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얼굴을 가린 채 사무실을 나갔고 사도현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형수님이 오셨구나... 미리 얘기를 하면 이러지 않았을 거 아니야.”“도현아, 설아가 남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래?”배경윤은 문을 열고 차설아를 끌어당겼고 사도현한테 말했다.“성철 오빠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알지? 설아랑 같이 온 것도 그것 때문이야. 실력 있는 성형외과 의사한테 오빠 얼굴 회복 수술을 부탁하고 싶어.”“그런 의사라면 내가 많이 알고 있지만 차성철이 수술하고 싶어 하는 거 맞아?”사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 차성철한테 여러 연예인을 성형해 준 유명한 의사를 소개해 주었는데 거절하면서 나한테 욕하더라고... 그 뒤로는 연락한 적 없어.”“아, 도현 씨가 성철 오빠한테 소개해 준다고 한 뒤로 아무 소식이 없길래 난 성도윤이랑 성철 오빠 사이가 좋지 않아서 없던 일로 하는 줄 알았죠. 성철 오빠가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차설아의 말에 배경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성철 오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잖아, 거절한 이유가 있겠지.”차설아는 머뭇거리다가 주먹을 꽉 쥐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괜찮으니 그 의사 선생님 좀 소개해 줘요. 오빠한테는 제가 잘 말해볼게요.”“그래, 내가 그 병원에 얘기해 둘 테니까 차성철이 하고 싶다고 할 때 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면 돼.”사도현은 서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차설아한테 건넸다.“고마워요!”차설아는 명함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배경윤도 같이 가려고 했지만 사도현한테 붙잡혀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소파에 기댄 배경윤은 사도현의 손가락을 매만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성도윤이랑 설아 말이야,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을까?”“글쎄...”사도현은 두 사람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차성철과 도윤 형의 원한이 깊었고 여러 충격으로 인해 차설아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배경윤과 사도현은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빌미로 또 싸웠다.“지금부터 너랑 선 그을려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연락하지 말자. 난 이만 가볼게.”배경윤은 사도현의 품에서 벗어나 단호하게 말했고 사도현은 차갑게 대답했다.“할 생각도 없었어.”사도현은 배경윤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겨서 차갑게 말했다.“이런 것 때문에 나랑 연락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모순이 생기든지 날 버릴 거란 뜻이잖아. 그럼 너랑 계속 만나야 할지 나도 다시 생각해 볼게.”배경윤은 그 자리에 굳었고 입술을 깨문 채 사도현을 쳐다보았다.“나랑 헤어지자는 뜻이야? 이깟 일로 지금 헤어지자고?”“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우리 시간을 갖고 계속 만날지 생각해 보자는 말이야.”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 사도현처럼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는 겉보기에 여유롭고 가는 사람 안 막을 것 같지만 사실 진심으로 한 여자를 사랑할 때는 바보처럼 굴었다. 그 여자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진실한 감정을 드러낼 줄 알게 되었고 기쁜 감정, 슬픈 감정이 몇 배로 커지면서 웃다가 우는 일도 아주 흔했다. 그리고 일부러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면서 장난칠 때도 많았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자신의 진심이 짓밟히고 버려질까 봐 두렵고 상처받기 싫어서 모진 말을 했던 것이다.“그래, 네 뜻대로 할 테니까 후회하지 마.”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문을 열고 나왔고 슬프고 속상한 감정에 영향받지 않으려고 했다.‘사랑 때문에 이러는 것도 병이야, 병! 배씨 가문에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만 있으니 나 배경윤부터 이 나쁜 습관을 고치는 거야. 하, 그깟 남자 때문에 내가 왜 화를 내야 해? 이놈도 안 되면 다른 놈으로 갈아타면 돼!’배경윤이 문을 열고 나간 뒤, 아직 화가 난 사도현은 뛰어나가서 붙잡을 생각조차 없었다. 지난 연애에서 어느 한 번 먼저 고개를 숙인 적이 없는 사도현은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달라붙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간 배경윤은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나쁜
우아한 하얀색 정장을 입은 윤설은 진한 화장을 했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톱스타의 느낌이 물씬 났다. 윤설은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더니 배경윤한테 눈웃음을 지으며 먼저 인사했다. 하지만 배경윤은 미소로 화답할 생각이 없었다.“윈스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마주칠 일이 없죠. 그리고 같은 남자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 어쩌다 한 번 마주칠 수도 있는 거고요. 우리 친하지 않으니 다음부터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마세요.”배경윤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나약한 척, 불쌍한 척, 착한 척하는 여자를 제일 싫어했다. 더군다나 윤설은 사도현이 오랫동안 아끼고 보살펴준 여자였다. 그런 윤설이 눈에 거슬렸고 질투 난 배경윤이 윤설한테 친절할 리가 없었다.“저기요, 말 가려서 하세요.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설 씨가 인사해 준 걸 영광으로 아셔야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윤설 씨 팬들한테 공격당할걸요?”윤설의 매니저가 씩씩대면서 말했다. 윤설은 인기가 많았기에 어디를 가든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기고만장해졌으니 쌀쌀맞게 말하는 배경윤이 거슬렸을 것이다. 아무리 배씨 가문 아가씨라도 윤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윤설은 극성팬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암암리에 소문을 내면 소문 상대를 물고 뜯어서 매니저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다.“어머, 정말 무섭네요. 연예계에서 윤설 씨 팬들은 팬덤 중에서 제일 악질이라던데요?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욕해서 정말 마음에 안 들었는데, 멀리하려고 하니까 또 이렇게 마주치네요. 그럼 또 욕해보시던가요.”배경윤은 자신을 건드린 사람에게 몇 배로 갚아주는 성격이라 반격하기 시작했다.“내 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요. 애초에 청순한 이미지로 뜬 내 친구를 따라 해서 인지도를 쌓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돈을 빨아먹으면서 극성팬을 제외하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정말... 내가 만약 이 회사 대표였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예요. 돈은 돈대로 쓰면서 수익이라고는 쥐꼬리만큼 벌었으니, 차라
