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가까운 시각에도 왕경루는 아직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입구에는 "영업 종료"라는 글자가 적힌 양각등 두 개가 걸려 있었다.3층의 별실은 원래 차를 마시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술 한 주전자와 몇 가지 안주가 놓여 있었다.사여묵는 호위와 함께 오지 않았고 수란석도 단 한 명의 하인만 데리고 왔는데 하인은 문 앞에 서 있었다.술은 이미 절반을 마셨고 두 사람은 내일 있을 협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누구도 핵심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수란석은 그를 이곳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명확했기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작전은 이미 끝났기에 반드시 잡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반면, 사여묵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내일의 협상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웃을 뿐이었다. 그들은 북명왕이 아주 대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했지만 막상 수란석은 단 몇 마디만으로 그를 속일 수 있었다.그렇다고 경계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의 협상은 상국이 매우 중요하게 여길 것이고, 자기들이 불리하다는 걸 알기에 자국의 조건을 탐색하려 할 것이다.그가 웃긴다고 생각한 것은 북명왕은 마치 광대처럼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그는 북명왕의 오만함이 참을 수 없어 웃으며 말했다."왕야께서는 전쟁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허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황제께서 왕야에게 군권을 넘길까요? 제가 알기로는 귀국의 황제는 왕야를 두려워하시기에 다시 군을 맡길 리가 없습니다."사여묵은 담담히 대답했다."그건 상황을 보고 결정할 문제지 폐하의 뜻에만 의존하는 건 아닙니다.""상황요?" 수란석은 여전히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만약 상황이 그렇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다면 왕야는 군을 이끌고 나가서 과연 전세를 돌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다만...""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한 번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사여묵의 눈빛에 담긴 자신감은 수란석의 걱정을 일으켰지만 그들이 이미 선수를 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수란석은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갔다.1층에는 몇 명의 호위 복을 입은 사람들이 계산대 근처에 서서 보고하러 온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들어왔을 땐 주인장과 하인밖에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들어온건지 궁금했다. 보고하러 온 사람은 왕정이었는데, 그는 세 명의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수란석을 보자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수 대인, 서경은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감히 송 대감에게 암살 시도를 하다니요?"수란석은 송석석이 보이지 않자 어쩌면 이것이 덫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십여 명을 이끌고 고작 세 명을 상대하는 일이니 정영수가 절대로 실패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정영수는 무공이 매우 높아 만약 그들이 미리 대비했다면 최소한 붙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송석석은 이미 잡혀갔고 그들은 그것을 서경에서 했다고 추측하여 이곳에서 그를 속이려는 게 분명했다. 그는 더욱 분노하며 사여묵을 향해 돌아서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북명왕,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연극을 꾸며서 우리를 모함하려는 겁니까? 내일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는 겁니까? 너무 비열하지 않습니까?"사여묵은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왕정에게 눈짓하며 말했다."왕비가 다쳤다고 했소? 그럼 괜찮은 건가?""큰 상처는 나지 않았고, 팔을 다치고 지금 약왕당에서 치료 중입니다. 치료가 끝난 뒤에는 대리사로 갈 예정입니다."사여묵은 왕비가 정말로 다쳤다는 말에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서경의 정영수가 한 짓이라고 확신하는게요?"왕정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합니다. 정영수 외에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십여 명 있었습니다. 송 대감이 몇 명을 처치했고 나머지는 모두 대리사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의 입속에는 독이 있었지만 송 대감이 모두 제거했습니다.""그럴 리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음해하려 한다면 내일 협상은 필요 없습니다."
