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놀다 와.”시연의 몸 상태 때문에 신혼여행 계획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제남도를 떠날 것도 아니었다.계획대로라면 섬에서 이틀, 삼일 정도 더 머무르며 쉴 예정이었다.오후가 되자, 유강석이 앞장서서 바닷가에 가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동의했다.시연은 우주를 걱정하며 물었다.“우주, 가고 싶어?”우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시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가고 싶어.”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고민되었다. 몸이 불편한 탓에 동생을 제대로 돌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주는 영리했다. 바로 유건에게 시선을 돌렸다.게다가 우주는 시연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간절하게 바라볼 때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유건이 그걸 이겨낼 리 없었다. 결국 처남을 위해 나섰다.“가자. 우주는 걱정하지 마. 내가 볼게. 마침 우주도 수영 배우고 싶다며? 내가 가르쳐 줄게.”우주의 두 눈이 더 크게 빛났다.몇 번이나 말하려다 망설이며, 결국 기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매형, 진짜... 진짜야?”“진짜지.”유건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면, 네 누나가 날 가만둘 것 같아?”“누나.”매형의 약속을 받고 나니, 우주는 다시 시연을 바라보았다. 결국 결정권은 누나에게 있었다.동생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던 시연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물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그녀는 유건을 믿었다.감정을 떠나, 유건이라는 사람 자체가 신뢰감을 주었다.“와!”우주는 기쁨에 들떠 뛰어올랐다.“매형! 누나가 허락했어! 얼른 가자!”그렇게 다들 바닷가로 향했다.남자들은 전부 바다로 뛰어들었고, 시연만이 해변 의자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임진아는 자연스럽게 시연 곁을 지켰다.“안 들어가?”“귀찮아.”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움직이기도 싫어.”“히힛.”진아는 장난스럽게 다가오며 속삭였다.“어젯밤에 너무 무리했어?”시연
“네?”진아가 고개를 돌려 보니, 부지하였다.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는 사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지하는 여자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궁금해했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무 말 없이 표정만 저렇게 변하는 걸까?’그가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가게의 코코넛을 바라보니, 이미 개봉된 상태였다. 상황이 다 이해됐다.지하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핸드폰 안 가져온 건가?”진아는 순간 멍해졌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결심한 듯 손을 꽉 쥐며 말했다.“실례지만, 대신 결제해 주실 수 있나요? 핸드폰 찾으면 바로 송금해 드릴게요.”“흠...”지하는 일부러 생각하는 척했다.코코넛 몇 개 값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진아가 원한다면, 섬 하나를 사서 선물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 쫀득한 찹쌀떡 같은 진아가 묘하게 재미있어서 장난치고 싶어졌다.“못 해 줄 건 없지.”“정말요?”진아는 반색하며 기뻐했다.“응.”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대신, 나를 ‘오빠’라고 한 번 불러 봐. 그럼 그냥 사줄게. 돈도 안 받을게, 응?”진아는 순간 얼어붙었다.‘뭐라고?'그리고 곧바로 깨닫고는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됐어요! 도움 안 받을래요!”‘성빈이 말이 맞아. 이 사람,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코코넛 몇 개 사 준다고 생색을 내다니! 게다가 이런 장난까지!’진아가 화가 나서 돌아서려던 순간, 가게 주인이 말했다.“어이, 아가씨! 돈 안 내고 어디 가!” 이와 동시에 지하가 진아의 손목을 붙잡았다.“사장님 말씀 들었지? 아가씨, 먹튀는 나쁜 거야.”진아는 당황스럽고 화가 나면서도 창피함까지 몰려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됐어.”지하는 더 장난을 칠 기세였지만, 이대로 가다간 진아가 진짜 폭발할 것 같아서 적당히 멈추기로 했다
“지하야, 우주 좀 잘 부탁해.”“걱정하지 마.”지하는 가볍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 ‘우주는 유건이 아내의 심장 같은 존재니까, 내가 당연히 잘 챙겨야겠지.’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유건은 시연을 방으로 데려가서 재우려 했다.혹시라도 햇빛이 들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아를 바라보았다.“진아 씨, 부탁 좀...”“네.”진아는 유건의 말에 따라 방수 의류를 들어 시연의 얼굴과 머리를 가렸다.“됐어, 고마워.”유건은 한숨을 돌리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그 태도에 진아는 순간 놀랐다.‘고 대표가 이렇게까지 시연이를 아끼다니.’그녀는 연애를 해본 적 없지만, 주변 친구들의 연애는 익히 봐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남자도 유건과 비교할 수 없었다.‘이래서 시연이가 결혼을 결정했구나.’