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사람들은 문서를 꺼내어 매우 공손한 척하며 성도윤에게 건넸다. “성 대표, 이 자발적으로 성대 그룹 경영을 포기한다는 동의서에 서명하길 바라요. 다만 성 대표 현재 상태로 독자적으로 서명할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어요?”고개를 살짝 젖힌 성도윤은 완벽한 턱선을 드러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펜 줘봐요.”“안 돼, 안 돼요!”차설아는 여전히 성진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는데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했지만 너무 허약해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망할 놈, 이거 놔,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그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이 성진 품에서 허우적대며 심지어는 남자의 팔을 잡아 사납게 물어뜯었다.“쉿, 조용히 좀 있어요. 이건 도윤이의 선택이야, 내가 당신을 놓아준다고 해도 서명할 건데 왜 그렇게 걱정해요?”“성진, 이 비열한 자식, 너는 네가 이런 식으로 이 사람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할 거야. 너는 영원히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야!”차설아는 한사코 성진의 팔을 물고 늘어졌는데 온몸이 떨리고 입술과 이빨 사이에 피비린내가 났다.성진은 팔뚝의 깊고 피가 배어 있는 이빨 자국을 보고 분명히 가슴이 아팠지만 또 한편으론 통쾌함을 느꼈다. “비교 대상이 안 되면 뭐 어때요. 적어도 당신이 나를 보게 할 수는 있잖아.”어쩌면 그는 이런 병적인 방식으로 차설아의 주의를 끌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여자가 그를 욕해도 좋고 때려도 좋고 심지어 한입에 그를 잡아먹는 것도 그녀의 안중에 그가 없는 것보다 나았다.“이... 차설아 씨, 자중하세요.”이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 침을 삼키고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성도윤도 비록 눈은 멀었지만 감정은 여전하니 차설아와 성진의 대화를 내내 들으며 차설아에 대해 더욱 확신이 생겼다. 분명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말이다. 사인펜을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살짝 조여졌다.“서명했으니 이젠 떠나셔야죠.”“
“허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요?”차설아는 마치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는데 그녀의 속상함과 방금 그 모든 것들이 볼품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당신 말이 맞아요. 이건 당신 사업이지 내 사업이 아니니 확실히 나와는 상관없어요. 내가 너무 한가해서 오지랖을 부렸네요!”차설아는 너무 괴로운 데다 몸이 허약한 나머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성진은 그녀의 비틀거리는 몸을 때맞춰 일으키며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정말 한가하다면 가서 봉사나 해요.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내가 오지랖이 넓은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판단할 필요는 없잖아!”차설아는 성진을 미워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더니 그를 모질게 밀어냈다.이 세 사람은 마치 세 개의 화살촉처럼 날이 세우고 있었는데 불꽃 튀는 신경전이 계속되었다.차설아는 말로는 괜찮다 하면서 몸은 지탱하기 버거웠는지 몇 발자국도 못 가서 중하게 쓰러졌다.“아가씨, 아가씨!”민이 이모가 당황해서 소리쳤다.——차설아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콜록콜록!”차설아는 눈을 떴는데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드디어 깼군요!”그녀의 손은 큰 손바닥으로 꼭 싸여 있었고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성도윤...”그녀는 비몽사몽 한 찰나 침대 앞 남자의 잘생긴 모습을 보고 불쑥 그의 이름을 불렀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기 손을 쥔 손바닥이 눈에 띄게 차갑고 딱딱해지는 걸 느꼈다.“성진, 너였구나!”차설아는 그제야 그녀의 손을 잡은 남자가 성도윤이 아니라 음흉한 성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즉시 얼음같이 차갑게 자신의 손을 뽑았다.“목적을 달성했으면 축하해야지 뭐하러 여기에 달라붙어 있어?”여자의 눈빛은 경멸의 기운이 가득했다.“내 목적은 성대 그룹이 아니라고 일찍이 말했던 거로 기억하는데.”“알았어, 너의 목적은 성도윤을 이기는 거잖아. 그는 이미 잃을 것이 없어. 아직도 무엇을 더 원하는 거야?”
