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현의 말에 김예나는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반응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했다.강나현이 떠나고 10여 분 후 김예나는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아픈 몸을 이끌고 화장실에서 나왔다.깔끔한 정장을 입은 심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별다른 표정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김예나는 손에 쥔 메모리 카드를 그에게 건넸다.“절 알아보지 못했어요.”멍투성이가 된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저 여자를 꼭 지옥에 보낼 겁니다. 유하의 복수를 하고 말 거예요.”심은호는 메모리 카드를 받아 들고 차갑게 돌아섰다. 그러자 김예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궁금한 게 있는데요. 변호사님은 왜 갑자기 절 도와주시는 거죠? 전에 제가 아무리 부탁해도 이 사건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잖아요.”심은호는 손가락 끝으로 작은 메모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한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요.”...검은색 마이바흐가 반씨 저택의 차고로 들어섰다.강나현은 손을 뻗어 반하준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반하준은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팔을 빼냈다.“오빠, 내가 잡아줄게.”“괜찮아.”그는 쉰 목소리로 말하고는 옆쪽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강나현이 황급히 뒤따라 내렸다.“아휴, 조심 좀 해. 그렇게 많이 마셔 놓고.”강나현이 따라가 반하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렸다.그는 집 안으로 들어간 후 소파에 앉아 미간을 문질렀다. 이렇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술을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레몬 물 줘.”반하준이 허공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나현이 막 들어오던 터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응? 뭐라고?”그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민아가 집을 나간 지 벌써 한 달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강민아가 없는 집을 적응하지 못했다.도우미들 또한 강민아가 없는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심지어 연진숙과 반현민까지 점점 더 불만을 쏟아냈다.반하준은 배를 움켜쥐고 미간을 찌푸린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강나현은 반하준이 내뿜는 싸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의 얼굴에 살기마저 담겨 있는 듯했다.“왜 그래? 언니가 또 무슨 기분 나쁜 소리라도 했어?”반하준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세 글자를 내뱉었다.“심은호!”강나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왜.”심은호의 빈정거리는 웃음소리가 반하준의 귀에 꽂혔다.“너 지금 민아 방에 있어?”반하준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강나현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반하준을 쳐다보았고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랑 민아가 오늘에 이혼했는데 벌써 신나서 호텔에서 밤을 보내?”지금 이 순간 반하준은 분노한 수컷 사자를 방불케 했다. 그와 달리 심은호는 느긋하기만 했다.“민아 씨가 내 호텔에 묵고 있거든. 한밤중에 내 손님이 방해받도록 내버려 둘 수 없지. 그리고...”심은호는 잠깐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이혼했는데도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야 해?”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주먹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튀어나올 듯했다.“심은호, 예전부터 민아한테 마음이 있었지? 전에 내 아이 생일 때 해외에서 비행기를 12시간 타고 날아온 이유가 혹시 강민아 때문이야?”매번 심은호와 만날 때마다 강민아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가 초대한 핑계로 민아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거였어.’반하준은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남의 아내를 탐내다니. 심은호, 너 아주 저질이구나.”그러자 심은호가 코웃음을 쳤다.“넌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하는 거지?”“민아 한때는 내 아내였으니까.”“하지만 진심을 저버린 사람은 나중에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돼 있어.”반하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위를 움켜쥐는 것처럼 아팠고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왔다.그의 창백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반하준, 제발 그만해. 민아 씨 잠 좀 편히 자게 내버려 둬.”말을
반하준이 경멸스럽게 콧방귀를 뀌면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는 샤워를 하고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강나현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미닫이문에 기대어 서 있는 걸 보았다.그녀는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며 복근을 은근히 과시했다.“오빠, 빨리 깼네.”순간 멈칫한 반하준은 머리를 닦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젖은 슬리퍼를 갈아신는 것도 잊은 채 강민아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는 침대의 이불을 들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강민아가 방 안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끼익.옷장을 열어보니 고급 맞춤복이 가득 걸려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집을 나갈 때 캐리어 하나만 들고 나갔다. 그 캐리어 안에는 평소 반우정에게 사 줬던 옷들이 들어 있었다.반씨 가문 사람들 모두 지난 7년 동안 강민아를 홀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강민아에게 이렇게 많은 고급 맞춤복과 명품 가방, 그리고 값비싼 보석들이 있지 않은가.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반씨 가문의 명의로 구매한 것들이었고 반하준과 연진숙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다. 강민아가 마음대로 가져가면 절도가 되는 것이었다.심지어 그녀마저도 반씨 가문을 빛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사 온 존재였다.반하준의 행동에 강나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오빠, 왜 그래?”옷장 앞에 있던 반하준은 갑자기 돌아서서 강민아의 잠옷을 입은 강나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어젯밤에 민아 방에서 잤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이름을 저렇게 다정하게 불러?’강나현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응. 오빠가 너무 아파해서 혼자 놔두고 갈 수가 없었어. 어차피 민아 언니 방이 비어 있으니까 하룻밤 자면서 오빠를 챙겨주려고 그랬지.”그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 강나현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목소리마저 떨렸다.“설마 민아 언니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그녀가 다급하게 캐물었다.“오빠, 민아 언니랑 이혼한 거 후회해?”“무슨 헛소리야?”
