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그는 송석석이 어떻게 피했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그저 긴 칼이 공중에서 빗나갔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마차의 풍등이 어두운 빛을 발산하며 송석석의 얼굴을 비췄는데,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워 보였다. 송석석이 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순간적으로 그의 피부를 스쳐 지나가며 오싹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오싹함은 단지 기분 뿐만이 아니라 통증까지 전해지게 했다.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송석석의 채찍이 공중에서 그를 정확히 내려 찍어버렸다. 순간 채찍 끝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몸을 돌려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얼굴을 재빨리 가렸다.그는 벽 위로 올라가 몸을 돌렸는데, 그때 붉은 채찍은 마치 독사처럼 왼쪽 사사의 목을 감아 버렸다. 송석석은 힘을 주어 채찍을 당기며 그를 오른쪽으로 날려버리고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그의 사사를 마차 앞으로 끌고갔다.곧 사사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는 손을 벗어났고 무기가 떨어지기 전 송석석은 발끝으로 그것을 날려 보냈다. 칼은 공중을 가르며 비행했고 그녀는 그 사사를 끌고 빠르게 공중으로 뛰어올라 칼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 칼은 또 다른 사사의 배꼽을 정확히 찔렀다.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정영수는 가까운 거리에서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지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송석석이지, 자신들이 아니라는 사실을.그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두르며 채찍을 끊으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사는 정말 죽게 될 것이다. 송석석은 채찍을 휘두르며 사람을 공중으로 던졌는데 그 속도는 정영수를 다시금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는 방향을 급히 바꾸어 사사를 실수로라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했다.하지만 방향을 바꾼 순간 그의 큰 칼엔 피가 묻었고 사사의 머리는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송석
냉옥 장공주는 회동관에 돌아왔지만 수란석과 정영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무언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수란석은 그녀의 작은 외삼촌으로, 수가에서 가장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성급하고 무모했다."양안을 불러라!" 그녀는 여관에게 명령했다. "당장!"양안은 내각 대학사이자 수란석의 처남이다. 두 사람은 상국에 오는 내내 함께 세밀히 논의했기에 양안은 그가 오늘 밤정영수와 함께 무엇을 하러 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양안은 방으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렸다.그는 이번 작전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준비된 계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떠날 때 수란석이 이미 계획을 반쯤 성공시킨 것을 보고는 북명왕을 데려갔다.북명왕을 속여 데려가기만 하면 송석석을 잡는 것은 매우 쉬웠다. 이번 외출에는 단지 마차 한 대와 하녀 두 명, 그리고 북명왕 부부만 있었으므로, 북명왕이 수란석에 의해 데려가졌다면 송석석이 아무리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정영수와 회왕이 보낸 사사들 앞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다.따라서, 이 작전은 확실히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양학사, 장공주께서 부르십니다." 문밖에서 향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안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이번 일은 냉옥 장공주에게 숨기려 했지만, 이미 실행에 옮겨졌고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았으므로 이제는 알려야 했다. 장공주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그저 상국의 적절한 설명을 원했다. 또한, 전쟁이 있어야만 진짜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어떻게 새 경계선을 정하고 사과와 배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향병을 따라 장공주가 머무는 별실로 향했다. 등불 아래의 장공주의 얼굴은 굳어 있었는데 오늘 밤 궁중 연회 때의 온화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수란석과 정영수는 어디 간 게요? 지금 무엇을 몰래 꾸미고 있는 것이오?" 그가 예의를 차리
양안은 승리가 확실해졌다는 것과 황제의 명령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감이 생겨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장공주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자신의 나라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은 옳지 않습니다. 저희는 두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이 물러나기를 원하면 당연히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만약 그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결국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북명왕비를 잡는 것 역시 이방이 선태자에게 했던 방식과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 두 군이 전쟁을 벌이면 북명왕비는 성릉관 전장에서 포로로 나타날 것이고 소가는 그대로 물러날 것입니다. 이는 수란키 대장군이 선태자를 위해 체결했던 그 부끄러운 조약처럼 될 것입니다."장공주는 이를 듣고 격노했다. "어리석기 그지없소! 그때 수란키 대장군이 그렇게 한 이유는 이방이 우리나라의 태자를 잡았기 때문이오. 당시 황제의 병세가 위중하고 내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국본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나라가 뒤집어질 수도 있었소. 그런데 북명왕비와 태자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단 말이오? 