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근데 요새 엄청 바쁘신가 봐요? 몇 달 만에 얼굴 뵙는 것 같아요.”“바쁜 건 아니었어요. 앞으로 자주 올게요.”성유리가 그녀를 향해 웃자 간호사도 오랜만에 보는 성유리가 반가웠는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다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병원 오기 편하라고 일부러 가까운데 집을 맡았기에 성유리는 택시를 타는 대신 우산을 들고 집까지 걸어갔다.그런데 집밖에는 예상외의 인물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온갖 짜증을 부리며 서 있었다.윤청하 역시 성유리를 보았는지 대뜸 말을 걸었다.“드디어 왔네.”보고 싶지 않았던 윤청하의 모습에 성유리는 쌀쌀맞은 말투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이세요?”“네가 집에만 왔어도 내가 여기 올 일은 없었어.”윤청하는 녹슨 집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혼하고 온다는 데가 여기야? 성유리, 너 진짜 미쳤구나!”“제 선택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성유리는 윤청하가 이곳을 탐탁지 않아 해서 문도 안 열고 밖에서 기다렸다는 걸 알기에 굳이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다.윤청하는 그런 성유리를 아니꼽게 보며 한숨을 쉬었다.“병원에서 온 거지? 가서 그 여자 봤어?”“네.”“성유리, 너 생각 잘해. 성씨 집안에 안 들어오면 넌 병원비도 못 내!”“알아요.”“아는데 왜...”“용건만 말씀하세요.”부모님이 정말로 제 걱정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니란 걸 성유리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집사가 전화할 때부터 집에 자신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는 것은 예상했었기에 뭐 그간의 정을 나눌 마음도 없었던 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에 윤청하도 입을 열려고 했는데 하필 3층 계단 입구에 있는 집이라서 내려가고 올라가는 사람마다 그들 모녀를 한 번씩 보면서 지나갔다.그냥 한번 보는 거였지만 그게 또 신경 쓰였는지 윤청하는 굳은 표정으로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밖에서 말하라고? 안에도 안 들여보내 줄 거야?”사실 원래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아 성유리는 입술을 말아 물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윤청하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만 유지했다.원래도 작아서 답답하던 집 안에 정적까지 감도니 전체적인 분위가 훅 가라앉는 것 같았다.그런 정적 속에서 윤청하를 바라보는 성유리의 평온한 시선은 윤청하의 심장까지 철렁이게 했다.“너...”“나가요.”그때 한참 만에 입을 연 성유리의 입에서 낯선 말이 튀어나왔다.그에 깜짝 놀란 윤청하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너 방금 뭐라고 했니?”“나가라고요.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도 마세요.”성유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저번에 한 말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면 기자회견도 열게요. 그래서 저는 성씨 집안과 연을 끊었으니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성씨 집안과 상관없다고 말할게요. 그럼 제가 집안 망신시킬까 더 걱정 안 하셔도 되잖아요.”성유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청하가 성유리의 뺨을 내리쳤다.오늘 금방 한 네일의 큐빅이 성유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피까지 흘러내렸지만 성유리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성유리는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고 평온하게 윤청하를 보고 있었다.“너... 너 다 컸다고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니? 성유리, 넌 내 딸이야. 넌...”“나더러 조씨 집안에 시집가라는 거 집안 이익 때문이잖아요.”성유리는 윤청하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그게 아니면 어머니가 이렇게 다급하게 절 찾아오실 리가 없잖아요.”“집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거예요? 됐어요, 어차피 전 그 집안에 원하는 게 없으니까 알고 싶지도 않아요.”“원하는 게 없어? 너를 키우느라 든 돈은 다 헛된 거였니?”“그리고 병원에 누워있는 그 여자, 우리 성씨 집안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어. 아직도 숨 붙어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인데!”“나도 알아, 네가 돌아올 때부터 넌 날 엄마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 너한테는 병원에 누워있는 그 여자밖에 없잖아. 그게 네 유일한 엄마잖아. 우리가 막지 않았으면 병원을 아주 제집 드나들듯 했겠지. 그 여자가 너한테 뭘 해줄
