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신기한 약이기에 그렇게 바로 효과가 나타나?’한현진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의심을 억누르며 강한서 앞으로 다가갔다. 소파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는 강한서는 전보다 안색이 어두워 보였다.한현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 아직도 아파요?”강한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서 있는 한현진을 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멀리 떨어져 주시면 안 아플 것 같네요.”한현진은 멈칫하더니 얼른 강한서 옆으로 다가가 그와 바짝 붙어 앉았다.“그러면 계속 아프던가요.”“...”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 씨, 자꾸 한서 오빠 자극하지 말아요. 교수님이 최대한 교수님 말씀대로 하라고 하셨어요.”한현진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교수님 말대로요? 화장실 가고 밥 먹는 것도 교수님 말대로 해야 하나요?”강한서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옆에 앉아도 죽네 사네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한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요? 우리 약혼남?”“저질.”강한서가 단 두 글자로 한현진을 평가했다. 한현진 역시 두 글자로 받아쳤다. “약골.”“무슨 약인지 보여줘요.”한현진이 말했다.강한서는 그녀를 훑어보았다. “독이라도 타려고요?”한현진이 그를 노려보았다. “네. 일단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지부터 봐야겠네요.”말하며 한현진은 강한서가 긴장을 늦춘 틈을 타 그의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뻗어 약을 찾았다. 흠칫 표정을 굳힌 강한서가 얼른 한현진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을 쳐내며 그를 째렸다. “움직이지 마.”그리고 그 순간 한현진의 손에 뭔가가 잡혔다. 약병이라고 생각한 한현진은 호주머니의 안감 쪽으로 손을 넣어 힘껏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한현진이 힘을 쓴 순간 강한서는 갑자기 감전된 사람처럼 한현진을 소파에 밀어버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강한서의 가슴이 세차게 오르내렸고 눈빛도 볼품없이 흔들리고 있었
‘강한서는 날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왜 내가 만지니까 몸이 반응하는 거야?’‘다른 나라 야동을 보면서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연기를 못한다며 평가하던 사람이잖아. 지금 자기에겐 전혀 모르는 여자에 불과한 내가 조금 만졌다고 반응을 보인다고?’‘말도 안 돼... 완전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이 개자식, 언제까지 아닌 척 연기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잠시 후, 송병천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비록 강한서가 기억을 잃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딸의 마음이 아직 강한서에게 있으니 송병천도 더 이상 못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송민준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고 한현진 바로 옆이자 송병천 쪽에 있는 송민준의 자리엔 주강운이 앉게 되었다. 그리고 강한서는 송가람과 서해금 쪽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얼핏 보면 두 딸이 각자 사위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와 밥을 먹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송병천은 예전에도 이런 장면을 그린 적이 있었다. 아들딸이 각자 가정을 꾸려 명절 때마다 집에 모이는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송병천이 상상했었던 것은 절대 지금처럼 어색한 분위기의 장면은 아니었다. 그는 주강운의 접시에 닭다리를 올려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운아, 요즘 일은 바쁘니?”주강운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대답했다. “요즘은 괜찮아요. 연말엔 사건이 별로 없거든요. 요즘엔 주로 법률 지원이나 법률 상식을 알리는 활동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요.”송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의미가 있는 활동이니 보기 좋구나. 현진이한테 들었는데 전에 현진이의 명예권 소송도 강운이 네가 변호해 준 거라며?”“네. 그땐 현진 씨를 금방 알게 되었을 때었어요.”송병천이 갑자기 한현진에게 물었다. “현진아, 넌 그때 왜 강운이에게 이혼 소송을 맡기지 않은 거야? 강운이 실력이라면 널 맨몸으로 쫓겨나게 하진 않았을 텐데.”강한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빠, 저 빈털터리로 나간 게
송가람이 얼른 대답했다. “닭내장볶음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못 드셔보셨어요?”강한서가 말했다. “전 동물 내장을 좋아하지 않아서요.”말하며 잠시 멈칫하던 강한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 번 시도는 해보죠.”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강한서도 먹어보려는 줄 알았던 송가람은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닭내장볶음을 강한서 앞으로 돌렸다. 그러자 목이버섯 돼지고기볶음이 한현진 앞으로 돌아왔다. 멈칫하던 한현진이 얼른 음식을 한 젓가락 집었다. 그 뒤로 강한서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하나 말할 때마다 한현진의 앞에는 그녀가 원하던 담백한 음식이 놓여있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라 오히려 우연 같지 않게 느껴졌다. 한현진은 금세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보다 못한 송병천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계속 그렇게 테이블을 돌리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먹으라는 거니?”‘우리 귀한 딸은 좋아하는 음식을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오히려 저 자식이 황제처럼 먹고 싶은 걸 다 먹고 앉아 있네.’송병천이 화를 내자 서해금이 입을 열었다. “가람아, 예의를 지키렴.”송가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강한서의 환심을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려 그런 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바로 그때 입을 열며 송가람 편을 들 듯 말했다. “가람 씨 저 안 챙겨도 괜찮아요. 먹고 싶은 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가람 씨도 많이 먹어요. 한 달 사이 많이 야위었어요.”그 말에 송가람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고마워요, 한서 오빠.”한현진은 말문이 막혔다. 전엔 아마 강한서의 마음이 온통 한현진을 향해있고 송가람과는 별다른 친분이 없었기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송가람은 정말 강한서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심지어 송가람에게 음식도 집어주지 않고 그저 많이 먹으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송가람은 감동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가 음식이라도 집어주면 방부제로 표본이라