약왕당 외에 두 개의 등불이 걸려 있었다. 사여묵 일행이 말을 타고 도착했을 때 송석석은 막 시만자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그녀가 나오자 수란석의 몸은 굳어졌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정말 실패한 걸까?’그는 분노로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회왕이다. 분명 회왕이다. 회왕이 서경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 아닌, 상국이 보낸 첩자가 분명했다.송석석의 머리카락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상처 입은 팔은 이미 붕대를 감고 새로운 옷을 입었다. 분명 누군가 그녀의 집에 가서 옷을 가져온 것이다.사여묵은 즉시 말에서 내리더니 약간 흔들리는 등불 아래를 급하게 걸어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소?"송석석은 불만과 억울한 기운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겁니다. 정 대인은 저와 무슨 큰 원한이 있기에 사람까지 데려와 저를 해치려고 하는 겁니까?"그녀는 화를 내면서도 사여묵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손끝으로 두드리며 괜찮다는 표시를 보였다.그 말을 들은 수란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번이나 쳐다보며 그녀가 진짜 북명왕비가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금 정영수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가 그런 짓을 했다니, 말도 안 됩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손을 꽉 잡고 몸을 돌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대리사에 가서 확실하게 확인해 봅시다."수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북명왕이 왕비를 말에 태우자 그 옆의 여종이 능숙하게 말에 올라 기민한 동작을 보였다. 이는 평범한 여종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밤늦게 대리사에 도착했지만 대리사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잡혀 온 정영수와 다섯 명의 사사는 아직 감옥에 가두어지지 않았고 소경인 진이가 심문을 진행하고 있었다.심문실에서 정영수를 본 수란석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그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머리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굵은 채찍 자국이 얼굴을 거의
사여묵은 그가 충동적이고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이 판은 쉽게 풀렸고 그들은 즉석에서 정영수를 붙잡았기에 수란석은 충분히 회왕을 의심하고 회왕이 그들과 함께 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란석은 입을 열려는 순간 다시 말을 삼켰다. 그는 비록 충동적이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진 소경, 계속 심문하거라." 사여묵은 전혀 실망하지 않고 진이에게 명령을 내린 후 왕정에게 말했다. "수 대인을 회동관으로 모시고 이 일을 장공주께 보고하거라.""예!" 왕정은 명령을 받고 수란석에게 말했다. "수 대인, 가시지요."수란석은 정영수를 한 번 보더니 손을 내밀어 소매 주머니를 정리했다. 그 안에는 황제의 성유가 들어 있었고, 정영수에게 말을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정영수는 그의 행동을 보고 마음이 식어버렸다. 그는 이미 버려진 졸개가 되었다. 비록 현장에서 붙잡혔지만 서경에서의 협상이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모든 책임을 혼자서 떠안아야 했다.수란석은 대리사를 떠나며 손과 발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고 마음속엔 계속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말로 매복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세 명만 있었던 걸까?’ 정영수의 몸에는 채찍 자국이 있었는데 그건 분명히 한 사람에게만 맞은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를 붙잡은 사람은 십여 명이 세 명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즉 북명왕은 미리 이 사태에 대비하지 않았고 그저 정영수와 사사들이 싸움에서 밀렸을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수란석은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약 세 명이라면 그것은 마부와 여종, 그리고 북명왕비의 조합일 텐데, 그런 조합이라면 사사들이 없다 해도 정영수를 이길 수는 없다.아니다, 마침 그때 경위가 나타났다는 건 미리 준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경위들이 정영수를 붙잡은걸까?그렇지만 그것도 이상했다.경위와 금군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그중에는 무공이 뛰어난 자는 거의 없었다.
수란석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말도 안 되오! 송석석이 아무리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우리 서경에서 제일 뛰어난 고수를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이오!" 장공주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더구나 손쉽게 제압했다지 않습니까? 서경의 고수가 권력에 눈이 멀어 스스로 무술의 한계를 정해버린 것과 달리 송석석은 어릴 적부터 만종문에서 무술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만종문이 어떤 곳인지 모르십니까?""그냥 하나의 무림 문파 아니오? 대체 뭐가 특별하단 말이오?"소란석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말했다. 비록 정영수가 송석석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눈에 선했지만, 그는 여전히 송석석의 무술 실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만약 정영수를 이긴 게 북명왕이었다면 그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한 문파의 여제자가, 그것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대단해봤자 얼마나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양안도 여성이 그렇게 강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비슷한 말을 했다.냉옥 장공주는 그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어휴, 이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라고!’그들의 불신은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무지함은 그들의 자만에서 나온 것이었다.그들은 여성이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상국뿐만 아니라 서경에서도 삼년에 한 번만 여성을 뽑아 조정에 들이는 데, 수많은 여인들이 단 세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밤새도록 노력하고, 나태함은 한순간도 용납되지 않으며, 매일 세 시진밖에 자지 못한 채 긴장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음을 그들이 알리 만무했다.상국에만 하더라도 현재 여관은 단 한 명뿐인데, 그 사람이 바로 송석석이다. 그녀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현갑군의 지휘관을 맡을 수 있었겠는가?그녀는 심지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운 바도 있었다.물론 그들의 눈에는 이런 모든 것이 북명왕이 그녀를