윤청하는 그래도 성유리와 더 얘기해보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생각해봤어?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병원비 만으로도 너 충분히 힘들어질 거야. 네 아빠는...”“어차피 굶어 죽진 않아요.”“이건 어머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앞으로는 그냥 저 같은 딸 찾은 적도 없는 셈 치고 사세요.”“어머니 딸 성유리는 5살 때 이미 죽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그날이요.”결국 윤청하는 밖으로 나갔고 그렇게 한참을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테니스라켓을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중학교 근처의 체육관에서 라켓을 한참이나 휘두른 탓에 에어컨이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을 해서인지 성유리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그 땀방울이 성유리의 앞머리를 적셨고 또 시야도 흐려지게 했다.그때 상대방의 서브를 기다리고 있던 성유리에게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한 게임 해도 될까요?”임시 파트너인 대학생은 남자의 제안에 순순히 라켓을 넘겨주고는 옆으로 가 물을 마셨다.“여기 있을 줄 알았어.”진무열의 목소리에도 성유리는 대답 없이 손에 들린 공만 보고 있었다.“땀도 많이 흘리는 것 같은데 좀 쉬었다 하자.”그런 진무열을 빤히 바라보던 성유리는 상대가 저랑 공을 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뒤 돌아 다른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진무열은 빠르게 달려가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놔.”진무열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다른 쪽으로 갔다.“이 손 놓으라고 진무열!”성유리는 계속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무열의 힘이 너무 세서 끝끝내 손은 빼내지 못했고 오히려 힘을 잘못 주어 진무열의 품에 안겨버리기까지 했다.성유리가 또 빠져나가려 하자 진무열은 그녀를 가둔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힘들면 울어도 돼. 여기 너 보는 사람 없어.”진무열의 말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버렸다.성유리는 천천히 몸에 힘을 풀과 라켓까지 땅에 내려놓았다.이를 악물고 있던 성유리는 운동
박한빈과 성유리가 결혼을 한 지는 2년밖에 안 됐지만 둘이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었는데 지금껏 박한빈은 성유리가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같이 살면서도 우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한 번 본 게 유산했을 때였디.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술이 끝난 뒤였고 밤이 깊어진 탓에 두 집안의 가족들은 모두 돌아갔고 간호사는 옆에서 잠들었는데 성유리만은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었다.성유리는 대성통곡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리 내 눈물을 훔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온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보냈었다.그때 박한빈은 뭘 하고 있었을까.박한빈 본인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리고 성유리 뱃속에서 3개월 남짓 머무른 작은 생명에 대한 기억과 감정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그렇게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성유리가 눈물을 흘리는 걸 다시 본 지금, 그날 병원에서 울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났다.그게 박한빈이 본 중에서는 감정 기복이 제일 심한 성유리였다.물론 특별한 일을 할 때는 제외하고.그런데 아까의 성유리는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몸을 떨어가며 울고 있었다, 그것도 진무열의 품 안에서.“박 대표님?”그때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박한빈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1시간쯤 지나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은 박한빈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성유리와 진무열이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그때 문득 코트 옆 벤치에 있는 초록색 머리끈이 눈에 띄었다.박한빈은 그것이 성유리 것임을 알아봤지만 굳이 가서 챙기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밖으로 나오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회사로 모실까요 대표님?”“그래.”박한빈은 차에 올라탄 뒤 바로 태블릿을 켜 처리해야 할 이메일들을 확인했다.그러던 박한빈이 무엇을 보기라도 한 건지 체육관을 금방 빠져나간 기사에게 말했다.“차 돌려.”“네?”순간 기사는 자신이
[자?][먹을 거 좀 사다가 집 앞에 놨으니까 일어나면 먹어.]나머지 문자들은 송효주가 보낸 것이었다.성유리의 소설연재로 인해 편집장과 싸워도 봤지만 아무래도 연재는 힘들 것 같다며 사과하는 내용의 문자였다.송효주에게 답장하며 현관문을 열어본 성유리는 문에 걸려있는 케익을 보게 되었다.달달한 초코향이 진하게 풍겨오는 그것은 성유리가 제일 좋아하는 케익이었다.성유리가 난데없는 케익을 보고 벙쪄있을 때 진무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깼어?”“응.”“물건은 잘 받았고?”“응.”“일단 냉장고에 넣어둬.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우리 같이...”“무열아.”“오늘 고마웠어, 근데 나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건 안 해도 돼.”제 말을 끊고 들려오는 성유리의 말에 수화기 너머의 진무열은 웃음을 터뜨렸다.“뭐 또 선이라도 그으려고? 전에는 결혼했다고 다가오지 말라더니 이번엔...”“나 이미 성씨 집안에서 나왔어.”“난 지금 성씨 집안 아가씨라는 이름도 없는 상태야. 이런 나를 너희 집안에서 받아줄까?”“너 이번에 힘들게 돌아온 거잖아. 나도 네가 무슨 포부를 갖고 있는지 아니까 말해주는 거야.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성유리의 말에 진무열은 잠깐의 정적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유리야,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여전히... 냉정하네.”“근데 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는 알아?”성유리는 진무열이 가져다준 케익을 보며 답했다.“네가 원하는 게 다른 거라면 난 더더욱 줄 수가 없어.”또 한 번 말문이 막혀버린 진무열은 끝내 그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박한빈을 사랑하는 거지?”하지만 성유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진무열과의 채팅창을 열어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럼 일부러 신경 쓰면서 발뺌하는 것 같아 성유리는 다시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버렸다.오후에 푹 잔 덕분인지 성유리는 밤이 깊어지는 이 시각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어차피
