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준이 경멸스럽게 콧방귀를 뀌면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는 샤워를 하고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강나현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미닫이문에 기대어 서 있는 걸 보았다.그녀는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며 복근을 은근히 과시했다.“오빠, 빨리 깼네.”순간 멈칫한 반하준은 머리를 닦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젖은 슬리퍼를 갈아신는 것도 잊은 채 강민아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는 침대의 이불을 들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강민아가 방 안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끼익.옷장을 열어보니 고급 맞춤복이 가득 걸려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집을 나갈 때 캐리어 하나만 들고 나갔다. 그 캐리어 안에는 평소 반우정에게 사 줬던 옷들이 들어 있었다.반씨 가문 사람들 모두 지난 7년 동안 강민아를 홀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강민아에게 이렇게 많은 고급 맞춤복과 명품 가방, 그리고 값비싼 보석들이 있지 않은가.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반씨 가문의 명의로 구매한 것들이었고 반하준과 연진숙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다. 강민아가 마음대로 가져가면 절도가 되는 것이었다.심지어 그녀마저도 반씨 가문을 빛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사 온 존재였다.반하준의 행동에 강나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오빠, 왜 그래?”옷장 앞에 있던 반하준은 갑자기 돌아서서 강민아의 잠옷을 입은 강나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어젯밤에 민아 방에서 잤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이름을 저렇게 다정하게 불러?’강나현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응. 오빠가 너무 아파해서 혼자 놔두고 갈 수가 없었어. 어차피 민아 언니 방이 비어 있으니까 하룻밤 자면서 오빠를 챙겨주려고 그랬지.”그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 강나현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목소리마저 떨렸다.“설마 민아 언니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그녀가 다급하게 캐물었다.“오빠, 민아 언니랑 이혼한 거 후회해?”“무슨 헛소리야?”
반 친구들 모두 반현민을 부러워했다....찐빵 천국.반우정은 커다란 찐빵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는 우유까지 야무지게 마셨다.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반우정이 먹는 모습을 보던 한 초등학생은 저도 모르게 한 입 더 쑤셔 넣었다.반우정이 아침 식사를 마치자 강민아가 물티슈를 건넸다.“어린이집 가자.”어린이집이라는 소리에 반짝였던 반우정의 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강민아는 딸의 감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왜 그래?”“엄마, 이젠 어린이집 가는 게 별로 좋지 않아요.”강민아가 물었다.“어린이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반우정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아니에요. 어린이집은 싫지만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요. 친구들이랑 있으면 재미있어요.”딸이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강민아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승덕 명문 학교는 귀족 학교라 아이들이 부모 영향을 받아서 반우정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을 가능성이 컸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잠시 후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강민아 씨 되십니까?”“네. 그런데요?”“저는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 직원입니다. 예선에서 1등 하신 걸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강민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1등이라고요?”‘조직위원회에서 잘못 안 거 아니겠지?’직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강민아 씨가 89점을 받았어요.”‘일부러 점수를 낮게 받으려고 했는데 89점이 예선 1등이라고? ALI 수학 경시대회 참가자 중에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나?’“강민아 씨, 제출하신 자료를 보니 고연대학교를 졸업하셨지만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지내셨더군요. 조직위원회에서는 강민아 씨가 어떻게 대회에 참가하게 됐고 또 어떻게 이렇게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무척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JVC 방송국 기자가 민아 씨 성적과 상황을 알고 인터뷰하고 싶다는데 괜찮으
