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그가 충동적이고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이 판은 쉽게 풀렸고 그들은 즉석에서 정영수를 붙잡았기에 수란석은 충분히 회왕을 의심하고 회왕이 그들과 함께 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란석은 입을 열려는 순간 다시 말을 삼켰다. 그는 비록 충동적이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진 소경, 계속 심문하거라." 사여묵은 전혀 실망하지 않고 진이에게 명령을 내린 후 왕정에게 말했다. "수 대인을 회동관으로 모시고 이 일을 장공주께 보고하거라.""예!" 왕정은 명령을 받고 수란석에게 말했다. "수 대인, 가시지요."수란석은 정영수를 한 번 보더니 손을 내밀어 소매 주머니를 정리했다. 그 안에는 황제의 성유가 들어 있었고, 정영수에게 말을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정영수는 그의 행동을 보고 마음이 식어버렸다. 그는 이미 버려진 졸개가 되었다. 비록 현장에서 붙잡혔지만 서경에서의 협상이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모든 책임을 혼자서 떠안아야 했다.수란석은 대리사를 떠나며 손과 발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고 마음속엔 계속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말로 매복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세 명만 있었던 걸까?’ 정영수의 몸에는 채찍 자국이 있었는데 그건 분명히 한 사람에게만 맞은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를 붙잡은 사람은 십여 명이 세 명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즉 북명왕은 미리 이 사태에 대비하지 않았고 그저 정영수와 사사들이 싸움에서 밀렸을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수란석은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약 세 명이라면 그것은 마부와 여종, 그리고 북명왕비의 조합일 텐데, 그런 조합이라면 사사들이 없다 해도 정영수를 이길 수는 없다.아니다, 마침 그때 경위가 나타났다는 건 미리 준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경위들이 정영수를 붙잡은걸까?그렇지만 그것도 이상했다.경위와 금군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그중에는 무공이 뛰어난 자는 거의 없었다.
수란석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말도 안 되오! 송석석이 아무리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우리 서경에서 제일 뛰어난 고수를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이오!" 장공주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더구나 손쉽게 제압했다지 않습니까? 서경의 고수가 권력에 눈이 멀어 스스로 무술의 한계를 정해버린 것과 달리 송석석은 어릴 적부터 만종문에서 무술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만종문이 어떤 곳인지 모르십니까?""그냥 하나의 무림 문파 아니오? 대체 뭐가 특별하단 말이오?"소란석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말했다. 비록 정영수가 송석석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눈에 선했지만, 그는 여전히 송석석의 무술 실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만약 정영수를 이긴 게 북명왕이었다면 그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한 문파의 여제자가, 그것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대단해봤자 얼마나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양안도 여성이 그렇게 강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비슷한 말을 했다.냉옥 장공주는 그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어휴, 이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라고!’그들의 불신은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무지함은 그들의 자만에서 나온 것이었다.그들은 여성이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상국뿐만 아니라 서경에서도 삼년에 한 번만 여성을 뽑아 조정에 들이는 데, 수많은 여인들이 단 세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밤새도록 노력하고, 나태함은 한순간도 용납되지 않으며, 매일 세 시진밖에 자지 못한 채 긴장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음을 그들이 알리 만무했다.상국에만 하더라도 현재 여관은 단 한 명뿐인데, 그 사람이 바로 송석석이다. 그녀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현갑군의 지휘관을 맡을 수 있었겠는가?그녀는 심지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운 바도 있었다.물론 그들의 눈에는 이런 모든 것이 북명왕이 그녀를
담판을 앞둔 전달 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회동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대리사 역시 밤새 재판을 진행했다. 형부에서는 이방이 자백한 이후로 줄곧 전북망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이방이 형부에 들어온 후 이렇게까지 약해진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택은 담판이 끝난 후 이방이 서경 사신에게 인계될 것이며 죽음도 쉽게 맞지 못할 잔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가족을 한 번 만날 수 있기에, 그는 오늘 밤 둘의 만남을 허락했다. 물론, 그 또한 감옥에서만 허용되었다. 이택은 전북망을 감옥으로 데려오라 명령하였다. 아전들이 감옥 문을 열어주자 전북망이 안으로 들어갔고 이택은 밖에서 대기했다. 당연히 전북망은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을 받아 어떠한 날카로운 물건도 지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방이 자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이방은 현재 여성 수감자용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중요한 인물이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택은 엄중한 병력으로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작은 등불이 두 사람의 초췌한 얼굴을 비추었다. 