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윤은 가늘고 보드라운 손으로 성도윤의 손목의 맥을 짚었고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어때? 도윤이가 심각한 상태야?”옆에 서 있던 소영금도 려윤이 미간을 찌푸리자 덩달아서 마음이 조였다.려윤은 대략 1분 정도 진찰한 후에야 손을 옮기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도윤 도련님의 맥은 실처럼 가늘고 급하고 아주 혼란스러워요. 전형적인 심근경색과 뇌사죠. 특히 뇌에...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아요. 상황이 좋지 않아요.”“뇌에... 뇌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고?”그렇게 아끼던 아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랐던 소영금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성도윤을 바라보았다.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서은아는 흥분한 어조로 려윤에게 소리쳤다.“나이도 젊어 보이는 아가씨가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죠. 병원의 전문가가 방금 준 진단서에요. 도윤 씨의 몸 상태는 지금 안정되었다고 했는데 무슨 심근경색과 뇌사라고 하는 거예요? 도윤 씨가 정말 그렇게 되기를 저주하는 거죠?”려윤은 나이가 어렸지만 성격은 차분했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이건 제가 한의사의 관점에서 진단한 결과예요. 서은아 씨가 정확하지 않다고 느끼시면 병원을 바꿔서 성도윤 씨가 다른 의사한테서 전신 검사를 받게 해줘요. 그러면 더 공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겠죠.”“그게 말은 쉽죠. 도윤 씨가 지금 아직 몸도 채 회복되지 않았는데 또 병원을 옮기면 그를 해치는 것이잖아요!”서은아는 절대 성도윤이 병원을 옮기게 할 수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와 성진이 저지른 그 일은 들킬 것이고 그녀와 성진은 아마도 완전히 끝장날 것 같았다.“서은아 씨, 제 능력을 믿으세요. 도윤 도련님의 맥은 정말 이상해요. 병원을 옮기지 않더라고 해도 한의약으로 몸을 회복해야 해요. 이러는 건 거절할 이유가 없겠죠?”려윤은 자신의 중요성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서은아가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서은아가 계속 거절하려면 분명히 무리수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서은아는 그제야 눈앞에 아직 젊은 려윤이 정말 실력이
려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녀의 예쁜 얼굴에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이분의 의술은 정말 너무 뛰어나요. 심지어 우리 아버지 려명호보다 더 훌륭해요. 서은아 씨, 이분은 어디에 계시는지 아세요? 저를 이분께 만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세요.”“이...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서은아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차설아, 네 이놈... 정말 예사롭지 않은 여자야. 이토록 마음이 넓다니. 나와 성도윤씨를 도와주겠다 하고 신기한 약 처방만 남기고 사라진다고... 대단하네.’“그게 무슨 불가능할 수 있겠어요. 도윤 도련님께서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했기에 지금 도련님을 구할 수 있는 귀한 분을 만나게 된 거죠. 장담하건대 도윤 도련님께서 이 약을 세 번만 열심히 드시면 분명 다시 건강을 되찾을 것이고 완쾌하실 겁니다.”려윤은 눈에 빛이 반짝이며 유일무이한 처방을 칭찬하고 있었다.소영금은 그제야 안색이 조금 좋아졌고 서은아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보아하니 너도 수고가 많았구나. 도윤이를 위해 그렇게 귀한 분도 찾아주고.”서은아는 어색한 듯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얼버무렸다.“그... 그냥 우연일 뿐이에요. 도윤 씨가 운이 좋은 거죠.”려윤은 쭈글쭈글한 처방을 보고 입술을 오므리며 천진난만한 말투로 말했다.“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건 이렇게 대단한 약 처방인데... 서은아 씨는 왜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거죠? 도윤 씨가 빨리 나으면 좋지 않나요?”“그게...”서은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말문이 막혔다.서은아는 려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마음속으로 려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이 빌어먹을 년, 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소영금은 서은아가 많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가볍게 기침하며 수습하려 했다.“됐어. 나도 은아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신중하게 처리했다고 봐. 약을 절대 함부로 먹어서는 안 돼.”“네네. 맞아요! 아주머니, 역시 아주머니께서 저
소영금이 이렇게 말하자 서은아는 깜짝 놀랐다.서은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급하게 말했다.“아주머니, 그게 아니라... 사실 이 약 처방을 준 사람이 신분이 너무 특별해서 그 사람을 도윤 씨에게 접근 못 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게 무슨 말이야?”소영금은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이 도윤을 구하고 싶어 하는데 왜 도윤에게 접근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 거지? 모순 되잖아.’휴!서은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성도윤을 힐끗 쳐다본 뒤 소영금에게 귓속말로 모든 것을 고백했다.소영금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없이 손가락을 오므리며 마음이 복잡해졌다.“됐어. 이 처방의 내력이 분명하지 않으니 그렇게 힘들여서 그 사람을 되찾을 필요가 없어. 만약 그 사람이 지금 먼저 도윤한테 좀 도움을 주고 후에 도윤이를 해치면 그때 가서 곤란하게 될 것이야.”“아주머니 말씀이 맞아요. 저도 그 사람이 그렇게 우리를 해칠까 봐 감히 이 처방을 쓰지 못한 거죠. 결국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아무 일도 없이 우리한테 좋은 일을 하는 건 분명히 엉큼하게 다른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그래. 찾지 말자. 찾지 말자.”서영금은 서은아와 함께 연기를 하는 것처럼 서로 맞장구를 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다.려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즉시 이 처방의 주인이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대답했다.“사실 이 처방도 그렇게 신기한 건 아니죠. 몇 가지 약재를 적절히 배합하면 목숨을 구하는 것이고 부적절하게 배합하면 사람을 해치는 것이죠. 이 약을 써보지 않은 이상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 없죠.”“...”성도윤은 입술을 오므린 채 말이 없었고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성도윤은 더더욱 바보가 아니었기에 세 여자의 서투른 연기를 이내 발견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라는 사람이 그에 있어서 단순한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던 친구뿐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됐어요. 시끄러워요. 좀 피곤하니까 나가