반 친구들 모두 반현민을 부러워했다....찐빵 천국.반우정은 커다란 찐빵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는 우유까지 야무지게 마셨다.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반우정이 먹는 모습을 보던 한 초등학생은 저도 모르게 한 입 더 쑤셔 넣었다.반우정이 아침 식사를 마치자 강민아가 물티슈를 건넸다.“어린이집 가자.”어린이집이라는 소리에 반짝였던 반우정의 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강민아는 딸의 감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왜 그래?”“엄마, 이젠 어린이집 가는 게 별로 좋지 않아요.”강민아가 물었다.“어린이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반우정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아니에요. 어린이집은 싫지만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요. 친구들이랑 있으면 재미있어요.”딸이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강민아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승덕 명문 학교는 귀족 학교라 아이들이 부모 영향을 받아서 반우정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을 가능성이 컸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잠시 후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강민아 씨 되십니까?”“네. 그런데요?”“저는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 직원입니다. 예선에서 1등 하신 걸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강민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1등이라고요?”‘조직위원회에서 잘못 안 거 아니겠지?’직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강민아 씨가 89점을 받았어요.”‘일부러 점수를 낮게 받으려고 했는데 89점이 예선 1등이라고? ALI 수학 경시대회 참가자 중에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나?’“강민아 씨, 제출하신 자료를 보니 고연대학교를 졸업하셨지만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지내셨더군요. 조직위원회에서는 강민아 씨가 어떻게 대회에 참가하게 됐고 또 어떻게 이렇게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무척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JVC 방송국 기자가 민아 씨 성적과 상황을 알고 인터뷰하고 싶다는데 괜찮으
반현민이 굳은 얼굴로 친구들에게 경고했다.“앞으로는 반우정이랑 놀지 마.”아이들이 일렬로 서더니 일제히 반현민에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알았어.”강민아는 학교 정문을 본 순간 반우정의 표정이 굳어진 걸 캐치했다.“정이야?”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반우정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꼭 잡고 애써 밝은 척했다.“엄마, 어린이집 갈게요. 빠이빠이.”반우정은 평소에 같이 놀던 친구들을 보고 기뻐하며 달려갔다.“민설윤.”그런데 민설윤이 반우정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반우정은 민설윤을 따라가서 신난 얼굴로 말했다.“설윤아, 나 이름 바꿨어. 이젠 반우정이 아니고 강윤정이야. 엄마 성을 따르기로 했어.”“나랑 말하지 마.”민설윤이 옆으로 피하면서 반우정과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에 반우정은 큰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설윤아, 왜 그래?”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민설윤이 발걸음을 멈췄다.“반현민이 너랑 노는 애는 어린이집에서 왕따당할 거라고 했어.”반우정은 놀란 나머지 넋이 나갔다.강민아는 떠나지 않고 멀찍이 서서 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반우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아차리는 그녀였다.“민아야.”누군가 그녀를 불러 고개를 돌려보니 반진경이 딸 반연주의 손을 잡고 다가오고 있었다.반진경은 반하준의 사촌 누나다. 남편은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반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왔다.반진경이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두 눈을 깜빡였다.“너 진짜 하준이랑 이혼했어?”“네. 이혼했어요.”강민아의 시선이 반연주에게 닿은 순간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반연주와 반우정의 나이는 같지만 몸집 차이가 심하게 났다.반진경은 아이를 채식주의자로 키우겠다고 어릴 때부터 채소만 먹였다. 그 바람에 반연주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얼굴도 잿빛처럼 하얬다.그래도 그녀가 반씨 가문에 있을 때 몰래 반연주에게 고기를 챙겨줬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일자리는 구했어?”반진경이 물었다.“아직요.”강민아가 솔직하게 대답
