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과 유건은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다.문에 들어서자, 지하와 몇몇이 장난스럽게 놀려댔다.“어젯밤에 너무 힘들었던 거 아니야?”“형수님, 정말 수고하셨어요!”“이야, 이러다 이삿짐 싸야 하는 거 아냐?”“너희, 평생 장가 안 갈 작정이냐?”다들 어른이 되고도 여전히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시연은 그들의 말다툼에 끼지 않고, 우주를 바라보았다.지금 우주는 고상훈과 함께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둘만이 유일하게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진아가 살짝 다가와 속삭였다.“꽤 오래 두고 있어. 처음엔 어르신께서 우주에게 말도 걸었는데...”그 말은 곧, 지금은 조용하다는 뜻이었다.‘왜...?’시연은 고상훈의 표정을 살폈다. 심각한 얼굴이었다.‘이거 좀 불안한데.'노인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굉장히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상훈은 바둑을 굉장히 좋아했고, 그만한 실력자가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상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것도 겨우 십 대의 소년.이번 한 수를 두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다행히도, 우주는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랐다. 성급하게 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시연은 바둑을 둘 줄 몰랐다.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고상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우...”입을 열어 우주를 부르려는 순간, 유건이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저지했다.시연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왜 그래요?”“당신이야말로 뭐 하려는 거야?”유건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두 사람 바둑 두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우주가 괜히 할아버지에게 폐 끼칠까 봐...”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우주는 바둑 둘 줄도 몰라요...”“우주가 보통 아이야?”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보기엔 잘 두고 있던데?”“하지만...”시연은 망설였다.고상훈의 표정을 보면, 우주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닐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그럴 필요 없어.”유건은
“젊은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놀다 와.”시연의 몸 상태 때문에 신혼여행 계획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제남도를 떠날 것도 아니었다.계획대로라면 섬에서 이틀, 삼일 정도 더 머무르며 쉴 예정이었다.오후가 되자, 유강석이 앞장서서 바닷가에 가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동의했다.시연은 우주를 걱정하며 물었다.“우주, 가고 싶어?”우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시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가고 싶어.”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고민되었다. 몸이 불편한 탓에 동생을 제대로 돌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주는 영리했다. 바로 유건에게 시선을 돌렸다.게다가 우주는 시연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간절하게 바라볼 때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유건이 그걸 이겨낼 리 없었다. 결국 처남을 위해 나섰다.“가자. 우주는 걱정하지 마. 내가 볼게. 마침 우주도 수영 배우고 싶다며? 내가 가르쳐 줄게.”우주의 두 눈이 더 크게 빛났다.몇 번이나 말하려다 망설이며, 결국 기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매형, 진짜... 진짜야?”“진짜지.”유건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면, 네 누나가 날 가만둘 것 같아?”“누나.”매형의 약속을 받고 나니, 우주는 다시 시연을 바라보았다. 결국 결정권은 누나에게 있었다.동생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던 시연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물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그녀는 유건을 믿었다.감정을 떠나, 유건이라는 사람 자체가 신뢰감을 주었다.“와!”우주는 기쁨에 들떠 뛰어올랐다.“매형! 누나가 허락했어! 얼른 가자!”그렇게 다들 바닷가로 향했다.남자들은 전부 바다로 뛰어들었고, 시연만이 해변 의자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임진아는 자연스럽게 시연 곁을 지켰다.“안 들어가?”“귀찮아.”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움직이기도 싫어.”“히힛.”진아는 장난스럽게 다가오며 속삭였다.“어젯밤에 너무 무리했어?”시연
