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다 했어.”욕실에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렸다.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답했다.“어, 알았어요.”그리고 허둥지둥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러나, 손을 떼기 전, 무심코 한 번 더 장소미의 생일을 빠르게 입력해 보았다. 화면에 뜬 글씨는 ‘비밀번호 오류’였다.순간, 가슴 깊이 안도감이 밀려왔고, 시연은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유건이 나와 손을 내밀었다.“가자. 나 배고파.”“나도요.”시연은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걸어 나가면서도 틈틈이 유건을 힐끔거렸다.‘남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여자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설정할까?’ ‘내가... 착각한 건 아니겠지?'...다음 날,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 시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출발 전, 시연은 고상훈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건의 팔을 치료해 주기로 했다. 예상한 대로, 화상 부위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소독한 바늘을 들고 하나씩 터뜨린 후, 그녀는 유건에게 연고를 발라주었다.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여긴 경구약이 없어서... 돌아가면 병원에서 항생제를 처방받는 게 좋겠어요. 감염되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요.”말하면서도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흉이 질 수도 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연해지긴 하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그런 시연을 보며 유건은 미소를 지었다.“그게 뭐 어때서? 난 여자도 아닌데, 흉 남으면 남는 대로 두지 뭐.”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남 일처럼 말하지 말아요.”“그건 그렇고.”유건이 여자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을 꺼냈다.“뭐예요?”시연이 남자의 손길을 피하지 않자, 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기환을 당신 곁에 붙이려고.”“네?”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이어서 말을 곱씹으며 다시 물었다.“나를 보호하려고 기환 씨를 붙이겠다는 거예요?”“똑똑하네.”유건은 시연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사실 이는 지난번 납치 사건 이후, 유건
고상훈은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내 선택이 옳았어. 시연이가 있어야 유건이가 사람답게 살 수 있어.’ “됐어.”모든 게 정리된 걸 확인하자, 고상훈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너희들은 이만 가봐. 나도 좀 자야겠다.”“그럼 할아버지 푹 쉬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그래, 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시연은 곧장 쉴 수 있었지만, 유건은 아니었다. 중요한 회사 업무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떠나기 전, 그는 시연에게 당부했다.“오늘은 공부하지 말고 푹 쉬어. 저녁엔 일찍 들어올 테니까 같이 저녁 먹자.”“네, 알았어요.”유건이 나가고 나서, 시연은 정말로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시연이 눈을 뜨니 어느새 다섯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창밖에는 붉은 석양이 걸려 있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시연은 하품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시연이 다니고 있는 산부인과 병원의 간호사였다.그 개인병원은 비용이 많이 든 만큼 서비스도 철저했다.간호사는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사모님, 모레가 정기 검진일인데 일정 괜찮으신가요? 시간 맞춰 오실 수 있죠?]“아, 네.”시연은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갈 수 있어요. 잊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네, 감사합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방문이 열리고 유건이 들어왔다.“일어났어?”“방금...”시연은 아직 남아 있던 잠기운을 털어내며 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급한 일만 처리하고 왔어.”유건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배 안 고파?”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럼 하고 싶은 거 있어? 내가 같이 해 줄게.”“바람 좀 쐬고 싶어요.”그녀는 테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자고 일어나니까 머리가 좀 띵해서요.”“좋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건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테라스로 나섰다.그리고 거기 놓인 라탄 소파에 앉아 시연을 품에 안았다.이 집에 산 지도 시간이
유건은 그렇게 쉽게 인정해 버렸다.시연은 적잖이 놀랐다.유건은 쉽게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런데도 이렇게 솔직하게 인정하다니...‘그 여자, 보통 사람이 아니네.’시연의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누구예요?”그리고 질문이 이어졌다.“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혹시 만난 적 있어요?”‘이상하네. 우리가 결혼하고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장소미 말고는 고유건 주변에서 다른 여자를 본 적이 없었는데...’“여보.”유건은 시연을 품에 안고, 난감한 듯 미소 지었다.“그만 물어봐.”“왜요? 말하기 싫어서 그래요?”시연은 손가락으로 남자의 가슴을 툭툭 찔렀다.“너무 아끼는 거 아니에요? 좀 알려 줘봐요.”“착하지.”유건은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여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멈추게 했다.“그 애는 좀 달라. 당신, 분명히 화낼 거야.” “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었다.그리고 일부러 소리 높여 말했다.“와! 첫사랑인가 보네요?”“응.”다시 한번, 유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순간, 시연의 심장이 묘하게 움츠러들었다.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더 알고 싶어졌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심지어 장소미가 유건의 마음속에서 그녀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여자가 고유건의 ‘진짜 사랑’이었다고?’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긴 속눈썹을 살짝 떨었다.“그럼, 왜 함께하지 못했어요? 혹시... 할아버지께서 반대하신 거예요?” ‘장소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혹시, 두 사람도 강제로 갈라진 걸까?’“아니.”유건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눈동자에는 희미한 아련함이 스쳐 갔다.“오랫동안 연락이 끊겼어.”“헤어진 거예요?”“그것도 아니야.”유건은 깊은숨을 쉬었다.“그땐 우리 둘 다 너무 어렸어. 헤어질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애는 돌아오지 않았어.”“아... 그렇구나...”
