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과 달리, 시연은 잘 알고 있었다. 은범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을 것이었다.왜냐하면 은범은 단 한 번도 시연이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라고 차창 너머로 시연은 은범의 눈빛을 읽었다. 그것은 그녀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문득, 시연은 손을 들어 차창을 내렸다.“시연아!” 유건이 놀라 외쳤다. ‘지금 뭘 하려는 거지?’하지만 시연은 유건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은범이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시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은범의 얼굴선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시연아.”시연은 눈물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입 모양을 만들었다. ‘나... 잘... 지내고 있어.’은범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가슴이 저리고 아팠고, 시연을 향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은범이도 내 마음을 알았네...’시연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 후,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이어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출발하세요.”“네, 사모님.”이제 시연은 ‘사모님’이었다. 그녀의 한마디에 차량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유건은 눈물이 맺힌 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는 참지 못하고 비꼬듯 말했다.“그렇게 아쉬워?”“고유건 씨.” 시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전 여자 친구와 끌어안고, 심지어 함께 밤을 보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친구와 멀리서 작별 인사도 못 해요? 사람이 너무 이중적이면 안 되죠.”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는데, 반박하려다 멈췄다.“내가 언제...”하지만 곧 깨달았다. 자신이 할 말이 없다는 것을.결국 머쓱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안았던 게 아니라, 장소미가 취해서 부축해 준 거야.”“흥.”시연은 차갑게 웃었다. “당신은 고 대표님이잖아요. 뭐든 변명할 수 있겠죠.” 유건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턱 막힌 듯했다.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진주야!”은범의 어조가 한층 낮아졌다. 그에게 있어서는 나름의 단호한 표현이었다.“아직도 못 알아듣겠어? 내 일에 상관하지 말고 당장 가줘.”잠시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찾지 마. 우리, 더 이상 만날 필요 없어.”이 말을 마친 그는 진주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잠깐만!”진주는 다급한 마음에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은범은 전류가 흐르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진주의 손을 뿌리쳤다.남자의 차가운 태도에 진주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러고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왜 그래...? 우리, 잘 지내왔잖아...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널 기분 나쁘게 했어?”진주의 말에 은범은 가늘게 눈을 떴다.그리고 깨달았다.‘왜 이제야 알았을까?’‘하진주는 늘 우리가 친구라면서 우리 부모님을 속이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어...’‘하지만 진실한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단순한 친구라면, 이런 표정을 지을 리 없을 테니까.’ “허...”은범은 비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시연이는 하진주를 딱 한 번 보고서 나와의 이별을 결심했어!’ ‘사실... 시연이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우스운 건, 내가 시연이한테 해명하려 했던 거지!’ ‘나랑 하진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면서...’하지만 은범은 이제야 깨달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여자를 곁에 두고 다닌 것이 잘못이었다.결국, 그는 시연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시연을 잃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진주.”모든 것을 이해한 순간, 은범의 목소리는 한층 차분해졌다.“난 너를 좋아하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이만 돌아가. 그러면 우린 앞으로도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계속 이런다면... 우린 결국 남이 될 수밖에 없어.”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진주가 더 이상 모를 리 없었다. 여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더 이상 부정하지도 않았다.“미안해.”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그동안 폐를 끼쳤어. 그럼, 난 이만
