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성도윤이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지 몰랐다.‘그래서... 그래서 정말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날 원망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고?’“맞아요. 개두술이죠. 설아 씨가 깨어나는 즉시 제가 말했잖아요. 수술 때문에 그는 일부 기억을 잃게 되었죠. 만약 강제로 그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면 뇌에 부담이 가중할 수 있어요. 제 생각에는... 그래서 갑자기 위험에 빠졌던 것 같아요.”“...”차설아는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진의 몇 마디가 그녀의 의심을 사실로 만들었다.성도윤은 정말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몇십 년 전 막장 드라마처럼 다른 사람은 다 기억하는데 유독 그녀만 기억나지 않았다.“그래. 바로 그 원인이지. 내가 진작에 성도윤 씨를 자극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일이 이렇게 되니 만족해? 남을 해칠 줄밖에 모르는 년!”서은아는 마침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고 더욱 당당하게 차설아에게 호통쳤다.하지만 성진이 서은아를 노려보자,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 내가 너무 당돌했어.”차설아는 허리 굽혀 사과의 인사를 했다. 항상 강인하던 그녀는 쉽게 남에게 사과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사과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는 그녀가 줄곧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서은아였다. 차설아가 지금 얼마나 자책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서은아에게 사과해도 소용없죠. 목숨이 위태로운 건 어차피 서은아가 아니에요...”성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복잡한 시선으로 말했다.“정말 자책할 거면 다시는 도윤 형님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설아 씨가 도윤 형님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형님도 위험에 처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지금 형님 마음속에는 서은아밖에 없고 그녀와 매우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어요. 그들 둘이 있으면 매우 행복할 것이에요.”“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난 도윤 씨를 떠나지 않을 거야.”차설아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뭐라고요?”
“설아 씨가 저와 도윤 씨를 도와준다고요?”서은아는 먼저 깜짝 놀랐고 마치 무슨 허튼소리를 들은 것처럼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차설아 씨, 제가 그렇게 바보처럼 보여요? 그런 거짓말을 믿을 줄 알아요?”차설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제가 서은아 씨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해야죠?”“뭐... 무슨 뜻이죠?”“제 말은 만약에 제가 정말로 서은아 씨와 도윤 씨를 위해서 다툰다면 서은아 씨는 어쩌면 저와 다툴 자격도 없죠. 그러니 전 이 일로 서은아 씨와 심술을 부릴 필요도 없다는 말이죠.”“이런!”서은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화가 나기는 났지만 차설아의 말에 일리가 있었기에 서은아는 반박할 수 없었다.성진은 복잡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 차갑게 물었다.“성도윤이 나아진다는 게 어느 정도 나아지는 걸 말하죠?”“이건 말하기 좀 곤란해.”차설아는 시선을 돌려 성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떠보는 중이었다. 차설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적어도 그가 남에게 피해를 볼 일은 없을 정도여야 해.”서은아는 한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차설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비록 저와 차설아 씨는 적이지만 도윤 씨를 정말 낫게 하고 싶은 거라면 전 차설아 씨와 화해하겠어요.”차설아는 서은아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지만 잡을 생각은 없었고 차갑게 말했다.“화해는 됐고 서은아 씨가 좀 감정 기복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한테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아요.”서은아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았다.“좋아요. 도윤 씨가 나아질 수만 있다면 전 뭐든 할 수 있어요.”두 여자가 마침내 짧은 평화를 되찾았고 병실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주치의가 밖으로 나와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성도윤 씨는 지금 별문제가 없어요. 그를 더 많이 쉬게 하고 기분 좋게 해주세요. 미리 말하는 데 자극해서는 절대 안 돼요.”“의사 선생님, 고마
성진은 긴 손가락으로 서은아의 턱을 꽉 잡고 들어 올리면서 음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비아냥거렸다.“이제 와서 사랑할 줄 아는 척해? 그 당시 개두술을 해서 성도윤이 차설아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려고 주장했던 사람이 너였고 차설아가 성도윤을 구했던 기억을 이식하려고 했던 사람도 너였지. 그때는 왜 성도윤이 나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난...”“너도나도 다 알다시피 개두술은 거짓에 불과했지. 성도윤이 차설아에 관한 기억을 지우는 것과 너를 그의 기억 속에 이식하는 게 바로 최종 목표였지. 넌 지금 이미 성도윤이 가장 믿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넌 아직 뭐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굳이 차설아까지 끌어들이려는 거야?”“미안해. 잘못 했어. 난...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어.서은아는 겁에 질려 조심스럽게 사과했다.한때 서은아도 오만방자한 명문의 아가씨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성도윤 외에는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성진 앞에서 그녀는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꼈다.한편으로 그의 손에는 너무 많은 약점이 잡혀 있었기에 그가 혹시 보복할까 봐 두려웠다.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성진이라는 남자는 너무 음흉하고 미쳤기 때문이었다.그는 개두술, 기억 이식 이런 모진 수법도 생각해 냈다. 이런 미친 사람을 건드리면 아마 바로 재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서은아는 조심스럽게 해명했다.“그 당시 상황은 너도 보았잖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차설아는 결코 죽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차설아가 그렇게 똑똑한데 들키면 너와 나는 모두 끝장날 거야. 그래서 내 생각에는... 차설아와 화해하는 척해서 그녀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기다렸던 거야.”“어찌 됐든 성도윤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지 못할 거야. 차설아가 마음이 많이 상해서 도윤 씨의 곁을 떠나면 우리에게는 더 좋지 않아?”이 말을 듣자 성진은 찡그렸던 미간은 조금 풀어졌다. 그는 서은아를 놓아주었고 변태처럼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넌 내가 생각했