“은혜도 모르면서. 이거 놔.”반우정이 무섭게 화를 냈다.“방금 뭐라고 했어?”반현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할머니가 그랬어. 은혜도 모르는 애를 키웠다고. 너랑 나 이젠 남매 아니야. 그 가식적인 여자랑 넌 썩은 하수구의 쥐새끼들이야. 우린 쥐새끼랑 같이 수업 안 해.”반현민의 뒤에 있던 아이들이 코를 막았다.“반우정, 빨리 도련님을 내려놓지 못해?”“반우정 몸에서 냄새나. 더러워.”“엄마가 우정이랑 말도 섞지 말랬어. 쟤는 우리랑 같이 수업 들을 자격 없어.”반우정이 이를 악물고 다른 손을 들었다. 반현민은 반우정이 때리려는 걸 눈치채고 뒤에 있는 친구들에게 소리쳤다.“나 좀 도와줘.”하지만 아무도 감히 반현민을 도우러 나서지 못했다.강나현은 오토바이에 기대서서 휴대폰으로 반우정이 반현민을 들어 올리는 과정을 전부 찍었다.반우정이 다른 손을 들어 반현민의 뺨을 때리려 하자 입꼬리를 씩 올렸다.‘때려. 계속 때려. 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영상을 하준 오빠랑 어머님한테 보내야겠어.’잠시 후 옷깃을 잡고 있던 힘이 사라지면서 반현민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울음을 터트렸다.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앞에 서 있는 반우정을 올려다보았는데 아주 기세등등했다.반우정의 그림자가 반현민을 완전히 뒤덮었고 반현민은 겁에 질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반현민의 친구들도 그런 반우정을 보고 혼비백산했다.반우정이 다시 주먹을 쥐었다.“으앙.”반현민은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체념한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약한 애를 괴롭히지 않아.”반우정이 주먹을 내렸다. 아무 저항도 못 하는 약골을 때려봤자 재미도 없었다.“우정아, 무슨 일이야?”강민아가 다가오자 반현민이 반우정을 가리키면서 고자질했다.“쟤가 날 때렸어요.”반우정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반현민이 다른 애들한테 나랑 놀지 말라고 했어요. 나랑 노는 애는 어린이집에서 왕따당할 거라고 했대요.”강민아의 차가운
반우정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충동적인 행동으로 엄마에게 문제를 가져다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의 어깨에 손을 얹어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주었다.“제 딸은 친구를 때리지 않았습니다.”“때렸어요.”반현민이 팔을 흔들면서 반우정을 가리켰다.“우정이가 나 때렸어요. 나쁜 여자, 우정이만 편애하고. 눈이 멀어서 내가 맞는 걸 못 봤겠죠.”강민아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학교 정문의 CCTV를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헐뜯는 학생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합니다.”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듯 반현민을 쳐다보았다. 유영호가 강민아에게 손을 내저었다.“CCTV가 고장 났어요. 반현민 어린이는 3년 연속 교내 유망주라는 칭호를 받았고 승덕 명문 학교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에요. 전 현민 어린이의 말을 믿습니다.”유영호는 그 자리에 있던 학부모들에게도 물었다.“여러분, 조금 전 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걸 보셨습니까?”적지 않은 학부모들이 유영호의 시선을 피했다.“봤어요.”반진경이 나섰다.“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걸 봤어요.”“반진경 씨.”강민아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제정신입니까?”그러자 반진경이 강민아를 흘겨봤다.“넌 더 이상 반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잖아. 너랑 같은 성을 가진 애는 승덕 명문 학교에 다닐 자격이 없어.”반씨 가문 사람이 강민아를 배척하는 모습을 본 다른 학부모들도 목소리를 높였다.“우정이 어머님과 우정이는 이미 반씨 가문에서 쫓겨났는데 아직도 딸을 귀족 학교에 다니게 한다는 게 말이 돼요?”“우정이가 엄마를 닮아서 어디 내놓기 부끄러우니까 버린 거겠죠.”“딸을 저렇게 덩치 큰 아이로 키우는 건 처음 봐요. 우리 아들이 쟤한테 맞을까 봐 걱정된다니까요.”강민아는 반우정의 퇴학을 원하는 학부모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역겨운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그녀가 반씨 가문을 떠난 후 그들은 그제야 점잖던 가면을 벗