성유리와 윤청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면 성유리와 성시원 사이는 뭐 사이라고 정의할 것도 없었다.성씨 집안 가장이자 한 회사의 회장인 성시원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회사에서의 습관을 집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윤청하가 성유정을 무조건 편애한다면 성시원은 모두에게 똑같이 차가웠다.성시원은 집에 있는 날도 적었기에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다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이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그래서 이번이 성유리가 처음으로 성시원관 단둘이 가지는 식사 자리였다.성유리가 룸에 도착했을 때 성시원은 못마땅한 듯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늦었어요.”성유리의 말에 성시원은 화는 내지 않고 그녀를 한번 보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하지만 성유리는 가만히 서서 테이블에 놓인 접시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성유리와 성시원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개였다.“좀 있다 다른 분들 더 오실 거야.”그런 성유리의 경계를 보아낸 성시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에 일전에 윤청하가 얘기하던 정략결혼이 떠오른 성유리는 목에 힘을 주며 물었다.“조씨 집안 사람들이에요?”“들었어? 네 엄마가 얘기했나 보구나. 그럼 더 잘됐네. 조 회장님이 마침 시간 난다고 하시니까 일단 그 집 아들과 만나보기라도 해.”“싫어요.”“제가 오늘 여기 나온 건 아버지한테 제 뜻을 똑바로 전하기 위해서예요. 더 이상 제 생활에 관여하지 마세요.”“저는 성씨 집안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우스운 짓은 그만하시라고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코웃음을 친 성시원이 입을 열었다.“성유리, 우스운 건 너야.”“너랑 성씨 집안의 관계가 말 한마디로 끊어낼 수 있는 거였어?”“그 여자 병원비만 대면 되는 줄 알았어? 순진하네. 내 말 한마디면 그 여자는 내일 당장이라고 병원에서 쫓겨나. 그리고 온 금성을 다 뒤져도 그 여자를 받아줄 병원은 없을 거야.”약점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성 회장님, 오랜만입니다.”두 집안 어른들은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성유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무언의 협박을 하듯 저를 보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결국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여긴 제 딸아이 성유리라고 합니다.”“따님이 예쁘네요.”조재원이 웃으며 제 아들에게도 눈짓하자 그제야 옆에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안녕하세요, 조경우입니다.”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는 그리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어 유난히 더 단정해 보였다.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와 달리 성유리는 여전히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자자, 다 앉으시죠!”성시원의 말에 다들 자리에 앉았고 성시원은 바로 조재원과 백화점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 분위기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몰랐다면 정말 그냥 양가의 식사 자리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성유리의 맞은편에 앉은 조경우는 아까의 인사 이후로는 성유리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이따금 진중하게 어른들의 대화에 동참하며 얘기를 나눴다.그때 가만히 있던 조재원의 아내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가씬 올해 스물넷이라고 했죠?”“네.”“우리 사실 전에 봤었는데.”“작년에 로즈 호텔에서.”한혜진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그날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첫 결혼기념일 파티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등장한 성유리는 그날 파티의 중심이 되었고 또 아직 결혼을 안 한 금성 재벌 집 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하지만 그날 박한빈이 나타나지 않아서 성유리는 그런 모습을 하고서도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김서영이 나서서 해명했지만 모두들 박한빈이 제 아내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하지만 원체 해명 따윈 하지 않는 박한빈 때문에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그가 그날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본인도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혜진이
