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고유건이잖아.”진아가 중얼거렸다.“이 영화, 네 남편이 투자한 거야? 그래서 오늘 산부인과도 못 온 거야?”“아마... 그렇겠지?”시연은 모호하게 답했다. 사실, 유건의 사업에 대해 그녀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가 오늘 ‘일이 생겼다'고 한 것도, 이 영화 투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잠시 후, 예상치 못한 현실이 시연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유건의 바로 뒤를 따르는 사람은 바로 장소미였다.진아는 본능적으로 시연을 쳐다보았다.“장소미? 이 영화에 출연했어?”“나도 몰랐어.”시연의 입가에 만연했던 미소가 굳어졌다. 그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예매한 영화였기에, 출연진을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그럼 유건이 오늘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잠깐, 검색해 볼게.”진아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검색했다.[화도...]주연 배우 명단에는 장소미의 이름이 없었다.다만, 특이하게도 ‘특별 출연’이라는 항목이 있었다.“특별 출연?”진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영화 촬영한 지 꽤 됐는데, 언제 들어갔대? 이런 특별 출연은 그냥 ‘백' 아니야?”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인맥을 이용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무대 위, 소미는 유건과 나란히 서 있었다.두 사람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유건은 살짝 몸을 숙이며 신사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그러다가, 유건이 미소를 지었다.소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더 크게 웃었다.그 모습을 본 진아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이게 뭐야, 진짜!”시연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이 영화, 계속 볼 거야?”진아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시연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나도 같이 가!”“죄송해요, 지나갈게요.”상영관 안에는 사람들이 많아 빠져나가기 쉽지 않았다.마침, 무대 위에서 시선을 돌린 유건이 그 모습을 포착했다.관중 속에서도 단번에 시연을 찾아냈다.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시연이가 여기 있었다
“유건 씨.”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소미가 뒤쫓아 와 유건의 곁에 나란히 섰다. 언뜻 보기엔 오히려 둘이 더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았다. “지 선생님.” 소미는 뛰어왔는지 숨이 약간 가빴고,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영화 보러 오셨어요? 진작 알았으면 제가 미리 표라도 챙겨둘 걸 그랬네요...” 하지만 소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아야, 가자.” “어, 응...” 완전히 무시당한 소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민망하게 웃으며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 씨, 지 선생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 “아니.” 유건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손을 뻗어 시연의 손목을 잡았다. 시연은 곁눈질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놔요.” 하지만 유건은 당연히 놓을 생각이 없었다. 깊은 주름이 잡힌 미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끝났어. 같이 가자.” “그래요?” 시연은 비웃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 시선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누가 저렇게 애타게 보고 있는데요? 나 때문에 오늘 밤 계획을 망칠 필요 없어요. 난 이만 가볼 테니까, 두 사람은 하던 거나 계속해요.”그 말속엔 분명한 비꼼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 “여보...” “지 선생님.” 소미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 있어요? 제가 지 선생님한테 미운털 박힌 거 알아요. 하지만 유건 씨는 지 선생님 남편이에요.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소미 씨.” 유건이 소미를 말리려 했다. “그만해.” “아니, 말하게 둬요.” 시연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더 듣고 싶으니까요.” “흥...” 소미는 코웃음을 쳤다. “오늘은 제가 출연한 영화의 시사회가 있는 날이에요. 유건 씨는 저를 응원해 주러 온 거고요.
