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온 소영금은 이 장면을 보자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소영금의 뒤에는 그녀가 성도윤에게 직접 골라준 하녀 려윤도 있었다.갑자기 들어온 사람 때문에 로맨틱한 분위기가 깨지자 서은아는 화를 내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소영금과 시선이 마주치자, 서은아는 재빨리 성도윤에게서 떨어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아… 아주머니,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어요!”서은아가 성진과 힘을 합쳐 뇌신경외과 의사에게 뇌물을 줘서 성도윤에게 기억 삭제 개두술을 한 후로부터 줄곧 불안감에 사무쳤고 누구를 봐도 불안했다.“내 아들이 입원했는데 엄마라는 사람이 와서 보면 안 돼?”소영금은 미간을 찌푸린 채 화를 내며 말했다.그는 서은아가 일 처리하는 방식에 상당히 불만족스러웠기에 바로 서은아를 나무라기 시작했다.“넌 정말 대단하구나. 내 아들이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꼬박 나를 일주일 동안 속이고 있었다니 말이야. 넌 내가 이 일주일 동안 미친 듯이 아들을 찾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비록 지금의 성도윤은 보기에는 별로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지만 항상 아들을 아끼던 소영금은 성도윤이 깁스도 하고 붕대도 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자신이 중상을 입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죄송해요. 아주머니. 저도 그때 너무 당황스러워서 많은 생각을 미처 못했어요. 게다가 아주머니가 알면 걱정하실까 봐 그래서…”“이런 변명 따위는 하지 마. 분명히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거지? 설마 네가 우리 도윤이를 이 정도로 해친 거야?”“아니에요. 전…”서은아는 소영금이 여러 번 진지하게 질문하자 어떻게 말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래서 소영금은 점점 더 의심이 갔다.그러자 성도윤이 눈썹을 찡그리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어머니, 저를 보았으면 됐잖아요. 왜 은아에게 화를 내시는 거예요.”소영금은 살짝 놀랐고 성도윤과 서은아를 엇갈아 보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도윤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네가 언제부
려윤은 가늘고 보드라운 손으로 성도윤의 손목의 맥을 짚었고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어때? 도윤이가 심각한 상태야?”옆에 서 있던 소영금도 려윤이 미간을 찌푸리자 덩달아서 마음이 조였다.려윤은 대략 1분 정도 진찰한 후에야 손을 옮기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도윤 도련님의 맥은 실처럼 가늘고 급하고 아주 혼란스러워요. 전형적인 심근경색과 뇌사죠. 특히 뇌에...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아요. 상황이 좋지 않아요.”“뇌에... 뇌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고?”그렇게 아끼던 아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랐던 소영금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성도윤을 바라보았다.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서은아는 흥분한 어조로 려윤에게 소리쳤다.“나이도 젊어 보이는 아가씨가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죠. 병원의 전문가가 방금 준 진단서에요. 도윤 씨의 몸 상태는 지금 안정되었다고 했는데 무슨 심근경색과 뇌사라고 하는 거예요? 도윤 씨가 정말 그렇게 되기를 저주하는 거죠?”려윤은 나이가 어렸지만 성격은 차분했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이건 제가 한의사의 관점에서 진단한 결과예요. 서은아 씨가 정확하지 않다고 느끼시면 병원을 바꿔서 성도윤 씨가 다른 의사한테서 전신 검사를 받게 해줘요. 그러면 더 공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겠죠.”“그게 말은 쉽죠. 도윤 씨가 지금 아직 몸도 채 회복되지 않았는데 또 병원을 옮기면 그를 해치는 것이잖아요!”서은아는 절대 성도윤이 병원을 옮기게 할 수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와 성진이 저지른 그 일은 들킬 것이고 그녀와 성진은 아마도 완전히 끝장날 것 같았다.“서은아 씨, 제 능력을 믿으세요. 도윤 도련님의 맥은 정말 이상해요. 병원을 옮기지 않더라고 해도 한의약으로 몸을 회복해야 해요. 이러는 건 거절할 이유가 없겠죠?”려윤은 자신의 중요성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서은아가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서은아가 계속 거절하려면 분명히 무리수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서은아는 그제야 눈앞에 아직 젊은 려윤이 정말 실력이