유건과 시연의 신혼 첫날밤은 살며시 스며드는 봄비처럼 다가왔고, 한여름 소나기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결국, 시연의 눈꺼풀이 감겨 버렸다.“여보, 물 좀 마셔.”유건은 시연을 품에 안고 물컵을 들어, 그녀의 입에 반쯤 가져다 댔다.“고마워요.”낮과 달리 한층 부드러워진 여자의 목소리였다.유건은 미소 지으며 받아들였다. “천만에, 여보.”‘역시 부부 사이는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구나.’‘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부부 싸움은 침대에서 끝난다더니, 정말 딱 맞아.’유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을 뒤적였다. 그러다 약을 하나 찾아 들고 돌아와 이불을 살짝 들추고는 시연의 발목을 잡았다.그는 아까 시연의 뒤꿈치가 벗겨진 걸 알아차렸었다. 시연은 평소에 힐을 신지 않는 여자였지만, 결혼식이기 때문에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짧게나마 힐을 신었다. 그러다 결국, 발뒤꿈치가 까진 것이었다. 유건은 약을 짜 손가락 끝에 묻혀 조심스레 상처 위에 발랐다.차갑고 약간 따끔한 감촉.“앗!”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움찔거렸다.“뭐 하는 거예요?”“가만히 있어.”유건은 여자의 다리를 살며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다정하게 말했다.“뒤꿈치가 까졌잖아. 약 바르면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착하지.”시연은 여전히 귀찮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재촉했다.“빨리 해요! 너무 귀찮아요. 지금 자야 해요.”“알았어, 알았어.”유건은 서둘러 남은 상처에도 약을 발랐다.“다 됐어. 이제 자.”“흥...”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 잠들어 버렸다.‘저것 좀 봐, 완전 귀찮다는 얼굴인데?’유건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나도 하루 종일 피곤했어.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챙겨줬는데, 칭찬 한마디도 안 해주는 거야?’ ‘조금 전까지 날 붙잡고 울던 사람은 어디 간 거지?’ ‘참, 자기 필요할 때만 날 찾는다니까.’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다음 날 아침.유건은 평소처럼 일어났다. 시연은 지쳐 있었고
“침대로?” 시간이 아직 이르니, 좀 더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유건은 시연을 침대에 눕혔다. 시연은 허리를 한번 문지르더니, 참지 못하고 남자를 흘겨보았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유건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이 인간, 진짜 뻔뻔하긴...’ 시연은 못마땅한 듯 다시 남자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안 잘 거면 내 허리 좀 주물러 줘요.” ‘어이구, 아주 능숙하게 부려 먹네.’ 하지만 유건은 거절할 생각도 없이 아주 쿨하게 대답했다. “좋아, 내가 해줄게. 내 손기술이 당신보단 못해도 힘 하나는 좋을 테니까.” 남자의 손바닥이 시연의 허리에 닿았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돼?” ‘오, 고 대표 손기술도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힘쓰는 일은 남자가 유리한 게 맞아.’ “네...” 시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른하게 몸을 맡겼다. “그렇게... 그래요... 거기...” 마치 고양이처럼, 나른하면서도 애교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시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벌써 정오였다. 순간, 그녀는 당황하며 황급히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와중에 옆에서 태평하게 앉아 있는 유건을 보자 괜히 화가 났다. “왜 안 깨웠어요?” 유건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깨우면 ‘왜 깨우냐’고 뭐라 하고, 안 깨우면 ‘안 깨운다’고 또 뭐라 하고. 사모님,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었어? 너무 곤란한데?” 사실 그는 시연이 늦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시연이 할아버지를 신경 쓴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바로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그리고 아직 안 늦었어.” 더 이상 유건과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서 시연은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신혼 첫날, 시연이 고른 옷은 연한 보랏빛 롱 원피스였다. 왼손 약지에서는 유건과 맞춘 커플링이 빛났다. 그