나는 그대들이 너무 어리석다고 생각하오. 내 말이 틀렸소? 그대들은 송석석에 대해 알고 있소? 소가의 장군에 대해 알고 있소? 소가군에 대해서는 아냐는 말이오!"양안은 송석석이 대단하다는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송회안 대장군이고 그녀도 남강 전장에서 싸운 경험이 있지만, 결국 여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영수와 회왕의 사사들이 그들을 도와줄 테니 실패할 일은 없을 것이다."물론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무작정 나선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준비한 계획이 있단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북명왕비는 반드시 우리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가둬둘 장소도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선 회왕부에 두었다가 기회가 오면 진성을 떠나도록 할 것입니다. 협상이 실패하면 우리는 안전하게 서경으로 돌아가면 되면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장공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서경으로 돌아가면 전쟁을 선포한단 말이오? 그럼 우리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도 왕경루는 아직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입구에는 "영업 종료"라는 글자가 적힌 양각등 두 개가 걸려 있었다.3층의 별실은 원래 차를 마시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술 한 주전자와 몇 가지 안주가 놓여 있었다.사여묵는 호위와 함께 오지 않았고 수란석도 단 한 명의 하인만 데리고 왔는데 하인은 문 앞에 서 있었다.술은 이미 절반을 마셨고 두 사람은 내일 있을 협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누구도 핵심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수란석은 그를 이곳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명확했기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작전은 이미 끝났기에 반드시 잡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반면, 사여묵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내일의 협상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웃을 뿐이었다. 그들은 북명왕이 아주 대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했지만 막상 수란석은 단 몇 마디만으로 그를 속일 수 있었다.그렇다고 경계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의 협상은 상국이 매우 중요하게 여길 것이고, 자기들이 불리하다는 걸 알기에 자국의 조건을 탐색하려 할 것이다.그가 웃긴다고 생각한 것은 북명왕은 마치 광대처럼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그는 북명왕의 오만함이 참을 수 없어 웃으며 말했다."왕야께서는 전쟁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허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황제께서 왕야에게 군권을 넘길까요? 제가 알기로는 귀국의 황제는 왕야를 두려워하시기에 다시 군을 맡길 리가 없습니다."사여묵은 담담히 대답했다."그건 상황을 보고 결정할 문제지 폐하의 뜻에만 의존하는 건 아닙니다.""상황요?" 수란석은 여전히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만약 상황이 그렇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다면 왕야는 군을 이끌고 나가서 과연 전세를 돌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다만...""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한 번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사여묵의 눈빛에 담긴 자신감은 수란석의 걱정을 일으켰지만 그들이 이미 선수를 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수란석은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갔다.1층에는 몇 명의 호위 복을 입은 사람들이 계산대 근처에 서서 보고하러 온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들어왔을 땐 주인장과 하인밖에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들어온건지 궁금했다. 보고하러 온 사람은 왕정이었는데, 그는 세 명의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수란석을 보자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수 대인, 서경은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감히 송 대감에게 암살 시도를 하다니요?"수란석은 송석석이 보이지 않자 어쩌면 이것이 덫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십여 명을 이끌고 고작 세 명을 상대하는 일이니 정영수가 절대로 실패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정영수는 무공이 매우 높아 만약 그들이 미리 대비했다면 최소한 붙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송석석은 이미 잡혀갔고 그들은 그것을 서경에서 했다고 추측하여 이곳에서 그를 속이려는 게 분명했다. 그는 더욱 분노하며 사여묵을 향해 돌아서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북명왕,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연극을 꾸며서 우리를 모함하려는 겁니까? 내일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는 겁니까? 너무 비열하지 않습니까?"사여묵은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왕정에게 눈짓하며 말했다."왕비가 다쳤다고 했소? 그럼 괜찮은 건가?""큰 상처는 나지 않았고, 팔을 다치고 지금 약왕당에서 치료 중입니다. 치료가 끝난 뒤에는 대리사로 갈 예정입니다."사여묵은 왕비가 정말로 다쳤다는 말에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서경의 정영수가 한 짓이라고 확신하는게요?"왕정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합니다. 정영수 외에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십여 명 있었습니다. 송 대감이 몇 명을 처치했고 나머지는 모두 대리사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의 입속에는 독이 있었지만 송 대감이 모두 제거했습니다.""그럴 리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음해하려 한다면 내일 협상은 필요 없습니다."
