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남아름은 더 이상 그 일을 회상하기 싫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시간이 많이 흘렀어. 예전의 일을 들추는 것보다 지금을 잘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아니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켜쥐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차씨 가문은 8대 명문가 중 우두머리에서 전멸될 정도로 수많은 참혹한 일을 당했어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거듭 예정의 일을 들추지 말라고 당부하셔서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억누르고 잠잠하게 있었을 뿐이에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예전의 일을 들추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로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후 몇 년 동안 부모님을 비참하게 죽인 범인이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서 마음 편히 잠에 들지 못했고 잠이 든다고 해도 부모님이 아래로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는 꿈에 시달려야 했어요. 전 오빠를 납치한 사람과 부모님을 살해한 사람이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진실을 파헤쳐서 복수를 할 거예요.”겉으로는 과거의 고통에서 헤어나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차설아는 마치 거대한 산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고 고통에서 하루도 벗어나지 못했다.게다가 쌍둥이 오빠인 차성철의 존재와 그의 쓰라린 과거를 알게 된 후부터 그녀의 복수심은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부모님께서 그곳에서 편히 쉬도록 오빠와 함께 범인을 찾아 복수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성도윤이 갑자기 사고를 당해 계획이 늦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지금 그의 상태가 점차 호전되고 있으니, 저도 이제 못했던 복수를 시작해야죠.”차설아는 원두를 가는 남아름의 손을 꼭 잡으며 정중하게 부탁했다.“저도 제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니까 더 이상 말릴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복수하려는 마음은 절대 꺾이지 않을 거니까 이모가 아는 모든 사실을 저한테 숨김없이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의 부모님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아이고, 이 녀석아! 어쩜 이렇게 네 엄마를 쏙 빼닮았
남아름은 종잡을 수 없이 변한 차설아의 표정을 보면서 자기의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그렇다고 해서 성씨 가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 두 가문은 줄곧 해안에서 서로 도우면서 발전했고 그동안 큰 이익 충돌도 없었어. 그냥 네 오빠의 일로 왕래가 줄어들면서 관계가 소원해졌을 뿐이야. 그리고 난 성씨 가문의 궐기가 자체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해.”그 덕에 차설아의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고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맞는 말인 것 같아요. 저희 가문이 파산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건 성씨가문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만약 그들이 부모님을 죽인 범인이라면, 할아버지께서 진정으로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성씨 가문이라면서 성도윤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지 않으셨겠죠.”차설아가 성씨 가문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신뢰로 인해 마음이 바뀌었다.남아름은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차설아를 말리고 싶었다.“설아야,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춘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그러니까 이쯤에서 옛날 일은 다 잊고 충실하게 살아가자...”그러나 차설아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고 그저 남아름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저도 제 분수를 알아요.”원두가 다 갈리자, 차설아는 성도윤의 요구에 따라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렸다.정자에 앉아 차설아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성도윤은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어 약간의 불만이 섞인 말투로 물었다.“커피 한 잔을 타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어느새 차설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그는 커피를 기다리는 것보다 그녀를 기다리는 마음이 더 컸다.“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똑같이 맛있는 커피를 마시려면 그만한 기다림이 필요한 법이에요.”차설아는 손수 내린 커피를 성도윤의 손에 쥐어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이 커피를 마시면 단언컨대 사랑에 빠질
차설아는 기대에 부푼 초롱초롱한 눈으로 성도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어때요?”성도윤을 입을 오므리며 부드러운 커피가 혀를 통해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느낌을 만끽했다.“내가 마셔본 커피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 뭔가 오래된 친구를 만난 느낌이랄까.”비록 성도윤은 까다롭기 짝이 없는 데다가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차설아가 내려준 커피는 단번에 그를 중독시킬 만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차설아는 성취감에 교만한 표정을 지었고 턱까지 치켜들면서 답했다.“당연하죠! 누가 만든 커피인데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전문적으로 배웠었고, 그의 아낌없는 찬사는 그녀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으며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자, 복잡했던 기적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면서 차설아와 관련된 일부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안개에 감춰진 흐릿한 장면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그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성도윤은 얼굴을 찌푸렸고 손바닥을 이마에 대면서 약간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빌어먹을!”