시연과 유건은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다.문에 들어서자, 지하와 몇몇이 장난스럽게 놀려댔다.“어젯밤에 너무 힘들었던 거 아니야?”“형수님, 정말 수고하셨어요!”“이야, 이러다 이삿짐 싸야 하는 거 아냐?”“너희, 평생 장가 안 갈 작정이냐?”다들 어른이 되고도 여전히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시연은 그들의 말다툼에 끼지 않고, 우주를 바라보았다.지금 우주는 고상훈과 함께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둘만이 유일하게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진아가 살짝 다가와 속삭였다.“꽤 오래 두고 있어. 처음엔 어르신께서 우주에게 말도 걸었는데...”그 말은 곧, 지금은 조용하다는 뜻이었다.‘왜...?’시연은 고상훈의 표정을 살폈다. 심각한 얼굴이었다.‘이거 좀 불안한데.'노인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굉장히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상훈은 바둑을 굉장히 좋아했고, 그만한 실력자가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상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것도 겨우 십 대의 소년.이번 한 수를 두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다행히도, 우주는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랐다. 성급하게 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시연은 바둑을 둘 줄 몰랐다.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고상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우...”입을 열어 우주를 부르려는 순간, 유건이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저지했다.시연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왜 그래요?”“당신이야말로 뭐 하려는 거야?”유건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두 사람 바둑 두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우주가 괜히 할아버지에게 폐 끼칠까 봐...”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우주는 바둑 둘 줄도 몰라요...”“우주가 보통 아이야?”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보기엔 잘 두고 있던데?”“하지만...”시연은 망설였다.고상훈의 표정을 보면, 우주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닐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그럴 필요 없어.”유건은
“젊은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놀다 와.”시연의 몸 상태 때문에 신혼여행 계획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제남도를 떠날 것도 아니었다.계획대로라면 섬에서 이틀, 삼일 정도 더 머무르며 쉴 예정이었다.오후가 되자, 유강석이 앞장서서 바닷가에 가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동의했다.시연은 우주를 걱정하며 물었다.“우주, 가고 싶어?”우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시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가고 싶어.”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고민되었다. 몸이 불편한 탓에 동생을 제대로 돌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주는 영리했다. 바로 유건에게 시선을 돌렸다.게다가 우주는 시연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간절하게 바라볼 때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유건이 그걸 이겨낼 리 없었다. 결국 처남을 위해 나섰다.“가자. 우주는 걱정하지 마. 내가 볼게. 마침 우주도 수영 배우고 싶다며? 내가 가르쳐 줄게.”우주의 두 눈이 더 크게 빛났다.몇 번이나 말하려다 망설이며, 결국 기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매형, 진짜... 진짜야?”“진짜지.”유건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면, 네 누나가 날 가만둘 것 같아?”“누나.”매형의 약속을 받고 나니, 우주는 다시 시연을 바라보았다. 결국 결정권은 누나에게 있었다.동생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던 시연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물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그녀는 유건을 믿었다.감정을 떠나, 유건이라는 사람 자체가 신뢰감을 주었다.“와!”우주는 기쁨에 들떠 뛰어올랐다.“매형! 누나가 허락했어! 얼른 가자!”그렇게 다들 바닷가로 향했다.남자들은 전부 바다로 뛰어들었고, 시연만이 해변 의자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임진아는 자연스럽게 시연 곁을 지켰다.“안 들어가?”“귀찮아.”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움직이기도 싫어.”“히힛.”진아는 장난스럽게 다가오며 속삭였다.“어젯밤에 너무 무리했어?”시연
“네?”진아가 고개를 돌려 보니, 부지하였다.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는 사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지하는 여자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궁금해했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무 말 없이 표정만 저렇게 변하는 걸까?’그가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가게의 코코넛을 바라보니, 이미 개봉된 상태였다. 상황이 다 이해됐다.지하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핸드폰 안 가져온 건가?”진아는 순간 멍해졌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결심한 듯 손을 꽉 쥐며 말했다.“실례지만, 대신 결제해 주실 수 있나요? 핸드폰 찾으면 바로 송금해 드릴게요.”“흠...”지하는 일부러 생각하는 척했다.