약왕당 외에 두 개의 등불이 걸려 있었다. 사여묵 일행이 말을 타고 도착했을 때 송석석은 막 시만자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그녀가 나오자 수란석의 몸은 굳어졌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정말 실패한 걸까?’그는 분노로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회왕이다. 분명 회왕이다. 회왕이 서경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 아닌, 상국이 보낸 첩자가 분명했다.송석석의 머리카락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상처 입은 팔은 이미 붕대를 감고 새로운 옷을 입었다. 분명 누군가 그녀의 집에 가서 옷을 가져온 것이다.사여묵은 즉시 말에서 내리더니 약간 흔들리는 등불 아래를 급하게 걸어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소?"송석석은 불만과 억울한 기운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겁니다. 정 대인은 저와 무슨 큰 원한이 있기에 사람까지 데려와 저를 해치려고 하는 겁니까?"그녀는 화를 내면서도 사여묵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손끝으로 두드리며 괜찮다는 표시를 보였다.그 말을 들은 수란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번이나 쳐다보며 그녀가 진짜 북명왕비가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금 정영수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가 그런 짓을 했다니, 말도 안 됩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손을 꽉 잡고 몸을 돌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대리사에 가서 확실하게 확인해 봅시다."수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북명왕이 왕비를 말에 태우자 그 옆의 여종이 능숙하게 말에 올라 기민한 동작을 보였다. 이는 평범한 여종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밤늦게 대리사에 도착했지만 대리사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잡혀 온 정영수와 다섯 명의 사사는 아직 감옥에 가두어지지 않았고 소경인 진이가 심문을 진행하고 있었다.심문실에서 정영수를 본 수란석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그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머리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굵은 채찍 자국이 얼굴을 거의
사여묵은 그가 충동적이고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이 판은 쉽게 풀렸고 그들은 즉석에서 정영수를 붙잡았기에 수란석은 충분히 회왕을 의심하고 회왕이 그들과 함께 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란석은 입을 열려는 순간 다시 말을 삼켰다. 그는 비록 충동적이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진 소경, 계속 심문하거라." 사여묵은 전혀 실망하지 않고 진이에게 명령을 내린 후 왕정에게 말했다. "수 대인을 회동관으로 모시고 이 일을 장공주께 보고하거라.""예!" 왕정은 명령을 받고 수란석에게 말했다. "수 대인, 가시지요."수란석은 정영수를 한 번 보더니 손을 내밀어 소매 주머니를 정리했다. 그 안에는 황제의 성유가 들어 있었고, 정영수에게 말을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정영수는 그의 행동을 보고 마음이 식어버렸다. 그는 이미 버려진 졸개가 되었다. 비록 현장에서 붙잡혔지만 서경에서의 협상이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모든 책임을 혼자서 떠안아야 했다.수란석은 대리사를 떠나며 손과 발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고 마음속엔 계속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말로 매복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세 명만 있었던 걸까?’ 정영수의 몸에는 채찍 자국이 있었는데 그건 분명히 한 사람에게만 맞은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를 붙잡은 사람은 십여 명이 세 명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즉 북명왕은 미리 이 사태에 대비하지 않았고 그저 정영수와 사사들이 싸움에서 밀렸을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수란석은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약 세 명이라면 그것은 마부와 여종, 그리고 북명왕비의 조합일 텐데, 그런 조합이라면 사사들이 없다 해도 정영수를 이길 수는 없다.아니다, 마침 그때 경위가 나타났다는 건 미리 준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경위들이 정영수를 붙잡은걸까?그렇지만 그것도 이상했다.경위와 금군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그중에는 무공이 뛰어난 자는 거의 없었다.
