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 씨, 왜 그러는 거야. 도윤 씨, 날 놀라게 하지 말라고... 말 좀 해봐!”서은아도 그제야 성도윤이 뭔가 수상쩍다는 걸 알아차렸다. 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창백해졌고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심박수가 너무 빨라요. 의사, 당장 의사를 불러요!”차설우는 심장 박동기에 나타난 심장 박동이 심한 기복이 있고 매우 불안정한 걸 발견했다. 마치 이 남자의 생명처럼 기복이 심했고 매우 불안정했다.주치의가 달려와 성도윤에게 바로 구급치료를 하기 시작했다.“두 분께서 먼저 나가주세요. 환자의 심박수와 혈압은 극도로 불안정해요. 지금 당장 구급치료가 필요해요.”차설아와 서은아도 그 말을 듣고 재빨리 병실을 떠났다.“이런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도대체 도윤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직도 도윤 씨를 더 해치고 싶어?”서은아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차설아를 때리면서 눈물을 흘렸다.“너만 안 나타났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의사도 도윤 씨는 이미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했고 며칠만 있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했어. 하지만 네가 나타나자마자 심박수가 이상해지고 생명이 위독해져 버렸어. 넌 정말 도윤 씨의 액운 그 자체야. 제발 좀 먼 곳으로 꺼져 줄래?”“저...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차설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성도윤의 병실을 바라보며 눈에는 깊은 서운함과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점점 하늘과의 거래가 조금씩 통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한 번이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는데 두 번, 세 번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우연의 일치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서은아의 말이 맞았어. 난 어쩌면 정말로 성도연의 액운일 수도 있어. 그와 가까이에 있기만 하면 그는 위험에 처하니까 말이야.’“내가 아까 말했지. 도윤 씨의 상처는 면봉으로 연고를 발라야 한다고! 넌 왜 굳이 손가락으로 발랐던 거야. 도윤 씨는 지금 바람을 맞아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몸이 허약해. 분명히 네 손가락에 묻은 세균 때문에 도윤 씨
그녀는 성도윤이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지 몰랐다.‘그래서... 그래서 정말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날 원망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고?’“맞아요. 개두술이죠. 설아 씨가 깨어나는 즉시 제가 말했잖아요. 수술 때문에 그는 일부 기억을 잃게 되었죠. 만약 강제로 그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면 뇌에 부담이 가중할 수 있어요. 제 생각에는... 그래서 갑자기 위험에 빠졌던 것 같아요.”“...”차설아는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진의 몇 마디가 그녀의 의심을 사실로 만들었다.성도윤은 정말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몇십 년 전 막장 드라마처럼 다른 사람은 다 기억하는데 유독 그녀만 기억나지 않았다.“그래. 바로 그 원인이지. 내가 진작에 성도윤 씨를 자극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일이 이렇게 되니 만족해? 남을 해칠 줄밖에 모르는 년!”서은아는 마침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고 더욱 당당하게 차설아에게 호통쳤다.하지만 성진이 서은아를 노려보자,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 내가 너무 당돌했어.”차설아는 허리 굽혀 사과의 인사를 했다. 항상 강인하던 그녀는 쉽게 남에게 사과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사과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는 그녀가 줄곧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서은아였다. 차설아가 지금 얼마나 자책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서은아에게 사과해도 소용없죠. 목숨이 위태로운 건 어차피 서은아가 아니에요...”성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복잡한 시선으로 말했다.“정말 자책할 거면 다시는 도윤 형님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설아 씨가 도윤 형님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형님도 위험에 처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지금 형님 마음속에는 서은아밖에 없고 그녀와 매우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어요. 그들 둘이 있으면 매우 행복할 것이에요.”“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난 도윤 씨를 떠나지 않을 거야.”차설아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뭐라고요?”