시연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 “아니, ‘만약’이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게요. 난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 시연은 유건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진아야, 가자.” “그래!” 그 순간, 유건은 얼어붙었다. “유건 씨, 이게 다... 미안해요. 저 때문이에요...” “소미 씨 잘못 아니야.” 유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연이가 소미 씨한테 너무 심한 말을 했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오늘 밤엔 정말 미안했어. 난 먼저 가볼게.” “유건 씨!” 남자를 더 이상 붙잡을 수도 없어서 소미는 그저 유건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쓸쓸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 속엔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둘이, 싸웠네.’ ...주차장에서 유건은 시연을 따라잡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환아, 진아 씨를 데려다줘.” “네, 형님.” 시연은 순식간에 다른 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남자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고 하는 건가?’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뜻밖에도, 유건이 먼저 사과했다. “당신이 알면 기분 나빠할 거 같아서 숨겼어. 그런데도 결국 들켜버렸네.” 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유건은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숨긴 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 장소미한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고. 오늘 밤, 나랑 그 사람은 단둘이 있는 시간조차 없었어.” 그는 계속 설명하려고 했지만, 시연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유건 씨, 내가 장소미한테 한 말, 당신한테도 그대로 돌려줄게요.” “친구라는 명목으로 미련을 남길 행동은 하지 마요.” 이 날카로운 일침 때문에 유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그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나랑 장소미가 한때 결혼까
유건은 혼자 남아 있는 것이 지루했고, 아까 일도 계속 신경 쓰였다. 결국 시연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재로 향했다. 그는 여자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또 책 보고 있어? 아까 깜빡했는데, 저녁은 제대로 먹었어?” 가까이 다가가자, 시연은 남자에게서 은은한 여성 향수를 맡을 수 있었다. ‘난 향수 안 쓰는데...’ 그렇다면 이건 장소미한테서 묻어온 향기였다. “먹었어요. 진아랑 같이.” 시연은 태연하게 유건을 밀어내고, 다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간간이 필기를 이어갔다. 너무나 성의 없는 대답. 시연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유건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할 말은 다 했으니까.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가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함부로 약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늦었어.” 유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슬슬 잘 준비해야 하지 않아?” “먼저 자요. 이 두 장만 보고 들어갈게요.” 시연은 여전히 남자를 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몇 초간 지켜보던 유건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어서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유건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시연은 이미 침대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시연 옆에 누우며 팔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러나 시연은 조용히 몸을 틀어 피하며, 핸드폰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고,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잠을 청했다. 여자의 등을 바라보며, 유건의 미간은 더욱 깊게 주름졌다. 결국 그날 밤, 유건은 쉽게 잠들지 못했고, 한참 뒤에야 간신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다음 날, 그가 눈을 떴을 때 시연은 먼저 일어나 있었다. 시연은 이미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유건은 식사를 끝낸 후, 그녀를 찾아갔다. “여보, 같이 나갈까? 오늘은 몇 시에 끝나? 그 시간에 맞춰
근처 두 블록에 걸쳐 차들이 멈춰 서 있었고, 차량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 어떡해요? 차 안에 다친 사람도 있는데, 빨리 병원 가야 할 거 아니에요!” 운전기사가 급히 다가와 승객들을 진정시켰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현재 교통경찰이 정리 중이고, 구급차도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맞아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우리보다는 앞쪽이 더 심하게 부딪혔대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시연은 이마를 누르며 실소했다. ‘하... 앞으로 외출할 땐 진짜 길일을 확인하고 나가야 하나.’ 다행히도, 곧 경찰이 도착해 승객들을 한 명씩 차에서 내리게 했다. “일렬로 서서 이쪽으로 이동하세요. 교차로에 구급차가 대기 중이니 병원까지 태워 드릴 겁니다.” 승객들은 하나둘씩 차에서 내려 구급차를 기다리며 줄을 섰다. “시연아!” 