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청하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만 유지했다.원래도 작아서 답답하던 집 안에 정적까지 감도니 전체적인 분위가 훅 가라앉는 것 같았다.그런 정적 속에서 윤청하를 바라보는 성유리의 평온한 시선은 윤청하의 심장까지 철렁이게 했다.“너...”“나가요.”그때 한참 만에 입을 연 성유리의 입에서 낯선 말이 튀어나왔다.그에 깜짝 놀란 윤청하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너 방금 뭐라고 했니?”“나가라고요.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도 마세요.”성유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저번에 한 말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면 기자회견도 열게요. 그래서 저는 성씨 집안과 연을 끊었으니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성씨 집안과 상관없다고 말할게요. 그럼 제가 집안 망신시킬까 더 걱정 안 하셔도 되잖아요.”성유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청하가 성유리의 뺨을 내리쳤다.오늘 금방 한 네일의 큐빅이 성유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피까지 흘러내렸지만 성유리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성유리는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고 평온하게 윤청하를 보고 있었다.“너... 너 다 컸다고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니? 성유리, 넌 내 딸이야. 넌...”“나더러 조씨 집안에 시집가라는 거 집안 이익 때문이잖아요.”성유리는 윤청하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그게 아니면 어머니가 이렇게 다급하게 절 찾아오실 리가 없잖아요.”“집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거예요? 됐어요, 어차피 전 그 집안에 원하는 게 없으니까 알고 싶지도 않아요.”“원하는 게 없어? 너를 키우느라 든 돈은 다 헛된 거였니?”“그리고 병원에 누워있는 그 여자, 우리 성씨 집안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어. 아직도 숨 붙어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인데!”“나도 알아, 네가 돌아올 때부터 넌 날 엄마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 너한테는 병원에 누워있는 그 여자밖에 없잖아. 그게 네 유일한 엄마잖아. 우리가 막지 않았으면 병원을 아주 제집 드나들듯 했겠지. 그 여자가 너한테 뭘 해줄
윤청하는 그래도 성유리와 더 얘기해보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생각해봤어?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병원비 만으로도 너 충분히 힘들어질 거야. 네 아빠는...”“어차피 굶어 죽진 않아요.”“이건 어머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앞으로는 그냥 저 같은 딸 찾은 적도 없는 셈 치고 사세요.”“어머니 딸 성유리는 5살 때 이미 죽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그날이요.”결국 윤청하는 밖으로 나갔고 그렇게 한참을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테니스라켓을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중학교 근처의 체육관에서 라켓을 한참이나 휘두른 탓에 에어컨이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을 해서인지 성유리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그 땀방울이 성유리의 앞머리를 적셨고 또 시야도 흐려지게 했다.그때 상대방의 서브를 기다리고 있던 성유리에게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한 게임 해도 될까요?”임시 파트너인 대학생은 남자의 제안에 순순히 라켓을 넘겨주고는 옆으로 가 물을 마셨다.“여기 있을 줄 알았어.”진무열의 목소리에도 성유리는 대답 없이 손에 들린 공만 보고 있었다.“땀도 많이 흘리는 것 같은데 좀 쉬었다 하자.”그런 진무열을 빤히 바라보던 성유리는 상대가 저랑 공을 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뒤 돌아 다른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진무열은 빠르게 달려가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놔.”진무열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다른 쪽으로 갔다.“이 손 놓으라고 진무열!”성유리는 계속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무열의 힘이 너무 세서 끝끝내 손은 빼내지 못했고 오히려 힘을 잘못 주어 진무열의 품에 안겨버리기까지 했다.성유리가 또 빠져나가려 하자 진무열은 그녀를 가둔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힘들면 울어도 돼. 여기 너 보는 사람 없어.”진무열의 말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버렸다.성유리는 천천히 몸에 힘을 풀과 라켓까지 땅에 내려놓았다.이를 악물고 있던 성유리는 운동
박한빈과 성유리가 결혼을 한 지는 2년밖에 안 됐지만 둘이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었는데 지금껏 박한빈은 성유리가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같이 살면서도 우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한 번 본 게 유산했을 때였디.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술이 끝난 뒤였고 밤이 깊어진 탓에 두 집안의 가족들은 모두 돌아갔고 간호사는 옆에서 잠들었는데 성유리만은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었다.성유리는 대성통곡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리 내 눈물을 훔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온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보냈었다.그때 박한빈은 뭘 하고 있었을까.박한빈 본인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리고 성유리 뱃속에서 3개월 남짓 머무른 작은 생명에 대한 기억과 감정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그렇게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성유리가 눈물을 흘리는 걸 다시 본 지금, 그날 병원에서 울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났다.그게 박한빈이 본 중에서는 감정 기복이 제일 심한 성유리였다.물론 특별한 일을 할 때는 제외하고.그런데 아까의 성유리는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몸을 떨어가며 울고 있었다, 그것도 진무열의 품 안에서.