코코넛 몇 개 값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진아가 원한다면, 섬 하나를 사서 선물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 쫀득한 찹쌀떡 같은 진아가 묘하게 재미있어서 장난치고 싶어졌다.“못 해 줄 건 없지.”“정말요?”진아는 반색하며 기뻐했다.“응.”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대신, 나를 ‘오빠’라고 한 번 불러 봐. 그럼 그냥 사줄게. 돈도 안 받을게, 응?”진아는 순간 얼어붙었다.‘뭐라고?'그리고 곧바로 깨닫고는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됐어요! 도움 안 받을래요!”‘성빈이 말이 맞아. 이 사람,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코코넛 몇 개 사 준다고 생색을 내다니! 게다가 이런 장난까지!’진아가 화가 나서 돌아서려던 순간, 가게 주인이 말했다.“어이, 아가씨! 돈 안 내고 어디 가!” 이와 동시에 지하가 진아의 손목을 붙잡았다.“사장님 말씀 들었지? 아가씨, 먹튀는 나쁜 거야.”진아는 당황스럽고 화가 나면서도 창피함까지 몰려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됐어.”지하는 더 장난을 칠 기세였지만, 이대로 가다간 진아가 진짜 폭발할 것 같아서 적당히 멈추기로 했다
“지하야, 우주 좀 잘 부탁해.”“걱정하지 마.”지하는 가볍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 ‘우주는 유건이 아내의 심장 같은 존재니까, 내가 당연히 잘 챙겨야겠지.’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유건은 시연을 방으로 데려가서 재우려 했다.혹시라도 햇빛이 들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아를 바라보았다.“진아 씨, 부탁 좀...”“네.”진아는 유건의 말에 따라 방수 의류를 들어 시연의 얼굴과 머리를 가렸다.“됐어, 고마워.”유건은 한숨을 돌리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그 태도에 진아는 순간 놀랐다.‘고 대표가 이렇게까지 시연이를 아끼다니.’그녀는 연애를 해본 적 없지만, 주변 친구들의 연애는 익히 봐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남자도 유건과 비교할 수 없었다.‘이래서 시연이가 결혼을 결정했구나.’이제 진아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그것은 바로 유건이 앞으로도 시연만 바라보고, 장소미 같은 사람과는 더 이상 얽히지 않는 것. ...유건은 시연을 방으로 데려가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커튼을 내려, 편히 잘 수 있도록 했다.몇 분 정도 옆에서 머물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우주는 여전히 해변에 있었다.물론 지하가 잘 챙기고 있겠지만, 그래도 유건은 시연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해가 저물 무렵, 시연이 눈을 떴다. 푹 자고 난 덕분에 머리가 개운했다.그리고 방 안은 조용했고, 그녀 혼자뿐이었다.시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어 보니, 바깥은 무척이나 떠들썩했다.모두가 머무는 곳과 테라스는 연결되어 있었고, 중앙의 넓은 공간에는 수영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BBQ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붉게 물든 노을과 겹쳐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가운데에는 진아와 성빈이 있었다.진아는 바비큐를 굽고 있었고, 성빈은 잘 깐 귤을 그녀 입에 하나씩 넣어 주고 있었다.시연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시연아, 일어났어?”진아가 바로 반응하며 성빈을 툭툭 쳤다.
“시연아, 나 M국 도착했어. 며칠은 적응해야 해서, 학교 등록은 좀 이따가 하려고...”“오늘은 눈이 왔어. M국 날씨는 G시보다 더 오락가락하고 있어. 어제는 반 소매 입었는데, 오늘은 눈이 내려...”“오늘 장 봐서 집에서 밥해 먹었어. 햄버거랑 치킨만 먹다 보니 몸이 좀 이상하더라...”“요리가 좀 익숙해지면, 나중에 너한테도 해줄게. 넌 교수가 될 거니까 아주 바쁠 거잖아. 내가 집안일도, 너도 챙길게.” 한 문장, 또 한 문장. 은범의 글씨를 따라가던 시연의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자꾸만 번졌다. ‘왜 이제야 보게 된 걸까...’ 시연의 심장이, 천천히, 무겁게 가라앉았다. ...“계속 답장이 없네. 아직도 화난 거야? 내가 갑작스럽게 떠난 건...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우리 부모님이...” “지난번 내가 한 설명... 안 믿는 거야? 맹세할게. 단 한 마디도 거짓은 없어.” “시연아, 보고 싶어.”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적이 없어. 너를, 그리고 우리를 배신한 적 없어.” “나, 오늘 전액 장학금 받았어! 너도 기뻐해 줄 거지?” “내 디자인이 공모전에서 상 받았어! 앞으로... 우리 집은 내가 잘 지켜낼 수 있을 거야.” “시연아, 날 기다려줘. 제발... 나 돌아갈게.” “너무 보고 싶다. 딱 한 번만, 연락해 줄래?” “내가 잘못했어. 넌... 절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점점, 시연은 더 이상 문장을 끝까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아...!!!”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시연은 오열했다. 이와 동시에 침대 위에 누운 은범을 바라보는 눈빛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서렸다. ‘난... 몰랐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지난 3년 동안, 시연이 은범에게 가졌던 감정은 오직 하나... 증오였다. 약속을 어긴 은범에 대한, 자신을 버린 은범에 대한, 가차 없이 떠난 은범에 대한.
