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다시 기본 화면으로 돌아와 채팅 기록을 복구시켰다.그러자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어쩐지 이혼한 후에 강한서와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그녀의 기분을 바로 알아맞히고 심지어 그녀가 언제 배고픔을 느끼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그녀는 그동안 그와 마음이 통한 줄 알았다. 통하긴 개뿔! 강한서는 그가 이훈을 수능 장소로 데려다주고 있을 때 몰래 그녀의 휴대폰을 열고 자신의 카톡 아이디 차단을 풀었던 것이었다!그렇게 두 달 동안이나 그는 아주 대놓고 그녀의 스토리를 구경하고 있었다!그는 그동안 아주 태연하게 연기를 잘해왔다. 전에 그와 서로 계좌이체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을 땐 그렇게 빨리 차단 풀리고 싶지 않다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다.실력을 보여주긴 개뿔!그는 자신이 몰래 그녀의 휴대폰으로 카톡 차단 풀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유현진은 이를 짓이기더니 강한서에게 카톡으로 중지 이모티콘을 보내고는 바로 다시 차단해 버렸다.유현진이 카톡으로 중지 이모티콘을 보낸 것을 본 강한서는 들켰다는 사실에 황급히 다시 카톡을 보냈다. 그러나 결과는 전송 실패였다. 유현진이 다시 그를 차단한 것이었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그는 자신의 입방정으로 “목소리를 듣고 싶다”라는 말을 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강한서가 유현진에게 문자를 보내 설명하려고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한주시 상인 단체 회장이 그에게 언제 올 것이냐고 연락한 것이었다.강한서는 상인 단체 회식에 갈 생각이 없었지만, 현재 회장과 그의 아버지는 친한 친구였고 또 이미 여러 차례 요청을 거절한 견적이 있었기에 이번엔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 회식 장소로 오게 되었다.“이미 도착했습니다. 곧 올라갈 거예요.”“그래, 내가 마중을 보내지.”전화를 끊은 강한서는 유현진에게 5200만 원을 계좌이체 하면서 메시지도 보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유현진은 그에게 10
유현진은 전 여사에게서 연락받은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정인월의 생일잔치에서 유현진은 전 여사의 의심에 완전히 불을 지폈다. 전 여사가 신미정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던 이유는 남편이 사업적으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신미정이 전 여사의 남편이 바람났을 뿐만 아니라 사생아까지 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을 용서하는 이유는 되지 못했다. 전 여사는 신미정을 ‘친구’로 생각했으니 말이다.생일잔치에서 폭죽이 고장 난 것도 아마 전 여사와 연관 있을 것이다. 전 여사는 유현진과 손을 잡고 싶어 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 여사는 폭죽에 손을 쓰고도 조사 하나 받지 않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으니, 괜히 잘못 엮였다가는 뒤통수를 맞고도 무슨 영문인지 모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전 여사를 곧바로 차단 목록에 넣어버렸다.“민영 씨, 가방 뭐에요? 너무 예뻐요.”여배우 주은비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드라마에서 송민영과 같은 반, 같은 기숙사의 룸메이트 역할을 맡았다. 무용학과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춤을 아주 잘 췄다.방이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안 예쁠 리가 있겠어요? 에르메스 프리미엄 회원만 살 수 있는 한정판인데, 저는 쇼장에서만 본 적 있어요.”여배우란 착장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직종이었다. 허영심 때문이라기보다는 브랜드 평판과 연관된 일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게 당연했다.특히 명품 브랜드에서는 브랜드 평판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 패션 센스가 떨어진다면 명품 브랜드의 광고 모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중요한 상품이 모델 때문에 값싸 보이면 안 되니 말이다.송민영이 바로 전형적인 실례였다. 그녀가 금방 뜨기 시작했을 때, 스타일이 뒤떨어지고 사복 패션이 엉망진창이라 레드카펫에서 오트 쿠튀르 드레스 하나도 빌리지 못했다.레드카펫이 끝나고 나서 팬들은 ‘저렴한 드레스를 입은 송민영’, ‘패션은 오트 쿠튀르가 아니다’, ‘레드카펫에서 국산품을 밀고 가는 투지’ 등 말로 송민영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아마
