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청하는 그래도 성유리와 더 얘기해보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생각해봤어?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병원비 만으로도 너 충분히 힘들어질 거야. 네 아빠는...”“어차피 굶어 죽진 않아요.”“이건 어머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앞으로는 그냥 저 같은 딸 찾은 적도 없는 셈 치고 사세요.”“어머니 딸 성유리는 5살 때 이미 죽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그날이요.”결국 윤청하는 밖으로 나갔고 그렇게 한참을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테니스라켓을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중학교 근처의 체육관에서 라켓을 한참이나 휘두른 탓에 에어컨이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을 해서인지 성유리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그 땀방울이 성유리의 앞머리를 적셨고 또 시야도 흐려지게 했다.그때 상대방의 서브를 기다리고 있던 성유리에게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한 게임 해도 될까요?”임시 파트너인 대학생은 남자의 제안에 순순히 라켓을 넘겨주고는 옆으로 가 물을 마셨다.“여기 있을 줄 알았어.”진무열의 목소리에도 성유리는 대답 없이 손에 들린 공만 보고 있었다.“땀도 많이 흘리는 것 같은데 좀 쉬었다 하자.”그런 진무열을 빤히 바라보던 성유리는 상대가 저랑 공을 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뒤 돌아 다른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진무열은 빠르게 달려가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놔.”진무열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다른 쪽으로 갔다.“이 손 놓으라고 진무열!”성유리는 계속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무열의 힘이 너무 세서 끝끝내 손은 빼내지 못했고 오히려 힘을 잘못 주어 진무열의 품에 안겨버리기까지 했다.성유리가 또 빠져나가려 하자 진무열은 그녀를 가둔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힘들면 울어도 돼. 여기 너 보는 사람 없어.”진무열의 말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버렸다.성유리는 천천히 몸에 힘을 풀과 라켓까지 땅에 내려놓았다.이를 악물고 있던 성유리는 운동
박한빈과 성유리가 결혼을 한 지는 2년밖에 안 됐지만 둘이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었는데 지금껏 박한빈은 성유리가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같이 살면서도 우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한 번 본 게 유산했을 때였디.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술이 끝난 뒤였고 밤이 깊어진 탓에 두 집안의 가족들은 모두 돌아갔고 간호사는 옆에서 잠들었는데 성유리만은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었다.성유리는 대성통곡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리 내 눈물을 훔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온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보냈었다.그때 박한빈은 뭘 하고 있었을까.박한빈 본인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리고 성유리 뱃속에서 3개월 남짓 머무른 작은 생명에 대한 기억과 감정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그렇게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성유리가 눈물을 흘리는 걸 다시 본 지금, 그날 병원에서 울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났다.그게 박한빈이 본 중에서는 감정 기복이 제일 심한 성유리였다.물론 특별한 일을 할 때는 제외하고.그런데 아까의 성유리는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몸을 떨어가며 울고 있었다, 그것도 진무열의 품 안에서.“박 대표님?”그때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박한빈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1시간쯤 지나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은 박한빈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성유리와 진무열이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그때 문득 코트 옆 벤치에 있는 초록색 머리끈이 눈에 띄었다.박한빈은 그것이 성유리 것임을 알아봤지만 굳이 가서 챙기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밖으로 나오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회사로 모실까요 대표님?”“그래.”박한빈은 차에 올라탄 뒤 바로 태블릿을 켜 처리해야 할 이메일들을 확인했다.그러던 박한빈이 무엇을 보기라도 한 건지 체육관을 금방 빠져나간 기사에게 말했다.“차 돌려.”“네?”순간 기사는 자신이
[자?][먹을 거 좀 사다가 집 앞에 놨으니까 일어나면 먹어.]나머지 문자들은 송효주가 보낸 것이었다.성유리의 소설연재로 인해 편집장과 싸워도 봤지만 아무래도 연재는 힘들 것 같다며 사과하는 내용의 문자였다.송효주에게 답장하며 현관문을 열어본 성유리는 문에 걸려있는 케익을 보게 되었다.달달한 초코향이 진하게 풍겨오는 그것은 성유리가 제일 좋아하는 케익이었다.성유리가 난데없는 케익을 보고 벙쪄있을 때 진무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깼어?”“응.”“물건은 잘 받았고?”“응.”“일단 냉장고에 넣어둬.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우리 같이...”“무열아.”“오늘 고마웠어, 근데 나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건 안 해도 돼.”제 말을 끊고 들려오는 성유리의 말에 수화기 너머의 진무열은 웃음을 터뜨렸다.“뭐 또 선이라도 그으려고? 전에는 결혼했다고 다가오지 말라더니 이번엔...”“나 이미 성씨 집안에서 나왔어.”“난 지금 성씨 집안 아가씨라는 이름도 없는 상태야. 이런 나를 너희 집안에서 받아줄까?”“너 이번에 힘들게 돌아온 거잖아. 나도 네가 무슨 포부를 갖고 있는지 아니까 말해주는 거야.