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 가문에서는 보물로 인한 차씨 가문의 손해를 메꿔주었고 6조를 선물로 전달했다. 거금을 받은 차성철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바람과 함께 다니면서 여러 협력 건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차성철은 바람에게 깍듯이 대했지만 차설아와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매는 예전처럼 대화하지도 않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지냈다. 두 사람은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식사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만 열면 비난하는 말뿐이어서 바람과 배경윤은 그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오빠, 좁쌀은 적게 먹어, 그러다가 속 좁은 인간이 되면 어떡해?”차설아는 차성철 앞에 놓인 죽 그릇을 다른 쪽에 가져다 놓았고 누가 들어도 차성철이 속 좁다는 뜻이었다. 차성철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더니 차설아한테 콩나물 볶음을 집어주면서 차갑게 웃었다.“설아야,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먹어야지. 아니면 돼지 취급당할 수도 있어.”“고마워, 오빠. 닭발 무침도 먹어봐, 닭발이 오빠 대신 돈을 세어줄 수도 있잖아.”“그래, 이 물고기 눈을 먹으면 남자 보는 눈이 높아진대.”저녁 식사 내내 남매는 서로에게 반찬을 집어주면서 비꼬았고 그 사이에서 한숨만 내쉬던 바람과 배경윤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다시 밥을 먹었다.“나 먼저 일어날게.”차설아는 차성한의 말에 기가 차서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은 뒤 자리를 떠났다. 차설아는 차성철과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어젯밤에 차성철이 먼저 인연을 끊자는 말에 화가 단단히 났던 것이다.“저도 다 먹었어요. 설아야, 같이 가!”배경윤은 재빨리 차설아를 뒤따라갔다. 차설아는 걷다가 부둣가 앞에서 멈춰 섰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배를 쳐다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설아야, 성철 오빠랑 무슨 일 있었어? 두 사람 요즘 따라 분위기 이상하단 말이야. 서로 비난하려고 안달 난 사람 같아.”뒤따라온 배경윤이 차설아 곁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매가 싸우는 일은 흔하지만 서로를 사랑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
“말해봐.”차설아는 차성철한테 화가 잔뜩 났지만 도와줄 방법이 있다는 말에 두 눈이 반짝였고 진지하게 말했다.“성철 오빠가 말하는 원한은 성씨 가문과 차씨 가문 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 것 같아. 난 오히려 가면 아래 숨겨진 반쪽 얼굴 때문에 그렇다고 봐. 오빠의 잘생긴 얼굴이 하루아침에 칼에 베여서 흉터가 남았잖아. 오빠는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하니까 거울을 볼 때마다 원한이 깊어지는 거야.”배경윤도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고 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런 것 같기도 해.”“약도 증상에 맞게 처방하는 것처럼 오빠 마음의 응어리를 파악해서 방법을 생각하는 거야. 오빠의 얼굴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원한이 풀릴 수 있어.”“그건 그렇지만 상처가 깊은 만큼 흉터가 짙어서 쉽게 회복할 수 있을까?”“일반 성형외과에서는 못하겠지만 연예인 전문 성형외과에서는 할 수 있을 거야. 마법이라도 쓰는지 어두운 피부를 뽀얀 피부로 바꿔주고 일반인도 김태희처럼 만들어 주잖아. 그런데 회복 수술이라고 못 하겠어?”배경윤은 여러 연예인한테 푹 빠지면서 연예인이 데뷔하기 전과 후의 차이가 엄청 크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성형외과 원장님한테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나도 성형수술이 많이 발전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난 성형외과 의사 중에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괜히 수술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을까 봐 걱정돼.”차설아는 차성철을 위해 일반 성형외과의 회복 수술을 권유하고 싶었지만 차성철은 완강하게 거부했고 이름난 성형외과에서 하려면 예약이 가득 차서 5년 기다려야 했다.“우리 둘은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 업계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차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배경윤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윈스 엔터테인먼트 본부로 향했다. 본부 건물을 등지고 선 배경윤이 팔짱을 낀 채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야, 잘 다녀와. 난