성도윤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그는 자기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점점 더 확신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이 어쩌면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던 차설아와 관련이 있겠다고 추측했다.서은아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점점 더 불안해졌다.“아, 아니야. 넌 나만 기억하면 돼.”병실 밖을 서성거리는 소영금의 표정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그러자 려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아들이 갑자기 저렇게 되었는데 걱정이 안 되겠어?”소영금은 엎어진 말벌 집처럼 눈에 보이는 게 없이 심한 말을 뱉어댔다. 그녀는 려윤을 노려보며 말했다.“아까 너도 눈치챘어? 도윤이의 상태가 매우 이상해.”“도윤 도련님의 상황은 확실히 좋지 않아요. 특히 머리에 큰 타박상을 입은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다른 의사에게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겠어요.”“그렇지? 너도 도윤이의 머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의심하는 건...”소영금은 여기까지 말하고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뭘 의심하는 거죠?”려윤도 덩달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소영금은 정색하며 말했다.“난 도윤이가 귀신에 들린 것 같아. 서은아가 한 짓인 게 틀림없고 서은아는 지금 도윤이를 통제하고 있지. 아니면 도윤이가 지금처럼 서은아의 말만 듣고 그녀를 그렇게 챙겨주고 있을 수가 없어. 전혀 말도 안 돼.”“헐... 귀신에 들렸다고요?”려윤은 어이가 없었고 일이 점점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귀신에 들리든 아니든 내 아들은 절대 서은아와 함께 있을 수 없어. 만약에 서은아가 성진 그 자식의 앞잡이라면 모든 것이 끝장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서은아를 다른 곳으로 떼어놓아야 해. 대놓고 그렇게 한다면 도윤이는 분명히 동의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래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소영금은 사려 깊은 사람이라서 가능한 모든 위험을 예상해야 했다.성도윤과 서은아 사이는 정말 이상했기에 서은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밤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마치 귀신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질주하며 숲속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차설아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멋지게 빠른 속도로 90도 가까운 커브를 가볍게 지나갔다.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반듯이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약효 때문에 눈을 질끈 감은 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차의 흔들림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정말 지독한 여자야. 자기 친아들에게 이렇게 심한 수면제를 먹였다니. 바보가 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차설아는 속으로 원망하며 신지 요양병원의 원장님인 오성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 원장님, 이제 곧 도착해요. 요양병원에 잠시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폐를 끼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전화기 너머로 오성문은 매우 열정적이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계집애야. 아저씨한테 무슨 예의를 갖추는 거야. 그 당시 나와 네 아버지는 의형제였고 네 아버지는 신지 요양병원 주식도 가지고 있어. 한동안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이곳에 살겠다고 해도 아저씨는 두 팔 벌려 환영이지.”“그러면 감사합니다. 아저씨.”오성문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신지 요양병원은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고급 요양병원이었고 특수 계층 사람들만 있을 수 있는 곳이었고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았기에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이곳은 식물들이 많았고 환경이 우아한 데다 공기 중의 음이온 함량이 매우 높으며 다양한 귀중한 약초와 현재 가장 선진적인 의료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가장 중요한 건 신지 요양병원의 원장님인 오성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적으로 차설아를 지지하고 파산 위험을 무릅쓰고 미리 요양병원을 정리해서 성도윤만을 위해 봉사하려고 했다.“도윤 씨, 걱정하지 마. 지금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도윤 씨를 반드시 치료 해줄게.”차설아는 성도윤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맹세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차가 곧 신지 요양병원의 입구에 도착했고 중국식 정원이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민이 이모도 모든 것이 이렇게 공교롭고 순조로울 줄은 몰랐다.‘어쩌면 하늘의 뜻이겠지. 하늘이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하고 아직 풀리지 않은 갈등이 있느니 두 사람의 운명을 다시 묶어 놓은 거겠지.’오성문도 열정적으로 말했다.“설아야, 너희 상황은 민이 이모가 다 알려줬어. 걱정하지 마. 요양병원은 최선을 다해서 성도윤 씨가 최대한 빨리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서 쉬어. 너희들을 위해 서쪽에 있는 스위트룸을 준비했어. 그 방은 가장 따뜻하고 집 분위기가 나는 방이야. 안에서 자유롭게 요리하고 쉬면서 책을 읽거나 밤에 별을 보며 반신욕도 할 수 있어.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질 거야.”신지 요양병원의 부원장님이자 오성문의 아내인 남아름이 친절하게 소개했다.“네. 아주머니. 폐를 끼치게 되었네요.”차설아는 고마운 표정으로 우아하고 온화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남아름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이런 모습을 보고 엄청나게 기뻐하실 것이다.“바보 같은 계집애. 아주머니랑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빨리 돌아가서 푹 쉬어. 이제 시간 나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자꾸나.”남아름은 마음 아프고 불쌍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으나 결국에는 조용히 가서 차설아를 안아주었다.요양병원 직원의 안내로 차설아는 아담한 정원을 지나 서쪽 스위트룸으로 향했다.약효가 채 가시지 않았기에 성도윤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스위트룸의 큰 침대에 편안하게 눕혀졌다.차설아는 주위를 둘러보니 나무로 된 인테리어와 곳곳에 우거진 식물들이 있었다. 정말 남아름의 말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나머지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차설아가 창문을 열자 밤바람이 서서히 하얀 색 커튼을 스치고 있었고 마치 비에 물든 것처럼 축축한 맑은 공기는 코에 들어와 바로 오장육부를 통해서 그녀의 지친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느낌이 들었다.“휴.