비서가 서류 봉투를 안고 잽싸게 달려왔다.“반우정 어린이의 학적 기록입니다.”유영호는 비서에게서 학적 기록을 받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지고는 뒷짐을 진 채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반우정을 승덕 명문 학교에서 내쫓는 것도 사실은 연진숙의 뜻이었다.어젯밤 연진숙이 특별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반우정이 강민아의 성을 따르기로 했으니 더 이상 남의 집 딸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연진숙은 하루빨리 반우정을 내쫓고 싶어 했다. 귀한 손주가 반우정에게 영향을 받아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되었다.강민아는 몸을 굽혀 딸의 학적 기록을 주웠다. 그 모습을 본 반우정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그녀는 학적 기록 봉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딸을 보면서 부드럽고 굳건하게 웃었다.“정아, 무서워하지 마. 넌 이미 반우정이라는 이 기록과 상관없어. 바닥에 떨어진 건 반우정이지만 가슴을 펴고 일어선 건 강윤정이야.”강민아는 일어나서 반우정에게 손을 내밀었다.“네 인생은 한 번의 퇴학으로 끝나지 않아. 엄마가 있잖아. 엄마가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줄게.”구경하던 학부모들은 양쪽으로 물러서서 강민아와 반우정에게 길을 터주었다. 학교 대문이 겹겹이 막혀있어 두 모녀에게 남은 건 승덕 명문 학교를 떠나는 길뿐이었다.반우정이 울음을 그쳤지만 앳된 얼굴에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우정은 강민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고 엄마의 손에서 전해지는 굳건한 힘을 느꼈다.엄마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마음이 편안해졌다.반우정은 전에 몇 번이고 강민아를 따라 떠났었다. 반현민만의 생일 파티를, 그들을 가두었던 반씨 가문을, 피를 빨아먹던 강씨 가문을 떠났었다.그때의 하늘은 오늘보다 더 어두웠지만 강민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어둠 속에서 나아갔고 반우정은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했다.아이는 강민아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갔다. 강민아가 자신을 빛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갑자기 베이지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자가 뛰쳐나왔다.
그는 이제 그 목도리를 어디에 뒀는지도 잊어버렸다.하지만 강민아는 목도리에 그려진 꽃을 자신이 직접 디자인했다고 말했다.백화점에서 살 수 없는 목도리니까 강민아가 직접 뜨개질을 한 것이 틀림없다!반하준은 우선 주문 내용을 살펴보며 강민아가 뜨개실을 많이 샀다는 것을 확인했다.그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목도리는 강민아가 직접 뜬 게 확실하다.그러다 문득 반하준의 시선이 한 주문 내용에 멈췄다.[자동 뜨개질 기계]아이들을 위해 목도리나 장갑, 모자 등을 뜨기 위해 구입한 것 같다.두 아이를 위해 그렇게 많은 걸 만들어줬는데 분명 강민아 혼자서 다 하기엔 힘들었겠지.반하준은 감시카메라 영상을 찾아 강민아가 자동 뜨개질 기계를 사용하는 모습을 발견했다.기계가 뜨는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한 그녀는 전동 드릴을 꺼내 기계를 개조했다.10분 후, 기계에서 목도리 하나가 뚝딱 완성되었다.그건 반하준에게 선물한 그 목도리였다.반하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강민아가 목도리를 건네줄 때 피곤한 표정으로 하품까지 했던 것을 기억한다.반하준은 강민아가 자신을 위해 밤새도록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해서 그 목도리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했다.그래도 기술이 발달한 탓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자동 뜨개질 기계가 있으니 강민아가 기계로 뜨는 건 당연했다.그러다 몇 번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면서 그녀에게 잘하는 요리를 준비하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강민아는 많은 요리를 준비하느라 오후 내내 바삐 돌았다.일부러 그때그때 마음을 바꾸면서 소금을 적게 넣거나 진간장 대신 전통 간장을 쓰라고 했었는데 그것까지 즉석식품으로 대체할 수는 없겠지.반하준이 주방 카메라를 돌려보니 그날도 어김없이 강민아는 점심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햇빛 아래에서 책을 보고 태블릿을 이용해 에세이와 연구 논문을 찾아보며 오후 내내 주방에 머물렀다.반하준과 그의 친구들이 집에 도착하기까지 30분 정도 남았다는 운전기사의 전화를 받고서야 강민아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그