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성유리의 말에 진무열은 잠깐의 정적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유리야,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여전히... 냉정하네.”“근데 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는 알아?”성유리는 진무열이 가져다준 케익을 보며 답했다.“네가 원하는 게 다른 거라면 난 더더욱 줄 수가 없어.”또 한 번 말문이 막혀버린 진무열은 끝내 그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박한빈을 사랑하는 거지?”하지만 성유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진무열과의 채팅창을 열어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럼 일부러 신경 쓰면서 발뺌하는 것 같아 성유리는 다시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버렸다.오후에 푹 잔 덕분인지 성유리는 밤이 깊어지는 이 시각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어차피
성유리와 윤청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면 성유리와 성시원 사이는 뭐 사이라고 정의할 것도 없었다.성씨 집안 가장이자 한 회사의 회장인 성시원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회사에서의 습관을 집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윤청하가 성유정을 무조건 편애한다면 성시원은 모두에게 똑같이 차가웠다.성시원은 집에 있는 날도 적었기에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다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이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그래서 이번이 성유리가 처음으로 성시원관 단둘이 가지는 식사 자리였다.성유리가 룸에 도착했을 때 성시원은 못마땅한 듯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늦었어요.”성유리의 말에 성시원은 화는 내지 않고 그녀를 한번 보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하지만 성유리는 가만히 서서 테이블에 놓인 접시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성유리와 성시원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개였다.“좀 있다 다른 분들 더 오실 거야.”그런 성유리의 경계를 보아낸 성시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에 일전에 윤청하가 얘기하던 정략결혼이 떠오른 성유리는 목에 힘을 주며 물었다.“조씨 집안 사람들이에요?”“들었어? 네 엄마가 얘기했나 보구나. 그럼 더 잘됐네. 조 회장님이 마침 시간 난다고 하시니까 일단 그 집 아들과 만나보기라도 해.”“싫어요.”“제가 오늘 여기 나온 건 아버지한테 제 뜻을 똑바로 전하기 위해서예요. 더 이상 제 생활에 관여하지 마세요.”“저는 성씨 집안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우스운 짓은 그만하시라고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코웃음을 친 성시원이 입을 열었다.“성유리, 우스운 건 너야.”“너랑 성씨 집안의 관계가 말 한마디로 끊어낼 수 있는 거였어?”“그 여자 병원비만 대면 되는 줄 알았어? 순진하네. 내 말 한마디면 그 여자는 내일 당장이라고 병원에서 쫓겨나. 그리고 온 금성을 다 뒤져도 그 여자를 받아줄 병원은 없을 거야.”약점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성 회장님, 오랜만입니다.”두 집안 어른들은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성유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무언의 협박을 하듯 저를 보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결국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여긴 제 딸아이 성유리라고 합니다.”“따님이 예쁘네요.”조재원이 웃으며 제 아들에게도 눈짓하자 그제야 옆에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안녕하세요, 조경우입니다.”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는 그리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어 유난히 더 단정해 보였다.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와 달리 성유리는 여전히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자자, 다 앉으시죠!”성시원의 말에 다들 자리에 앉았고 성시원은 바로 조재원과 백화점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 분위기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몰랐다면 정말 그냥 양가의 식사 자리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성유리의 맞은편에 앉은 조경우는 아까의 인사 이후로는 성유리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이따금 진중하게 어른들의 대화에 동참하며 얘기를 나눴다.그때 가만히 있던 조재원의 아내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가씬 올해 스물넷이라고 했죠?”“네.”“우리 사실 전에 봤었는데.”“작년에 로즈 호텔에서.”한혜진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그날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첫 결혼기념일 파티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등장한 성유리는 그날 파티의 중심이 되었고 또 아직 결혼을 안 한 금성 재벌 집 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하지만 그날 박한빈이 나타나지 않아서 성유리는 그런 모습을 하고서도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김서영이 나서서 해명했지만 모두들 박한빈이 제 아내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하지만 원체 해명 따윈 하지 않는 박한빈 때문에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그가 그날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본인도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혜진이