시연은 조용히 침대 곁에 앉았고, 모니터에 뜬 숫자들을 힐끗 봤다. 심박수, 산소포화도를 포함한 모든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은범아... 나야, 시연이.” 물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시연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은범의 손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감쌌다. “은이야...”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내가 왔어. 널 보러 왔어... 은이야...” 이어서 눈을 감자,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었어... 아프면 말하지 그랬어. 그동안 혼자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지?” “포기하지 마. 지금 여기서 끝내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내가 곁에 있을게.” 시연은 계속 중얼거렸다. 우울증이 어떤 건지, 그녀는 의사지만 완전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하면... 널 도울 수 있을까?’은범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시연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연아?” 문밖에 서 있던 강수희와 노수철이 놀라 그녀를 불렀다. “어디 가는 거니?” 지금 노수철 부부에게, 시연이 병실을 떠나는 건 곧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두 사람을 지나쳐, 병실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정기환을 바라봤다. “기환 씨...” 그녀의 부름에 그가 다가왔다. “형수님, 무슨 일이세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뒤적였다. “예전에... 지 사장님이... 제 이름으로 집을 하나 사주셨거든요. 그 집, 어딘지 알죠?” “네, 압니다.” 그녀는 집 열쇠를 꺼내 건넸다. “거기 서재 책상 왼쪽 서랍에, 천으로 된 가방이 하나 있어요. 그거 좀 가져다주세요.” 기환은 멈칫했다. ‘지금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시연은 고개를 돌려 노수철 부부를 바라봤다.
이 광경에 시연은 숨이 턱 막혔다. “사모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요, 사모님!” 시연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왕성애마저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사모님은 아직 어리세요. 갑자기 이러시면 놀라서 수명이 깎일지도 모른다고요!”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강수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서 일어나세요.” 왕성애는 불쾌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한밤중에, 그것도 울고불고하며 무릎까지 꿇다니... 대체 누구한테 겁을 주려는 거야?’ “아, 네...” 노수철이 강수희를 부축해 일으켰고, 강수희는 그 틈에 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시연아,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무 급해서, 너무 막막해서 그랬어. 부탁이야... 우리 은범이 좀 살려줘.” ‘뭐...?’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은범이가... 왜요?” “은범이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강수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범이가 손목을 그었어... 자살 시도를 했다고... 의사 말로는, 그냥...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대. 시연아, 너밖에 없어. 은범이한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너뿐이야...” “맞아.” 노수철은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듯했다. “예전에 우리가 널 힘들게 했던 거 안다. 근데 은범이도... 결국 피해자잖니.” 시연은 이미 정신이 아득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리며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은범이는 어디 있어요?” “병원에 있어.” “어서 가요.” ‘지금은 묻고 따질 때가 아니야.’ 은범에게 우울증 있다는 거,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손목을 그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안 돼요!” 갑자기 왕성애가 가로막았다. “사모님! 가시면 안 돼요!” “왜요?” 시연은 당황했다. 왕성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답한 듯 말을 끌었다. “유건 도련님을 생각하셔야죠!” ‘고유건...’ 유건이 알게 된다면,
“어떻습니까, 교수님?” 강수희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물었다. 초조함이 전신을 감쌌고, 목소리도 떨렸다.의사는 깊게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출혈은 막았고 봉합은 완료했지만... 생명 징후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혹시 부모님이시라면, 자살 시도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노수철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절망과 자책, 무지의 공허함만이 흐를 뿐.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병실로 옮겨 보겠습니다. 상황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병실로 옮겨진 은범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몸은 차갑고, 호흡은 희미했다.의사는 곁을 돌며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생명 징후가 너무 약해요. 솔직히 말해서... 살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두 분... 부모로서... 정말 이유를 모르십니까?”‘살겠다는 의지가 없다’라는 말이, 비수처럼 강수희의 가슴에 꽂혔다. 의료는 기적을 바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꺾인 사람에겐 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이기도 했다.“방법... 방법이...” 강수희는 중얼거리며, 불현듯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방법 있어요! 방법이 있어요, 분명히!”그리고 이내, 진성빈을 찾아갔다.“성빈아... 있어. 방법이 있어.” 강수희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성빈은 바로 눈치를 챘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설마... 시연이요?”“그래, 시연이.” 강수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만이 은범이를 살릴 수 있어... 그 아이는... 은범이한테 약이야...”“이모...” 성빈은 난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시연이가 결혼했다는 거, 이모도 아시잖아요.”고씨 가문의 결혼식은 조용히 이루어졌지만, G시의 상류 사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버린 시연이, 전 남자 친구를 보러 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