“박 대표님?”그때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박한빈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1시간쯤 지나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은 박한빈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성유리와 진무열이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그때 문득 코트 옆 벤치에 있는 초록색 머리끈이 눈에 띄었다.박한빈은 그것이 성유리 것임을 알아봤지만 굳이 가서 챙기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밖으로 나오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회사로 모실까요 대표님?”“그래.”박한빈은 차에 올라탄 뒤 바로 태블릿을 켜 처리해야 할 이메일들을 확인했다.그러던 박한빈이 무엇을 보기라도 한 건지 체육관을 금방 빠져나간 기사에게 말했다.“차 돌려.”“네?”순간 기사는 자신이
[자?][먹을 거 좀 사다가 집 앞에 놨으니까 일어나면 먹어.]나머지 문자들은 송효주가 보낸 것이었다.성유리의 소설연재로 인해 편집장과 싸워도 봤지만 아무래도 연재는 힘들 것 같다며 사과하는 내용의 문자였다.송효주에게 답장하며 현관문을 열어본 성유리는 문에 걸려있는 케익을 보게 되었다.달달한 초코향이 진하게 풍겨오는 그것은 성유리가 제일 좋아하는 케익이었다.성유리가 난데없는 케익을 보고 벙쪄있을 때 진무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깼어?”“응.”“물건은 잘 받았고?”“응.”“일단 냉장고에 넣어둬.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우리 같이...”“무열아.”“오늘 고마웠어, 근데 나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건 안 해도 돼.”제 말을 끊고 들려오는 성유리의 말에 수화기 너머의 진무열은 웃음을 터뜨렸다.“뭐 또 선이라도 그으려고? 전에는 결혼했다고 다가오지 말라더니 이번엔...”“나 이미 성씨 집안에서 나왔어.”“난 지금 성씨 집안 아가씨라는 이름도 없는 상태야. 이런 나를 너희 집안에서 받아줄까?”“너 이번에 힘들게 돌아온 거잖아. 나도 네가 무슨 포부를 갖고 있는지 아니까 말해주는 거야.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성유리의 말에 진무열은 잠깐의 정적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유리야,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여전히... 냉정하네.”“근데 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는 알아?”성유리는 진무열이 가져다준 케익을 보며 답했다.“네가 원하는 게 다른 거라면 난 더더욱 줄 수가 없어.”또 한 번 말문이 막혀버린 진무열은 끝내 그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박한빈을 사랑하는 거지?”하지만 성유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진무열과의 채팅창을 열어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럼 일부러 신경 쓰면서 발뺌하는 것 같아 성유리는 다시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버렸다.오후에 푹 잔 덕분인지 성유리는 밤이 깊어지는 이 시각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어차피
성유리와 윤청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면 성유리와 성시원 사이는 뭐 사이라고 정의할 것도 없었다.성씨 집안 가장이자 한 회사의 회장인 성시원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회사에서의 습관을 집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윤청하가 성유정을 무조건 편애한다면 성시원은 모두에게 똑같이 차가웠다.성시원은 집에 있는 날도 적었기에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다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이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그래서 이번이 성유리가 처음으로 성시원관 단둘이 가지는 식사 자리였다.성유리가 룸에 도착했을 때 성시원은 못마땅한 듯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늦었어요.”성유리의 말에 성시원은 화는 내지 않고 그녀를 한번 보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하지만 성유리는 가만히 서서 테이블에 놓인 접시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성유리와 성시원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개였다.“좀 있다 다른 분들 더 오실 거야.”그런 성유리의 경계를 보아낸 성시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에 일전에 윤청하가 얘기하던 정략결혼이 떠오른 성유리는 목에 힘을 주며 물었다.“조씨 집안 사람들이에요?”“들었어? 네 엄마가 얘기했나 보구나. 그럼 더 잘됐네. 조 회장님이 마침 시간 난다고 하시니까 일단 그 집 아들과 만나보기라도 해.”“싫어요.”“제가 오늘 여기 나온 건 아버지한테 제 뜻을 똑바로 전하기 위해서예요. 더 이상 제 생활에 관여하지 마세요.”“저는 성씨 집안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우스운 짓은 그만하시라고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코웃음을 친 성시원이 입을 열었다.“성유리, 우스운 건 너야.”“너랑 성씨 집안의 관계가 말 한마디로 끊어낼 수 있는 거였어?”“그 여자 병원비만 대면 되는 줄 알았어? 순진하네. 내 말 한마디면 그 여자는 내일 당장이라고 병원에서 쫓겨나. 그리고 온 금성을 다 뒤져도 그 여자를 받아줄 병원은 없을 거야.”약점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성 회장님, 오랜만입니다.”두 집안 어른들은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성유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무언의 협박을 하듯 저를 보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결국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여긴 제 딸아이 성유리라고 합니다.”“따님이 예쁘네요.”조재원이 웃으며 제 아들에게도 눈짓하자 그제야 옆에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안녕하세요, 조경우입니다.”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는 그리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어 유난히 더 단정해 보였다.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와 달리 성유리는 여전히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자자, 다 앉으시죠!”