시끌벅적한 인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노은범이 서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아닌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까 정말 너였네!” 은범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다 이마가 이렇게 된 거야?”“별거 아니야.” 남자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시연은 일부러 가볍게 웃어 보였다. “좌석에 부딪힌 거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곧바로 되물었다. “넌 괜찮아?” “멀쩡해.” 은범이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길게 늘어선 차들이 멈춰 서 있었다. “내 차는 저쪽에 있어. 사고엔 휘말리지 않았지만, 꼼짝없이 막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중이야.” “앞쪽 사람들! 빨리 좀 움직여요! 구급차를 타야 한다고요!” 뒤쪽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연도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은범아, 나 구급차 타야 해...” “같이 가자.” 시연이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은범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는 시연이 혹시라도 거부할까 봐, 덧붙
핸드폰 너머로 전해지는 시연의 말에, 유건의 감정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아내에게 사고가 났다면, 자신은 남편으로서 당연히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시연은 기가 막히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유건을 미치게 했다. 특히 시연의 입에서 나온 ‘바쁘면 안 와도 된다’는 그 한마디.‘도대체 지시연 눈에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이었길래, 아내와 아이의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도 무관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분노가 극에 달한 순간, 유건은 오히려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나한테 말은 왜 한 거야?]예상치 못한 반응에, 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집에 갔을 때, 내가 없으면 찾을 것 같아서요...” ‘하. 참나...’ 유건은 소리 없이 비웃었다. ‘그래, 당연히 찾겠지.’ ‘하지만 내가 너한테 ‘그 정도 의미’밖에 안 되는 거야?’ 이 순간, 남자의 감정이 폭발했다. [지시연, 일부러 그러는 거지?][어제 일 때문인가? 일부러 날 엿먹이려고?] “뭐라고요...?” 시연은 어리둥절한 듯 반문했지만, 유건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이 여자, 지금 나를 벌주고 있는 거야!!’ ‘그래, 인정하지. 처음 잘못한 건 나니까.’ 유건은 겨우 분노를 억눌렀지만,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기다려. 곧 갈 테니까.] “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시연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왜 저렇게 화를 내지? 내가 귀찮아서 그런 건가?’ ‘그럼 안 오면 되잖아. 난 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 ‘...’ “시연아.” 은범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잠시 밖에서 통화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었다. 은범이 의자를 당겨 앉자, 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너 바쁘지 않아?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 은범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 나서, 태연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이 오면 갈게. 아마 곧 도착하시겠지?”
시연은 순간 당황했다. ‘벌써 도착했다고?’ 은범도 기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봉지를 손에 쥔 채,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 오셨네. 그럼 난 가볼게.” “오늘... 고마웠어.” 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는 약봉지를 등 뒤로 숨기듯 들고 있었다. 마치 시연이 보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무심한 척 한마디 더 했다. “은범아, 몸 잘 챙겨. 건강이 제일이야.” “알지.” 은범은 살짝 미소 지으며, 순간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췄다. 대신,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난 간다. 잘 있어.” “응... 잘 가.”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유건과 은범.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짧지만 묘한 기류가 흐르는 사이, 은범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표님.” 이어서 간결하게 설명했다. “사고가 난 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거기 있더라고요.” 그 한마디로,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설명을 끝냈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유건을 지나쳐 병실을 빠져나갔다. 유건은 무표정하게 은범을 보내고, 천천히 시연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시연은 시선을 피한 채, 문 쪽을 향해 있었다. 은범이 나가는 순간, 그녀는 남자의 손에 들린 약봉지를 확인했다. 어렴풋이 그 물체가 보였다. ‘수면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거야? 그 정도로 심한 건가?’ 시연이 잠시 생각에 빠진 순간, 유건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허.” 이것이 비웃음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아쉬워? 한참 바라보네.” “기환이한테 다시 불러오라고 할까? 아직 멀리 못 갔을 텐데.” 유건의 말투에는 짙은 조롱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시연은 천천히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웠다. ‘하... 진짜 피곤하다.’ 유건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상황에서 대놓고 무시?’ ‘어제까지는 화
