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근데 요새 엄청 바쁘신가 봐요? 몇 달 만에 얼굴 뵙는 것 같아요.”“바쁜 건 아니었어요. 앞으로 자주 올게요.”성유리가 그녀를 향해 웃자 간호사도 오랜만에 보는 성유리가 반가웠는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다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병원 오기 편하라고 일부러 가까운데 집을 맡았기에 성유리는 택시를 타는 대신 우산을 들고 집까지 걸어갔다.그런데 집밖에는 예상외의 인물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온갖 짜증을 부리며 서 있었다.윤청하 역시 성유리를 보았는지 대뜸 말을 걸었다.“드디어 왔네.”보고 싶지 않았던 윤청하의 모습에 성유리는 쌀쌀맞은 말투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이세요?”“네가 집에만 왔어도 내가 여기 올 일은 없었어.”윤청하는 녹슨 집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혼하고 온다는 데가 여기야? 성유리, 너 진짜 미쳤구나!”“제 선택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성유리는 윤청하가 이곳을 탐탁지 않아 해서 문도 안 열고 밖에서 기다렸다는 걸 알기에 굳이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다.윤청하는 그런 성유리를 아니꼽게 보며 한숨을 쉬었다.“병원에서 온 거지? 가서 그 여자 봤어?”“네.”“성유리, 너 생각 잘해. 성씨 집안에 안 들어오면 넌 병원비도 못 내!”“알아요.”“아는데 왜...”“용건만 말씀하세요.”부모님이 정말로 제 걱정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니란 걸 성유리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집사가 전화할 때부터 집에 자신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는 것은 예상했었기에 뭐 그간의 정을 나눌 마음도 없었던 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에 윤청하도 입을 열려고 했는데 하필 3층 계단 입구에 있는 집이라서 내려가고 올라가는 사람마다 그들 모녀를 한 번씩 보면서 지나갔다.그냥 한번 보는 거였지만 그게 또 신경 쓰였는지 윤청하는 굳은 표정으로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밖에서 말하라고? 안에도 안 들여보내 줄 거야?”사실 원래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아 성유리는 입술을 말아 물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윤청하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만 유지했다.원래도 작아서 답답하던 집 안에 정적까지 감도니 전체적인 분위가 훅 가라앉는 것 같았다.그런 정적 속에서 윤청하를 바라보는 성유리의 평온한 시선은 윤청하의 심장까지 철렁이게 했다.“너...”“나가요.”그때 한참 만에 입을 연 성유리의 입에서 낯선 말이 튀어나왔다.그에 깜짝 놀란 윤청하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너 방금 뭐라고 했니?”“나가라고요.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도 마세요.”성유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저번에 한 말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면 기자회견도 열게요. 그래서 저는 성씨 집안과 연을 끊었으니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성씨 집안과 상관없다고 말할게요. 그럼 제가 집안 망신시킬까 더 걱정 안 하셔도 되잖아요.”성유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청하가 성유리의 뺨을 내리쳤다.오늘 금방 한 네일의 큐빅이 성유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피까지 흘러내렸지만 성유리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성유리는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고 평온하게 윤청하를 보고 있었다.“너... 너 다 컸다고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니? 성유리, 넌 내 딸이야. 넌...”“나더러 조씨 집안에 시집가라는 거 집안 이익 때문이잖아요.”성유리는 윤청하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그게 아니면 어머니가 이렇게 다급하게 절 찾아오실 리가 없잖아요.”“집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거예요? 됐어요, 어차피 전 그 집안에 원하는 게 없으니까 알고 싶지도 않아요.”“원하는 게 없어? 너를 키우느라 든 돈은 다 헛된 거였니?”“그리고 병원에 누워있는 그 여자, 우리 성씨 집안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어. 아직도 숨 붙어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인데!”“나도 알아, 네가 돌아올 때부터 넌 날 엄마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 너한테는 병원에 누워있는 그 여자밖에 없잖아. 그게 네 유일한 엄마잖아. 우리가 막지 않았으면 병원을 아주 제집 드나들듯 했겠지. 그 여자가 너한테 뭘 해줄
윤청하는 그래도 성유리와 더 얘기해보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생각해봤어?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병원비 만으로도 너 충분히 힘들어질 거야. 네 아빠는...”“어차피 굶어 죽진 않아요.”“이건 어머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앞으로는 그냥 저 같은 딸 찾은 적도 없는 셈 치고 사세요.”“어머니 딸 성유리는 5살 때 이미 죽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그날이요.”결국 윤청하는 밖으로 나갔고 그렇게 한참을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테니스라켓을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중학교 근처의 체육관에서 라켓을 한참이나 휘두른 탓에 에어컨이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을 해서인지 성유리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그 땀방울이 성유리의 앞머리를 적셨고 또 시야도 흐려지게 했다.