잘생긴 반하준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며 살벌한 표정이 드러났다.“아줌마한테 해달라고 해!”참 터무니없다.강민아를 대하는 민이의 태도가 확 달라지니 고통받는 사람은 그가 되었다.반하준은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민이는 고집스럽게 떼를 썼다.“엄마가 직접 끓인 죽 먹고 싶어요! 으아앙!”전화기 너머로 아이가 칭얼대자 반하준은 귀에 수많은 바늘이 꽂힌 듯 고막을 찌르는 듯한 이명을 느꼈다.“그럼 내가 그 여자 손을 잘라서 죽 만들어줄게!”홧김에 뱉은 말에 민이의 얼굴이 충격으로 창백해졌다.“아빠!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난 엄마...”“다시는 엄마라는 말 입에 담지 마!”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 남자는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분노의 불길에 피가 부글부글 끓으며 전화기를 쥐고 있던 손에서는 푸른 혈관이 뚫고 나올 기세로 뱀처럼 꿈틀거렸다.그는 여전히 강민아가 그토록 오랜 결혼 생활 동안 자신에게 무심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전 봤던 건 전부 우연일 거다.그렇다면 스코틀랜드식 에그는?만드는 과정이 복잡한 스코틀랜드식 에그는 강민아가 분명 매번 손수 만들어줬을 거다.반하준은 컴퓨터를 들여다보다가 강민아가 올해 자신과 아이를 위해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만들었던 영상을 발견했다.그는 모니터를 통해 강민아가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만드는 것을 확인했다.반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까지 올라갔다.그러다 갑자기 반하준이 고개를 앞으로 숙여 컴퓨터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강민아가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두 개만 만든 게 아니겠나.반하준과 민이, 정이를 위한 것이라면 세 개를 만들어야 했다.반하준은 음식이 거의 끝날 무렵 강민아가 냉장고에서 상자를 하나 꺼내는 것을 발견했다.포장을 뜯어보니 안에는 이미 튀긴 스코틀랜드식 에그가 들어있었고, 강민아는 조리된 채 얼린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꺼내 에어프라이어에 넣었다.그렇게 곧 스코틀랜드식 에그 3인분이
반하준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지고 반용화는 반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았다.“촌수로 따지면 너와 석현이가 같지 않나? 대단하신 반 대표님이라 사촌 동생한테 사과를 못 하겠어?”세대로 따지면 반석현이 그의 사촌 동생인 것은 맞지만 반석현은 민이와 동갑내기였다.게다가 반석현은 반용화의 양아들에 불과했고 반씨 가문에서 그의 지위는 민이보다 열세였다.그런데 어른인 그를 보고 반석현에게 사과하라고 하니 반하준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반용화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연진숙이 걸어 나왔다.“용화 씨, 지금 뭐 해요? 왜 가만히 있는 하준이보고 석현이한테 사과하라는 건데요? 그러다 애가 벌 받아요.”마지막 말은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연진숙도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대단한 반용화가 굳이 그녀에게 캐묻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준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손 내밀어.”반용화는 아무 기복 없는 목소리에 웃어른의 진중함을 담아 명령했다.반하준은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마치 강한 힘이 자신을 부추기는 것 같아서 도저히 손을 뻗지 않을 수가 없었다.반용화가 비서에게 눈짓하자 비서는 자를 꺼내 반하준의 손바닥을 내리쳤다.짜악!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연진숙은 몸을 흠칫 떨었다. 병실에서 울고 있던 민이도 벌벌 떨며 울음을 그쳤다.맞은 반하준의 손바닥은 순간 하얗게 변했다가 이내 피가 몰리며 맨눈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때린 건 반하준의 손바닥이지만 아픈 건 연진숙의 마음이었다. 연진숙은 속이 쓰라린 느낌에 입술을 달달 떨었다.“이... 이게 대체...”연진숙은 충격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그녀가 보는 앞에서 때렸다는 걸 안다.반용화는 올곧은 소나무처럼 휠체어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네 아들이 석현이한테 무례하게 굴어서 때리는 거야. 네 어머니가 말실수했으니 벌은 네가 받아야지.”반용화가 연진숙에게 말했다.“형수님, 다음에 또 말실수하면 그땐 제가 하