반현민이 굳은 얼굴로 친구들에게 경고했다.“앞으로는 반우정이랑 놀지 마.”아이들이 일렬로 서더니 일제히 반현민에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알았어.”강민아는 학교 정문을 본 순간 반우정의 표정이 굳어진 걸 캐치했다.“정이야?”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반우정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꼭 잡고 애써 밝은 척했다.“엄마, 어린이집 갈게요. 빠이빠이.”반우정은 평소에 같이 놀던 친구들을 보고 기뻐하며 달려갔다.“민설윤.”그런데 민설윤이 반우정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반우정은 민설윤을 따라가서 신난 얼굴로 말했다.“설윤아, 나 이름 바꿨어. 이젠 반우정이 아니고 강윤정이야. 엄마 성을 따르기로 했어.”“나랑 말하지 마.”민설윤이 옆으로 피하면서 반우정과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에 반우정은 큰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설윤아, 왜 그래?”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민설윤이 발걸음을 멈췄다.“반현민이 너랑 노는 애는 어린이집에서 왕따당할 거라고 했어.”반우정은 놀란 나머지 넋이 나갔다.강민아는 떠나지 않고 멀찍이 서서 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반우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아차리는 그녀였다.“민아야.”누군가 그녀를 불러 고개를 돌려보니 반진경이 딸 반연주의 손을 잡고 다가오고 있었다.반진경은 반하준의 사촌 누나다. 남편은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반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왔다.반진경이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두 눈을 깜빡였다.“너 진짜 하준이랑 이혼했어?”“네. 이혼했어요.”강민아의 시선이 반연주에게 닿은 순간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반연주와 반우정의 나이는 같지만 몸집 차이가 심하게 났다.반진경은 아이를 채식주의자로 키우겠다고 어릴 때부터 채소만 먹였다. 그 바람에 반연주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얼굴도 잿빛처럼 하얬다.그래도 그녀가 반씨 가문에 있을 때 몰래 반연주에게 고기를 챙겨줬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일자리는 구했어?”반진경이 물었다.“아직요.”강민아가 솔직하게 대답
“은혜도 모르면서. 이거 놔.”반우정이 무섭게 화를 냈다.“방금 뭐라고 했어?”반현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할머니가 그랬어. 은혜도 모르는 애를 키웠다고. 너랑 나 이젠 남매 아니야. 그 가식적인 여자랑 넌 썩은 하수구의 쥐새끼들이야. 우린 쥐새끼랑 같이 수업 안 해.”반현민의 뒤에 있던 아이들이 코를 막았다.“반우정, 빨리 도련님을 내려놓지 못해?”“반우정 몸에서 냄새나. 더러워.”“엄마가 우정이랑 말도 섞지 말랬어. 쟤는 우리랑 같이 수업 들을 자격 없어.”반우정이 이를 악물고 다른 손을 들었다. 반현민은 반우정이 때리려는 걸 눈치채고 뒤에 있는 친구들에게 소리쳤다.“나 좀 도와줘.”하지만 아무도 감히 반현민을 도우러 나서지 못했다.강나현은 오토바이에 기대서서 휴대폰으로 반우정이 반현민을 들어 올리는 과정을 전부 찍었다.반우정이 다른 손을 들어 반현민의 뺨을 때리려 하자 입꼬리를 씩 올렸다.‘때려. 계속 때려. 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영상을 하준 오빠랑 어머님한테 보내야겠어.’잠시 후 옷깃을 잡고 있던 힘이 사라지면서 반현민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울음을 터트렸다.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앞에 서 있는 반우정을 올려다보았는데 아주 기세등등했다.반우정의 그림자가 반현민을 완전히 뒤덮었고 반현민은 겁에 질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반현민의 친구들도 그런 반우정을 보고 혼비백산했다.반우정이 다시 주먹을 쥐었다.“으앙.”반현민은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체념한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약한 애를 괴롭히지 않아.”반우정이 주먹을 내렸다. 아무 저항도 못 하는 약골을 때려봤자 재미도 없었다.“우정아, 무슨 일이야?”강민아가 다가오자 반현민이 반우정을 가리키면서 고자질했다.“쟤가 날 때렸어요.”반우정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반현민이 다른 애들한테 나랑 놀지 말라고 했어요. 나랑 노는 애는 어린이집에서 왕따당할 거라고 했대요.”강민아의 차가운