씻고 나서 시연은 아침과 점심을 한 끼로 때운 후, 가방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집을 나서는 순간, 정기환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형수님, 좋은 아침이에요.”“형님께서 앞으로 형수님이 외출하실 때마다 따라다니라고 하셨어요.”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방해는 안 할게요. 저를 그냥 기사라고 생각하세요. 웬만하면 앞에 안 나타날 테니까요.”이 이야기는 이미 유건에게 들었기에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자, 형수님, 타세요.”“네.”...병원에 도착한 시연은 곧바로 외래 진료실로 향했다.양석현 교수의 대리 진료였다.자리에 앉자마자 끊임없이 환자들이 들어왔고, 두 시간 내내 물 한 모금 마실 틈도 없었다.한 환자의 진료를 마친 뒤, 시연은 프린트된 진료 기록을 건넸다.“이 날짜에 맞춰서 다시 오세요.”“감사합니다, 선생님.”“다음 분...”문이 열리자마자 여러 명이 몰려 들어왔다.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어떻게 된 거죠? 환자는 한 분만 들어오시고, 보호자는 한 분만 동반해 주세요.”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 중년 남성이 붉어진 눈으로 노려보며 다가왔다.“당신이 양석현 교수야?”시연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석현 교수가 아니었다.“무슨 일이시죠?”“흥!”남자는 시연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더욱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이깟 게 무슨 의사야? 내 아이가 수술받기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당신이 다른 사람한테 차례를 넘겨줬다며?!” “의사라면, 모든 생명이 똑같이 여겨야 하는 거 아니야? 돈 있는 집안 애들이 더 소중한 거야?!”점점 더 격양된 목소리.그리고 갑자기, 손을 들어 시연을 때리려 했다.“뭐 하시는 겁니까?!”시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하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도망쳐 봤자야! 난 오늘 내 아이의 정당한 권리를 찾으러 왔어!