그때 상대방의 서브를 기다리고 있던 성유리에게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한 게임 해도 될까요?”임시 파트너인 대학생은 남자의 제안에 순순히 라켓을 넘겨주고는 옆으로 가 물을 마셨다.“여기 있을 줄 알았어.”진무열의 목소리에도 성유리는 대답 없이 손에 들린 공만 보고 있었다.“땀도 많이 흘리는 것 같은데 좀 쉬었다 하자.”그런 진무열을 빤히 바라보던 성유리는 상대가 저랑 공을 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뒤 돌아 다른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진무열은 빠르게 달려가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놔.”진무열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다른 쪽으로 갔다.“이 손 놓으라고 진무열!”성유리는 계속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무열의 힘이 너무 세서 끝끝내 손은 빼내지 못했고 오히려 힘을 잘못 주어 진무열의 품에 안겨버리기까지 했다.성유리가 또 빠져나가려 하자 진무열은 그녀를 가둔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힘들면 울어도 돼. 여기 너 보는 사람 없어.”진무열의 말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버렸다.성유리는 천천히 몸에 힘을 풀과 라켓까지 땅에 내려놓았다.이를 악물고 있던 성유리는 운동
박한빈과 성유리가 결혼을 한 지는 2년밖에 안 됐지만 둘이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었는데 지금껏 박한빈은 성유리가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같이 살면서도 우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한 번 본 게 유산했을 때였디.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술이 끝난 뒤였고 밤이 깊어진 탓에 두 집안의 가족들은 모두 돌아갔고 간호사는 옆에서 잠들었는데 성유리만은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었다.성유리는 대성통곡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리 내 눈물을 훔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온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보냈었다.그때 박한빈은 뭘 하고 있었을까.박한빈 본인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리고 성유리 뱃속에서 3개월 남짓 머무른 작은 생명에 대한 기억과 감정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그렇게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성유리가 눈물을 흘리는 걸 다시 본 지금, 그날 병원에서 울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났다.그게 박한빈이 본 중에서는 감정 기복이 제일 심한 성유리였다.물론 특별한 일을 할 때는 제외하고.그런데 아까의 성유리는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몸을 떨어가며 울고 있었다, 그것도 진무열의 품 안에서.“박 대표님?”그때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박한빈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1시간쯤 지나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은 박한빈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성유리와 진무열이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그때 문득 코트 옆 벤치에 있는 초록색 머리끈이 눈에 띄었다.박한빈은 그것이 성유리 것임을 알아봤지만 굳이 가서 챙기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밖으로 나오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회사로 모실까요 대표님?”“그래.”박한빈은 차에 올라탄 뒤 바로 태블릿을 켜 처리해야 할 이메일들을 확인했다.그러던 박한빈이 무엇을 보기라도 한 건지 체육관을 금방 빠져나간 기사에게 말했다.“차 돌려.”“네?”순간 기사는 자신이
[자?][먹을 거 좀 사다가 집 앞에 놨으니까 일어나면 먹어.]나머지 문자들은 송효주가 보낸 것이었다.성유리의 소설연재로 인해 편집장과 싸워도 봤지만 아무래도 연재는 힘들 것 같다며 사과하는 내용의 문자였다.송효주에게 답장하며 현관문을 열어본 성유리는 문에 걸려있는 케익을 보게 되었다.달달한 초코향이 진하게 풍겨오는 그것은 성유리가 제일 좋아하는 케익이었다.성유리가 난데없는 케익을 보고 벙쪄있을 때 진무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깼어?”“응.”“물건은 잘 받았고?”“응.”“일단 냉장고에 넣어둬.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우리 같이...”“무열아.”“오늘 고마웠어, 근데 나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건 안 해도 돼.”제 말을 끊고 들려오는 성유리의 말에 수화기 너머의 진무열은 웃음을 터뜨렸다.“뭐 또 선이라도 그으려고? 전에는 결혼했다고 다가오지 말라더니 이번엔...”“나 이미 성씨 집안에서 나왔어.”“난 지금 성씨 집안 아가씨라는 이름도 없는 상태야. 이런 나를 너희 집안에서 받아줄까?”“너 이번에 힘들게 돌아온 거잖아. 나도 네가 무슨 포부를 갖고 있는지 아니까 말해주는 거야.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성유리의 말에 진무열은 잠깐의 정적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유리야,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여전히... 냉정하네.”“근데 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는 알아?”성유리는 진무열이 가져다준 케익을 보며 답했다.“네가 원하는 게 다른 거라면 난 더더욱 줄 수가 없어.”또 한 번 말문이 막혀버린 진무열은 끝내 그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박한빈을 사랑하는 거지?”하지만 성유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진무열과의 채팅창을 열어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럼 일부러 신경 쓰면서 발뺌하는 것 같아 성유리는 다시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버렸다.오후에 푹 잔 덕분인지 성유리는 밤이 깊어지는 이 시각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어차피