반우정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충동적인 행동으로 엄마에게 문제를 가져다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의 어깨에 손을 얹어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주었다.“제 딸은 친구를 때리지 않았습니다.”“때렸어요.”반현민이 팔을 흔들면서 반우정을 가리켰다.“우정이가 나 때렸어요. 나쁜 여자, 우정이만 편애하고. 눈이 멀어서 내가 맞는 걸 못 봤겠죠.”강민아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학교 정문의 CCTV를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헐뜯는 학생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합니다.”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듯 반현민을 쳐다보았다. 유영호가 강민아에게 손을 내저었다.“CCTV가 고장 났어요. 반현민 어린이는 3년 연속 교내 유망주라는 칭호를 받았고 승덕 명문 학교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에요. 전 현민 어린이의 말을 믿습니다.”유영호는 그 자리에 있던 학부모들에게도 물었다.“여러분, 조금 전 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걸 보셨습니까?”적지 않은 학부모들이 유영호의 시선을 피했다.“봤어요.”반진경이 나섰다.“우정이가 현민이를 때리는 걸 봤어요.”“반진경 씨.”강민아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제정신입니까?”그러자 반진경이 강민아를 흘겨봤다.“넌 더 이상 반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잖아. 너랑 같은 성을 가진 애는 승덕 명문 학교에 다닐 자격이 없어.”반씨 가문 사람이 강민아를 배척하는 모습을 본 다른 학부모들도 목소리를 높였다.“우정이 어머님과 우정이는 이미 반씨 가문에서 쫓겨났는데 아직도 딸을 귀족 학교에 다니게 한다는 게 말이 돼요?”“우정이가 엄마를 닮아서 어디 내놓기 부끄러우니까 버린 거겠죠.”“딸을 저렇게 덩치 큰 아이로 키우는 건 처음 봐요. 우리 아들이 쟤한테 맞을까 봐 걱정된다니까요.”강민아는 반우정의 퇴학을 원하는 학부모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역겨운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그녀가 반씨 가문을 떠난 후 그들은 그제야 점잖던 가면을 벗
비서가 서류 봉투를 안고 잽싸게 달려왔다.“반우정 어린이의 학적 기록입니다.”유영호는 비서에게서 학적 기록을 받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지고는 뒷짐을 진 채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반우정을 승덕 명문 학교에서 내쫓는 것도 사실은 연진숙의 뜻이었다.어젯밤 연진숙이 특별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반우정이 강민아의 성을 따르기로 했으니 더 이상 남의 집 딸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연진숙은 하루빨리 반우정을 내쫓고 싶어 했다. 귀한 손주가 반우정에게 영향을 받아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되었다.강민아는 몸을 굽혀 딸의 학적 기록을 주웠다. 그 모습을 본 반우정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그녀는 학적 기록 봉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딸을 보면서 부드럽고 굳건하게 웃었다.“정아, 무서워하지 마. 넌 이미 반우정이라는 이 기록과 상관없어. 바닥에 떨어진 건 반우정이지만 가슴을 펴고 일어선 건 강윤정이야.”강민아는 일어나서 반우정에게 손을 내밀었다.“네 인생은 한 번의 퇴학으로 끝나지 않아. 엄마가 있잖아. 엄마가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줄게.”구경하던 학부모들은 양쪽으로 물러서서 강민아와 반우정에게 길을 터주었다. 학교 대문이 겹겹이 막혀있어 두 모녀에게 남은 건 승덕 명문 학교를 떠나는 길뿐이었다.반우정이 울음을 그쳤지만 앳된 얼굴에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우정은 강민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고 엄마의 손에서 전해지는 굳건한 힘을 느꼈다.엄마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마음이 편안해졌다.반우정은 전에 몇 번이고 강민아를 따라 떠났었다. 반현민만의 생일 파티를, 그들을 가두었던 반씨 가문을, 피를 빨아먹던 강씨 가문을 떠났었다.그때의 하늘은 오늘보다 더 어두웠지만 강민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어둠 속에서 나아갔고 반우정은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했다.아이는 강민아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갔다. 강민아가 자신을 빛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갑자기 베이지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자가 뛰쳐나왔다.