다행히 식사 자리는 무사히 끝이 났고 성유리는 보는 눈이 있어 성시원과 같이 차를 타긴 했지만 그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기에 기사더러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에 성시원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성시원에 깜빡이를 켜고 방향을 틀었다.성시원과는 말조차 섞기 싫어진 성유리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려왔다.성유리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성시원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씨 집안 아들이 보낸 것 같은데.”그 말에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어봤고 역시나 조경우가 보낸 문자였디.[오늘 성유리 씨라는 분을 알게 돼서 너무 영광이에요.][혹시 오페라 좋아하세요?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 내일 같이 갈래요?][시간 없으시면 같이 안 가도 되니까 부담 갖지는 마세요.]당돌하진 않지만 목적성이 명확한 요청에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승낙하고 답장을 보냈다.[좋아요.]문자를 보내고 난 성유리는 핸드폰을 성시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이제 만족해요?]아무 대답도 없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졌는지 기사를 보며 말했다.“옆에 차 세워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하지만 기사는 성시원의 명령이 아니라 차를 세우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그에 성유리가 성시원을 쳐다보자 성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세워.”성유리가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성시원이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조경우 씨 사람 좋아.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그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알지?”그 말에 성유리는 웃으며 답했다.“조건이 그렇게 좋으면 성유정더러 결혼하라고 하지 그래요?”성유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성시원은 답을 하지 못했고 성유리 역시 그 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9시가 금방 넘은 지금은 거리의 불빛들이 찬란해지고 사람들의 밤 생활이 막 시작된 시각이었다.길가에 널린 차들이며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영업장이며 모두 생기가 가득했지만 성유리는 이곳은 자신이 있
그래서 식탁에는 박한빈과 김서영 둘만이 마주 앉게 되었다.“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니?”수프를 마시며 묻는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는 유리랑 같이 사니까 여기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나가라고 한 거였어. 이젠 이혼도 했으니 들어와야지.”“괜찮아요.”“도연제가 더 편해요.”“뭐가 편한데? 새 여자친구 데려가는 게 편해?”말투는 평온했지만 단어마다에 조롱이 가득 배어있는 문장을 들은 박한빈은 수저를 내려놓고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의 시선을 못 느낀 척 계속 말했다.“나 진지해. 네 아버지가 시킨 결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혼하고 새로운 여자 만나겠다면 난 반대 안 한다.”“하지만 성유정은 안돼. 걔는 절대 우리 집에 못 들여.”“왜요?”박한빈의 질문에 김서영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너 정말 그 아이랑 결혼할 생각이었니?”“그냥 어머니가 왜 유정이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궁금한 것뿐이에요.김서영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니?”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대꾸를 못 하자 김서영은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성유정 그 아이만 아니면 다 괜찮아.”“저는 어머니 눈에는...”말을 하다말고 멈칫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저한테 골라주신 그 사람밖에 안 보이는 줄 알았어요.”성유리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박한빈에 김서영은 웃으며 말했다.“유리?”“그래, 유리 좋아하지. 그런데 뭐 어쩌겠니, 너흰 이미 이혼을 했고 유리는 앞으로 나아가야지. 벌써 선보고 있던데.”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선이요?”“그래, 오늘 오페라 보러 갔다가 만났어. 조경우 씨랑 같이 있더라.”“조경우면 그 절름발이 말하는 거예요?”“네.”“성씨 집안에서 많이 급하긴 했나 보네요.”그 말에 김서영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 너도 반성이란 걸 좀 해봐야 하지 않겠니? 왜 유리가 절름발이에게 가면서까지 너랑 이혼했겠니?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으며 그 입가에 핀 미소는 사람 자체가 한없이 온화해 보이게 했다.조경우가 뭐라고 했는지 성유리는 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조경우를 바라보았다.웃을 때마다 반짝이는 눈은 하나의 호수를 연상케 했다.성유리를 재미없고 조용한 사람이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던 박한빈은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문득 성유리가 스케치북을 뺏으려 하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그날은 성유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키스한 날이었다.박한빈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조경우는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에게 또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고개를 저었고 결국 조경우 혼자 차에 탄 뒤 성유리는 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누른 성유리는 다른 손을 들어 조경우를 향해 흔들어주었다.