성유리와 윤청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면 성유리와 성시원 사이는 뭐 사이라고 정의할 것도 없었다.성씨 집안 가장이자 한 회사의 회장인 성시원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회사에서의 습관을 집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윤청하가 성유정을 무조건 편애한다면 성시원은 모두에게 똑같이 차가웠다.성시원은 집에 있는 날도 적었기에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다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이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그래서 이번이 성유리가 처음으로 성시원관 단둘이 가지는 식사 자리였다.성유리가 룸에 도착했을 때 성시원은 못마땅한 듯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늦었어요.”성유리의 말에 성시원은 화는 내지 않고 그녀를 한번 보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하지만 성유리는 가만히 서서 테이블에 놓인 접시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성유리와 성시원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개였다.“좀 있다 다른 분들 더 오실 거야.”그런 성유리의 경계를 보아낸 성시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에 일전에 윤청하가 얘기하던 정략결혼이 떠오른 성유리는 목에 힘을 주며 물었다.“조씨 집안 사람들이에요?”“들었어? 네 엄마가 얘기했나 보구나. 그럼 더 잘됐네. 조 회장님이 마침 시간 난다고 하시니까 일단 그 집 아들과 만나보기라도 해.”“싫어요.”“제가 오늘 여기 나온 건 아버지한테 제 뜻을 똑바로 전하기 위해서예요. 더 이상 제 생활에 관여하지 마세요.”“저는 성씨 집안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우스운 짓은 그만하시라고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코웃음을 친 성시원이 입을 열었다.“성유리, 우스운 건 너야.”“너랑 성씨 집안의 관계가 말 한마디로 끊어낼 수 있는 거였어?”“그 여자 병원비만 대면 되는 줄 알았어? 순진하네. 내 말 한마디면 그 여자는 내일 당장이라고 병원에서 쫓겨나. 그리고 온 금성을 다 뒤져도 그 여자를 받아줄 병원은 없을 거야.”약점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성 회장님, 오랜만입니다.”두 집안 어른들은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성유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무언의 협박을 하듯 저를 보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결국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여긴 제 딸아이 성유리라고 합니다.”“따님이 예쁘네요.”조재원이 웃으며 제 아들에게도 눈짓하자 그제야 옆에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안녕하세요, 조경우입니다.”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는 그리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어 유난히 더 단정해 보였다.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와 달리 성유리는 여전히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자자, 다 앉으시죠!”성시원의 말에 다들 자리에 앉았고 성시원은 바로 조재원과 백화점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 분위기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몰랐다면 정말 그냥 양가의 식사 자리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성유리의 맞은편에 앉은 조경우는 아까의 인사 이후로는 성유리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이따금 진중하게 어른들의 대화에 동참하며 얘기를 나눴다.그때 가만히 있던 조재원의 아내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가씬 올해 스물넷이라고 했죠?”“네.”“우리 사실 전에 봤었는데.”“작년에 로즈 호텔에서.”한혜진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그날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첫 결혼기념일 파티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등장한 성유리는 그날 파티의 중심이 되었고 또 아직 결혼을 안 한 금성 재벌 집 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하지만 그날 박한빈이 나타나지 않아서 성유리는 그런 모습을 하고서도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김서영이 나서서 해명했지만 모두들 박한빈이 제 아내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하지만 원체 해명 따윈 하지 않는 박한빈 때문에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그가 그날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본인도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혜진이