수란석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말도 안 되오! 송석석이 아무리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우리 서경에서 제일 뛰어난 고수를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이오!" 장공주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더구나 손쉽게 제압했다지 않습니까? 서경의 고수가 권력에 눈이 멀어 스스로 무술의 한계를 정해버린 것과 달리 송석석은 어릴 적부터 만종문에서 무술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만종문이 어떤 곳인지 모르십니까?""그냥 하나의 무림 문파 아니오? 대체 뭐가 특별하단 말이오?"소란석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말했다. 비록 정영수가 송석석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눈에 선했지만, 그는 여전히 송석석의 무술 실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만약 정영수를 이긴 게 북명왕이었다면 그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한 문파의 여제자가, 그것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대단해봤자 얼마나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양안도 여성이 그렇게 강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비슷한 말을 했다.냉옥 장공주는 그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어휴, 이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라고!’그들의 불신은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무지함은 그들의 자만에서 나온 것이었다.그들은 여성이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상국뿐만 아니라 서경에서도 삼년에 한 번만 여성을 뽑아 조정에 들이는 데, 수많은 여인들이 단 세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밤새도록 노력하고, 나태함은 한순간도 용납되지 않으며, 매일 세 시진밖에 자지 못한 채 긴장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음을 그들이 알리 만무했다.상국에만 하더라도 현재 여관은 단 한 명뿐인데, 그 사람이 바로 송석석이다. 그녀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현갑군의 지휘관을 맡을 수 있었겠는가?그녀는 심지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운 바도 있었다.물론 그들의 눈에는 이런 모든 것이 북명왕이 그녀를
말을 하고 있을 때, 영태비가 사적으로 사람을 보내 송석석을 초대했다. 송석석은 태후마마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그곳으로 향했다. 영태비는 문엄 황제의 빈이라 아들을 따라 봉지에 가서 복을 누려야 했지만 지금은 궁궐의 외딴곳에 홀로 남아 생활을 했다. 송석석이 고 공공을 따라 영수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설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는 몇 개의 전각이 아닌 하늘과 땅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울이 되자 영태비의 병세가 악화되어 연왕의 아들인 사여령이 진성에 남았는데 오늘 입궁해서 조모의 곁을 지켰다. 송석석이 온 것을 보자 사여령은 일어나 인사를 했다. “왕비님, 오셨습니까?” 송석석은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큰 도련님도 계셨군요.” “네, 조모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사 여령은 송석석 앞에서 감히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고, 송석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태비께 인사를 올렸다. 영태비는 등에 비단 베개 두 개를 받치고 침대에 기대 있었는데 안색이 노란 데다 푸르스름했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풀어헤친 채 계속 누워있었던 탓에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기침을 하더니 송석석에게 말했다. “왕비, 어서 앉게.” 영태비는 말하는 속도가 아주 느리고 힘이 없었다. 궁녀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놓자 고 공공이 말했다. “왕비님, 앉으십시오. 태비마마께서 몸이 허약해서 말소리가 크지 않으니 가까이 앉으셔야 들을 수 있습니다.” 송석석은 태비마마께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태비마마께서는 좀 괜찮으십니까?” “아마도 낫지 않을 것이다.” 영태비는 말을 하며 입술에 립밤을 좀 발랐는데 혈색을 더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창백해 보였다. 송석석은 영태비를 위로했다. “잘 치료한다면 금방이라도 괜찮아질 것입니다.” 전 중의 숯불은 아주 따뜻하게 타올라서 송석석은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태우는데도 연기 한 점 보이지 않을 것으로 보아 좋은 숯임을 알 수