다행히 식사 자리는 무사히 끝이 났고 성유리는 보는 눈이 있어 성시원과 같이 차를 타긴 했지만 그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기에 기사더러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에 성시원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성시원에 깜빡이를 켜고 방향을 틀었다.성시원과는 말조차 섞기 싫어진 성유리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려왔다.성유리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성시원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씨 집안 아들이 보낸 것 같은데.”그 말에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어봤고 역시나 조경우가 보낸 문자였디.[오늘 성유리 씨라는 분을 알게 돼서 너무 영광이에요.][혹시 오페라 좋아하세요?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 내일 같이 갈래요?][시간 없으시면 같이 안 가도 되니까 부담 갖지는 마세요.]당돌하진 않지만 목적성이 명확한 요청에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승낙하고 답장을 보냈다.[좋아요.]문자를 보내고 난 성유리는 핸드폰을 성시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이제 만족해요?]아무 대답도 없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졌는지 기사를 보며 말했다.“옆에 차 세워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하지만 기사는 성시원의 명령이 아니라 차를 세우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그에 성유리가 성시원을 쳐다보자 성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세워.”성유리가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성시원이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조경우 씨 사람 좋아.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그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알지?”그 말에 성유리는 웃으며 답했다.“조건이 그렇게 좋으면 성유정더러 결혼하라고 하지 그래요?”성유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성시원은 답을 하지 못했고 성유리 역시 그 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9시가 금방 넘은 지금은 거리의 불빛들이 찬란해지고 사람들의 밤 생활이 막 시작된 시각이었다.길가에 널린 차들이며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영업장이며 모두 생기가 가득했지만 성유리는 이곳은 자신이 있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
하지만 진행자는 여전히 그 화제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관련 질문이 나올 때마다 성유리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다른 억측들까지 차단해 버렸다.처음부터 끝까지 성유리는 단 한 번도 박한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성유리가 비협조적이라고 느껴졌던 탓인지 1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는 30분도 진행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버렸다.인터뷰가 끝난 뒤, 성유리는 송효주에게서 사과의 메시지를 받았다.“나도 저쪽에서 이런 의도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저 사람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지금 주인공들 인기가 어느 정도인데, 캐릭터 얘기나 할 것이지 왜 네 사생활까지 다 언급하고 난리래?”송효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송효주의 연락에도 아무런 감흥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한참이나 말을 이어나가던 송효주는 아무 대답 없는 성유리의 반응에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혹시... 화 난 거야?”“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네.”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일을 마친 그녀는 다시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화가 나는 것도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오래 기억될 정도도 아니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거의 다 까먹어 버렸고 뒤늦게 뉴스를 통해 자신이 어제 진행했던 라이브 방송의 채널이 정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정지된 그 채널은 무려 출판사의 공식 계정이었다.곧 출판사에서도 다른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전날 진행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사적인 감정으로 무례한 행동을 감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과, 어제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 진행자와는 계약을 해지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성유리는 어젯밤 진행했던 인터뷰 질문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식사를 이어나갔다.잠시 후, 앞집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어젯밤보다는 훨씬 조용하