“지시연!!!” 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붉어졌다. “정말 죽고 싶어?” “뭐라고요?” 하지만 시연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장소미를 만날 수 있는데, 나는 은범이를 만나면 안 돼요?”“그래! 유건이 고함쳤다. “난 해도 되지만, 당신은 안 돼!” 남자의 목소리가 병실을 뒤흔들었다. 순간, 공간이 얼어붙었다. 시연의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난 안 된다고?’ ‘너무나도 뻔뻔한 이중잣대...’ 순간,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참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단숨에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의자에 걸쳐둔 가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기환이 당황하며 길을 막아섰다. 그러나 유건이 차갑게 명령했다. “놔둬.”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해.” “나한테 마음도 없는 여자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좋아, 가서 전 남자 친구나 만나보라지. 딱 잘 어울리는 커플이잖아.’ 이 말을 듣자, 시연은 차갑게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면서,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 척. 그녀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기환을 피해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 ...“하...” 유건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시연이 병실에서 나가며 가방을 꼭 쥐고 있는 걸 보니,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진짜 안 따라가실 겁니까?”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유건은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따르릉— 그때, 병실 한쪽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시연의 핸드폰이었다. 그녀는 너무 급히 나가면서 핸드폰을 두고 갔다. 유건은 무심코
기환은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오늘, 장소미 씨가 형수님한테 말하는 걸 들었어요. 형님이랑 오늘 만나서 점심 약속을 하셨다고...”유건은 순간 굳어졌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시연이 자신에게 차갑게 대했는지.그녀가 왜 그렇게 거리감을 두었는지.유건의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진작에 말했어야지!’“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기환은 억울한 얼굴로 변명했다.“기회가 없었어요...”‘형님은 형수님 곁을 지키거나, 장소미 씨와 대화하고 계셨으니...’‘내가 감히 앞에 끼어들 수가 없었던 거지...’유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이 사실을 기환이 말해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헤맬 뻔했다....“아악!”병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곧이어 쏟아지는 물건 소리, 난장판이 된 소리가 들려왔다.“우주야!”이어지는 건 시연의 다급한 목소리와 억눌린 울음.“누나야! 우주야, 누나 좀 봐! 제발...!!”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그리고 마침 넘어지려는 시연을 붙잡았다.“괜찮아? 얼른 앉아!”“괜찮아요.”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그럼 어떻게 해야 안 괜찮은 건데?”병실 안에서는 간호사와 의사, 그리고 방금 도착한 정신과 교수가 우주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무도 소년을 막을 수 없었다.우주는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누나를 밀쳐낼 리 없을 테니까. 유건은 단호하게 말했다.“여보, 날 믿어. 우주는 내가 맡을게.”시연은 입술을 앙다물었다.그러나 결국, 유건이 우주를 맡겠다고 하자, 한 발짝 물러났다.“그래.”유건은 시연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그런 뒤, 곧장 우주에게 다가가 소년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아악...!!!”우주는 더욱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유건은 흔들리지 않았다.“우주야, 나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냥 내 말 들어.”유건은 단호했다.“민환이 데려다줄 거야. 이미 충분히 복잡해졌어. 더 걱정하게 만들지 마, 응?”“알겠어요.”소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를 보내고 나서도, 유건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소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장 여사가 혼자 있는 우주를 발견했다? 우주는 왜 혼자 있었던 거지?” ‘그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병실은 고요했다.우주는 약물로 인해 깊이 잠들어 있었고, 시연도 침대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유건은 조용히 다가가 시연을 안아 올려 옆에 있는 보호자 침대에 눕혔다.“으음.”시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흐느적거렸다.순간, 유건은 긴장했다. 시연을 깨운 줄 알고 멈칫했지만, 다행히도 다시 조용해졌다.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그때, 시연이 희미하게 신음했다.“엄마...”유건의 손길이 멈췄다.그녀는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으흑...”