담판을 앞둔 전달 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회동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대리사 역시 밤새 재판을 진행했다. 형부에서는 이방이 자백한 이후로 줄곧 전북망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이방이 형부에 들어온 후 이렇게까지 약해진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택은 담판이 끝난 후 이방이 서경 사신에게 인계될 것이며 죽음도 쉽게 맞지 못할 잔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가족을 한 번 만날 수 있기에, 그는 오늘 밤 둘의 만남을 허락했다. 물론, 그 또한 감옥에서만 허용되었다. 이택은 전북망을 감옥으로 데려오라 명령하였다. 아전들이 감옥 문을 열어주자 전북망이 안으로 들어갔고 이택은 밖에서 대기했다. 당연히 전북망은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을 받아 어떠한 날카로운 물건도 지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방이 자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이방은 현재 여성 수감자용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중요한 인물이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택은 엄중한 병력으로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작은 등불이 두 사람의 초췌한 얼굴을 비추었다. 성릉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의 그 당당함은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초라함, 그리고 절망과 혼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장군님을 위해 제 진술을 바꿨습니다.” 이방은 눈앞의 이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의지가 꺾인 모습에 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다소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들에게 성릉관 일은 장군님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은 무사하실 것입니다.”전북망이 대답했다.“그건 사실이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장군님께서 개입하시기 전에는 소승이 모든 일의 주동자였습니다.”“그 말은 성립되지 않소. 황제와 형부는 믿지 않을 것이오.”이방의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상관없습니다. 서경이 이
그녀는 결코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비루하게 살아남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녀는 사람이 평생토록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했다. 여장군이 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이토록 넓은데, 충분히 강인하게 버틴다면 한 자리라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하지만 전북망은 그저 그녀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탈출 경로를 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번에 서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아시오? 합치면 백여 명이고, 시위만 해도 최소 예순 명이오. 내가 구해낼 수 있을 리 없잖소.”“혼자 할 필요 없으십니다, 장군님. 북명왕부가 도와줄 겁니다.” 이방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북망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제가 서경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반드시 소승도 함께 데려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북명왕부는 소승을 못 본체 하지 않을 겁니다. 장군님은 단지 그들이 소승을 구할 때 저를 구해내면 됩니다.”전북망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하였소? 무슨 수로 서경 사람들이 소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다는 거요?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작정이오?”이방은 그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알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일을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를 구해 주시면 장군님과 저 사이의 빚은 깔끔하게 청산되는 겁니다. 앞으로 제가 죽든 살든 장군님과는 아무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아니, 난 받아드릴 수 없소.” 전북망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도와줄 수 없소.”“장군님, 장군님의 마음속엔 언제나 송석석이 남아 있겠지요. 장군님은 결국 저를 저버린 셈이 되는 겁니다.” 이방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장군님을 위해 진술까지 바꿨습니다. 정말 조금의 정마저도 잊
염선생은 배를 문지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왕부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소?”“마차 세 대가 후문에 대기 중이며 그 안에 물건들을 싣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금은과 귀중품으로 보였습니다.”“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군.”염선생이 말했다. “무사부님, 염선생님, 저희가 사람을 보내 도중에 그들을 막는건 어떠신지요?”염선생은 겸손하게 사숙의 의견을 물었다. “무사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그가 뭐 어디로 가겠나? 분명 연주로 갈 것이다. 사람을 붙여 중간에 그의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아라. 빈손으로 연주에 가게 두고 연주에 도착한 이후에는……” 그는 평무종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람을 보내 그를 감시하게 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해라.”평무종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염선생은 무사부님이 감시를 붙일 건 알았지만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훔쳐 오라는 지시를 내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다.무소위는 두 사람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마침내 벌을 풀어주기로 했다. “물독을 밖으로 내가서 내려놓고 할 일을 하러 가거라.”두 사람은 대사면을 받은 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독을 이고 밖으로 나갔다. 물독이 워낙 커서 문을 겨우 빠져나갔다. 문이 조금이라도 작았다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했을 터였다.두 사람은 물독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와 짧은 훈계를 들었다. 그들은 벌받는 것에 익숙해서 모든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숙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무소위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이 너희를 벌주는 것이 야박하다 생각하느냐? 원망할거면 너희들의 못난 사부를 탓해라. 너희 사부는 산에서 화약을 연구하다가 내 마당을 날려 버리고도 뻔뻔하게 내게 진성까지 와 자기 제자들을 도와 달라 청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다. 너희가 벌을 조금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내 마음의 화가 도저히 풀리지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