이제 진아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그것은 바로 유건이 앞으로도 시연만 바라보고, 장소미 같은 사람과는 더 이상 얽히지 않는 것. ...유건은 시연을 방으로 데려가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커튼을 내려, 편히 잘 수 있도록 했다.몇 분 정도 옆에서 머물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우주는 여전히 해변에 있었다.물론 지하가 잘 챙기고 있겠지만, 그래도 유건은 시연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해가 저물 무렵, 시연이 눈을 떴다. 푹 자고 난 덕분에 머리가 개운했다.그리고 방 안은 조용했고, 그녀 혼자뿐이었다.시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어 보니, 바깥은 무척이나 떠들썩했다.모두가 머무는 곳과 테라스는 연결되어 있었고, 중앙의 넓은 공간에는 수영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BBQ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붉게 물든 노을과 겹쳐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가운데에는 진아와 성빈이 있었다.진아는 바비큐를 굽고 있었고, 성빈은 잘 깐 귤을 그녀 입에 하나씩 넣어 주고 있었다.시연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시연아, 일어났어?”진아가 바로 반응하며 성빈을 툭툭 쳤다.
옆에서 빠르게 한쪽 팔이 뻗어 나와 우주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러나 너무 급한 탓에 숯불 화로가 그대로 넘어가면서 뜨거운 숯이 쏟아졌다. 그중 일부가 그 팔 위로 떨어졌다.“쓰읍!”유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입을 벌린 시연은 약 2초가량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유건 씨!”이어서 본능적으로 남자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빨리 보여줘요.”그녀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그리고 더 볼 것도 없었다. 고온의 숯이 직접 닿았으니 당연히 화상이었다.“빨리 와요!”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시연은 유건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우선 세면대 앞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화상 부위를 식혔다.“잠깐만 있어요.”여자는 곧바로 욕실로 뛰어가 대야를 찾아 들고, 냉장고의 얼음 칸에서 얼음을 퍼 담았다.그런 다음, 단호하게 지시했다.“팔 넣어요.”유건은 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왜 멍하니 있어요?”시연은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너무 아파서 정신이 나간 거예요?”그리고 답답해서 남자의 손을 직접 잡고 강제로 얼음물에 담갔다.유건은 당연히 정신을 놓은 게 아니었다.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시연이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시연은 원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지금처럼 유건을 신경 써 주고, 다급하게 챙기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그게 유건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역시,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겠지?'유건은 시연이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단순히 할아버지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순간, 그는 멀쩡한 팔로 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리고 여자를 품에 끌어당겼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여보, 날 좋아하지?”질문을 뱉어낸 순간, 남자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사실, 유건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시연이 자신을 조금은 좋아한다는 사실을.하지만 그녀가 직접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또한 묻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우주에게 차근차근 가르치듯 말하길 십 분.“누나가 말한 거, 기억했어?”“응!” 우주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다시는 안 그럴게. 누나, 화내지 마.”동생이 잔뜩 주눅 든 모습을 보니 시연의 마음이 또 약해졌다.그녀는 우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누나는 화난 게 아니야. 우주가 걱정돼서 그래.”바로 그 순간, 우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아이고!”기다렸다는 듯이 진아가 우주의 팔을 잡았다.“우리 우주 배고프다! 나랑 같이 가서 뭐 좀 먹자!”그녀는 우주를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아이고 참, 우리 우주를 배고프게 했네!”방 안에는 다시 부부 둘만 남았다.시연은 유건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약상자를 꺼냈다.이곳의 약상자는 꽤 잘 갖춰져 있었다. 화상 연고까지 있었다.“얼음찜질은 이 정도면 됐어요.”그녀는 유건의 팔을 살며시 잡아 닦아주었다.“물기부터 닦고, 연고 바를게요.”이어서 깨끗한 거즈를 꺼내 물기를 조심스럽게 흡수한 후, 면봉으로 연고를 정성껏 발랐다.그리고 한층 신중해진 얼굴로 말했다.“아마 물집이 잡힐 거예요. 