다행히 식사 자리는 무사히 끝이 났고 성유리는 보는 눈이 있어 성시원과 같이 차를 타긴 했지만 그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기에 기사더러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에 성시원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성시원에 깜빡이를 켜고 방향을 틀었다.성시원과는 말조차 섞기 싫어진 성유리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려왔다.성유리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성시원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씨 집안 아들이 보낸 것 같은데.”그 말에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어봤고 역시나 조경우가 보낸 문자였디.[오늘 성유리 씨라는 분을 알게 돼서 너무 영광이에요.][혹시 오페라 좋아하세요?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 내일 같이 갈래요?][시간 없으시면 같이 안 가도 되니까 부담 갖지는 마세요.]당돌하진 않지만 목적성이 명확한 요청에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승낙하고 답장을 보냈다.[좋아요.]문자를 보내고 난 성유리는 핸드폰을 성시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이제 만족해요?]아무 대답도 없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졌는지 기사를 보며 말했다.“옆에 차 세워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하지만 기사는 성시원의 명령이 아니라 차를 세우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그에 성유리가 성시원을 쳐다보자 성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세워.”성유리가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성시원이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조경우 씨 사람 좋아.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그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알지?”그 말에 성유리는 웃으며 답했다.“조건이 그렇게 좋으면 성유정더러 결혼하라고 하지 그래요?”성유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성시원은 답을 하지 못했고 성유리 역시 그 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9시가 금방 넘은 지금은 거리의 불빛들이 찬란해지고 사람들의 밤 생활이 막 시작된 시각이었다.길가에 널린 차들이며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영업장이며 모두 생기가 가득했지만 성유리는 이곳은 자신이 있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깨어났어요?” 그녀가 다가오자 박한빈의 얼굴에 서려 있던 감정이 단숨에 사라졌다.“정말 놀랐잖아. 얼마 전 갑자기 응급실 근무에 차출되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빴는데 오늘 간신히 핸드폰을 확인했어. 그리고 처음으로 너에 대한 뉴스를 확인했고.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최정민이 눈가가 붉어진 채로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눈살을 바짝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지?”“너 보러 왔지. 마침 이 방에 아무도 없고 나도 마침 퇴근해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온 거였어. 그런데 네가 딱 깨어난 거야. 물 마실래? 내가 따라줄게.” “나가.” 최정민이 말을 이어가며 자리에 앉으려 하자 박한빈은 단호히 말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최정민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한 말은 못 알아들었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최정민은 처음엔 걱정과 열정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점차 무표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냉정할 필요 있나? 그냥 잠깐 보러 온 건데.”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정민은 그의 태도에 이를 악물며 계속 말했다. “좋아. 내가 괜히 참견했네. 다음엔 안 오면 되잖아? 걱정 마, 너한테서 빌린 돈은 반드시 갚을 테니까. 돈 갚고 나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최정민의 마지막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거지? 또 누가 쟤랑 우리라는 말을 쓴다고?’ 그러나 박한빈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최정민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그것은 박한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성유리는 언제 나간 거지? 혹시 이 상황을 보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박한빈은 급히 핸드폰
그들은 전에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한빈이 손에 힘을 살짝 풀자 성유리는 바로 손을 빼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를 조용히 쳐다보며 그녀가 먹여주기를 기다렸다. 결국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의 요청에 응했고 이번에는 그도 얌전히 협조했기 때문에 한 그릇의 죽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하지만 박한빈은 곧바로 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기대앉아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여 도시락을 정리했다. “전 가볼게요. 푹 쉬세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박한빈이 물었다. “나랑 잠깐만 더 있어 줄래?” 성유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하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그의 곁에 앉았다. 사실 박한빈은 그녀가 거절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조금 지나친 부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성유리는 예상과 달리 박한빈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지금 그녀는 박한빈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20cm 남짓이었다. 