“설아 씨가 저와 도윤 씨를 도와준다고요?”서은아는 먼저 깜짝 놀랐고 마치 무슨 허튼소리를 들은 것처럼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차설아 씨, 제가 그렇게 바보처럼 보여요? 그런 거짓말을 믿을 줄 알아요?”차설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제가 서은아 씨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해야죠?”“뭐... 무슨 뜻이죠?”“제 말은 만약에 제가 정말로 서은아 씨와 도윤 씨를 위해서 다툰다면 서은아 씨는 어쩌면 저와 다툴 자격도 없죠. 그러니 전 이 일로 서은아 씨와 심술을 부릴 필요도 없다는 말이죠.”“이런!”서은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화가 나기는 났지만 차설아의 말에 일리가 있었기에 서은아는 반박할 수 없었다.성진은 복잡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면 차갑게 물었다.“성도윤이 나아진다는 게 어느 정도 나아지는 걸 말하죠?”“이건 말하기 좀 곤란해.”차설아는 시선을 돌려 성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떠보는 중이었다. 차설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적어도 그가 남에게 피해를 볼 일은 없을 정도여야 해.”서은아는 한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차설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비록 저와 차설아 씨는 적이지만 도윤 씨를 정말 낫게 하고 싶은 거라면 전 차설아 씨와 화해하겠어요.”차설아는 서은아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지만 잡을 생각은 없었고 차갑게 말했다.“화해는 됐고 서은아 씨가 좀 감정 기복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한테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아요.”서은아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았다.“좋아요. 도윤 씨가 나아질 수만 있다면 전 뭐든 할 수 있어요.”두 여자가 마침내 짧은 평화를 되찾았고 병실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주치의가 밖으로 나와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성도윤 씨는 지금 별문제가 없어요. 그를 더 많이 쉬게 하고 기분 좋게 해주세요. 미리 말하는 데 자극해서는 절대 안 돼요.”“의사 선생님, 고마
성진은 긴 손가락으로 서은아의 턱을 꽉 잡고 들어 올리면서 음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비아냥거렸다.“이제 와서 사랑할 줄 아는 척해? 그 당시 개두술을 해서 성도윤이 차설아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려고 주장했던 사람이 너였고 차설아가 성도윤을 구했던 기억을 이식하려고 했던 사람도 너였지. 그때는 왜 성도윤이 나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난...”“너도나도 다 알다시피 개두술은 거짓에 불과했지. 성도윤이 차설아에 관한 기억을 지우는 것과 너를 그의 기억 속에 이식하는 게 바로 최종 목표였지. 넌 지금 이미 성도윤이 가장 믿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넌 아직 뭐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굳이 차설아까지 끌어들이려는 거야?”“미안해. 잘못 했어. 난...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어.서은아는 겁에 질려 조심스럽게 사과했다.한때 서은아도 오만방자한 명문의 아가씨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성도윤 외에는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성진 앞에서 그녀는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꼈다.한편으로 그의 손에는 너무 많은 약점이 잡혀 있었기에 그가 혹시 보복할까 봐 두려웠다.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성진이라는 남자는 너무 음흉하고 미쳤기 때문이었다.그는 개두술, 기억 이식 이런 모진 수법도 생각해 냈다. 이런 미친 사람을 건드리면 아마 바로 재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서은아는 조심스럽게 해명했다.“그 당시 상황은 너도 보았잖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차설아는 결코 죽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차설아가 그렇게 똑똑한데 들키면 너와 나는 모두 끝장날 거야. 그래서 내 생각에는... 차설아와 화해하는 척해서 그녀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기다렸던 거야.”“어찌 됐든 성도윤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지 못할 거야. 차설아가 마음이 많이 상해서 도윤 씨의 곁을 떠나면 우리에게는 더 좋지 않아?”이 말을 듣자 성진은 찡그렸던 미간은 조금 풀어졌다. 그는 서은아를 놓아주었고 변태처럼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넌 내가 생각했