려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녀의 예쁜 얼굴에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이분의 의술은 정말 너무 뛰어나요. 심지어 우리 아버지 려명호보다 더 훌륭해요. 서은아 씨, 이분은 어디에 계시는지 아세요? 저를 이분께 만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세요.”“이...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서은아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차설아, 네 이놈... 정말 예사롭지 않은 여자야. 이토록 마음이 넓다니. 나와 성도윤씨를 도와주겠다 하고 신기한 약 처방만 남기고 사라진다고... 대단하네.’“그게 무슨 불가능할 수 있겠어요. 도윤 도련님께서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했기에 지금 도련님을 구할 수 있는 귀한 분을 만나게 된 거죠. 장담하건대 도윤 도련님께서 이 약을 세 번만 열심히 드시면 분명 다시 건강을 되찾을 것이고 완쾌하실 겁니다.”려윤은 눈에 빛이 반짝이며 유일무이한 처방을 칭찬하고 있었다.소영금은 그제야 안색이 조금 좋아졌고 서은아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보아하니 너도 수고가 많았구나. 도윤이를 위해 그렇게 귀한 분도 찾아주고.”서은아는 어색한 듯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얼버무렸다.“그... 그냥 우연일 뿐이에요. 도윤 씨가 운이 좋은 거죠.”려윤은 쭈글쭈글한 처방을 보고 입술을 오므리며 천진난만한 말투로 말했다.“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건 이렇게 대단한 약 처방인데... 서은아 씨는 왜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거죠? 도윤 씨가 빨리 나으면 좋지 않나요?”“그게...”서은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말문이 막혔다.서은아는 려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마음속으로 려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이 빌어먹을 년, 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소영금은 서은아가 많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가볍게 기침하며 수습하려 했다.“됐어. 나도 은아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신중하게 처리했다고 봐. 약을 절대 함부로 먹어서는 안 돼.”“네네. 맞아요! 아주머니, 역시 아주머니께서 저
소영금이 이렇게 말하자 서은아는 깜짝 놀랐다.서은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급하게 말했다.“아주머니, 그게 아니라... 사실 이 약 처방을 준 사람이 신분이 너무 특별해서 그 사람을 도윤 씨에게 접근 못 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게 무슨 말이야?”소영금은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이 도윤을 구하고 싶어 하는데 왜 도윤에게 접근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 거지? 모순 되잖아.’휴!서은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성도윤을 힐끗 쳐다본 뒤 소영금에게 귓속말로 모든 것을 고백했다.소영금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없이 손가락을 오므리며 마음이 복잡해졌다.“됐어. 이 처방의 내력이 분명하지 않으니 그렇게 힘들여서 그 사람을 되찾을 필요가 없어. 만약 그 사람이 지금 먼저 도윤한테 좀 도움을 주고 후에 도윤이를 해치면 그때 가서 곤란하게 될 것이야.”“아주머니 말씀이 맞아요. 저도 그 사람이 그렇게 우리를 해칠까 봐 감히 이 처방을 쓰지 못한 거죠. 결국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아무 일도 없이 우리한테 좋은 일을 하는 건 분명히 엉큼하게 다른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그래. 찾지 말자. 찾지 말자.”서영금은 서은아와 함께 연기를 하는 것처럼 서로 맞장구를 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다.려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즉시 이 처방의 주인이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대답했다.“사실 이 처방도 그렇게 신기한 건 아니죠. 몇 가지 약재를 적절히 배합하면 목숨을 구하는 것이고 부적절하게 배합하면 사람을 해치는 것이죠. 이 약을 써보지 않은 이상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 없죠.”“...”성도윤은 입술을 오므린 채 말이 없었고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성도윤은 더더욱 바보가 아니었기에 세 여자의 서투른 연기를 이내 발견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라는 사람이 그에 있어서 단순한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던 친구뿐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됐어요. 시끄러워요. 좀 피곤하니까 나가