더 아플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터뜨려 줄게요.”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앙다물고 조용히 말했다.“미안해요.”시연은 자기 동생이 유건을 다치게 했으니 당연히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그런 말은 하지 마.”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아내가 남편한테 이런 식으로 사과해야 하나?’어쩐지 유건의 속이 상했다.“지시연, 지금 너는 내 아내고, 우주는 내 처남이야. 그런 사과는 필요 없으니까 취소해.”시연은 순간 당황했다.‘말한 걸 어떻게 취소하라는 거지?’하지만 유건은 진심으로 기분 나빠했다.시연은 살짝 남자의 손을 잡고 나긋하게 말했다.“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취소할게요.”그녀는 때로는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오늘 유건이 아니었으면, 다친 건 우주였을 것이다.그런 남편에게 사과하는 것은 이상한 일
“여보, 나 다 했어.”욕실에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렸다.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답했다.“어, 알았어요.”그리고 허둥지둥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러나, 손을 떼기 전, 무심코 한 번 더 장소미의 생일을 빠르게 입력해 보았다. 화면에 뜬 글씨는 ‘비밀번호 오류’였다.순간, 가슴 깊이 안도감이 밀려왔고, 시연은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유건이 나와 손을 내밀었다.“가자. 나 배고파.”“나도요.”시연은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걸어 나가면서도 틈틈이 유건을 힐끔거렸다.‘남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여자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설정할까?’ ‘내가... 착각한 건 아니겠지?'...다음 날,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 시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출발 전, 시연은 고상훈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건의 팔을 치료해 주기로 했다. 예상한 대로, 화상 부위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소독한 바늘을 들고 하나씩 터뜨린 후, 그녀는 유건에게 연고를 발라주었다.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여긴 경구약이 없어서... 돌아가면 병원에서 항생제를 처방받는 게 좋겠어요. 감염되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요.”말하면서도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흉이 질 수도 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연해지긴 하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그런 시연을 보며 유건은 미소를 지었다.“그게 뭐 어때서? 난 여자도 아닌데, 흉 남으면 남는 대로 두지 뭐.”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남 일처럼 말하지 말아요.”“그건 그렇고.”유건이 여자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을 꺼냈다.“뭐예요?”시연이 남자의 손길을 피하지 않자, 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기환을 당신 곁에 붙이려고.”“네?”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이어서 말을 곱씹으며 다시 물었다.“나를 보호하려고 기환 씨를 붙이겠다는 거예요?”“똑똑하네.”유건은 시연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사실 이는 지난번 납치 사건 이후, 유건
고상훈은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내 선택이 옳았어. 시연이가 있어야 유건이가 사람답게 살 수 있어.’ “됐어.”모든 게 정리된 걸 확인하자, 고상훈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너희들은 이만 가봐. 나도 좀 자야겠다.”“그럼 할아버지 푹 쉬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그래, 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시연은 곧장 쉴 수 있었지만, 유건은 아니었다. 중요한 회사 업무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떠나기 전, 그는 시연에게 당부했다.“오늘은 공부하지 말고 푹 쉬어. 저녁엔 일찍 들어올 테니까 같이 저녁 먹자.”“네, 알았어요.”유건이 나가고 나서, 시연은 정말로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시연이 눈을 뜨니 어느새 다섯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창밖에는 붉은 석양이 걸려 있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시연은 하품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시연이 다니고 있는 산부인과 병원의 간호사였다.그 개인병원은 비용이 많이 든 만큼 서비스도 철저했다.간호사는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사모님, 모레가 정기 검진일인데 일정 괜찮으신가요? 시간 맞춰 오실 수 있죠?]“아, 네.”시연은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갈 수 있어요. 잊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네, 감사합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방문이 열리고 유건이 들어왔다.“일어났어?”“방금...”시연은 아직 남아 있던 잠기운을 털어내며 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급한 일만 처리하고 왔어.”유건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배 안 고파?”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럼 하고 싶은 거 있어? 내가 같이 해 줄게.”“바람 좀 쐬고 싶어요.”그녀는 테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자고 일어나니까 머리가 좀 띵해서요.”“좋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건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테라스로 나섰다.그리고 거기 놓인 라탄 소파에 앉아 시연을 품에 안았다.이 집에 산 지도 시간이