송가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빠, 한서 오빠는 지금 현진 씨를 기억 하지...”“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현진이와 아무 사이도 아닌게 되는 거냐?”송가람이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송병천이 손을 내저었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넌 아줌마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해.”송가람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불만과 억울함은 집어삼켜야만 했다. 주강운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현진 씨, 저도 같이 가요.”“괜찮아요. 금방 돌아올게요.”한현진은 말하며 강한서를 잡아당겼다. “제가 안내해 줄게요.”강한서가 한현진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옷을 정리했다. 그는 회사 대표 특유의 카리스마를 유지하며 말했다. “앞장서시죠.”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몸이 금방 회복된 것만 아니었다면 아까 뜨거운 물을 섞었을 텐데.’그녀는 강한서를 노려보더니 바닥을 쾅쾅 밟으며 길을 안내했다. 몇 분 후, 한현진은 강한서를 핑크빛으로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강한서가 눈썹을 씰룩였다. “여기가 송민준 방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등골이 서늘해진 강한서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는 얼른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한현진과 거리를 뒀다. 고개를 돌린 한현진은 방구석으로 도망한 강한서를 보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렇게 멀리 도망가는 거예요?”“왜 저를 현진 씨 방으로 데려온 거예요?”강한서는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현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여기가 오빠 방이에요.”강한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전 기억을 잃은 거지 멍청해진 게 아니에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오빠가 다른 사람이 자기 방에 가는 걸 싫어해서요. 제 방에서 해결하시죠.”강한서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집에 갈 거라서요.”그가 말하며 방을 나서려 하자 한현진은 재빨리 움직여 강한서 앞을 가로막았다. “강한서 씨가 스스로 벗을래요, 아니면 제가 벗겨줄까요. 선
말이 끝나자마자 한현진은 강한서의 벨트에 손을 올렸다. 강한서는 마치 감전이 된 듯 장난스레 움직이는 한현진의 손을 꽉 잡았다. 한현진의 맹랑한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강한서는 목부터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마치 한현진을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한참을 입술을 씰룩이던 강한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대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기는 해요? 한현진 씨, 당신은 정말... 정말 할 말을 잃게 하네요.”한현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뭐가요? 전 단지 아까 제가 약병을 가지려 할 때 주머니에 숨긴 물건이 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에요. 대체 뭔데 그렇게까지 숨기면서 보여주지 않는 거예요.”강한서는 사실을 왜곡하는 한현진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금 분명...”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그러나 한현진은 봐줄 생각 없이 오히려 강한서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는데요?”강한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한현진은 쯧 혀를 찼다. ‘섰다는 말도 하지 못하다니. 기억을 잃더니 순진한 대학생이 됐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강한서는 원래부터 그런 비속한 말을 잘 못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교육을 잘 받았으니까. 천생 도련님이시잖아.’자기가 그런 강한서를 속세의 사랑에 허덕이게 했다고 생각하자 한현진은 어쩐지 성취감이 생겼다. 그녀는 눈으로 강한서의 이목구비를 살피더니 웃으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왜 말이 없어요?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본인이 잘 알겠죠.”화가 난 강한서의 모습에 한현진도 더 이상 그를 놀릴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화났어요?”강한서가 다시 등을 돌렸다. 한현진을 보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태도였다. 한현진은 다시 자
강한서는 순간 그날 한현진이 귓가에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송가람을 감싸줄 때마다 난 송가람을 밟아버릴 거야. 그리고 네가 감히 송가람과 만난다면 난 네 후대를 끊어버릴 줄 알아.”강한서의 시선이 다리 사이에 놓인 발로 향했다. 조금 더 위로 향했다면, 정말 대가 끊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계속 집착하는 거, 재밌어요? 한현진 씨는 송씨 가문의 딸이자 아저씨의 금지옥엽이잖아요. 원하는 남자든 누구든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본인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집착하는 거예요?”며칠간 마음을 굳게 먹은 덕에 한현진은 이미 전처럼 그의 날카로운 말에 쉽게 상처받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여전했다. 그녀는 그저 강한서를 다그치며 물었다. “그럼 강한서 씨는요? 기억을 잃은 사람이 왜 기억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절 쫓아내는 일에만 집착하는 거예요?”