그렇게 조경우의 차가 떠나자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성유리는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도 지우고 고개를 떨궜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액셀을 밟아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성유리는 제 앞으로 다가오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검은색 맥세라티에 처음에는 두 눈을 의심했었다.하지만 창문이 내려지고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 성유리는 제가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신했다.“타.”“괜찮아요.”잠시 벙쪄있던 성유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난 지하철 타고 가면 돼.”말을 마친 성유리가 박한빈 차 뒤로 돌아가려고 하자 박한빈은 차를 뒤로하며 성유리의 길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명확했다.그에 성유리는 입술을 말아 물더니 치마를 잡았다 놓으며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만 성유리는 조수석에 타지 않고 뒷좌석에 올라타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실 말씀 있으세요, 박 대표님?”박한빈은 말없이 강하게 액셀을 밟았고 그 반동에 방심하고 있던 성유리는 앞 좌석에 머리까지 박을 뻔했다.그에
성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잊어버렸어요. 그냥 몇 번 밥만 같이 먹은 기억만 나요.”“그러니까... 진짜 남자였네?”박한빈이 다시 확인하듯 묻자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럼 그 자식도 별거 아니었네. 널 진심으로 신경 쓴 척하면서도 네가 그때 연기한 게 단순한 하녀 역할이라는 것조차 기억 못 했잖아. 대사도 하나 없는 배역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유리는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반응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다 문득 뭔가 깨달은 듯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이거 봐요. 박한빈 씨 제대로 기억하고 계셨잖아요.”장난스러운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이 성유리에게 속아 넘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 같았다.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그때부터 저 좋아했어요?”“아니.”박한빈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고 성유리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그래요? 알겠어요.”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근데 저 심지어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그냥 빈말이라도 절 좋아한다고 말해 줄 수는 없는 거예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고 살짝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렇게까지 말하면 박한빈도 조금은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아무 반응도 없자 결국 성유리는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몸을 숙였다.그리고 성유리의 입술을 덮쳤다.그의 키스는 처음에는 강한 벌처럼 다가왔다.박한빈은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고 성유리가 아파서 살짝 신음하자 그 틈을 타 혀끝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속으로 밀려들어 왔다.처음에는 강제적인 느낌이었지만 점점 부드러워졌다.그는 성유리의 혀를 가볍게 감싸며 유혹하듯 움직였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성유리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그렇게 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손을 뻗어
“그 사람은 아니야.”성유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곧 무언가 떠오른 듯 표정이 살짝 변했다.“그런데 연정우 씨는 지금 어떻게 됐어요?”“죽었어.”박한빈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는 곧바로 화제를 되돌렸다.“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고?”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물음보다 죽었다는 대답이 더 신경이 쓰였다.순간적으로 멍해진 그녀에게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이번에는 한층 낮고 어두운 톤이었다.“내가 묻고 있잖아. 도대체 누구야? 너 도대체 남자가 몇이나 되는 거야?”“뭐라고요? 지금 그게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이죠?”성유리는 황당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왜 그 사람이 남자라고 확신하세요?”“아니야?”박한빈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잠시 말을 멈춘 성유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단 연정우 씨가 정말 죽었는지부터 제대로 말해 줘요.”“그 미친놈을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건데? 먼저 너부터 말해. 그때 널 봤다는 사람이 누구야?”“지금 제정신이세요? 전 무대 위에 있었어요. 절 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럼 그 사람들 다 찾아볼 건가요?”성유리가 단호하게 받아치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화가 나서였을까.병실 안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연정우가 죽었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은 걸 보며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아마도 살아 있겠지만 상태가 어떤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진심은 하나였다.연정우가 그렇게 쉽게 죽어버린다면 너무 쉬운 결말 아닌가.그가 겪어야 할 대가는 그 정도가 아닐 텐데.의사가 병실로 들어왔을 때,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박한빈은 여전히 성유리를 부축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얼음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의사는 자신이 들어온 타이밍이 적절한지 잠시 고민하다 결국 말을 꺼냈다.“환자 상태를 다시 한번 체크하겠습니다.”박한빈은 의사를 한 번 흘깃