유건은 그렇게 쉽게 인정해 버렸다.시연은 적잖이 놀랐다.유건은 쉽게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런데도 이렇게 솔직하게 인정하다니...‘그 여자, 보통 사람이 아니네.’시연의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누구예요?”그리고 질문이 이어졌다.“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혹시 만난 적 있어요?”‘이상하네. 우리가 결혼하고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장소미 말고는 고유건 주변에서 다른 여자를 본 적이 없었는데...’“여보.”유건은 시연을 품에 안고, 난감한 듯 미소 지었다.“그만 물어봐.”“왜요? 말하기 싫어서 그래요?”시연은 손가락으로 남자의 가슴을 툭툭 찔렀다.“너무 아끼는 거 아니에요? 좀 알려 줘봐요.”“착하지.”유건은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여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멈추게 했다.“그 애는 좀 달라. 당신, 분명히 화낼 거야.” “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었다.그리고 일부러 소리 높여 말했다.“와! 첫사랑인가 보네요?”“응.”다시 한번, 유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순간, 시연의 심장이 묘하게 움츠러들었다.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더 알고 싶어졌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심지어 장소미가 유건의 마음속에서 그녀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여자가 고유건의 ‘진짜 사랑’이었다고?’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긴 속눈썹을 살짝 떨었다.“그럼, 왜 함께하지 못했어요? 혹시... 할아버지께서 반대하신 거예요?” ‘장소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혹시, 두 사람도 강제로 갈라진 걸까?’“아니.”유건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눈동자에는 희미한 아련함이 스쳐 갔다.“오랫동안 연락이 끊겼어.”“헤어진 거예요?”“그것도 아니야.”유건은 깊은숨을 쉬었다.“그땐 우리 둘 다 너무 어렸어. 헤어질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애는 돌아오지 않았어.”“아... 그렇구나...”
기환은 시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 급히 손을 뻗었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근데... 내가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이...’‘그 사람이 병들었어. 그것도, 너무 많이...’기환은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시연을 본가까지 바래다주었다. 왕성애와 이호민에게 그녀를 맡긴 뒤, 유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형수님이 노은범 사장님을 만난 건 아니지만, 진료차트를 보고 오셨습니다.” [알겠어.]전화를 끊은 유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은범이... 우울증이라니...’ 그날 밤. 유건이 본가로 돌아왔을 때, 시연은 이미 잠든 상태였다. 그는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가가 살짝 부어 있었는데, 많이 운 모양이었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울다니.’ “됐어.” 유건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만 봐준다. 딱, 이번 한 번만.” ...그 시각, 장소미는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장미리의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말 좀 해봐요! 당신, 벙어리라도 된 거예요?” 며칠 전 퇴원한 지동성은 간 이식 대기 중이라, 당분간은 외래 치료로 버티고 있었다. “뭘 자꾸 설명하라는 거야?!” 지동성은 피곤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분명히 말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장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웃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당신, 사람을 기만하는 재주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때, 소미가 들어왔다. “엄마, 아빠, 또 왜 그러세요?” 부부싸움이 일상이 된 이 집안에서, 소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소미야!” 장미리는 다급히 딸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지동성을 가리켰다. “너 잘 왔다. 엄마 좀 도와줘. 너희 아빠...