이날 차설아는 갓 달인 한약을 들고 성도윤 병실 문을 열었다.병실 안에서는 성도윤과 서은아가 껌딱지처럼 다정하게 안고 있었다.“은아야, 내가 고민해 봤는데 이제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하면 우리 결혼하자!”성도윤은 긴 팔로 서은아의 어깨를 살짝 감싸고 턱을 그녀의 머리에 얹은 채 잘생긴 얼굴로 동경하는 표정을 지었다.“우리 결혼식이 따이띠에서 열렸으면 좋겠어. 그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푸른 해안선과 가장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있지. 네가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니 그곳에서 우리가 결혼하면 가장 좋을 거야.”서은아는 행복한 표정 대신 의아함이 가득했다.“퇴원하고 바로 결혼 한다고? 너무... 서두른 건 아닐까?”게다가 서은아는 바다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심지어 서은아는 바다를 가장 싫어했다. 햇볕도 쬐고 지루한 데다가 만약 태풍 날씨가 닥치면 너무 귀찮다고 생각했다.“전혀 서두르는 게 아니야.”성도윤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난 널 너무 사랑해서 지금이라도 당장 너랑 결혼하고 싶어. 1분 1초도 기다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너도 날 사랑하고 있잖아. 우린 함께 강도 뛰어들어서 생사를 함께 한 사이인데. 결혼을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돼.”“네 말도 맞는 것 같아.”서은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에 서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대로라면 서은아는 지금 이미 차설아를 완전히 이겼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런 승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서은아는 성도윤이 갑자기 기억을 회복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다.“어찌 됐든 넌 내 여자니까 도망갈 생각 마!”성도윤은 패기 넘치게 말하고는 서은아의 턱을 치켜들고 키스했다.성도윤은 병실 전체의 공기마저 끓어오를 정도로 매우 다정하면서도 뜨겁게 키스했다.“...”차설아는 원래 자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뜨겁게 키스하는 장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서은아는 서둘러 차설아를 내쫓으려 했다.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나랑 같은 날에 다쳤다고요?”“그게...”차설아는 표정이 굳어졌고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망했어. 잘못 말했어.’“어떻게 다쳤어요?”성도윤은 계속 추궁했다.“전... 그냥 길을 걷다가 부주의로 넘어졌어요.”차설아는 아무 이유나 말해서 재빨리 병실을 나갔다.사실 차설아는 성도윤이 자신을 알아차리는 걸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묵묵히 그의 곁에서 돌봐주다가 그가 몸이 다 나을 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오늘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더 이상 숨기려고 해도 아마 어려울 것 같았다...“갔어?”성도윤는 살짝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보내기 아까워? 방금 나를 너무 사랑해서 당장이라도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서은아는 속으로 아주 불안했고 그와 동시에 질투심이 가득했다.서은아는 성도윤의 목을 껴안고 적극적으로 키스를 하며 말했다.“그녀는 이미 떠났어. 이제 울 둘밖에 없다고.”“...”하지만 성도윤의 방금 열정은 이미 식어버렸고 그는 건성으로 서은아를 반겨 주었다.지금 그의 모든 생각은 약을 가져다주러 온 그 여자에게 있었다.차설아는 한약 달이는 솥 앞에 꼬박 네 시간 동안 기다린 후에야 손바닥만 한 작은 탕약 한 그릇을 만들었다.차설아는 재빨리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성도윤의 병실로 갔다.서은아는 그녀를 보자 또 강적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차설아보고 재빨리 약을 탁자 위에 놓고 떠나가라고 손짓했다.그러자 차설아는 살금살금 걸어 들어와 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바로 떠나려고 했다.약 냄새를 맡은 성도윤은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물었다.“이름은 뭐예요?”“...”차설아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아니. 약 바꾸는 사람 이름은 왜 물어보는 거야?”서은아는 영역표시를 하듯 성도윤의 손을 잡은 채 애교 섞인 말투로