혜태비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덕귀태비와 제귀테비를 찾아가 정원을 노닐었다. 혜태비는 홍보석 장신구가 오늘 피부색을 잘 받쳐주어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사여묵은 송석석과 함께 태후마마에게 문안을 드리러 태후전에 들어갔는데 많은 명부들 또한 때를 지어 태후에게로 왔다. 마침 방시원의 어머니인 오수인도 태후에게 인사를 드리러 궁으로 들어왔는데, 태후가 이렇게 많은 명부들 앞에서 방시원의 혼사를 물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았다. 오수인은 마음속으로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감히 태후 앞에서 하소연하지는 못했다. “태후마마, 혼인을 조급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후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시원이 고생이 많구나. 이유 없이 이런 일에 연루되고, 너희 집안은 더할 나위 없이 인자한데 하필이면 그 사람들 때문에 발칵 뒤집히다니.” 오수인은 그제야 태후께서 왜 갑자기 그 말을 물으셨는지 알았다. 알고 보니 방시원과 방 씨 가문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복이 천박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후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거라. 그는 우리 상국의 훌륭한 장군이자 황은을 받들고 있는데 복이 천박하다니? 그의 운명은 분명 찾아올 것이다.” “예, 태후마마께서 좀 더 신경을 써주십시오.” 사건이 일어난 후 사람들은 다소 조롱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었는데, 지금 현장에 있던 명부들의 오수인을 보는 눈빛은 순식간에 달라져 있었다.하지만 태후께서 말씀을 하시니 상황이 달라졌다. 태후는 방시원을 상국의 훌륭한 장군이라고 평가했다. 여태껏 조정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방시원을 위해서 나선 것이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총명한 사람이기에, 태후의 이 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그러니 앞으로 아무도 감히 방 씨 가문을 무시하지도, 함부로 입에 담지도 못할 것이다.태후마마께서는 방시원의 얘기를 길게 하지 않고 다른 가문의 일도 물어보았다. 그리고 제대부인이 보이지 않자
제황후는 그녀에게 대황자와 공주를 데리고 나가 놀라고 하고 제자예의 어머니인 경 씨를 불러들였다. 경 씨는 방시원의 일을 듣고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황후마마, 그는 자예보다 나이도 훨씬 많아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광릉후의 향삼랑이 젊은 나이에 능력까지 있어 벌써 거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비록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능력에 제 씨 가문의 추대를 더하면 반드시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삼랑은 풍채가 넘치는 데다 올해 열아홉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작년에 과거에 진급했으니 진사에 급제를 하기만 하면 앞날이 창창할 것입니다.” 경 씨의 말이 끝나자 란주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 제 씨 가문의 아들 중 출세한 사람이 많습니까?” 그러자 경 씨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많지요. 우리 제 씨 가문의 아들들 중에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셋째 집이 가장 모자라지만 제수찬도 공주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셋째 삼촌은 모자란 게 아니라 머리를 다친 탓에 그런 것 입니다. 머리를 다치기 전엔 아주 총명했답니다. 우리 제 씨 가문엔 모자란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큰 가문에 아들들은 모두 뛰어나고 이미 벼슬에 들어간 사람과 곧 벼슬에 들어갈 사람도 적지 않지요. 그렇다면 외가에 의해 올라온 향삼량이 무슨 좋은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무심한 듯 계속 말했다. “사위가 아들과 앞길을 다투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 황후의 말을 들은 경 씨의 표정이 순간 엄숙하게 변했다. 그러자 란주가 말했다. “맞습니다. 부인, 사람은 많고 벼슬은 한계가 있으니 차라리 아가시의 사위는 제 씨 가문과 달리 다른 길을 개척하는 사람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방시원의 나이가 좀 만긴 하지만 벌써 삼 품 총병까지 올라갔고 어머니도 고명을 받았으니 아가씨께서 시집을 가 고명을 받으면 젊은 나이에