이날 아침, 송석석 일행은 서경으로 출발했다.송석석은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성릉관을 또 지나야 했기에, 이후에도 외조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성릉관을 떠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가 다 울퉁불퉁했고 일부러 인위적으로 파괴한 곳도 있었기에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진왕은 절대 다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다리 안쪽의 쓸림 상태가 아직 심했기에 걸을 땐 괜찮아도 말에 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때문에 성릉관에서 공을 세우고 육아당까지 설립한 진왕은 까탈스럽게 마차를 고집했고 마차가 도무지 지나갈 수 없는 곳은 현갑군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밀면서 힘겹게 전진했다.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양국으로 통하는 길이 개방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길밖에 없었다면 고귀한 진왕의 엉덩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그렇게 겨우 서경 지대에 진입하여 루벌로 향하자, 서경의 관원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가는 길까지 호송해주었다.송석석 일행들 중에서 통역관을 제외하고는 서경에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 같은 변경 도시라고 해도, 루벌은 성릉관보다 훨씬 낙후했다. 여기저기에는 망가지고 훼손된 집채가 많았으며 행색이 누추한 거지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 백성들도 많았다.송석석은 이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른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침투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 전북망과 이방이 이곳 마을을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당한 그 마을만 피해를 받아야지 루벌 전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이 안 되었다.루벌의 한 역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석석은 호송하고 있던 관원한테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후방 공급이 부족한 탓에 병사들이 루벌로 돌아와 약탈을 진행한 것이었다.수란석 당시의 상황이 빅토르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
소 팔야는 곧바로 송석석이 말한대로 지시를 내렸고 이 지시를 실행에 옮긴 사람은 바로 전북망이었다. 그는 서둘러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수색하기 시작했다.송석석이 성릉관에 왔다는 사실은 전북망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맞이하던 그날, 그는 멀리 서서 지켜볼 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전북망은 송석석을 정확히 보지도 못했고 그저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전북망은 자신이 지금 참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느껴지기도 했다. 송석석은 이제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진성의 일과 관련된 사람은 이제 멀리해야했기 때문이다. 한편, 시절단은 성릉관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도 담판의 기교에 대해 상의했으며 상황 모의도 여러 번 해보았다.이번 담판이 저번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쉬운 건 아니었다. 이는 여제가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기에 쉽게 타협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씨 가문에서도 상대방이 몰래 사람을 보내 사절단의 책략을 몰래 엿듣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사절단의 책략을 알게 된다면 상대방은 그에 맞는 대책을 미리 준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국은 열세에 처하게 된다.때문에 소 팔야는 전북망에게 반드시 철저하게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래 침입한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사절단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 사이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으니 확실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이틀 동안 수색했지만 전북망은 수확이 없었다. 그리고 수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위장술을 쓰거나 몰래 정보를 외부에 빼돌리는 사람도 없었다.전북망이 유일하게 알아낸 정보는 검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춘만루에서 밥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춘만루를 떠난 뒤, 이들을 목격했다는 가게 주인도 있었지만 어디에 묵었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심지어 전부 검은 복장을 차려 입었는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춘만루는 오늘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가게가 그리 크지 않기도 했고, 다른 손님들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 전 낭자가 데리고 오겠다고 했던 검은 복장을 입은 남자들까지 가게 안 나머지 자리를 전부 차지했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남자까지 앉을 자리가 없었기에 가게 주인은 급하게 작은 탁자 하나를 펴서 가게 앞에 자리를 마련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일행들과 떨어져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이때, 남자가 미안한 목소리로 송석석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저자들은 전부 제 일행입니다. 