성릉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의 그 당당함은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초라함, 그리고 절망과 혼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장군님을 위해 제 진술을 바꿨습니다.” 이방은 눈앞의 이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의지가 꺾인 모습에 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다소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들에게 성릉관 일은 장군님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은 무사하실 것입니다.”전북망이 대답했다.“그건 사실이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장군님께서 개입하시기 전에는 소승이 모든 일의 주동자였습니다.”“그 말은 성립되지 않소. 황제와 형부는 믿지 않을 것이오.”이방의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상관없습니다. 서경이 이
그녀는 결코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비루하게 살아남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녀는 사람이 평생토록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했다. 여장군이 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이토록 넓은데, 충분히 강인하게 버틴다면 한 자리라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하지만 전북망은 그저 그녀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탈출 경로를 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번에 서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아시오? 합치면 백여 명이고, 시위만 해도 최소 예순 명이오. 내가 구해낼 수 있을 리 없잖소.”“혼자 할 필요 없으십니다, 장군님. 북명왕부가 도와줄 겁니다.” 이방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북망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제가 서경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반드시 소승도 함께 데려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북명왕부는 소승을 못 본체 하지 않을 겁니다. 장군님은 단지 그들이 소승을 구할 때 저를 구해내면 됩니다.”전북망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하였소? 무슨 수로 서경 사람들이 소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다는 거요?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작정이오?”이방은 그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알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일을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를 구해 주시면 장군님과 저 사이의 빚은 깔끔하게 청산되는 겁니다. 앞으로 제가 죽든 살든 장군님과는 아무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아니, 난 받아드릴 수 없소.” 전북망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도와줄 수 없소.”“장군님, 장군님의 마음속엔 언제나 송석석이 남아 있겠지요. 장군님은 결국 저를 저버린 셈이 되는 겁니다.” 이방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장군님을 위해 진술까지 바꿨습니다. 정말 조금의 정마저도 잊
염선생은 배를 문지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왕부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소?”“마차 세 대가 후문에 대기 중이며 그 안에 물건들을 싣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금은과 귀중품으로 보였습니다.”“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군.”염선생이 말했다. “무사부님, 염선생님, 저희가 사람을 보내 도중에 그들을 막는건 어떠신지요?”염선생은 겸손하게 사숙의 의견을 물었다. “무사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그가 뭐 어디로 가겠나? 분명 연주로 갈 것이다. 사람을 붙여 중간에 그의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아라. 빈손으로 연주에 가게 두고 연주에 도착한 이후에는……” 그는 평무종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람을 보내 그를 감시하게 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해라.”평무종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염선생은 무사부님이 감시를 붙일 건 알았지만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훔쳐 오라는 지시를 내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다.무소위는 두 사람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마침내 벌을 풀어주기로 했다. “물독을 밖으로 내가서 내려놓고 할 일을 하러 가거라.”두 사람은 대사면을 받은 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독을 이고 밖으로 나갔다. 물독이 워낙 커서 문을 겨우 빠져나갔다. 문이 조금이라도 작았다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했을 터였다.두 사람은 물독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와 짧은 훈계를 들었다. 그들은 벌받는 것에 익숙해서 모든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숙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무소위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이 너희를 벌주는 것이 야박하다 생각하느냐? 원망할거면 너희들의 못난 사부를 탓해라. 너희 사부는 산에서 화약을 연구하다가 내 마당을 날려 버리고도 뻔뻔하게 내게 진성까지 와 자기 제자들을 도와 달라 청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다. 너희가 벌을 조금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내 마음의 화가 도저히 풀리지