차설아는 즉시 이상함을 감지하고 그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부축하며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요?”그는 갑자기 현기증이 났고 속까지 울렁거려 가쁜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내가 예전에 이 커피를 마셔본 것 같아요. 하지만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수록 점점 더 흐릿해져서 너무 괴로워요...”차설아는 문득 의사의 당부가 떠올라 성도윤의 등을 몇 번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도윤 씨, 그만 생각하고 얼른 심호흡해요.”복잡한 뇌 수술을 받은 성도윤은 적절한 휴식이 필요했고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수록 대뇌에 무리가 가서 심할 경우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차설아는 그가 헛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커피 한 잔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지 상상도 못 했다.“대체 어디서 이 커피를 마셔 봤을까요?”성도윤은 여전히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그뿐만이 아녜요!”성도윤은 손가락의 힘이 세지고 말투가 더욱 거칠어졌다.“나는 내가 회복되는 날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말해 봐요, 당신과 나 사이에 도대체 무슨 과거가 있었던 거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은아인데 왜 당신은 매번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거예요?”그가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그는 칼로 끊임없이 자신의 뇌를 자르는듯한 고통을 느꼈고 현기증이 났다.“난... 윽!”차설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픔에 소리를 질렀다.“왜 그래요?”성도윤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즉시 손을 놓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 손에 힘이 너무 세서 아파서 그래요.”차설아는 숨을 죽이고 손목의 거즈를 조심스레 정리했는데 피가 배어 나왔다.마음속으로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원망했는데 피가 조금 났다고 이렇게나 허약하니 만약 이럴 때 적과 마주친다면 분명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차설아가 정신을 다시 다잡기도 전에 민이 이모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렸다.“아가씨, 큰일 났어요!”민이 이모는 황급히 뒤뜰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성도윤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괜찮아요, 무슨 일 있으면 그냥 말씀하세요.”차설아는 성도윤을 힐끗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민이 이모에게 말했다.“누가 찾아왔는데 오 원장님께서 조금은 감당하기 버거워하시는 것 같아요. 두 분 좀 피해계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민이 이모는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찾아온 사람이 정말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러나 차설아는 천성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사전에 후퇴란 없었다.“찾아왔으니 쉽게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얼마나 상대하기 어려운 지 한 번 봐야겠네요.”차설아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그 사람을 만날 준비를 했다.그러나 민이 이모는 그녀의 손목에서 새어 나온 핏자국을 한눈에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민이 이모의 입에서 나온 '문제'는 이미 코앞까지 닥쳐왔다.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줄곧 차설아 곁을 맴돌고 있는 성진이었다.“도윤아, 정말 말도 안 돼...”성진은 평소 산만한 차림에서 벗어나 올백 머리를 하고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는데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해안 전체에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성가와 서가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널 찾아 나섰어. 이곳에 갇혀 있었다니... 네가 즐길 줄 아네.”“성진, 여긴 웬일이야?”차설아는 무슨 짐승을 보듯 두 팔을 벌려 성도윤의 앞을 가로막고 성진을 노려보았다.“지금 뭐에요? 도윤이를 지키려고?”성진의 교활한 눈매는 마치 천년 산 여우처럼 차설아와 성도윤을 쓸어보며 의미심장한 냉소를 지었다.“당신이 얼마나 큰 소란을 피웠는지 아는 거예요?”차설아는 성진을 상대하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민이 이모에게 말했다.“민이 이모, 먼저 이 사람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세요, 이 녀석은 저에게 맡겨주시면 돼요.”민이 이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도윤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도련님, 저를 따라오세요.”“만지지 말아요!”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고 민이 이모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며 말했다.“당신들 눈에는 내가 뭐로 보여요? 내가 여자 뒤에만 숨어야 하는 겁쟁이예요? 난 내가 아직 이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그게...”민이 이모는 어색하게 자리에 굳어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차설아는 고개를 돌리고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아무도 당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이 사람이 좋은 목적으로 찾아온 건 아니고 당신은 지금 열세에 처해있으니 지금 이렇게 자존심을 세우는 건 저 사람한테 유리한 거잖아요?”‘그게 뭐 어때서요, 이건 우리 성가의 원한이에요. 외부 사람이 끼어드는 건 아니지 않나요?”성도윤은 오만했는데 남자들의 대결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한 여자의 뒤에 숨어서 잠시의 안녕을 고하는 것보다 그는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성진은 손을 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알겠지만 성대 그룹의 규정에 따를 수밖에...”차설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빠르게 되물었다.“성대 그룹 무슨 규정?”“성대 그룹에서 인수인은 반드시 건강하고 민사행위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명문화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법정 상속인 중에서 새로운 인수자를 선발할 의무가 있다...?”