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원피스는 강민아가 당시 입을 수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이었다.강나현이 호탕한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언니, 이리 와서 우리랑 같이 술 마시자.”겁에 질린 여자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저... 술 못 마셔요.”강나현은 콧방귀를 뀌고는 주위 남자들에게 물었다.“너희들은 다 이런 스타일 좋아하지? 순진해 보이는 거. 나까지도 불쌍하게 느껴지잖아.”“저런 토끼 같은 애들이 인기가 많긴 하지.”“하준이가 마음에 든 애라면 우린 건드리지 않아.”강나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언니, 무서워하지 말고 내 옆에 앉아.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여자는 강나현에게 경계를 풀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강나현이 그녀에게 술잔을 쥐여주었다.“자, 하준 오빠한테 한잔 따라줘.”여자는 강나현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반하준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반하준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 대표님.”여자가 술을 따르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반하준의 분노가 확 폭발했다.‘민아 아니잖아. 하얀 원피스를 보고 대체 뭘 기대했던 거지?’“꺼져.”반하준이 술잔을 엎은 바람에 술이 여자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졌고 곧이어 비명이 들려왔다.룸 안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그 누구도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었다.강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등을 토닥였다.“아이고, 울지 마. 언니가 우니까 내 마음이 다 아프네. 같이 나가자.”강나현은 여자를 데리고 룸을 나선 후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룸을 나서자 여자도 조금씩 진정되는 듯했다.“데리고 나와줘서 고마워요.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거예요. 그나저나 반 대표님 너무 무서워요. 전 김예나라고 하는데 이름이 뭐예요?”강나현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호감이 가득했다.복도에 드리워진 어두운 조명 덕에 강나현의 두 눈에 비친 감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뭐야? 나랑 친
강나현의 말에 김예나는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반응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했다.강나현이 떠나고 10여 분 후 김예나는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아픈 몸을 이끌고 화장실에서 나왔다.깔끔한 정장을 입은 심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별다른 표정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김예나는 손에 쥔 메모리 카드를 그에게 건넸다.“절 알아보지 못했어요.”멍투성이가 된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저 여자를 꼭 지옥에 보낼 겁니다. 유하의 복수를 하고 말 거예요.”심은호는 메모리 카드를 받아 들고 차갑게 돌아섰다. 그러자 김예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궁금한 게 있는데요. 변호사님은 왜 갑자기 절 도와주시는 거죠? 전에 제가 아무리 부탁해도 이 사건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잖아요.”심은호는 손가락 끝으로 작은 메모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한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요.”...검은색 마이바흐가 반씨 저택의 차고로 들어섰다.강나현은 손을 뻗어 반하준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반하준은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팔을 빼냈다.“오빠, 내가 잡아줄게.”“괜찮아.”그는 쉰 목소리로 말하고는 옆쪽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강나현이 황급히 뒤따라 내렸다.“아휴, 조심 좀 해. 그렇게 많이 마셔 놓고.”강나현이 따라가 반하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렸다.그는 집 안으로 들어간 후 소파에 앉아 미간을 문질렀다. 이렇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술을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레몬 물 줘.”반하준이 허공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나현이 막 들어오던 터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응? 뭐라고?”그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민아가 집을 나간 지 벌써 한 달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강민아가 없는 집을 적응하지 못했다.도우미들 또한 강민아가 없는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심지어 연진숙과 반현민까지 점점 더 불만을 쏟아냈다.반하준은 배를 움켜쥐고 미간을 찌푸린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강나현은 반하준이 내뿜는 싸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의 얼굴에 살기마저 담겨 있는 듯했다.“왜 그래? 언니가 또 무슨 기분 나쁜 소리라도 했어?”반하준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세 글자를 내뱉었다.“심은호!”강나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왜.”심은호의 빈정거리는 웃음소리가 반하준의 귀에 꽂혔다.“너 지금 민아 방에 있어?”반하준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강나현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반하준을 쳐다보았고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랑 민아가 오늘에 이혼했는데 벌써 신나서 호텔에서 밤을 보내?”지금 이 순간 반하준은 분노한 수컷 사자를 방불케 했다. 