병실 안에는 여전히 둘 뿐이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숨결이 매우 뚜렷하게 느껴졌다. 원래 박한빈은 잠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배를 든든히 채워서인지 점점 졸음이 밀려왔고 살짝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박한빈은 그날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그는 성유리가 귀여운 딸을 낳는 장면을 보았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는 박한빈의 품에 안겨 있었고 마치 단단한 끈처럼 그와 성유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단단히 이어진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 아이가 자라난 모습도 꿈에서 보았는데 성유리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꿈속에서 굳게 다짐했다. 딸의 평생을 걱정 없고 평온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성유리는 그의 모습에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죠?” “그런데 사모님 의사 선생님께서 박 대표님은 이미...” 서훈은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눈을 쳐다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박한빈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손에 넣었다. “죽 좀 끓여왔어요.” 그때, 성유리가 말했다. “이거 좀 드시고 푹 쉬세요.”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유리는 자기가 박한빈의 물건을 빼앗아 그가 화가 난 줄 알았고 입술을 오므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셨기 때문에 잘 쉬셔야죠.” “...” 그 시각, 서훈은 조용히 서류를 건네받더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한빈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못 본 척 애써 무시하며 준비해 온 도시락통을 열었다. 도시락통 안에 들어있는 죽의 향긋한 냄새는 병실 가득 퍼졌고 죽이 너무 뜨거운 탓에 성유리는 조금 소분하여 박한빈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순간, 박한빈이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목을 꽉 잡았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몸이 굳어졌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더욱더 힘을 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손목에 고통이 느껴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박한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주는 거야?” 성유리는 그의 물음이 무척이나 웃겼다. 지금 병실 안에는 둘 뿐인데 박한빈을 주려는 것이 아니면 뭐겠는가?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계속 말했다. “안에 독 탔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박한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며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박한빈은 통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 “대표님!” 서훈이 제일 먼저 박한빈의 움직임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달려와 그를 강제로 눕혔다.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박한빈은 서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성유리는 어디 있습니까? 다친 데는 없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은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서훈이 서둘러 대답하자 박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은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훈은 그제야 박한빈의 의도를 깨달은 듯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 사실 어제 하루 종일 사모님께서는 계속 병원에 계셨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쉬시라고 설득해 보냈을 뿐입니다.” 그의 설명은 타당해 보였지만 박한빈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짧게 물었다. “그래요?” 박한빈의 물음에는 서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결혼식 날조차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았다. 만약 성유정이 난입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날 결혼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혹은 만약 성유정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난입했다면 성유리가 그를 따라가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대표님.” 서훈은 박한빈의 눈 속에 서려 있는 냉랭한 감정을 알아보았고 이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게다가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성유리는 인간이 아닌 나무로 만든 인형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결혼식이 두 사람의 예상대로 평화롭고 순조롭게 진행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 그들 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실루엣은 무척이나 야위었지만 그 안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성유리는 그 사람이 달려드는 순간 가장 먼저 자신의 배를 감싸안았고 커다란 공포가 한순간에 성유리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지난번 성유정과 계단에 서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때 성유정은 손을 뻗어 자신을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고 그 순간에도 성유정의 입가에는 지금과 똑같은 광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눈을 천천히 떴고 그제야 성유정이 이미 현장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눌려 있는 것을 보았다. “놔! 