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감히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사부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너희는 너희 일에나 집중하거라. 나는 여기서 지켜보며 상황을 살필 테니. 일은 어떻게 됐느냐? 사람은 잡았느냐?"무소위의 질문을 듣고 보니 그가 오늘 밤의 암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사여묵은 다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석석과 그들이 정영수를 붙잡아 대리사에 넘겼습니다. 정영수는 본인이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라 자부했지만 석석을 만나 결국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렇군." 무소위는 담담히 응답한 후 송석석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다른 장점은 전혀 없고 그나마 무술만 조금 할 뿐이다. 게다가 정영수는 진짜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도 아니지. 서경의 고수들은 대부분 조정에 나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를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알겠습니다." 송석석은 얌전히 대답했다.송석석은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완전히 달랐는데, 어떤 이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고 어떤 이는 존경했으며, 또 어떤 이는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소위만은 매산에서 지냈을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염선생은 이들이 궁중 연회 이후에 겪은 일들과 연황실과 회왕부의 움직임, 그리고 회동관에서 전해온 보고 내용을 대략 정리해 무소위에게 보고했다.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사여묵이 말을 꺼내려 했으나 무소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잠자는 것만큼은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네가 이번 담판의 주관자이니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어서 가서 쉬도록."사부의 명령에 사여묵은 거역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 물었다. "사백께서 마당을 폭파하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그러자 염선생은 깜짝 놀라며 얼른 눈짓으로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사여묵은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그저 화약을 가지고
증언은 전부 상국 문자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경 사신들은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두 명의 통역관이 서경어로 증언을 천천히 읽어주었다.정영수는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과거 송회안이 서경을 격퇴하며 수많은 서경 병사를 죽인 일과 송석석의 외조부인 소승이 성릉관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러온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소 가문과 송석석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번에 진성에 오게 된 기회를 틈타 송석석을 죽여 그 원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이었다.증언을 모두 들은 후에도 서경 사신들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정영수의 행위가 어쨌든 송석석을 해치려 했다는 점에서 성릉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서경 사신들은 북명왕이 이 문제를 담판 자리에서 꺼내지 않고 담판 전에 공정하게 따져 물었다는 점에서 그가 의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북명왕이 비열하게 이를 담판 자리에서 올렸다면 자신들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대응할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양안을 제외한 다른 사신들은 속으로 수란석을 온갖 욕설로 비난했다. 형인 수란키와 자신을 비교하려 들다니…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광대처럼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사여묵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담판은 결국 심리전이 가장 중요하다.원래 서경은 천리 길을 달려와 상국에 죄를 묻는 입장이었기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분노할 수도, 따져 물을 수도, 과감히 큰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왕비를 암살하려는 일이 벌어진 이상 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잘못한 것은 송씨 가문과 관련된 부분 뿐이었지만, 암살 시도가 담판 하루 전날 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수란석은 손등으로 증언 문서를 눌러 가리키며 사여묵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이 일 뿐이고, 암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수란석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오늘 협상에서 그는 원래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죄를 물으며 압박을 가하고는,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며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한 뒤 귀국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협상도 오히려 서경 측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인 장공주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목 승상은 한쪽에 앉아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평화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녹분성 사건은 상국의 잘못이기에 상국이 사죄하고 보상하려면 평화롭게 협상을 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서경 측은 녹분성 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 문서를 상국 측에 배포했다. 그 문서에는 당시 서경의 태자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병사들의 구술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생존자들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했다.학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 탓에 잔혹함에 벌벌 떨었다.문서에서는 우용이라 불리는 소장이 서경 선태자를 의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사여묵과 이덕회는 우용이 선태자의 별칭이며, 그의 본명이 경역임을 알고 있었다.그 기록을 읽은 사여묵을 비롯한 상국 측 사람들의 마음도 몹시 무거워졌다.비록 이방과 이천명이 반복된 심문 끝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떻게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가혹하게 학대하며 그 과정에서 우용을 끌어내려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말이다.특히, 우용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도 말이다. 장공은 목 승상을 알아보고 향병을 시켜 그에게 문서를 건네 주었고, 사여묵의 신호에 따라 홍려사 관원은 송씨 가문 멸문의 참혹한 사건 기록도 배포했다.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과 깊은 관련이