동지 날, 궁에서 단합연회를 열기 전에 내외 명부들이 입궁하여 문안인사를 올렸다. 태후께서는 평소에 조용한 것을 좋아하지만 이 날은 명부들의 방문을 허락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황후는 먼저 와서 함께 있다가 다시 장춘궁으로 돌아가 친정 식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친정어머니인 제대부인은 입궁하지 않고 오히려 숙모와 사촌 여동생들이 몰려왔다. 물어보니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바람을 맞으면 안 된다고 했다. 게다가 입궁을 하면 황태후께 문안을 드려야 할 텐데 태후에게 병을 전염시키면 큰일이라 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황후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번에 어머니가 공방의 일을 말했는데 거절을 한 탓에 그녀가 화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황후는 실망이 컸지만 내색하지 않고 란주에게 몇 마디와 효심을 전하라고 분부했다. 번잡한 예절이 끝난 후, 황후는 작은 사촌 여동생을 남겨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자예는 여학에서 주 장군의 손녀인 주창우와 광릉후의 막내딸인 향회옥과 함께 소란을 피워 안여옥을 못살게 굴었던 사람이다. 한바탕 혼쭐이 난 후부터는 좀 수그러들긴 했지만 가끔씩 안여옥을 격분시켜 다른 사람에게 성격이 조급하다는 말을 듣게 하려고 했다. 그해서 여학의 명성에도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제자예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사촌 언니, 국태부인은 너무 무섭습니다. 심 선생도 저를 엄하게 꾸짖었으니 나도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태후에게까지 알려지면 언니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황후는 몸을 반쯤 기울인 채 담담하게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여학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느냐? 황제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여학이 설립되었을 때 황제는 송석석의 형세가 너무 세 질까 봐 걱정했단다. 다만 여학이 태후의 뜻이었기에 공개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워 수단을 써서 여학의 명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나중에 태후가 원망을 하더라도 송석석이 훈장 노릇
고 공공은 울면서 무릎을 꿇고 공주를 부르더니 땅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온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치매에 걸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고 공공은 한바탕 울고 나서야 찬합에서 떡 한 접시를 꺼냈고 유은이 검사해 보겠다고 하자 만소가 말렸다. “왕야께서 떡은 검사할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 공공은 무릎을 꿇고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한 입만 드십시오. 이건 영태비께서 특별히 저에게 부탁하여 보내온 것입니다. 공주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달콤한 떡입니다. 아직 많이 있으니 천천히 드셔도 됩니다. 사온은 영태비의 이름을 듣고서야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검게 물들어 드러웠으며, . 눈가에도 검푸른 색깔이었지만 눈시울은 붉어졌다. “내려놓거라.” 그녀는 이가 없어 발음이 또렷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옷도 한 벌 가져왔는데 제가 입혀드리겠습니다.” 고 공공은 옷을 받들고 와서 더러운 사온의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를 일으켜 부축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유은은 다급하게 만소와 고 씨 유모를 보며 물었다. “들아가보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괜찮아, 옷을 바꾸게 둡시다.” 만소는 말하며 떡 한 조각을 소매 속에 숨겼다. 유은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왕야님과 왕비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상관하지 않았다. 반 시진 정도 지나자 고 공공은 사온을 업고 나왔다. 사온은 옷을 갈아입었는데 몸이 너무 말라서 옷이 헐렁해 보였다. 고 공공이 그녀를 떡 옆에 내려놓자 그는 다시 몸을 웅크렸다. 이때 만소가 말했다. “자, 이제 유 대인을 곤란하게 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고 공공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사온을 보더니 아쉬운 마음으로 떠났다.사온은 고 공공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문이 닫히고 나서야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만소는 떡을 들고 약왕당에서 청작을 찾아 독이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왕야와 왕비에게 보고를