심재규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것들, 시연은 스스로 다 알 수 있었다. “그건...” 기환이 아직도 망설이자, 시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같이 가요.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당장 절 묶어서 끌고 가세요.” 그러곤 간절히 덧붙였다. “부탁이에요, 기환 씨, 은범이는... 제 친구예요. 지금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아주 심하게.” “그럼, 알겠습니다.” 시연의 간절함에 결국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연이 은범을 직접 만나게 될까 봐, 기환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시연은 익숙하게 응급 외과로 향했고, 은범의 진료차트를 어렵지 않게 열람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병력, 과거력란에서 시선이 멈췄다.‘우울증 병력, 3년?’‘왼쪽 손목 자해 흉터... 영구적 손상?’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뻐근했다. 옆에 있던 당직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지 선생님, 지인분이세요?” “네.” 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이죠.”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외상은 크지 않아요. 아직 젊으니까 회복도 빠르고요. 근데...” 간호사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우울증이 꽤 심해요. 밤새 잠도 못 자고, 반복 행동도 있고... 오늘 정신과 교수님도 다녀가셨어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그 뒤로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연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가, 이내 텅 비어버렸다. “부탁드릴게요.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지 선생님.” 진료차트를 돌려주고, 시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빠르게 벗어났고, 끝내 은범과 만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시연은 점점 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시연이? 우리 시연이, 너무 오랜만에
“네.”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딱히 움직임은 없어요. 아마, 자기들 살기 바쁠 거예요.” 고상훈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때마침 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수술 날짜 정해졌어요. 이번 주 금요일인데, 그날은 할아버지 한 분만 수술이 잡혀 있어서 양석현 교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실 거예요. 물론 저도 양 교수님 곁에서 그분을 도와드릴 거고요. 할아버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그래, 잘 됐구나.” 고상훈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착한 손자며느리가 옆에 있는데, 내가 뭐가 무섭겠냐.” 수술 이야기를 마친 뒤, 유건은 먼저 병원을 나서 회사로 향했다. 시연은 고상훈 곁에 조금 더 머물다가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심재규였다. 그는 유건이 우주를 위해 따로 모셔 온 정신과 교수였다. “심 교수님?” “사모님.” 심재규 역시 시연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간이라면, 그는 분명 태산요양병원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래서 심재규도 급히 해명했다. “오늘 진행해야 할 우주 군의 치료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요양병원을 떠나기 전에 최예민 선생님께 인수인계도 다 해뒀고요.” “혹시라도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급한 볼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로 처리하고 돌아갈 겁니다.” 시연은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긴장하지 마세요. 따지러 온 건 아니니까요.” 그 말투와 표정이 진심처럼 느껴져, 심재규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제 환자 중 한 분이 지난번에 다쳤는데, 이후로 통 진료를 받으러 못 오셔서요. 시간 날 때 한번 보려고 들렀습니다.” “환자 보러 오신 거였군요?” 같은 의료인으로서, 시연은 그런 의사들을 가장 존경했다. ‘역시 심 교수님은 진짜 의사야.’ “교수님처럼 진심으로 환자를 생각하시는 분께 뭐라 할 이유는 없죠.” “사모님, 과
유건이 이렇게까지 많은 걸 해줬는데, 시연은 자신이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아...”시연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다.‘너무 쉽게 마음이 흔들려...’‘다짐했잖아.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결국, 그녀는 선물을 주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상자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유건이 돌아왔을 때, 욕실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시연이 샤워 중이라는 걸 알기에 방해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은 후, 소파에 앉았다.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상자가 눈에 띄었다.“이건 뭐지?”그는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손바닥 크기의 작은 상자였다. 시계 상자처럼 보였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열어보았다.그런데 시계가 아니었다.황동으로 만들어진 반듯한 네모의 그 물건은, 라이터였다.손안의 정교한 그 물건은 표면이 매끄럽게 연마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작은 영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To H.]그는 무심코 속삭였다.“To H?”그 순간, 유건의 눈이 흔들렸다.‘H?’‘‘husband’? 나잖아?!’‘나한테 주는 선물인가?’‘하긴, 이 방에서 나한테 이런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유건은 바로 떠올렸다.시연이 직접 자신의 생일 선물을 준비했다던 기환의 말을. ‘설마... 이건가?’유건은 손아귀에 서서히 힘을 주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때, 욕실 안에 샤워기 소리가 멈췄다.시연이 욕실에서 나왔고, 곧바로 유건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리고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 순간, 당황스러움에 시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녀는 급히 달려갔다.“유건 씨...!”“응?”유건은 웃으며 대답했고,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괜히 애쓰지 마. 당신, 나보다 키 작은 거 알잖아. 뺏을 수 있겠어?”시연도 그걸 알고 있었다.‘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건가...’그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