장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국이 양국 간 체결된 민간인을 해치지 않고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협정을 먼저 위반했으며, 전쟁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포로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경 첩자가 송씨 가문을 멸문한 일 역시 엄청난 죄악이라고 지적했다."우리가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면 양측 모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만 양국 간의 평화로운 협상이 가능합니다."통역관이 이를 번역하자 사여묵과 상국 측 협상 담당 관원들도 이에 동의했다.그렇게 정식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서경 측은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첫째, 상국은 학살당한 서경의 민간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둘째, 황금 만 냥을 배상해야 한다.셋째, 서경으로 삼십만 석의 곡식을 배상하고 상국 측에서 운송해야 한다.넷째, 녹분성에서 체결된 협정을 무효화하며 국경선을 협정 이전의 기준으로 복구해야 한다.다섯째, 전북망, 이방, 소승을 서경으로 넘겨 처벌해야 한다.’상국 측도 어느 정도의 요구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서경이 제시한 조건들은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수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삼십만 석의 곡식 배상과 국경선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조건과 관련하여 이방은 서경에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승은 당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주된 책임이 없습니다. 단지 부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상국에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서경의 대학사 고공이 말했다."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애초에 상국이 협정을 위반하면서 발생한 재앙입니다. 서경에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상국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그러자 이덕회가 나서서 반박
서경 사신들이 홍려사를 떠나 회동관으로 돌아간 뒤에도 상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홍려사에 남아 다음 협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다.목 승상 역시 논의에 참여했다. "곡물을 배상해야 한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많은 양은 안 됩니다. 그들은 지난해 흉작으로 군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우리가 삼십만 석의 곡물을 배상한다는 건 그들의 군량을 채워주는 꼴입니다. 따라서 곡물 배상을 한사코 물고 늘어지다 하더라도 삼만 석을 넘겨서는 안됩니다."목 승상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덧붙였다."또한 황제께서는 국경선 문제에서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이 두 가지를 말한 후 그는 자리를 떴다. 북명왕의 협상 진행 방식에 대해 목 승상은 꽤 안심하는 듯했다.한편, 형부에서는 전북망이 이택을 만나겠다는 요청을 했다.어젯밤 이방과 대화를 나눈 뒤, 전북망은 이방이 서경이 소 대장군을 데려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 점이 몹시 불안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아무리 고민해도 이방이 어떤 방법으로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이택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그녀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이택이 직접 전북망을 찾아와 서둘러 그에게 질문했다."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도 말했습니까?"전북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말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도망칠 경로를 계획해 둔 걸 보면 서경 사신들을 설득해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이택은 아직 협상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 대장군이 협상에서 주요 쟁점으로 논의될 것은 분명했다. 만약 상국 측이 협상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그렇다면 협상이 끝난 뒤에는 과연 서경이 어떤 수단으로 상국의 손에서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인가?그런데 이방은 어떻게 서경 사신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걸까?"그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이
송석석은 곧바로 평서백부로 가서 최씨를 찾아 상황을 전달했다. 최씨는 단호히 한 마디만 했다."소 대장군과 관련된 일이니 지체할 수 없군요. 당장 나서겠습니다."전북망이 형부로 끌려간 이후 왕청여는 줄곧 불안에 떨었다.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최씨는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이건 두 나라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신 같은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겁니까?"그렇다고 최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전북망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전북망이 형부에 갇혀 있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고생하거나 고문당하지는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최씨는 왕청여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왕청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하소연했다."겨우 현철위 지휘사가 되었는데 이제 이방 일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씨 부인이 이런 혼사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셨겠지요!”최씨는 그 말을 듣고 꾸짖었다."일이 생길 때마다 원망만 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질 생각을 좀 하십시오!"형수의 꾸짖음에 왕청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녀는 결국 장군부로 돌아갔지만 안채의 일을 모두 시아버지 전기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장군부 안에서 왕청여에 대한 뒷말이 돌기도 했다.최씨는 장군부에 도착하자마자 왕청여에게 말했다."모든 하인들의 노비문서를 가져오게 하세요."왕청여가 이유를 묻자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전북망을 구할 방법을 찾으려는 겁니다."왕청여는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최씨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잘랐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시키는 대로 당장 실행하세요."결국 왕청여는 노비문서를 찾아와 그녀에게 건넨 후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최씨는 노비문서를 확인한 뒤 집안 관리인을 불러 하인들의 신원을 물었다. 특히나 이방을 보좌했던 하인들을 주목했다.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후 최씨는 다시 문지기를 불러다 물었다.그