그와 달리 심은호는 느긋하기만 했다.“민아 씨가 내 호텔에 묵고 있거든. 한밤중에 내 손님이 방해받도록 내버려 둘 수 없지. 그리고...”심은호는 잠깐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이혼했는데도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야 해?”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주먹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튀어나올 듯했다.“심은호, 예전부터 민아한테 마음이 있었지? 전에 내 아이 생일 때 해외에서 비행기를 12시간 타고 날아온 이유가 혹시 강민아 때문이야?”매번 심은호와 만날 때마다 강민아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가 초대한 핑계로 민아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거였어.’반하준은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남의 아내를 탐내다니. 심은호, 너 아주 저질이구나.”그러자 심은호가 코웃음을 쳤다.“넌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하는 거지?”“민아 한때는 내 아내였으니까.”“하지만 진심을 저버린 사람은 나중에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돼 있어.”반하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위를 움켜쥐는 것처럼 아팠고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왔다.그의 창백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반하준, 제발 그만해. 민아 씨 잠 좀 편히 자게 내버려 둬.”말을
반하준이 경멸스럽게 콧방귀를 뀌면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는 샤워를 하고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강나현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미닫이문에 기대어 서 있는 걸 보았다.그녀는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며 복근을 은근히 과시했다.“오빠, 빨리 깼네.”순간 멈칫한 반하준은 머리를 닦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젖은 슬리퍼를 갈아신는 것도 잊은 채 강민아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는 침대의 이불을 들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강민아가 방 안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끼익.옷장을 열어보니 고급 맞춤복이 가득 걸려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집을 나갈 때 캐리어 하나만 들고 나갔다. 그 캐리어 안에는 평소 반우정에게 사 줬던 옷들이 들어 있었다.반씨 가문 사람들 모두 지난 7년 동안 강민아를 홀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강민아에게 이렇게 많은 고급 맞춤복과 명품 가방, 그리고 값비싼 보석들이 있지 않은가.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반씨 가문의 명의로 구매한 것들이었고 반하준과 연진숙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다. 강민아가 마음대로 가져가면 절도가 되는 것이었다.심지어 그녀마저도 반씨 가문을 빛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사 온 존재였다.반하준의 행동에 강나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오빠, 왜 그래?”옷장 앞에 있던 반하준은 갑자기 돌아서서 강민아의 잠옷을 입은 강나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어젯밤에 민아 방에서 잤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이름을 저렇게 다정하게 불러?’강나현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응. 오빠가 너무 아파해서 혼자 놔두고 갈 수가 없었어. 어차피 민아 언니 방이 비어 있으니까 하룻밤 자면서 오빠를 챙겨주려고 그랬지.”그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 강나현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목소리마저 떨렸다.“설마 민아 언니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그녀가 다급하게 캐물었다.“오빠, 민아 언니랑 이혼한 거 후회해?”“무슨 헛소리야?”
반 친구들 모두 반현민을 부러워했다....찐빵 천국.반우정은 커다란 찐빵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는 우유까지 야무지게 마셨다.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반우정이 먹는 모습을 보던 한 초등학생은 저도 모르게 한 입 더 쑤셔 넣었다.반우정이 아침 식사를 마치자 강민아가 물티슈를 건넸다.“어린이집 가자.”어린이집이라는 소리에 반짝였던 반우정의 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강민아는 딸의 감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왜 그래?”“엄마, 이젠 어린이집 가는 게 별로 좋지 않아요.”강민아가 물었다.“어린이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반우정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아니에요. 어린이집은 싫지만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요. 친구들이랑 있으면 재미있어요.”딸이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강민아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승덕 명문 학교는 귀족 학교라 아이들이 부모 영향을 받아서 반우정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을 가능성이 컸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잠시 후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강민아 씨 되십니까?”“네. 그런데요?”“저는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 직원입니다. 예선에서 1등 하신 걸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강민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1등이라고요?”‘조직위원회에서 잘못 안 거 아니겠지?’직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강민아 씨가 89점을 받았어요.”‘일부러 점수를 낮게 받으려고 했는데 89점이 예선 1등이라고? ALI 수학 경시대회 참가자 중에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나?’“강민아 씨, 제출하신 자료를 보니 고연대학교를 졸업하셨지만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지내셨더군요. 조직위원회에서는 강민아 씨가 어떻게 대회에 참가하게 됐고 또 어떻게 이렇게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무척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JVC 방송국 기자가 민아 씨 성적과 상황을 알고 인터뷰하고 싶다는데 괜찮으