박한빈, 내가 널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아? 그리고 너 성유리! 네가 원흉이야! 다 너 때문이야!” “왜 돌아온 거야? 이건 원래 다 내 것이었어! 다 내 거라고! 왜 죽지 않았어? 왜 거기서 사라지지 않았냐고?!”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너희 모두 다 죽어야 한다고!” 성유정은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사를 불러오라고 외쳤다.‘의사를? 왜?’ 성유리는 의사를 왜 불러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린 그녀는 성유정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과일칼을 발견했다. 그 칼에는 누군가의 선명한 피가 묻어 있었다. ‘저 피는 누구 꺼지?’ 성유리는 느리게 돌아가는 사고 속에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굳은 상태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박한빈의 하얀 정장이 이미 빨간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한빈이 그녀를 바
성유리의 웨딩드레스는 맞춤 제작된 것이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해외 최정상급 디자이너를 초청해 손수 바느질로 완성된 작품이었다. 그녀가 현재 임신 중이라는 점을 고려해 디자이너는 드레스 허리 부분에 조절 가능한 끈을 추가해 체형에 맞게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 조명 아래에서 마치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성유리는 마음이 이미 메말라 있는 상태였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본 순간 잠시 멍해졌다. 사진 촬영 외에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고 성유리가 결혼하는 상대마저 같은 남자였다. 첫 번째로 박한빈에게 다가갔던 날, 성유리의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에 그는 마치 하늘의 밝은 달빛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과 갈망을 숨기기만 했다. 그 감정은 어린 시절 먹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솜사탕을 조심스레 숨기는 마음과 비슷했다. 하지만 박한빈과의 결혼 생활 속에서 그녀의 감정은 모두 소진되어 갔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의 관계가 그때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생활 동안 성유리는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녀에게 거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멈추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사모님, 신랑분이 오셨습니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침대에 앉았다. 그들 둘 다 들러리 없이 식을 올리기로 했기 때문에 오늘은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장난스러운 절차도 없었다. 박한빈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성유리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 성유리의 손에는 그가 건넨 부케가 들려 있었는데 연분홍빛 장미에는 투명한 이슬이 맺혀 있어 하나하나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성유리는 부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앞에서 무릎 꿇
“맞아. 하지만 이게 투자라고? 이건 분명 덫이야! 진무열이 일부러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오,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시원의 표정에서 서서히 굳어갔다.“만약 신고를 하신다면 제가 증거 몇 가지를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가며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성시원에게 건넸다. 성시원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는 다 알고 있었단 말이지? 모든 걸 알고도 내가 이 함정에 빠지는 걸 뻔히 지켜본 거야? 딱 오늘을 위해서?”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모든 걸 대변하고 있었다. 성시원은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으며 물었다. “너 미쳤어? 나한테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심지어 성유리를 너한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고!” 박한빈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성시원의 손을 내려다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 저한테 화내셔도 소용없습니다. 돈은 이미 날아갔고 당신이 제 사무실을 부순다고 해도 그 돈은 돌아오지 않아요.” “하지만 제 말대로만 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기회를 드리는 거죠.” 성시원이 박한빈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박한빈은 침착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천성에 배 공장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걸 넘겨드릴 수 있어요. 이후에 꾸준히 자원을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비록 회장님이 원하던 상업적 높이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적어도 실업자는 되지 않게 해드리죠.” 성시원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끝내 붙잡고 있던 손을 서서히 놓았다. 그의 주먹은 여전히 꽉 쥐어있었지만 목소리는 점차 진정이 되는 듯 가라앉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박한빈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이 진무열이 혼자 한 짓일 리가 없죠. 성