전북망의 본가, 문희거(文熙居). 창호지 너머로 은은한 불빛이 아른거리며 그림자를 흔들어놓았다. 송석석(宋惜惜)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두 손을 포갠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결혼 후 곧바로 전장으로 떠나 일 년이나 보지 못했던 남편이었다. 전북망(战北望)은 전장에서 돌아온 복장 그대로 당당히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폐하의 교지(旨意)까지 내려진 이상, 되돌릴 수 없소. 이방(易昉)은 이 집에 들어오게 될 것이오."송석석은 손깍지를 끼면서 어두운 눈빛으로 전북망에게 물었다."태후(太后)마마께서도 능력을 인정한, 그 이방 장군님이 첩이 되길 받아들이셨단 말씀입니까?"그 말을 들은 전북망의 눈빛에 살짝 노기가 서렸다."아니, 이방은 첩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오. 평처(平妻: 본처와 같은 지위를 가진 여인)라, 그대와 다를 것이 없소."송석석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장군님도 아시다시피 평처라는 명칭은 듣기 좋을 뿐, 실제로는 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전북망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첩이라니, 이방과 나는 전장에서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소. 그리고 이건 나와 이방이 군공(军功: 군사적 공로)으로 받은 교지이니, 사실상 그대의 동의는 필요 없소."송석석은 억누를 수 없는 비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라, 그럼 출정 전에 저에게 했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일 년 전, 출정 명령이 떨어진 혼례 첫날밤에 전북망은 약속했었다. 평생 그 하나만을 바라보며 절대로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송석석이 언급하자 그제야 약속을 떠올린 전북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 약속은 잊어버리시오. 그때 나는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했소. 그저 그대를 아내로서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뿐. 하지만 이방을 만나고 마음이 달라졌소."이방을 떠올린 그의 표정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그가 숨길 수 없는 깊은 감정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이방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여인과도 비교할 수 없소.
전북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왜 어려운 길을 자처하시오? 이 혼인은 폐하의 어명이오. 더군다나 이방이 들어온다고 한들, 서로 다른 별채에 머물 텐데, 뭐가 걱정이오? 이방은 안살림에 관심이 없소. 또한 그대의 권한을 빼앗는 일도 없을 것이오. 그대가 중요시 여기는 것들, 이방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걸 모르겠소?”“권한이요? 제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이러시는 줄 아십니까?”송석석이 반문했다. 장군부(將軍府: 장군의 집) 살림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노부인한테 들어가는 약값만 해도 매달 수십 냥(两: 화폐 단위)이었고, 그 외 사람들한테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그녀가 들고 온 지참금이 아니었다면, 이 집안은 진작에 파산했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헌신한 대가가 겨우 이거라니, 정말 황당했다.반면, 전북망도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됐소. 더 말하지 않겠소. 본래 통보만 하면 되는 일이었고, 그대가 허락하든 하지 않든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오.”그 말을 끝으로 전북망은 소매를 털며 자리를 떠났다. 송석석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아가씨.”보주(寶珠)가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장군님도 참 너무하세요.”“됐어, 이렇게 된 이상 움직이자.”송석석이 차갑게 눈빛을 굳히며 보주를 쳐다보았다.“첫날밤도 치르지 못했는데,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고 볼 수도 없지. 일단 가서 내가 이 집안에 들어올 때 들고 온 지참금 목록을 가지고 와 봐.”“지참금 목록은 왜요?”보주가 물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그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답했다.“바보야. 계속 이 집에 머물 거야?”그러자 보주가 이마를 감싸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이 혼사는 부인께서 아가씨를 위해 직접 예비하신 거잖아요. 어르신도 살아계실 때, 얼마나 아가씨가 잘 살길 바라셨는데요.”부모님의 얘기가 나오자 송석석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송석석의 부모님은 참 금슬이 좋았다. 그녀를 포함해 자식이 여섯이나 됐지
송석석은 곧바로 평서백부로 가서 최씨를 찾아 상황을 전달했다. 최씨는 단호히 한 마디만 했다."소 대장군과 관련된 일이니 지체할 수 없군요. 당장 나서겠습니다."전북망이 형부로 끌려간 이후 왕청여는 줄곧 불안에 떨었다.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최씨는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이건 두 나라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신 같은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겁니까?"그렇다고 최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전북망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전북망이 형부에 갇혀 있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고생하거나 고문당하지는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최씨는 왕청여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왕청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하소연했다."겨우 현철위 지휘사가 되었는데 이제 이방 일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씨 부인이 이런 혼사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셨겠지요!”