차설아는 몸을 굳히고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일침을 가했다.“네 말대로라면 내가 언젠가는 널 잦아가 빌기라도 하겠어? 그래서 여기서 기다리는 거야?”“그렇게 생각해도 되고.”성진은 살짝 눈썹을 치켜들었는데 유유자적하는 표정이었다,“지금 도윤이를 매우 아끼고 있지 않아요? 그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잖아요. 내가 지금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이 나에게 간청하기만 한다면 나는 즉시 대외적으로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거예요. 성대 그룹은 여전히 성도윤의 것이죠?”“정말이야?"차설아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정말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다.성대 그룹이 성도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오랜 세월 심혈을 기울였는데 만약 성진 같은 소인에게 뺏긴다면 그것은 그의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그녀는 정말 그러는 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당연히 진심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자사자 당신 옆에 달라붙어 뭐 하겠어요? 나는 진작에 축하파티를 했겠죠, 안 그래요?”성진은 여자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여자의 의지가 조금씩 무너지자 더욱 대담해져 손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시작해봐요, 나한테 빌어보라고요.”“웩!”차설아는 되려 토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눈을 뒤집으며 말했다.“성진, 너 좀 제대로 해봐, 차라리 그냥 대가가 무엇인지나 말해. 가성비 계산해야 하니까.”“가...가성비?”성진이 가까스로 꺼낸 시크한 카리스마는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입가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이 여자는 왜 조금이라도 그 앞에서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이 사람은 차설아 아닌가? 그녀가 연약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 해가 서쪽에서 뜨겠지...차설아는 정색하며 말했다.“무릎 꿇는 게 대가가 적다면 무릎을 꿇을 거야. 하지만 무릎 꿇는 대가가 크다면 무릎을 꿇지 않고 간단하고 난폭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니 기대해.”
남자의 어두운 눈동자는 캄캄한 밤에 갑자기 켜진 등대처럼 유난히 밝아졌다.여자의 이 자그마한 자비는 성진에게 있어서는 마치 오아시스처럼 달콤했는데 그를 미친 듯이 기쁘게 만들었다.“그건 내가 죽는 게 아깝다는 얘기잖아요.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것 뿐이라는 거죠.”“그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성도윤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면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야.”“대가라기보다는 선택이죠.”성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고 잘생긴 얼굴은 보기 드물게 평온하고 이성적이었다.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간다면 나는 성대 그룹을 버리고 이제부터 은거하고 다시는 이런 분쟁에 참여하지 않겠어요.”“너랑 같이 가자고? 그게 다야?”차설아는 좀 이상했다.그녀는 원래 성진이 변태적인 요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그의 시중을 드는 등과 같은 것 말이다.심지어 그녀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약 그가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의 뺨을 세게 때리고 그를 변태라고 욕할 준비가 말이다.“그래.”눈을 감은 성진은 동경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우리는 세상과 단절된 곳을 골라 편안하게 소소한 나날을 보내는 거죠.”“그게...”차설아는 얼떨떨했다. 성진은 멍청하다고 하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것이 오랫동안 준비한 끝에 정말 성대 그룹을 빼앗았다. 하지만 또 똑똑하다고도 할 수도 없는 것이 여자밖에 모르는 순애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계획해 온 일을 이렇게 포기하다니...그는 악역이잖아? 어떻게 악역이 마땅히 해야 할 악랄한 결단이 조금도 없단 말인가?“싫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난 단지 당신이 저와 함께 은둔하기를 원할 뿐이고 다른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강요하고 싶어도 그럴 재주는 있기나 하고?”“기회를 주면 내가 과연 그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 거예요.”차설아는 눈빛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장난기를 거뒀다.“너랑 은둔만 하면 성도윤을 놔준다... 가성비도 좋은 것 같으니 잘 생각해 볼게.”원래