반현민이 굳은 얼굴로 친구들에게 경고했다.“앞으로는 반우정이랑 놀지 마.”아이들이 일렬로 서더니 일제히 반현민에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알았어.”강민아는 학교 정문을 본 순간 반우정의 표정이 굳어진 걸 캐치했다.“정이야?”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반우정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꼭 잡고 애써 밝은 척했다.“엄마, 어린이집 갈게요. 빠이빠이.”반우정은 평소에 같이 놀던 친구들을 보고 기뻐하며 달려갔다.“민설윤.”그런데 민설윤이 반우정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반우정은 민설윤을 따라가서 신난 얼굴로 말했다.“설윤아, 나 이름 바꿨어. 이젠 반우정이 아니고 강윤정이야. 엄마 성을 따르기로 했어.”“나랑 말하지 마.”민설윤이 옆으로 피하면서 반우정과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에 반우정은 큰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설윤아, 왜 그래?”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민설윤이 발걸음을 멈췄다.“반현민이 너랑 노는 애는 어린이집에서 왕따당할 거라고 했어.”반우정은 놀란 나머지 넋이 나갔다.강민아는 떠나지 않고 멀찍이 서서 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반우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아차리는 그녀였다.“민아야.”누군가 그녀를 불러 고개를 돌려보니 반진경이 딸 반연주의 손을 잡고 다가오고 있었다.반진경은 반하준의 사촌 누나다. 남편은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반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왔다.반진경이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두 눈을 깜빡였다.“너 진짜 하준이랑 이혼했어?”“네. 이혼했어요.”강민아의 시선이 반연주에게 닿은 순간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반연주와 반우정의 나이는 같지만 몸집 차이가 심하게 났다.반진경은 아이를 채식주의자로 키우겠다고 어릴 때부터 채소만 먹였다. 그 바람에 반연주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얼굴도 잿빛처럼 하얬다.그래도 그녀가 반씨 가문에 있을 때 몰래 반연주에게 고기를 챙겨줬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일자리는 구했어?”반진경이 물었다.“아직요.”강민아가 솔직하게 대답
“은혜도 모르면서. 이거 놔.”반우정이 무섭게 화를 냈다.“방금 뭐라고 했어?”반현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할머니가 그랬어. 은혜도 모르는 애를 키웠다고. 너랑 나 이젠 남매 아니야. 그 가식적인 여자랑 넌 썩은 하수구의 쥐새끼들이야. 우린 쥐새끼랑 같이 수업 안 해.”반현민의 뒤에 있던 아이들이 코를 막았다.“반우정, 빨리 도련님을 내려놓지 못해?”“반우정 몸에서 냄새나. 더러워.”“엄마가 우정이랑 말도 섞지 말랬어. 쟤는 우리랑 같이 수업 들을 자격 없어.”반우정이 이를 악물고 다른 손을 들었다. 반현민은 반우정이 때리려는 걸 눈치채고 뒤에 있는 친구들에게 소리쳤다.“나 좀 도와줘.”하지만 아무도 감히 반현민을 도우러 나서지 못했다.강나현은 오토바이에 기대서서 휴대폰으로 반우정이 반현민을 들어 올리는 과정을 전부 찍었다.반우정이 다른 손을 들어 반현민의 뺨을 때리려 하자 입꼬리를 씩 올렸다.‘때려. 계속 때려. 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영상을 하준 오빠랑 어머님한테 보내야겠어.’잠시 후 옷깃을 잡고 있던 힘이 사라지면서 반현민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울음을 터트렸다.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앞에 서 있는 반우정을 올려다보았는데 아주 기세등등했다.반우정의 그림자가 반현민을 완전히 뒤덮었고 반현민은 겁에 질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반현민의 친구들도 그런 반우정을 보고 혼비백산했다.반우정이 다시 주먹을 쥐었다.“으앙.”반현민은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체념한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약한 애를 괴롭히지 않아.”반우정이 주먹을 내렸다. 아무 저항도 못 하는 약골을 때려봤자 재미도 없었다.“우정아, 무슨 일이야?”강민아가 다가오자 반현민이 반우정을 가리키면서 고자질했다.“쟤가 날 때렸어요.”반우정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반현민이 다른 애들한테 나랑 놀지 말라고 했어요. 나랑 노는 애는 어린이집에서 왕따당할 거라고 했대요.”강민아의 차가운
반우정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충동적인 행동으로 엄마에게 문제를 가져다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의 어깨에 손을 얹어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주었다.“제 딸은 친구를 때리지 않았습니다.”“때렸어요.”반현민이 팔을 흔들면서 반우정을 가리켰다.“우정이가 나 때렸어요. 나쁜 여자, 우정이만 편애하고. 눈이 멀어서 내가 맞는 걸 못 봤겠죠.”강민아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학교 정문의 CCTV를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헐뜯는 학생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합니다.”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듯 반현민을 쳐다보았다. 유영호가 강민아에게 손을 내저었다.“CCTV가 고장 났어요. 반현민 어린이는 3년 연속 교내 유망주라는 칭호를 받았고 승덕 명문 학교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에요. 전 현민 어린이의 말을 믿습니다.”유영호는 그 자리에 있던 학부모들에게도 물었다.