결국, 유건은 시연을 빠르게 차에 실려 집으로 향했다....침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바닥에는 남성 재킷, 넥타이, 여성 숄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시연은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기 싫었다.그러나 몸이 끈적거려 너무 불편했다.“저기...”눈도 뜨지 않은 채, 옆에 있는 남자를 발끝으로 살짝 툭 찼다.“안 씻어요?” 시연은 깔끔한 걸 좋아했고, 유건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먼저? 아니면 내가 먼저?”시연은 눈을 부릅뜨며 노려봤다.“나 혼자 씻으라고요?”‘지금 내 상태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푸흣... 하하, 알았어.”유건은 기꺼이 시연을 안아 들고, 여자를 번쩍 안아 욕실로 향했다.그가 시연을 씻겨 주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사실, 처음부터 유건이 먼저 나섰다.그는 이런 부부간의 애정 표현을 꽤 즐기는 편이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런 일이 그에게 일종의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유건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시연의 입술을 깨물듯이 키스했다.“아얏, 아파요...”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왜 깨물어요?”유건은 대답 대신 입술을 따라 천천히 입맞춤을 퍼부었다.“우리 아기는 언제 태어나지?”‘응...?’‘설마... 그것도 모른다고?’유건은 고개를 젓다가 피식 웃었다.“이 아이, 나중에 정말 효도해야 해.”그는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이 녀석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지...”그 순간, 시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푹 잠든 후, 다음 날 아침.오늘은 출산 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보통 이 시기의 임산부는 한 달에 한 번만 검진을 받으면 되지만, 시연의 초기 상태가 다소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오선화는 특별 지시를 하여 일주일에 한 번 검진을 받도록 했다. 이번에 유건은 시연과 함께 병원에 동행했다.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후, 오선화와 유건은 또다시 시연을 피해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확실히 좋아졌습니다.”오선화는 차트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지난번보다
“어떻게 그래요?”시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웃었다.“교수님께서는 늘 저를 위해 힘써 주셨잖아요. 감사한 건 저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나한테 감사할 거 없어.”양석현은 눈가가 촉촉해지며 말했다.“감사해야 할 사람은 너 자신이야. 역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냈으니까.”“네...”시연은 목이 메어 끄덕였다.양석현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만약 대학원 입학 특별전형 대상자로 선정되면, 너는 강울대병원 인턴으로 근무할 기회를 얻게 돼. 그렇게 되면, 학업도, 경력도 한층 더 안정될 거야. 결과를 기다려보자꾸나.”“네.”...양석현 교수 연구실을 나서자, 시연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너무 기쁜 나머지,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확인도 안 한 채 곧바로 받았다.“여보세요?”[여보.]유건이었다.[퇴근했어? 나 지금 병원 앞이야.]“아, 그래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시연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건물 출입문을 나서자, 유건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시연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며 거의 뛰다시피 남자에게 달려갔다.“뛰지 마!”유건이 급히 말렸지만, 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허리를 감싸 안고,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유건은 순간 얼어붙었다. 마치 몸이 굳어버린 듯했다.하지만 곧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뛰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안 듣네?”“유건 씨.”시연은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눈물방울이 눈가에 가득 맺혀 있었다.그리고 곧,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여보?!”유건은 당황하여 손발이 엉켜 허둥댔다.“갑자기 왜 울어?”‘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선배한테 혼났어? 동료가 괴롭혔어? 아니면, 환자가 당신을 힘들게 했어?”그러나 시연은 계속 울기만 했고, 대답이 없었다.“말해봐!”유건은 점점 초조해졌다.“대체 어떤 개XX가 널 울렸어?!”“아, 아니에요.”시연이