“무슨 요구요?”성진은 기분이 매우 좋았는데 밝은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승낙했어! 승낙했다고!!그는 마음속으로 노호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 성취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 차설아의 작은 요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별을 갖고 싶다고 해도 그는 따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나는 너와 함께 갈 수 있어. 다만 그가 완쾌되고 빛을 볼 때까지 성도윤과 함께 있어야 해.”차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이것은 그녀가 일찌감치 계획한 일이며 어떠한 변고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성진의 원래 횃불처럼 밝았던 눈동자는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암울해졌고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허허, 어떻게 완치할 수 있지? 또 당신 피로 그를 먹여 살리려고요? 봐요, 당신은 지금 허약하다고요. 당신이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데요!”“너.....네가 어떻게 알아?”차설아는 의외였다.그녀는 그에게 이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은 거로 기억하는데...?“당신의 양쪽 손목에 상처가 가득한데 성도윤처럼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머리가 있는 사람이 모를 리 없지 않아요?”성진은 여기까지 말하고 여인의 팔을 잡아당겨 손목의 상처를 보았는데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성도윤은 당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목숨을 걸고 그를 치료하려는 목적이 뭐야?”“내 마음 편하려고.”차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녀와 성도윤이 물과 불, 날아다니는 새와 물고기처럼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라도 그녀는 반드시 그의 남은 인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그래서 그녀는 그의 곁에서 그가 낫는 것을 지켜봐야 하고 그를 대신해서 그의 사업을 지켜야 하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줘야 했다...이렇게 해야만 그녀는 안심하고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당신 마음은 편해도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요.”성진은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당신의 이 요구를 나는 들어줄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이 즉시 나와 함께 떠나기를 바래요.
민이 이모는 아직도 약국에서 차설아를 위해 약을 달이고 있는데 미간이 깊게 파여 있었다.“회장님, 사모님. 반드시 아가씨의 평안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제 탓이에요. 저 때문에 아가씨가...”민이 이모는 부채로 난로의 불을 살살 때고 있었는데 후회막심이었다.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처방은 확실히 효과가 있지만 부작용도 대단했다.아가씨는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성도윤에게 줄 약도 이미 다 써버렸다.그 결과 남자는 점점 더 상태가 안 좋아져서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있었다.갖은 방법을 다 생각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고 무슨 까닭인지도 찾을 수 없었다.이 일은 아가씨에게도 감히 알리지 못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큰 사달이 날 것이다.“민이 이모!”차설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민이 이모 뒤로 다가와 놀라게 하며 장난을 쳤다.민이 이모는 워낙 걱정이 많았는데 자연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고, 아가씨. 깜짝 놀랐잖아요. 깨어나셨으니 다행이에요. 어서 이 약을 마셔요.”노인은 갓 달인 약을 손바닥만 한 작은 그릇에 붓고 세심하게 식혀 차설아에게 건넸다.차설아는 무심코 약을 마시다가 급히 물었다. “성도윤은 어때요, 약은 아직 충분해요? 더 뽑을까요?”말하면서 그녀는 두세 번 소매를 걷어 올리고 피를 뽑으려는 자세를 취했다.“뭘 또 뽑아요, 피가 수돗물이에요?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있게!”뒤따르던 성진이 냉담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누르며 말했다.“먼저 약을 마셔요, 도윤이는 지금 괜찮아,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어요.”“정말?”차설아는 반신반의했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모를 바라보며 확인하고 싶어 했다.“그게...”민이 이모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정직하고 성실해서 성진처럼 눈 뜨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또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차설아는 금세 알아차렸다.“민이 이모, 솔직히 말해봐요, 성도윤이 도대체 어떤데요?”그녀가 막 깨어나는 순간부터 그녀는 좀 이상하