“네?”진아가 고개를 돌려 보니, 부지하였다.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는 사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지하는 여자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궁금해했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무 말 없이 표정만 저렇게 변하는 걸까?’그가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가게의 코코넛을 바라보니, 이미 개봉된 상태였다. 상황이 다 이해됐다.지하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핸드폰 안 가져온 건가?”진아는 순간 멍해졌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결심한 듯 손을 꽉 쥐며 말했다.“실례지만, 대신 결제해 주실 수 있나요? 핸드폰 찾으면 바로 송금해 드릴게요.”“흠...”지하는 일부러 생각하는 척했다.코코넛 몇 개 값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진아가 원한다면, 섬 하나를 사서 선물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 쫀득한 찹쌀떡 같은 진아가 묘하게 재미있어서 장난치고 싶어졌다.“못 해 줄 건 없지.”“정말요?”진아는 반색하며 기뻐했다.“응.”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대신, 나를 ‘오빠’라고 한 번 불러 봐. 그럼 그냥 사줄게. 돈도 안 받을게, 응?”진아는 순간 얼어붙었다.‘뭐라고?'그리고 곧바로 깨닫고는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됐어요! 도움 안 받을래요!”‘성빈이 말이 맞아. 이 사람,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코코넛 몇 개 사 준다고 생색을 내다니! 게다가 이런 장난까지!’진아가 화가 나서 돌아서려던 순간, 가게 주인이 말했다.“어이, 아가씨! 돈 안 내고 어디 가!” 이와 동시에 지하가 진아의 손목을 붙잡았다.“사장님 말씀 들었지? 아가씨, 먹튀는 나쁜 거야.”진아는 당황스럽고 화가 나면서도 창피함까지 몰려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됐어.”지하는 더 장난을 칠 기세였지만, 이대로 가다간 진아가 진짜 폭발할 것 같아서 적당히 멈추기로 했다
“지하야, 우주 좀 잘 부탁해.”“걱정하지 마.”지하는 가볍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 ‘우주는 유건이 아내의 심장 같은 존재니까, 내가 당연히 잘 챙겨야겠지.’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유건은 시연을 방으로 데려가서 재우려 했다.혹시라도 햇빛이 들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아를 바라보았다.“진아 씨, 부탁 좀...”“네.”진아는 유건의 말에 따라 방수 의류를 들어 시연의 얼굴과 머리를 가렸다.“됐어, 고마워.”유건은 한숨을 돌리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그 태도에 진아는 순간 놀랐다.‘고 대표가 이렇게까지 시연이를 아끼다니.’그녀는 연애를 해본 적 없지만, 주변 친구들의 연애는 익히 봐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남자도 유건과 비교할 수 없었다.‘이래서 시연이가 결혼을 결정했구나.’이제 진아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그것은 바로 유건이 앞으로도 시연만 바라보고, 장소미 같은 사람과는 더 이상 얽히지 않는 것. ...유건은 시연을 방으로 데려가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커튼을 내려, 편히 잘 수 있도록 했다.몇 분 정도 옆에서 머물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우주는 여전히 해변에 있었다.물론 지하가 잘 챙기고 있겠지만, 그래도 유건은 시연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해가 저물 무렵, 시연이 눈을 떴다. 푹 자고 난 덕분에 머리가 개운했다.그리고 방 안은 조용했고, 그녀 혼자뿐이었다.시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어 보니, 바깥은 무척이나 떠들썩했다.모두가 머무는 곳과 테라스는 연결되어 있었고, 중앙의 넓은 공간에는 수영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BBQ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붉게 물든 노을과 겹쳐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가운데에는 진아와 성빈이 있었다.진아는 바비큐를 굽고 있었고, 성빈은 잘 깐 귤을 그녀 입에 하나씩 넣어 주고 있었다.시연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시연아, 일어났어?”진아가 바로 반응하며 성빈을 툭툭 쳤다.