몇 년 동안 버텼지만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설의 상업 가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사회에서는 사도현한테 밉보일 위험도 감수하고 의견을 모았고 윤설 대신 소속 연예인 중에서 새로운 스타를 배출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사회에서 윤설을 건드리면 윤설을 아꼈던 사도현이 분노할 줄 알았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지지하는 입장이었다.“저도 윤설에 대한 자원에 비해 이익이 적다고 생각해요. 윤설은 더 이상 회사의 전면적인 케어를 받을 가치가 없어 보이네요.”회의실 중간에 앉은 사도현은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했다.“이럴 수가! 사도현 대표님이 새로운 스타를 배출하는 걸 동의했다고? 마, 말도 안 돼!”마케팅팀을 전적으로 담당한 오진혁 이사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사도현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제가 제대로 말하지 못한 건지, 오 이사의 이해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회사에서 인사이동은 흔한 일인데 뭐가 그렇게 놀랍다는 거죠?”사도현은 손을 턱에 받친 채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오진혁은 사도현의 분위기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아, 아니에요!”오진혁은 깜짝 놀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상치 못한 말씀에 놀라서 다시 확인한 것뿐이에요. 대표님께서 윤설 씨한테 모든 것을 퍼붓던 모습이 생생하거든요.”“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오늘부로 모든 것이 바뀔 거예요. 앞으로 회사 소속 연예인을 동일하게 대하고 연습생 기간과 상관없이, 수익이 얼마든지 상관없이 똑같은 대우를 해야 해요. 이 원칙을 어기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당장 회사에서 내보낼 거고요.”사도현이 정식으로 발표한 뒤,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 사도현한테 귓속말로 급한 일을 전했다. 이사회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중요한 일은 뒤로 미뤄야 했지만 비서가 배경윤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사도현의 눈에서 빛이 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자,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마쳐요. 더 상의할 것이 있으면 내일 계속하면 되니까 저는 이만 퇴근할게요.”사도현은
사도현은 사무실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고 창문 앞에 서 있는 배경윤을 와락 안았다.“경윤아, 회사까지 올 줄 몰랐어. 나랑 비밀 연애 그만하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만나는 사이인 걸 알릴 셈이지?”사도현은 고양이처럼 배경윤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고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일단 만나보기로 한 뒤부터 상황이 역전되었다.사귀기 전에는 배경윤이 사도현을 따라다니면서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지만 사도현은 썸만 타는 게 좋다고 정식으로 사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도현이 배경윤을 쫓아다녔고 매일 붙어있으려 했다. 일에 더 집중하고 싶었던 배경윤은 비밀 연애를 제안했고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사귀었다.“왜 나랑 만난다고 말 못 하는 거야? 넌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이잖아. 나랑 만나는 게 네가 일하는데 방해 돼?”사도현은 배경윤의 가는 허리를 안고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난 아니지만 네 전 여자 친구는 연예인이 맞잖아. 넌 연예계를 잘 모르지만 난 그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만약 지금 만난다고 공개하면 난 두 사람을 갈라놓은 나쁜 여자가 될 거고 인신 공격당할 거야. 내가 일군 사업이 이제야 상승세를 보이는데 너 때문에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기 싫어.”배경윤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현이 윤설을 제외한 다른 여자에게 신경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도현이 여자 연예인과 인플루언서의 대시를 받으면 윤설의 극성팬한테 사이버 폭력을 당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가문만 믿고 게으름 피우던 배경윤이 겨우 정신을 차려서 브랜드 마케팅을 위주로 하는 작은 미디어 회사를 설립했는데 명성이 더럽혀지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것이다.사도현이 입을 열었다.“그게 뭐 어때서? 네 사업이 망해도 내가 널 먹여 살릴 수 있잖아. 혹은 네가 윈스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면 내가 널 톱스타로 만들어 줄게. 네가 더 강해지면 사이버 폭력 따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날 두 번째 윤설로 만들려고?”배경윤이 차갑게