오후 여섯 시, 시연은 마지막 환자를 진료하고 진료실을 정리했다.양석현 교수의 진료는 정해진 수량이 있었고,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 수도 한정되어 있었다.시연이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기환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생 많았어요. 이제 가면 될까요?” 기환이 말했다.“형수님, 서두를 필요 없어요. 형님이 금방 온다고 하셨거든요.”“네?”시연은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유건 씨가 온다고요?”말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목소리는 부드럽고 가벼웠다.“그럼 좀 기다려야겠네요.”20분 뒤, 유건이 도착했다.“형님.”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시연에게 다가왔다.시연은 책을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었다.“왔어요?”“어디 다쳤어?”유건은 시연 앞에 반쯤 무릎을 꿇으며 다급하게 물었다.그리고 손을 뻗어 여자의 다리를 살피며 다시 한번 물었다.“어느 쪽이지?”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려 했다.시연은 깜짝 놀라 유건의 손을 막았다.“유건 씨!”“응?”유건은 태연하게 눈썹을 올렸다.“걱정하지 마, 우리밖에 없어.”이미 기환과 다른 직원들은 조용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오른쪽 다리예요.”시연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손을 풀었다.“별거 아니에요. 살짝 긁힌 정도예요. 내가 부주의해서 그런 거고요.”유건은 꼼꼼하게 살펴본 후, 더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이제 곧 엄마가 될 사람이니까, 더 조심해야 해.”“그래요...”시연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유건 씨가 또 아이에 대한 이야기했어.’ ‘그렇다면... 이 기회에 다음 출산 검사 일정에 대해 말해도 될까?’시연이 고민하는 사이, 유건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오늘은 특별히 집 말고 밖에서 먹자.”시연은 유건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웃었다.“좋아요. 당신이 결정해요.”차를 몰아 향한 곳은 ‘영복루’였다.시연의 취향을 고려한 유건은 꼼꼼하게 메뉴를 주문했다.“음식
순간, 유건은 기쁨과 놀라움에 휩싸였다.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진짜?”시연은 오히려 긴장이 풀린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진짜예요. 뭐 하러 거짓말하겠어요? 당신은 내 남편이잖아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게 잘못된 일이에요? 아니면, 하면 안 되는 일이에요?”맞는 말이었지만, 유건은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후, 그는 조용히 물었다.“그럼... 노은범보다도?”유건은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술에 취했던 밤. 시연이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했던 말을.그녀는 노은범을 사랑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 걸까?’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유건과 은범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고 대표님, 사모님. 음식을 준비해도 될까요?”그 순간, 시연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답했다.“네, 들어오세요. 배가 고프네요.”“네, 사모님.”직원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자, 유건은 살짝 눈썹을 올렸다. 그는 시연이 일부러 화제를 피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굳이 들추진 않았다.‘노은범은 과거일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더 깊이 묻혀 사라질 거야.’...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자기 전, 시연은 유건의 품속에서 나지막이 물었다.“혹시... 내일 바빠요?”“응?”유건은 생각하다가 답했다.“그렇게 바쁘진 않을 거야.”그는 결혼 준비로 한동안 정신이 없었으니, 최근 일부러 여유를 두고 있었다.그리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매일 늦게 들어오는 것도 좋지 않았다.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럼 내일 날 데리러 올 수 있어요?”그녀는 퇴근 후 산부인과 검진을 예약해 두었다. 만약 유건이 데리러 온다면, 자연스럽게 검진을 함께할 수 있을 터였다.“좋지.”유건은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내가 데리러 갈게.”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여자의 사소한 기쁨이 유건에게도 전해진 것 같아서
[소미야, 이건 양호천 감독님이 직접 부탁하신 거야. 넌 아직도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잖아. 앞으로도 신경 써야 한다고!]조애린은 소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유건도 다 듣고 있을 테니, 차라리 확실하게 말하는 게 나았다.[고 대표님, 처음에 소미를 양호천 감독님의 작품에 넣어주신 것도 대표님이셨잖아요. 이 바닥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 잘 아시죠? 언제나 강자에게 붙고, 약자를 밀려나는 곳이라는 걸요...][지금 대표님이 결혼한 이후로 소미가 기댈 곳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오늘 양호천 감독님의 영화가 개봉하는 자리에, 감독님이 대표님을 초대한 것도 그걸 확인하려는 의도인 거라고요. 만약 대표님이 안 오시면...]조애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그럼 소미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거예요.][그만해!]소미가 조애린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하지만 조애린은 개의치 않았다.[고 대표님, 소미는 더 이상 대표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해요. 그런데... 대표님은요? 이 정도 배려도 못 해주시는 건가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끊겼다.아마도, 소미가 전화를 끊어버린 모양이었다....