옆에서 빠르게 한쪽 팔이 뻗어 나와 우주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러나 너무 급한 탓에 숯불 화로가 그대로 넘어가면서 뜨거운 숯이 쏟아졌다. 그중 일부가 그 팔 위로 떨어졌다.“쓰읍!”유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입을 벌린 시연은 약 2초가량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유건 씨!”이어서 본능적으로 남자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빨리 보여줘요.”그녀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그리고 더 볼 것도 없었다. 고온의 숯이 직접 닿았으니 당연히 화상이었다.“빨리 와요!”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시연은 유건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우선 세면대 앞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화상 부위를 식혔다.“잠깐만 있어요.”여자는 곧바로 욕실로 뛰어가 대야를 찾아 들고, 냉장고의 얼음 칸에서 얼음을 퍼 담았다.그런 다음, 단호하게 지시했다.“팔 넣어요.”유건은 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왜 멍하니 있어요?”시연은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너무 아파서 정신이 나간 거예요?”그리고 답답해서 남자의 손을 직접 잡고 강제로 얼음물에 담갔다.유건은 당연히 정신을 놓은 게 아니었다.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시연이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시연은 원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지금처럼 유건을 신경 써 주고, 다급하게 챙기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그게 유건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역시,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겠지?'유건은 시연이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단순히 할아버지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순간, 그는 멀쩡한 팔로 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리고 여자를 품에 끌어당겼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여보, 날 좋아하지?”질문을 뱉어낸 순간, 남자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사실, 유건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시연이 자신을 조금은 좋아한다는 사실을.하지만 그녀가 직접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또한 묻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우주에게 차근차근 가르치듯 말하길 십 분.“누나가 말한 거, 기억했어?”“응!” 우주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다시는 안 그럴게. 누나, 화내지 마.”동생이 잔뜩 주눅 든 모습을 보니 시연의 마음이 또 약해졌다.그녀는 우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누나는 화난 게 아니야. 우주가 걱정돼서 그래.”바로 그 순간, 우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아이고!”기다렸다는 듯이 진아가 우주의 팔을 잡았다.“우리 우주 배고프다! 나랑 같이 가서 뭐 좀 먹자!”그녀는 우주를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아이고 참, 우리 우주를 배고프게 했네!”방 안에는 다시 부부 둘만 남았다.시연은 유건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약상자를 꺼냈다.이곳의 약상자는 꽤 잘 갖춰져 있었다. 화상 연고까지 있었다.“얼음찜질은 이 정도면 됐어요.”그녀는 유건의 팔을 살며시 잡아 닦아주었다.“물기부터 닦고, 연고 바를게요.”이어서 깨끗한 거즈를 꺼내 물기를 조심스럽게 흡수한 후, 면봉으로 연고를 정성껏 발랐다.그리고 한층 신중해진 얼굴로 말했다.“아마 물집이 잡힐 거예요. 더 아플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터뜨려 줄게요.”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앙다물고 조용히 말했다.“미안해요.”시연은 자기 동생이 유건을 다치게 했으니 당연히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그런 말은 하지 마.”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아내가 남편한테 이런 식으로 사과해야 하나?’어쩐지 유건의 속이 상했다.“지시연, 지금 너는 내 아내고, 우주는 내 처남이야. 그런 사과는 필요 없으니까 취소해.”시연은 순간 당황했다.‘말한 걸 어떻게 취소하라는 거지?’하지만 유건은 진심으로 기분 나빠했다.시연은 살짝 남자의 손을 잡고 나긋하게 말했다.“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취소할게요.”그녀는 때로는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오늘 유건이 아니었으면, 다친 건 우주였을 것이다.그런 남편에게 사과하는 것은 이상한 일
“여보, 나 다 했어.”욕실에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렸다.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답했다.“어, 알았어요.”그리고 허둥지둥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러나, 손을 떼기 전, 무심코 한 번 더 장소미의 생일을 빠르게 입력해 보았다. 화면에 뜬 글씨는 ‘비밀번호 오류’였다.순간, 가슴 깊이 안도감이 밀려왔고, 시연은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유건이 나와 손을 내밀었다.“가자. 나 배고파.”“나도요.”시연은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걸어 나가면서도 틈틈이 유건을 힐끔거렸다.‘남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여자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설정할까?’ ‘내가... 착각한 건 아니겠지?'...다음 날,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 시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출발 전, 시연은 고상훈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건의 팔을 치료해 주기로 했다. 예상한 대로, 화상 부위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소독한 바늘을 들고 하나씩 터뜨린 후, 그녀는 유건에게 연고를 발라주었다.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여긴 경구약이 없어서... 돌아가면 병원에서 항생제를 처방받는 게 좋겠어요. 감염되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요.”