반용화는 깊은 웅덩이처럼 맑고 차가운 눈빛으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반하준의 시선이 반용화의 두 다리로 향했다.7년 전, 반용화는 미린국의 제재를 받고 국가안보 리스트에 올랐다. 국내를 떠나 미린국과 조약을 맺은 나라만 가면 곧바로 체포될 수 있었다.그러나 국내의 많은 학자들에게 이러한 제재는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심한기도 5년 전에 미린국의 입국 제한 명단에 올랐고, 미린국은 심한기가 학자의 신분으로 어떠한 동맹국이든 연구 방문하는 것을 금지했다. 즉 세계 10대 대학에 전부 심한기, 반용화와 협업하는 것을 금한 것이다.하지만 이들이 국내에 거주하는 한 최고급 학자로서 생활하는 데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그러다 하필 반용화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목숨을 노린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 다행히 반용화는 목숨은 건졌지만 대신 다리를 잃었다.이후 반씨 가문은 반용화를 더욱 회피했고, 반용화도 반씨 가문 기업은 물론 그 어떤 사람과도 엮이려 하지 않으며 일부러 반씨 가문과 거리를 두었다.반하준은 반용화가 수많은 사람 중 강민아를 발탁해 영재반에 데려간 것 말고는 둘 사이에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다.가족 모임에서 몇 번 만난 게 전부였다.강민아도 반용화를 만나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는 것 외에는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이 때문에 반하준은 오랫동안 반용화와 강민아가 서로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반용화의 말이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강민아가 원하던 야심 찬 목표가 뭔데요?”반용화의 검은 눈동자엔 통찰력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는 반하준의 당황과 긴장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자신을 깊이 사랑한다고 믿어왔던 것이 반용화의 한 마디에 너무도 쉽게 뒤집혀버린 것이다.“걔가 할 일은 끝났어. 사모님이라는 신분으로 보호받으며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지. 반씨 가문이 걔를 지켜주는 건 여기까지야. 이제부터는 내가 해. 하지만 너한테 고맙다는 말은 안 해. 결혼은 했지만 평범한 부부생활을 보내진 못했잖아
그가 고개를 돌려 병실을 보니 의사들이 병상 주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민이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건가?’“네 아들 왜 저래?”“독한 엄마 때문에 저렇게 됐죠.”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이 칼날처럼 그의 얼굴을 스쳤다.뺨이 찬바람을 맞은 것처럼 아팠다.반하준은 물었다.“작은아버지, 왜 그런 눈빛으로 저를 보시는 거예요?”그의 말이 틀렸나.“제 아들이 강민아에게 달려가서 화해하자고, 제발 좀 자기를 봐달라고, 한 번만 안아달라고 애원했지만 강민아는 애가 밖에서 비를 맞게 내버려뒀어요. 그래서 민이가 저 지경이 됐는데 엄마로서 책임이 없나요?”반용화의 흠잡을 곳 없는 얼굴은 내내 무표정이었다.“나보고 민아를 질책하라는 거야?”반하준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작은아버지도 반씨 가문 사람인데 팔이 바깥으로 굽으면 안 되죠.”반용화는 깊은 눈동자로 덤덤하게 반하준을 응시했다.“난 반씨 가문 사람이니까 당연히 반씨 가문 편을 들 거야. 반씨 가문 사람들이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불쾌함을 느낀 반하준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강민아와 저는 이미 이혼했는데 작은아버지는 무슨 신분으로 걔 편을 드는 거죠?”반용화는 지나치게 강민아를 챙기고 있었다.이건 제자에 대한 스승의 애정을 넘어선 감정이다.게다가 반용화가 어떻게 강민아의 스승인가. 제대로 가르친 적도 없는데.“민아가 너랑 결혼한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당황한 반하준은 순간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나랑 결혼하는데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날 좋아하고 내 위치 때문에...”“네 신분 때문인 건 맞지.”반용화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다.반하준은 그런 그의 눈빛에 불안한 마음이 쿵쾅거렸다.“난 부신 그룹 대표고 그 여자는 불순한 의도로 내게 접근했어요.”“그래.”반용화가 인정했다.“민아는 더 큰 꿈을 위해 7년 동안 반씨 가문에 있었던 거야.”반하준은 휠체어에 앉은 반용화를 바라보면서 숨이 가빠지고 동공이