교장은 무척 혼란스러웠다.‘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기자가 학교 앞에 나타난 거지?’그들은 모두 강민아를 둘러싸고 있는데 혹시 강민아가 부른 사람들은 아닐까.하지만 반씨 가문에서 쫓겨난 낙오자가 어떻게 기자들을 동원할 능력이 있겠나.교장은 의아했다.“난 인터뷰 요청을 못 받았는데? 아이고, 방금 그건 다 연기였어요. 카메라에 찍힌 건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요.”교장이 키 작은 여성 기자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아가씨, 안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직접 학교를 둘러볼 수 있게 안내하면서 승덕 학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드리죠.”키 작은 여성 기자는 교장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저희는 인터뷰하러 온 게 아니라 교장 선생님의 행동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찾아온 거예요!”교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학교 정문 앞으로 찾아와서 뭘 하려고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키 작은 여성 기자가 강민아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반진경이 소리를 질렀다.“무슨 일이야? 강민아가 기자를 부른 거야?”강나현은 이미 정이가 한 손으로 민이를 들어 올리는 영상을 자신과 반하준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그녀는 다시 휴대폰을 들고 강민아와 기자들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고는 2초 남짓한 영상을 단톡방에 올리면서 특별히 반하준을 태그했다.[큰일 났어! 민아 언니가 기자들을 불러서 학교 앞에서 마구 소란을 피우고 있어.]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단톡방에서 말했다.[이건 너무하잖아. 시골 여자라 그 망할 버릇을 못 고쳤네.][우리 언니가 이혼하더니 완전히 미쳐버렸어. 딸한테도 아들을 때리라고 시켰어!]단톡방의 재벌가 도련님들은 저마다 강민아를 욕하기 바빴고 강나현은 휴대폰을 들고 다시 강민아를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파란색 정장을 입은 한 남자 직원이 강민아 앞에 서더니 카메라 앞에서 정중하게 붉은 봉투를 건넸다.“저는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 대표로 왔습니다. 강민아 씨, 예선 1위로 본선 진출권을 획득한 것을 축하드립니다!”강민아
“혹시 따님이신가요?”“네, 제 딸 강윤정입니다.”기자들은 의아했다.“따님께서 강민아 씨 성을 따랐네요.”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면 남편분은...”강민아가 환하게 웃었다.“이혼했어요. 전남편은 언급할 가치도 없죠.”한 기자가 정이에게 물었다.“강윤정 어린이, 저희와 인터뷰해 주실 수 있나요?”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조금 전 체구가 작은 여성 기자가 정이에게 물었다.“조금 전 왜 저 남자아이의 옷깃을 잡아당겼어요?”“쟤가 다른 애들한테 저랑 놀지 말라고 했어요.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저랑 말도 못 하게 하니까 화가 났어요.”정이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저도 그렇게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민이는 너무 가벼워요.”조금 전 정이가 민이를 한 손에 들어 올리는 걸 목격한 카메라맨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강윤정 어린이, 제가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들어 올릴 수 있어요?”전문적인 카메라 장비는 최소 20kg이 넘었다.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자 강윤정이 한 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아령보다 훨씬 가볍네요.”카메라맨의 입이 떡 벌어졌다.“강윤정 어린이, ALI 수학 경시대회 예선전에서 1등을 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있어요?”정이는 카메라를 든 채 팔운동을 하며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우리 엄마는 원래도 훌륭한 사람이에요. 저는 엄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멀리멀리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강민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따뜻한 기류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다른 아이들은 옆에 서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정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우와, 반우정이 방송에 나온다.”민이는 팔짱을 낀 채 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발로 흙탕물을 걷어찼다.“우리도 다 방송에 나왔어. 그게 뭐가 신기하다고!”그를 따라다니는 한 아이가 말했다.“우리는 서경 어린이 채널에만 나가잖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반우정과 너희 엄마를
그러다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고 정이만 데리고 나왔을 때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강민아는 손을 움직이며 육성민이 반하준에게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봤다.반하준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순백의 벽에 끔찍한 흔적을 남겼다.강민아는 반용화에게 물었다.“선생님, 저 어떻게 찾았어요?”“여기 스프링 가든이야. 반하준이 네 집 맞은편에 집을 샀어.”강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이 집을 언제 샀는데요?”“3일 전에.”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울컥 역겨움이 밀려왔다.강나현에게서 반유하의 녹취록을 얻은 후 일부러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마음먹은 거다.그녀를 스프링 가든에 가둠으로써 마치 그녀가 집을 나가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 눈을 속이려고 했다.만약 그녀가 육성민의 경호원 없이 ‘시크릿’에 갔다면 그녀가 감금된 후 반하준은 육성민에게도 손을 써서 정이를 데려갔을 거다.