말하면서도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흉이 질 수도 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연해지긴 하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그런 시연을 보며 유건은 미소를 지었다.“그게 뭐 어때서? 난 여자도 아닌데, 흉 남으면 남는 대로 두지 뭐.”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남 일처럼 말하지 말아요.”“그건 그렇고.”유건이 여자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을 꺼냈다.“뭐예요?”시연이 남자의 손길을 피하지 않자, 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기환을 당신 곁에 붙이려고.”“네?”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이어서 말을 곱씹으며 다시 물었다.“나를 보호하려고 기환 씨를 붙이겠다는 거예요?”“똑똑하네.”유건은 시연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사실 이는 지난번 납치 사건 이후, 유건
고상훈은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내 선택이 옳았어. 시연이가 있어야 유건이가 사람답게 살 수 있어.’ “됐어.”모든 게 정리된 걸 확인하자, 고상훈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너희들은 이만 가봐. 나도 좀 자야겠다.”“그럼 할아버지 푹 쉬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그래, 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시연은 곧장 쉴 수 있었지만, 유건은 아니었다. 중요한 회사 업무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떠나기 전, 그는 시연에게 당부했다.“오늘은 공부하지 말고 푹 쉬어. 저녁엔 일찍 들어올 테니까 같이 저녁 먹자.”“네, 알았어요.”유건이 나가고 나서, 시연은 정말로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시연이 눈을 뜨니 어느새 다섯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창밖에는 붉은 석양이 걸려 있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시연은 하품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시연이 다니고 있는 산부인과 병원의 간호사였다.그 개인병원은 비용이 많이 든 만큼 서비스도 철저했다.간호사는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사모님, 모레가 정기 검진일인데 일정 괜찮으신가요? 시간 맞춰 오실 수 있죠?]“아, 네.”시연은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갈 수 있어요. 잊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네, 감사합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방문이 열리고 유건이 들어왔다.“일어났어?”“방금...”시연은 아직 남아 있던 잠기운을 털어내며 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급한 일만 처리하고 왔어.”유건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배 안 고파?”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럼 하고 싶은 거 있어? 내가 같이 해 줄게.”“바람 좀 쐬고 싶어요.”그녀는 테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자고 일어나니까 머리가 좀 띵해서요.”“좋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건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테라스로 나섰다.그리고 거기 놓인 라탄 소파에 앉아 시연을 품에 안았다.이 집에 산 지도 시간이
시연은 온몸이 찌릿하게 굳었고,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로얄호텔... 그날 밤... 그 남자...’ 애써 잊으려 했지만, 그건 분명 시연의 가슴 깊숙이 박힌 가시였다.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찔림. 그런데 소미가 지금 그걸 언급했다. ‘무슨 뜻이지? 설마... 뭔가 알아낸 거야?’ 시연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고, 소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너, 뭘 안다는 거야?” 시연은 숨을 참으며 다그쳤다. “그날... 그 남자, 누구야?” [진정해.] 소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 지금 강울대 뒷골목에 있어. 우리 잠깐 만나자. 내가 아는 걸 다 말해줄게.] “좋아.” 시연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근무 중 자리를 비우는 그녀를, 기환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소미가 보낸 주소를 따라, 시연은 강울대 후문 쪽에 있는 한 중식당으로 갔다. 물론, 식사하러 가는 건 아니었다. 그 식당엔 단독 룸이 있었고, 대화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먼저 도착한 시연은, 소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환은 무슨 일인지 몰라 식당 입구에서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미가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소미 씨?” 기환은 의아해졌다. ‘설마 형수님이 만날 사람이 장소미 씨였어?’ “기환 씨.” 소미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밀크티예요. 아까 주차하러 가는 길에 사 왔어요.”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장소미 씨 드시죠.” “괜히 사 온 거 아니에요. 시연이도 있으니, 정기환 씨도 있을 것 같아서 석 잔 산 거예요. 안 드시면 그냥 버릴 수밖에 없는데요?” “그럼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기환은 어쩔 수 없이 받아서 들었다. “천만에요.” 소미는 환하게 웃은 후, 나머지 두 잔을 들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기환은 밀크티를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생