성도윤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그는 자기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점점 더 확신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이 어쩌면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던 차설아와 관련이 있겠다고 추측했다.서은아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점점 더 불안해졌다.“아, 아니야. 넌 나만 기억하면 돼.”병실 밖을 서성거리는 소영금의 표정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그러자 려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아들이 갑자기 저렇게 되었는데 걱정이 안 되겠어?”소영금은 엎어진 말벌 집처럼 눈에 보이는 게 없이 심한 말을 뱉어댔다. 그녀는 려윤을 노려보며 말했다.“아까 너도 눈치챘어? 도윤이의 상태가 매우 이상해.”“도윤 도련님의 상황은 확실히 좋지 않아요. 특히 머리에 큰 타박상을 입은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다른 의사에게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겠어요.”“그렇지? 너도 도윤이의 머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의심하는 건...”소영금은 여기까지 말하고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뭘 의심하는 거죠?”려윤도 덩달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소영금은 정색하며 말했다.“난 도윤이가 귀신에 들린 것 같아. 서은아가 한 짓인 게 틀림없고 서은아는 지금 도윤이를 통제하고 있지. 아니면 도윤이가 지금처럼 서은아의 말만 듣고 그녀를 그렇게 챙겨주고 있을 수가 없어. 전혀 말도 안 돼.”“헐... 귀신에 들렸다고요?”려윤은 어이가 없었고 일이 점점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귀신에 들리든 아니든 내 아들은 절대 서은아와 함께 있을 수 없어. 만약에 서은아가 성진 그 자식의 앞잡이라면 모든 것이 끝장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서은아를 다른 곳으로 떼어놓아야 해. 대놓고 그렇게 한다면 도윤이는 분명히 동의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래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소영금은 사려 깊은 사람이라서 가능한 모든 위험을 예상해야 했다.성도윤과 서은아 사이는 정말 이상했기에 서은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밤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마치 귀신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질주하며 숲속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차설아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멋지게 빠른 속도로 90도 가까운 커브를 가볍게 지나갔다.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반듯이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약효 때문에 눈을 질끈 감은 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차의 흔들림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정말 지독한 여자야. 자기 친아들에게 이렇게 심한 수면제를 먹였다니. 바보가 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차설아는 속으로 원망하며 신지 요양병원의 원장님인 오성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 원장님, 이제 곧 도착해요. 요양병원에 잠시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폐를 끼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전화기 너머로 오성문은 매우 열정적이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계집애야. 아저씨한테 무슨 예의를 갖추는 거야. 그 당시 나와 네 아버지는 의형제였고 네 아버지는 신지 요양병원 주식도 가지고 있어. 한동안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이곳에 살겠다고 해도 아저씨는 두 팔 벌려 환영이지.”“그러면 감사합니다. 아저씨.”오성문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신지 요양병원은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고급 요양병원이었고 특수 계층 사람들만 있을 수 있는 곳이었고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았기에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이곳은 식물들이 많았고 환경이 우아한 데다 공기 중의 음이온 함량이 매우 높으며 다양한 귀중한 약초와 현재 가장 선진적인 의료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가장 중요한 건 신지 요양병원의 원장님인 오성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적으로 차설아를 지지하고 파산 위험을 무릅쓰고 미리 요양병원을 정리해서 성도윤만을 위해 봉사하려고 했다.“도윤 씨, 걱정하지 마. 지금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도윤 씨를 반드시 치료 해줄게.”