두 팬덤의 싸움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만 제작사와 영상 플랫폼 측은 오히려 그런 팬덤 싸움을 반기는 모양이었다.요즘은 다들 그렇듯 차라리 시끄럽게 이슈가 되는 게 조용히 묻히기보다는 수익성이 더 크니 그럴 만도 했다.그러던 중, 편집자가 성유리에게 연락해 원고를 요청해왔다.최근 두 달 동안 성유리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낸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곳에서 들어오는 작은 일만 맡아왔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만큼, 회사에서는 이 틈을 타 성유리를 한껏 밀어줄 계획이었다.“요즘은 시간도 없고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없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난 이 말만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겠어, 하늘이도 아직 어리고. 그렇다고 이 어린 애가 하루아침에 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알겠어, 신작은 없다 치고, 인터뷰나 하나 잡아줄게. 이 정도는 괜찮지?”“무슨 인터뷰인데?”“웹에서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인터뷰야. 전에 우리랑 협업한 적 있는 출판사인데, 드라마가 인기를 끄니까 원작자라도 인터뷰해서 판매량 좀 올릴 생각인가 봐.”성유리는 대충 들어주는 척만 하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성유리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걱정 마. 언니만의 원칙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언니 얼굴이 세상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거야. 이번 인터뷰도 굳이 얼굴을 노출할 필요는 없어.”그 말에 성유리는 뒤늦게 마음을 누그러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오케이, 그럼 답장 보내둔다? 구체적인 시간은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해서 알려줄게.”편집자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성유리도 하늘이의 생체 리듬을 지켜주며 일을 해야 했던 탓에 인터뷰 시간은 밤 11시로 정해두고 아이가 완전히 잠든 후에야 인터뷰를 진행했다.성유리는 진행자가 단순히 드라마의 구상이나 여자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대한 질문만 할 것이라 예상
점심시간이 다 되었지만 앞집에서는 계속 이삿짐을 옮기고 있었다.성유리는 현관문을 꼭 잠가두었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꽤 시끄러웠고, 새로운 입주자는 집을 다시 리모델링이라도 하는지 짐 옮기는 소리와 공사 소리까지 계속해서 들려왔다.피곤했던 성하늘도 소음 때문에 침대에서 한참이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성유리는 그런 성하늘의 곁에 누워 아이의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성하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성유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잠이 안 와.”“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잠이 올 거야.”성유리의 말에 성하늘은 순순히 눈을 감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엄마, 그래도 잠이 안 와.”“그럼 뭘 하고 싶은데?”“그림도 그리고 싶고, 책도 보고 싶어.”“그러니까, 자기 싫다는 뜻이네?”그 말에 성하늘은 민망한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무슨 말을 더 꺼내려던 그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싫다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성하늘은 바로 성유리의 품에 파고들어 그녀의 팔을 꽉 껴안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그런 아이의 반응에 성유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손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괜찮아, 엄마가 나가서 확인해 볼게.”“안돼, 엄마. 나가지 마.”성하늘은 그런 성유리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현관문 앞까지 가 스코프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바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한 건장한 남자가 문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어린 딸과 단둘이 살다 보니 성유리의 경계심은 자연스레 높아져 있었다. 그녀는 현관문을 꼭 잠근 채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무슨 일이시죠?”“저희 대표님께서 이삿짐 때문에 시끄럽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케이크라도 드리고 싶다