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무의식적으로 발코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주저하다가 조용히 입을 뗐다.“소미 씨, 미안해. 난 못 갈 것 같아.”[네?]소미는 당황했는데, 유건이 거절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부탁한 건, 거의 다 들어줬던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랜 세월 쌓인 정’까지 있었는데...[왜요?]“미안해.”유건은 차분하게 말했다.“우주가 이제 막 퇴원했어. 아직 회복 중이라 시연이도 신경이 예민한 상태야. 난 두 사람 곁을 지켜야 해.”[아...]소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지시연 곁을 지켜야 한다고? 하루 24시간 내내?’‘둘은 이미 부부가 됐는데, 매일 함께 있는 걸로는 부족해서, 단 몇 시간조차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거야?’ 소미는 손을 꼭 쥐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이해해요. 그래야죠.]“그날엔 지한을 보낼게.”유건은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소미 씨가 그 바닥에서 가볍게 보이는 일은 없을 거야.”[그래요. 고마워요.]전화를 끊자마자, 소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힘껏 던졌다.핸드폰이 벽에 부딪혀 땅에 떨어졌다.“신경이 예민하다고?”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래? 그럼 내 마음은...?’‘지시연 곁을 지켜주겠다고? 그럼 나는?’ ...조용한 나날이 흐르던 어느 날.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시연은 양석현 교수에게 호출받았다.“교수님.”“오, 시연이 왔구나!”양석현 교수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아니, 오히려 들뜬 기색이었다.“어서 앉아! 임신 중인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고 대표님이 나를 탓할 거 아니야!” “무슨 일이신데요?”시연은 피식 웃으며 앉았다.“제가 그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에요? 저, 그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은 아니에요.” “아니, 네 나이 또래라면 누구든 놀랄 만한 소식이야.”양석현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돌렸다.“솔직히 말하면, 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유건이 본 것은 시연이 가져온 꽃과 묘비 위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여자는 젊었고, 눈매와 이목구비가 시연과 닮아 있었다.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후, 묘비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하... 이제 모든 게 명확해졌네”유건은 냉소하며 발끝에서부터 냉기가 스며들었다.그리고 단숨에 시연이 오늘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바로 ‘부명주’라는 사람이었으며, 그녀는 시연의 친어머니였다.그는 천천히 시연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분이 네가 말한 ‘어르신’이야?”남자의 눈빛이 차가웠다.“지금, 내 앞에서 한번 불러보지 그래? ‘이모’라고.” 시연은 눈을 감았다가 뜬 후,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엄마예요. 오늘은 엄마의 기일이고요.”“이제야 말하네?”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얼굴이 굳어지고, 감정이 격해져 제어할 수 없었다.그리고 짜증스럽게 발을 구르더니, 마지막엔 참지 못하고 욕설까지 터져 나왔다.“씨X, 난 완전 바보였네! 지시연, 넌 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시연은 고개를 숙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시연, 난 네 남편이야!”법적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두 사람은 부부였다.결혼식도 했고, 부부로서 관계도 맺었다.그런데 장모 기일에, 묘지까지 왔으면서도 유건은 제지당하고 말았다.“설명해. 왜 거짓말했어? 왜 날 못 오게 했어?”시연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천천히 말했다.“당신을 오게 하면...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소개해야 하죠?”“뭐...?”유건은 어이없어졌고, 시연은 이어서 말했다.“엄마한테 ‘이 사람이 내 남편이에요, 엄마의 사위예요’라고 해야 하나요?”“아니, 당연한 거잖아.”유건이 답했다.“하지만...”시연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난 일 년에 최소 다섯 번은 여기에 와요. 설, 한식, 추석, 그리고 생일이랑 기일...”그러다 목소리가 서늘해졌다.“그런데 다음번에 올 때, 내가 혼자라면요...?”“여보...”유건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그러나 시연은
“...미안하다.”지동성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아빠가 잘못했다. 깊이 생각하지 못했어.”“됐어요.”시연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과한다고 우주가 다치기 전으로 돌아가나요?”“시연아... 아, 맞다.”지동성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지갑을 꺼내어 카드를 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지난번에 주려던 거야. 받아.”시연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다시 설득했다.“필요할 거야.”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중요한 날에 너 혼자 왔구나. 고 대표는 네 곁을 지키지 않았어, 그 말인즉슨, 그 사람은 널 충분히 아끼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오래갈 것 같니? 고씨 가문을 떠나게 되면, 너는 돈이 필요할 거야.” 시연은 잠시 흔들렸다.왜냐하면 지동성이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지동성 집안의 재산 중에는 시연과 우주의 몫도 있는 게 맞았다.“시연아, 받아. 거절하지 말고.”그때, 뒤에서 깊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럴 필요 없습니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연은 긴장했다.뒤를 돌아보자, 유건의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반사적으로 유건의 앞을 가로막았다.즉, 묘비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왜 왔어요? 기다리라고 했잖아요.”유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왜 오면 안 되는데?”‘안 왔으면, 내 와이프 딴 남자한테 뺏겼을지도 몰라.’그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었다.멀리서도 지동성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고,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처음에는 시연과 지동성이 친척과 같은 관계라고 하니, 지동성이 두 마디 정도하고 간다면 유건도 이해할 참이었다. ‘가족 같은 사이니까, 그냥 몇 마디 하는 거겠지.’하지만, 지동성은 계속 떠날 기미가 없었다.‘뭐야, 카드까지 내밀고 있잖아?’유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는 시연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그리고 지동성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 사장님, 아내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