차설아는 성도윤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맹세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차가 곧 신지 요양병원의 입구에 도착했고 중국식 정원이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민이 이모도 모든 것이 이렇게 공교롭고 순조로울 줄은 몰랐다.‘어쩌면 하늘의 뜻이겠지. 하늘이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하고 아직 풀리지 않은 갈등이 있느니 두 사람의 운명을 다시 묶어 놓은 거겠지.’오성문도 열정적으로 말했다.“설아야, 너희 상황은 민이 이모가 다 알려줬어. 걱정하지 마. 요양병원은 최선을 다해서 성도윤 씨가 최대한 빨리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서 쉬어. 너희들을 위해 서쪽에 있는 스위트룸을 준비했어. 그 방은 가장 따뜻하고 집 분위기가 나는 방이야. 안에서 자유롭게 요리하고 쉬면서 책을 읽거나 밤에 별을 보며 반신욕도 할 수 있어.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질 거야.”신지 요양병원의 부원장님이자 오성문의 아내인 남아름이 친절하게 소개했다.“네. 아주머니. 폐를 끼치게 되었네요.”차설아는 고마운 표정으로 우아하고 온화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남아름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이런 모습을 보고 엄청나게 기뻐하실 것이다.“바보 같은 계집애. 아주머니랑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빨리 돌아가서 푹 쉬어. 이제 시간 나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자꾸나.”남아름은 마음 아프고 불쌍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으나 결국에는 조용히 가서 차설아를 안아주었다.요양병원 직원의 안내로 차설아는 아담한 정원을 지나 서쪽 스위트룸으로 향했다.약효가 채 가시지 않았기에 성도윤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스위트룸의 큰 침대에 편안하게 눕혀졌다.차설아는 주위를 둘러보니 나무로 된 인테리어와 곳곳에 우거진 식물들이 있었다. 정말 남아름의 말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나머지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차설아가 창문을 열자 밤바람이 서서히 하얀 색 커튼을 스치고 있었고 마치 비에 물든 것처럼 축축한 맑은 공기는 코에 들어와 바로 오장육부를 통해서 그녀의 지친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느낌이 들었다.“휴.
“얼굴은 여전하네요? 피부 좋은 것 좀 봐.”차설아는 만질수록 기분이 좋아졌는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평소의 성도윤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낯선 사람에게는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온순한 고양이처럼 차설아가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저항하지 않고 있었다.머리를 만지고 있는데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던 그는 갑자기 그 깊은 눈을 떴는데 벌떡 일어나 차설아를 눕히고 본인은 그 위를 가로 탔다.그의 긴 손가락은 차설아의 목덜미를 졸랐는데 끊임없이 힘을 주며 말했다.“약골이라고요? 정신을 잃게 한 다음 마대에 쑤셔 넣겠다고요?”“당신... 콜록콜록!”차설아의 가느다란 목은 백조처럼 선이 완벽하고 연약해서 살짝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남자의 긴 손가락은 힘이 너무 센 나머지 그녀는 숨을 쉴 수도 없었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사실 중상을 입은 성도윤을 상대하기엔 그녀의 솜씨로는 식은 죽 먹기였지만 그녀는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남자다운 공격을 즐겼다.적어도 죽는 한이 있어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그가 약골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그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좋아질 가능성이 있었다.“말해요, 목적이 뭐죠?”성도윤은 차설아가 거의 질식해 정신을 잃으려 하자 끝내 긴 손가락을 떼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콜록, 콜록콜록!”차설아는 크게 숨을 쉬었고 붉게 상기된 볼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운 웃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래, 이게 내가 알던 성도윤이지, 당당한 성대 그룹 대표, 해안의 절대적인 권위자 말이에요!”“내가 하마터면 당신 목숨을 앗아 갈 뻔했는데 무섭지도 않아요?”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고 그의 흑 보석처럼 환한 눈매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조각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그는 원래도 어리둥절했는데 여자의 방자한 웃음이 그를 더욱 의심하게 만들었다.“당연히 두렵지 않죠, 당신이 날 죽이지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