끝내 억누른 듯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눈을 감은 채, 시연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우리 와이프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구나.’사람은 가장 약해지고, 슬프고, 무력할 때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찾는다.유건은 여자의 깨끗한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렸다.그는 결국 시연 곁에 누워,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그리고 한 손으로 시연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아주 부드럽고도 인내심 있는 손길이었다.점차 시연의 떨림이 잦아들었고, 마침내 조용히 눈을 떴다.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녀는 그 불편함에 손을 올려 닦으려 했다.“손으로 닦지 마.”유건이 시연의 손을 붙잡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내가 닦아줄게.”남자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시연은 훨씬 편안해졌다. 하지만 정신이 또렷해지자,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
시연의 손목이 단단히 잡혔다.유건이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앉아.”시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그는 애타고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한마디 했다고 그렇게까지 날 몰아붙여야 해? 내가 우주를 신경 안 쓴다고? 당신,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날 화나게 하려는 거야?”시연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유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우주 상태는 깨어나야 정확히 알 수 있어. 나도 함께할 거야. 당신 곁에서 우주를 지킬게, 응?”“당신...?”시연이 비웃듯 눈썹을 올렸다.“그럴 시간이나 있어요? 고 대표님은 아주 바쁘신 분이잖아요.”그런 냉소적인 태도에, 유건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이해하고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있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낼 거야.”그는 시연을 부드럽게 눌러 앉혔다.“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밥 좀 먹어. 응?”“싫어요!”유건은 미간을 좁혔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는 분명 잘못한 게 없었고, 도착했을 때 소미와 말을 섞지도 않았다.그런데도 시연은 마치 자신에게 큰 원한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대체 뭐가 문제지?’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먹을래?”“간단해요.”시연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내 앞에서 사라져 줘요. 당신 얼굴만 안 보면, 나도 식욕이 생길 거예요.”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눌렀다.두 손을 꼭 쥐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 갈 테니까 꼭 먹어.”그는 돌아서서 나갔다.그 순간, 시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식기를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유건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그러나 동시에 서운함이 밀려왔다.‘내가 그렇게까지 역겨운 존재야?’그는 잘못한 게 없었다.그리고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우주가 왜 지 사장 집에서 다친 채 발견된 거지?’이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시연의 눈빛을 떠올렸다.‘시연이의 그 눈빛... 단순한
“무슨 뜻이야? 제대로 설명해.”“그러니까...”소미는 긴장한 채 연신 침을 삼켰다.“오늘... 나 사실 유건 씨랑 점심 먹기로 했어. 네가 전화했을 때, 마침 같이 있었어...”그 순간.시연은 기억을 되짚었다. 그리고 깨달았다.‘그때, 장소미와 고유건이 같이 있었던 거야?’두 사람은 또 만난 거였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대체 몇 번을 만난 거야?’‘아니, 셀 수도 없겠지.’시연은 갑자기 온몸이 차갑게 식어갔다....그때, 문가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유건이 지한과 민환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유건은 단번에 시연을 발견했고, 곧바로 그녀가 짓누르고 있던 소미를 보았다.“소미 씨!”이 광경에 깜짝 놀란 그는 급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놔.”“유건 씨...”소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마치 억울함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흥!”시연은 가볍게 비웃었다.“고 대표님, 지금 영웅 구출 작전인가요?”이어서 힘을 풀며 손을 놓았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손도 못 댔으니까요. 고 대표님의 ‘나비 공주’는 잘 있어요.”유건은 당황했다.“여보?!”시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기환 씨, 아직도 내 지시를 들을 수 있어요?”“당연합니다.”“고마워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곧바로 기환에게 지시했다.“우리 우주 좀 안아줘요.”그녀는 우주를 안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아직 ‘고씨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명목이 있으니, 이를 이용할 수 있을 때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기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주에게 다가갔다.그제야 유건은 구석에 쓰러져 있는 우주를 보았다.소년의 머리는 피투성이였다.유건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기환, 움직이지 마.”유건이 단호하게 막았다.“예?!”시연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고 대표님, 약속을 깨겠다는 거예요? 방금 본인도 허락했잖아요.”“그런 게 아니야.”유건은 고개를 저었