유건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한참을 고민한 후, 다시 핸드폰을 들고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 그는 병원에 있는 시연을 데리러 가기로 했지만, 이제는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여보세요.]시연이 전화를 받았다.[벌써 도착한 거예요? 생각보다 빠르네요.]유건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여보, 갑자기 일이 생겼어. 오늘은 당신을 데리러 갈 수 없을 것 같아.”잠시 정적이 흘렀다.시연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조금 가라앉았다.[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일도 중요하니까... 난 퇴근하면 혼자 갈게요.]기환이 함께 있으니, 유건이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최대한 일찍 돌아갈게.”그는 영화 시사회에 잠깐 얼굴만 비추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네, 그럼 끊을게요.]전화
때가 되면 상황을 보고 결정할 일이었다. 어쩌면 더 이상 수액을 맞을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그래.”오선화는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끼리 상의한 거네? 좋아, 일단 세 번 처방할 테니까 맞아 보고 결정하자.”“감사합니다.”오선화는 처방전을 적으면서도 잔소리를 놓치지 않았다.“다음번엔 꼭 고 대표님이랑 같이 와. 아기가 배 속에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면 안 돼. 부모가 다정해야 건강하게 자란다니까.”“네, 교수님 말씀대로 할게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오늘 밤, 유건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번에는 분명 함께 올 수 있을 것이다.출산 검진이 끝난 후,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진아야, 우리 밖에서 저녁 먹자. 오늘따라 훠궈가 당기네.”“좋지!”진아는 흔쾌히 동의했다.“먹고 나서 영화 한 편도 보고 갈까?”“완전 찬성!”두 사람은 곧장 시내로 향했다.훠궈집에 자리를 잡고 앉자, 진아가 두리번거렸다.시연이 웃으며 물었다.“뭐 찾아?”“네 보디가드.”진아가 투덜거렸다.“어? 아까까지 따라왔잖아. 어디 갔어? 설마 가버린 거야?”“아니.”시연은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기환 씨는 원래 이런 거 전문이야. 평소엔 안 보이지만 필요하면 바로 나타나지. 신경 쓰지 마. 우린 그냥 맛있게 먹자.”“오... 완전 프로네. 신기하다.”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식사했고, 시연은 영화 티켓을 예매했다. “무슨 영화야?”“양호천 감독님의 신작. 오늘 개봉했어.”양호천은 업계에서 실력파 감독으로 유명했다. 그의 작품이라면 기본적으로 믿고 볼 수 있었다.“기대되는데?”영화관은 같은 건물 13층에 있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극장으로 올라갔다.하지만 진아와 시연이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뭐야? 사람 엄청 많네.”진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관객에게 물었다.“저기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몰랐어요? 오늘이
“은범이?”진짜 노은범이었다!“시연아, 괜찮...”은범이 갑자기 신음을 내뱉었다. 잘생긴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며 고통에 찬 표정을 지었다.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형수님!!”기환은 구조 요청 소리를 듣자마자 빛처럼 달려왔다. 화살처럼 뛰어 들어와 단숨에 칼을 든 남자를 제압했다.“가만있어! 움직이지 마!”기환은 순식간에 그 남자를 바닥에 눌러 제압했고, 피 묻은 칼이 남자의 손에서 떨어졌다.기환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단 몇 분,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형수님 다쳤다니?!’“형수님, 어디 다치셨어요?”“아, 아니에요. 난 괜찮아요.”시연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은범에게 돌렸다.은범은 왼쪽 허리를 부여잡고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선홍빛 피가 흘러내렸다.시연은 즉시 판단을 내렸다.“은범아, 너 당장 응급실로 가야 해! 기환 씨, 도와줘요!”“네! 알겠습니다!”순식간에 병원 내부는 분주해졌고, 은범은 긴급히 응급실로 실려 갔다.마침 응급실 당직 중이던 의사는 시연의 동창인 김현진이었다.“상황은 좀 어때?”“허리에 자창이 있어. 개복 수술로 내부 확인이 필요해.”현진은 은범이 시연과 아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방금 상처를 확인했는데 깊지는 않아. 심각한 문제는 없을 거야.”“고마워.”“별거 아닌데, 뭐. 바로 수술실로 옮길게.”시간을 지체할 틈도 없이, 은범은 응급실에서 바로 수술실로 이송되었다.시연도 은범을 따라 수술실로 향했다....한편, 구석에 있던 기환은 시연을 주시하며 유건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벌어진 일을 보고했다.[칼을 든 남자?]유건의 이마가 깊게 주름졌다.[기환아, 너 요즘 너무 태만해진 거 아니야? 내가 뭐라고 했어? 한순간도 떨어지지 말라고 했잖아.]이 말에 기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옆에서 지한이 나서서 기환을 두둔했다.“형님, 기환이도 사람입니다. 모든 순간을 감시할 순 없죠.”즉, 실수할 수도 있다는
“미안해. 내 잘못이야. 벌 받을게.”...다음 날 아침.시연은 몽롱한 상태에서 손에 간지러운 느낌을 받았다.“뭐 하는 거예요?”그녀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내가 깨운 거야?”유건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곧 나가야 해서 가기 전에 약 한 번 더 발라주려고. 다 바르면 다시 자. 깨어나서도 꼭 스스로 바르고. 하루 네다섯 번 정도.”“귀찮아 죽겠어요!”시연은 이불을 확 댕겨 얼굴을 덮어버렸다.유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지만 다정하게 웃었다.시여의 성격은 그다지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가 기상 후 심한 짜증을 부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잠을 충분히 잤을 때는 괜찮지만, 덜 잤을 때는 아주 예민했다.“안 건드릴게. 푹 자.”...시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오늘은 별다른 업무가 없었고, 강울대병원에 가서 서류만 제출하면 되는 날이었다.