사여묵은 감히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사부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너희는 너희 일에나 집중하거라. 나는 여기서 지켜보며 상황을 살필 테니. 일은 어떻게 됐느냐? 사람은 잡았느냐?"무소위의 질문을 듣고 보니 그가 오늘 밤의 암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사여묵은 다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석석과 그들이 정영수를 붙잡아 대리사에 넘겼습니다. 정영수는 본인이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라 자부했지만 석석을 만나 결국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렇군." 무소위는 담담히 응답한 후 송석석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다른 장점은 전혀 없고 그나마 무술만 조금 할 뿐이다. 게다가 정영수는 진짜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도 아니지. 서경의 고수들은 대부분 조정에 나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를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알겠습니다." 송석석은 얌전히 대답했다.송석석은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완전히 달랐는데, 어떤 이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고 어떤 이는 존경했으며, 또 어떤 이는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소위만은 매산에서 지냈을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염선생은 이들이 궁중 연회 이후에 겪은 일들과 연황실과 회왕부의 움직임, 그리고 회동관에서 전해온 보고 내용을 대략 정리해 무소위에게 보고했다.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사여묵이 말을 꺼내려 했으나 무소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잠자는 것만큼은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네가 이번 담판의 주관자이니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어서 가서 쉬도록."사부의 명령에 사여묵은 거역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 물었다. "사백께서 마당을 폭파하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그러자 염선생은 깜짝 놀라며 얼른 눈짓으로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사여묵은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그저 화약을 가지고
증언은 전부 상국 문자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경 사신들은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두 명의 통역관이 서경어로 증언을 천천히 읽어주었다.정영수는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과거 송회안이 서경을 격퇴하며 수많은 서경 병사를 죽인 일과 송석석의 외조부인 소승이 성릉관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러온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소 가문과 송석석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번에 진성에 오게 된 기회를 틈타 송석석을 죽여 그 원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이었다.증언을 모두 들은 후에도 서경 사신들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정영수의 행위가 어쨌든 송석석을 해치려 했다는 점에서 성릉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서경 사신들은 북명왕이 이 문제를 담판 자리에서 꺼내지 않고 담판 전에 공정하게 따져 물었다는 점에서 그가 의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북명왕이 비열하게 이를 담판 자리에서 올렸다면 자신들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대응할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양안을 제외한 다른 사신들은 속으로 수란석을 온갖 욕설로 비난했다. 형인 수란키와 자신을 비교하려 들다니…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광대처럼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사여묵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담판은 결국 심리전이 가장 중요하다.원래 서경은 천리 길을 달려와 상국에 죄를 묻는 입장이었기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분노할 수도, 따져 물을 수도, 과감히 큰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왕비를 암살하려는 일이 벌어진 이상 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잘못한 것은 송씨 가문과 관련된 부분 뿐이었지만, 암살 시도가 담판 하루 전날 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수란석은 손등으로 증언 문서를 눌러 가리키며 사여묵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이 일 뿐이고, 암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수란석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오늘 협상에서 그는 원래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죄를 물으며 압박을 가하고는,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며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한 뒤 귀국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협상도 오히려 서경 측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인 장공주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목 승상은 한쪽에 앉아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평화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녹분성 사건은 상국의 잘못이기에 상국이 사죄하고 보상하려면 평화롭게 협상을 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서경 측은 녹분성 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 문서를 상국 측에 배포했다. 