염선생 측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한 결과 몇몇 용의자를 특정했고, 사람을 시켜 그들의 동태를 밀착 감시하도록 조치를 취했다.그러나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무상은 연주로 돌아간 후 회왕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시씨 가문에도 방문하지 않아 정말로 깊이 숨어서 들어간 것 같았다.현재 들어온 단서에 의하면, 사병들은 한때 옹현에 있었으나 이후 매우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동 과정에서 많은 물건을 남겨두고 갔다.하지만 그들이 정확히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연주 지역은 본래 분열되어 있었으나, 무상이 돌아간 이후 세력이 다시 결집되었다. 지방 관료들은 연황실을 자주 드나들며 잔치를 즐기고 술자리를 벌이며 매우 즐겁게 지냈다.이 명단은 사여묵의 손을 거쳐 숙청제에게 전달되었다.그러나 여전히 그곳은 군주가 없는 상태로 보였다. 그렇다고 회왕과 무상을 군주로 볼 수도 없었다.숙청제는 사여묵과 논의한 끝에 연왕을 서둘러 연주로 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연왕은 적어도 현재 무상의 세력을 억제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무상이 연왕의 손에서 권력과 자원을 완전히 빼앗으려면 그곳에 연왕이 없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연왕이 연주로 돌아가면 그곳에서 쌓아온 인맥과 자원은 여전히 연왕의 손에 있기 때문에, 무상이 그것을 차지하려면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숙청제는 연왕에게 부상을 회복했으니 연주로 돌아가라는 교지를 내렸다.연왕은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그는 연주의 상황을 심히 걱정했고, 시씨 가문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지 깊이 고민해왔다.교지가 내려지자 그는 영태비께 작별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이 짐을 싸서 가족들과 함께 바로 진성을 떠났다.그는 신체에 장애를 입었고 그 방면에서도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한동안 침체된 시간을 보낸 후 오히려 투지가 되살아났다.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야망을 품고 있었지만, 예전에는 어느 정도 명예를 중시했기에 세상을
사여묵이 말했다. “맞다, 전에 최씨 부인이 부탁한 일 말이오, 오사형이 동의했소?”송석석이 대답했다. “오사형에게 이야기했는데 생각해보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아요.”"내 생각엔 그에게 이 일을 알려서 스스로 판단하게 하면 좋겠소. 그가 예전에도 최씨 부인이 내놓은 점포들을 산 적이 있는 걸로 보아 평서백부를 도울 의향이 있었던 걸로 보이오."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평서백부를 돕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저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돕고 싶었던 것뿐이겠죠.”며칠간 많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송석석은 점점 과거 노부인이 왕전의 계획에 관여했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마 한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오사형을 찾아갔고, 오사형이 불에 타 죽은 것을 발견하자 왕전에게 분노를 돌린 것 같았다. 분명 이 죄책감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이는 그녀가 오사형을 만나고 나서 이야기를 지어내어 용서를 구했지만, 정작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였다. 심지어 오사형에게 보상하겠다고 말한 후에도 사람을 보내 소식을 묻지도 않았다.그녀는 단지 마음의 안정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녀 곁에서 자라지 않은 아이에게는 왕표나 왕청여처럼 깊은 감정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그럼 제가 오사형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송석석이 말했다.왕이장은 송석석의 말을 듣고 차갑게 욕을 퍼부었다.“뭐라고? 남강에서 첩이랑 호강하며 지내고 있다고? 애까지 배서 부인 행세를 하고 있다니, 그럼 진성에 있는 본처는 뭘로 보는 것이냐? 식모 취급하는 거냐?” “아마 최씨 부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부탁을 한 거죠. 오사형, 이제 오사형이 어떻게 하실 건지에 달려있어요.”왕악장은 더 이상 두말하지 않고 말했다."최씨 부인에게 전해.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라고. 넘길 수 있는 건 전부 넘기라고 해. 이 일을 굳이 조용히 처리할 필요는 없어. 백부 쪽에서 지출이 너무