박한빈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그저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귀 끝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참다못해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하지만 박한빈은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그럼 다 기억난 거야? 우리 사이의 모든 것들.”“아니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면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머리가 아파요. 아까 의사 부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가서...”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불쑥 그녀의 손을 잡았다.힘이 강하지는 않았다.그런데도 그의 손가락 끝이 살짝 스치는 때, 성유리는 온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순간적으로 손을 빼려던 찰나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사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도 난 너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어.”성유리는 뜻밖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알아요. 학교에서 몇 번 마주쳤잖아요.”“그것뿐만이 아니라 졸업 후에도 널 본 적이 있어. 네 대학 졸업 공연도 직접 가서 봤어.”그는 느릿하게,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그리고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듯한 기색도 묻어 있었다.이런 이야기는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그래서인지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졸업 공연이요?”“응. 네가 연극에 출연했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렸다.학교 축제 때 한 번 공연했던 연극을 졸업할 때도 다시 무대에 올렸었다.물론, 성유리는 단역이었다. 대사 한마디도 없는 엑스트라.“그걸 보러 왔었다고요?”그녀는 어리둥절했다.그게 대체 뭐라고? 박한빈이 그런 공연을 일부러 보러 올 이유가 있었을까?성유리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때, 박한빈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용히 대답했다.“넌 졸업하자마자 나랑 결혼했어. 기억하지?”“알지. 그런데 그게...”성유리는 말하다가 문득 깨달았다.“설마 진짜 일부러 저 보러 오신 거예요?
“누구세요?”이것이 성유리가 눈을 뜨고 나서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박한빈은 그녀가 깨어난 기쁨에 잠겨 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뭐라고?”묻는 그의 목소리는 많이 떨리고 있었다.성유리는 대답 없이 그저 조용히 박한빈을 바라볼 뿐이었는데 눈빛에는 분명한 의심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박한빈은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또다시 이런 일을 겪게 되어서일까.이번에는 꽤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다.“나는 네 남편, 박한빈이야.”그러고는 다시 물었다.“너... 네 이름은 기억해?”“남편?”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다.“저희가 결혼했다는 뜻인가요?”“그래. 우리에겐 하늘이라는 딸도 있어. 올해 세 살이야. 여기 사진도 있고.”박한빈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보다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왜 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네가 좀 다쳤거든. 하지만 걱정 마. 곧 의사 불러서 검사받게 할 거니까.”박한빈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갑자기 성유리가 그의 옷소매를 살짝 붙잡았다.아주 약한 힘이었지만 박한빈은 즉시 그것을 감지하고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왜?”“머리가 좀 아파요. 그렇지만 의사는 별로 보고 싶지 않네요.”“그래도...”“저희에겐 딸이 있다면서? 그럼... 언제 결혼한 건데요?”“우리는...”박한빈은 즉시 대답하려다가 문득 이 질문이 생각보다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애초에 그들의 이야기는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모든 기억을 잃었다.그렇다면 굳이 복잡한 과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우린 결혼한 지 7년 됐어.”“7년이요?”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그럼 그동안 줄곧 함께였나요?”“당연하지.”“그럼 저희가 왜 결혼한 거예요?”“그야 당연히...”박한빈은 자동으로 대답하려 했지만 말을 하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다.그래서
연정우는 자신이 정말로 잘못한 것 같다.돈과 권력.사실 그건 애초에 그가 쫓아야 할 것이 아니었다.아무도 영원히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없고, 아무도 영원히 그것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연정우가 진짜로 쫓아야 했던 것은 오직 그 한 줄기 빛뿐이었다.늦은 밤까지도 자신을 위해 남아 있을 그 불빛 하나.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너무 늦어버렸다.눈을 감는 순간, 연정우는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어릴 때 그는 새 그림 도구 세트를 너무나도 갖고 싶었다.부모님께 여러 번 얘기했고 세뱃돈을 모아 직접 사려고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부모님은 그것이 지나친 낭비라 생각했고 그들의 검소한 삶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그래서 결국 연정우는 문구점에서 몰래 그 그림 도구를 훔쳤다.그는 학자 집안 출신이었고 바깥에서는 항상 온화하고 품격 있는 모습을 유지해 왔다.