그 문서에는 당시 서경의 태자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병사들의 구술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생존자들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했다.학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 탓에 잔혹함에 벌벌 떨었다.문서에서는 우용이라 불리는 소장이 서경 선태자를 의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사여묵과 이덕회는 우용이 선태자의 별칭이며, 그의 본명이 경역임을 알고 있었다.그 기록을 읽은 사여묵을 비롯한 상국 측 사람들의 마음도 몹시 무거워졌다.비록 이방과 이천명이 반복된 심문 끝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떻게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가혹하게 학대하며 그 과정에서 우용을 끌어내려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말이다.특히, 우용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도 말이다. 장공은 목 승상을 알아보고 향병을 시켜 그에게 문서를 건네 주었고, 사여묵의 신호에 따라 홍려사 관원은 송씨 가문 멸문의 참혹한 사건 기록도 배포했다.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과 깊은 관련이
그 마름쇠는 이황자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가 떨면서 받아 보니 확실히 삼황자가 가지고 놀던 그 마름쇠였다. ‘그들이 너에게 어떻게 대했든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주거라.’바로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그는 놀라서 마름쇠를 밖으로 던졌다. 덕비는 직접 마름쇠를 주워 차가운 이황자의 손을 잡고 떠났다. “내가 후궁을 거느리지 않으니 너의 황형이 널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본데, 각 궁엔 아직 나의 인맥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몰랐나 보군. 내가 바로 사람을 잡아와서 고문을 해본 결과 네가 본 그대로였다. 그 사람은 장춘궁의 사람이니 너도 잘 알 것이다.” 순간 이황자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괴로웠다. ‘그럼… 황후마마와 황형이 날 모해하려고 했던 거야? 그럼 사이좋게 지낸 것도 모두 가짜였어?’ 그는 돌아가서 멍하니 덕비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내일 이렇게 하거라.” 어머니의 계획을 들은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자 덕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죽는 건 너가 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마름쇠를 멀리 던지고 덕비의 품에 안겨서 말했다. ‘어마마마, 전 죽기도 싫고 황형을 모해하기도 싫습니다. 전 지금 너무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자 덕비가 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이야, 난 네가 착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착한 건 네가 주동적으로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널 해쳤을 때 반격해서 안된다는 게 아니란다.”이황자가 울면서 물었다. “그럼 저번처럼 황숙과 숙모에게 잘 보여서 보호해 달라고 하면 안 됩니까?” “소용없단다. 그들은 모두 너의 황형이 곧 태자가 될 것을 알고 있어서 태자를 보조할 것이란다.” 그러자 덕비가 부드러운 말투로 타일렀다. “그리고 나도 너의 황형이 정말로 죽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가 낙마한 후에 단신의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면 두 다
이황자는 덕비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져 자기도 모르게 배를 가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모두 최근에 형제들과 함께 수업하고 무술을 익히며 힘든 순간에도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던 기억들 뿐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마마마, 혹시 오해가 아닐까요? 지금 황형은 저와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그러자 덕비가 한숨을 쉬더니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먼저 밥부터 먹거라. 식사 후에 내가 널 데리고 갈 곳이 있다.” 그러자 이황자가 물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먼저 먹거라.” 덕비는 옆에 앉아 이황자가 식사하는 것을 보며 옆에 있는 청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황자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듯 식사하는 속도도 훤히 느려졌다. 사실 그는 진작에 자신이 황형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마마마도 줄곧 그에게 황형을 적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그리고 태자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항상 강조해 왔다. 게다가 황형이 예전엔 확실히 밉상이었기에 황형이 태자가 되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꼭 태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생활이 즐거워 그는 태자의 자리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덕비는 아무 말없이 그가 식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들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총명하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잘만 키우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했다.