“짝퉁이라고 하기에는 포장도 있고 증서도 있었어요. 제 친구가 잠깐 빌려서 사진 찍으려고 물어본 적 있는데 팔기만 하고 빌려주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후에 제 친구가 돈을 모아서 다시 사려고 했을 때는 이미 팔렸다고 했어요. 그러니 가짜일 리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그 사람은 잠깐 멈칫하며 송민영의 가방을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민영 씨의 가방이 중고 거래 사이트의 가방이랑 코드가 같은 것 같은데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현장의 분위기는 약간 미묘해졌다. 중고 거래 사이트에 관한 얘기는 애초에 패션계의 떠오르는 여왕인 송민영에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송민영을 바라봤다. 송민영은 예상 밖으로 덤덤한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못 본 거 아니에요? 저는 직접 예약해서 샀거든요.”유현진은 살짝 머리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고 휴대폰을 만졌다.따지고 보면 송민영은 직접 예약해서 산 것이 맞았다.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말이다.유현진은 딱히 폭로할 생각이 없었다. 거래는 이미 끝났고 더 이상 신경 쓸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6억짜리 물건을 10억을 받고 팔았으니, 비밀 유지쯤은 충분히 해줄 수 있기도 했다.게다가 송민영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이 가방이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남들의 눈에 유현진은 에르메스 가방을 살 돈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송민영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앞에서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방이진이 송민영을 도와 설명을 보탰다.“민영 언니가 패션계에서의 영향력으로 봤을 때, 이 정도 가방을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어요?”유현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는 방이진이 아무것도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에르메스는 콧대가 높기로 유명하다. 아주 친한 합작 관계가 아닌 한 평등하게 무시하는 것이 에르메스의 일관된 태도이다. 이게 바로 어떤 상품은 아무리 재벌 집 사모님이라고 해도 사지
“그 예능 저도 본 적 있어요! 옷방 문이 열리자마자 꿈을 꾸는 줄 알았잖아요. 저는 꿈에서만 본 적 있는 장면이었어요.”“맞아요, 그런 집을 꿈 꾼 적 없는 여자는 없을 거예요.”“민영 씨 너무 겸손해요. 그렇게 귀한 가방을 왜 안 들고 다녀요? 저 같으면 매일매일 다른 가방을 골라서 들고 다닐 거예요!”송민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러 브랜드에서 받은 선물일 뿐이에요. 제가 직접 산 건 별로 없어요. 대부분 일 때문에 받은 거라 이제는 유행이 지나 쓰지도 못해요. 조만간 시간을 내서 안 쓰는 건 버리거나 선물하든지 해야겠어요.”이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부럽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했다. 적어서 몇백만 원은 하는 가방들을 버리거나 선물한다니, 웬만한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방이진은 돌연 머리를 숙인 채 휴대폰을 닦고 있는 유현진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안 쓰는 가방은 현진 씨한테 버리는 거 어때요?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급이 너무 떨어져도 보기 안 좋잖아요. 오늘처럼 저희끼리 만나는 자리에서는 상관없는데 홍보할 때도 저런 가방을 들면 부끄러움은 저희 몫이에요.”유현진은 동작을 멈추고 머리를 들더니 방이진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제 가방이 뭐 어떻다고요?”방이진은 가식적인 목소리로 받아쳤다.“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현진 씨. 나도 현진 씨를 위해 하는 말이니까. 현진 씨 아직 연예계의 규칙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지? 자고로 여배우는 패션이 가장 중요한 법이야. 근데 현진 씨 출연료로는 명품을 사기에 턱도 없잖아? 얼마 없는 출연료를 패션에 투자하면 성형할 돈도 모자랄 텐데, 민영 언니가 가방 정리를 하는 김에 몇 개 받으면 돈 절약도 하고 좋잖아.”방이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진짜 유현진을 걱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롱으로 가득했다. 언제부터 연예계가 이런 곳이 되었는지, 유현진은 어이없을 따름이었다.유현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송민영이 자선가의