윤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배경윤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도현 씨, 왔어요? 난 배경윤 씨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저 인사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저한테 욕해서... 하지만 저는 연예인이기 전에 한낱 사람이니까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배경윤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고 차갑게 말했다.“그럼요,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고 사연 많은 윤설 씨. 위대한 톱스타 윤설 씨한테 무례하게 굴고 모욕한 저는 정말 나쁘고 미친년이에요. 이러면 기분 좋아요?”“배경윤 씨, 저는 그런 뜻이 아닌데 왜 이러세요...”윤설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내가 누구한테 먼저 시비 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도현 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요.”사도현이 윤설을 흘겨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드라마 촬영 때 그렇게 연기했더라면 진작에 돈을 벌었을 텐데...”“도현 씨!”윤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늘 윤설을 예뻐해 주었던 사도현이 다른 여자를 위해서 윤설을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수치심을 느꼈던 것이다.“풉!”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참지 못하고 배를 끌어안은 채 웃었다.‘회사 대표도 멍청한 여자한테 투자했다는 걸 알긴 아는구나.’사도현은 배경윤이 웃는 모습을 보자 마음에 걸렸던 돌이 내려가는 것만 같았고 곧바로 윤설을 향해 말했다.“마침 잘 왔어, 너랑 할 얘기가 있었거든.”윤설은 두 눈이 반짝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현 씨, 나도 도현 씨한테 할 얘기가 있었어요. 같이 사무실로 갈까요?”윤설은 사도현의 마음이 진작에 변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만회하려고 무진장 애썼었다. 하지만 냉철하고 똑똑한 사도현한테 그런 유치한 수법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도현은 윤설만 보면 구역질이 나서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단둘이 얘기하자고 하니 윤설은 다시 마음을 얻을 기회라고 생각했다.“따라와.”사도현은 배경윤을 힐끗 쳐다보고는 윤설을 향해 말했고 뒤돌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 사도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차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이때 매니저가 눈치 있게 대답했다.“아, 아니에요. 대표님과 윤설 씨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전달하실 사항이 있으면 조금 있다가 윤설 씨한테서 들으면 되니깐요.”매니저는 윤설이 사도현과 다시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회사 대표 사도현이 윤설을 계속 밀어주지 않는다면 얼마 가지 못하고 연예인으로서의 가치를 잃기에 사람들한테 잊힐 것이고 다시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들어오라면 들어와. 담당 연예인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매니저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사도현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고 인상을 찌푸렸다. 배경윤의 모진 말에 상처받아서 짜증 났는데 세 사람이 눈앞에서 수작질을 부리고 있으니 당장 발로 걷어차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그, 그럼...”두 매니저는 윤설을 힐끗 쳐다보며 지시하기를 기다렸다. 매니저는 윤설이 충견처럼 부려 먹어서 행동하기 전에 윤설이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조금 전에 배경윤과 말싸움이 일어난 것도 윤설이 암묵적으로 허락했기에 매니저가 나섰던 것이다. “도현 씨 말대로 해요. 회사에서 새로운 제안을 하려는 것 같으니까 함께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윤설이 매니저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자 두 매니저는 재빨리 대표 사무실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사도현은 손으로 턱을 괴고 편하게 앉아 있었지만, 대표로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사도현 앞에만 서면 숨기는 것 없이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다 모였으니 본론만 얘기할게. 요즘 인기가 많은 컨셉은 걸크러시지만 윤설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아. 이사회에서 윤설에게 지원하던 것의 일부분을 철회하라는 의견을 제출했고 윤설은 곧 A 국에 가서 연기를 배우게 될 거야. 앞으로는 스케줄 없이 출국할 준비만 하면 돼.”사도현은 회사의 입장을 간략하게 말했고 윤설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뭐, 뭐라고요?”매니저는 적잖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냐고?”사도현은 피식 웃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윤설을 노려보았다.“네가 한 짓들을 생각해 봐, 당장 네 목을 베어도 시원치 않은데 감히 뭘 더 욕심내는 거지?”윤설은 눈시울을 붉히고는 사도현의 팔을 붙잡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난 도현 씨가 그 일 때문에 나랑 멀어진 줄 알았는데, 사실 아직 나를 사랑하는 거죠? 그렇다면 나한테 기회를 줘요, 우리 다시 시작하자고요.”“그럴 일 없으니까 가식 떨지 마.”사도현은 윤설의 손을 내치고는 차갑게 말했다.“예전에는 정말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고 너랑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네가 한 짓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난 욕심 많은 여자라면 끔찍해서 치를 떠는 사람이야. 