하지만 아직 어려서 권력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지 못하고 현재의 작은 기쁨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비록 보통 아이들보다 생각은 깊었지만 마음이 독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시킨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태후가 너무 엄격히 지키고 있어서 다른 기회는 없었고 유일한 방법은 이황자에게 직접 하라고 하는 것 뿐이었다.왜냐하면 요즘 그들 사이가 좋아서 아무도 아이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황자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태부께서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저는 중개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
숙청제의 천추만수절은 황실 정원에서 열릴 예정이였기에, 내부에서는 미리 준비를 마치고 이날만 기다리고 있었다.12월 25일, 황자들은 여전히 열심히 훈련을 했고, 심지어 삼황자마저 함께 연습했다.삼황자는 안아줘야 말에 올라탈 수 있었지만, 누구보다 용감해서 황숙이 가르쳐준 대로 고삐를 잡고 말을 달렸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여묵은 사람을 보내 삼황자를 보호하도록 했다.대황자와 이황자는 이미 숙련되어 있어서 말을 타고 달리는 건 그들에게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탄 말은 큰 말이 아니라 작은 망아지여서 성격이 온화하고 통제하기도 쉬웠다.해시까지 훈련하고 사여묵은 그들에게 내일 주의해야 할 사항과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줬다.그리고 말이 끝나자마자 덕비는 사람을 보내 이황자를 데려갔다.이황자는 원래 형들과 함께 자안궁으로 돌아가 야식을 먹으려고 했었는데, 청이가 몇 번이나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대황자와 서우에게 함께 응원하자고 말했다. “내일 우리 모두 열심히 해서 부황의 체면을 세워주자.”그러자 대황자가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그래. 어서 돌아가서 푹 쉬렴.”“응.”이황자는 대답하고 사여묵에게 인사를 했다.“황숙,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래.”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황자가 떠나자 계란궁에서도 사람을 보내 삼황자를 데리러 왔다. 삼황자는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며 떠났다.그 모습을 본 대황자는 웃으며 말했다.“삼황자 아픈 거 맞아? 우리보다 더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오늘 훈련이 너무 힘든 탓에 다리마저 다 후들거렸다.삼황자의 일은 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다.사여묵은 하인에게 뒷수습을 하라고 분부하고 그들에게 자안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가는 길에 호위들이 있었는데, 태후께서 엄명을 내려 현철위는 조금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채릉궁에
대황자는 두 손으로 나무줄기를 안고 앞으로 움직여 얼굴을 나무줄기에 기대고 말했다. “모르겠어. 어마마마는 항상 나에게 잘해 주셨는데 저번에 정말로 죽을 정도로 배가 아팠거든.” 대황자가 담담히 말하고는, 얼굴을 돌려 서우를 보며 물었다. “네 고모는 너한테 잘해줘?” 대황자는 서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예전엔 이 일을 거리낌 없이 언급했지만, 지금은 철이 들었는 데다가 서우와 관계가 좋아지다 보니 서우를 슬프게 하는 일은 언급하고 싶지 않아했다. 게다가 태후가 그에게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으니 말이다. 서우가 대답했다. “너무 잘해주시지.” 대황자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네 고모가 어떤 목적을 위해 너에게 독을 타서 네가 아파 죽을 때까지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애?” 그러자 서우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럴 일은 당연히 없어.” “그럼 너의 앞길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한다면?” 서우는 이번에 잠시 생각을 하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밖에서 거지생활까지 해서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세상 물정을 깨달았다. 만약 서우가 자신의 고모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대황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하지만… 친구 사이에는 거짓이 없어야 하는데. 서우는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앞길을 위해서라면, 고모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을 거야. 그리고 황후마마께서는 다른 방법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셔서 그런 것일수도 있어.” “정말 위험했다고.” 대황자가 냉소하며 말했다. “그때 내가 정신이 혼미하긴 했지만, 태의가 낮은 목소리로 이 독은 사람의 생명을 해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어.” 서우는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황후마마께서는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대황자는 다리까지 떨며 마음의 아픔을 애써 감추려하며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사실 난, 네 고모의