그녀는 준비를 마치고 기환의 차에 올라 강울대병원으로 향했다.서류를 제출한 후, 같은 팀 펠로우인 서성안이 그녀에게 근무 스케줄을 건넸다.“이게 우리 과 다음 주 야간 근무 일정이야. 가는 길에 외래 수간호사님께 전해줘.”“알겠어요.”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받아서 들었고, 외과 건물을 나와 외래 진료실로 향했다.그녀는 수간호사에게 스케줄을 전달한 후, 외과 진료실을 한 번 힐끗 바라보았다.오늘은 오준수와 김현진이 외래 근무 중이었다. 역시나 환자들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그때, 기환이 시연에게 달려왔다.“형수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금방이에요. 1분이면 돼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주시거나, 그냥 소리치시면, 제가 바로 달려올게요.”“알겠어요. 빨리 다녀와요.”기환은 늘 시연을 보호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심지어 식사나 화장실 가는 일조차 마음대로 못 할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나 괜찮아요. 여긴 사람도 많잖아요.”“금방 다녀올게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환을 기다
유건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시연을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품속에 가두어, 다시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내 말 안 들려? 내가 절대 아내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왜 날 믿지 않는 거야?”시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고 대표님, 당신이 도덕적 기준을 지킬 거라고 믿어요. 당신의 몸은, 나에 충실할 거라고요.”유건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도덕성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유건을 오래 봐왔기에 시연도 확신할 수 있었다.“하지만, 배신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에요. 마음의 배신도, 배신이에요.”뭔가 어색한 듯, 그녀는 말을 고쳐 잡았다.“아니, 내가 잘못 말했네요. 사실 당신의 마음도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죠.”유건이 시연의 말을 끊었다.“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 양심에 찔리진 않아?” ‘내가 이 여자에게 쏟아온 모든 진심이, 헛것이었단 말이야?!’“그래요.”시연은 솔직히 인정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찔리는 것 같기도 하네요. 당신 마음은 나를 향하긴 했어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유건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완전히 당신을 향한다고 생각할 건데?” ‘나는 진심으로 이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고, 함께 살아가려 했고...’ ‘이 여자와 배 속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야?’“몰라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절호의 순간이 오면, 당신이 다른 이유로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 말이 틀렸나요?” 결국, 그녀는 오늘 밤 유건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유건은 시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베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그런 얘긴 나중에 하고, 약부터 바르자.”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연의 손을 놓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잠시 후, 약을 들고 돌아왔다.“칼에 베인 거야?”시연은 살짝 찡그리며
‘애초부터 장소미와 함께 보낼 생각이었겠지.’ 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괜히 헛수고하지 말자.’‘괜히 마음 쓰고 노력해 봤자, 정작 본인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결국 나만 바보 되는 거잖아.’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조용히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조용했던 방 안, 문 쪽에서 철컥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시연은 즉시 몸을 돌려,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환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유건은,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소파 위에 툭 던졌다. ‘맞네, 여기... 저 사람 집이었지?’ ‘내가 문을 잠근다고 해서 이 사람이 못 들어올 리가 없잖아.’ 시연은 순간적으로 잊고 있던 현실을 떠올렸다. 유건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침대 위에 편하게 앉았다. “날 못 들어오게 해? 그럼 난 어디서 자라고?”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 방은 우리 방이야. 반반씩 나눠 써야지.” 시연은 남자를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섰다. “그럼 당신이 여기서 자고, 난 다른 방에서 잘게요.” 그러고는 바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손목이 단단히 붙잡혔다. “손님방은 안 치웠어.” 유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설마, 이 시간에 성애 이모를 깨울 생각이야?” 그 말에, 시연은 순간 망설였다. ‘하긴, 나도 남한테 폐 끼치는 걸 싫어하긴 하는데.’ 하지만 바로 대안을 찾았다. “그럼 서재에서 잘게요.” “안 돼.” 그 순간, 유건이 팔을 당겨 그녀를 품 안에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가슴팍에 파묻힌 시연.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여보, 오늘 내 생일이야. 그냥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지금 이걸... 핑계라고 하는 거야?’ 시연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런 말... 다른 사람한테는 통할지 몰라도, 나한