덕분에 주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래도 나중에 부모님은 결국 진실을 알아버렸다.그리고 가장 가혹한 방법으로 연정우를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바로 문구점 앞에 무릎 꿇리고 주인에게 용서를 빌게 만든 것이다.그때, 주변에는 그의 친구들도 있었다.그러나 부모님은 연정우의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정직과 성실, 그게 연정우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덕목이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뿐이었다.정직과 성실이라는 그 두 단어를 성인이 된 지금 떠올리며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며 아주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엄마, 내가... 잘못했어.”...손목시계의 시침이 정확히 열 시를 가리켰다.박한빈은 이미 사람을 시켜 연정우의 차가 향한 방향을 알아냈고 지금 그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그 과정에서 그는 계속해서 연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우와 협상할 기회만 생긴다면 반드시 설득해서 성유리를 놓아주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연정우의 휴대폰은 내내 꺼져 있었다.운전을 하던 박한빈이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보니 손목시계의 시침이 갑자기
“미쳤어? 성유리, 당장 손 놔!”연정우는 필사적으로 핸들을 되찾으려 했다.하지만 성유리는 마치 먹이를 물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맹수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어 핸들을 꽉 붙잡았다.차의 속도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광란의 질주를 이어갔다.이 모든 과정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아마도 몇십 초 정도였을 것이다.그렇지만 연정우에게는 단지 한순간처럼 느껴졌다.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면에서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가 보였기 때문이었다.연정우는 더 이상 총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그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다.그러나 그 찰나, 두 대의 차량이 엄청난 속도로 충돌했다.쾅!굉음이 울려 퍼졌고 차체가 한순간 공중으로 떠오른 후, 격렬한 충격과 함께 다시 도로로 떨어졌다.연정우는 크게 뜬 눈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성유리였다.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마치 처음부터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처럼.성유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연정우가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는 걸.그가 그녀를 납치한 진짜 이유가 박한빈을 협박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연정우는 생각했다.비록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성유리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는 있을 것이라고.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함정에 빠뜨린 것에 대한 감정도 이제는 조금 덜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냥 단순히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하지만 성유리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단 한 마디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를 죽음으로 끌어들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연정우는 그녀에게 별다른 원망을 느끼지 못했다.오히려 어딘가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그때 연정우는 불현듯 자신과 성유리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그날, 성유리는 박한빈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리고 연정우는 그 연회장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이 정원으로 나왔었다.그는 당시 명문대 교수였고 외할아버지는 존경받는 화
에릭이 다시 묻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선생님, 아내 분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요.”박한빈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이내 검은 머리에 커다란 눈을 가진 여자아이가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금 뒤쪽에 있는 화단 쪽에서 아내 분이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걸 봤어요. 제 착각이 아니라면... 그 남자는 전에 마피 쪽에 있던 연정우 씨였던 것 같은데요?”연정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박한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그리고 즉시 소녀 앞으로 다가섰다.“그들이 어디로 갔지?”“그건 잘 모르겠지만 대신 차 번호를 기억해 뒀어요. 필요하세요?”“어디 있는데?”박한빈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소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천 달러요, 선생님.”박한빈은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즉시 자신의 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번호!”소녀는 카드에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박한빈이 누군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 돈을 떼먹을 사람은 아닐 터였다.결국 소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박한빈은 주저 없이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았다.