“그렇긴 하죠. 노인 네 명에 어린애 둘 딸린 집인데 부부 중 한 명은 해고당하고 다른 한 명은 월급이 깎였다잖아요. 집 안 팔면 못 살죠.”“그러게요. 그러니까 직장을 들어가도 대기업으로 들어가라고 하잖아요. 대우도 좋고 안정적이니까!”“맞아요, 맞아.”“맞다, 하늘이 엄마. 그 친구분... 은 회사 운영하시죠? 요즘 어떻게 지낸대요?”성유리는 곁에서 그녀들의 대화를 한참이나 듣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수다 화제가 성유리로 바뀔 때,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성유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되물었다.“어떤 친구요?”“그냥...”“하늘이 아빠요!”곁에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곧이어 후회가 들었는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그 사람... 하늘이 아빠 맞죠?”“그 사람 일이라면 저도 잘 몰라요.”성유리의 대답은 단호했다.“이혼한 지도 꽤 됐고, 연락도 거의 안 하고 지내니까요.”“그래요? 그렇다고 하기엔... 꽤 자주 오는 것 같던데요? 혹시 모르죠, 그분이 아직도 유리 씨한테 관심이 있을지.”“제가 보기엔 두 분 꽤 어울리는 것 같던데요! 저희 시어머니도 그러셨어요. 하늘이가 예쁜 건 다 하늘이 부모님이 예쁘고 잘생겨서라고요!”“저희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에요.”성유리가 대답했다.얼핏 듣기엔 평범했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분명 약간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갑자기 날카로워진 성유리의 말투에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엄마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윽고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는 애 밥 차려줘야 해서요, 먼저 가 볼게요.”“저... 저기, 하늘이 엄마. 다음에 그 친구분 또 오시면 저한테도 얘기 좀 해줄래요? 우리 남편이 할 얘기가 했다고 그래서...”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나갔다.하늘이도 충분히 놀았는지 성유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얌전히 그녀의 손을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성유리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거침없는 성유리의 행동에 오히려 전화를 건 쪽에서 멈칫하는 듯 보였다.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물었다.“아까 전화 왜 걸었어?”박한빈은 어떻게든 성유리의 입에서 먼저 어떤 말이든 나오길 기다렸고 성유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것 역시 박한빈의 일관적인 성격이었다.무슨 일이 있든 항상 타인이 먼저 다가가야만 했다.박한빈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돌려줄지 고민해 보는 사람.심지어 자신이 주는 그 ‘조금’의 것도 마치 대단한 은혜인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전형적인 이기주의자 마인드가 아닐 수 없다.“왜 말이 없어?”박한빈은 성유리의 그 짧은 침묵도 못 참고 성급하게 그녀를 재촉해댔다.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 그냥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성유리의 말과는 다르게 박한빈은 그녀의 말투에서 사과의 기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결국, 차가운 웃음을 터뜨린 박한빈이 물었다.“성유리,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예요.”성유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어차피 이 일도 다 대표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대표님이 아파트단지까지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제가 대표님한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대표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제가 무슨 오해를 하든, 그건 다 대표님 자업자득이죠. 그래도 오해했던 건 사과할게요.”성유리는 단숨에 마음속에 있던 말을 쏟아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의 기복도 없이 아주 차분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차분한 목소리 속에서 단 하나의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안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사과의 뜻이 담긴 그녀의 말 속에도 그저 형식적인 인사말에 불과해 보였다.성유리는 박
그 탓에 성유리는 자신의 휴대폰이 어느덧 잠잠해졌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모녀가 아파트단지에 도착했을 때는 몰려있던 사람들이 전부 흩어진 후였고 남아 있던 사람들의 손에는 새로운 장난감이 들려있었다.그 모습을 보던 성유리가 잠시 멈칫했다.“하늘이 엄마, 고마워요.”누군가가 성유리에게 다가와 말했다.“그... 단톡방에서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요. 사람들이 정말 못돼 먹었죠.”“그러게나 말이에요. 공짜에 눈이 멀어도 유분수지.”이윽고 또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 맞장구를 쳐주었다.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물었다.“이 물건들... 다 누가 보낸 거예요?”“당연히 한빈 씨가 보내준 거죠! 일 때문에 직접 못 온다고 비서님이 대신 갖고 왔더라고요. 설마 얘기 못 들었어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다소 거칠어지기 시작했다.“그게... 대체 언제였죠?”“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받아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으니까 아마 11시쯤이었을 걸요?”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가 12시쯤이었다.그 말인즉슨 두 사람이 통화하고 있었을 때는 이미 박한빈이 물건을 보낸 뒤였다는 뜻이 된다.성유리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겨우 입꼬리를 살짝 올린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저희가 더 고맙죠. 애들이 얼마나 기뻐했는데요. 그나저나, 유리 씨 남편분... 아니, 전 남편분은 무슨 일 하세요? 장난감 사업이라고 하시나?”“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는데, 꽤 잘생겼어요. 연예인 아니에요?”성유리는 그녀들의 말을 모조리 무시한 채 고개만 살짝 까딱이고는 성하늘과 함께 자리를 떴다.아이와 함께 집으로 올라오자 관리사무소에서 입주민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공지에는 최근 이틀간 아파트단지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전해 들었으며, 내일부터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그 공지를 확인한 입