차설아는 얼굴을 가린 채 사무실을 나갔고 사도현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형수님이 오셨구나... 미리 얘기를 하면 이러지 않았을 거 아니야.”“도현아, 설아가 남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래?”배경윤은 문을 열고 차설아를 끌어당겼고 사도현한테 말했다.“성철 오빠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알지? 설아랑 같이 온 것도 그것 때문이야. 실력 있는 성형외과 의사한테 오빠 얼굴 회복 수술을 부탁하고 싶어.”“그런 의사라면 내가 많이 알고 있지만 차성철이 수술하고 싶어 하는 거 맞아?”사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 차성철한테 여러 연예인을 성형해 준 유명한 의사를 소개해 주었는데 거절하면서 나한테 욕하더라고... 그 뒤로는 연락한 적 없어.”“아, 도현 씨가 성철 오빠한테 소개해 준다고 한 뒤로 아무 소식이 없길래 난 성도윤이랑 성철 오빠 사이가 좋지 않아서 없던 일로 하는 줄 알았죠. 성철 오빠가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차설아의 말에 배경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성철 오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잖아, 거절한 이유가 있겠지.”차설아는 머뭇거리다가 주먹을 꽉 쥐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괜찮으니 그 의사 선생님 좀 소개해 줘요. 오빠한테는 제가 잘 말해볼게요.”“그래, 내가 그 병원에 얘기해 둘 테니까 차성철이 하고 싶다고 할 때 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면 돼.”사도현은 서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차설아한테 건넸다.“고마워요!”차설아는 명함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배경윤도 같이 가려고 했지만 사도현한테 붙잡혀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소파에 기댄 배경윤은 사도현의 손가락을 매만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성도윤이랑 설아 말이야,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을까?”“글쎄...”사도현은 두 사람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차성철과 도윤 형의 원한이 깊었고 여러 충격으로 인해 차설아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배경윤과 사도현은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빌미로 또 싸웠다.“지금부터 너랑 선 그을려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연락하지 말자. 난 이만 가볼게.”배경윤은 사도현의 품에서 벗어나 단호하게 말했고 사도현은 차갑게 대답했다.“할 생각도 없었어.”사도현은 배경윤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겨서 차갑게 말했다.“이런 것 때문에 나랑 연락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모순이 생기든지 날 버릴 거란 뜻이잖아. 그럼 너랑 계속 만나야 할지 나도 다시 생각해 볼게.”배경윤은 그 자리에 굳었고 입술을 깨문 채 사도현을 쳐다보았다.“나랑 헤어지자는 뜻이야? 이깟 일로 지금 헤어지자고?”“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우리 시간을 갖고 계속 만날지 생각해 보자는 말이야.”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 사도현처럼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는 겉보기에 여유롭고 가는 사람 안 막을 것 같지만 사실 진심으로 한 여자를 사랑할 때는 바보처럼 굴었다. 그 여자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진실한 감정을 드러낼 줄 알게 되었고 기쁜 감정, 슬픈 감정이 몇 배로 커지면서 웃다가 우는 일도 아주 흔했다. 그리고 일부러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면서 장난칠 때도 많았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자신의 진심이 짓밟히고 버려질까 봐 두렵고 상처받기 싫어서 모진 말을 했던 것이다.“그래, 네 뜻대로 할 테니까 후회하지 마.”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문을 열고 나왔고 슬프고 속상한 감정에 영향받지 않으려고 했다.‘사랑 때문에 이러는 것도 병이야, 병! 배씨 가문에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만 있으니 나 배경윤부터 이 나쁜 습관을 고치는 거야. 하, 그깟 남자 때문에 내가 왜 화를 내야 해? 이놈도 안 되면 다른 놈으로 갈아타면 돼!’배경윤이 문을 열고 나간 뒤, 아직 화가 난 사도현은 뛰어나가서 붙잡을 생각조차 없었다. 지난 연애에서 어느 한 번 먼저 고개를 숙인 적이 없는 사도현은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달라붙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간 배경윤은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나쁜