이날 차설아는 갓 달인 한약을 들고 성도윤 병실 문을 열었다.병실 안에서는 성도윤과 서은아가 껌딱지처럼 다정하게 안고 있었다.“은아야, 내가 고민해 봤는데 이제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하면 우리 결혼하자!”성도윤은 긴 팔로 서은아의 어깨를 살짝 감싸고 턱을 그녀의 머리에 얹은 채 잘생긴 얼굴로 동경하는 표정을 지었다.“우리 결혼식이 따이띠에서 열렸으면 좋겠어. 그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푸른 해안선과 가장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있지. 네가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니 그곳에서 우리가 결혼하면 가장 좋을 거야.”서은아는 행복한 표정 대신 의아함이 가득했다.“퇴원하고 바로 결혼 한다고? 너무... 서두른 건 아닐까?”게다가 서은아는 바다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심지어 서은아는 바다를 가장 싫어했다. 햇볕도 쬐고 지루한 데다가 만약 태풍 날씨가 닥치면 너무 귀찮다고 생각했다.“전혀 서두르는 게 아니야.”성도윤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난 널 너무 사랑해서 지금이라도 당장 너랑 결혼하고 싶어. 1분 1초도 기다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너도 날 사랑하고 있잖아. 우린 함께 강도 뛰어들어서 생사를 함께 한 사이인데. 결혼을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돼.”“네 말도 맞는 것 같아.”서은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에 서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대로라면 서은아는 지금 이미 차설아를 완전히 이겼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런 승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서은아는 성도윤이 갑자기 기억을 회복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다.“어찌 됐든 넌 내 여자니까 도망갈 생각 마!”성도윤은 패기 넘치게 말하고는 서은아의 턱을 치켜들고 키스했다.성도윤은 병실 전체의 공기마저 끓어오를 정도로 매우 다정하면서도 뜨겁게 키스했다.“...”차설아는 원래 자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뜨겁게 키스하는 장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서은아는 서둘러 차설아를 내쫓으려 했다.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나랑 같은 날에 다쳤다고요?”“그게...”차설아는 표정이 굳어졌고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망했어. 잘못 말했어.’“어떻게 다쳤어요?”성도윤은 계속 추궁했다.“전... 그냥 길을 걷다가 부주의로 넘어졌어요.”차설아는 아무 이유나 말해서 재빨리 병실을 나갔다.사실 차설아는 성도윤이 자신을 알아차리는 걸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묵묵히 그의 곁에서 돌봐주다가 그가 몸이 다 나을 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오늘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더 이상 숨기려고 해도 아마 어려울 것 같았다...“갔어?”성도윤는 살짝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보내기 아까워? 방금 나를 너무 사랑해서 당장이라도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서은아는 속으로 아주 불안했고 그와 동시에 질투심이 가득했다.서은아는 성도윤의 목을 껴안고 적극적으로 키스를 하며 말했다.“그녀는 이미 떠났어. 이제 울 둘밖에 없다고.”“...”하지만 성도윤의 방금 열정은 이미 식어버렸고 그는 건성으로 서은아를 반겨 주었다.지금 그의 모든 생각은 약을 가져다주러 온 그 여자에게 있었다.차설아는 한약 달이는 솥 앞에 꼬박 네 시간 동안 기다린 후에야 손바닥만 한 작은 탕약 한 그릇을 만들었다.차설아는 재빨리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성도윤의 병실로 갔다.서은아는 그녀를 보자 또 강적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차설아보고 재빨리 약을 탁자 위에 놓고 떠나가라고 손짓했다.그러자 차설아는 살금살금 걸어 들어와 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바로 떠나려고 했다.약 냄새를 맡은 성도윤은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물었다.“이름은 뭐예요?”“...”차설아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아니. 약 바꾸는 사람 이름은 왜 물어보는 거야?”서은아는 영역표시를 하듯 성도윤의 손을 잡은 채 애교 섞인 말투로
“...”차설아는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말하지 않자 성도윤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그쪽 신분이 특수하기라도 하나요? 왜 이름도 밝히지 않는가요?”그는 또 한 번 차설아에게 몰아붙이며 기필코 답안을 얻어야 말겠다고 작정했다.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또박또박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제 이름은 차설아라고 해요. 혹시 성도윤 씨가 기억하시나요?”“차설아 씨,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서은아는 감정이 격해지자 차설아를 밀치면서 소리쳤다.서은아는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긴 느낌이 들었고 당장이라도 차설아와 대판 싸우고 싶었다.“차설아...”성도윤 차가운 표정으로 이 세 글자를 반복하여 중얼거리면서 사소한 기억이라도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다.차설아는 한편으로 허탈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성도윤 씨는 기억할 필요가 없어요. 분명히 기억할 수도 없을 거예요.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이죠. 