성시원의 말에 다들 자리에 앉았고 성시원은 바로 조재원과 백화점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 분위기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몰랐다면 정말 그냥 양가의 식사 자리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성유리의 맞은편에 앉은 조경우는 아까의 인사 이후로는 성유리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이따금 진중하게 어른들의 대화에 동참하며 얘기를 나눴다.그때 가만히 있던 조재원의 아내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가씬 올해 스물넷이라고 했죠?”“네.”“우리 사실 전에 봤었는데.”“작년에 로즈 호텔에서.”한혜진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그날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첫 결혼기념일 파티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등장한 성유리는 그날 파티의 중심이 되었고 또 아직 결혼을 안 한 금성 재벌 집 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하지만 그날 박한빈이 나타나지 않아서 성유리는 그런 모습을 하고서도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김서영이 나서서 해명했지만 모두들 박한빈이 제 아내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하지만 원체 해명 따윈 하지 않는 박한빈 때문에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그가 그날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본인도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혜진이
다행히 식사 자리는 무사히 끝이 났고 성유리는 보는 눈이 있어 성시원과 같이 차를 타긴 했지만 그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기에 기사더러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에 성시원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성시원에 깜빡이를 켜고 방향을 틀었다.성시원과는 말조차 섞기 싫어진 성유리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려왔다.성유리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성시원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씨 집안 아들이 보낸 것 같은데.”그 말에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어봤고 역시나 조경우가 보낸 문자였디.[오늘 성유리 씨라는 분을 알게 돼서 너무 영광이에요.][혹시 오페라 좋아하세요?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 내일 같이 갈래요?][시간 없으시면 같이 안 가도 되니까 부담 갖지는 마세요.]당돌하진 않지만 목적성이 명확한 요청에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승낙하고 답장을 보냈다.[좋아요.]문자를 보내고 난 성유리는 핸드폰을 성시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이제 만족해요?]아무 대답도 없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졌는지 기사를 보며 말했다.“옆에 차 세워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하지만 기사는 성시원의 명령이 아니라 차를 세우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그에 성유리가 성시원을 쳐다보자 성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세워.”성유리가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성시원이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조경우 씨 사람 좋아.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그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알지?”그 말에 성유리는 웃으며 답했다.“조건이 그렇게 좋으면 성유정더러 결혼하라고 하지 그래요?”성유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성시원은 답을 하지 못했고 성유리 역시 그 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9시가 금방 넘은 지금은 거리의 불빛들이 찬란해지고 사람들의 밤 생활이 막 시작된 시각이었다.길가에 널린 차들이며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영업장이며 모두 생기가 가득했지만 성유리는 이곳은 자신이 있
그래서 식탁에는 박한빈과 김서영 둘만이 마주 앉게 되었다.“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니?”수프를 마시며 묻는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는 유리랑 같이 사니까 여기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나가라고 한 거였어. 이젠 이혼도 했으니 들어와야지.”“괜찮아요.”“도연제가 더 편해요.”“뭐가 편한데? 새 여자친구 데려가는 게 편해?”말투는 평온했지만 단어마다에 조롱이 가득 배어있는 문장을 들은 박한빈은 수저를 내려놓고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의 시선을 못 느낀 척 계속 말했다.“나 진지해. 네 아버지가 시킨 결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혼하고 새로운 여자 만나겠다면 난 반대 안 한다.”“하지만 성유정은 안돼. 걔는 절대 우리 집에 못 들여.”“왜요?”박한빈의 질문에 김서영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너 정말 그 아이랑 결혼할 생각이었니?”“그냥 어머니가 왜 유정이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궁금한 것뿐이에요.김서영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니?”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대꾸를 못 하자 김서영은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성유정 그 아이만 아니면 다 괜찮아.”“저는 어머니 눈에는...”말을 하다말고 멈칫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저한테 골라주신 그 사람밖에 안 보이는 줄 알았어요.”성유리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박한빈에 김서영은 웃으며 말했다.“유리?”“그래, 유리 좋아하지. 그런데 뭐 어쩌겠니, 너흰 이미 이혼을 했고 유리는 앞으로 나아가야지. 벌써 선보고 있던데.”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선이요?”“그래, 오늘 오페라 보러 갔다가 만났어. 조경우 씨랑 같이 있더라.”“조경우면 그 절름발이 말하는 거예요?”“네.”“성씨 집안에서 많이 급하긴 했나 보네요.”그 말에 김서영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 너도 반성이란 걸 좀 해봐야 하지 않겠니? 왜 유리가 절름발이에게 가면서까지 너랑 이혼했겠니?