저와 똑같이 이틀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혹시 불편하시다면 저자들에게 가게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저자들에게 호빵이나 하나씩 나눠줘도 충분합니다.”멈칫하던 시만자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편하게 드시고 싶은 거 시키시면 됩니다.”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낭자는 정말 얼굴도 예쁘시고 마음도 선하시군요. 그럼 저희 편하게 시키겠습니다.”“그… 그래요.”고개를 끄덕이던 시만자는 가게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자들의 옷차림은 꽤 눈에 띄었으며 옷소매에 수놓은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옷이 구겨지고 먼지도 많이 묻었기에 수놓은 글씨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동안 쳐다본 시만자는 그제야 이자들의 옷에 수놓은 글씨들이 각자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중에서 흑영위나 전광위 등 글씨들이 보이기도 했다.이자들은 예의가 없거나 우악스럽지는 않았다. 각자 자리를 찾은 뒤 자신들에게 밥을 사준 시만자와 송석석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머리가 하얬지만 얼굴은 불그스름한 게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그 중에서 생김새가 매우 추악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으며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송석석과 시만자 그리고 몽동이는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왠지 이 식사자리가 자신들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송석석은 식사를
송석석은 이들을 몇 번이나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순간 마음속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의 나이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외모로 보면 서른 살은 족히 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활력이나 기운은 최대 스무 살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송석석은 이들의 눈빛도 함께 살폈는데, 특히 그 남자의 눈빛은 매우 심오하고 진중했으며 나이를 꽤 많이 먹은 늙은 여우와 흡사하게 느껴졌다.송석석 일행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한걸음 다가가서 물었다.“여기에 육아당이 생기는 겁니까? 혹시 관아에서 직접 계획한 일인가요?”곁에 서있던 몽동이가 이들을 자세하게 훑어보았다.완벽한 상국 말투를 쓰고 있었기에 성릉관 사람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일단 이자들 태도에서 악의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몽동이가 남자의 말에 대답을 했다.“맞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곳입니다. 관아에서 직접 설립했고요.”“참 좋은 일이네요.”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석석이 한걸음 다가가 물었다.“선생님께서는 진성에서 오셨습니까?”하지만 남자는 그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되레 그녀에게 되물었다.“혹시 북명왕비이십니까? 성함은 송석석이고요?”경계심이 잔뜩 차오른 송석석이 질문을 하려던 그때, 남자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서경으로 출발하실 예정이시죠?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혹시 저희도 함께 동행해도 되겠습니까?”송석석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물론 그들이 서경에 담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송석석 일행은 사절단 신분으로 가는 것이기에 함부로 아무 사람이나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 남자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묻는 것이 몹시 수상했다.“선생님들은 왜 서경에 가시려는 겁니까?”송석석의 물음에 남자가 대답했다.“담판하는 과정을 구경하고 싶어서요. 증인도 되어줄 겸 해서요.”송석석은 상대방이 예사롭지 않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거나 단순히 헛소리가 습관처럼 나오는 이상한 사람일
진왕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배고픔에 못 이겨 깨어났다. 눈을 뜨고 나니 온몸이 마치 부서진 것처럼 쑤시고 아파왔다. 심지어는 뼛속까지 피곤이 스며들어 손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 중에는 심복인 소환이라는 하인이 있었다. 그가 침상 곁에서 진왕에게 보고했다. "북명왕비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며 반나절째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왕은 원래 침상에서 식사를 해결한 뒤 그대로 다시 자려고 했다. 너무 지쳐서 움직이기조차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석석이 반나절 동안 기다렸다는 말을 듣자, 급히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혀라, 어서!" 이번 여정에서 그는 이미 송석석의 대단함을 목격했다. 여성이지만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그녀의 지휘 아래 여러 차례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다. 게다가 길에서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쓰러졌을 때도 그녀는 황소처럼 튼튼했다. 실력 있는 사람은 소홀히 대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들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려고 찾아오는 법이 없으며,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뱃가죽이 달라붙을 지경이었지만, 서둘러 씻고 죽 한 그릇을 들이킨 뒤 송석석을 만나러 갔다. "나를 찾은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송석석은 육아당 건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진지하게 듣고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겠네. 어제 도착하자마자 피곤해서 쓰러져 자긴 했지만, 이 소부의 장식이 간소하고 사용하는 물품도 매우…… 소박한 것을 보았다. 대장군의 일가는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이렇게 푸대접 받아서는 안 되겠지." 송석석이 입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전하, 오해하셨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소씨 가문은 한 푼도 착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전하의 선행을 널리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 아이들은 훗날 멀리 진성에 계신 전하를 감사히 여길 것이며, 조정의 문무백관들도 전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