차가운 면도날이 혈관을 스쳤다. 피가 터지듯 솟구쳤다.은범은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 ‘이상하다... 오히려... 편안해.’ ‘이대로 피가 다 빠지면, 이제... 끝이겠지.’그는 서서히 의자에 앉았다. 팔을 세면대 안으로 걸치고,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해방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죽음은 단지 긴 수면일 뿐이야.’ ‘두렵지도 않아...’그리고 점점 몸이 식어갔다.은범의 의식이 아득해지고, 생각은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때,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은범아! 은범아!!”강수희였다. 피범벅이 된 아들의 손목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무너졌다.“으아아악... 은범아...!”어머니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재빨리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제발요, 제 아들이에요! 지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요...” “여기... 제발, 빨리 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병원.“어떻게 된 거야?! 은범이는...!” 노수철이 숨을 헐떡이며 응급실로 뛰어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강수희의 눈은 완전히 부어올랐고,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우리 은범이가 왜...”“이모.” 조용히,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성빈이었다. 은범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가장 가까운 친구.“성빈이?” 노수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삼촌.” 성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싫어하실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강수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물었다. “무슨 말이든... 해줘, 제발.”“네...” 성빈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모, 은범이... 심각한 우울증 환자예요.”“뭐...?” 강수희와 노수철은 동시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하늘은 한 점 구름 없이 맑았다. 농구 코트 위, 남자들의 구호와 땀방울이 어우러진 뜨거운 풍경 속, 관중석의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은범이 파이팅!” “은범이, 잘생겼다!”“오늘은 구경꾼도 많네! 은범아, 여자애들이 저렇게 많은데 한 명도 눈에 안 들어와?” “야야, 우리 은범이 여자 친구 있잖아.”“아, 그냥 농담이지 뭐... 여기, 여자 친구는 안 왔잖아?”“저기 ‘법대 퀸’, 너 좋아한 지 꽤 됐지? 아빠가 대형 로펌 대표래. 솔직히 네 여친보다 집안이 몇 배는 좋잖아. 솔직히 말해봐, 흔들리지도 않아?”“그래, 시대가 변해도, 결국은 ‘분수에 맞는 집안’이 최고잖아.”“야, 그만해.” 은범이 결국 참지 못하고 수건을 내팽개쳤다. “끝나고 밥도 없어. 다들 꺼져.”“뭐야?!”“오늘 은범이의 한턱 기대했는데...”“야야, 시연이 얘기 꺼낸 너 때문이야! 은범이가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서 그러냐?”“오늘의 죄인은 너로 정했다!”농구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정리할 때쯤, ‘법대 퀸’이라 불리는 여대생이 다가왔다. 손에 시원한 음료를 든 채, 수줍은 미소를 띠며.“은범아, 이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범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버렸다. 남자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등에 백팩을 멘 채, 린넨 원피스를 입고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시연.“우리 여친 왔네!”“흥!” 시연은 콧소리를 흘리며, 은범의 시선을 따라 ‘법대 퀸’을 슬쩍 훑었다. “내가 좀... 타이밍이 안 좋았나 보네?”‘질투 날 수밖에 없잖아. 저렇게 예쁘고, 잘 어울리데...’“무슨 소리야! 나, 이제 막 경기 끝났어. 못 봤지? 나 아까 진짜 멋있었어.” 은범은 웃으며 시연의 손을 잡았다.그제야 시연도 입꼬리를 올렸다. “물 마실래?”시연이 내민 물병을 보자 은범이 반갑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스럽게 손을 뒤로 뺐다.“이건 그냥 물이야
노은범이었다.“시연아.”시연보다 먼저, 은범이 담담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응, 오랜만이야.” 딱히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은범은 또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그는 더 말라가고 있었다.‘왜 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복잡하지...?’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시연의 감정.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은범은 심재규 쪽을 힐끗 보더니, 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교수님이랑 아는 사이야. 근처에 볼일 있어서 잠깐 들른 거고.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어.”‘정말 그게 다일까? 아니야, 분명 날 보러 온 거잖아.’하지만 시연은 굳이 그 사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배웅해 줄게.”“응, 좋아.” 