결국 대황자는 어쩔 수 없이 남아서 서우와 이황자가 식사하러 떠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그는 속으로 약간 화가 났지만 황조모께서 화가 나도 쉽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기에 담담한 척을 하며 물었다. “어마마마, 제게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너……!” 황후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넌 오랜만에 어마마마를 만났는데 할 말이 없느냐?” 대황자는 황후를 보다가 란주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란주의 간절한 눈빛에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말했다. “저도 어마마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식사를 하러 가고 싶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후, 그는 태후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리고 서우를 쫓아갔다. 대황자가 떠나자, 황후는 멍하니 앉아서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아들과 서먹해진 모습을 보니 만족하십니까?” 그녀는 한참 후에야 눈물을 닦고 이를 갈며 말했다. 눈 밑의 원한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황후는 자신이 아직 태후와 소란을 피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때, 태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가 너와 서먹해진 걸 왜 내 탓을 하느냐?” 그러자 황후가 눈시울을 붉히며 태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태후께서 우리 모자 사이를 이간질하지 않으셨습니까? 인정하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누군가가 고의로 이간질을 한 것이 아니라면 모자 사이에 이렇게 깊은 원한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태후는 그녀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듯 담담하게 말했다. “대황자를 만났으니 이만 돌아가거라.” “제가 오해를 풀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황후는 결국 굴복하여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러자 태후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해명할 오해가 대체 뭐가 있느냐? 네가 그를 독살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제 황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도 그가 웃음
승마 대회가 겉으론 보기엔 무장들을 위해 열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황자가 사냥할 때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주려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대황자가 복통으로 인해 실수를 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금세 알아챘다. 아침까지 활기찼던 사람이 왜 하필 그 순간에 복통이 온 것인지, 의심 되는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날 그는 실수를 한 게 아니라 추태를 부렸다. 맞히지 못했다고 엉엉 울질 않나, 아무리 봐도 태자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황후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특별히 자안궁으로 가서 태후마마께 대황자를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태후가 이번엔 허락했지만, 반드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야 하며 사적으로 만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제 황후는 사실 사적으로 대황자를 만나 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태후가 허락하지 않으니 어쩔수 없었다. 그녀는 저녁 무렵 태후를 모시고 식사를 했다. 한 시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대황자가 서우와 손을 잡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고, 그 뒤에는 이황자가 뒤따랐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그들의 이마가 흠뻑 젖은 것을 보면 방금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후는 대황자를 보자마자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들을 못 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니 말이다. 대황자는 전보다 많이 말라졌고, 키도 더 커졌다. 반면, 대황자와 서우는 웃으며 들어와 대황자의 어머니와 황조모가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먼저 앞으로 가서 황조모에게 인사를 한 후 작은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의 태도로 보아, 사이가 서먹한게 분명했다. 서우와 이황자도 앞으로 가서 인사를 올린 후 한쪽으로 물러났다.황후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아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가 약간의 기쁨도 없이 이렇게 냉담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그녀의 품에 안겨
란주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대황자를 찾아갔다. 하지만 서재 같은 중요한 곳에는 잡인들을 들여보내지 않기에 그녀가 멀리서 한 번 보기 위해서는 대황자가 서재에서 나와 자안궁이나 연무장으로 갈 때만 가능했다. 때로는 호위병들의 몸집이 커서 대황자의 머리끝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호위병들에게 은자를 줘서 대황자를 반 시진만 나오게 하려고 했지만 그 호위병들은 태후가 배치한 사람들이라 은은커녕 금을 줘도 받지 않을 것이었다.태후는 가장 간단하고 거친 방식으로 그들을 보호했다. 그래서 황제가 보고 싶다고 해도 사람을 배치해서 그들을 호송할 뿐이었다.반면, 태후는 이황자에게는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는데, 이유는 덕비가 후궁을 오랫동안 다스린 데다가 곳곳에 사람을 배치했기에 그녀가 이황자를 보호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태후는 사람을 보내 은밀히 주시하도록 했다. 이황자의 사고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막으려는 것이었다.지금 상황으로 보아 황후와 덕비의 마음은 아주 초조한 것 같았다.