최씨는 그 말을 듣고 꾸짖었다."일이 생길 때마다 원망만 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질 생각을 좀 하십시오!"형수의 꾸짖음에 왕청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녀는 결국 장군부로 돌아갔지만 안채의 일을 모두 시아버지 전기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장군부 안에서 왕청여에 대한 뒷말이 돌기도 했다.최씨는 장군부에 도착하자마자 왕청여에게 말했다."모든 하인들의 노비문서를 가져오게 하세요."왕청여가 이유를 묻자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전북망을 구할 방법을 찾으려는 겁니다."왕청여는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최씨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잘랐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시키는 대로 당장 실행하세요."결국 왕청여는 노비문서를 찾아와 그녀에게 건넨 후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최씨는 노비문서를 확인한 뒤 집안 관리인을 불러 하인들의 신원을 물었다. 특히나 이방을 보좌했던 하인들을 주목했다.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후 최씨는 다시 문지기를 불러다 물었다.그
서경 사신들이 홍려사를 떠나 회동관으로 돌아간 뒤에도 상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홍려사에 남아 다음 협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다.목 승상 역시 논의에 참여했다. "곡물을 배상해야 한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많은 양은 안 됩니다. 그들은 지난해 흉작으로 군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우리가 삼십만 석의 곡물을 배상한다는 건 그들의 군량을 채워주는 꼴입니다. 따라서 곡물 배상을 한사코 물고 늘어지다 하더라도 삼만 석을 넘겨서는 안됩니다."목 승상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덧붙였다."또한 황제께서는 국경선 문제에서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이 두 가지를 말한 후 그는 자리를 떴다. 북명왕의 협상 진행 방식에 대해 목 승상은 꽤 안심하는 듯했다.한편, 형부에서는 전북망이 이택을 만나겠다는 요청을 했다.어젯밤 이방과 대화를 나눈 뒤, 전북망은 이방이 서경이 소 대장군을 데려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 점이 몹시 불안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아무리 고민해도 이방이 어떤 방법으로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이택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그녀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이택이 직접 전북망을 찾아와 서둘러 그에게 질문했다."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도 말했습니까?"전북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말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도망칠 경로를 계획해 둔 걸 보면 서경 사신들을 설득해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이택은 아직 협상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 대장군이 협상에서 주요 쟁점으로 논의될 것은 분명했다. 만약 상국 측이 협상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그렇다면 협상이 끝난 뒤에는 과연 서경이 어떤 수단으로 상국의 손에서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인가?그런데 이방은 어떻게 서경 사신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걸까?"그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이
장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국이 양국 간 체결된 민간인을 해치지 않고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협정을 먼저 위반했으며, 전쟁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포로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경 첩자가 송씨 가문을 멸문한 일 역시 엄청난 죄악이라고 지적했다."우리가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면 양측 모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만 양국 간의 평화로운 협상이 가능합니다."통역관이 이를 번역하자 사여묵과 상국 측 협상 담당 관원들도 이에 동의했다.그렇게 정식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서경 측은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첫째, 상국은 학살당한 서경의 민간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둘째, 황금 만 냥을 배상해야 한다.셋째, 서경으로 삼십만 석의 곡식을 배상하고 상국 측에서 운송해야 한다.넷째, 녹분성에서 체결된 협정을 무효화하며 국경선을 협정 이전의 기준으로 복구해야 한다.다섯째, 전북망, 이방, 소승을 서경으로 넘겨 처벌해야 한다.’상국 측도 어느 정도의 요구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서경이 제시한 조건들은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수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삼십만 석의 곡식 배상과 국경선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조건과 관련하여 이방은 서경에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승은 당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주된 책임이 없습니다. 단지 부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상국에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서경의 대학사 고공이 말했다."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애초에 상국이 협정을 위반하면서 발생한 재앙입니다. 서경에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상국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그러자 이덕회가 나서서 반박