두 사람은 마치 친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함께 별산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은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로 향했다. “많이 나왔네.”“응, 이제 슬슬 티 나기 시작했어. 4개월 지나고부터 눈에 띄더니,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느낌이야.”“그래... 참 좋다.” 은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잘 지내? 그 사람은... 너한테 잘해줘?”시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나쁘든... 이젠 내 몫이야. 너까지 이런 얘기 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너... 상태도 안 좋은데.’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은범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줘. 곧 우주 수업이 끝날 시간이잖아. 이만 돌아가.” “응, 잘 가.”“잘 있어.”시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은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후에도, 우주는 아직 수업 중이었다....심재규는 시연을 보자 바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오늘이 마침 노 사장님의 진료 날이었어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두 번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연은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리고... 또...‘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뭔가 꽉 막힌 듯한 느낌, 그리고 불쾌한 통증. 혹시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두려워진 시연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유건과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특히 복수 때문에 이혼을 거부했다는 말. 그 말은 진심이었다.깜깜한 어둠 속, 시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결국, 난 지키지 못했어.” ‘난... 마음이 움직였으니까.’‘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좋아하게 돼버렸어.’ ‘내가 만든 덫에 내가 걸려든 거야. 자업자득이지.’그날 밤, 유건은 끝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식탁에서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여전히 유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출근했나...?’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두통도 없나 보네. 진짜 대단한 체력이다.’시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가방을 둘러매고 현관을 나섰다. 역시나 정기환이 대기 중이었다.“형수님.” 기환은 운전석에서 시연을 힐끔힐끔 보며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왜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아니요... 그게...” 기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네...?” 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왜요, 제가 뭘 물어야 하죠? 무슨 질문을 기다리는 거예요?”‘뭐야, 이건 또 무슨 희한한 대화야...’“아, 아니요... 그냥요. 하하.” 기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조용히 운전대를 잡았다.강울대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이 병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기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걸... 형님한테 뭐라고 보고해야
유건의 약속을 들은 시연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사실대로 말할게요.” “처음에 계약 결혼을 수락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우주 치료비가 필요해서.”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장소미의 남자친구라는 걸 알았죠... 이혼을 거부한 건, 복수였어요. 그 여자한테, 그 집안에...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게 전부예요.”시연의 분홍빛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건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정말... 복수였어...’예전에 시연이 병실에서 그랬다. 유건이 누굴 사랑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인제야 명확하게 유건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그동안... 내가 느낀 시연이의 다정함은... 모두 연기였던 걸까?’‘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유건은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표정을 감췄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방식으로 복수한다고? 좀 유치하지 않아?”“그렇죠, 유치하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복수는커녕, 나 자신만 구역질 나게 했으니까.’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미안해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이혼 안 해준 것도, 당신을 이용한 것도... 그건 분명 내가 잘못한 거니까요.”그 한마디가 유건의 가슴 깊은 곳에 단번에 불을 밝혔다. ‘‘그동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지금은...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걸까?’유건은 묻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웠다.그런 유건의 망설임을 모른 채, 시연은 조용히 물었다.“이제 다 알았으니까... 어쩔 건데요? 이혼할 거예요?”“뭐...?”그 순간, 유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 질문을 참을 수는 없을 터였다.‘이혼? 또 이혼? 이혼이 무슨 일상 대화야?’‘조금만 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