“여러분, 조금 전 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걸 보셨습니까?”적지 않은 학부모들이 유영호의 시선을 피했다.“봤어요.”반진경이 나섰다.“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걸 봤어요.”“반진경 씨.”강민아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제정신입니까?”그러자 반진경이 강민아를 흘겨봤다.“넌 더 이상 반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잖아. 너랑 같은 성을 가진 애는 승덕 명문 학교에 다닐 자격이 없어.”반씨 가문 사람이 강민아를 배척하는 모습을 본 다른 학부모들도 목소리를 높였다.“우정이 어머님과 우정이는 이미 반씨 가문에서 쫓겨났는데 아직도 딸을 귀족 학교에 다니게 한다는 게 말이 돼요?”“우정이가 엄마를 닮아서 어디 내놓기 부끄러우니까 버린 거겠죠.”“딸을 저렇게 덩치 큰 아이로 키우는 건 처음 봐요. 우리 아들이 쟤한테 맞을까 봐 걱정된다니까요.”강민아는 반우정의 퇴학을 원하는 학부모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역겨운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그녀가 반씨 가문을 떠난 후 그들은 그제야 점잖던 가면을 벗
강나현은 다급한 어조로 강민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 모든 게 강민아가 우리를 해치려고 짠 계획이에요!”그런데 얼굴 전체가 돼지처럼 부어올라 말을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목소리가 어눌하게 들렸다.그런 그녀의 말에 강성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벨트를 반으로 접은 뒤 강나현의 콧대를 조준해 휘둘렀다.“민아랑 내 부녀 사이 이간질할 생각 마!”강나현은 당황했다. 강성진이 왜 갑자기 강민아 편을 드는 걸까.“아빠가 키운 자식은 저예요! 강민아랑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래요? 애초에 데려올 생각도 없었잖아요!”“닥쳐!”강성진은 화가 났다. 그의 평판은 무너졌지만 강민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앞으로 그녀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강나현이 대놓고 헛소리하는 걸 그냥 둘 리가 없었다.강성진이 소리를 질렀다.“테이프 가져와!”작고 하얀 손이 검은 테이프를 건넸다.강기성은 강성진에게 테이프를 건네는 김예나를 보고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였다.강성진이 테이프를 찢자 강나현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강성진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네 망할 입을 막으려는 거지!”강성진은 본인과 강민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돌아온 지 9년이 지났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게다가 둘은 한때 팽팽하게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강성진은 강민아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아빠! 하지 마요!”강나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강성진의 행동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강성진이 곧장 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감자 김예나는 한쪽에 서서 진흙탕처럼 혼탁한 눈빛으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한때 강나현은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테이프를 붕대 삼아 눈과 머리, 입, 코를 감아 숨도 못 쉬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다.그렇게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잠식되어 갈 때 가위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강나현은 강성진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상황을 뒤집을 희망이라도 본 듯 서서히 안도했다.‘그래, 이제 강민아가 맞아서 이빨이 뽑힐 차례야!’강성진은 강나현의 휴대폰 앨범 속 강민아와 관련된 영상을 지우고 숨을 고르더니 손을 들어 또다시 강나현의 뺨을 때렸다.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강나현의 얼굴을 강타했다.강나현의 입에 머금었던 솜뭉치가 끈적끈적한 피와 섞여 바닥에 튀어나왔다.“강나현, 이 망할 것! 날 해친 것도 모자라 민아까지 해치려고 들어? 강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가 오늘 너 때려죽인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에요!”강나현이 피를 뱉자 혀끝에는 온통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설명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강성진은 왜 그녀를 믿지 않는 걸까.휴대폰을 강나현에게 던진 뒤 강성진은 벨트를 풀었다.강나현은 강성진이 벨트로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그 순간 강성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벨트로 강나현을 한 대 세게 내려친 뒤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여보세요.”강성진은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들어와요.”강승 테크의 주요 주주 몇 명이 들어왔고 맨 앞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성진, 지금 여론이 자네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옴 쪽에서는 입찰에서 빠지려고까지 해!”강성진은 그 말에 덩달아 조바심을 냈다.“네? 어떻게 멋대로 발을 뺀다는 거죠? 지금 당장 옴 테크 쪽 임원에게 연락해 봐야겠어요!”또 다른 주주가 강성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지금 어디든 자네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다는 걸 몰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난...”주주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우린 고심 끝에 만장일치로 자네가 먼저 대표 사임 발표를 하길 바라네. 그래야 자네나 회사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잠잠해질 거야.”“어떻게 강승