아라는 원래 그저 하나의 거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릭의 태도는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아라는 당연히 에릭과 계속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일부러 에릭에게 바람을 피울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일부러 현장에서 들키는 상황까지 연출했다.아라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에릭은 결국 그녀에게 질려버렸고 먼저 이별을 통보했었다.그녀는 약간의 소란을 피운 뒤, 에릭이 건넨 이별 위로금을 받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듯 끄 까지 연기하며 퇴장했다.이걸로 모든 이야기가 완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에릭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그리고 에릭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에릭이 얼마나 냉혹한 남자인지 아라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짜요? 정말 다행이네요.”말을 하며 아라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을 껴안았다.“제가 요즘 에릭 씨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르시죠?”에릭은 아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아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철없이 굴지 않을게요. 에릭 씨 일에는 절대 참견하지도 말썽도 부리지 않을 거예요. 그저 에릭 씨 곁에 남아있을 수만 있다면...”“그래. 걱정 안 할게. 이제부터 다른 사람은 없을 거니까.”에릭이 아라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며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네?”아라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질문에 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자.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아니... 잠깐만요.”그제야 아라는 정신을 차리고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에릭은 곧장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싫어?”에릭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고 눈빛도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눈치 보던 아라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라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박한빈은 오
아라는 요 며칠 계속해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잠시 불안감이 스쳤지만 이내 스스로를 달랬다.‘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누가 날 쫓아오겠어?’아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돈도 많지 않고 외모도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그러니 누군가 아라를 미행할 이유 따위 없었다.애써 잡생각을 정리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신경을 끄기로 했다.요즘 아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주성운이었다.요즘 그는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기에 아라가 돈을 모아 주문한 의족도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의족이 도착하면 주성운은 다시 두 발로 설 수 있고 그들의 삶도 한층 더 나아질 터였다.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함께 작은 가게를 열어 조용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그것이 아라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였다.공공버스에서 내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아라야.”익숙한 이름,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아라의 발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딱 떨어지는 고급 정장을 입은 채로 눈에 띄는 금발과 짙은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남자가 입을 열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아라에게 쏠리자 아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에릭이 아라를 찾아온 것이다.순간 아라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몇 초 후, 그녀는 억지로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다가섰다.“에... 에릭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에릭은 아라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지나가는 길인가요?”아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려 했다.“진짜 우연이네요. 근데...”“아니. 특별히 널 찾으러 왔어.”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멈칫했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 저를 왜 찾아오셨어요? 무슨
“모르지. 방금 에릭이 나한테도 말 안 해줬잖아?”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근데 에릭 씨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 단순히 재산 문제로 화낼 리는 없고... 그렇다면 그냥 가지고 놀았다는 건가요?”성유리가 이 일에 대해 그렇게 분석하자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럴걸?”에릭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그 녀석이 예전에 나보고 미쳤다고 난리 치더니 이제야 본인이 제대로 당했네. 아주 좋아.”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릭은 뭔가 떠오른 듯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라의 신원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그리고는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번 연극... 아주 볼만하겠어.”...에릭이 도착한 건 새벽이었지만 박한빈은 당연히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미리 주소를 알아두었기 때문에 에릭은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쳐들어왔다.현관 벨이 울릴 때, 성유리와 박한빈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그 바람에 그녀의 손톱이 박한빈의 등을 스치며 얇은 상처를 남겼다.그래서 박한빈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사람 있어요.”성유리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그렇지만 벨 소리는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성유리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고 결국 그를 밀어내려 했다.살짝 화가 난 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아예 성유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러버렸다.한편, 에릭은 문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금성은 아직 그렇게 추운 계절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이처럼 문 앞에서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는 경험은 그야말로 치욕이었다.그렇게 이를 악물고 서 있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내려왔는데 그의 표정은 에릭 못지않게 어두웠다.“대체 뭐 하러 온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에릭은