반용화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경찰에 신고했어.”이제 그는 자기 조카에 대한 혐오밖에 남지 않았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다시 바닥에 쓰러져 턱을 따라 흐르는 피가 비싼 와이셔츠를 더럽히는 것을 보았다.사파이어 브로치는 진작 2, 3미터 떨어진 곳에 날아갔고 남자의 얼굴은 붉고 멍이 든 흔적이 가득했다.그는 볼품없이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들고 오만하게 눈을 치켜뜬 채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강민아가 반용화에게 물었다.“저를 납치한 지 얼마나 됐죠?”“두 시간.”“네.” 강민아가 대답했다.“사태가 심각하지 않고 사람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니니 구치소에 들어가도 귀한 대접만 받겠네요.”오히려 육성민이 반하준을 적지 않게 다치게 했다.반하준은 바닥에 앉아 한 쪽 팔을 구부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경찰서로 보내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재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깟 법 하나 모를까.강민아는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떠올라 반용화에게 물었다
반하준이 고개를 돌리자 문 밖의 하얀 빛이 휠체어에 앉은 남자의 실루엣을 비추었다.성큼성큼 들어오는 육성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를 집어삼켰다.반하준이 이제 막 몸을 일으키는데 육성민이 주먹을 휘둘렀고, 손을 들어 저항했지만 육성민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반하준은 프로 격투기를 배웠어도 힘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자랑하는 육성민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육성민이 반하준의 복부를 펀치로 가격했고 반하준은 바닥에 쓰러졌다.바닥에 엎드린 그가 입을 벌리며 울컥 무언가를 뱉어냈다.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들자 육성민이 열쇠를 들고 강민아의 손목에 묶인 수갑을 풀고 있었다.반하준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아픈 복부를 감쌌다.고개를 드니 휠체어를 탄 반용화가 눈앞에 와 있었다.남자는 찢어진 입술을 끌어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반용화, 이래도 저 여자한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용화는 검은색 지팡이를 들고 반하준의 얼굴을 때렸다.5년 동안 반용화가 지팡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반하준을 때리려고 꺼내든 것이다.휘두르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지만 단단한 나무 지팡이가 반하준의 얼굴에 얼음처럼 차갑게 부딪혔다.퍽!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반하준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며 부어올랐다.반용화는 발밑에 엎드린 개미를 바라보듯 그를 내려다보았다.“괜찮아?”반하준의 뒤에서 육성민의 걱정 어린 물음이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육성민의 훤칠하고 건장한 몸이 강민아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육성민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민아를 향한 그의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당시 육성민은 풋풋했고 군대 훈련도 받고 작전에도 참여했지만, 고귀한 재벌가 후계자에 비하면 밑바닥부터 한 걸음씩 올라온 그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육성민이 강민아에게 남매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반하준은 적을 만났을 때
강민아는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반유하를 그렇게 만들어서 내가 얻는 게 뭔데?”반하준의 음침한 동공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죽을 줄은 몰랐겠지. 항상 널 괴롭혔으니까 그냥 한번 골려주고 싶었겠지.”강민아가 우아하게 눈을 흘기자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네가 인정 안 할 줄 알았어. 이 녹취록만 가지고는 절대 널 감옥에 보낼 수는 없겠지.”남자의 시선이 그의 손에 붙잡혀 억지로 고개를 든 강민아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그에게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던 시절도 잠시,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그녀는 온갖 수작을 부리며 그를 챙기지 않았다.“강민아, 난 너한테 뭐야? 네가 사는 집, 네가 타는 차, 매달 수억 원의 생활비까지 줬잖아. 근데 넌 나한테 쓰레기 음식이나 먹이고 싸구려 도시락을 회사에 가져왔어. 그러곤 내가 배탈이 날까 봐 끓인 차에 위장약을 탔지. 사모님 노릇 한번 편하게 하네.”눈을 깜박이던 강민아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잠시, 반하준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 어떤 당황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흑백이 분명한 맑은 눈동자는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세 번째 아이를 잃고 난 뒤엔 당신을 인간 취급도 하기 싫었어. 집안 음식과 살림은 내가 책임지는데 약으로 대머리를 만들 순 없잖아? 어르신이 민이를 정식 후계자로 삼을 때까지 몇 년만 참으려고 했어.”나른하게 흘러나오는 강민아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워 깃털처럼 날렸지만, 그게 반하준의 신경을 자극하며 사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그의 손끝이 미끄러져 강민아의 목을 움켜쥐었다.웃는 그의 선홍빛 얇은 입술이 어두운 밤의 뱀파이어처럼 광기를 띠었다.너무 똑똑한 여자는 독이 든 꽃과 같아서 쉽게 끌리지만 한번 건드리면 역으로 공격당한다.강민아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 할아버지 반영식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가 적절한 상대는 아니라고 말했다.“저는 정략결혼보다 쉽게 통제할 수 있고 진심으로 나만 사랑하는 여자를 원해요.