“들어가시죠.” “응.”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어 열었다. 방 안엔 이미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말라보였지만, 한 명은 비대한 체격. 여자가 들어서자, 두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마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금은, 가져왔지?” 여긴 이태길, G시에서 알아주는 암시장이자,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될 모든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 오직 현금을 이용하는 것.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응.”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여행용 가방을 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마른 남자가 옆의 뚱뚱한 남자를 흘끔 보더니, 둘이 함께 다가와 가방을 열었다. 현금다발을 일일이 확인한 뒤, 이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시킨 일, 내용은 다 이해했어.” “좋아.” 여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끝나는 대로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때 잔금을 줄게.” “거래 성사.” 이 말을 마친 여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모자챙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여자가 허둥지둥 줍기 전에, 마른 남자가 손을 뻗어 먼저 집어 들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밀었다. “여기.”여자는 얼른 모자를 받아서 들었지만,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시선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뭘 그렇게 봐?” “아, 그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우리... 예전에 본 적 있나?” “아니거든.” 여자는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고, 단숨에 자리를 떠났다. ‘기분 나빠...’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골목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거칠게 숨을 몰아쉰 그녀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했다. ‘설마 했는데... 이 암시장에서 잡은 놈들이 그 둘일 줄은 몰랐네.’ ‘하마터면... 들킬
탈의실 한가운데엔, 의료진이 환복할 때 앉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시연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유건은 물론, 함께 들어온 간호사도 깜짝 놀랐다. “지 선생님, 왜 이러시죠?” “여보!” 유건은 단숨에 뛰어 들어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간호사님, 당장 의사 좀 불러주세요! 제 아내는... 임신 중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급히 뛰쳐나가려던 찰나, 유건의 품에 안긴 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유건은 얼떨떨했다. ‘여보...?’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탈의실이었다. “여긴...? 당신, 어떻게 들어왔어요?” ‘설마 이젠 수술실까지 침입하는 건가? 이 사람...?’“정신 좀 들어?” 유건은 대답 대신 그녀를 꼭 안은 채 그대로 걸어 나가려 했다. “어디 불편해? 쓰러질 때 부딪힌 데는 없어?” “어...어어?” 시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 “쓰러졌다고요?” 그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 이건 완전한 착각이잖아.’“내려줘요.” 시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쓰러졌잖아.” “아니, 쓰러진 게 아니라...” 결국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이번 수술을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긴 했지만, 시연은 끝까지 버텼고, 체력이 바닥나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으려다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거였다. “진짜예요. 그냥 잠들었어요.” “잠든 거라고?” 유건은 여전히 믿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 당신 생각만큼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요. 수술 끝났다고 바로 기절하는 스타일 아니라고요.” 옆에
시연은 유건을 조심스럽게 놓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봐요.” “응.” 그녀는 뒤돌아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문이 서서히 닫히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유건은 처음으로, 시간이 이렇게까지 더디게 흐르는 걸 느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 곧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지한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형님, 수술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잠깐 뭐라도 드시죠.” 하지만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안 먹을래.” 진심이었다. 그는 무언가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고도의 긴장 상태에서는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건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시연이가 분명... 이번 수술은 양석현 교수가 직접 지도하는 거고, 큰 수술이 아니라고 했었는데...’‘잘만 되면 정오쯤이면 끝날 거라고...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벌써 12시를 넘겼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유건의 가슴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한과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결국 한 시간 반이 지나,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질 무렵 수술실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 유건은 누구보다 먼저 뛰어갔다. 지한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간호사가 밀고 나온 수술대 위, 고상훈은 조용히 누워 있었고, 팔에는 아직 링거가 꽂혀 있었다. 곧이어 양석현 교수가 마스크를 벗고 나왔다. 그는 유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표님.” “교수님...” “수술은 아주 잘 됐습니다.” 양석현은 침착하게 말했다. “다만 어르신의 회복력이 떨어질 수 있어서 48시간 정도는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그 후엔