“우주야...!!!”무릎이 풀리며, 시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손을 살며시 뻗었지만, 혹여 우주가 아플까 봐 닿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고, 목소리조차 떨렸다.“우주야!! 제발 깨어나!! 누나한테 말 좀 해봐!!”그러나, 우주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시연의 이성은 그 순간 완전히 타버렸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장미리와 소미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날카롭게 갈라졌다.“너희들이었어.”추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아, 아니...”장미리는 겁에 질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시연의 눈빛은 너무나도 무서웠다.장미리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내 말 좀 들어봐... 내가 그런 게 아니야...”“허.”시연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말을 믿을 리가 없잖아!!’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단숨에 장미리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었다.“아악!”여자의 비명이 터졌다. 장미리는 고통스러워 몸부림쳤다.그러나 시연은 더욱 세게 머리를 틀어쥐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나이 들어서 기억력이 나빠졌어? 내가 경고했지, 우주는 건드리지 말라고.”시연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눈빛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너희가 우주한테 어떻게 했는지, 그대로 돌려줄게.”“아야야! 소미야!”“지시연!”소미도 당황하며 다급히 소리쳤다.“당장 놔! 내 말 안 들려?”시연은 단 한 번도 소미를 쳐다보지 않았다.그저 장미리의 머리를 움켜쥐고, 마치 병든 닭이라도 잡듯 머리를 탁자 위로 내리찍었다.쿵!“으아악!”장미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살려줘! 살려달라고! 으아아...”소미는 손을 떨며 기환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다급하게 명령했다.“뭐 해요?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예요? 유건 씨가 지시연을 보호하라고 했지, 우리 엄마를 이렇게 두라고 한 건 아닐 텐데요? 당장 막아요!”기환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소미는 당황했고, 하는 수 없이 직접 나섰다.“지시연! 그만해! 이렇게
지동성은 간 이식을 기다리며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그리고 그 문제로 인해, 지동성은 이미 장미리와 소미에게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소미는 더 이상 어머니를 책망할 수 없었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됐어...’쾅!갑자기 철문이 거세게 두들겨졌다.“문 열어! 당신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열고, 우리 우주를 돌려줘!”장미리와 소미는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어떡하지?”“일단 우주를 일으켜요!”“그래.”모녀는 힘을 합쳐 우주를 부축했다.“그다음은?”“숨겨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춰야 해요!”소미가 단호히 말했다.“그리고, 엄마가 나가서 최대한 지시연을 붙잡아 둬요. 절대 안으로 들이지 말고요!”“알았어.”...문밖에서 시연은 한참을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녀는 정기환을 돌아보며 말했다.“문 따요!”“네!”그러나 기환이 움직이기도 전에, 문이 안에서 열렸다.나온 사람은 장미리였다.“어머나.”장미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게 누구신가 했더니, 너였구나?”시연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어어, 뭐 하는 거야?”장미리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시연은 차갑게 말했다.“우리 우주를 데려가야겠어요.”“하?”장미리는 코웃음을 쳤다.“그 애가 여기 있다고 누가 그래? 밥도 가려 먹는데, 말도 가려 해야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어?” “그래요?”시연의 표정은 변함없었다.“좋아요, 만약 오늘 내가 우주를 찾지 못하면, 내 잘못을 인정할게요. 고소하세요.”장미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이X이...”그러나 시연은 더 이상 장미리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기환 씨.”그녀는 지체 없이 명령했다.“문 부숴요.”“알겠습니다.”“잠깐!”장미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시연 혼자라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녀가
“네!”기환은 손쉽게 가사도우미를 제압했다.그녀는 속수무책으로 시연이 창고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사모님! 사모님! 사모님! 으읍...!”하지만 가사도우미의 입은 기환에 의해 막혀버렸다....창고 안.장미리는 소미의 말을 듣고 기분 좋게 웃었다.“생각지도 못했는데, 네가 그런 운을 타고났구나.”그리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하늘의 뜻이야! 하늘이 너랑 고 대표를 갈라놓고 싶지 않으신 거야!”“엄마.”소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히 말했다.“앞으로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무슨 일이든 저랑 상의하세요.”“알겠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미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어라? 방금 가사도우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진짜요?”소미는 깜짝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설마 지시연이 벌써 온 걸까요?”