황후는 한동안 기뻐했지만 곧바로 태자 후보를 발표하지 않으면 이황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고 덕비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후는 그들에게 단념하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사실 덕비는 그 어떤 희망이나 요행도 품지 않았고, 태자 후보가 대황자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이상 노력해서 쟁취할 기회는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하늘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반드시 스스로 쟁취했다. 원래 대황자의 품행에 따르면 황제가 그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대황자가 죽어야만 이황자에게 기회가 생길 것이었다. 삼황자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수빈이 황자를 모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있어, 비록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황제께서 다시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황자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태후가 이렇게 단단히 보호하고 있는데 어찌 손을
조정에서는 태자를 세우는 것과 관련된 말은 멈추지 않았고, 대신들마저 매일 아침마다 이 일을 언급했다. 그러다 마침내 음력 12월 18일에 숙청제가 태자후보가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태자가 어리기 때문에 직접 발표하지 않고 왕실 종묘의 기둥에 보관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고는 조정에서 태자 후보는 자신만 알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목 승상과 사여묵이 계속 대신들에게 질문을 받는 걸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대황자가 예전처럼 게으르고 교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고 성격도 많이 겸손 해졌다. 게다가 진국공부의 국공님이 그의 독서친구이기에, 모두가 그를 태자 후보라고 생각했다. 적장자의 지위에 나쁜 습관을 모두 고친 데다가, 태후가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으니 사실 추측하기 어렵진 않았다. 비록 이황자도 태후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대황자와는 달랐다. 대황자가 장춘궁으로 돌아가지 않아, 이황자는 덕비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많은 대신들은 제상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상서부의 문턱이 닳도록 방문했다. 그렇게 상서부에 찾아와서 축하해 주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 많은 선물들을 보내왔는데 그중엔 진귀한 보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상서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대황자를 태자로 세운다면 황제는 계속해서 외척의 세력을 약화시킬 것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지금 찾아와서 선물을 하는 건 그들에게 위험을 증가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미움을 살 수 있으니 모두 거절할 수는 없었다. 거절했다가는 황제가 제 씨 가문을 건드릴 때 도와줄 사람도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꾀병을 부리고 휴가를 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방문을 사절할 수 있고 황제에게 태도를 표명할 수 있었다. 청가 상주문을 올리자 숙청제는 결재를 하며 그에게 병을 잘 치료하라고 했다. 그리고 이부가 어차피 연말에 봉인될 것이니 이부의 일을 먼저 해결하라고 했다.제상서는 그제서야 한숨을 돌
태후는 수빈이 계란궁으로 이주한 것이 삼황자의 요양을 위한 것이니,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태후의 감시가 있는 한, 궁의 내부에서도 감히 게을리할 수 없어, 여전히 수빈에게 원래의 빈의 신분에 걸맞은 의식주를 제공했다.그러나 가권들과의 만남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그 이유 역시 삼황자의 안정적인 요양을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이씨 부인은 더 이상 방법이 없자, 송석석을 찾아가 부탁하기로 했다. 그녀는 수빈이 궁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테니, 약간의 은화를 보내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적절히 챙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궁 안에서 고생하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었다.이씨 부인은 복소의의 유산이 수빈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총애를 잃은 후궁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궁 안에서는 권력이 곧 생명이며, 사람들은 강한 자에게만 붙어 약한 자를 철저히 외면했다.송석석은 그녀에게 태후께서 이미 공주와 황자를 돌보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지다. 그러나 이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 아이는 제가 열 달을 품고 어렵게 낳은 딸입니다. 손바닥 위에서 귀하게 키우며 그 어떤 고통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아이인데……이제는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으로는 스스로 헤쳐 나가야겠지요. 왕비께서 부디 그녀에게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부디 스스로를 아끼라고 전해주십시오.”송석석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지며, 가슴이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녀도 이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녀의 모친은 자신을 전북망에게 시집을 보낼 때,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내가 석석이를 가졌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아 열 달을 품고 또 낳는 동안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했네. 이 아이는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소중한 내 딸이네. 작은 고통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