성유리가 아라와 다시 마주친 건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병원 로비,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낯선 남성과 아라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남자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아라에게 무언가를 조용히 이야기했고 아라는 몸을 숙여 그의 말을 경청했다.그러다 말이 끝나자 대놓고 눈알을 굴리며 남자를 향해 장난이 섞인 짜증도 부렸다.아라의 표정은 투덜대는 듯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그 모습은 성유리가 에릭 곁에서 보았던 아라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그래서 성유리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그런데 아라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한 듯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지만 그 찰나의 경직은 오래가지 않았다.아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선을 피하고 다시 남자를 밀며 걸어갔다.그 모습을 보고도 성유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어차피 아라는 에릭의 여자 친구였을 뿐이고 지금은 헤어진 듯하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아라의 발걸음이 왠지 급해 보였다.마치 무언가를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들킬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처럼.이상한 아라의 행동에 성유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때 마침, 박한빈이 성유리의 건강검진 결과를 들고 다가왔다.“유리야.”그녀는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박한빈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못했다.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가 반응이 없자 결국 박한빈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성유리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 얼이 빠져있는 사람처럼.”성유리는 한동안 박한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방금 아라 씨를 봤어요.”“아라?”“네. 에릭 씨의 새 여자 친구였던 사람.”그제야 박한빈도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아라 씨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그래요?”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네. 저도 금성 대학 출신이에요. 다만 제가 입학했을 땐 선배님은 이미 졸업하고 결혼하셨더라고요. 나중에 선배님의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소개해 주셨었어요.”아라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이야기 소재 자체가 성유리에게는 다소 민망한 주제였지만 덕분에 박한빈과 에릭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그런 이유로 성유리는 굳이 더 신경 쓰지 않았다.어쨌든 저녁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이미 밤이 깊었기 때문에 에릭은 두 사람에게 하룻밤 묵고 가라고 권했지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에릭은 여전히 냉랭한 박한빈의 태도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정 그렇다면 나도 더 붙잡지는 않을게. 집사님, 손님들을 배웅하십시오.”말을 마친 그는 아라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박한빈 또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성유리를 데리고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보며 성유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이 둘은 한때 명실상부한 파트너였고 지금도 각자의 분야에서 손꼽히는 인물인데 지금 하는 행동은 꼭 유치한 초등학생 같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아직도 에릭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에 성유리는 굳이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을 뿐.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넣고 장난스럽게 주물렀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좀만 기다려 봐.”“뭘요?”성유리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저 바보 곧 크게 당할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제가 연정우한테 끌려갔던 건 사실 에릭 씨 탓만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박한빈 씨랑 에릭 씨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는데 굳이 이 일로 계속 싸울 필요는 없지 않아요?”성유리가 말하는 동안 박한빈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더니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
사실 에릭에게 여자 친구가 끊긴 적은 없었다.자주 마주칠 일도 없는 성유리조차 그가 여러 명의 여자 친구를 두는 모습을 봐왔을 정도였다.박한빈도 전에 말했었다. 에릭에게 여자 친구란 그저 소모품 같은 존재라고.한동안은 그녀들에게 온갖 애정과 특권을 쏟아붓지만 ‘유효기간’이 지나면 가차 없이 버려버린다고 했다.그 과정에서 단 한 치의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오히려 에릭은 여자들이 잃어버린 것에 절망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즐기는 인간쓰레기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라에게만큼은 에릭이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가장 직관적인 증거는 박한빈이 말하기를 이 저택은 에릭의 개인적인 공간이었으며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그럼 아라는?그녀의 태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 같았다.물론 이건 그저 성유리의 생각일 뿐이었으니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박한빈과 에릭 사이에는 어딘가 묘한 거리감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저녁 식사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아라는 에릭 곁에서 마치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에릭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에릭은 그런 아라의 ‘배려심’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아라를 보면서 왠지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성유리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아라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뒤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그때, 갑자기 에릭이 입을 열었다.“돌아가면 이제 2세 가질 계획을 세우는 건가?”성유리는 난데없는 대화 주제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니, 그보다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에릭이라는 점이 더 황당했다.