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한쪽만 기억하고 다른 한쪽은 기억하지 못하는 생사를 함께 한 정이라는 건 말이에요, 기억이 없는 사람에겐 부담이라고요.”“거짓말.”한현진이 눈시울을 붉혔다. “너 나 기억하는 거 맞지? 설사 기억 못 한다고 해도 나에 대한 감정은 남아있잖아. 그렇지? 네가 왜 계속 날 쫓아내려 하는 건지 나 정말 모르겠어. 강한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한테 얘기해 줘. 우리 같이 해결해 나가면 안 될까?”강한서는 아무 말 없이 이상하도록 복잡한 심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강운이를 이용해 제 화를 돋우거나 그럴 필요 없어요. 좋아하지 않으시면 상처 주지마세요. 민 실장에게 정명석 씨가 한현진 씨 첫사랑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명석 씨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현진 씨와 나이도 비슷한 것 같던데, 아마 저보다는 더 말이 통할 거예요.”그 말에 한현진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갑자기 강한서의 어깨를 툭 밀쳤다. “강 대표님은 아량도 넓으시네요. 헤어지는 마당에 제가 만날 남자까
강한서가 약병을 주워 들자 한현진은 바로 그것을 빼앗아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 입술을 달싹이던 강한서는 곡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놓인 물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이번엔 한현진이 거절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사람을 부르려 하자 한현진이 눈을 감고 말했다. “나가기만 해요. 여기서 뛰어내릴 거예요.”강한서가 흠칫 몸을 굳혔다.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한현진은 강한서의 무시한 채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강한서 씨. 다시 한번 물을게요. 정말 저와의 연을 끊을 생각이에요?”강한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한현진의 얼굴을 향했던 시선을 내리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전 현진 씨를 기억하지 못해요.”한참을 침묵하던 한현진이 냉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꺼져요. 강한서 씨가 바라던 대로.”한현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깨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현진이 그런 말투로 강한서를 대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한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잠시 후 말했다. “푹 쉬어요.”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문밖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자 한현진은 그제야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얼굴엔 조금 전의 병색 짙던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강한서가 저택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고 송가람은 종종걸음으로 강한서의 뒤를 따르며 뭐라고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차로 향하는 강한서의 걸음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가 차에 올라타서야 한현진은 어쩐지 어떤 시선이 유리 넘어 창가에 닿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아주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자주 운전하던 벤츠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창가에 한참을 서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임신 중절 수술 예약하려고 하는데요...”
송가람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내연녀라는 오명을 쓰고 싶지는 않았고 그로 인해 송씨 가문과 멀어지는 일은 더욱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송가람은 강한서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선을 넘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강한서가 먼저 자기에게 고백하는 것일 테였다. 그렇게 되면 욕을 먹고 질책을 받는 쪽은 자기가 아니라 조강지처를 버린 배은망덕한 강한서가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송가람은 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설사 정말 그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송가람에게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전 와이프인 한현진과 송가람의 관계를 알게 된 이상 강한서는 절대 송가람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송가람이 자기를 좋아하는 건 근친상간이라고 강한서가 본인 입으로 직접 말했었다. 강한서가 이토록 뼛속까지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송가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송가람이 강한서에게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면 당연히 한현진에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태도를 떠올린 송가람은 곧 한현진과 강한서 사이에 유쾌하지 않은 대화가 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송가람의 말투가 바뀌었다. “현진 씨, 한서 오빠 기억을 찾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조급해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황 교수님께서 지금 한서 오빠의 대뇌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 너무 많은 자극을 받으면 오히려 탈이 난다고 했어요. 한서 오빠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요즘엔 좀 자제하는 게 어때요? 한서 오빠는 현진 씨 때문에 이렇게 다친 거잖아요. 오빠는 현진 씨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 현진 씨는 잠깐 거리를 두는 것도 그렇게 어려워요?”그 말에 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강한서의 기억이 차라리 한평생 안 돌아왔으면 좋겠죠?”송가람은 한현진의 말에 부정하려 했지만 한현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송가람 씨,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 본인의 구역질 나는 탐욕에 핑계를 찾는 건 그만하죠. 송가람 씨가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