유현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송민영 씨. 그러면 저도 내외하지 않을게요.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이 그냥 지금 가면 안 돼요? 다들 시간 있을 때 같이 구경해요. 송민영 씨 이 근처에 살잖아요.”유현진은 또 장난스러운 말투로 송민영의 거절을 미리 거절했다.“내일이 되면 생각이 바뀔까 봐서요.”송민영은 눈에 띄게 멈칫했다.‘이혼하고 나서 거지가 된 거야 뭐야? 내가 비꼬는 걸 이해 못했나? 진짜 어디 잘못된 거 아니야?’유현진의 말에 거절하지 못할 처지에 놓인 송민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다들 듣고 있는 자리에서 한 약속인데 어길 리 있겠어요? 하지만...”“그러면 지금 출발할까요?”유현진은 송민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머리를 잘랐다. 그러고는 잔뜩 신바람 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며 이어서 말했다.“다들 꿈과 같다고 비유한 옷방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보고 싶어요.”방이진은 콧방귀를 뀌며 생각했다.‘쓰레기통 취급당하면서 신이 난 거야? 흥, 평생 거지로 살 운명이네.’방이진은 또 머리를 돌려 송민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애들한테도 구경시켜 줘요. 애들 지금 침 흘리게 생겼어요.”송민영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흔쾌히 동의했다.“좋아요, 그러면 감독님한테 얘기하고 나서 가볼까요?”송민영이 엘 하트 펜션에 있는 집은 호텔과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엘 하트 펜션의 집은 적어도 몇십억 원은 있어야 살 수 있었다. 송민영의 경우 비록 대출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약금을 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8명의 여배우는 차량 두 대로 나눠서 송민영의 집에 도착했다. 출입문을 열자마자 고풍스러운 유럽식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한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기는 하지만 졸부 티가 팍팍 나는 인테리어였다. 하지만 졸부 티가 나면 뭐 어떻겠는가? 줄부도 엄연한 부자인데 말이다.사람들은 집안을 둘러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송민영은 여전히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인테리어는 약간 대충한 티가 나죠? 이
유현진은 머리를 돌려 방이진을 바라봤다. 지난번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던 사람은 전 여사였다. 똑같기로는 두 사람이 출생의 비밀로 인해 헤어진 모녀가 아닌지 의심 갈 지경이었다.‘이러다 아주 송민영 찬송가까지 만들겠어.’전 여사는 남편을 위해 신미정을 감쌌다고 하지만, 방이진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분석해 봤을 때, 방이진은 송민영에게서 받아먹을 게 별로 없었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건 둘째 치고 인맥이 삼류 제작진에 멈춰있는 데다가 본인 대본 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사람이 송민영이었으니 말이다.‘잠깐, 혹시 이거 엄청난 고단수의 돌려 까기 아니야?’유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보다는 방이진 씨가 더 급해 보이는데요? 혹시 원하면 민영 씨한테 물어봐 봐요. 두 사람 그렇게 사이가 좋은데 설마 이진 씨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겠어요?”이런 일에는 전문가급으로 두뇌 회전이 빨랐던 방이진은 금세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이제 또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간이 모자랄까 봐 그러지. 장난 좀 친 걸로 왜 그렇게 말해. 민영 언니가 버리는 가방을 받아 가지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야.”유현진은 방이진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저는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민영 씨가 저를 챙겨주는데 고맙기만 해도 모자랄 판이에요. 근데 이진 씨는 왜 제가 창피를 당하는 것처럼 말해요? 저는 상관없지만 만약 소문이라도 난다면 민영 씨가 신인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 거 아니에요. 저 그러면 민영 씨한테 미안해서 못 살아요.”송민영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방이진은 말문이 막힌 채로 입꼬리만 씰룩거렸다.‘무슨 말을 이렇게 잘해? 지금 문제를 나랑 민영 언니한테로 돌린 거야? 하, 진짜 어이없어.’방이진은 말다툼을 그만두고 유현진을 힐끗 노려봤다.“민영 언니는 그깟 소문으로 무너질 사람 아니거든. 잔말 말고 네 가방이나 빨리 골라. 중고 가방이라는 걸 들키기 싫으면 아주 잘 골라야 할 거야.이제는 숨길 시도도