그 한마디가 소미의 뇌리에 박혔다.‘그래...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난 아직 포기할 수 없어.’‘그리고... 내 손에는 아직 남은 패도 있으니까.’ 그 순간, 눈물이 뚝 그쳤다. “늦었네, 이만 올라가서 쉬자.” “네...” 모녀는 서로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발밑을 가득 메운 아기용품들에 막혀 걸음을 멈췄다. “쳇!” 장미리는 갑자기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박스를 몇 번이나 세게 차도 성에 안 찼다. “네 아빠, 병에 걸리더니 이젠 정신까지 나갔나 봐. 죽기 전에 후회한들 뭐가 달라지니?” “엄마.” 소미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조용히 말했다. “아빠, 병 걸리고 나서 좀 달라졌잖아요. 너무 방심하지 마세요.” “왜?” 장미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몸 가지고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서 그래?” “그게 아니라...” 소미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지시연이랑 지우주 쪽이 걱정돼요.” 장미리는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챘고,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 지금... 그 둘한테 돈 줄까 봐 걱정하는 거야?” “네.” 소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 이 집안의 돈은 엄마가 잘 관리해야 해요. 아빠가 몰래 두 사람한테 뭔가 주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요.” “네 아빠 감히...?” 장미리는 눈을 부라리며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이 집을 십수 년 동안 지킨 사람이야. 내가 그런 허튼 꼴 당할까 봐?” “아니면 다행이고요.” 금요일.오늘은 고상훈의 수술 날이었다. 아침 일찍, 유건과 시연은 병원에 도착했고, 모든 수술 전 준비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였다. 고상훈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채 병상에 앉아 있었고, 유건은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시연은 수술 준비 때문에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유건이 고상훈의 손을 꼭 잡았다. 오히려 고상훈보다 손자의 얼
소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이 집구석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네...’ 그녀의 시선이 장미리가 들고 온 박스들로 향했다. 전부... 아기용품이었다. 놀란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설마, 진짜예요?” ‘설마 진짜 밖에 여자가 있어서... 애까지?’ 이쯤 되면 장미리의 의심이 헛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정말 너무 수상했다. “소미야...!” 장미리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으흐흑...” 지동성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며, 한결같이 말했다. “그런 일 없었다니까.” “그럼 이건 다 뭐예요?” 소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가 거짓말하는 건 같진 않아. 그럼 이 많은 아기용품은 대체 왜?” “선물하려고 산 거야.” 결국 지동성이 입을 열었다. “하! 웃기고 있네요!” 장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 우리 집 사람들 경조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는 사람이에요” “요즘 주변에 임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믿든 말든 당신 마음이지.” 지동성은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미야, 너도 들었지?” 장미리는 억울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소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의 행동... 확실히 요즘 너무 이상해.’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가 이미 다 알아버렸잖아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건 어때요? 계속 숨기다간... 더 골치 아파질 거예요.” “소미야?” 장미리는 놀라 소리쳤다. “너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소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아빠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동성은 입을 뗄 듯 말 듯 망설였다.그 모습에, 소미의 뇌리를 번뜩 스치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설마... 최근 들어 아빠가 보여준 수상한 움직임... 전부 지시연 때문인가?’ “아빠... 이거
기환은 시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 급히 손을 뻗었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근데... 내가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이...’‘그 사람이 병들었어. 그것도, 너무 많이...’기환은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시연을 본가까지 바래다주었다. 왕성애와 이호민에게 그녀를 맡긴 뒤, 유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형수님이 노은범 사장님을 만난 건 아니지만, 진료차트를 보고 오셨습니다.” [알겠어.]전화를 끊은 유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은범이... 우울증이라니...’ 그날 밤. 유건이 본가로 돌아왔을 때, 시연은 이미 잠든 상태였다. 그는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가가 살짝 부어 있었는데, 많이 운 모양이었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울다니.’ “됐어.” 유건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만 봐준다. 딱, 이번 한 번만.” ...그 시각, 장소미는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장미리의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말 좀 해봐요! 당신, 벙어리라도 된 거예요?” 며칠 전 퇴원한 지동성은 간 이식 대기 중이라, 당분간은 외래 치료로 버티고 있었다. “뭘 자꾸 설명하라는 거야?!” 지동성은 피곤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분명히 말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장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웃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당신, 사람을 기만하는 재주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때, 소미가 들어왔다. “엄마, 아빠, 또 왜 그러세요?” 부부싸움이 일상이 된 이 집안에서, 소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소미야!” 장미리는 다급히 딸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지동성을 가리켰다. “너 잘 왔다. 엄마 좀 도와줘. 너희 아빠...