그러자 강성진은 강나현에게 소리쳤다.“민아를 좀 봐! 우리 회사를 위해서 애쓰고 있잖아!”강민아가 덧붙였다.“그런데 오늘 파티에서 공개된 영상이 서경 상류층에 퍼졌어요.”그녀는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강나현에게 물었다.“나현아, 넌 상류층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니까 가서 확인해 봐. 다들 우리 집 얘기하고 있는지.”강나현은 심장이 철렁하고 소름이 돋았다.강민아가 지금 그녀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강성진이 곧바로 강나현을 재촉했다.“휴대폰 내놔.”강나현은 두 볼이 부어올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강민아가 또다시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녀는 강성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곧바로 강성진이 그녀의 뺨을 또 때렸고,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뺨 사이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으며 살갗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강성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명령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강성진의 위협적인 압박에 강나현은 순순히 휴대전화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부은 얼굴로 휴대폰 잠금이 풀리지 않자 지문으로 해제한 뒤 카톡 채팅 기록을 살펴보았다.곧 여러 명이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고, 강나현을 삭제하지 않은 재벌 2세들이 파티에서 강나현이 당당하게 강성진이 바람피운 것을 공개한 영상 링크를 보냈다.[강나현, 너 멋있다!][나현, 이게 네가 말한 빅 뉴스야?][역시 너야. 나오자마자 아빠부터 건드리네. 강나현, 용감해! 너는 내가 인정한다!]강성진은 강나현을 칭찬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두 눈에 담긴 불길이 거세게 번졌다.한심한 재벌 2세들은 부모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강나현이 파티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들에게 ‘모범’ 역할을 했기에 강나현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강나현은 소파에 앉아 강성진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발바닥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온몸을 휩쓸고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래위 치아가 달달 떨리며 서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아빠...”강성진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강나
강민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잔이 강나현의 가슴을 강타하고 뜨거운 물이 마침 강나현의 얼굴에 튀면서 그녀의 얼굴도 씻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아악! 젠장!”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강나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물이 그녀의 얼굴에 있던 핏자국과 뒤섞이며 연분홍색으로 바뀔 때쯤 그녀가 허둥지둥 소파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김예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어두운 동공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이런 망할!”강나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에서 쿠션을 잡아 김예나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김예나는 피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강나현이 던지는 딱딱한 물건에 맞아 머리에 피가 난 적도 있는데 이까짓 쿠션쯤이야.강기성이 손을 뻗어 쉽게 쿠션을 낚아채더니 김예나를 등 뒤로 보내면서 쿠션을 옆으로 던졌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예나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그의 눈에 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미친개 같았다.강나현은 입에 솜을 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당장이라도 김예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일부러 그런 거야! 왜 아직도 우리 집에 살게 놔두는 거야? 저번에 내 그릇도 깨고, 내 옷도 잘못 빨고, 내 방 창문도 열어놔서 엄청나게 큰 벌레가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왔어!”김예나는 벌벌 떨며 강기성 뒤로 숨었다.강나현의 말이 맞다. 일부러 그랬다.강기성의 손에 이끌려 강씨 가문에 살게 되면서 강나현은 일부러 그녀에게 집안일을 시켰다.김예나도 기꺼이 도우미를 자처했는데 청소도구를 들고 강나현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강씨 가문의 다른 도우미들이 너도나도 일을 도와주는 탓에 강나현의 방을 꼼꼼히 뒤져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강나현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괴롭힘을 하나하나 되갚아주는 것뿐이었다.2년 내내 강나현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강씨 가문에서 강나현에게 했던 복수는 그녀가 한 짓에 비하면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그녀가 강기성에게 약을 먹이고 나서야 그는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였다.강기성은 이 집안에서 강성진에게 맞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강나현은 어렸을 때부터 강성진에게 매를 맞으며 점차 폭력을 동경하게 되어 여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자 무리에 어울리려 했다. 마치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되어야만 매 맞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처럼.“그 사람이 도민영을 아끼는 것처럼 보여도 예전에 때려서 도민영 얼굴이 부은 걸 봤어. 난 어렸을 때부터 도민영이 저 사람한테 맞아서 머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어젯밤에 왜 오빠를 때린 거야?”