수란석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오늘 협상에서 그는 원래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죄를 물으며 압박을 가하고는,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며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한 뒤 귀국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협상도 오히려 서경 측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인 장공주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목 승상은 한쪽에 앉아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평화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녹분성 사건은 상국의 잘못이기에 상국이 사죄하고 보상하려면 평화롭게 협상을 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서경 측은 녹분성 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 문서를 상국 측에 배포했다. 그 문서에는 당시 서경의 태자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병사들의 구술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생존자들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했다.학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 탓에 잔혹함에 벌벌 떨었다.문서에서는 우용이라 불리는 소장이 서경 선태자를 의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사여묵과 이덕회는 우용이 선태자의 별칭이며, 그의 본명이 경역임을 알고 있었다.그 기록을 읽은 사여묵을 비롯한 상국 측 사람들의 마음도 몹시 무거워졌다.비록 이방과 이천명이 반복된 심문 끝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떻게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가혹하게 학대하며 그 과정에서 우용을 끌어내려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말이다.특히, 우용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도 말이다. 장공은 목 승상을 알아보고 향병을 시켜 그에게 문서를 건네 주었고, 사여묵의 신호에 따라 홍려사 관원은 송씨 가문 멸문의 참혹한 사건 기록도 배포했다.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과 깊은 관련이
증언은 전부 상국 문자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경 사신들은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두 명의 통역관이 서경어로 증언을 천천히 읽어주었다.정영수는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과거 송회안이 서경을 격퇴하며 수많은 서경 병사를 죽인 일과 송석석의 외조부인 소승이 성릉관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러온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소 가문과 송석석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번에 진성에 오게 된 기회를 틈타 송석석을 죽여 그 원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이었다.증언을 모두 들은 후에도 서경 사신들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정영수의 행위가 어쨌든 송석석을 해치려 했다는 점에서 성릉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서경 사신들은 북명왕이 이 문제를 담판 자리에서 꺼내지 않고 담판 전에 공정하게 따져 물었다는 점에서 그가 의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북명왕이 비열하게 이를 담판 자리에서 올렸다면 자신들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대응할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양안을 제외한 다른 사신들은 속으로 수란석을 온갖 욕설로 비난했다. 형인 수란키와 자신을 비교하려 들다니…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광대처럼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사여묵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담판은 결국 심리전이 가장 중요하다.원래 서경은 천리 길을 달려와 상국에 죄를 묻는 입장이었기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분노할 수도, 따져 물을 수도, 과감히 큰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왕비를 암살하려는 일이 벌어진 이상 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잘못한 것은 송씨 가문과 관련된 부분 뿐이었지만, 암살 시도가 담판 하루 전날 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수란석은 손등으로 증언 문서를 눌러 가리키며 사여묵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이 일 뿐이고, 암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사여묵은 감히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사부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너희는 너희 일에나 집중하거라. 나는 여기서 지켜보며 상황을 살필 테니. 일은 어떻게 됐느냐? 사람은 잡았느냐?"무소위의 질문을 듣고 보니 그가 오늘 밤의 암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사여묵은 다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석석과 그들이 정영수를 붙잡아 대리사에 넘겼습니다. 정영수는 본인이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라 자부했지만 석석을 만나 결국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렇군." 무소위는 담담히 응답한 후 송석석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다른 장점은 전혀 없고 그나마 무술만 조금 할 뿐이다. 게다가 정영수는 진짜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도 아니지. 서경의 고수들은 대부분 조정에 나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를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알겠습니다." 송석석은 얌전히 대답했다.송석석은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완전히 달랐는데, 어떤 이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고 어떤 이는 존경했으며, 또 어떤 이는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소위만은 매산에서 지냈을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염선생은 이들이 궁중 연회 이후에 겪은 일들과 연황실과 회왕부의 움직임, 그리고 회동관에서 전해온 보고 내용을 대략 정리해 무소위에게 보고했다.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사여묵이 말을 꺼내려 했으나 무소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잠자는 것만큼은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네가 이번 담판의 주관자이니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어서 가서 쉬도록."사부의 명령에 사여묵은 거역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 물었다. "사백께서 마당을 폭파하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그러자 염선생은 깜짝 놀라며 얼른 눈짓으로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사여묵은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그저 화약을 가지고