“선생님, 그건 제 휴대폰이에요!”소녀가 깜짝 놀라 소리치며 따라붙으려 했지만 에릭이 가로막았다.“넌 누구야?”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에릭 씨.”에릭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넌 이곳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소녀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가슴팍의 직원 명찰을 가리켰다.“저는 그냥 아르바이트생이에요. 서빙하러 들어온 거랍니다.”에릭은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조용히 말했다.“그럼 이제 네가 해고됐다는 걸 알려 주지.”...한편, 성유리는 연정우의 차 안에 있었다.그가 어디로 차를 몰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에릭 씨!”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에릭은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이번 ‘전쟁’에서 그들은 승리했으니 그는 상당한 보상을 손에 넣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아마도 박한빈이 억지로 그를 이 판에 끌어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이제 단순한 승패로는 에릭의 감정을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처음에는 그래도 기대감이 있었다.연정우라는 상대는 꽤 까다로운 인물이었고 엄청난 위기를 초래하며 심지어 그들을 완전히 박살 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그랬다면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그러나 정작 모든 일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끝나 버렸다.별다른 기복도 없이.이건 정말 따분했다.오늘 밤의 축하 파티도 마찬가지였다.박한빈이 꼭 성유리를 이 연회에 참석시키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이번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승리의 일부는 성유리의 몫이라는 말과 함께.그래서 오늘 밤의 축하는 유난히 ‘건전’했다.아니, ‘심심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에릭은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샴페인 잔에 던져 넣었다.한 잔에 5만 달러가 넘는 술이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그리고 뒤쪽에서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뭐죠?”“로얀이라는 분이 데리고 오신 동반자가 누군가에게 끌려갔습니다.”상대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하자 에릭의 눈이 가늘어졌다.“뭐라고요?”“아까 경호원들이 순찰 중에 봤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초대장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죠. 그런데 지금 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서...”“그래서 지금 그 사람은?”“이미 끌려갔습니다.”에릭은 보고한 사람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그러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에릭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습니까?”“방금 CCTV를 확인했습니다. 아마도... 마피
에릭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입속으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굳이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대신 고개를 돌려 연회장 안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귀를 찢을 듯한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들떠있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원래 이들의 축하 파티는 이런 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이 모든 건, 박한빈이 성유리를 이곳에 적응시키고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이 사실을 모르는 것도,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금 깨닫게 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졌다.그리고 문득, 며칠 전 연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것은 그녀와 박한빈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물론, 연정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보장도 없었다.연정우가 말한 과거들 중, 진실은 얼마이며 거짓은 얼마나 될까?성유리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웠고 과거의 선택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박한빈의 감정을 믿고 싶었다.그렇게 믿고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때때로 지금의 자신이 마치 허상처럼 느껴졌다.박한빈과의 관계조차 마치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정작 그녀 자신도 자신의 본모습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데 하물며 박한빈이 온전히 알 수 있을 리가 있을까?성유리는 손에 든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달콤한 맛과 함께 과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그녀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기로 했다.이곳은 에릭이 통째로 빌린 사적인 공간이었다.주변에는 수시로 순찰을 도는 경호원들이 있어 안전은 보장된 곳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이곳에서 연정우와 딱 마주치게 된 것이다.그리고 그의 총구는 성유리의 허리에 거의 닿아 있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성유리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연정우를 바라보았다.그 반응이 오히려 연정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