다음 날, 전북망은 소위 합동 훈련이라는 것이 병력 배치나 전술 훈련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9월은 겨울 밀을 심기에 적기였다. 남강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지역으로, 물자가 여전히 부족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인구도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에 병사들이 농사를 돕게 된 것이다. 밀 외에도 배추, 무, 과일 등을 심기도 했다.방천허는 전북망이 마침 좋은 시기에 도착했다며 서둘러 가서 합류하라고 말했다.전북망은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렸지만, 그 와중에도 짬을 내어 필명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진성에서 전북망의 편지를 받은 필명은 편지를 본 후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았던가?' 편지에는 자잘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어 무려 3장이나 되었다. 대부분은 전에 전북망이 술에 취해 늘어놓았던 말들과 비슷했다.전북망은 원수부에서의 생활을 적으며 원수부가 얼마나 호화롭고 웅장한지 왕실조차 능가할 정도라고 표현했다.그는 원수부에 하인들이 구름처럼 많고 임신한 주모를 모시고 있으며,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이 모두 사치스러워 천금에 맞먹는다고 묘사했다.또한 농번기로 인해 현재 병사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가 끝난 뒤에야 훈련이 시작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병사들의 피부는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원수는 돼지처럼 하얗다고 비꼬기도 했다.뒤죽박죽한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은 뒤, 평서백 부인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그 말을 마치고 나서는 자신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고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과거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말하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이어갔다.편지를 읽던 필명은 전북망이 왜 이런 말을 적었는지 눈치챘다. 평서백 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그녀가 마음 속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필명은 전북망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평서백 부인처럼 현명한 사람이 왕표의 상황을 모를 리가 있나?'그러나
왕표는 전북망이 자신의 위엄을 충분히 보도록 한 뒤에야 그를 불러들였다.남강에 머문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왕표는 살이 많이 쪘다. 비록 과도한 비만 상태는 아니었지만, 호랑이 가죽이 깔린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턱 밑의 주름이 겹겹이 드러났다.그는 높은 자리에서 전북망을 내려다보며 위압적인 태도로 말했다.“너와 왕청여의 일은 이미 들었다. 그래, 너같이 평범하고 포부도 없는 자는 내 여동생과 어울릴 자격도 없지."전북망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 없이 한마디 대꾸만 하고 입을 닫았다.왕표는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꾸짖었다."네가 이렇게 무능할 줄은 몰랐다. 현철위 부사령관이었지만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장군부는 정말 무능한 자들로만 가득 찼구나. 네 조부께서 하늘에서 너희 같은 무용지물을 보고 계신다면 눈을 감지 못하실 거다."전북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마에는 핏줄이 드러났다."불만이면 어쩔 거냐? 너희 장군부에서 나온 인간들이 대체 어떤 꼴이 났는지 봐라. 그리고 너 자신만 봐도 여자 하나한테 휘둘려 이 지경이 됐으니. 앞뒤로 세 명의 여자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지 않냐……쯧, 우리 남자들의 체면을 다 구겨놨다!”왕표는 지금 그야말로 의기양양했다.그의 곁에는 절세미인이 있었고, 그 미인은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 이전에도 왕표는 남강에서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손에 넣었다.언제나 여자들이 그를 즐겁게 하려고 애썼을 뿐이었다.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전북망을 깔보았다.위세를 충분히 떨친 뒤 왕표는 물었다."진성 쪽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것이냐?"전북망은 대답했다."큰일은 없습니다."왕표는 의자 팔걸이를 매만지며 입가에 냉소를 띠고 말했다."그래? 그럼 여기로 오기 전에 최씨를 본 적이 있나?"전북망은 고개를 들고 답했다."원수께서 말씀하신 게 평서백 부인 입니까?"왕표는 그의 의도적인 물음 속 뜻을 간파하고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내 여자를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