강기성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내가 사람을 시켜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어.”강기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강씨 가문은 남자가 물려받아야 한다면서 내가 친부모에게 가면 강씨 가문 대가 끊길 거래.”말하며 강기성이 경멸하듯 비웃었다.“난 언젠가 저 사람 죽여버릴 거야.”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강성진의 피가 튀는 것조차 더러운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앞길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다.강민아는 숟가락으로 강기성에게 포도당 물을 먹여주었다.“언젠가 우리가 크면 저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날이 올 거야.”도민영이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걸 강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강기성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고리타분한 마인드와 강나현의 출생 이후 강성진은 큰딸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접었다.“다들 이만 돌아가세요.”직원들에게 말하던 강민아는 자리에 있던 임원들과 주주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단상 위에 꿇고 앉은 그녀의 발치에는 아직 기절한 척 시늉하는 도민영이 있었다.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임원들도 마음을 진정시켰다.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강민아의 차분한 모습은 임원들에게 구원의 지푸라기와 같았다.강민아는 심은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나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강성진에게 설명했다.“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올린 영상이 아니라고요!”강성진은 이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과 어린 비서의 동영상이 폭로되었고, 게다가 폭로한 당사자는 그의 잘난 딸이었다.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행복한 얼굴로 단상 아래에 있는 임직원들에게 두 딸이 강승 테크에 입사해 온 가족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의 열정적인 연설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효녀 강나현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강나현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공처럼 차버리고 싶었다.“개자식,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강성진은 발을 들어 강나현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이대로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강나현은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리며 서둘러 기어서 도망쳤다.그때 강민아를 돌아보았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냥 내버려두진 않겠지?’그런데 강민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도민영의 어깨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엄마, 일어나봐요!”강민아가 손을 뻗어 도민영의 인중을 누르자 도민영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뜨며 강민아를 노려보았다.“아파!”그리고 다시 기절했다.강민아는 연기라는 걸 알았다.지금 상황에서는 무고한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것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도 엄마를 걱정하는 효녀인 척 강성진에게 맞는 강나현을 무시하고 있었다.강나현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지만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강성진은 그들의 대표였고 말 한마디로 그들을 해고할 수 있으니까.임원들과 주주들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강성진이 어린 비서와 놀아난 사실은 사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적나라한 영상이 공개되고 현장에 기자까지 있으니 일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강승 테크에 미칠 부정
강나현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리고, 그는 포박당한 채 매서운 눈빛으로 TV 화면을 응시했다.강민아를 저격하는 말인 건 안다.대체 강민아의 무슨 약점을 잡은 걸까.강민아가 강씨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위험한 짓을 한 건 그를 이곳에 가둔 것뿐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이 그가 감금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반하준은 자신의 뇌 어딘가에서 신경이 거칠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안 돼!’절대 그가 이곳에 감금된 사실을 폭로해선 안 된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확장되며 스크린에는 적나라한 영상이 재생되었다.강성진의 얼굴이 단번에 퍼렇게 질렸다.“아아악!”도민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미처 입을 가리지 못한 채 비참한 비명을 내뱉었다.강씨 가문의 다른 친척이나 주주들도 일제히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강나현은 단상에 서서 모두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상 아래 손님들에게 말했다.“여러분, 다 보셨나요? 저런 사람이 강승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나요? 저렇게 사생활이 엉망인데 정말 강승 테크를 믿고 맡길 수 있나요?”강나현이 눈가에 악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차갑게 웃었다.무죄로 석방된 후 강민아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다.‘그러게 누가 감히 도발하래?’