“얼굴은 여전하네요? 피부 좋은 것 좀 봐.”차설아는 만질수록 기분이 좋아졌는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평소의 성도윤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낯선 사람에게는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온순한 고양이처럼 차설아가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저항하지 않고 있었다.머리를 만지고 있는데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던 그는 갑자기 그 깊은 눈을 떴는데 벌떡 일어나 차설아를 눕히고 본인은 그 위를 가로 탔다.그의 긴 손가락은 차설아의 목덜미를 졸랐는데 끊임없이 힘을 주며 말했다.“약골이라고요? 정신을 잃게 한 다음 마대에 쑤셔 넣겠다고요?”“당신... 콜록콜록!”차설아의 가느다란 목은 백조처럼 선이 완벽하고 연약해서 살짝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남자의 긴 손가락은 힘이 너무 센 나머지 그녀는 숨을 쉴 수도 없었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사실 중상을 입은 성도윤을 상대하기엔 그녀의 솜씨로는 식은 죽 먹기였지만 그녀는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남자다운 공격을 즐겼다.적어도 죽는 한이 있어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그가 약골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그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좋아질 가능성이 있었다.“말해요, 목적이 뭐죠?”성도윤은 차설아가 거의 질식해 정신을 잃으려 하자 끝내 긴 손가락을 떼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콜록, 콜록콜록!”차설아는 크게 숨을 쉬었고 붉게 상기된 볼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운 웃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래, 이게 내가 알던 성도윤이지, 당당한 성대 그룹 대표, 해안의 절대적인 권위자 말이에요!”“내가 하마터면 당신 목숨을 앗아 갈 뻔했는데 무섭지도 않아요?”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고 그의 흑 보석처럼 환한 눈매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조각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그는 원래도 어리둥절했는데 여자의 방자한 웃음이 그를 더욱 의심하게 만들었다.“당연히 두렵지 않죠, 당신이 날 죽이지
성도윤 눈의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내가 당신이랑 무슨 관계인데요? 왜 당신은 이렇게 힘을 들여서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려고 하는 건데요? 당신이 이렇게 나를 몰래 빼돌리면 얼마나 큰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지는 알아요?”“당신이 나을 수만 있다면 난 어떤 결과를 감수하든 상관없어요.”차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서은아나 소영금한테 성도윤을 옮긴 걸 들키면 나중에 얼마나 귀찮을지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하지만 민이 이모는 제대로 치료하려면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그녀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볼 수밖에는.“흥,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 관계에 대해서는 계속 언급을 회피하네요? 나는 당신을 믿지 않을 거예요. 분명 이상한 점이 있어.”성도윤이 현재 유일하게 신뢰하는 사람은 서은아뿐이었다.“당신이 나를 은아 곁으로 돌려보내 준다면 이번에는 용서할게요.”“미안하지만 그 요구는 들어줄 수 없어요.”차설아는 몸을 일으켜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당신은 지금 내 사람이에요. 내가 당신을 빼앗아 왔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해요. 도망치려 하지 말고 외부와 연락하려고도 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놓아줄 생각 없으니까.”“빌어먹을!”성도윤은 화가 났다.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그에게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말을 걸지 못했다.“그렇다면... 그냥 같이 죽죠.”남자는 말을 마치고 여자의 방향을 향해 호되게 공격했다.하지만 그는 지금 두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팔과 다리 부상도 낫지 않아 공격은커녕 차설아의 품에 안겨버렸다.“푸, 우리 서방님,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다음에... 다음에 내가 다시 찾아올게요!”차설아는 웃음을 참으며 강아지 만지듯 품에 안긴 남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 후 자상하게 솜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얌전히 자고 있어요, 내가 옆방에 있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차설아, 죽여버릴 거야!”성도윤은 완전히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