저도 며칠 전에 병원에서 성도윤 씨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우리는 정말 모르는 사이에요?”성도윤의 차가운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다.그는 뇌 절제술이 아닌 개두술만 했기에 지금 심지어 이전보다 더 똑똑하고 현명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가 모르는 사이인 것 같지는 않게 느껴졌다.“네. 정말이에요. 저도 성도윤 씨와 함께 병원에 실려 왔어요. 저를 돌봐주던 간호사가 말하는데 성도윤 씨가 심하게 다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때 저도 제가 죽을 줄 알았어요. 저세상으로 갈 때 어쩌면 성도윤 씨와 함께 갈 수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차설아는 진지한 얼굴로 허튼소리를 했다.성도윤의 팔짱을 끼고 있던 서은아는 옆에서 듣다가 속으로 짜증이 났다.‘이 여자는 정말 헛소리만 치고 있네. 입만 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야.’하지만 성도윤은 열심히 듣고 있다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차설아는 성도윤과 일정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소탈하게 떠났다.민이 이모의 약은 정말 효과가 대단했다.성도윤은 겨우 한 그릇만 마셨는데 효과가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다. 다음날 깨어나 보니 상처가 덜 아팠고 정신이 아주 좋아졌다.“도윤 씨, 물 좀 마셔.”서은아는 성도윤에게 물 한 잔 따라주며 물컵 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조심스럽게 떠보기 시작했다.“도윤 씨가 그날에 퇴원하면 바로 나랑 결혼하겠다는 게 사실이야?”성도윤은 잔을 잡고 벽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느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당연하지.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해?”“며칠 동안 너무 정신이 없어서 불안해서 그러지 뭐.”서은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미래를 동경하기 시작했다.“사실 오래전부터 그날만을 기다려왔어. 우리 결혼식 장소는 아마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왜? 내 기억 속에는 네가 꿈꾸던 결혼식 장소는 따이띠라고 했어.”성도윤이 왜 이토록 따이띠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의 자잘한 기억 속에서 서은아는 따이띠에서 로맨틱한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들은 것 같았다.사실 이 기억도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다만 여자 주인공이 서은아가 아닌 차설아였을 뿐이었다.그동안 성도윤은 차설아가 말한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계획적으로 실현하고 싶었다.“아이고. 사람은 변하는 거잖아. 예전에는 따이띠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파리가 더 좋아. 파리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건 어때?”서은아는 바닷가 결혼식을 원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굳이 바닷가에서 결혼식을 하자고 고집하는 성도연을 보니 기필코 그의 기억에 뭔가 착오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다면 서은아는 그의 기억을 다시 바로잡아야 했다. 천천히 남의 기억은 지워버리고 자기 기억을 집어넣어야 했다.“말 좀 해봐 봐. 고대 성루 같은 곳에서 결혼식을 한다면 얼마나 로맨틱하겠어. 나도 공주처럼 분장하고 오랫동안 사랑했던 왕자님과 결혼하고 싶어...”서은아는
“뭐라고요? 이미 퇴원했다고요?”서은아는 조금 의아했고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이 여자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간다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야지.”서은아는 차설아가 전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성도윤이 다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지금 성도윤은 전혀 낫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도망쳤으니 정말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혹시 서은아 씨에요?”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제가 서은아예요. 무슨 일이죠?”서은아는 짜증이 난 상태였기에 눈꺼풀을 치켜들고 퉁명스럽게 물었다.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차설아가 갑자기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지자 서은아는 매우 불안했다. 왠지 이 여자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뭔가 큰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이 처방은 차설아 씨가 저보고 서은아 씨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성도윤 씨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효과가 뛰어나다고 했어요. 서은아 씨께서 이 처방에 따라 한약을 잘 달여주세요.”호사는 말하면서 네모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서은아에게 건네주었다.“저한테 준다고요?”서은아는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 차설아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서은아는 처방을 보았지만, 지렁이처럼 생긴 글씨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고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차설아가 도윤 씨를 치료하라고 이렇게 친절하게 이런 신기한 처방을 나한테 순순히 줄 리가 없을 텐데.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 처방은 분명 문제가 있을 거야. 어쩌면 독약 처방으로 일부러 날 해치려는 것일 수도 있어. 섣불리 사용해서는 절대 안 돼!’서은아는 소심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성도윤의 병실로 돌아왔다.성도윤은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청력은 매우 예민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그의 차갑던 얼굴은 이내 밝아졌고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었다.“드디어 저에게 약을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서은아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짜증이 났지만 화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