잠시 에릭이 정말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에릭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그리고 성유리뿐만 아니라 박한빈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렇지만 그는 성유리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미쳤냐?”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또 다음 있다고?”성유리는 웃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다음은 없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박한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바로 그때 운전기사의 안내 소리가 들려왔다.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궁금증을 잠시 접어두고 성유리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잠깐만요. 저 립스틱 좀 다시 바르고.”성유리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뜻대로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그럴 필요 없어. 그 사람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그렇게 격식을 차려야 해?”박한빈에게는 자신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에릭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그런데 굳이 멋을 낼 필요가 있나?성유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박한빈이 이끄는 대로 차에서 내렸다.“로얀.”그곳에 있던 집사는 박한빈과 매우 친숙한 듯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후,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저택의 구조를 살폈다.박한빈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에릭은 단순히 넥스트의 창립자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고 했다.이 저택 역시 그 시절부터 내려온 유산이었다.새하얀 벽과 아치형 창문은 성유리가 동화책에서 본 성과 거의 똑같았다. 천장이 높은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는 웅장한 샹들리에도 그녀가 떠올린 전형적인 귀족 저택의 이미지와 부합했다.하지만 한 가지, 성유리가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 있었다.거실에서 차를 따르고 있는 여인.그녀는 푸른빛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가지런히 틀어 올렸는데 우아한 몸매에 단아한 얼굴, 그리고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낯선 인물의 등장에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올렸고 박한빈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박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돌아봤다.
성유리와 박한빈이 라온시를 떠나기 전에, 에릭이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그런데 그 식사는 호텔이나 다른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릭의 개인 별장에서 진행되었는데 마치 성인 사자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갖듯 에릭의 별장도 그의 사적인 영역이었다.에릭이 박한빈 혼자 초대한 적이 있지만 성유리와 함께 초대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는 그가 성유리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박한빈은 사실 에릭의 인정 따위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성유리의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뜻깊게 생각했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끌려갔던 일을 아직 에릭에게 따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유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 초대를 했다.어쩔 수 없이 성유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초대에 기꺼이 응하며 박한빈과 함께 가기로 했다.그리고 성유리 또한 에릭의 별장에 흥미를 보이기에 박한빈도 순순히 그녀의 결정을 따랐다.별장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모습을 봤다.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고 비록 에릭이 사전에 연락을 했지만 어떤 경비 지점에선 차량을 멈추고 확인을 거친 후에야 통과를 허락했다.“자기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누군가 자신을 암살하려 할까 봐 두려워서 저러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설명을 듣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그냥 안전을 위한 거겠죠. 여긴 위험한 곳이니까.”하지만 박한빈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보안이 그렇게 철저하면 뭐 해? 보디가드들이 엉망이니까 너를 연정우가 납치해 갔잖아.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 같으니라고.”성유리가 그를 달래듯 조용히 말했다.“그때 연정우가 초대장을 구해서 들어온 거였어요.”박한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있었다.성유리는 그가 여전히 그때 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이틀 동안, 박한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러나 박한빈이 유서를 작성했다는
“네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어머니한테 말했어. 설령 어머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박한빈 씨가 결국 널 찾아낼 거라고.”“박한빈 씨 수단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어. 그때가 되면 네 어머니가 원하는 평온한 삶도 불가능해질 거라고.”“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내게 네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적어도 지금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연정우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내 행방을 알려준 거란 말이지?”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연정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방금 전의 웃음과는 달랐다.이번에는 한층 더 담담한, 어쩌면 체념이 섞인 듯한 웃음이었다.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갔고 손도 덜덜 떨렸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런 말 해주려고 오늘 일부러 찾아온 건가?”그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발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연정우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는 다시 말했다.“성유리, 너는 나를 냉혹하다고 해도 좋아.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 불러도 좋아. 하지만 내가 평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도 너한테만큼은 아니야!”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했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널 믿었기 때문이야!”“하지만 넌? 나한테서 그토록 많은 걸 가져가고도 아직도 부족해?!”“이제는 날 이렇게까지 짓밟아야 속이 시원해?”“감옥에서조차 편히 지낼 수 없게 하려는 거냐고!”“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어?”잔인하다는 그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연정우 스스로도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