심재규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것들, 시연은 스스로 다 알 수 있었다. “그건...” 기환이 아직도 망설이자, 시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같이 가요.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당장 절 묶어서 끌고 가세요.” 그러곤 간절히 덧붙였다. “부탁이에요, 기환 씨, 은범이는... 제 친구예요. 지금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아주 심하게.” “그럼, 알겠습니다.” 시연의 간절함에 결국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연이 은범을 직접 만나게 될까 봐, 기환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시연은 익숙하게 응급 외과로 향했고, 은범의 진료차트를 어렵지 않게 열람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병력, 과거력란에서 시선이 멈췄다.‘우울증 병력, 3년?’‘왼쪽 손목 자해 흉터... 영구적 손상?’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뻐근했다. 옆에 있던 당직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지 선생님, 지인분이세요?” “네.” 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이죠.”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외상은 크지 않아요. 아직 젊으니까 회복도 빠르고요. 근데...” 간호사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우울증이 꽤 심해요. 밤새 잠도 못 자고, 반복 행동도 있고... 오늘 정신과 교수님도 다녀가셨어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그 뒤로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연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가, 이내 텅 비어버렸다. “부탁드릴게요.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지 선생님.” 진료차트를 돌려주고, 시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빠르게 벗어났고, 끝내 은범과 만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시연은 점점 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시연이? 우리 시연이, 너무 오랜만에
“네.”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딱히 움직임은 없어요. 아마, 자기들 살기 바쁠 거예요.” 고상훈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때마침 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수술 날짜 정해졌어요. 이번 주 금요일인데, 그날은 할아버지 한 분만 수술이 잡혀 있어서 양석현 교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실 거예요. 물론 저도 양 교수님 곁에서 그분을 도와드릴 거고요. 할아버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그래, 잘 됐구나.” 고상훈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착한 손자며느리가 옆에 있는데, 내가 뭐가 무섭겠냐.” 수술 이야기를 마친 뒤, 유건은 먼저 병원을 나서 회사로 향했다. 시연은 고상훈 곁에 조금 더 머물다가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심재규였다. 그는 유건이 우주를 위해 따로 모셔 온 정신과 교수였다. “심 교수님?” “사모님.” 심재규 역시 시연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간이라면, 그는 분명 태산요양병원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래서 심재규도 급히 해명했다. “오늘 진행해야 할 우주 군의 치료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요양병원을 떠나기 전에 최예민 선생님께 인수인계도 다 해뒀고요.” “혹시라도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급한 볼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로 처리하고 돌아갈 겁니다.” 시연은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긴장하지 마세요. 따지러 온 건 아니니까요.” 그 말투와 표정이 진심처럼 느껴져, 심재규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제 환자 중 한 분이 지난번에 다쳤는데, 이후로 통 진료를 받으러 못 오셔서요. 시간 날 때 한번 보려고 들렀습니다.” “환자 보러 오신 거였군요?” 같은 의료인으로서, 시연은 그런 의사들을 가장 존경했다. ‘역시 심 교수님은 진짜 의사야.’ “교수님처럼 진심으로 환자를 생각하시는 분께 뭐라 할 이유는 없죠.” “사모님,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