“...”차설아는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말하지 않자 성도윤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그쪽 신분이 특수하기라도 하나요? 왜 이름도 밝히지 않는가요?”그는 또 한 번 차설아에게 몰아붙이며 기필코 답안을 얻어야 말겠다고 작정했다.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또박또박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제 이름은 차설아라고 해요. 혹시 성도윤 씨가 기억하시나요?”“차설아 씨,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서은아는 감정이 격해지자 차설아를 밀치면서 소리쳤다.서은아는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긴 느낌이 들었고 당장이라도 차설아와 대판 싸우고 싶었다.“차설아...”성도윤 차가운 표정으로 이 세 글자를 반복하여 중얼거리면서 사소한 기억이라도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다.차설아는 한편으로 허탈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성도윤 씨는 기억할 필요가 없어요. 분명히 기억할 수도 없을 거예요.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이죠. 저도 며칠 전에 병원에서 성도윤 씨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우리는 정말 모르는 사이에요?”성도윤의 차가운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다.그는 뇌 절제술이 아닌 개두술만 했기에 지금 심지어 이전보다 더 똑똑하고 현명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가 모르는 사이인 것 같지는 않게 느껴졌다.“네. 정말이에요. 저도 성도윤 씨와 함께 병원에 실려 왔어요. 저를 돌봐주던 간호사가 말하는데 성도윤 씨가 심하게 다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때 저도 제가 죽을 줄 알았어요. 저세상으로 갈 때 어쩌면 성도윤 씨와 함께 갈 수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차설아는 진지한 얼굴로 허튼소리를 했다.성도윤의 팔짱을 끼고 있던 서은아는 옆에서 듣다가 속으로 짜증이 났다.‘이 여자는 정말 헛소리만 치고 있네. 입만 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야.’하지만 성도윤은 열심히 듣고 있다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차설아는 성도윤과 일정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소탈하게 떠났다.민이 이모의 약은 정말 효과가 대단했다.성도윤은 겨우 한 그릇만 마셨는데 효과가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다. 다음날 깨어나 보니 상처가 덜 아팠고 정신이 아주 좋아졌다.“도윤 씨, 물 좀 마셔.”서은아는 성도윤에게 물 한 잔 따라주며 물컵 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조심스럽게 떠보기 시작했다.“도윤 씨가 그날에 퇴원하면 바로 나랑 결혼하겠다는 게 사실이야?”성도윤은 잔을 잡고 벽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느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당연하지.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해?”“며칠 동안 너무 정신이 없어서 불안해서 그러지 뭐.”서은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미래를 동경하기 시작했다.“사실 오래전부터 그날만을 기다려왔어. 우리 결혼식 장소는 아마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왜? 내 기억 속에는 네가 꿈꾸던 결혼식 장소는 따이띠라고 했어.”성도윤이 왜 이토록 따이띠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의 자잘한 기억 속에서 서은아는 따이띠에서 로맨틱한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들은 것 같았다.사실 이 기억도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다만 여자 주인공이 서은아가 아닌 차설아였을 뿐이었다.그동안 성도윤은 차설아가 말한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계획적으로 실현하고 싶었다.“아이고. 사람은 변하는 거잖아. 예전에는 따이띠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파리가 더 좋아. 파리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건 어때?”서은아는 바닷가 결혼식을 원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굳이 바닷가에서 결혼식을 하자고 고집하는 성도연을 보니 기필코 그의 기억에 뭔가 착오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다면 서은아는 그의 기억을 다시 바로잡아야 했다. 천천히 남의 기억은 지워버리고 자기 기억을 집어넣어야 했다.“말 좀 해봐 봐. 고대 성루 같은 곳에서 결혼식을 한다면 얼마나 로맨틱하겠어. 나도 공주처럼 분장하고 오랫동안 사랑했던 왕자님과 결혼하고 싶어...”서은아는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