성유리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망고나무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 열매가 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키보다 큰 나무가 몇 년 뒤에는 얼마나 장관일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가 되면 난 이 나무를 못 보겠지?’ 성유리는 김서영에게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알려주었고 김서영은 안색이 굳어진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다시 잘 될 확률은 없니?” “네.” “근데 난 네가 떠날 것 같지 않구나.” 김서영이 계속 말했다. “사실 전에 너한테 가라고 했을 때가 제일 좋은 기회였어.” 성유리가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채 무슨 대답을 하려는 찰나,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빈이는 내 아들이야. 나는 누구보다 더 걔를 잘 알아.” “지금 너희 둘 사이가 나쁘다 해도 한빈이는 너한테 집착할 거야. 절대 유리 너를 떠나게 하지 않을 거고.”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설령 너희 둘 사이에 원한과 원망의 감정만 남아있다고 해도 말이다.” 김서영은 하려던 말들을 다 내뱉었지만 성유리는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필경 어젯밤 박한빈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심한 말을 다 했기 때문에. 상황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서영의 말은 다 사실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다음 날 저녁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 심지어는 손에 케이크 하나를 든 채로 말이다.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박한빈을 쳐다만 보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감정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휙 돌려 성유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먼저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내가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린 평소대로 살 수 있다고.” “그럼 계속 살던 대로 살자. 우리 둘의 결혼인 이미 한번 실패로 끝을 봤는데 한 번 더 실패하면... 금성에 있는 사람들 입에 우스운 이야깃거리로 남을 테니까.”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 관계라고 해도 같이 살아가자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해가 떠 있는 상태였다. 내리던 눈은 이미 멈췄지만 방 안에는 여전히 성유리 홀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박한빈이 오늘 자신을 찾아와 얘기를 나눌 줄 알았다. 성유리가 아는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이런 일을 질질 끌지는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을 더 끌면 끌수록 박한빈은 견딜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성유리의 이번 추측은 제대로 빗나갔다. 그날, 박한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쯤에 김서영이 전화를 걸어 교외에 있는 별장으로 오라는 말까지 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의도를 몰랐지만 다음 날, 결국 그곳으로 향했다. 아마 생활환경이 바뀌어서일까? 김서영의 모습은 전보다 더 생기 있고 건강해 보였다. 게다가 늘 입고 있던 우아한 원피스와 액세서리가 아닌 편안 차림으로 머리까지 낮게 묶고 있는 김서영은 보기에 전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아니, 젊어진 게 아니라 생동해졌다. 성유리는 늘 김서영이 그림 속에 갇혀있는 여인인 줄 알았지만 편하게 있는 김서영을 보니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그녀가 별장에 도착했을 때, 김서영은 정원에서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끙끙거리며 땅을 파고 있는 김서영을 보던 성유리가 다가가 도움을 주려 했다. 그제야 성유리를 발견한 김서영이 고개를 들더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왔니?” “네.” “다른 사람이 선물로 준 망고 나문데 열매가 맺히면 그렇게 맛있다더라. 내년이면 열매가 맺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려고. 아, 맞다! 유리 너도 망고 좋아하지 않니?” 성유리는 스스로도 언제부터 망고를 즐겨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서영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박한빈이 전에 사줬던 망고 케이크가 떠올랐다. ‘케이크 좀 먹었다고 내가 망고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가?’ 성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 시간에 나무 심으면 안 되지 않나요?” “그렇지? 근데 누가 그러더라. 정성껏 나무를 심으면 시간이 늦어도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