강민아는 우경아를 만나러 가기 전 육성민에게 이를 알렸다.그녀 혼자 우경아를 만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육성민은 경호원 몇 명을 시켜 그림자 속에서 강민아를 보호하도록 했다.그때 주차장을 지키던 경호원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타더니 곧바로 검은색 리무진이 그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마스크를 쓴 남자가 의식을 잃은 강민아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검은색 리무진이 차에 던져진 강민아를 태운 채 빠르게 출구로 달려갔다.“강민아 씨가 납치되었다. 지원 바람!”경호원이 무전기를 통해 다른 동료들에게 외쳤다.그들 중 한 명이 차를 몰고 뒤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다른 차가 달려와 길을 막더니 순식간에 검은색 리무진은 도로 위 차량 사이로 사라졌다.정장을 차려입고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반하준은 굳은 표정이었다.시트에 쓰러진 강민아는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고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시선을 아래로 떨군 반하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검은 눈동자는 기나긴 밤과 닮아 있었다.손을 뻗은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제지했다....강민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다소 추운 느낌에 몸을 살짝 떨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와 있었다.벽은 새하얗고 불빛은 어두웠으며 반하준은 그녀와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남자는 몸을 숙여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강민아가 몸을 움직이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반하준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무릎을 꿇고 두 손이 위로 묶인 강민아는 발에 우경아가 선물한 신발이 신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가 신겼을까.’강민아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팔을 움직였다.속박당하는 게 싫다.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그녀의 첫 양부
아름다움은 그녀의 무기였고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영 그룹이 곧 그녀의 뒷심이었다.그런 사람과는 적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강민아는 손을 내밀어 그녀가 건넨 선물을 받아 들었다.“우 대표님 감사합니다. 주신 선물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강민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며 웅크리고 있는 장기명을 차갑게 훑어보았다.우경아는 떠나는 강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녀의 공세를 당해낼 수는 없다. 게다가 강민아는 7년 동안 주부로 살아온 여자가 아니던가.누군가 잘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겠지.우경아는 떠나기 전 장기명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언감생심 주제도 모르고 어딜 넘봐. 시간 있으면 가서 거울이나 봐.”우경아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외국인은 장기명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강민아라는 여자 반용화와 무슨 사이지?”장기명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도운, 빨리 날 병원에 데려다줘!”도운이 거침없이 장기명의 어깨를 흔들자 그는 고통에 눈을 뒤집었다.“빨리 말해! 방금 당신이 매달리던 여자 반용화와 아는 사이지?”장기명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부신 그룹 대표 전 와이프니까 당연히 반용화를 알겠지. 반용화 추천으로 고연대 영재반에도 들어갔는데.”장기명은 허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 내가 이렇게 맞은 건 안중에도 없고?”도운은 장기명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일어서서 강민아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그냥 낯이 익어서. 5년 전에 빠져나간 사람일 수도 있어.”“빠져나갔다니?”장기명은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강민아는 우경아와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간 뒤 휴대폰을 꺼내 심은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민아 씨, 밖에서 다른 강아지 키워요?]그는 벽에 기대어 숨은 채 몰래 훔쳐보는 강아지 이모티