[재벌가 도련님과 암컷 돼지의 은밀한 관계!][사도현의 정신 상태 우려스러워...]사도현의 부드러운 노랫소리 덕분에 암컷 돼지는 첫 번째 새끼 돼지를 순리롭게 낳았다.“드디어 아기를 낳았어! 돼지야, 너는 정말 멋진 엄마야. 다른 아기도 힘내서 낳자!”사도현은 새끼 돼지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는 낡은 옷에 감싸안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마음이 뭉클했다.예전부터 사도현은 딩크족이었다. 아이는 그저 악마 같은 존재일 뿐, 절대 가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 돼지를 보면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경윤이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거야. 경윤이를 닮은 아이면 얼마나 예쁠까?’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출산이 마무리되었다. 다섯 마리의 암컷 돼지는 순리롭게 몇십 마리의 새끼 돼지를 낳았고 장은학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사도현이 빨리 달리고 용기를 낸 덕분에 다른 게스트를 제치고 먼저 1000점을 획득했다. 장은학은 마을 이장과 함께 꽃다발을 건넸고 ‘돼지 출산 전문가’라는 글이 적힌 상장도 주었다.사도현의 하얀 셔츠가 더럽혀졌지만 꽃다발과 상장을 안고 있으니 무척 행복했다.사도현은 배경윤 쪽으로 다가가서 환하게 웃더니 상장을 보여주면서 말했다.“경윤아, 내가 결국 해냈어. 네가 후회할 날이 올 거라고 내가 말했었지? 이제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할 거야. 기대해도 좋아.”배경윤은 싱글벙글 웃는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고 슬며시 엄지를 내밀었다.“네가 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 진짜 대단해.”날이 어두워지자 사도현은 게스트들을 불러 해산물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게스트들은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도현은 사람을 시켜 진찬영이 파티에 참가하지 못하고 업무 전화만 받게 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지내는 숙소로 걸어갔다.배경윤은 해산물 바비큐 파티에 참가하지 않고 혼자 별장의 베란다에 기대 넓은 바다를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날이 어두워
암컷 돼지들은 괴로워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허공에 대고 발길질했다. 그러면서 몸에 붙어있던 배설물이 사방으로 튀어서 접근하기 어려웠다.사도현은 토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고 천천히 다가갔다.“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 봐! 난산이어서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장은학은 급한 마음에 목청을 높여 말했다.“확실히 할 줄 아는 사람 맞아? 할 줄 모르면 당장 나와. 자네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잠시만요. 제가 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사도현은 코를 막고 겨우 말했다.‘이 세상에 내가 해내지 못하는 일은 없어. 고작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는 걸로 겁먹지 말자. 나는 할 수 있어.’고민하던 사도현은 휴대폰을 꺼내 암컷 돼지의 출산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첫째, 산후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깨끗한 출산 공간을 만들어주고 괴망간산칼륨으로 암컷 돼지의 온몸을 한 번 닦는다.][둘째, 가위를 소독하고 새끼 돼지의 탯줄을 자른다.][셋째, 낡은 수건이거나 옷으로 새끼 돼지의 몸을 닦아주고 감싸안는다.][그리고 출산 과정에서 암컷 돼지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투로 다독이거나 노래를 불러서 암컷 돼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암컷 돼지의 출산 절차를 보고 난 사도현은 당장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연예계에서 알아주는 재벌가 도련님, 유명한 회사의 대표가 이제는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황당한 일이 연속 벌어지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사도현 씨, 할 수 있는 거 맞아요? 못 하겠으면 빨리 나오세요. 대학교 때 배웠던 적이 있어서 제가 더 잘할 것 같거든요.”하늘은 돼지우리 밖에서 목을 빼 들고 말했다. 하늘은 사도현 다음으로 제일 초라한 별장을 선택한 사람이었기에 별장을 바꾸고 싶었다.“할 수 있으니 들어오지 마세요. 이건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사도현은 심호흡하고는 가만히 누워있는 암컷 돼지를 괴망간산칼륨으로 닦아주었다.암컷 돼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서 버둥거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