성유리는 단체 채팅방 알림을 차단했지만 여전히 개인 메시지가 계속 들어왔다.발송자들은 다 단지에서 알게 된 아이 엄마들이 보내온 메시지였다.[박 대표님 오늘 언제 오시는지 아세요?][오늘 안 오신다면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이들이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는데요.]성유리는 무표정으로 그 메시지들을 바라보았다.사실, 박한빈이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모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것.박한빈은 언제나 그런 일에 능숙했다.그녀가 이 단지에서 겨우 찾아낸 평온한 삶은 박한빈의 등장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박한빈에게 그 돈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결국 그는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려 하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성유리와 하늘이의 안정된 일상을 깨뜨리고 있었다.“엄마, 엄마!”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이내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엄마 햄버거는 맛없어?”하늘이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에 들린 음식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 그냥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너 많이 먹어.”“엄마 오늘 이상해.”하늘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다시 고개를 숙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맞은편에 있던 성유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박한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서 전화가 먼저 걸려 왔다.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아파트 단지에 있어?”그의 첫 마디는 성유리의 행방을 묻는 말이었다.“미안해. 오늘은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네.”“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두 번째 말에 바로 반박했다.“그런 말은 박한빈 씨가 약속했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게 맞지 않나요?”“약속? 난 누구랑 약속한 적 없는데.”“그럼 왜 저한테 전화하세요?”“혹시 기다리고 있을까 봐...”“전 당신을 기다린 적
하늘이의 단호한 대답에 성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그럼 우리 이제 집에 가자.”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뒤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와 흥분된 목소리는 마치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그런데 다음 날, 박한빈이 또 아파트 내에 나타났다.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몇 명의 보디가드도 함께였고 그들의 손에는 묵직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어제와 달리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이들이 먼저 우르르 몰려들었고 심지어는 옆 단지에서 소문을 듣고 온 아이들까지 있었다.박한빈은 찾아오는 아이들이 누구인지도 구분하지 않은 채 아이들이 오기만 하면 모두에게 선물을 나눠줬다.오늘은 그가 직접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됐기에 성유리의 반응을 살필 시간도 있었다.그러나 선물을 나눠주던 박한빈은 금세 깨달았다. 성유리와 하늘이는 이미 떠나버렸단 사실을.‘언제 떠난 거지?’그로부터 셋째 날, 넷째 날이 지나갔고 다섯째 날이 될 무렵 박한빈은 더 이상 아파트에 나타나지 않았다.하지만 며칠간의 무료 선물이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충분히 인상적이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단지 아래에 모여 있었다.아이들은 기대에 들떠 있었고 부모들은 아이들만큼이나 박한빈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성유리는 그동안 하늘이를 데리고 단지 아래가 아닌 근처 어린이 공원으로 나가곤 했다.그날도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어린이 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다.그런데 단지 사람들 중 일부가 그녀와 박한빈의 관계를 알아냈는지 성유리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오늘 박 대표님은 언제 오세요?”성유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도 몰라요.”“아니, 어떻게 몰라요? 남편 일인데 모를 리가 있나요?”“저희는 이미 이혼했잖아요.”그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참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두 분은 전혀 이혼한 사람들 같지 않은데? 박 대표님 같은 좋은 사람을 왜 용서하지 않는 거예요?”“맞아요! 박 대표님 같은 분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