 대신 소속 연예인 중에서 새로운 스타를 배출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사회에서 윤설을 건드리면 윤설을 아꼈던 사도현이 분노할 줄 알았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지지하는 입장이었다.“저도 윤설에 대한 자원에 비해 이익이 적다고 생각해요. 윤설은 더 이상 회사의 전면적인 케어를 받을 가치가 없어 보이네요.”회의실 중간에 앉은 사도현은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했다.“이럴 수가! 사도현 대표님이 새로운 스타를 배출하는 걸 동의했다고? 마, 말도 안 돼!”마케팅팀을 전적으로 담당한 오진혁 이사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사도현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제가 제대로 말하지 못한 건지, 오 이사의 이해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회사에서 인사이동은 흔한 일인데 뭐가 그렇게 놀랍다는 거죠?”사도현은 손을 턱에 받친 채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오진혁은 사도현의 분위기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아, 아니에요!”오진혁은 깜짝 놀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상치 못한 말씀에 놀라서 다시 확인한 것뿐이에요. 대표님께서 윤설 씨한테 모든 것을 퍼붓던 모습이 생생하거든요.”“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오늘부로 모든 것이 바뀔 거예요. 앞으로 회사 소속 연예인을 동일하게 대하고 연습생 기간과 상관없이, 수익이 얼마든지 상관없이 똑같은 대우를 해야 해요. 이 원칙을 어기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당장 회사에서 내보낼 거고요.”사도현이 정식으로 발표한 뒤,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 사도현한테 귓속말로 급한 일을 전했다. 이사회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중요한 일은 뒤로 미뤄야 했지만 비서가 배경윤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사도현의 눈에서 빛이 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자,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마쳐요. 더 상의할 것이 있으면 내일 계속하면 되니까 저는 이만 퇴근할게요.”사도현은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