우아한 하얀색 정장을 입은 윤설은 진한 화장을 했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톱스타의 느낌이 물씬 났다. 윤설은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더니 배경윤한테 눈웃음을 지으며 먼저 인사했다. 하지만 배경윤은 미소로 화답할 생각이 없었다.“윈스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마주칠 일이 없죠. 그리고 같은 남자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 어쩌다 한 번 마주칠 수도 있는 거고요. 우리 친하지 않으니 다음부터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마세요.”배경윤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나약한 척, 불쌍한 척, 착한 척하는 여자를 제일 싫어했다. 더군다나 윤설은 사도현이 오랫동안 아끼고 보살펴준 여자였다. 그런 윤설이 눈에 거슬렸고 질투 난 배경윤이 윤설한테 친절할 리가 없었다.“저기요, 말 가려서 하세요.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설 씨가 인사해 준 걸 영광으로 아셔야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윤설 씨 팬들한테 공격당할걸요?”윤설의 매니저가 씩씩대면서 말했다. 윤설은 인기가 많았기에 어디를 가든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기고만장해졌으니 쌀쌀맞게 말하는 배경윤이 거슬렸을 것이다. 아무리 배씨 가문 아가씨라도 윤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윤설은 극성팬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암암리에 소문을 내면 소문 상대를 물고 뜯어서 매니저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다.“어머, 정말 무섭네요. 연예계에서 윤설 씨 팬들은 팬덤 중에서 제일 악질이라던데요?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욕해서 정말 마음에 안 들었는데, 멀리하려고 하니까 또 이렇게 마주치네요. 그럼 또 욕해보시던가요.”배경윤은 자신을 건드린 사람에게 몇 배로 갚아주는 성격이라 반격하기 시작했다.“내 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요. 애초에 청순한 이미지로 뜬 내 친구를 따라 해서 인지도를 쌓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돈을 빨아먹으면서 극성팬을 제외하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정말... 내가 만약 이 회사 대표였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예요. 돈은 돈대로 쓰면서 수익이라고는 쥐꼬리만큼 벌었으니, 차라
윤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배경윤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도현 씨, 왔어요? 난 배경윤 씨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저 인사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저한테 욕해서... 하지만 저는 연예인이기 전에 한낱 사람이니까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배경윤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고 차갑게 말했다.“그럼요,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고 사연 많은 윤설 씨. 위대한 톱스타 윤설 씨한테 무례하게 굴고 모욕한 저는 정말 나쁘고 미친년이에요. 이러면 기분 좋아요?”“배경윤 씨, 저는 그런 뜻이 아닌데 왜 이러세요...”윤설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내가 누구한테 먼저 시비 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도현 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요.”사도현이 윤설을 흘겨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드라마 촬영 때 그렇게 연기했더라면 진작에 돈을 벌었을 텐데...”“도현 씨!”윤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늘 윤설을 예뻐해 주었던 사도현이 다른 여자를 위해서 윤설을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수치심을 느꼈던 것이다.“풉!”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참지 못하고 배를 끌어안은 채 웃었다.‘회사 대표도 멍청한 여자한테 투자했다는 걸 알긴 아는구나.’사도현은 배경윤이 웃는 모습을 보자 마음에 걸렸던 돌이 내려가는 것만 같았고 곧바로 윤설을 향해 말했다.“마침 잘 왔어, 너랑 할 얘기가 있었거든.”윤설은 두 눈이 반짝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현 씨, 나도 도현 씨한테 할 얘기가 있었어요. 같이 사무실로 갈까요?”윤설은 사도현의 마음이 진작에 변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만회하려고 무진장 애썼었다. 하지만 냉철하고 똑똑한 사도현한테 그런 유치한 수법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도현은 윤설만 보면 구역질이 나서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단둘이 얘기하자고 하니 윤설은 다시 마음을 얻을 기회라고 생각했다.“따라와.”사도현은 배경윤을 힐끗 쳐다보고는 윤설을 향해 말했고 뒤돌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