널 죽이고 싶을 만큼 싫지만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떠난다면 좋은 기억만 가져갈 수 있게 해주지.”윤설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만 도현 씨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도현 씨 아버지랑...”“닥쳐!”사도현은 윤설의 말을 끊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내 앞에서 그 사람 얘기 꺼내지 마! 두 사람 진짜 역겹고 더러워.”“도현 씨,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날 아껴주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도현 씨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그러니 저를 외국으로 보내지 말고 조연이라도, 예능이라도 다시 출연하게 해주세요. 처음부터 다시...”“넌 처음부터 끝까지 네 생각만 하는구나. 난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아.”사도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윈스 엔터테인먼트는 자선 사업 같은 건 하지 않아. 손해 볼 장사도 하지 않으니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줘. 되돌릴 수 없고 넌 꼭 떠나야만 해.”“그래요, 당신의 결정 때문에 내가 어떻게 변할지 두고 봐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부 당신 탓일 거예요.”윤설은 연약한 척, 불쌍한 척해도 사도현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자 사도현보다 더 많은 권력을
윤설은 매니저와 함께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배경윤이 문을 열고 굴러들어 왔다.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굳었고 정적이 흘렀다.“아, 망했어.”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했고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아,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배경윤은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려고 먼저 입을 열었다. 수치스럽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당장이라도 다른 도시로 이사 가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본 윤설은 거만하게 배경윤을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 배경윤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리가 하는 말 엿듣고 있었나 보죠?”“그럴 리가요! 제가 엿들을 게 뭐 있다고요. 저는 절대로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지나가다가 하필 이 앞에서 발이 미끄러졌어요.”배경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대답했다.“저는 배경윤 씨가 재벌가 아가씨라서 암묵적인 원칙 같은 건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한 사람의 소양과 출신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남의 말을 엿듣는 무식한 짓은 한 적이 없거든요.”윤설은 이미 사도현 앞에서 진실한 모습을 드러냈기에 가식을 떨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배경윤을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뭘 또 그렇게 말하세요. 저는 무식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제 말이 틀렸나요? 분명 엿들은 것 같은데, 아니라는 말에 부모님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저, 저는...”배경윤은 입을 삐죽 내민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엿듣는 것은 확실히 비도덕적인 행동이었다. 배경윤이 기세에서 밀리자 사도현이 나서서 차갑게 말했다.“엿들으면 뭐 어때? 난 경윤의 남자 친구니까 경윤은 내가 다른 여자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들을 권리가 있어. 난 경윤이가 엿듣기만 해서 좀 섭섭한걸? 보통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랑 있으면 들이닥쳐서 내 남자 친구를 건드리지 말라고 할 텐데 말이야.”“남, 남자
배경윤의 말에 화가 단단히 난 사도현이 차갑게 물었다.“날 여태껏 그렇게 생각한 거야?”“너도 날 그렇게 생각했다면서?”배경윤이 피식 웃으면서 반문했다.“난 너랑 함께하면서 나의 진심이 느껴졌을 거라고 여겼는데, 다른 사람 말 한마디에 내 진심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거야?”사도현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윤설과 다른 여자라고 여겼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뜨겁고 진실한 사랑을 아무도 흔들지 못할 거라고 여겼지만 윤설의 말에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사도현은 지금까지 느꼈던 사랑과 행복이 배경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배경윤의 말에 더 크게 실망했다.“그래, 난 적어도 윤설 씨가 나보다는 똑똑하다고 생각해. 네가 윤설 씨한테 해준 거랑 나를 대하는 걸 보면 너무 차이 나서 내가 불쌍해 보여. 하긴, 윤설 씨는 네가 애지중지 아낀 장미꽃이고 나는 너의 여러 소문 상대와 다름없는 한낱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하겠지.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솔직해지자.”배경윤은 자존심이 강했고 감정적인 면에서는 유독 까다로웠다. 사도현과 만나면서 사업에 더 집중한 것도 불안감을 제어하지 못해서였다. 사도현은 이름난 바람둥이었고 곁에 수많은 여자가 따라붙었기에 사도현의 사랑을 계속해서 받으려면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배경윤은 노력만 하면 이 관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여겼지만 자기기만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사도현은 상대가 마음에 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윤설이었고 배경윤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네가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 없어.”사도현은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그래, 난 피도 눈물도 없는 바람둥이고 너랑 만난 것도 심심하고 외로워서, 윤설 때문에 구겨진 내 자존심을 다시 찾고 싶어서 그런 거야. 맞아, 너는 그저 하룻밤 자고 다시 안 보는 그런 여자야.”“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