“맞아요. 제집에는 자리가 없어서 친구한테 맡기려고요.”강한서가 얼마 전 옷가지들을 보내준 덕분에 유현진의 옷장은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송민영의 가방 따위를 넣을 자리는 하나도 없었다.하지만 다른 사람의 귀에는 유현진의 집이 작다 못해 가방조차 친구한테 맡겨야 한다는 것으로 들렸다. 사람들은 동정 서린 눈빛으로 유현진을 바라봤다. 실력도 없으면서 송민영과 겨루려는 그녀가 답답하기도 했다.방이진은 동정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피식 비웃었다.“가방 몇 개 고르라고 했더니 도매하려는 거야?”방이진의 도발에 유현진은 화를 내기는커녕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버릴 걸 필요한 사람한테 준다고 했잖아요? 제가 그 필요한 사람인데 혹시 문제 되나요?”유현진은 짧은 두 마디의 말로 송민영을 핑곗거리도 대지 못할 위치에 몰아넣었다.송민영의 가방들이 아무리 유행 지난 비인기 상품이라고 해도 중고로 팔면 꽤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연예인이 쓰지 않는 명품을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려 돈벌이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명품은 대부분 연예인의 출연료로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패션계의 특성상 유행이 너무 빨리 교체되기 때문에 구석에 방치되는 것들도 많았다. 가지고 있는 명품을 팔아 새 명품을 사는 데 보태는 것이 대부분 연예인의 방식이었고 송민영도 마찬가지이다. 조금 전 안 판다고 했던 것은 그저 허풍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현진이 눈치 없이 덥석 받아들인 덕분에 선물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송민영이 말을 잃은 것을 보고 유현진은 일부러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자극했다.“민영 씨, 혹시 아까워요? 이해해요. 비싼 가방이라 선뜻 선물하기 아까울만도...”“아니에요, 현진 씨.”송민영이 유현진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현진 씨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요. 유행 지난 가방들은 쓰레기처럼 자리만 차지해서 고민이었는데 현진 씨가 재활용하는 건 좋은 일이죠.”‘쓰레기처럼 자리만 차지해서
유현진의 친구는 다름 아닌 지난번에 가방을 거래할 때도 만난 적 있는 중고 명품숍의 조 사장이었다. 조 사장은 또 중고숍의 직원 한 명을 데려왔는데, 세 사람은 그렇게 천천히 옷방 안으로 들어섰다.조 사장은 명품의 중고 거래에서 아주 유명했다. 수많은 인플루언서가 그의 고객이었기 때문에, 옷방에 있던 여배우 중에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다들 유현진의 친구가 어떻게 조 사장인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유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이쪽이에요, 사장님. 이쪽 벽면에 있는 가방을 전부 봐주세요.”조 사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상자 속에서 장갑, 안경 등 각종 도구를 주섬주섬 꺼내 검사하기 시작했다. 직원이 먼저 검사하고, 조 사장이 확인한 다음 태블릿으로 사진을 찍고 예상 가격을 적는 시스템이었다.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다 방이진이 문득 정신 차리고 언성을 높였다.“유현진 씨, 이게 뭐 하는 짓이야?”유현진은 살짝 머리를 들며 말했다.“이 가방들 다 저한테 준다면서요? 어차피 제집에는 자리가 없어서 조 사장님한테 팔려고요. 이걸 판 돈으로 더 좋은 가방을 사면 되잖아요. 이진 씨 말대로 드라마를 홍보하러 다닐 때 다른 분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죠.”“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오해를 해도 유분수지. 내 말은 여기서 가방 몇 개를 골라서 들고 다니라는 뜻이었어. 남의 가방을 팔고 돈을 받는 건 다른 얘기지.”유현진은 이를 악물고 말하는 방이진을 힐끗 보며 말했다.“참고로 민영 씨는 이미 저한테 가방을 줬어요. 이제 어떻게 처리할지는 제 마음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민영 씨도 아무 말 없는 데 이진 씨가 왜 흥분해요? 아, 혹시 가방 몇 개 가지고 싶었는데 저한테 다 뺏겨서 화난 거예요? 괜찮아요, 민영 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제일 친한 사람을 빼먹을까 봐서요?” 방이진은 화가 나서 목까지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송민영의 안색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그래도 제가 현진 씨한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