“알 필요 없어요.” 시연은 아픈 손을 조심스럽게 뺐다. ‘알 필요 없다고?’ 유건의 예리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당신은 내 아내야. 아내가 손을 다쳤는데, 내가 몰라도 된다고?” “그게 뭐 대수인가요?” 시연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지만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전 여자 친구와 생일을 함께 보낸 것도 몰랐는데요?” ‘뭐...? 생일을... 함께 보냈다고?’ 유건은 순간 당황했다. 그보다 더한 기분은, 놀라움이었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시연은 이미 팔을 빼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생일...?’ 유건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가, 곧바로 깨달았다. ‘맞다, 오늘 내 생일이었지.’ 시연이 저녁 약속을 잡았던 이유, 그녀가 오늘 내내 기다렸던 이유. ‘시연이는...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유건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곧장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전화기 너머로 기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알고 있었어?” 유건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연이가... 내 생일 챙기려고 했던 거.” [네, 알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유건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기환은 짧은 침묵 후, 솔직하게 답했다. [형수님께서 형님께 직접 깜짝선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았던 거죠.]유건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요 형님... 혹시... 선물 이야기는 들으셨나요?]“선물?” [아... 형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제가 말하면, 그 마음을 망치는 거 아닐까요?]유건은 그 말을 듣자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기환은 한 가지 더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형수님께서 정말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직접 손으로 만든 거예요.]‘
시연은 계속해서 국수를 먹었지만, 전혀 유건을 쳐다보지 않았다. 유건은 속이 쓰렸다. 그리고 시연을 한밤중까지 기다리게 한 자기 잘못을 확실히 인정했다. “내일 저녁은 어때? 내가 직접 예약하고 먼저 가 있을게.” “괜찮아요.” 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 남은 매운 단무지 한 조각을 집었다. “마지막 하나네.” “더 가져다줄게.” 유건은 기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반찬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곧바로 깨달았다. 자기는 반찬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걸. 잠시 냉장고를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이모님 부를게.” “됐어요.” “아니야.” 유건은 고집스레 말했다. “당신이 먹고 싶다며?” “그러니까, 됐다고요.” 시연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왜 그래요?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게 해줘요.” 여자의 말속에 분명한 불만이 묻어 있었다. ‘많이 화났구나...’ 유건은 결국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알겠어. 당신 말대로 할게.” 시연은 다시 젓가락을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왜 계속 쳐다봐요? 배고픈 거예요? 저녁 안 먹었어요?” 유건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먹었어.” “먹었군요.” 시연이 잠시 멈칫하더니, 작은 웃음을 흘렸다. 유건은 순간 깨달았다. ‘아차, 또 실수했어!’ 그렇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 “미안해.” 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사과하는 것 외에는. 그러나, 그 사과조차도 공허할 뿐이었다. 시연은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면을 다 먹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요.” 말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유건은 얼른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그녀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 유건을 보면서 소미는 바로 눈치챘다. 지금 남자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소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응.” 유건은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소미 씨. 지금 당장 가봐야 해.” “미안하긴요.” 소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린 오랜 친구인데, 그런 걸로 사과할 필요 없어요. 급한 일 있으면 얼른 가요.” 유건은 그녀의 배려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조심해서 가요!” 소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손안에 쥔 나비 머리핀을 서서히 꽉 쥐었다. ...차 안. 지한은 운전석에서 전화를 걸었다. “기환아, 형수님을 꼭 붙잡아 둬. 형님, 지금 가는 중이야.” 기환이 난감한 목소리로 답했다.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러나 통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시연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갔다. 기환은 순간 당황하며 급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형수님, 형님 곧 도착하십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시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늦었어요. 식사 시간도 훌쩍 지났으니, 저도 이제 들어가 봐야죠.” 기환은 속수무책이었다. ‘형수님을 강제로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결국, 한숨을 삼키며 시연을 따라 차에 올랐다. ‘형님이 실수하신 건 맞지...’‘아무리 바빴다고 해도, 임신 중인 형수님을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기환은 차를 몰며 지한에게 전화를 걸까 고민했지만, 마땅한 변명이 없었다. ‘오늘은... 형님이 잘못하신 거야.’ 두 사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건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건 텅 빈 테이블,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 치우지 않은 식기들.그리고... 텅 빈 의자.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고, 바로 눈