옆에 서 있던 외국인은 우경아의 고혹적인 외모에 매료되었다.우경아가 앞으로 다가가 장기명의 뺨을 때렸다.“어떤 개가 감히 시크릿을 함부로 돌아다녀? 여기가 아무 데나 똥오줌 싸는 곳인 줄 알아?”장기명이 반응하기도 전에 우경아는 그의 사타구니를 발로 찼다.“아악!”바닥에 털썩 쓰러진 장기명이 아우성을 질렀다.우경아는 칼 모양 케이스를 씌운 태블릿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손잡이' 부분을 잡고 태블릿을 칼처럼 사용하며 장기명의 머리를 내리쳤다.“감히 내 사람을 희롱해? 사는 게 지긋지긋하지? 이제 조상님 만나러 가.”장기명과 함께 있던 외국인은 나서서 말리고 싶었지만 우경아의 기세에 두 손을 든 채 한발짝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애원하던 장기명은 30초가 지나자 통곡과 비명만 내질렀다.우경아는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의 가장 약한 부위를 세게 발로 찼다.장기명의 몸이 삶은 새우처럼 말리자 우경아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그녀의 행동에 강민아는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다 우경아는 외국인이 휴대폰을 집어 드는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 상대방의 휴대폰 화면 위로 자신의 명함을 올려놓았다.“충고하는데 주제넘은 짓은 하지 마세요.”외국인이 서투른 우리말로 물었다.“우... 대표님?”장기명은 자신을 때린 사람이 우경아라는 말을 듣고 순간 굳어버렸다.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이제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누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우경아는 강민아에게 다가가더니 뒤따라오던 근육질 남자에게 태블릿을 건네고, 상대방의 손에서 따뜻한 수건을 가져와 손을 닦았다.“때려서 해결하지 못할 건 없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더 때리면 돼요.”“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강민아는 장기명을 흘깃 쳐다보았다.“하지만 폭력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진 못해요.”우경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근육질 남자에게 명령했다.“신발 바꿔.”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우경아의 한쪽 발을 조심스럽게 들더니 끝이 뾰족한 검은색 하이힐을 신겨
“아악!”장기명이 비명을 지르자 강민아는 뒤로 물러서며 장기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민아 씨, 저예요!”장기명이 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강민아는 두 눈에 가득 담긴 역겨움을 덜어냈다.“장 교수님이었군요. 전 변태가 들이대는 줄 알았어요.”장기명은 외국인 한 명과 동행했는데, 그는 강민아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장기명은 맞은 얼굴을 문질렀다.“시크릿 같은 곳에 무슨 변태가 있어요. 그냥 왜 여기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죠.”강민아는 똑같이 상대에게 되물었다.“여기 왜 오셨는데요?”장기명은 옆에 있는 외국인을 바라보며 웃었다.“모임이 있어서요.”외국인은 강민아에게 고개만 끄덕였고, 강민아는 장기명을 돌아보며 말했다.“그럼 전 이만 갈게요.”그녀가 가려는데 장기명이 곧바로 그녀의 앞을 막았다.“민아 씨, 줄곧 강승 테크에 대해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쪽이 강승에 입사한 후 두 곳에서 인수할 의향을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죠?”강민아가 물었다.“강승의 일이 장 교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죠?”말문이 막힌 장기명이 다소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옴 테크에선 민아 씨가 강승 테크 인수를 도와주길 바라고 있어요. 옴 테크로 가서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되고 싶지 않아요?”강민아는 웃었다.“사업에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이 이기죠. 두 회사가 강승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옴에서 정말로 강승을 원한다면 만족할 만한 가격을 제시해야 할 것 같네요.”장기명이 발끈했다.“그건 억지잖아요!”강민아는 속눈썹을 깜빡이며 화장기 없는 얼굴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사실대로 말할게요. 방금 우영 그룹 대표 우경아 씨와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분도 강승을 인수하고 싶어 해요.”장기명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왜 우영 그룹도...”“최저 금액을 제시한 옴 테크를 선택하면 국내 대기업 3곳에 밉보이는 건데, 장 교수님께서 뒷감당하실 건가요?”장기명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죠! 이럴 줄