염선생은 배를 문지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왕부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소?”“마차 세 대가 후문에 대기 중이며 그 안에 물건들을 싣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금은과 귀중품으로 보였습니다.”“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군.”염선생이 말했다. “무사부님, 염선생님, 저희가 사람을 보내 도중에 그들을 막는건 어떠신지요?”염선생은 겸손하게 사숙의 의견을 물었다. “무사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그가 뭐 어디로 가겠나? 분명 연주로 갈 것이다. 사람을 붙여 중간에 그의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아라. 빈손으로 연주에 가게 두고 연주에 도착한 이후에는……” 그는 평무종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람을 보내 그를 감시하게 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해라.”평무종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염선생은 무사부님이 감시를 붙일 건 알았지만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훔쳐 오라는 지시를 내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다.무소위는 두 사람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마침내 벌을 풀어주기로 했다. “물독을 밖으로 내가서 내려놓고 할 일을 하러 가거라.”두 사람은 대사면을 받은 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독을 이고 밖으로 나갔다. 물독이 워낙 커서 문을 겨우 빠져나갔다. 문이 조금이라도 작았다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했을 터였다.두 사람은 물독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와 짧은 훈계를 들었다. 그들은 벌받는 것에 익숙해서 모든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숙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무소위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이 너희를 벌주는 것이 야박하다 생각하느냐? 원망할거면 너희들의 못난 사부를 탓해라. 너희 사부는 산에서 화약을 연구하다가 내 마당을 날려 버리고도 뻔뻔하게 내게 진성까지 와 자기 제자들을 도와 달라 청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다. 너희가 벌을 조금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내 마음의 화가 도저히 풀리지
그녀는 결코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비루하게 살아남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녀는 사람이 평생토록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했다. 여장군이 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이토록 넓은데, 충분히 강인하게 버틴다면 한 자리라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하지만 전북망은 그저 그녀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탈출 경로를 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번에 서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아시오? 합치면 백여 명이고, 시위만 해도 최소 예순 명이오. 내가 구해낼 수 있을 리 없잖소.”“혼자 할 필요 없으십니다, 장군님. 북명왕부가 도와줄 겁니다.” 이방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북망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제가 서경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반드시 소승도 함께 데려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북명왕부는 소승을 못 본체 하지 않을 겁니다. 장군님은 단지 그들이 소승을 구할 때 저를 구해내면 됩니다.”전북망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하였소? 무슨 수로 서경 사람들이 소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다는 거요?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작정이오?”이방은 그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알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일을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를 구해 주시면 장군님과 저 사이의 빚은 깔끔하게 청산되는 겁니다. 앞으로 제가 죽든 살든 장군님과는 아무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아니, 난 받아드릴 수 없소.” 전북망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도와줄 수 없소.”“장군님, 장군님의 마음속엔 언제나 송석석이 남아 있겠지요. 장군님은 결국 저를 저버린 셈이 되는 겁니다.” 이방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장군님을 위해 진술까지 바꿨습니다. 정말 조금의 정마저도 잊
담판을 앞둔 전달 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회동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대리사 역시 밤새 재판을 진행했다. 형부에서는 이방이 자백한 이후로 줄곧 전북망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이방이 형부에 들어온 후 이렇게까지 약해진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택은 담판이 끝난 후 이방이 서경 사신에게 인계될 것이며 죽음도 쉽게 맞지 못할 잔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가족을 한 번 만날 수 있기에, 그는 오늘 밤 둘의 만남을 허락했다. 물론, 그 또한 감옥에서만 허용되었다. 이택은 전북망을 감옥으로 데려오라 명령하였다. 아전들이 감옥 문을 열어주자 전북망이 안으로 들어갔고 이택은 밖에서 대기했다. 당연히 전북망은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을 받아 어떠한 날카로운 물건도 지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방이 자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이방은 현재 여성 수감자용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중요한 인물이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택은 엄중한 병력으로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작은 등불이 두 사람의 초췌한 얼굴을 비추었다. 성릉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의 그 당당함은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초라함, 그리고 절망과 혼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장군님을 위해 제 진술을 바꿨습니다.” 이방은 눈앞의 이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의지가 꺾인 모습에 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다소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들에게 성릉관 일은 장군님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은 무사하실 것입니다.”전북망이 대답했다.“그건 사실이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장군님께서 개입하시기 전에는 소승이 모든 일의 주동자였습니다.”“그 말은 성립되지 않소. 황제와 형부는 믿지 않을 것이오.”이방의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상관없습니다. 서경이 이