그날, 지한이 다녀온 후, 직접 유건에게 보고했다.유건이 남긴 선물이 이미 ‘나비 공주'의 손에 무사히 전달되었다고.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유건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해외로 나가 치료받았다. 그는 반년 동안 앞이 보이지 않았고, 또다시 반년을 걸려 치료받고서야 성공했다. 유건은 그렇게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그것이 ‘나비 공주’가 가져다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아이가 날 지켜준 덕분에 시력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시력을 되찾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비 공주’를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비 공주’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그녀가 살던 집은 텅 비어 있었고, 그 후로도 ‘나비 공주’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소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걸 보며, 유건의 눈가가 뜨겁게 붉어져 왔다. ‘설마... 정말 유건 씨가...?’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손에 쥐고 있던 나비 머리핀을 소미 앞에 내밀었다. 소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애린 언니가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이걸 왜 유건 씨가...?”유건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원래 내 것이었어.” ‘만약 장소미가 진짜 나비 공주라면,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거야.’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공기마저 조용해진 듯했다. 소미의 눈에 혼란과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입술이 떨리면서도 몇 번이나 말하려다 멈추었다. “유건 씨... 당신...!” 그녀는 숨이 가빠진 듯, 겨우 말을 꺼냈다. 유건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여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소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달라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 순간, 유건의 숨이 멎었다. ‘그때 내가 남겼던 말을 장소미가 기억하고 있어.’ ‘그렇다면... 맞아.’ ‘진짜 ‘나비 공주’가... 장소미인 거라고.’ 유건은 미
과거의 기억이 순식간에 유건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그것은 유건이 아직 어리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해, 그는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충격으로 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 유건은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고상훈은 세계적인 명의들을 불러 치료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누구도 극 시력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앞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세상이 영원히 어둠뿐일 거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 사실은 소년이던 유건에게 아주 가혹한 선언이었다...그 시절의 유건은 극도로 예민하고 난폭했다.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고상훈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의 소통을 거부했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무시했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화를 냈다. 그저 모든 것이 짜증 났다.간병인과 가사 도우미들에게도 끊임없이 신경질을 부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어두운 사람이 되어 갔다. 고상훈은 그런 손자를 안타까워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최대한 그의 뜻을 존중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건은 조용한 회복을 위해 도심에서 떨어진 별장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나비 공주’와 처음 만났다. ‘나비 공주’는 유건의 옆집에 살고 있었다. 두 집은 높은 담장을 두고 연결되어 있었고, 그녀는 자주 그 담장을 넘어오곤 했다. 두 사람과의 첫 만남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유건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데, 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걸까...?’ 그때, 익숙하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비 오는데 왜 거기 앉아 있어? 감기 걸릴지도 몰라!” 유건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나는 볼 수도 없는데.’ 그가 반응하지 않자, 소녀는 다급한 듯 담장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잠시 후, 소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