이어 강민아가 물었다. “그쪽과 손잡으면 전 뭘 얻을 수 있죠?”우경아는 미소를 지으며 강민아에게 태블릿을 건넸다.“여기 프로젝트가 있는데 지분을 가져가요. 강민아 씨는 기술을 투자하고 난 돈을 투자해서 수익금을 똑같이 나눠 갖는 거죠. 똑똑한 강민아 씨라면 이 프로젝트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강민아는 우경아가 건넨 프로젝트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마침 자신도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에 대해 연구 중이었는데 기술을 알아내더라도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 없어서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이었다.반면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 북은 서경 정부에서 지원하고 부신 그룹이 새로운 기술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우경아는 이미 이 프로젝트에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이를 가져와서 그녀와 공유한다는 것은 연막작전이거나 기술팀이 곤경에 처했다는 뜻이다.강민아와 반용화 사이를 알고 있으니 아마도 그녀를 통해 반용화 연구팀과 접촉하려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강민아가 이 판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녀는 부신 그룹의 ‘갑’이 되는 셈이다.그녀가 웃었다.“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우경아가 한숨을 쉬었다.“큰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매사 신중하게 움직이기에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되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기꺼이 적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에요.”“제가 적인가요?” 강민아가 웃자 우경아의 화려한 이목구비에도 덩달아 부드러운 감정이 담겼다.“같은 여자끼리 서로 돕고 살죠.”강민아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저희 아빠와 가까운 사이인 줄 알았는데요.”우경아는 환하게 웃었다.“영원한 친구는 없지만 영원한 이익은 있죠. 강성진을 감옥으로 보내는 게 내게 큰 이득이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락으로 보낼 거예요.”우경아는 술잔 두 개를 집어 들고 그중 하나를 강민아에게 건넸다.“건배해요.”강민아는 술잔을 건네받았다.“그러면 우 대표님은 언젠가 저도 지옥으로 보낼 건가요?”우경아는 유리잔을 입술에
그녀는 곧바로 강민아의 턱을 잡고 강제로 그녀의 얼굴을 육지광 쪽으로 돌렸다.“그쪽같이 다리 불편한 고물상 아버지를 뒀으면 아들 장가가기엔 그른 것 같은데, 얘를 데려가서 며느리처럼 키워요. 60만원 줘요.”양어머니가 손가락을 내보이며 말하자 육지광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저축한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그는 힘없이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아이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양어머니가 또다시 욕을 하며 꺼지라고 말하자 육지광은 굳은 표정으로 육성민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그녀는 하씨 가문에서 석 달을 더 지냈고, 그 사이 경찰이 집에 찾아와 하씨 가문 사람들의 정보를 등록하고 떠났다.강민아는 양부모가 때리고 욕하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며 부엌 싱크대 파이프 옆에 지쳐서 웅크리고 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따뜻한 이불 아래에서 자는 자신을 발견했다.한 번도 이불 아래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검은 솜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뒤늦게 그녀가 누워있는 곳이 다리 아래라는 걸 알아차렸고 육지광이 죽을 끓여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육성민은 숟가락으로 죽을 호호 불어서 식힌 뒤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죽을 다 먹은 후엔 육지광이 약을 먹였다.“나도 널 사 온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나와 성민이는 마땅히 지낼 곳도 없으니까.”강민아는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채 까만 눈동자로 육지광과 육성민을 빤히 쳐다보았다.육성민이 그녀에게 물었다.“이름이 뭐야?”그녀가 고개를 젓자 육지광이 말했다.“얘는 이제 내 아이이자 네 동생이니까 이제부터 우리랑 같은 성을 쓸 거야. 성은 육, 이름은...”육지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내가 널 하씨 가문에서 데리고 오던 날 밤 넌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어. 네 부모님은 네가 곧 잘못될 줄 알고 20만원으로 가격을 낮췄고, 난 16만원만 던져놓고 널 안은 채 도망쳤어. 그날 밤 달이 무척 밝았는데 꼭 하늘에서 떨어질 것처럼 지붕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