“그래서 네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이유는 그가 민사행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구나. 그리고 네가 다시 성대 그룹의 법정 상속인으로 순리대로 이 사람을 대체하는 거?”“이런 음모는 하지 말아요. 난 단지 도윤이의 건강 상태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에요. 도윤이를 대신하여 성대 그룹 대표를 맡을지 말지는 이사회의 결정이니 존중할 수밖에 없죠.”“쯧쯧, 고상한 척은!”성진의 이 말은 차설아의 화를 돋웠다.반면 성도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는 확실히 성대 그룹의 명문 규정이니 난 현임 대표로서 당연히 규정을 지킬 거야. 이사회에서 이미 결정이 난 일이라면 난 더는 할 말이 없어.”“역시 우리 도윤이.”성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음을 지었다.이때 성대 그룹 임원진 8명과 의료평가팀이 도착했다.이 8명의 이사회 구성원들은 성도윤의 심복들, 중립자들이 있었다. 지금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그건 바로 성도윤이 소문대로 실명하고 뇌에 손상을 입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만약 성도윤이 실명하고 뇌에 손상을 입은 것이 확인되면 성대 그룹의 미래를 위해 이들은 성도윤의 심복이든 아니든 만장일치로 성도윤을 퇴진시킬 예정이다.성진의 이 수법은 정말 확실하고 잔인했는데 성도윤의 약점을 정확히 명중했다.“대표님, 드디어 대표님을 찾게 되어 다행입니다.”이사회 구성원 중 한 명인 소인성은 항상 성도윤에게 충성하던 인물이다.그는 한눈에 멀쩡하고 생기발랄한 성도윤을 보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나머지 이사회 성원들을 향해 말했다.“이것 보세요, 내가 외부의 그 소문들이 모두 헛소리라고
차설아의 포스가 너무 강한 나머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멍해져서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그게...”의료평가팀 사람들은 난색을 보이며 이사회 사람들과 성도윤을 번갈아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쯧쯧, 가여운 여자.”성진은 성도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차설아를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웃음 속에는 음산한 기운이 풍겼는데 그는 가슴이 답답하여 미칠 것 같았다, “내 남자라... 도윤이도 아는 사실이야?”남자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서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이 이토록 사랑하는 남자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기억을 못 하는데... 이 정도면 도윤이 마음속에서 당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는 너무나 잘 알리는 거 아닌가? 그런 당신이 불쌍하지도 않아요?”“......”차설아는 양미간을 찌푸렸는데 그의 말에 심장이 멎는 듯싶었다.성진 이 녀석, 말이 정말 독하네,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이렇게나 콕콕 찌르다니.그러게 말이야, 성도윤 이 나쁜 놈 정말 너무하네. 어떻게 모든 사람을 기억하면서 하필이면 나를 잊을 수가 있지?성진은 차설아 눈빛의 상처를 보고 만족스럽게 몸을 바로 세우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어쨌든 이것은 성가와 성대 그룹 내부의 일입니다. 나는 당신이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뿐입니다. 성대 그룹은 지금 아주 혼란한 상태에요. 우리 이사회는 많은 주주에게 설명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당신이 협조할 수 있기를 바래요. 얼굴을 붉히는 건 좀 그렇잖아요.”“나는 당신들이 누구에게 설명하든 말든 상관 안 해. 내가 있는 한 당신들 누구도 그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마, 믿지 못하겠으면 어디 한 번 해보든가!”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서늘한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성대 그룹은 성도윤이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온 사업으로 그가 모든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데 인제 와서 다른 사람한테 내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잔인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녀는 결코 성진이 원
차설아는 몸이 너무 허약해서 몸부림칠 힘조차 없었다.요즘 너무 많은 피를 써서 성도윤에게 약을 지어 주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제압하기는커녕 그녀는 성진 같은 쓰레기도 당해내지 못하는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그러자 침묵하던 성도윤이 입을 열었다."내 몸 상태가 그렇게 궁금하면 절차를 따르죠.”신체검사를 담당한 몇몇 의료진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성도윤의 각종 검사를 위해 앞으로 나섰다.“그럼 성 대표님, 저희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검사는 뇌 검사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안 돼!”차설아는 있는 힘을 다해 성진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이자들이 당신을 만지게 해서도 안 되고 이들에게 당신의 몸 상태를 알려서도 안 돼요. 당신은 성도윤이에요. 당신은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움츠러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순간이 되기도 전에 어떻게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요?”만약 성대 그룹에 정말 어떤 규정이 있다면 이 평가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성진의 음모와 계략은 실현될 것이다. 그녀는 성도윤의 이런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후퇴할 수 있단 말인가?성도윤은 차설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시끄러운 건 별로 안 좋아해요. 검사가 끝나면 이곳을 떠나시길 바랍니다.”곧 의료진은 절차에 따라 성도윤에 대한 전면적인 신체검사를 한 뒤 전문적인 건강평가서를 발급했다.“성 대표님, 성진 부대표님, 이사님들, 성 대표님의 건강평가보고서 결과로는 성 대표님은 현재 실명 상태이시고 뇌 손상 4급, 오른쪽 종아리뼈가 부러진 흔적이 있고 정신상태도 좋지 않으신데 신체적 자질이 걱정됩니다. 완전한 민사행위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뇌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업무에 적합하지 않으며 장기간 요양이 필요합니다.”의료진은 로봇처럼 감정 없이 평가 결과를 읽어 내려갔다.“닥쳐, 이 정도 수준으로 무슨 의사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상한 소리 지껄이지 좀 마요.”“뇌를 다쳤을 뿐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