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꿨으니 이제 강민아가 심은호와 사귀면서 다른 남자와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강나현은 심은호를 바라보며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무대 맨 앞줄에 서 있던 심은호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강나현 씨의 가족도 서슴없이 희생하는 용기는 대단하네요!”강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심은호는 왜 저렇게 담담한 걸까.게다가 대놓고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강나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심은호는 강민아를 그저 데리고 놀 생각이었고, 어쩌면 진작 그녀가 방탕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강나현이 승리의
강나현은 강민아의 게시물을 클릭해서야 이미 올렸던 영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고개를 든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쳐다보았다.영상을 삭제했다고 그녀를 도발했던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이미 강민아와 반하준의 영상을 저장해 놓았으니까!강민아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강나현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렸다고 더더욱 확신했다.강민아는 분명 반하준이 합의서에 사인하고 아직 민이가 병원에 있는 데도 강나현이 보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거다.그래서 다시 친구 추가를 한 뒤 일부러 그녀만 볼 수 있는 게시물을 올려 기선제압을 했다.강민아는 그녀가 반하준을 좋아해서 그의 체면 때문에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겠지만, 강나현은 강민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강나현은 영상을 저장한 뒤 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꾸었다.이제 강민아에게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련다.“강민아, 내가 이미 경고했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심은호와 만나고 하준 씨랑 얽혀 있다고 해서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마.”강나현의 경고가 끝나고 파티장 스피커가 울렸다.무의식적으로 단상 위를 돌아보니 강성진이 그쪽으로 다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제가 이 자리에서 몇 마디 짧게 얘기하겠습니다...”강성진은 10분 넘게 열정적으로 연설한 뒤 도민영과 두 딸까지 무대 위로 데려갔다.그들은 저마다 다른 속셈을 품고 역겨움을 참아가며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가족인 척 연기를 했다.마침내 강성진의 연설이 끝나고 강나현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아빠의 딸로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강나현의 발언은 약속된 게 아니었기에 강성진은 당황한 듯 강나현을 바라봤고, 강민아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우리 중엔 직책에 걸맞지 않은 품행을 지닌 사람이 있어요. 비록 가족이지만 사생활이 난잡해 강승 테크의 임원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호흡을 가다듬은 강나현은 강민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구치소에서 나온 뒤 미용실에 가서 브라운으로 염색하고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이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일부러 피부과에 가서 관리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을 거다.남성 정장을 입고 검은 가죽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걸음은 당차 보였지만 나이 많은 임원이나 주주들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차림새였다.“언니, 축하해. 벌써 다른 사람 만나네.”강나현은 다가가 심은호를 돌아보며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빛을 감추었다.“심은호,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리 언니랑 만나게 됐어?”강나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심은호는 무심하게 그녀를 흘겨볼 뿐이었다.“대단하네.”강나현이 눈이 휘어지게 히죽 웃었다.“심은호,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뭘 칭찬하는 거야?”“사고를 내고도 벌을 받지 않았잖아. 반씨 가문 도련님이 그 정도 다쳤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나왔어. 참 운도 좋네. 반하준이 아마 불길 속에서도 구해줄 거야.”강나현의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었다.안 그래도 심은호는 존재만으로 눈에 띄고 주위에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이제 그들이 전부 강나현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게다가 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었다.지난달 강나현이 강변대로에서 큰 사고를 쳤다는 건 서경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심은호는 고개를 돌려 강민아에게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산에 있는 불상 대신 반하준이 거기 앉아있으면 되겠네요.”강민아는 심은호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얘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따스하고도 솔직한 심은호의 눈빛이 강민아의 얼굴에 머물렀다.“걱정되는데요.”강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리듯 말했다.“얘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요?”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강나현은 불쾌함에 입을 삐죽거렸다.“언니는 날 뭐로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