“그럴 리가 있나? 이렇게 빨리?”“저도 빨리 왔는데, 지시연이 못 올 이유가 있겠어요?” “그럼 어쩌지? 시연이 그 계집애, 쉬운 상대가 아닌데!”“그래서 제가 엄마한테 매번 조심하라고 한 거잖아요!”...갑자기 우주가 반응을 보였다.그는 ‘지시연’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자신의 누나 이름. ‘누나가 나를 찾아왔어!! 누나가 나를 구하러 왔어!!’소년은 벌떡 일어섰다.그리고 187cm의 큰 키로 곧장 문 쪽을 향해 달려갔다.이와 동시에 주먹을 꽉 쥔 채, 끊임없이 외쳤다.“누나! 누나!”장미리와 소미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장미리는 급히 우주를 붙잡았다.“우주야, 착하지? 어디 가려고? 네 누나는 여기 있잖아.”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소미를 가리켰다.하지만 우주는 소미를 보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 시선은 낯설고도 두려움이 가득했다.소년은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아니, 아니야! 우리 누나 아니야!”그는 장미리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소리쳤다.“누나! 누나!”...창고로 향하던 시연은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우주다!”그녀는 곧
“뭐?”장미리는 순간 얼이 빠졌다.“너희, 이미 헤어진 거 아니었어? 설마 아직 가능성이 있는 거야?”“네.”소미는 애매하게 대답했다.“정말?”장미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딸의 손을 붙잡았다.“어서 말해봐.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떻게 한 거야?”“엄마...”...지씨 저택 앞.시연은 정말 오랜만에 이 집을 찾아왔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문과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오늘 길에 자신이 초인종을 눌러도 지동성 일가가 자신을 들여보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정기환이 있었으니까.기환은 시연의 지시에 따라 차를 집 앞에 세웠다.낯익은 대문을 바라보며 그는 당황했다.‘여기... 장소미네 집 아니야?’‘형수님은 여기 온 이유가 대체 뭐지?’“기환 씨.”시연이 저택 대문 너머를 가리켰다.“담 넘을 수 있죠?”‘그건...’솔직히 이 정도 담장은 기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수고스럽겠지만, 담을 넘어서 문 좀 열어줘요.”“형수님.”기환은 머뭇거렸다.“이거 불법침입 아닌가요? 경찰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시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했다.“아, 기환 씨도 여기가 어딘지 아나 보네요? 여기가 장소미네 집이라서 망설이는 거죠?” 기환이 순간에 말문이 막혔다.‘우리 형수님... 역시나 똑똑하시네.’“그렇다면...”시연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억지로 기환 씨를 시킬 필요 없겠네요. 내가 직접 넘을게요.”그러면서 소매를 걷어붙였다.“아이고!”기환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붙잡았다.“형수님! 장난하지 마세요! 어떻게 형수님이 담을 넘어요?”결국 그는 체념한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제가 할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고마워요.”기환은 가뿐히 담장을 넘어 문을 열었다. 시연은 아무렇지 않게 발을 들였고,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아니... 시연 아가씨?”가사도우미가 시연을 보자마자 경악했다.“여길 어떻게...?”시연은
‘지씨 집안 사람들!’이 생각이 시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설마...’그리고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커졌다.시연과 지동성 일가의 원한은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뿌리 깊은 원한이 되었다. 시연은 갑자기 병원에 있는 지동성을 떠올렸고, 그 병약한 얼굴이 눈앞에 스쳐 갔다.그리고 소미가 몇 번이나 간 청한 간 이식...‘혹시, 나에게서 방법을 찾지 못하자 우주에게 손을 뻗은 건 아닐까?’그녀는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섰다.‘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이라도 놓칠 수 없어!’...지씨 저택.소미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고, 장미리가 보이지 않자, 바로 가사도우미를 불렀다.“우리 엄마는 어디 계세요?”“사모님께서는 뒤쪽 창고에 계십니다.”“네, 알았어요.”소미는 곧장 창고로 향했는데, 밖에서도 장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자, 우주야, 착하지? 조금이라도 먹어야 해. 안 먹으면 힘이 없어진단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소미는 문을 두드렸다.“누구야?” 장미리의 목소리가 순간 긴장했다.“엄마, 저예요. 문 좀 열어주세요.”잠시 후, 문이 열렸고, 장미리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우리 딸이구나.”그러면서 그녀는 소미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창고 안은 어두웠고, 낮인데도 불빛이 필요할 정도였다.희미한 주황빛 조명이 공간을 비췄고, 그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소미의 시선이 한 곳으로 꽂혔다.구석에 놓인 작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우주.소년은 겁에 질려 있었다. 아이는 온몸이 긴장된 채 땅만 바라보고 있었고, 두 손은 꼭 쥔 채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엄마!”소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머니를 노려보았다.“진짜... 엄마였어요? 대체 왜 그랬어요?”유건에게 우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는 바로 어머니 장미리를 의심했다.“왜냐고?”장미리는 되려 반문했다.“네 간이 안 맞잖니? 지시연 그 계집애는 끝까지 거부하고.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우주뿐이잖아!”“네?”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