반하준이 민이를 병원에 데려왔을 때 민이의 목소리는 우느라 다 쉬었다.이젠 소리조차 나오지 않자 작은 얼굴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장시간 격한 감정 기복과 빗속에서 넘어지기까지 해서 몸의 염증을 유발한 탓에 민이의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반하준은 민이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재빨리 의사를 불렀다.여러 명의 의사가 민이를 둘러싸고 곧바로 응급처치를 시작했다.소식을 들은 연진숙은 병원에 도착해 의사들이 병상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움켜쥔 채 소리를 질렀다.“민이한테 무슨 일 생겼어? 오소정이 어디로 데려갔어?”“강민아를 찾으러 갔어요.”반하준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연진숙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그 양심 없는 것을 만나러 갔는데 왜 이렇게 됐어? 강민아가 민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남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민이를 용서하지 않고 민이가 비를 맞도록 내버려두었대요.”그 말을 들은 연진숙은 분노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기자들 불러서 강민아는 엄마가 될 자격이 없다고 모든 매체에 대서특필할 거야! 유명하다고 우리가 대단하게 생각할 줄 아나 본데, 명성은 원래 양날의 검이야. 높이 올라갈수록 처참하게 떨어진다고!”“마음대로 하세요.”뒤돌아 병실을 나서는 반하준의 얼굴이 침울했다.강민아의 이름은 가시처럼 그의 심장 깊숙이 박혀 혈관 속을 누비고 다녔다.그녀를 생각만 해도 반하준은 온몸이 아팠다.아들이 동의하는 모습에 연진숙은 기분이 좋았다.“오늘 신씨 집안 딸과 소개팅한 건 어땠어?”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반하준은 귀를 의심했다.“어머니, 의사들이 지금 민이를 살리고 있잖아요!”조금 전까지 민이의 몸 상태에 대해 슬퍼하던 사람이 곧바로 기대에 찬 목소리로 반하준의 연애사에 개입했다.“의사들이 민이를 살리고 있지만 애한테 새엄마를 찾아주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지.”연진숙이 덧붙였다.“빨리 새엄마를 찾아줘야 민이를 잘 보살펴주지. 신씨 집안 딸이 의대생에 한의학 전공했대.
옷은 모두 젖어서 하얗고 얇은 천이 몸에 딱 달라붙어 섬세한 곡선을 드러내고 있었다.오소정의 입이 달걀 하나는 족히 들어갈 정도로 떡 벌어졌다.“여사님... 왜 그러세요?”오소정은 도민영이 미친 게 아닌지 의심되었다.도민영은 음악을 틀어놓고 휴대폰을 향해 요염한 몸짓을 선보이며 말했다.“모르겠어요? 나 성진 씨한테 복수하고 있어요!”그제야 오소정은 도민영이 SNS 계정을 만들어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이게 무슨 복수에요?”오소정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도민영은 허리를 비틀며 가슴을 흔들었다.“성진 씨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내 몸을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줄 거예요!”오소정은 침묵했다. 강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사람은 역시 남다르다.민이가 중얼거렸다.“할머니는 무슨 소설에서 뛰쳐나온 사람 같아요.”오소정은 민이를 안은 채 도민영에게서 멀어졌다.“도련님,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안 돼요. 내려주세요!”오소정이 민이를 휠체어에 태우려 하자 민이의 온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또다시 휠체어에서 떨어졌다.“도련님!”오소정은 이제 목소리가 다 갈라져 있었다.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민이를 부축해 주려 하자 아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도련님, 바닥에 엎드려 있으면 어떡해요!”빗물이 얼음처럼 민이의 얼굴을 때렸지만 추운 날씨에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말라고!”도민영의 행동이 민이를 자극했다. 이렇게 바닥에 누워 있으면 강민아가 자신을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민이와 도민영을 쫓아내려던 경비원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민이는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고 도민영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하나는 미친 할망구, 하나는 미친 아이라 차마 다가가서 쫓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16층에서 강민아는 커튼을 열어 아래층 광경을 보고는 다시 커튼을 닫았다.다섯살 민이가 떼를 쓰