차설아가 서쪽 스위트룸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 컵과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꺼져, 나는 너희들의 연민은 필요 없다고!”곧이어 두 요양 병원의 간병인이 고개를 떨구고 나와 얼굴을 붉히며 억울한 듯 울음을 터뜨렸다.“왜 그래요?”차설아가 간병인에게 물었다.“설아 씨, 깼어요? 잘됐네요..”여 간병인은 구원병을 보듯 다급하게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빨리 가서 성 대표님을 설득하세요.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은데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시고 더욱이는 저희가 보살피지도 못하게 하면서 우리를 모두 쫓아냈어요. 이게 지속되면 병이 낫기는커녕 목이 말라 굶어 죽을 것입니다.”“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차설아는 눈썹과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는데 이 녀석이 또 어린애 같은 성질을 부리며 유치하게 구는 거에 대해 머리가 아파 났다.그는 두 여성 간병인을 향해 말했다.“먼저 내려가요. 여기는 나한테 맡기면 돼요.”“그럼 수고하세요, 조심하셔야 해요, 성 대표님 요 며칠 너무 예민하세요.”여 간병인이 당부했다.차설아는 넓고 편안한 정원을 지나 성도윤의 방문 앞에 이르러 문을 살짝 열자 벼루 하나가 문 쪽으로 던져졌다.“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꺼지라니까! 귀찮게 하지 마.”성도윤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기댄 채 어눌한 말투로 현관 쪽을 향해 소리쳤다.그의 이런 조급하고 통제 불능의 모습은 차설아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두려워할 것이지만 그녀는 안쓰럽기만 했다.사람이 너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자포자기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는 성도윤인데 말이다.“조심 좀 해요. 이렇게 좋은 벼루가 당신 때문에 바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잖아요.”차설아는 아무렇지 않게 허리를 굽혀 세 동강 난 벼루를 쓰레기통에 넣고는 성도윤의 옆으로 가서는 가늘고 하얀 손으로 남자의 손등을 살짝 덮었다.이는 성도윤을 금세 진정시켰다.“당신... 괜찮아요?”성도윤은 괜히 가슴이 조여왔다.그날 차설아가 갑자기 쓰러졌고 그는
그는 줄곧 경계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서은아가 가끔 그의 얼굴이나 머리카락에 닿으면 적응이 좀 안 되었는데 하물며 모르는 여자 간병인들이 그를 돌보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았다.“그래요? 난 왜 당신이 내가 만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죠?”차설아는 입술을 오므리고 웃으며 장난스럽게 남자의 머리를 비비고 뺨을 주물렀다.그녀는 참다못해 폭발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상하네, 당신은 예외인 것 같아요.”“...”“따라서 누군가가 나를 꼭 챙겨줘야 한다면 그건 당신이어야 해요.”“???”“왜, 싫어요?”“아니,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혹시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차설아는 성도윤이 그녀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고 그가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다시 돌아왔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왜 그녀가 특별하단 말인가?“나에 대한 기억이 돌아온 거예요?”성도윤은 대꾸하지 않았다.차설아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차라리 생각이 안 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거든요.”성도윤은 자신이 아무리 알고 싶어도 차설아가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하고 좋고 나쁨도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나 면도 좀 해줘요.”성도윤이 불쑥 요구했다.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은 사람으로 항상 깨끗하고 산뜻한 모습을 유지했는데 자신의 수염이 덥수룩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었다.그런데 요 며칠 그는 유난히 퇴폐적이었는데 얼굴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아 마치 삶에 흥미를 잃은 아티스트 같았다.차설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이 세상이 여전히 흥미롭고 계속 발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도, 면도요?”차설아가 머리를 긁적거리니 어색하게 되물었다.차설아는 비록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거의 남자처럼 생활해왔지만 유독 면도를 해본 적이 없었고 누군가를 도와 면도를 해준 적도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