오소정의 심장이 철렁했다.“도련님!”“으아앙, 엄마!”민이는 두 손으로 강민아를 향해 기어가려고 했다.“엄마, 나 좀 봐줘요!”두 눈에서 눈물이 솟구치고 뺨이 붉게 상기된 채 민이는 몸의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앞으로 기어 나갔다.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고 오소정이 서둘러 민이를 안아 들었다.강민아와 정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소정이 민이를 안은 채 뛰어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민아와 정이가 안으로 들어갔다.“엄마!”민이는 목이 터지라 울부짖으며 두 팔을 쭉 뻗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아이는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렸고 슬픈 울음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엄마! 다시는 엄마를 화나게 하지 않을게요! 제발 돌아와요! 내가 이렇게 빌게요! 돌아와 줘요!”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머리 위 조명이 고개를 든 강민아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는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민이가 버린 밥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고, 민이가 찢어버린 시험지와 교과서도 다시 쓰면 되지만...버려진 사랑은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쓰레기통에서 자신이 부쉈던 조각들을 꺼내 다시 이어 붙여도 그 위에 얼룩진 상처는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그것이 그녀가 엄마로서 아이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교훈이었다.거듭된 상처를 받은 후 엄마로서 용기를 내어 가해자인 아들을 떠난 것이다....“엄마...”정이가 속삭였다.강민아가 슬퍼하는 것이 느껴져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엄마를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강민아는 아랫입술에 깊은 이빨 자국이 남을 정도로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정이에게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려 했다.하지만 표정을 바꾸자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정이는 마음이 아프고 코끝이 시큰거렸다.“엄마, 민이 낳은 거 후회해요?”강민아가 고개를 저으며 쭈그리고 앉자 정이는 손을 내밀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강민아가 말했다.“정아, 난
옆에서 지켜보던 도민영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딸, 민이 동생 용서해 줘. 엄마가 자식 용서 안 하는 게 어디 있어.”민이가 물었다.“엄마는 내가 어떻게 해야 용서해 줄 거예요? 내 카드 엄마한테 줄게요!”평소 강나현이 카드를 긁는 것을 제일 좋아했기에 민이는 손에 쥔 블랙 카드가 제일 가치 있고 누구나 탐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강민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민아,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이번 한 번만 용서하는 게 아니야. 오늘 내가 너를 용서하면 앞으로 매일 밥을 짓고 죽을 끓일 때마다 널 한 번씩 용서해야 할 거야. 앞으로 강나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또다시 너를 용서해야 하고, 네 아빠를 볼 때면 반씨 가문에서 네가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이 떠오를 거야. 그러면 난 또 내 아픈 상처를 마주하면서 너그러운 척 너를 용서해야 해.”강민아는 민이의 눈에 수정 같은 눈물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지금 속상한 마음에 울기 직전이었다.“이제 오토바이 탈 수 있어?”강민아가 묻자 민이는 울면서 말했다.“이제 못 타요.”강민아가 덤덤하게 대꾸했다.“그래, 나도 못 해. 한번 뱀에게 물리면 10년 동안 밧줄만 봐도 놀란다는데, 넌 몸을 다쳤지만 난 마음을 다쳤어.”민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난 뱀이 아니라 엄마 아들이에요...”“난 네 아빠와의 결혼생활에서 일찍 벗어날 수 있었어. 하지만 너희를 두고 갈 수가 없었어. 네 아빠와 이혼하면 둘 다 데려가진 못하니까. 둘 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누구를 버리겠어? 근데 네가 날 도와줬어. 네 덕분에 숨 막히는 결혼생활을 끝낼 결심을 할 수 있었어.”강민아는 오래전부터 이혼할 생각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줄곧 이혼을 준비해 왔기에 반하준 명의로 된 다양한 사업체와 자금을 파악하고, 마음을 굳힌 후 빠르게 이혼 서류와 합리적인 공동 재산 분배 계획을 반하준에게 내밀 수 있었다.아이를 낳은 후 본능적인 모성애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아이 울음소리만 들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